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감상문
사회학과 2024130565 최우영
두 주인공 미나토와 요리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몇 마디 편견들에 휩싸여 극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학교 학생들은 요리를 괴롭히고, 미나토는 요리를 사랑한다. 미나토의 이상 증세 때문에 미나토가 괴롭힘을 당한다고 오인한 미나토의 엄마는 담임을 의심하고,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고 오인한 담임은 미나토를 의심한다. 미나토는 자신이 요리를 사랑한다고 밝히는 것이 무서워 엄마 말을 따라 거짓말을 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선의를 갖고 있고, 각자 구성한 나름의 개연성과 서사가 있지만, 그것이 동성애라는 ‘정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서사일 때는 아무도 제대로 구성을 하지 못한다.
가부장제하에서는 여성성뿐만 아니라 남성성도 한 인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담임 호리는 체육 시간에 인간 탑에서 떨어지는 미나토에게 ‘그러고도 남자냐’며 웃고, 미나토와 요리의 싸움 이후에는 ‘남자답게 화해하라’고 악수를 강요한다. 미나토의 반 친구들은 ‘여자 같다, 여자 편을 왜 드냐’며 요리를 괴롭힌다. 풀이 죽어 있는 미나토를 본 미나토의 엄마는 TV 속 여장 남자의 말투를 따라 하며 장난을 건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젠더 규정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관습이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남성성의 핵심이다. 남성은 성교(fuck)에 있어서 지배하는 위치, 보호하는 위치, 깔아뭉개는 위치에 있을 것을 요구받는다. 동성애는 남성으로 하여금 성교의 대상(be fucked)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동성애 혐오라는 방어 기제가 나타나게 된다. 극 중 끊임없이 나타나는, 또래 남학생들 앞에서 아는 체하지 말라는 미나토의 양가적인 태도는 동성애가 남성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인 동시에, 편견이 쌓여가고 뇌가 굳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아이들은 사회의 여러 규칙을 내면화하면서 차츰 ‘괴물’이 되어간다. 요리는 우정과 성애를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의 규칙을 내면화하지 않았기에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는 영화에서처럼 학교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편을 드는 분위기였다. 가장 친하고 항상 같이 다니던 남자인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뉴스를 보고 와서 호주였나 어느 나라에서는 동성결혼이 가능하다고 말해줬다. 나는 그걸 듣고 ‘우리끼리 결혼하면 재밌을 것 같다’ 정도로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말이지만, 그때는 사랑에 눈을 뜨지도 못했고, 여자 전반을 어느 정도 적대할 때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 본능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사랑의 최종 형태가 우정이라는 말도 있듯이, 성애에서 포르노적으로 과장된 것을 제하고 보면 우정과 성애는 구분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퀴어 장르의 영화는 로맨스 장르의 외피를 띠는 자유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미나토와 요리가 초록빛 산을 배경으로 함께 웃으며 달려가는 결말은 자유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대화의 부재와 오해의 누적 속에서 자유와 진실은 억압받는다. 작중 교장 선생님과 미나토는 말하는 대신 금관악기를 불어서 억압의 고통을 소리로 승화한다. 억압의 주체가 되는 괴물은 작중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선한 편이다. 다만 아이들의 처지에서 볼 때, ‘정상인’이 ‘비정상인’을 볼 때는 ‘비정상인’이 괴물이지만, 어쩌면 ‘정상인’들이 괴물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