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도포라의 잎사귀를 보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준 것은 맨 꼭대기에 위치한 포식자로서의 증표가 아니다. 예의와 염치를 알며 겸양의 미덕을 가지라는 뜻도 담겨있다.
세상에는 하찮은 짐승과 식물한테도 배울 점이 많다. 가령 기러기가 창공을 날 때도 새끼는 가운데에 세워 보호를 한다든가, 짐승도 먹이를 두고 배를 어느 정도 채우면 물러난다. 심지어는 까마귀의 경우, 어미가 늙어서 먹이사냥을 못하면 새끼가 먹이를 구해온다고 한다. 그래서 녀석에게는 ‘반포조(反哺鳥’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미에게 먹이를 토해 준다는 것이다.
수년 전 나는 야생 조류들을 위해 아파트 베란다 거치대에다 먹이통을 달아 메어 모이를 준 적이 있다. 그때 보니 종류는 다르더라도 한녀석이 먹이를 독식하지 않았다. 몸집이 큰 순서대로 날아와 깃털이 칙칙한 직박구리가 먼저 먹고 가면, 눈 주위가 하얀 곤줄박이가 나중 와서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먹이를 양보하고 평화로움을 이어갔다. 한데 나는 이보다 더 기막힌 어느 식물의 알게 되었다. 우연히 식물도감을 들춰았더니 거기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동남아 보르네오 섬에서 자라는 어떤 식물은 다른 식물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파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단다. 일견 보면 벌레가 파먹은 듯 한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설명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이파리가 군데군데 뚫여 있는 건 다른 식물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라고 그런다는 것이다. 그 식물이름은 '라피도포라'. 주로 다른 나무를 지주목삼아서 감아 오르는 덩굴식물인데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놀라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낱 식물이 배려를 하고 살다니. 어찌 미물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실천한단 말인가.
나는 처음에 라피도 포라의 이파리를 보고는 표본에 쓸 좋은 것을 구하지 못해서 불가피잎파리가 상한 걸 실어 놓은 줄로 알았다. 보기에 좀 안 좋아 보여 ‘좀 좋은 자료를 싣지’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설명을 읽고는 갑자기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보노라니 느낌이 많았다. 식물이 이러한데 무시하거나 업신여길 있을까.
이는 사람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오히려 독식을 하려드는 점에서 보면 사람한테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한데 한낱 미물인 식물이 그렇게 실천하는 걸 보니 경각심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 식물도 그러한데 사람이기로서야’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요즘 사람들이 보여주는 탐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절제 있는 행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사람과는 달리,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보지 않는 가운데서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라피도포라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타의 정신을 발휘하여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가상하고 감탄스러운 일인가.
이 식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조물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은연중에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고 깨달으라고 하는게 아닌가.
주물주가 보기에 하도 세상 사람들이 욕심에 취하여 탐욕과 개인주의로 빠져 지내는 것을 보고서 깨닫게 하려는 뜻은 아닌가.
현실에서 인간이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구는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여 궁핍하게 사는데, 다른 누구는 넘치는 음식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다버린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양심을 지키고 분수에 맞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양심과 도덕 따윈 내던져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간다. 돈이 될 만한 것에는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이런 현상을 배운 사람일수록 부자일수록 더하여 세상을 온통 부패천지로 만들어 놓고 있다. 복마전이 따로 없다. 이번에 터진 성남 대장동사건만 보더라도 성실하게 사는 소시민들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대못을 박아놓았다.
무슨 알라딘의 요술램프도 아니고 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돈벼락 맞는 요지경 세상이 있을 것인가. 단돈 몇 백 만원, 몇 천만을 들여서 백억, 천억을 버는 돈 잔치가 있을 것인가.
신출귀몰하는 능력으로 돈을 벌었다고 할지 모르나 이것은 성실하게 사는 서민의 억장을 무너뜨린 일이다. 과연 이런 현상을 보고도 공정을 말할 수 있을까. 몇 천 몇 만 배의 돈 잔치가 벌이지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도 같은 기상천의의 현상이 극심한 세상의 부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무리 약육강식이 횡횡하고 능력에 따라 사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너무한 작태가 아닌가 한다.
그렇잖아도 부의 세습은 날로 고착화되어가는 현실이다. 양극화는 날로 더해간다. 들여오는 말에 의하며 현재의 우리국토는 상위 10프로의 부자들이 70프로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여의도 면적을 상회하거나 버금하는 토지소유자도 흔하다고 한다. 이러고서야 함께 산다고 할 수 있으며 집 없는 서민들이 언제 자기 집 가져볼 꿈이나 꿀 수 있는가.
크나큰 현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도무지 탐욕자들의 의식 속에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눈곱만큼이나 있기나 한 것일까. 눈 씻고 보아도 그런 싹수가 보이지 않으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어디서 이런 식물의 반에 반이나마 상생의 정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물인 라피도포라도 이런 현실을 안다면 혀를 끌끌 찰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잘나서, 자기 주관대로 살고 또 살아갈 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고 오만이다. 해와 달의 조화나 태양계의 조율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좀 더 겸허해져야 하지 않을까. 상생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바로 라피도포라는 각별히, 자기 몸을 헐어서 구명을 내어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사람에게 던지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2021)
첫댓글 새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 화백은 동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가 합니다. 화백인 줄 알았다면 그런 소동도 없었을 터이지요. 밀로의 비너스를 보는 안목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런 예술품을 누가 소장하고 있느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가령 성범죄 전력이 있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듯합니다^^
생각하니 그렇기도 하군요. 그 주인공은 바로 지역의 대표화가인 강화백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2008 선수필에 선정된 작품
.2013년 윤재천교수가 엮은 <오늘의 한국대표수필 100인선>에 수록된 작품 .
개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떠오르네요. 만고의 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 일을 당한 화가의 말을 듣고 느낀것이 있어서 작품을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