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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1번째기사 종부시 제조 견성군 이돈이 폐조의 후손과의 혼인 문제와 종학에 대해 아뢰니 윤허하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敦)이 아뢰기를, “폐조(廢朝)에서 대군·왕자의 후손과 공주·옹주(翁主)의 후손으로서 현손까지는 종친으로 하여금 망을 드려[望呈]549) 혼인하지 말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근일 영신수(永新守)의 계청(啓請)으로 예조(禮曹)에서 아뢰어 그 법을 파하였으며, 금후로는 증손까지 양편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면 망을 드려 혼인케 하지 말게 함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폐조에서는 종친으로 하여금 글을 읽지 말게 하였기 때문에 종학(宗學)을 폐지하였던 것을 지금 이미 수리하도록 명하였는데, 일 맡은 이들이 늑장을 부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속히 수리하여 가을이 되면 나가 배우게 함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5장 B면 【영인본】 14책 136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건설-건축(建築)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註 549]망을 드려[望呈] : 혼인의 희망을 아뢰는 일.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2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을 탄핵하다 대간이 아뢰기를, “반정 때 거의(擧義)하던 날, 3대장(大將)이 무사를 유자광(柳子光)의 집에 보내며 말하기를, ‘오겠다고 하면 데려 오고, 명을 어기면 자취를 없애라.’ 하였는데, 무사가 그 뜻을 전하며 효유하니, 자광이 사세가 벌써 정하여진 것을 알고 부득이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논공(論功)할 때 신윤무(辛允武) 이하를 모두 그 훈로(勳勞)를 따져 이름을 쓰게 되었는데, 자광은 2∼3등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겉으로 겸양하며, ‘내가 무슨 공이 있는가? 이름을 쓰지 말기 바란다.’ 하며 쓰지 말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녹훈(錄勳)이 끝난 뒤 3대장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윤무 이하는 신 등이 그 고하를 따져 이름을 썼지만, 신 등 자신의 일은 감히 스스로 편리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자광이 곁에 있다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3대장과 같습니다.’ 하여, 결국은 외람하게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공신을 모점(冒占)한 연유입니다. 그리고 문신들이 전강(殿講)550) 하는 날, 대간이 신은윤(辛殷允)·조계형(曺繼衡) 등의 일을 논란하니, 자광이 아뢰기를, ‘은윤·계형의 일은 추후로 의논함이 불가하니 대간의 말은 거행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계형은 사홍(士洪)을 종처럼 섬겼는데 자광이 본래 그 당여(黨與)이므로 그를 비호한 것이며, 은윤이 남의 집을 빼앗았고 자광 역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후일의 계획을 하려는 계책에서 추론(追論)하지 말게 한 것입니다. 또 자광은 본래 사홍의 집을 하사받았는데, 사홍의 처자가 일찍이 이억년(李億年)의 집을 빌려 살았으므로 자광이 또 말하기를, ‘역시 사홍의 집이다.’ 하며 빼앗았습니다. 자광은 또, 안극종(安克從)·심광종(沈光宗)의 일을 비호해 말하기를, ‘당번 군사에게 하문하면 알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대간을 억제하는 술책입니다. 폐조 때 자광이 대궐에 나가 아뢰기를, ‘윤필상(尹弼商)·이세좌(李世佐)가 모두 큰 죄가 있으니 중하게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이것은 미리 폐주(廢主)의 뜻을 알고서 아첨한 것이며, 필상·세좌의 죽음은 모두 자광 때문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소인 중에도 더욱 심한 자이며, 또 나라를 그르치는 술책이 이미 나타났으니 극형에 처하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대간이 자광에 관하여 조열(條列)한 상소를 삼공·육경(六卿) 및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게 보이고, 의논해서 아뢰게 하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의계(議啓)하기를, “자광의 전일 소행이나 말한 것에는 그른 것이 많습니다. 지금 대간과 시종(侍從)이 여러날을 두고 논계하는데, 이것은 공의(公議)가 용납하지 못하는만큼 치죄(治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왕을 익대(翊戴)한 공이 있기 때문에 성종조에서 조정(朝政)을 혼란시킨 죄를 지고서도 그는 죽음을 용서받고 귀양을 갔을 뿐이었으니 지금 파직시켜 국정에 간여하지 말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은 아뢰기를, “대간이 아뢴 바, ‘자광이 공신을 모점(冒占)하였다.’는 말과 ‘오지 않으면 자취를 없애라.’고 하였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거의(擧義)할 때 성희안이 김수동(金壽童)·김감(金勘)·유자광에게 알리었는데, 이 때 그는 곧 말을 달려 먼저 훈련원(訓鍊院)에 당도하여 그 모의에 참여하였으며, 대궐문으로 와서 폐치(廢置)551) 를 정한 일은 이계남(李季男)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계남은 2등에 들고, 자광은 1등에 든 것은 먼저 훈련원에 당도한 공으로 인해서였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계남은 아뢰기를, “대간이 자광이 남의 집 빼앗은 일을 논하였는데, 자광과 이억년(李億年)은 지금 서로 송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광은, ‘사홍(士洪)이 병판(兵判)이 되었을 때 억년이 벼슬하려고 집을 바쳤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다.’ 하고, 억년은, ‘나는 일찍이 사홍에게 바친 일이 없다.’ 하며 서로 송사하여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5장 B면 【영인본】 14책 136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주생활-가옥(家屋) [註 550]전강(殿講) : 임금이 친히 강 받는 것. ☞ [註 551]폐치(廢置) : 연산군을 폐하고 새 왕을 세우는 것.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3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의 죄를 논하니 파직을 전교하다 대간이 유자광의 죄를 논하여 중법에 처하기를 청하고, 또 자광의 아들 유방(柳房)과 유진(柳軫)및 그 사위 손동(孫同)과 손자 유승건(柳承乾)이 방자하게 횡행하는 죄를 다스려 자광의 수족을 제거할 것을 청하니, 상이 빈청(賓廳)에 전교하기를, “대간이 자광의 전의 일을 추론(追論)함은 온당치 못한 것 같다. 홍문관에서 역시 자광이 도총부(都摠府) 및 각사(各司) 제조(提調)에 간여된 사실을 논하니, 내 생각으로는 다만 제조만을 갈았으면 하는데 대신의 의사가 어떤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에 회계(回啓)하기를, “공론을 고집하는 자는 모두 중죄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만일 파직하지 않는다면 조정 의논이 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파직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자광은 당대의 공신일 뿐만 아니라 누대 조정의 원훈(元勳)이다. 그러나 중의(衆議)가 이러하니 파해야 하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6장 A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4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을 중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니 불허하다 대간이 유자광을 중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6장 A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5번째기사 병조가 광흥창의 녹봉, 폐조 때의 군직의 체차에 대해 아뢰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광흥창(廣興倉)에 있는 녹봉(祿俸)이 다 되었습니다. 폐조에서 더 두었던 군직(軍職)의 체아(遞兒) 1백 50명은 폐지하여야 할 것이지만 3분의 1만은 남겨서, 부득이 군직에 붙이는 자의 쓰임에 대비함이 어떨까 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6장 B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군역(軍役) / *재정-국용(國用)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6번째기사 유자광이 죄받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다 유자광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이 달 12일에 박영문(朴永文)과 함께 도총부(都摠府)에 입직(入直)하였다가 구언(求言)을 하는 전지가 있음을 들었습니다. 