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제2막의 요란스런 시작
조우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
나는 사실 꽤 어이없는 이유로 의학에 입문했다. 3년 전 이맘때, 나는 계산화학자 경력을 청산하고 약사로서의 인생 제2막을 준비했다. PEET 시험 당일 컨디션 난조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의대 학사편입도 지원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듯이 붙어버린 의대에서는 약대 서류전형도 끝나기 전에 등록금 예치를 요구했다. 도박을 싫어했던 나는 지금 본과 2학년이 되었다. 친구 표현을 빌리자면 ‘의대에 납치당한’ 셈이다.
그런데 3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 2학년일까? 내 인생의 기구함이 의대 납치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학 첫 해 가을학기의 어느 날, 혓바늘이 생긴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이윽고 혀가 하얗게 헐고 병변은 몇 달 동안 계속 커졌지만, 시험 때문에 잠을 못 잔 탓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병원 본관에서 호떡을 사먹다가 낫지 않는 구내염은 구강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입간판을 우연히 봤다. 에이, 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는데!
하지만 이듬해 1월, 핸드폰 플래시라이트로 병변을 관찰하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누런 색깔에 피가 나는 구내염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검사 결과 아니나 다를까 혀의 편평세포암이었다. 내 전화 한 통에 온 집안에 계엄이 선포되고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하지만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 병원은 국내 최고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지하 2층 식당만 있는 줄 알았던 암병원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갔다. 암은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원무과에서 컴퓨터를 몇 번 두들기더니 앞으로 5년 간 중증질환 산정특례 대상자가 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중증질환? 내가 그렇게 중증이야?
다음번 외래에서 주치의 교수님께서 MRI 영상 위에 마우스 커서로 한 바퀴 큼직하게 그린 절제연을 보니 그제야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KMLE 문제로 나왔다면 1초만에 ‘혀 반절제술 및 경부 림프절 곽청술’을 찍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쉬운 케이스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 EMR에 타이핑되는 걸 본 순간, 내가 30년간 이루어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강의실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리라.
곧바로 수술 내용과 부작용에 대해 안내받았다. 혀가 반쪽이 되면 말도 못하고 밥도 못 먹는다고 한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하니 억울한 마음에 ‘저 임상의학 할 수 있나요?’ 하고 토해내듯이 물었다. 수사적 질문이었다. 당연히 가능하다는 상냥하면서도 수사적인 답을 듣고 엉엉 울고 말았다. 겨우 좀 살만한 인생이라 생각했더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요. 학창시절에 선생님 성대모사를 많이 해서?
모든 자연현상은 원인이 있다. 암도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학자적 본능으로 암에 걸린 이유를 찾아 방황했지만, 무익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 까지 고통 받을 뿐이었다. 문득 종교에 신실한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욥이 겪은 고초가 전부 신께서 큰 뜻을 가지고 설계하신 바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 터이니.
의대 동기들에게 암으로 휴학하게 되었다고 알리니 놀람의 카톡이 답지했다. 대부분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아무 내용이 없지만 그들이 내게 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노자가 도덕경에 이르기를 ‘도(道)는 늘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도를 아는 친구들이다.
입원 전날 마지막으로 코인노래방에 가보았지만, 통증이 심해서 천 원어치만 부르고 나왔다. 이제 내 혀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교수님, 일괴로 예쁘게 잘라주세요! 프로포폴이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별이 보이면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이 세상에 마법이 존재할 리 없다.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하게 고통스러웠고, 내가 상상했던 여유로운 병실 생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밤새도록 열과 가래가 끓는 젊은 남자 환자를 돌볼 간병인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서, 결국 부모님께서 입원 기간 10일 동안 독박을 쓰셨다.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입원 환자 간병을 담당할 만한 간호 인력이 있었다면 내가 이런 불효를 저지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기관절개술 상처를 봉합하면서 상태가 급격히 호전되어서 설날 연휴에 퇴원했다.
회복이 빨라서 어쩌면 휴학계를 취소해도 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외래에 갔더니 신경주위침범 때문에 방사선치료를 해야 한다는 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1층 방사선종양학과는 3층 이비인후과의 훈훈했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대뜸 ‘설암은 매우 어렵다’고 운을 떼시더니, 재발에 대한 통계를 보여주셨다. 그제야 나의 퇴원이 석방이 아니라 5년짜리 집행유예였음을 깨달았다.
휴학해서 시간이 남은 김에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담담한 필치로 블로그에 써보았다. 우연히 블로그에 들어온 환자 분들이 감사하게도 내 글에서 위안을 얻어간다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단순히 독백처럼 쓴 글이었는데 의외였다. 피부에 반점 하나만 생겨도 암이 재발한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암환자의 마음을 이해받았다고 생각하신 걸까? 그 분들과 블로그 이웃이 되어 소통하면서 다른 암환자들의 고충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바가 많았다.
나 같은 일반인도 이와 같이 환자분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는 있지만, ‘병원 가보세요’ 이상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의사 면허가 필요하다. 운명의 급류를 타고 도착한 곳이긴 해도, 의사 면허를 받기 위한 훈련과정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러워졌다. 블로그 이웃 분들은 내가 환자들에게 공감할 줄 아는 의사가 될 거라고 과분한 덕담을 해주셨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은 것만 많아 황송했다. 사실은 그런 의사가 되라는 주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주치의 교수님께서 혀와 설하신경을 생각보다 많이 남겨주셔서 말하는 데 지장이 거의 없다. 계속되는 ‘이상 소견 없음’에 재발의 두려움은 옅어지고, 당면한 시험과 과제 및 앞으로의 진로가 더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예비 의료인으로서 경험한 암환자의 입장은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면허에 부끄러운 의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가오는 가을학기를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