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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어서 말해 보세요! 왜 자수하게 됐는지 말해 보세요.”
담당형사가 다그치듯 물었다.
“아냐. 아닐세!”
김 노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김 노인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담당형사가 지친 듯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담당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고서 다시 나갔다. 그리고 경찰관은 타자기에서 손을 내려놓으며 김 노인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가족관계는요?……그리고 이곳에서 결혼도 혹 위장 결혼입니까……?”
경찰관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
“할아버지! 지식들 걱정은 안 되십니까?”
경찰관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
김 노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서서히 번져갔다. 김 노인은 경찰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찰관은 뭔가를 알겠다는 듯이 지레짐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 노인은 지금의 가족들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특히 아내가 죽고 없는 마당에 그들은 이제 남이나 디를 바 없다고 여겨왔다. 이미 김 노인은 북에 있을 때 결혼을 한번 했기 때문에 다시 결혼하는 것을 그리 원하지는 않았다. 김 노인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재혼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김 노인은 아내의 생전에, 단 한 번도 아내에게 속내의를 시원히 내보여준 적이 없었다. 김 노인은 아내의 응석이나 구박을 별 시답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아내 또한 그리 상관하지 않았다. 아내는 김 노인의 행동을 원래 과묵한 성격 탓이려니 하거나 응당 실향민의 아픔쯤으로 지레 치부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내의 성격은 제법 깐깐한 데가 있었다. 큰 딸이 교제하던 사람과의 결혼도 김 노인은 은근히 반대했으나 아내는 적극적이었다. 또한 매사에 예의가 바르고 행동거지도 당당하였다. 그러나 김 노인은 뚜렷한 연유 없이 그 점이 싫었다. 어쩌면 그가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곧 검사가 될 사람이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단지 내심으로는 오관 반반한 사람치고 심성 곱게 쓰는 이 없다는 옛말을 떠올리곤 했을 뿐이었다. 아무튼 김 노인은 그가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는 저런 구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려운 고시를 통과한 사람이 빽이 있거나 돈 많은 처갓집 골라 장가드는 것이 보통인데, 그 사람처럼 된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을 해댔다. 그러나 김 노인은 오히려 이 점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은 제 형편대로 만나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은 사위는 김 노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조금은 어수룩하고 또 실수도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김 노인은 큰 사위에 비해 작은 사위에게 더 정이 갔다. 결국 큰 딸의 결혼은 아내와 가족들의 뜻대로 별 탈 없이 치러졌다. 아내는 당찬 데가 있는 여자였다.
“내가 먼저 죽으면 안 되는디! 내 죽으면 누가 뒤치다꺼리를 하겄소! 내 죽어도 당신이 먼저 죽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하는디! 이를 어째꺼나! ……”
아내가 임종 시 하던 말이었다. 또 아내가 허약하여 자리보전하면서도 늘 입에 올린 말이기도 했다. 아내는 임종 시에는 당장 눈앞의 죽음보다도 뒤에 남은 김 노인의 보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 노인은 아내가 임종을 맞았을 때에서야 비로소 진실로 아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김 노인은 때늦은 회오로 아내를 위로하고 싶었으나 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아내의 손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뭐 다른 증명될 만한 것은 없습니까? 인식표라든지 아니면 난수표라든지 하는 거 말이오!”
담당형사가 되돌아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물었다.
“……없네.”
김 노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형사는 저 홀로 머리를 끄덕였다. 김 노인은 테이블만 그저 힘없이 내려다보았다. 두 형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실내는 세 사람이 담배를 피워대는 바람에 뿌연 연기로 가득 찼고, 한동안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형사가 간간이 왼팔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딸들과 사위들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김 노인이 자수한 지 세 시간쯤 지나서였다. 김 노인은 그들이 들어서자 고개를 모로 돌려버렸다. 두 딸은 김 노인의 팔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섧게 울기부터 했다. 작은 사위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큰 사위는 매우 침착했다. 그리고 그는 업을 앙다문 채 담당형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두 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구 팔을 흔들었다. 김 노인은 애써 눈길을 피하면서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멀리 비행기 한 대가 상공을 사선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까만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희뿌연한 빈 하늘만 보였다. 그 아래로는 온통 우중충한 진회색 건물들이 눈에 성기게 박혀 있었다. 건물도 담장도 모두 진회색 일색이었다. 회색빛 도시, 조그마한 틈새라곤 전혀 없을 것만 같아 보여 김 노인은 숨이 칵칵 막혀왔다.
“아버님 !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작은 사위도 근심어린 채근을 했다. 그러나 김 노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김 노인은 피곤했다. 큰 딸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었다.
“아저씨 ! 이게 웬 날벼락이에요? 어찌된 일이에요? 말씀 좀 해보세요?”