신이 생각하기를, ‘성주(聖主)께서 하늘의 경계[天戒]를 조심하여, 일의 득실을 들으려 하시니, 재상된 자로서 말할 것이 없다면 모르되, 만일 있다고 한다면 말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삼가 다섯 가지 일을 가지고 조목을 나누어 써가지고 빈청으로 나갔습니다. 이 때 영문이 신에게 이르기를, ‘근일 고성(固城) 사는 전 현감(縣監) 허원필(許元弼)과 창녕(昌寧) 사는 전 사복(司僕) 김이형(金利亨) 등을 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우리 고을 원[邑宰]의 정사가 폐해되는 일이 없는데 파직되니 애매하다고 한다.’ 하므로, 신이 언뜻 대답하기를, ‘함께 아뢰는 것이 어떤가?’ 하니 영문이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과연 영문이 들은 것과 같다면, 다시 그 사실을 자세히 알아보고 처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고, 아뢰기를, ‘영문의 말이 이러하고, 감사(監司) 장순손(張順孫)이 서울에 왔으니, 다시 하문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고성·창녕 군사로서 당번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또한 하문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을 뿐이요, 말이 대간에게 미친 일은 없었습니다. 승지·주서(注書)·한림들도 있었고 전하께서도 분명히 아시는 일입니다. 지금 비록 신의 이 논계가 불가하다 하더라도 그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은 아닌데, 13일에 대간이 합사(合司)로 아뢰고, 14일에는 또 홍문관(弘文館)에서 말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자제와 종족(宗族)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가 없어 고립된 몸이라 바깥일을 듣고 볼 수도 없는데 무슨 일로 신을 이처럼 호되게 공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궐에 나가 대죄하고자 하지만 대간과 시종이 지금 한창 죄주기를 청하고 있는 때이므로, 마음대로 궐하(闕下)에 나가지 못하고 문을 닫고 대죄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신을 관원에게 내리시어, 대간·홍문관이 신을 공박한 사연으로 신을 국문하여 정상을 알아낸 다음 신의 죄를 정하시고 또 공의(公議)를 쾌하게 하소서. 신의 한 몸이야 곧 외로운 병아리, 썩은 쥐나 다름없어서 있고 없는 것이 조정에 무슨 관계가 되겠습니까?”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6장 B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7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다 대간이, 자광의 죄를 조진(條陳)하여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차(上箚)하기를, “예로부터 큰 간악한 자들이 그 술법을 크게 부리려면 반드시 널리 당파를 만들어 중외에 자리잡고, 제게 붙는 자는 심복으로 삼고 붙지 않는 자는 온갖 계획으로 음모 중상하여, 대권(大權)을 손아귀에 넣고 흉도(兇徒)들을 문 안에서 길러 그만 백족지충(百足之蟲)552) 의 형세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 스스로 위엄이 임금을 흔들 수 있고 세력이 엎어지지 않을 것을 믿으면서 떠들어대어 짖고, 사납게 눈을 떠서 독한 불이 들을 태우고, 사나운 물이 하늘에 닿는 형세가 됩니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무어라 못하게 된 뒤에 공론이 무너지고 조정이 배척할 수 없게 되며 인군은 제어하지 못하여 마침내 나라를 팔아먹을 지경이 돼야만 그만두게 되는 것이니, 자광은 곧 그 사람인 것입니다. 자광은 간당(奸黨)의 우두머리가 되고 그 자서(子壻) 및 손자들은 손발이 되며, 또 정부와 이조(吏曹)·대간(臺諫)·감사(監司)의 직책을 총괄하고자 하여 백관의 게으름을 들어서 그 위엄을 보이고, 수령 중에서 포상하지 않은 자를 포상하며, 이미 파직한 자는 구원을 하여 그 은혜를 보임으로써, 조종하는 권리가 모두 제게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백족의 형세[百足之勢]를 이루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우리 조종의 당당한 기업을 그르칠 자는 이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보이지 않을 때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不見是圖]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무성하게 퍼져 있음이겠습니까? 원컨대 큰 죄로 다스리고 그 손발도 함께 제거하여 중외의 분한을 씻게 하소서.” 하니, 회답하기를, “여러 의논이 이러하므로 이미 명하여 파직하였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6장 B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註 552]백족지충(百足之蟲) : 백족(百足)은 노래기[馬陸] 또는 지네[蜈蚣]의 딴 이름. 노래기나 지네는 모두 발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며, 또 발이 많아서 죽어도 엎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백족지충 지사불강’[百足之蟲至死不僵]이라는 말이 생겼다. 여기서는 유자광(柳子光)이 친근한 사람이 많아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6일(기축) 8번째기사 이조·예조에서 금방 권학 절목을 아뢰니 따르다 이조(吏曹)·예조에 전교하기를, “새 급제 등을 전례에 따라 관직에 제수하라. 근래 유생들이 학문에 힘쓰지 않고 군위(軍衛)에 속하기를 좋아하며 산관(散官) 가자(加資)를 얻어 타일 승서(陞敍)의 계제로 삼으려고 애쓴다. 사습(士習)의 비루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금방 권학 절목(禁防勸學節目)’을 마련하여 아뢰라.” 하니, 회계(回啓)하기를, “이미 6품 이상 실직(實職)에 있는 자는 다 함께 분관(分館)하되, 강등하여 참외(參外)553) 의 직을 제수해야 하겠지만 과거[科目]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자가 벼슬길에 장애가 없다면 과거 출신인 자가 도리어 하류에 있게 될 것이니, 사람 쓰는 사체가 전도(顚倒)되기 이를 데 없어 시행할 수 없습니다. 또 업유(業儒)554) 인 자로서 나이 40이 되면 충순위(忠順衛)에 속하는 것은 이미 법령이 있으니 연한에 따라 입속(入屬)한 자는 할 수 없지만, 근년 이래로 사습(士習)이 날로 비루해져서 나이를 속여 입속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금후로는 이에 관한 금령을 다시 밝혀 규찰(糾察)하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참상(參上)555) 의 관직을 지나 급제하였더라도 강등하여 사관(四館)556) 에 속하게 함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7장 A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553]참외(參外) : 7품 이하의 관직. ☞ [註 554]업유(業儒) : 글자 그대로 하면 유학(儒學)을 공부한다는 말로 볼 수 있으나 옛날에는 같은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의 신분이라도 적자(嫡子)는 유학(幼學), 서자(庶子)는 업유(業儒)로 구별되었음. ☞ [註 555]참상(參上) : 6품 이상에서 당하 종3품까지의 관직. ☞ [註 556]사관(四館) : 성균관·예문관·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1번째기사 신용개의 추천으로 직강 이철균의 자품을 올리다 조강(朝講)에 납시었다. 동지사(同知事) 신용개(申用漑)·시독관(侍讀官) 김관(金寬)·지평(持平) 유의신(柳義臣)·정언(正言) 조방언(趙邦彦)·검토관(檢討官) 김내문(金乃文)·기사관(記事官) 이희증(李希曾)과 정웅(鄭熊) 등이 면대하여 유자광(柳子光)의 죄를 진언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용개(用漑)가 이어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의 장관을 물망 있는 자를 택차(擇差)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사학(四學)에도 성균관의 윤차 당상(輪次堂上)의 예에 따라, 따로 한 명을 선정하여 윤차로 나가 일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문관(弘文館) 관원은 또 한 달에 세번 씩 제술(製述)하고, 그밖의 문신들 역시 이 예에 따라 시제(試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직강(直講) 이철균(李鐵鈞)은 인물이 출중하고 경학(經學)에 밝아 사표(師表)가 될 만한데 직위가 낮으니, 자품(資品)을 올려 주소서.” 하고,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은 아뢰기를, “철균의 사람됨은 진실하고 겉치레가 없으며 행실이 고매한 자입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라 자품을 뛰어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7장 A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2번째기사 학교의 교수·훈도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대신들에게 명하여, 학교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유순(柳洵)이 의논드리기를, “근래 학교가 폐지되어 스승이나 생도는 자리에만 앉아 있고 강독하지 않습니다. 