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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시의 유래 스크랩 안산은 완벽한 형태의 서호(西湖), 왜 시화라 부르나
金舜鎭 추천 0 조회 100 12.03.23 17: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산은 완벽한 형태의 서호(西湖),

왜 시화라 부르나

내고장 안산/안산의 역사와 상징 2010/04/22 10:27

 

 

‘안산통합’으로 제3기 문예부흥

시대 오는가  <10월 탕변잡담>

 

전 안산문화원장 유천형 선생의 ‘안산 찾기’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안산’이라는 말은 어쩌면 ‘비명(碑銘)’이 될 뻔했다.

 

1986년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반월공단을 따서 ‘반월’이라는 도시 명을 염두에 두었다. 다들 신군부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유천형 선생은 ‘안산’이라는 지명을 끝내 관철시켰다.

 

당시 군부실세까지 직접 면담하면서 안산을 되찾기까지 유 선생의 노고는 일제 잔재를 폐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국가적 사명이라는 점을 선양했던 한편의 드라마나 진배없었다.

 

유천형 선생의 안산 이름 찾기는 안산 명문가 후손답게 전통의 자긍심과 문화역량을 돋보이게 했던 쾌거였기 때문이다.

 

고려조 500년과 조선 500년으로 이어진 ‘안산 천년’ 역사와 다시 찾은 그 안산에서 우린 과연 제3기 문화 부흥기를 맞이할 자세를 가지고 있을까? 10월 탕변잡담에서 전 안산문화원장 유천형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안산은 완벽한 형태의 서호(西湖), 왜 시화라 부르나

 

 

오늘 여기 와서도 ‘시화(始華)’ 라는 두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제겐 일단 거부감이 든다.

 

‘시화’라는 말은 이곳에 신도시 개발 터를 닦은 박정희 정권 때 나온 말이다(‘始華’는 ‘시흥’과 ‘화성’의 첫 글자를 따서 통상 이곳 신도시 개발을 ‘시화지구’라 불리웠다).

 

제가 살아온 곳이 부곡동인데 예전에 산릉성이를 올라가 서쪽 앞바다를 바라보면 육지에서 뻗어 나온 초지진(별망성)이 남동쪽으로 나와 있고 화성 쪽 남양반도가 서쪽으로 가로막아 척 보면 여기는 영락없는 ‘호수’였다.

 

그래서 이곳을 ‘서호’(西湖)라 했다. 문헌상 서호를 여기저기라고들 하는데 그 완벽한 형태로 안산이 ‘서호’였다.

 

 

현재 도시가 되어 훤한 바다가 사라졌지만 지금도 산마루에 올라가면 그 형태가 살아 있기에 ‘시화’라는 인위적인 개념보다는 옛 정서를 쫓아 ‘서호’라고 칭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안산은 바로 ‘호수’였다. 성호선생 글을 봐도 ‘서호’가 나온다. 대개 ‘서호’라 하면 서울 마포를 지목하는데 마포도 당인리 발전소 쪽이 안으로 나와 있어 멀리서 보면 그곳도 호수였을 게다.

 

단원 김홍도 어릴 때 호가 ‘서호’였고, 저희 6대조 할아버지 호도 ‘서호’다. 성호 선생의 방손 이지정이라는 명필가가 말을 타고 당진을 오가면서 남긴 ‘안산 서호’에 대한 기록도 있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누구든지 이 지형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지명의 선대 정신들이 사라졌고 특히 일본에 의해 옛 지명과 명칭들이 다 없어지면서 행정명칭 위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부터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였던 ‘안산’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삼국시대 안산은 고구려 땅이었다. 아산만과 안성천, 충주일대가 바로 고구려 세력권이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신라 땅이 된다.

 

삼국시대 세력판도가 바뀌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핵심적인 요충지가 안산이었다. 백제에 막힌 신라의 북쪽루트는 문경새재를 넘어 용인과 수원을 지나 이곳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오산 독산성, 지금 병점에서 바라다보면 수리산이 우뚝 서 지리적으로 방향 역할을 했다.

 

옛날 기마병들은 험준한 산천을 피해 길을 냈는데 북쪽과 바다로 나가는 길이 수원평야를 가로질러 수리산을 돌아 안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 반월저수지가 있는 안산 쪽 산릉성이를 올라서 한 200m정도 가면 부곡동 골프장으로 넘어오는 길이 있다.

 

그곳을 ‘바지고개’라 했다. 바지고개 길은 대동여지도상에 표기된 옛날 ‘대로’ 길이었다.

 

그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지금 청소년수련관이 있는 월피동이나 월피동 개울둑을 지나 장하동 현재의 고속도로로 이어진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지금보다 훨씬 넓었던 그 뚝 길이 예로부터 선조들이 걸어 다니던 ‘대로’였다.