큰 딸이 경찰관한테 다가가 물었다. 경찰관은 그저 비긋이 웃고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위와 담당형사가 들어섰다. 큰 사위의 눈빛이 한순간 묘한 빛을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큰 사위는 시종 침착하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아버님! 가시죠!”
“좋은 사위님을 두셨군요. 지금은 일단 돌아가셔도 됩니다.”
담당형사는 유쾌하게 말하면서도 입가에는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두 딸네는 안도의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작은 사위는 김 노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딸들도 앞서서 일어나고 있었다.
“난안가! 난 자수한 거여.”
김 노인은 별안간 작은 사위의 손길을 홱 뿌리치며 도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작은 사위는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망설였다. 큰 사위의 입가에 엷은 조소가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져 갔다. 김 노인은 주머니를 뒤져 껌을 꺼내어 한입 가득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아버지! 왜요?”
두 딸네가 소매를 붙들고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느그덜은 몰라! 정말 몰라!”
김 노인이 크게 소리쳤다.
“아버님! 어서 가시죠. 일단 돌아 가셔서 말씀하세요.”
큰 사위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김 노인은 결국 가족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왔다. 차안에서도 큰 딸은 왜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고 다니시냐고 추궁해 왔다. 김 노인은 차에서 내려 홀로 거처하던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다 가족들이 완강하게 붙잡는 바람에 별수 없이 작은 딸네 집으로 가게 됐다. 김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아 버렸다. 김 노인은 아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작은 딸네와 함께 살았었다. 작은 딸네 집은 원래 김 노인의 소유였지만, 아내가 죽은 뒤에는 김 노인이 먼저 집을 나와 버렸다. 김 노인의 가출을 가족들은 은근히 환영하는 것 같았다. 김 노인은 가족들의 그런 행동에 내심 서운했고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김 노인도 기족들과 따로 사는 게 훨씬 속 편했다.
“아버지! 도대체 웬일이에요? 한번 속 시원히 말씀이나 해 보세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 딸이 다그쳤다. 김 노인은 응대하지 않았다.
“아버님! 이제라도 저희랑 같이 사시죠! 저희들이 잘못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작은 사위가 김 노인의 두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됐다!”
김 노인은 손을 빼내었다.
“아버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예?”
큰 딸이 말했다.
“일 없다! 험!”
김 노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버지가 간첩?……정말이세요?”
작은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이구! 답답해 죽겠네! 어떻게 된 거 아녜요?”
큰 딸이 작은 딸한테 눈을 흘기고 나서, 이내 김 노인을 되바라지게 톡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이, 이놈들이 애비한테 못할 소리가 없구나. 나쁜 놈덜!”
김 노인은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버님! 우린 그런 아버지를 둔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간첩을 아버지로 둘 수 있겠어요?”
큰 사위가 나서서 지지 않겠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김 노인은 현기증을 느꼈다.
“나쁜 놈덜 같으니…!”
김 노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방으로 향했다.
“에이! 누구 신세 조질 일 있나.”
큰 사위가 뒤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김 노인은 상대할 기력을 잃어버려 못들은 체했다. 작은 시위는 안절부절 못하고 큰 사위의 눈치를 흘금흘금 살피고 있었다. 김 노인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두 딸네는 방문을 두들기며 소란을 피웠으나 김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 노인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한동안 방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던 두 딸네는 지쳐 물러났다. 김 노인은 자식들한테 홀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도 했지만, 오후의 일이 차츰 후회스럽고 또 자식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응접실 쪽에서는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정신병원엘 한번 가봐야 될 것같애. 아무래도 안 되겠어!”
큰 딸의 목소리였다.
“아니야. 우리가 그 동안 아버지한테 제대로 못해드려서 이렇게 된 거야. 지금부터라도 잘 모시고 살아야 될 것같애!”
작은 딸이 말했다.
“요새 정신병원은 꼭 어떻다고 해서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감정의뢰로써 보통 누구나 진찰을 받죠! 정신병원 하니까 괜히 겁먹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님 행동은 사실……”
큰 사위의 말이었다.
“형님도 비약이 심하십니다. 아무튼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을 테지요.”
작은 사위의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솔직히 좀 이상하잖아! 정신이 좀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간첩이라고 자수할 수 있지. 또 우리들은 뭐가 되는 거야?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큰 사위의 흥분된 목소리였다.
“좀 조용히 해요! 아버지가 듣겠어요. 원 세상에.”
작은 딸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시간을 더 두고 봐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작은 사위의 말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대화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다음 날, 김 노인은 작은 딸네 집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 노인은 작은 딸이 한사코 붙잡는 바람에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작은 사위는 김 노인이 홀로 거처하던 집에 가서 가재도구를 챙겨 와버렸다.