성균관도 그러한데 더구나 사학이겠습니까? 일찍이 들으니, 학교를 비우고 모이지 않는 날도 많다 합니다. 학교는 근본이 되는 곳이니 원래 이럴 수가 없습니다. 성균관 준례에 따라, 명망 있는 문신으로 하여금 열흘씩 번갈아 사진(仕進)하여, 혹은 강독을 시험하기도 하고 혹은 글 제목을 내어 글을 짓기도 하여 공부를 권장하는 방법으로 하며, 교수와 훈도(訓導) 역시 함부로 차정하지 말아서 그 소임을 오로지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순정(柳順汀)은 의논드리기를, “사학의 교수·훈도의 적임자를 얻는다면, 따로 문신을 뽑아 돌려가며 일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순정의 의논을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7장 B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3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유자광은 이미 파직하였지만, 그 몸뚱이가 그대로 있으면 시기를 틈타 나라를 그르칠 염려가 없지 않으니, 극형에 처하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 유진(柳軫)은 장순손(張順孫)의 첩을 빼앗고, 유방(柳房)은 탐오(貪汚)한 짓을 행하였는데, 모두 노간(老奸)한 그 아비의 기세를 빙자하여 교만 방종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니, 다 함께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 바랍니다. 그 사위 손동(孫同)과 손자 유승건(柳承乾)은 훈적(勳籍)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모두 제 공이 아니고 자광의 협잡 행위에서 나온 것이니, 공을 깎고 멀리 내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자광의 일은 이미 대신들과 의논해서 정하였다. 방·진의 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손동·승건의 일은 서로 의논하여 녹훈(錄勳)한 것이요, 자광이 제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7장 B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가족-친족(親族) / *윤리-강상(綱常)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4번째기사 홍문관·예문관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어제 전교에, ‘유자광은 익대(翊戴)의 공이 크다.’ 하시었습니다. 성종께서 어찌 익대의 공이 있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임사홍(任士洪)을 의주(義州)에 귀양보내고 유자광을 동래(東萊)에 귀양보내는 동시에 또 그 공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홍을 중형에 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나라를 그르치는 화를 가져왔습니다. 자광이 형벌을 면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입니다.” 하고, 또 예문관(藝文館) 전원(全員)이 와서 아뢰기를, “자광은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대간·홍문관이 아뢴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7장 B면 【영인본】 14책 13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5번째기사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홍문관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옛부터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소인을 먼저 제거하였습니다. 알지 못한다면 그만이지만 안다면 반드시 엄중히 다스려 통렬히 끊기를 사나운 범이나 독한 뱀을 멀리하듯 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흉험(兇險)하고 독살스러운 마음으로 물어 뜯어대며 틈을 엿보아 수시로 발동하여 반드시 선비들을 상해하고 사직을 위태롭게 한 뒤에야 말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자광은 소인 중에도 심한 자이니, 그 해독이 어찌 사나운 범이나 독한 뱀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성종조에 있어 자광은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일찍이 한번 그 술책을 시험하려 하였는데, 위에서 밝게 살피어서 공을 삭탈하고 귀양보내셨으니, 실로 한때의 공로로는 정사 어지럽힌 죄를 속(贖)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그것을 쾌하게 여기지 않고 후일의 화가 될까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그 후 석방하고 복직시켜 그 녹을 잃지 않게 하니, 이는 곧 성종의 자상하심이 너무 지나쳐서였습니다. 만일 그 당시 임사홍과 함께 중형으로 처치하였다면 어찌 폐조(廢朝)에서 나라를 그르친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가 인군을 인도해 악하게 만들고 정기(政紀)를 문란시키며, 선비를 섬멸하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한 것은 오직 평소 공론에 용납되지 못함으로써 감정을 품었다가 시기를 타서 제멋대로 행동한 데 있습니다. 화란이 극도에 이른 다음 사홍을 베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는데, 하물며 같은 악당으로서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구차하게 성명(聖明)의 주벌(誅罰)을 벗어나고 교묘히 훈적(勳籍)에 의탁하여, 제 스스로 잘한 일이라 하여 조정을 멸시하고 상권(相權)을 침해하며, 훼예(毁譽)를 전도하고 위복(威福)557) 을 제멋대로 농락한 정상이 이미 드러나 가리울 수 없습니다. 공경 대신이 모두 공론을 옳다 하는데 노간(老奸)을 제압하는 것이 고작 파직에 그치시니 그가 어찌 회오하고 자책하여 스스로 반성하겠습니까? 앞으로 이를 갈면서 그 독을 풀려고 하는 것이 전일보다 더욱 심할 것입니다. 사나운 범을 회초리로 제압하는 것 같아 오직 악을 징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노기를 격동시키고 그 사나움을 더하는 것이니, 다른 날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공론을 따르시어 분명히 형벌을 써서 영원히 후일의 화를 끊으소서.”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8장 A면 【영인본】 14책 13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註 557]위복(威福) : 형벌을 주고 복을 주는 일.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6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대간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공론은 안극종(安克從)·심광종(沈光宗)을 가리켜 불법이라 하는데, 유자광은 이들을 어진 수령(守令)이라 하며, 조정에서는 유자광을 가리켜, ‘공론을 막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대간을 독해한다.’ 하는 데, 자신은 ‘한 마디의 말도 대간을 핍박한 일이 없다.’ 하며, 공론은 유자광을 가리켜, ‘나라를 그르치는 간흉이라 하여 반드시 중형으로 처치하여야 한다.’ 하는데 자신은 그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지 않는다.’ 하며, 공론은, ‘대간(臺諫)·홍문관의 논박(論駁)을 쾌하다.’ 하는데 자광은, ‘무슨 일로 신을 이다지 급박하게 공박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공론은, ‘자광의 두 아들이 재상이 되고 한 사위, 한 손자가 외람되게 훈적(勳籍)에 끼어들었으며, 틈을 노려 따라 붙는 무리로 근거를 삼는다.’ 하는데 자신은 고립된 몸이라 합니다. 실지는 차자(箚子)를 올려 스스로 옳다 하며 공론에 항거하면서 말로는, ‘문을 닫고 대죄(待罪)한다.’ 하며, 실지는 대간 시종(侍從)을 하옥시켜 죄주게 하려 하면서 말로는, ‘신을 빨리 하옥하라,’ 하니, 신 등은, 자광이 말한 바, ‘한 마디 말도 대간을 핍박함이 없었다.’ ‘그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지 않는다.’ ‘고립된 몸이다.’ ‘신을 하옥하라.’하는 것이 무슨 술책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바른 선비들을 그물질하여 제거하고 대간의 입을 틀어막으며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하면서 눈 한번 흘긴 혐의라도 보복한 후에야만 대간을 핍박한 것이 되겠습니까? 반드시 크게 간악한 술책을 마음대로 부려 온 세상을 귀머거리 소경으로 만들어서 국가가 없어진 후에야,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된다’ 하겠습니까? 반드시 공경(公卿) 백관이 다 그 문하에서 나고, 아들 사위와 여러 손자들이 모두 큰 권세를 잡아서 한 나라 사람을 제 심복으로 만든 후에야 고립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그가 말한 ‘문을 닫고 대죄한다’는 것과 ‘신을 하옥시켜 달라’는 것은 대간과 시종으로 하여금 문을 닫고 대죄케 하며 한 그물에 거두어 하옥한 후에야 쾌하겠다는 것입니다. 