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광주 무등산
제가 역사여행을 주업으로 하고 있으면서 역사여행 해설을 많이 나가는데요.
크게 두 유형으로 하나는 광주에서 출발하는 버스 여행으로 주로 광주사람들에게 외부 지역을 안내합니다.
경주나 공주 부여의 고도에서부터 서울 궁궐, 수원화성, 강화도나 제주도 등 전국을 다니지요.
그리고 또다른 유형으로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게 광주와 그 인근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광주를 안내할 때 어떤 성격의 단체가 어떤 주제로 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보통은 이런 멘트로 시작합니다.
광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광주에는 1187번 버스가 다닙니다.
1186번도 없고, 1188번도 없는데 1187번 버스가 있어요.
왜 1187번일까요?
그리고 일행을 둘러보지요.
이렇게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해설 멘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저희들 해설하는 사람들의 영업기밀입니다.
1187번 버스는 왜 있지요?
그렇지요. 무등산의 높이가 1187미터라는 데 착안해 무등산을 가는 버스에 1187번이라는 번호를 붙였지요.
무등산의 높이는 1187미터입니다. 보통의 광주 사람이라면 무등산의 높이를 다 알고 있어요.
참고로.
한라산의 높이? 금강산의 높이를 쉽게 기억하는 방법이 있어요.
한번 구경오십시오. 1950이 한라산.
이팔청춘에 금강산 구경갈랬더니 삼팔선이 가로막혔네. 1638 금강산.
광주인구가 140만이지요.
백만 인구가 사는 도시에 천미터 높이의 산은 무등산이 유일하다며 무등산 안내판에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내 중심가에서 10분이내면 산에 들어서지요.
오늘은 무등산을 주제로 떠나 볼까 합니다.
지금에 이름은 무등산 한자로는 없을 무에 등급 등 - 등급이 없이 고루 평등한 산으로 해석을 하는데,
역사적으론 다양한 이름이 존재합니다.
무돌산, 무진악, 무당산, 서석산 등이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무진악이거든요.
당시 광주의 이름이 무주, 무진주 였기에 거기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일겁니다.
무돌산은 산이름으로도 통하고 광주의 옛이름으로도 통하는데,
광주가 무돌이라고 불린 이유가 물독 - 습지였기에 붙였다고도 합니다.
무돌에서 또하나의 설은 “무”가 무지개의 무처럼 빛을 나타낸 게 아닐까?
무등산의 빛은 정상에 우뚝솟은 입석대와 서석대에서 햇빛에 비치는 경치에서 “무”돌 - 빛나는 돌이 와서 이 이름은
광주 - 빛고을까지 연결되었다고도 합니다.
무당산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선 실재로 산신을 모시는 무당들이 많았다는 설까지 다양합니다.
사실 저는 지금의 빛고을인 광주에서 보듯 빛으로 보고 싶어요.
이름은 그 동네 사람들보다는 외지인이 와서 다른 곳과 구분하기위해 짓거든요.
무등산이 다른 지역의 여타산들과 차별화 되는 점은 보통은 바닷가에 있는 주상절리대가 산 정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서석대이고 입석대 이지요.
서석대나 입석대나 같은 말이거든요, 우리가 한자의 설 립을 보면 훈독 - 그러닌까 뜻으로 읽으면 “서” 가 되고,
음으로 읽으면 “입” 이 되거든요.
서석대나 입석대나 둘 다 돌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돌에서 빛이 나요. 그래서 무돌이고, 광주가 되고 그러지요.
무등산 북쪽으로 담양군이 자리하지요.
지금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라는 광역단체로 구분이 되지만, 무등산 자락으로 보자면 단일 지역이지요.
담양 광주지역의 선비문화를 말할 때 무등산권 인물벨트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담양 인근의 가사문화권을 돌면서 담양이나 광주라는 지역이름보다는 저는 무등산권이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무등산권 인물벨트 여행이라고 말하면서요.
무등산권 인물벨트에서 광주정신의 바탕이 시작됩니다.
고려와 조선 왕조교체기 이후 집권세력이 교체되고 밀리는 세력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거든요.
중앙으로부터 멀리 멀리, 피하기도 하고, 밀리기도 하면서 자의반 타의반 남도로 내려옵니다.
정권의 중심부에서 떠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게 의리, 도덕.
그리고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교육입니다.
봐라. 저 임금 옆에 붙어 있는 이들은 의리를 져버리는 이들이다.
나는 그렇지 않는다라면서 이 곳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킵니다. 젊은이들,
지금의 중고생들의 머릿속에 우리 스승님은 잘나가는 분이었는데,
책대로 사는 삶을 사시기에 이렇게 시골에 내려와 있는 것이다. 이게 광주정신이지 않을까 생각되구요.
이게 무등산의 북쪽인 담양의 독수정, 소쇄원, 식영정, 그리고 광주의 무등산 아래 환벽당, 취가장, 풍암정 등입니다.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인데요. 15명이나 출마해서 최고로 많은 후보가 나왔다고 하지요.
예전에 문화유산 공부하던 단체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조선시대 1대 태조부터 27대 순종까지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고 하고 선거를 해보자.
그래서 한명씩 그 후보가 되어 본인의 업적이나 장점을 홍보해서 투표를 해보자.
기호 1번 태조 이성계, 2번 정종 이방과, 3번 태종 이방원식으로 27번 순종까지요.