김 노인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지냈다. 이미 지치고 불안해진 마음은 가닥 없이 뒤엉켜 있었고, 또한 머릿속엔 온통 미소 간첩들이 자기네 가족들을 만나 부둥켜안고 감격해 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작은 사위는 조석으로 들러 살피고 갔고, 큰 딸도 매일 인사한답시고 드나들었다. 그러나 김 노인은 그들의 환대를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김 노인은 비행장의 홍군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도 매번 받지 않았다. 김 노인은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으나 노곤한 몸은 조금도 까딱하기가 싫었다.
김 노인은 경찰서에서 출두요구서가 날아올 때까지, 사흘간을 방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김 노인은 지난번의 경솔한 행동에 근심이 됐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경찰서로 출두했다.
“아,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 히힛.”
모자를 벗기도 전에, 예의 담당형사가 빈정대며 맞이했다.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접수 서류의 미결처리 때문에 형식상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염려 놓으시고 몇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영감님! 아직도 간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담당형사의 날카로운 눈이 휘번득였다. 김 노인은 별안간 어이가 없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난번에 간첩이라고 진술했을 때에도 형사들은 그다지 믿어주지 않았다. 김 노인은 지난번의 진술을 번복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한순간 들었다. 하지만 김 노인은 마음을 다잡고 앞을 바라봤다.
“내가 간첩이라고 혔잖소! 자, 나를 빨리 구속하시오!”
김 노인은 크게 외쳤다.
“예, 좋아요. 그러면 어떻게 간첩임을 증명하지요? 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소. 왜 자수하려는지도 잘 이해가 안 간단 말이오.”
담당형사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 여기 있소! 이것 보면 알 것 아니오!”
김 노인은 책상 위에 손때 묻은 일제 소형 단파 라디오를 꽝하고 꺼내 놓았다. 담당형사는 라디오를 주워들고 보다가 피식 웃으며 도로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아니 김영귀 씨! 이것은 별게 아니요. 요새는 흔하디흔한 거요. 뭐 증거가 될 만한 다른 거 없소?”
김 노인은 난감했다. 간첩임을 증명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첩으로서 활동한 바도, 공작원으로서 교육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에서 남파되기 전에 사흘간 아주 간단한 기초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매우 상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김 노인이 생각해도 마땅한 제시물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구두상의 진술뿐이었다.
“하여간 난 간첩이오!”
김 노인은 답답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예, 알았어요. 그러면 여기에 일단 자술서를 쓰세요.”
김 노인은 담당형사가 내미는 볼펜과 종이를 아무 말 없이 받았다. 그러나 볼펜을 쥐고 빈 종이를 대하자 앞이 막막했다. 김 노인은 빈 종이를 묵묵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종이 위에 딸네들의 얼굴이 어른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김 노인은 허위 진술이었노라고 그만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 노인은 자신의 행동이 지식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김 노인의 입에서는 낮은 탄식이 흘러 나왔다. 김 노인은 머리를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김 노인은 한동안 잔잔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이내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바뀌었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목울대를 올려 고인 침을 삼키기도 했다. 이미 두 눈자위는 붉게 충혈돼 있었다. 담당형사는 하품을 하면서 상념에 젖어 있는 김 노인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 노인은 치밀어 오르던 격정이 조금 수그러들자, 담당형사가 일러 주는 양식대로 ‘자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김 노인은 먼저 원적지와 주소지,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줄을 바꾸어서는 고향의 가족 관계와 인민군 생활, 전투에서의 경험, 공작원으로 차출되던 일, 그리고 삼일간의 교육을 마친 뒤 남파되던 상황 등에 대해서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김 노인은 담담하게 자술서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특히 인생의 향방을 가름 지어버린 사건이 되고 만, 공작원으로 차출되던 일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라, 김 노인은 그만 낮은 탄식을 했다.
그 당시에는 인민군의 패퇴와 함께 전선마저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전선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한동안 고착되어 있었다. 또한 미처 소개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매 시간 계속되던 공습과 핵전쟁으로 확산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공포 속에 속속 피난민 대열에 끼어들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김영귀 동무! 전선에서 동무의 영용한 투쟁은 전 인민군의 전형이었소. 동무! 현재 우리는 미군의 참전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소. 그래서 당은 적 치하 공작사업의 중요성을 재삼 인식하게 됐소. 동무를 대남 공작원으로 천거하오. 동무! 빛나는 대남 공작을 바라오!”