계교가 간교하고 술책이 교묘하기 때문에, 은미한 말로 시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시비 사정(是非邪正)에 현혹되어 그 단서[端倪]를 알아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온 나라의 공론을 거절하고 노간(老奸)을 용서하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 등은 전하께서도 또한 점점 그의 술수에 말려들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속히 자광의 나라 그르친 죄를 바로하시어 온 나라의 공론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어필로 차자 끝에 쓰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다시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8장 B면 【영인본】 14책 13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7일(경인) 7번째기사 예문관 봉교 정충량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회보하지 않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정충량(鄭忠樑) 등이 또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옛부터 소인이 악행을 하면서 선한 이름을 빌어서 간악함을 이루는 자는 참으로 소인 중에 소인으로서 분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성묘(成廟)께서 승하하시던 날, 유자광이 제 어미의 복을 입고 밖에 있으면서 임금의 복 입기를 청하였으니, 그 계략은 사왕(嗣王)의 총애를 받으려는 것이나 그 일로 보면 충성인 것 같았으며,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에 제일 먼저 검약(儉約)을 숭상하자고 청하였으니, 그 뜻은 자기 말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여 임용(任用)에 유의하여 달라는 것이나 그 말로 보면 바른 것 같았으며, 그 후 글을 올려 자기의 공을 차례로 들어 말하면서 자신이 말하기를, ‘여러 조정을 섬기면서 아는 것은 모두 다 말하여 국가를 보익(補益)하였다.’고 하는데, 그 마음은 공로와 재능을 자랑하여 권세와 총애를 굳히려는 것이나 그 말인즉 옳은것 같았으며, 또 향리에 물러가 천명[性命]을 보호하겠다고 청원하는데, 그 생각은 위유(慰諭)하여 만류하게 하려는 것이나, 말도 보면 청렴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왕안석(王安石)이 자기에게 불합한 것이 있으면 문득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던 술법이, 어찌 기망(欺罔)의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천재(天災)가 자주 보이는데, 여름철의 우박은 음이 양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비하면, 군자는 양이요 소인은 음이니, 이것은 바로 소인의 도가 자라나는 징조입니다. 전하께서 구언(求言)558) 하는 명을 내리시면, 말하는 자가 반드시 유자광을 들어 말할 것입니다. 자광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공론을 저지하려 하면서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몰래 그 술법을 써서 은밀히 전하의 뜻을 시험한 것인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계책이 행하여지지 못하게 되자, 그 뒤를 이어 할 짓이란 지극히 간교(奸巧)하여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술책일 것이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어쩌다가 바른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은 한 망언(妄言)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 등이 어찌 감히 남의 허물을 고자질하기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말의 발단은 매우 작지만 그 조짐은 매우 큰 것으로서 이 바로 시운(時運)의 비태(否泰)559) 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멀리 외딴 변방으로 내치시어 신민(神民)의 기대에 맞게 하소서.” 하였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9장 A면 【영인본】 14책 13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과학-천기(天氣) [註 558]구언(求言) : 바른 말을 구함. ☞ [註 559]비태(否泰) : 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8일(신묘) 1번째기사 참찬관 이윤 등이 유자광의 중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조강에 납시었다. 참찬관(參贊官) 이윤(李胤)이 아뢰기를, “유자광(柳子光)이 성종조 때 임사홍(任士洪)과 짜고 현석규(玄錫圭)를 음해하였습니다. 석규는 바른 선비인데, 반드시 석규를 모함하려 한 것은 사홍과 결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폐조(廢朝)에 와서는 까닭없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은 모두 큰 죄가 있으니, 중형에 처하고 자손들도 죽이소서.’ 하였으며, 그 때 임사홍(任士洪) 역시 차비문(差備門)560) 에 나아가 아뢰기를, ‘이세좌(李世佐)의 죄는 주아부(周亞夫)561) 가 조정의 석차(席次)를 설치하지 않은 데 성낸 것과 같으니 죽이기를 청합니다.’ 했습니다. 곧 자광에게 유시하니, 자광 역시 죽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안팎으로 결탁하여 간악한 술책을 이루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오년562) 에는 자광이 명사들을 김종직(金宗直)의 문도라 지목하여 다 없애려 하면서 노사신(盧思愼)의 분간하자는 의논을 힘써 저지하였습니다. 만일 그 술책이 행하게 되었더라면, 글하는 선비는 씨도 안 남았을 것입니다. 폐주(廢主)가 일찍이 극균의 집을 찾아간 선비들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자광과 사홍도 처음에는 모두 이에 참여하였다가 재빨리 벗어났으니, 이는 폐주에게 아첨하여 잘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간의 말을 쾌히 따르소서.” 하고, 장령 한급(韓汲)은 아뢰기를, “자광의 죄는 사홍보다도 심합니다. 일찍이 어미 복을 벗고 인군의 복 입기를 청하였으며, 함경도 감사가 되었을 때에는 봉진하고 남은 생복(生鰒)을 먹으면서, 이런 특이한 것을 신하로서 차마 목에 넘길 수 없다.’ 하며 곧 봉진(封進)하였습니다. 신하로서 봉진하고 남은 물건을 먹는 것은 예사인데 자광만은 이러하였으니, 그 폐주에게 총애를 구하려 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상소하여, ‘무오 여당(戊午餘黨)이 아직도 있어 정국(靖國) 초에 신의 녹공이 잘못되었다고 의논합니다.’ 하였으니, 그의 음험하고 간교함이 이러합니다. 전일에, 천사(天使)563) 가 한명회(韓明澮)의 압구정(狎鷗亭)을 구경하려 하니, 명회가 대궐에 들어와서 용봉 차일(龍鳳遮日)을 청구하다가 되지 않자, 명회가 안색을 변하고 일어나니, 성종께서 귀양보냈습니다. 명회는 성종의 장인이므로 그 세력을 제어하기 어려울 듯하였지만, 그래도 의심치 않고 죄를 주었습니다. 또 신정(申瀞)은 좌리 공신(佐理功臣)이 되고 허혼(許渾) 역시 대신이었지만, 한 번 큰 죄가 있자, 성종께서 모두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청컨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거울삼아 쾌히 결단하소서.” 하고, 기사관(記事官) 정웅(鄭熊)은, “반정(反正) 후 신이 외방 사람을 만났더니 먼저 전하의 즉위하심을 하례하고, 다음에는 사홍·자광의 존몰(存沒)을 물었습니다. 신이 ‘사홍은 처형되고 자광은 그대로 있다.’ 하였더니, 듣는 사람은 괴이하게 여기며 마음에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으로도 자광의 죄가 큼을 알 수 있습니다. 중형으로 다스리소서.” 하고, 영사(領事) 유순정(柳順汀)은, “자광의 일은 가볍지 않기 때문에 신 등이 파직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공론도 모두 불가하다 하니, 널리 의논하여 처치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허집(許輯)은, “공론을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특진관 이계남은, “성종조에 이칙(李則)이, ‘금일 사홍(士洪)을 등용하면 명일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입니다.’ 하니, 성종께서 ‘금일 등용하면 명일 꼭 나라를 그르치겠는가?’ 하셨는데, 칙이 ‘꼭 나라를 그르칩니다.’ 하니, 성종께서 ‘네 말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오활(汚闊)한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았습니다. 지금 공론이 또 이러하니, 따르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종조에서 자광은 죄를 입었다가 즉시 도로 등용되었으며, 근일에 또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들 ‘파직만 하는 것이 옳다.’ 