 

안산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전국 팔달로 이어지는 교통요지였던 셈이다.

 

 

고려 건국 후 개성에 도읍지가 되고 거란과 여진족의 침략으로 조정이 공주까지 밀려갔는데 그 때 공주부사로 있던 김은부가 피난 온 왕을 잘 보필하면서 결국에 그 따님이 왕비가 되었다.

 

그 분이 바로 안산 김 씨다. 김은부가 부원군이 되어 연성군으로 봉해지는데 이때 ‘연성’이 안산의 별호(별칭)이다.

 

주) 위 내용은 수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김은부는 고려현종의 국구(장인)로  "안산군 개국후" 에 봉해지고

김은부의 부(父) 긍필(兢弼)은 안산김씨 시조로 안산현 개국후에

추봉되었으며 그 후손인 조선초기 좌명공신 김정경이 연성군(안산

군)에 봉해진 이후 후손들이 본관을 안산(安山)로 정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왕권국가에서 왕의 처가가 있는 곳은 그 세력을 무시 못했다.

 

안산은 고려당시 왕의 처가 도시로 김은부 후예 고려 덕종, 정종, 문종 세 임금 외가가 있는 세력의 거점이었다.

 

개성에서 안산은 곧바로 김포평야를 거쳐 말을 타고 한 이틀이면 올 수 있었다. 삼국시대 교통대로고 개성에서 가깝고 왕의 외가였으니 안산은 고려 때부터 팔도강산의 위상이 높은 지역이었다.

 

고려조 50년 동안 안산 김 씨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또한 사돈관계로 있던 인천 이 씨도 이후 한 50여 년간 권세를 이어갔으니 고려 때는 약 1세기 동안 안산, 인천이 행세를 했다.

 

왕자의 난 진압하고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닦은 곳도 ‘안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한양으로 천도하고 서울을 옮겼어도 안산 지역의 위상은 마찬가지였다. 서울 명망가들이 바다를 구경하려 어디로 가느냐는 것인데, 당시 150리 길로 멀었던 인천보다도 안산이 각광받았다.

 

조선시대에 서대문 서교동을 지나서 문밖으로 나와 영등포 당산역을 지나면 그곳이 양화나루다. 여기서 말을 타고 오류동, 광명을 지나면 바로 안산이다. 역사를 보면 공경가들이 바다구경과 풍류를 즐기려면 바로 안산으로 나와야 했다.

 

지금 압구정처럼 서울 공경가들이 붐볐던 곳이다. 실학자 이중환 글을 보면 안산은 공경가의 산소가 많아 자손이 번성하고 명망가의 집들도 많고 한양에서 지척이고 바다가 있어 풍수적으로 좋은 고장이라고 나와 있다.

 

 

역사적으로 방원이 왕자 난 때 정도전 쿠데타로 이숙번을 안산군수로 보내게 된다.

 

옛날 안산은 고려시대 이미 노량진, 영등포. 석수동, 시흥동 그 일대가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시흥군현이었고 안양 과천일대가 과천현인데, 그때 이미 안산은 지금 시흥시하고 안산시를 합해 안산군으로 승격했다.

 

시흥과천은 현으로 현감을 두었지만 이곳은 ‘지군사’를 두고 현감과 다르게 직접 중앙에서 인사를 관리했다.

 

군수가 관할하는 상권과 함께 안산은 해안가를 관리하는 초지진을 둔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지금 해안가를 보면 야목을 거처 어천까지 물길이 나서 수원으로 직통하였으며 이쪽은 성포리까지 배가 들어가 만약 외침이라도 당하면 큰일인지라 이를 차단하기 위해 초지진을 만든 것이다.

 

안산은 육군도 있었지만 해군도 막강했고 이 모두를 이숙번 휘하였다. 태종이 안산에서 왕자 난을 진압하고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닦은 것이다.

 

숙종, 선조 때 정권이 혼란할 때 성호 이익선생이 안산 일동에서 일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단원 김홍도가 안산에서 출생하고 그 스승인 표암 강세황 선생이 2,30년 활동하면서 안산은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맞는다.

 

조선 500년 역사 중 문예 부흥기 1기가 세종 때였고 300년이 지나 영 정조 때가 문예부흥기 2기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며, 그 후 300년이 지난 지금은 3기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과연 당대에 새로운 문예부흥이 안산에서 가능할 런지가 관심이다.

 

민생개혁과 실학의 땅 안산에서 제3기 문예부흥은 가능한가

 

전란이후 민생도탄의 시기에 재야의 성호선생은 국가의 난을 타파하고자 현실 실생활에 이용한 학문을 설파하고 임금께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개혁을 건의했다.