누가 제일 표를 많이 얻었을까요?
당연 세종이겠지요. 참고로 2등은 정조 임금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1등 당선은 세종일거란 생각이 들어요.
세종의 위대함과 유명세에 화폐에도 들어가 있고, 광화문 광장에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서울역에서 광화문까지의 거리이름이 세종대로가 되는 것이죠. 우리나라 중심도로 이름.
자. 다시 광주로 오겠습니다. 광주의 중심도로가?
충장로. 금남로를 들지요.
충장로는 왜 충장로일까?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본정통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이 물러난 그 자리에 일본을 깨부순 이를 기려 이름을 정해요.
그래서 충장로이고 광주의 중심도로는 충장로입니다.
광주의 군부대 이름이 충장부대도 있고, 충장중학교도 있으며, 광주 대표축제인 충장 축제도 있지요.
여기에서의 충장이 김덕령 장군의 시호입니다.
무등산 호랑이라고 불리는 임진왜란때의 의병장이지요.
김덕령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 무등산 충장사이고,
충장사 언덕 뒤편으로 장군의 가족과 장군의 부부 합장묘가 위치합니다.
충장공 김덕령.
무등산 자락에서 태어납니다.
김덕령장군은 3형제가 있었는데, 형 덕홍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여했으나
노모가 걱정되어 동생 덕령에게 노모를 부탁하면서 귀가하도록 했고, 본인은 금산전투에서 돌아가십니다.
김덕령은 노모의 상을 치른 후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29세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후 65년이 지나 억울함이 풀리며 벼슬이 내려지고, 150년이 지난 정조때엔 충장이라는 시호와 정려비 등이 내려집니다.
태어난 마을이름이 지금 광주시 충효동이예요.
왜 충효동이냐면, 정조임금때 마을이름이 내려지거든요, 충효리로요.
정조임금때 충무공 전서도 그때 새로 쓰이고, 김덕령 장군에 대한 재조명 사업도 있었나봅니다.
충효리, 충과 효 - 조선을 유지시킨 기본 틀이지요. 그에 모범이라고 임금이 내린 마을 이름이고
지금도 충효동이란 이름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무등산을 관통하는 1187번 버스길과
무등산을 오르는 또다른 방법이 증심사 쪽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증심사 종점에는 여러 노선의 버스가 있습니다.
증심사 쪽에서 오를 땐 저는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 말고 왼편 샛길로 접어듭니다.
그곳에 무등산의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편백나무 숲길이거든요.
무등산 1수원지 길이라고도 합니다. 광주는 일백년사이에 급격하게 큰 도시거든요.
원래 나주의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오면서 백년사이에 인구유입이 급격하게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형성하게 되면서 가장 필요했던 급수시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 8천명을 위한 급수시설로 만들어 놓은게 제 1 수원지입니다.
증심사 올라가는 길에 있습니다.
그 수원지 상류로 편백나무 삼나무숲이 한여름에도 시원함을 선물합니다.
광주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지요.
참고로 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가 편백나무에서 제일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원지 길을 돌아 오르면 의재미술관을 만나게 됩니다.
광주를 예향이라고 불리는 터전이 되는 곳입니다.
선생님은 화가로 활동하시니 의재 허백련 선생님이나 오지호 선생님에 대한 영향을 받으셨겠지요.
저는 의재선생님이 진도 태생인데 왜 광주에 머물렀을까가 의문이었어요.
최근에 읽은 자료 보니
1938년이더라구요. 의재 선생님이 광주에 터전을 잡은게.
왜?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많아서” 라고 합니다.
의재선생님은 무등산 춘설헌에 머물렀고, 춘설헌 건너편 농업학교 자리엔 의재선생을 기리는 미술관이 자리합니다.
의재미술관.
의재미술관은 광주에서 유일하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건물입니다.
산수화라고 하면 산과 물을 그리고 간혹 인물이나 집을 넣게 되지요.
그 의재미술관이 무등산에 들어있는 집이 됩니다.
의재미술관의 내부 작품도 훌륭하겠지만 저는 의재미술관에 들어서면 1층 창틀에서 펼쳐지는 자연이 참좋습니다.
투명창이 족자처럼 구획지어 있어요. 그 창으로 무등산의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창틀 수 만큼 자연 병풍이 만들어 지지요.
그것도 사시사철 하루 열두때 다른 표정으로요.
그래서 의재미술관에 들어서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와봐야한다는 말을 합니다.
광주가 예향일 수 있는 뿌리는 의재 선생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부안에 계셨던 김지운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해방 공간에서 좌익계에서 큰 역할을 했던 분인데 이분이 다 버리고 시골에 와 있으면서 의재선생님과 통했었나 봅니다.
이 분이 의재선생님께 보낸 편지에 무등산 산신령 앞. 이라고 보냈어요.
그런데 그 편지가 정확히 의재선생님께 배달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 분이나 의재선생을 떠나서 그 편지를 배달한 평범한 광주의 우편배달부.
광주 사람들이 바라보는 의재선생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의재미술관을 뒤로 하고 나오면 바로 증심사에 오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 편하다며 중심사로 많이들 부르는데, 마음을 증명하는 증심입니다.
통일신라때 사찰입니다. 역사가 깊지요.
증심사는 다음에 기회되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광주에 무등산이 있다는 것은 광주사람에겐 큰 선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