하였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한급이 아뢰기를,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이 성종조에 있으면서, 대궐에 나와 어전(御殿)에 오를 것을 청하고, 사홍의 나라 그르치는 정상을 들어 말하였는데, 성종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심원이 곧 주상 앞에서 통곡하고 나갔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모두 오활하다 하고 사홍의 화가 나중에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고, 이윤은, “김희수(金希壽)가 자광의 상소문을 썼습니다. 유생으로서 소행이 매우 비루하니 함께 추문하소서.”【상소는 무오 여당(戊午餘黨)을 논하는 소장인데, 자광이 송일(宋軼)을 빙자하여 쓰기를 청하였으며, 희수는 송일의 명에 핍박되어 썼다. 그러나 그것이 불의임을 안다면 지조 있는 자로서는 힘써 거절했을 것이다.】 하였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자광은 정상은 근일의 소행뿐만 아니라 전에도 소인의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대저 인군은 소인에 대해 한 사람이 먼저 보고 말하더라도 죄를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지금 온 나라가 논계하는 경우겠습니까?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9장 A면 【영인본】 14책 138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註 560]차비문(差備門) : 편전의 앞문. ☞ [註 561]주아부(周亞夫) : 한(漢)나라의 장군으로 정승에 이름. ☞ [註 562]무오년 : 연산군 4년, 무오 사화가 있었음. ☞ [註 563]천사(天使) : 중국 사신.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8일(신묘) 2번째기사 대간이 유자광의 중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대간이 아뢰기를, “자광이 나라를 그르치는 정상은 온 나라가 다 알고 있습니다. 청컨대 쾌히 결단하시고, 그 아들·사위도 다 함께 귀양보내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자광은 성종조에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환직(還職)되었으며, 지금 소론(疏論)하는 것이 역시 말의 실수에 불과하다.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했으니, 다시 그 죄를 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상차(上箚)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주역(周易)》 쾌괘(夬卦) 단사(彖辭)564) 에, ‘군자가 왕정(王庭)에서 드러내 그 호령을 미쁘게 하여도 위태로움이 있다.’ 하였으니, 이는 군자가 소인의 죄를 왕정(王庭)에 드러내서 결단하여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호령을 밝고 믿음 있게 하여도 위태로울 수 있으므로 진실로 쾌히 결단하지 않고 주저한다면 반드시 소인의 큰 화가 있기 때문에 초구(初九)565) 에 이기지 못하는 경계가 있습니다. 이는 성인의 우환을 예방하는 뜻에서 빨리 소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옛날 공공(共工)566) 이 일은 모아 공을 나타내므로[方鳩僝功] 대순(大舜)이 귀양 보냈고 소정묘(少正卯)567) 가 말로 변명하며 정사를 어지럽히므로[辨言亂政] 공자(孔子)가 처단하셨는데 이는 쾌결(夬決)의 도를 쓴 것이며, 원제(元帝)는 공(恭)·현(顯)568) 의 간악함을 알고도 제거하지 못하였고, 영종(英宗)은 여혜경(呂惠卿)569) 의 사특함을 알고도 베이지 못하니, 쾌결(夬決)을 쓰지 못한 것입니다. 인군으로서 모른다면 할 수 없지만, 안다면 혹시라도 제거하기를 속히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가라지[稂莠]가 곡식에 있는 것을 제거하듯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자광이 공공의 공을 자랑함이 있고,소정묘의 정사 어지럽힘이 있으되 전하께서는 유주(幽州)의 귀양보냄과 양관(兩觀)의 처단을 행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전하께서 홍공·석현과 혜경의 악행을 놓아두었다가 영원히 원제·영종과 같은 조롱을 받을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 자광에게 공이 있다 하시지만, 작은 공로가 나라를 그르친 큰 죄를 속죄하지 못할 것이요,자광이 대신이라 하시지만 나라 그르친 소인을 대신이라 하여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붉은 기운이 가로지르는가 하면, 또 두 번 우박의 재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의 경계가 잦은 것은 실로 《춘추(春秋)》에 경계한 바 음(陰)이 성하고 양이 쇠미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하나의 노간(老奸)을 아껴서 하늘이 꾸짖어 경계하는 뜻을 버리십니까? 바라건대 속히 대형(大形)으로 처치하시어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소서.” 하고, 또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자광의 아들 유방(柳房)이 사명을 받들고 남해(南海)에 나갔는데, 여러 고을 원이 소와 개를 잡아 날마다 돌아가며 지공(支供)하였습니다. 방이 친히 가죽과 고기를 토색하여, 시렁을 매고 포(脯)를 말려서 공인(工人)을 시켜 제조하는가 하면, 스스로 녹반(綠磻)570) 을 꾸리기도 하였습니다. 또 여러 고을에 분부하여 목화(木花)를 팔게 하니, 공납하는 사람들이 백여 명이었으며, 한달 동안 방한(放閑)하다가 생마(生麻) 40속(束)을 늑정(勒定)하고 한결같이 공문을 내어 거두어 들이기를 성화보다 급히 해서, 한 지역이 소란하였습니다. 또 그 아우 유진(柳軫)은 아비의 세력을 믿고 거리낌없이 방자합니다. 제마음대로 궁문을 닫고 금위병(禁衛兵)을 점고하는 등 횡포와 행패가 이를 데 없습니다. 어느 재상의 첩이 광주(光州)에 있는데, 진이 그가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원래부터 간음하려고 하던 중, 하루 아침에 재상이 귀양간 틈을 타 빼앗아 자기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유승건(柳承乾)은 진의 자식이요, 손동(孫同)은 자광의 서사위로서, 털끝만큼의 공로도 없이, 다만 자광의 위공(僞功)을 빙자하여 훈적(勳籍)을 더럽혔으니, 그의 기만죄(欺瞞罪)는 베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광이 전일에 아뢴 바, ‘대간의 말을 다 들을 것이 못된다.’고 한 것은 자기의 기만죄를 가리우고 은밀히 공의(公議)를 막으려는 것으로서, 나라를 망치는 화가 실은 이 말 한 마디에 있습니다. 지금 공경(公卿)·대간·시종에서부터 사서(士庶)·군오(軍伍)에 이르기까지 이를 갈고 통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모두 극형에 처했으면 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하나의 노간(老奸)을 아끼시고 여러 사람과 함께 기시(棄市)하지 않으십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중형을 시행하심과 동시에 방·진의 방자 횡포한 죄를 다스리시며, 손동과 승건의 함부로 받은 공을 삭탈하고 귀양보내 내쫓아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쾌하게 하고 조정을 안정케 하소서.” 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천하에 큰 악이 다섯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음험한 것이고, 둘째는 행실이 괴벽하면서 견고한 것이고, 세째는 거짓을 하면서도 말이 분명함이고, 네째는 그른 것을 배워 넓히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른 일을 감싸주어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인데,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사람에게 있으면 군자의 처단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자광을 본다면, 음험하고 기회를 노리는 잔꾀가 많으며, 임사홍(任士洪)과 결탁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며, 한번 자기에게 틀리기만 하면 문득 중상을 가하며 선비들을 해쳐 한 그물에 다 잡으려 하니, 이것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험한 것이 아닙니까? 어버이 복을 벗어놓고 인군의 복을 입었으므로 사람들은 의심하건만 자신은 옳다 하면서 거짓 충성을 보여 새 은총을 구하니, 이것이 행실이 괴벽하고 견고한 것이 아닙니까? 공론을 저지하고 사특한 꾀를 드러내어, ‘대간의 말을 다 들을 것이 아니다.’고 아뢰었으며 심지어는 수령(守令)을 포미(褒美)하고 핵파(劾罷)할 때에도 상으로 하여금 자기를 믿고 대간을 의심하게 하려 하였으니, 그 말이 진실되지 못하고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솔하게 상소하여 스스로 자기의 공을 내세워 그 은총을 굳히고, 또 선비들을 김종직(金宗直)의 여당이라 모함하여 화에 빠뜨릴 것을 꾀하며, 국인으로 하여금 자기를 무서워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하게 하니, 그른 것을 배워 넓힘을 알 수 있습니다. 대책(大策)을 결정한 후에 영을 듣고 가서 참여한 것은 곧 형세에 밀려서 한 것이지 그 계책에 협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을 의논할 때에는 온갖 방법으로 틈을 노려 1등을 차지하고 뻔뻔스럽게 제가 잘난 척하니, 이것이 그른 것을 감싸주어 번지르르하게 한 것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소인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5악을 겸하고 있는데이겠습니까? 