 

그것이 바로 실학이다. 이로써 안산은 광주 등 전국의 많은 학자들이 실학을 배우로 오는 고장이 되었다. 그것은 표암 선생의 슬하에 김홍도가 배출 되는 등 영 정조시대 문예부흥으로 이어진다.

 

 

안산은 민생개혁과 실학, 문화예술의 고장이다. 이 두 가지가 중요한다. 1986년 반월출장소에서 시 승격을 앞두고 공무원들이 이 고장 성격에 대한 학자들 자문을 구하고 이를 토대로 ‘시민헌장’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종의 안산 역사데, 시민헌장 제1항이 ‘안산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실학의 고장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중간을 뛰어넘어 ‘안산은 상록수 고장이다’라고 쓰여 있다.

 

올바른 역사적 인식 없이 시민헌장이 바꿔 버린 것이다. 이를 개정할 때 학자들이 못 챙긴 것은 문제다.

 

번째 ‘문화예술의 고장’이라는 것도 단원 김홍도를 볼 때도 당연한데 그것조차도 빠졌다.

 

조선 500년 역사를 보면 ‘실학과 문화예술의 안산’은 누구나 알 수 있으며 중앙의 학자들 부인할 수 없는 일인데 정작 ‘핵심’이 다 빠져 버린 것이다.

 

조선 500년, 안산이 제2기 정조대왕 문예부흥의 중심에 있었는데 이를 시민들이 느낄 수 있는 계기를 갖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시흥시는 안산의 서촌, 안산통합은 제3기 문예부흥을 이룰 기회

 

요즘 안산시와 시흥시 통합문제가 나오는데 정작 시는 이를 제대로 홍보도 않고 시민과 단체들은 침묵하고 있다. 시 통합을 공무원들은 달갑지 않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시민들 입장에서는 가장 급한 사안이다.

 

통합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바로 찬란한 역사의 맥과 고향의식 차이에서 온다. 지역사회 발전의 원동력은 시민들의 역사 문화인식에 따른 애향심이다. 통합논의 장은 초청된 외부 학자들의 말잔치와 지엽적인 문제만 난무한다.

 

 

안산시흥 통합의 프레임웍은 천 년 전 고려시대에 이미 500년 ‘안산’이었고, 다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안산’이라는 지역이 유지되었다는데 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안산군을 없애고 과천군에 시흥군으로 통합된 것이 70년 전 일이다.

 

해방이 되고 다시 70년 후에 그 역 사를 조명해 안산을 부활했는데,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 대거 군수나 시장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안산이 시가 되고 5년 후에 시흥시를 또 만들었는데 이는 태생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당시 시흥은 ‘서촌’이라 했다. 장유선생의 글에도 나온다.

 

원래 시흥은 서울 시흥구이다. 시흥시는 역사적으로 안산 동네의 ‘서촌’이었다. 그 역사를 보면 명백하다.

 

조선시대 문예부흥의 전통과 경제적 측면에서도 통합은 안산의 제3기 르네상스를 이룰 절호의 찬스다. 공무원들은 잠자고 시흥시장은 반대 아닌 반대를 하고 있지만 당연히 시민이 주인이어야 한다.

 

이 시기에 모든 지역단체들이 통합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원래 지역사회가 발전하려면 시민들이 과거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계승해야한다. 애향심이 지역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며 통합이 되면 안산은 대한민국 최고의 고장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큰 대사에 앞서 시가 지역사정을 밝혀 일을 잘해야 하는데 걱정이 많다.

 

시민혈세를 들어 만든 자전거 보관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보관소가 없어서 자전거를 못 타는가. 보관소보다는 전용도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안산은 큰 도로가 동서로 되어있고 여기에 안산천 화정천 등 남북으로 흘러 그냥 우물 정(井)자로 길이 나있다. 안산천 하나만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놓으면 수암동에서 자전거 타고 공단까지 출근할 수 있다. 자전거 도로를 중간 중간 끊어놓고 안산시는 엉뚱한 얘기만 한다.

 

연성팔경이라고 있는데, 이는 표암 선생의 그림에 나온다. 원당사에 다 올라가보면 이곳은 돛단배가 왔다 갔다 하고 갈매기가 날고 석양이 떨어지는 그림 같은 호수라는 것을 시로 읊은 것이다.

 

‘연성팔경’ 을 살린다 하여 화정천 공사를 한다는데 기본이 안 되어있다. 화정천을 인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건천’으로 하라고 건의했는데 그저 ‘청계천’을 답습하고 있다. 자연적 화정천이 물 꽐꽐 나오는 청계천보다 백번 낳다.

 

김갑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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