이는 소인 중에도 심한 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5악의 일을 살피시어 군자의 주벌[君子之誅]을 시행하소서.” 어필로 차자 끝에 쓰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0장 A면 【영인본】 14책 139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註 564]단사(彖辭) : 그 괘의 뜻을 풀이하는 말. ☞ [註 565]초구(初九) : 괘의 처음 양효(陽爻). ☞ [註 566]공공(共工) : 당우(唐虞) 시대의 관직 이름. ☞ [註 567]소정묘(少正卯) : 중국 노나라의 대부. ☞ [註 568]공(恭)·현(顯) : 홍공(弘恭)·석현(石顯) 한(漢)나라의 환관(宦官). ☞ [註 569]여혜경(呂惠卿) : 송(宋)나라의 간신. ☞ [註 570]녹반(綠磻) : 약재와 염료(染料)로 사용하는 광물.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8일(신묘) 3번째기사 태학생 윤임이 유자광을 탄핵하니 불허하다 태학생 윤임(尹霖)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옛부터 소인이 나라를 그르침에 있어, 처음에는 능력을 다하여 그 기초를 쌓고 공을 세워 그 근본을 수립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뿌리가 박히고 가지가 번창하여 세력이 정해진 다음에는, 남모르게 기교(機巧)를 부려 앉아서 인군을 술수 중에 빠뜨립니다. 온 나라가 알게 되더라도 그 위엄에 위축되어 입을 다물며, 간혹 말하는 이가 있더라도 인군은 그가 공이 있다 능력이 있다 하면서 알고도 물리치지 못하고, 물리친다 하더라도 능히 멀리하지 못하여, 끝내는 나라를 망친 후에야 그만둡니다. 이래서 《주역》에, ‘나라를 창설하고 집을 계승하는 데 소인을 쓰지 말라.’는 경계가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유자광(柳子光)은 천한 서족에서 발신하여 지위가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니, 공이 크다 하더라도 그 보답이 또한 지나치게 융숭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일찍이 감사할 줄을 모르고 오직 기망(欺罔)만을 일삼았는데, 그 간사하고 음흉한 태도와 국정을 방해하고 나라를 좀먹는 자취가 이미 소장(疏章)에 다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신 등은 또 그 중에서도 가장 국맥(國脈)을 손상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전 성종조에 자광이 임사홍(任士洪)과 결탁해서 조정을 혼란시켰다 하여 공을 삭제하고 멀리 내쳤는데, 그때 사홍이 ‘대간의 말을 다 믿을 것이 못된다.’고 아뢰었습니다. 아아! 이것은 바로 저 왕안석(王安石)의 삼부족(三不足)의 설571) 과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광 역시, ‘대간·시종의 말은 모두 사감을 가진 것이니, 다 들을 것이 못된다.’고 아뢰었습니다. 이는 곧 전일 사홍의 간악함을 이어받아 수행하려는 것입니다. 대체로 언로(言路)란 나라의 혈맥입니다. 언로가 통하고 막힘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자광의 이 계책은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무오 옥사(戊午獄事)는 반드시 다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광이 사류(士流)를 모함하여 없는 사실로 죄를 얽어, 성종께서 20여 년간 배양하여 온 국맥(國脈)을 하루아침에 다 망치고 유화(流禍)가 만연케 하였습니다. 그것을 사홍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화의 원인을 보면 실은 자광에게 있습니다. 사홍은 이미 처형되었는데, 자광의 발호(跋扈)는 더욱 심하니, 종당에는 어찌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라에 이흉(二兇)572) 이 있는데, 그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정치를 잘 하려면 어찌하여 빨리 제거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죽이려 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전하께서는 또 용서하시니, 어찌 공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신 등의 말은 또한 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의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노간(老奸)을 아껴 상하의 인정을 거스립니까?” 예문관에서도 상소하여, 유자광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1장 B면 【영인본】 14책 139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註 571]왕안석(王安石)의 삼부족(三不足)의 설 : 천변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天變不足畏], 사람의 말을 생각할 것이 없다[人言不足恤], 조종의 법을 지킬 것이 없다[祖宗法不足守]를 말하는 것. 송 신종(宋神宗) 때에 재상 왕안석이 옛 제도를 폐지하고 새 법을 만들어 시행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 법 시행에 반대하였는데, 왕안석은 삼부족설을 내세워 세상 의논을 무시하여 크게 말썽을 일으켰다. 《송사(宋史)》 권327 왕안석 열전(王安石列傳). ☞ [註 572]이흉(二兇) : 임사홍과 유자광.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9일(임진) 1번째기사 유자광을 벌주라는 간언은 모두 물리치다 조강에 납시었다. 대간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시강관(侍講官) 경세창(慶世昌)이 아뢰기를, “근자에 공신으로서 대신을 모해하는 자도 주벌하고 귀양보내는데, 더구나 자광의 죄는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렵게 여겨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간이 또 아뢰기를, “어제 경연(經筵)에서 좌우 대신이 모두 공론을 따르시라고 청하는데, 전하께서는 언제나 대신에게 의논하였다고 핑계하십니다. 옛말에 ‘좌우·제대부(諸大夫)·국인이 모두 죽여야 한다 한 후에 죽인다.’고 하였는데, 지금 입시 대신 및 여러 재상과 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이 모두 죽여야 한다 하고, 태학생에서 군졸에 이르기까지 말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이는 국론(國論)이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전하는 어찌 홀로 어렵게 여기시어 이렇게까지 주저하십니까? 속히 중형에 처하기 바랍니다.” 하고, 영사(領事) 박건(朴楗)은 아뢰기를, “자광은 성종조에서 붕당(朋黨)과 결탁하였기 때문에 귀양갔습니다. 이번에는 공론이 크게 퍼지니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지사(知事) 김응기(金應箕)는 아뢰기를, “자광의 일은 누구나 아뢰려고 하지만, 그의 천성이 본래 음험하여 거개가 두려워하다가 지금에 와서는 공론이 크게 일어납니다. 조정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야 하겠습니다. 만약 성안에 두면 인심이 편케 여기지 않으니, 속히 처단하소서.” 하고, 특진관(特進官) 이점(李坫)은, “자광의 간악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반드시 대간과 함께 형세가 둘이 같이 설 수 없습니다. 먼 지방으로 내치기 바랍니다.” 하고, 특진관 성세순(成世純)은, “소인은 인군의 마음이 깊고 얕음을 엿보아서 그 술책을 시험합니다. 성종은 고명하시기 때문에 자광이 그 술책을 시험하지 못하였고, 폐주(廢主)573) 는 혼황(昏荒)하기 때문에 그 술책을 시험한 것입니다. 무오년574) 화에 김일손(金馹孫)은 그 죄를 달게 받았거니와, 기타 정사(正士)를 모두 붕당으로 몰아다 죽이기를 청하였으니, 폐주의 살륙하는 마음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갑자년575) 에 와서는 정사(正士)들을 다 죽였으니, 자광의 죄는 이 천지간에서 용납되지 못합니다. 옛말에 ‘작상(爵賞)과 형벌은 모두 천명 천토(天命天討)하는 것이요, 인군이 사사로이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자광이 성명하신 밑에서 성상의 뜻을 엿보려 하여, ‘무오년의 여당(餘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고, 또 시사를 조목으로 진술하여 그 술책을 시험하려 하니, 그 계교가 간휼합니다.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익대(翊戴)의 공이 있고, 지금 정국(靖國)의 훈(勳)에 참여하였으니, 내가 어찌 참작하지 않고 처치하겠는가?” 하자, 세창이 아뢰기를, “비록 익대의 공이 있었지만, 성종께서 용서하지 않고 멀리 귀양을 보냈습니다. 근자에는 대신을 모해한 일로 하여, 공신 정미수(鄭眉壽)·김감(金勘)을 외방에 귀양보냈는데, 더구나 유자광을 용서하겠습니까?” 하고, 기사관(記事官) 정웅(鄭熊)은, “모든 일을 알지 못하다면 할 수 없지만, 안다면 속히 처단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신진 선비가 어찌 사체를 알겠는가?’ 하십니다. 그러나 신 같은 자는 조석으로 사필(史筆)을 잡고 있으며, 사건을 보면 즉시 기록합니다. 근자에는 신 등이 대간·시종(侍從)의 소차(疏箚)를 쓰는데, 자광이 나라 그르친 정상도 자세히 갖추어 썼습니다. 이미 자광의 간악함을 쓰고 또 그 파직을 허락하신 것도 썼습니다. 그러면 장차 전하께서는 자광의 간악함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알고서 용서하여 주시었다 하겠습니까? 만일 알면서도 제거하지 않았다고 사기에 적는다면 성덕에 손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신 등이 아침 저녁으로 시종하면서, 차마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후인에게 비웃음을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2장 A면 【영인본】 14책 14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註 573]폐주(廢主) : 연산군. ☞ [註 574]무오년 : 1498 연산군 4년. ☞ [註 575]갑자년 : 1504 연산군 10년.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9일(임진) 2번째기사 대간·홍문관·예문관·승정원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대간·홍문관·예문관·승정원이 반복하여 유자광의 죄를 거론하며 중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2장 B면 【영인본】 14책 140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9일(임진) 3번째기사 대간·홍문관·대사헌·대사간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대간이 또 아뢰기를, “유자광(柳子光)을 그대로 둔다면 신 등이 있을 수 없어, 그 형세가 양립(兩立)할 수 없습니다. 지금 청한 대로 되지 않으면, 신 등은 관을 벗어버리고 멀리 가겠습니다. 속히 쾌한 결단을 바랍니다.” 하고, 홍문관은 아뢰기를, “성종조에 대간·시종이, 임사홍(任士洪)을 나라 그르치는 간인이라 지목하여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성종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대간이 한만하여 힘써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사홍이 끝내 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었으니, 신 등은 그 때 대간이 힘써 간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 신 등이 만일 여기에 그치고 물러간다면 반드시 후세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으므로 대간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대간을 명하여 부르자, 대간이 와서 아뢰기를, “신 등은 종묘 사직의 대계를 하는데, 전하께서 따르지 않으십니다. 언관(言官)이 그 말을 다 하지 못한다면 어찌 감히 일을 보겠습니까? 아뢴 대로 따르소서.” 하고, 홍문관에서 또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민상안(閔祥安)·대사간 윤희손(尹喜孫)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 등이 《역경(易經)》 박괘(剝卦)의 괘됨을 보건대, 음(陰)이 아래 있고, 한 양(陽)이 위에 있어, 여러 음이 양을 소박(消剝)576) 하니, 성인이 경계하기를, ‘상(床)을 떨어 뜨리기를 발로 하니, 정(貞)을 멸(滅)함이라 흉하다.’ 하였고, 풀이하는 자는, ‘박(剝)은 아래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발을 떨어뜨림이 되며, 음이 아래서부터 점점 나가 정(貞)에 소멸되니 정흉(正凶)의 도다.’ 하였습니다. 임괘(臨卦)의 괘됨을 두 양이 아래에 있고, 네 음이 위에 있으니, 성인이 경계하여, ‘8월에 가서 흉하다.’ 하고, 풀이하는 자는, ‘두 양이 성해갈 때에, 성인이 미리 경계한다.’ 하였습니다. 양이 한창 성하더라도 8월이 되면 그 도가 시들어지는 것인데, 한창 성한 때에 쇠할 것을 염려하면 그 가득한 것을 방지하고 영구한 것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미 쇠해진 후에는 경계하여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쾌(夬)괘의 괘됨은, 다섯 양이 아래 있고 한 음이 위에 있는데, 성인이 경계하여, 왕정(王庭)에 드러내서 미쁘게 호령하여도 위험이 있다.’ 하였고, 풀이하는 자는, ‘소인이 소미하고 군자의 도는 성하니, 마땅히 조정[公朝]에서 드러내 놓고 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선과 악을 환히 알게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미쁘다[孚]’는 것은 성의이고, ‘호령[號]’이란 것은 여러 사람을 명령하는 말입니다. 군자의 도가 비록 장성(長盛)하기는 하지만, 감히 경계와 방비를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지성으로 여러 사람을 명령하여 아직도 위태로운 길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음양의 소장(消長)하는 이치에 있어서 반복하여 경계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실로 사(邪)와 정(正)이 양립(兩立)할 수 없고, 물과 불은 상합(相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邪)는 음이요, 정(正)은 양이며, 물은 음이요, 불은 양입니다. 이치로 말한다면, 사가 정을 이기지 못하고,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할 것 같지만, 정이 반드시 사의 해를 받고, 불이 반드시 물에 꺼지게 되는 것은, 양의 도는 나타나 화사하며, 음의 도는 은미하여 음산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사(邪)가 타기 쉽고 은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단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옛사람이 소인을 물건에 비할 때에 반드시 봉채 귀역(蜂蠆鬼蜮)이라 하는데, 자광은 그 중에도 심한 자입니다. 성종조에 있어서, 사홍과 결탁하여 조정을 혼란시키기를 마치 박괘(剝卦)에 여러 음이 한 양(陽)을 소멸하듯 하였는데, 당시 삼공·육경과 대간·시종이 들고 일어나 시비하기를 임괘(臨卦)의 두 양이 한창 성함에도 쇠할 것을 염려하듯 하여, 대벽(大辟)577) 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종은 차마 베지 못하고 공을 삭제하여 멀리 귀양보내고 일을 맡기지는 않으셨지만, 역시 뿌리를 뽑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연산군에 와서는 또 사홍(士洪)과 함께 안팎으로 체결하여 인군에게 아첨하고 공을 자랑하여 끝내는 나라를 그르치기를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사홍의 죄이기는 하지만, 자광 역시 그 우익(羽翼)이었으니, 이른바 ‘8월에 가서 흉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고, 여러 어진이 이가 포열(布列)하기를, 쾌괘의 다섯 양이 위의 한 음(陰)을 결단하는 것 같으니, 지금이 실로 왕정(王庭)에서 드러내어 소인의 죄를 바로잡아 사람들에게 선과 악을 명백히 알게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자광의 개처럼 짖고 물어 뜯는 독해를 두려워하여 조야는 곁눈질만 하고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는데, 신 등이 백 번 죽을 힘을 내어서 늑대·이무기[豺虺]와 항쟁하니, 그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에는 잘된 일이나, 성인의 ‘미쁘게 호령하여도 위험이 있다.’는 경계를 생각하면,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있음을 알고 몸이 있음을 모르며, 공론이 있음을 알고 사모(私謀)가 있음을 모르며, 하늘을 두고 항론하여 맹세코 유자광을 대벽(大辟)으로 다스리게 하고야 말려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노간(老奸)의 공로만을 기억하고 조석에 닥쳐올 화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역경(易經)》 명이괘(明夷卦) 육사(六四)의 효사(爻辭)에, ‘왼쪽 배로 들어가 명(明)을 상멸(喪滅)한 마음을 얻어 문정(門庭)을 나온다.’고 하였는데, 왼쪽 배는 은벽(隱僻)한 곳이요, 그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마음에 믿어지는 것이며, 문정을 나온다는 것은 밖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즉 소인은 은벽(隱僻)한 도로 인군에게 결탁하여, 인군으로 하여금 마음에 믿어지게 한 후에 밖에서 간악한 짓을 마음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자광(子光)이 거짓 폐단을 진언하면서 음으로 공론을 저지하고,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원하면서 자기의 전공을 열거, 성상으로 하여금 그 말이 구언(求言)578) 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시게 하여, 비록 공론이 있더라도 먼저 들어간 나의 말을 믿어 거절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며, 저의 공 있는 것을 알려서 비록 공론이 물러가기를 청하거나 주벌하기를 청하여도 허락하니 않도록 하였으니, 명이괘의 육사(六四)가 왼쪽 배에 들어가 유벽한 데로 해서 그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주벌하지 않고, 앉아서 문정을 나오게 한다면, 그 품은 심술[胸臆]을 부려, 눈 흘긴 원한까지 갚아 우리 사류(士流)를 독해하고 우리 국가를 그르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합니다. 한 자광이 죽고 사는 데에 종사의 안위와 신민의 화복이 달렸으니 위태롭고 위태롭습니다. 옛날 한 원제(漢元帝)는 공(恭)·현(顯)579) 의 간악함을 알고도 제거하지 못하여, 한(漢)나라의 화가 싹트게 하고, 송(宋)나라 신하 호전(胡銓)이 진회(秦檜) 베기를 청하였는데, 고종(高宗)이 따르지 않아 끝내는 매국(賣國)에 이르렀습니다. 역대로 모두 그런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실로 인군의 마음이 과감하지 못하여, ‘한 사람의 간사함이 어찌 나라를 망칠 수 있겠는가.’ 하고, 간하는 자의 말은 과격하다 하며 그 화가 여기에까지 닥칠 것을 스스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의 군주(君廚)를 한 상시(常侍)가 족히 금고 종신580) 할 수 있었고, 당(唐)나라의 청류(淸流)를 한 장군이 족히 다 황하(黃河)에 던질 수 있었습니다.581) 한 사람의 독이 이렇게 혹독한 것이니,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신 등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전하께서 온 나라의 공론을 거절하고 한 음흉한 적을 용납하시니, 한 사람의 진퇴로 하여 나라가 반드시 갑자기 흥하고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나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옛일을 보시지 않더라도 사홍(士洪)을 경계로 삼으소서. 이것을 놓아주고 베지 않아 후에 다시 만연된다면, 양 장군(梁將軍)의 발호(跋扈)582) 가 한(漢)나라에만 있지 않을 것이요, 유흠(劉歆)·곡영(谷永)583) 처럼 변을 인해 계책을 올려서 임금을 공격하는 데 전력하고 권세에 거슬리지 않는 자가 지금엔들 없겠습니까? 신 등은 의리상 유자광과 한 하늘 아래 설 수 없으며, 구구한 충성으로 바라는 것은, 유자광을 중형에 처하고 아들·사위·손자도 함께 귀양보내라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역경[大易]》의 교훈을 경계삼으시고, 중(中)으로 한(漢)·당(唐)·송(宋)의 난망(亂亡)한 원인을 거울삼으시며, 아래로는 사홍(士洪)이 나라를 그르친 원인을 징계하시어 양(陽)을 배양하고 음을 억제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시며, 사특한 자를 베고 바른 사람을 등용하시어 사람들의 분한을 쾌하게 하소서.” 어필로 소장 끝에 쓰기를, “나의 뜻을 이미 다 말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서 유자광의 죄를 극론하였는데, 어필로 차자 끝에, “윤허하지 않는다.” 라고 썼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2장 B면 【영인본】 14책 140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註 576]소박(消剝) : 《역경》 박괘 주에, ‘박소어양(剝消於陽)’의 ‘어(於)’자는 일작(一作) 강(剛)이라 했음. ☞ [註 577]대벽(大辟) : 사형. ☞ [註 578]구언(求言) : 임금이 바른 말을 구함. ☞ [註 579]공(恭)·현(顯) : 중국 한(漢)나라의 환관 홍공(弘恭)과 석현(石顯). ☞ [註 580]군주(君廚)를 한 상시(常侍)가 족히 금고 종신 : 후한(後漢)의 삼군(三君)과 팔주(八廚). 삼군은 두무(竇武)·유숙(劉淑)·진번(陳蕃)이며, 팔주는 도상(度尙)·장막(張邈)·왕고(王考)·유유(劉儒)·호모반(胡母班)·진주(秦周)·번향(蕃嚮)·왕장(王章)인데, 이들은 모두 당시 명망 높은 재보(宰輔)로서 환관(宦官)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환관의 모함을 입어 금고 종신되었음. 《후한서(後漢書)》 당고전(黨錮傳). 상시(常侍)는 임금 곁에 항상 모시는 환관. ☞
[註 581]청류(淸流)를 한 장군이 족히 다 황하(黃河)에 던질 수 있었습니다. : 당(唐)나라 말년에 환관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국력이 미약히진 기회를 틈타, 주전충(朱全忠:후의 오대(五代) 양(梁) 태조)이 무력으로 환관 등을 제거하고, 임금 소종(昭宗)을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겨다가 죽이며, 나중에는 당나라를 대신하여 양(梁)나라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 무렵 전충은 종사관의 말을 듣고, 정의와 명분을 내세우는 세칭 청류(淸流)의 인사들을 영구히 탁류(濁流)로 만든다고 하며 모두 황하(黃河) 흐린 물에 던져 죽이는 죄악을 저질렀음. 《당서(唐書)》 배추전(裵樞傳). ☞
[註 582]양 장군(梁將軍)의 발호(跋扈) : 양 장군은 후한(後漢) 때 집권한 무장 양기(梁冀). 순제(順帝)의 왕후 양씨(梁氏)의 오라비로서 집권 약 20년간에 사치와 횡포가 극심하였다. 순제의 뒤를 이은 충제(沖帝)·질제(質帝)·환제(桓帝)가 모두 그의 세력을 꺾지 못하였는데, 그 중에 어린 나이로 총명했던 질제는, 어느 날 조회가 있을 때에 양기를 눈짓하며, “이 사람이 발호 장군(跋扈將軍)이다.”고 하였는데, 기는 이것을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떡속에 독약을 넣어서 시해(弑害)하고, 환제(桓帝)를 맞아 들여 세웠다. 《후한서(後漢書)》 양기전(梁冀傳). ☞
[註 583]유흠(劉歆)·곡영(谷永) : 전한(前漢) 말기의 사람. 학식이 있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이 없었고, 왕망(王莽)의 세력이 커짐을 보고 거기에 추종하였으며, 왕망이 한나라를 전복한 다음에도 그를 따라 높은 벼슬에 있었음.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9일(임진) 4번째기사 홍문관이 또 상소하여 유자광의 죄주기를 청하니 불허하다 홍문관이 또 상소하여 유자광에서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어필로 소장 끝에 쓰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4장 A면 【영인본】 14책 141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9일(임진) 5번째기사 성균관 생원 권숙균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권숙균(權淑鈞) 등이 또 상소하여 자광의 죄를 극론하면서 중형으로 처단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4장 A면 【영인본】 14책 141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20일(계사) 1번째기사 대간·홍문관이 유자광을 탄핵하니 불허하다 대간을 명하여 나와 일을 보게 하니, 합사(合司)하여 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나와 일을 보게 하시려면, 신 등의 아룀을 받아들이소서.” 하고, 홍문관은 아뢰기를, “옛날 원제(元帝)가 우유부단하여 공(恭)·현(顯)584) 의 간악함을 알면서 제거하지 않다가 나라를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자광의 간악함을 아시면서도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이 역시 한 원제처럼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4장 A면 【영인본】 14책 141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註 584]공(恭)·현(顯) : 환관 홍공(弘恭)·석현(石顯). ☞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20일(계사) 2번째기사 예문관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예문관(藝文館)이 다시 차자를 올려 유자광(柳子光)의 일을 극론하였는데, 어필로 차자 끝에, “윤허하지 않는다.” 라고 썼다. 홍문관(弘文館)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군자와 소인이 함께 있으면 소인이 군자를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광은 나라를 그르치는 노간(老奸)이니, 조정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혼자 결단하실 수 없으시다면 널리 중의를 모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에 앞서 이미 삼공·육경과 의논하여 처리한 것이다. 지금 널리 중의를 모은들 무엇이 이에 더하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4장 A면 【영인본】 14책 141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20일(계사) 3번째기사 대간·정원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대간을 명하여 나와 일을 보게 하니, 와서 아뢰기를, “옛날부터 종묘 사직에 크게 관계되는 일을 의논하다가 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나와 일을 보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대간이 사직하니 조정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어찌 한 노간(老奸)을 아껴서 조정으로 하여금 분요하게 하겠습니까? 지금 홍문관 및 재상 유순정(柳順汀)·이계남(李季男)·이손(李蓀)·허집(許輯)·박건(朴楗)·김응기(金應箕)·이점(李坫)·성세순(成世純) 등이 또한 대간의 공론대로 하기를 청하니, 온 나라 공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홍문관이 또 차자를 올려, 자광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는데, 어필로 차자 끝에 쓰기를, “내가 사사로이 자광을 비호(庇護)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정과 의논해서 처리하였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4장 B면 【영인본】 14책 141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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