한때는 중공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대장 동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었다. 김영귀 씨는 깜짝 놀랐다. 대장 동무는 김영귀 씨를 잔뜩 추켜 세워주고 있었다. 사실 김영귀 씨는 그리 내세울 만한 공적이랄 게 별로 없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싸웠을 뿐이었다. 김영귀 씨는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눈앞에는 고운 아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아내의 얄상한 얼굴은 얼추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모습을 또렷하게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얼굴은 아득히 멀어지기만 하였다. 김영귀 씨는 답답하고 안타까워졌다. 그리고 문득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이 그리워졌다. 김영귀 씨는 50년 정월 초, 이웃 마을의 아가씨와 혼인을 했었다. 다섯 형제 중의 장남인 김영귀 씨의 혼인은 단연 집안의 경사였다. 농투성이인 아버지와 고생으로 아버지보다 더 늙어버린 어머니는 물론 색시도 그 혼사를 기뻐했다. 그리고 혼인하고 나서 채 일주일도 안 되어 바로 밑의 동생과 함께 군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동생은 불행하게도 그해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시였지만 아내와 가족들 간에는 간간히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득남 소식도 전선에서 들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자꾸만 북으로 밀려나던 와중에는 그나마 가능했던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김영귀 씨는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이미 후방으로 소개된 뒤라 그 뒤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옛, 알겠습니다. 대장 동무!”
김영귀 씨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좋소. 동무! 그러면 저 동무를 띠라 가시오. 이제 명령은 거기에서 받게 될 것이오. 한시가 바쁘오. 동무 빨리 가시오.”
대장 동무가 인민복을 입은 사람을 가리켰다. 김영귀 씨는 안내원을 따라 개마고원의 오지인 강계로 갔다. 그곳은 임시로 만든 공작원 양성소로서 쉰 명이나 되어 보이는 남녀들이 고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신참들이 들어오고, 급조된 공작원들은 제각기 임무를 맡고 어둠을 틈타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김영귀 씨는 그곳에서 공작원으로서, 거의 상식적인 것이지만 간단한 지침 등을 교육받았다. 그리고 소정의 교육이 끝나자 특별히 훈련된 여성동무와 함께 공작지도원 동무 앞에 불려갔다.
“동무들은 특별히 선발된 공작원들이오. 지금부터 두 동무는 한 조가 되어 부부처럼 행동하시오. 동무들의 비밀접선 암호는 ‘까마귀 북으로 날아간다’이오. 그럼 지령은 여기에 들어 있소. 반드시 숙지하고 소각하도록 하시오. 동무들! 이상이오!”
공작 지도원 동무의 말이었다. 김영귀 씨는 내심 새 임무를 맡는 게 싫었지만, 암호는 마음에 들었다. 김영귀 씨는 속으로 ‘까마귀 북으로 날아간다’를 계속 외워 보았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그 여성동무와 함께 칠흑같이 막막한 어둠 속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김영귀 씨 일행은 어렵지 않게 민간인 난민 대열에 부부처럼 가장하고 끼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성동무는 도중에 폭격기의 공습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죽었고, 김영귀 씨만 홀로 목적지까지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김 노인은 자술서를 쓰고 나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담당형사는 담배를 꼬나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뭔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핏 회심의 미소를 띠며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 계셨군요.…예, 그렇습니다.… 네, 그렇게 하지요.… 저 부탁했던 것……예, 그럼 그것 좀 잘 부탁합니다.……그러지요. 아이구 감사합니다.……네, 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담당형사가 김 노인을 힐끔거리며 통화를 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딱 감췄다.
“어디 한번 봅시다.”
담당형사가 머쓱해 하며 말했다. 김 노인은 자술서를 건넸다. 담당형사는 자술서를 건성으로 한번 쭈욱 훑어보고는 인주와 함께 내밀었다.
“이곳에 이름을 쓰시고 지장을 찍으세요.”
김 노인이 말없이 이름을 적고 망설이자, 담당형사는 김 노인의 엄지 손가락을 가져다가 인주에 묻혀 이름 끝 자인 ‘귀’자를 쿡 눌렀다. 섬뜩하리만치 빨간 지문이 찍혀 나왔다.
“이젠 됐습니다. 하하하!”
담당형사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제, 어떻게 되지?”
김 노인은 별다른 조치가 없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요? 무섭습니까? 하하, 너무 걱정 마시고 집으로 가세요. 나중에 연락드리지요.”
김 노인은 쓴 입맛을 다셨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왔으나 담당형사가 의외로 일을 쉽게 처리하고 있었다. 김 노인은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라 담당형사의 그러한 태도에 그만 맥이 풀렸다. 김 노인은 성심껏 자술서를 썼고, 이젠 꼼짝없이 입건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조금은 진저리치는 때늦은 후회와 함께 오금까지 저미고 있던 터였다.
김 노인은 별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아니 담당형사가 한사코 밖으로 내몰았다. 김 노인은 딱히 갈 곳이 없어, 쌀쌀한 오후나절의 시내를 한동안 배회했다. 봄바람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매웠다. 아직도 따스한 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차량들은 빵빵대며 지나쳐 갔고 많은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여 갔다. 김 노인은 목적 없이 딱딱한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김 노인은 껌을 꺼내어 한입 가득 질겅질겅 씹었다. 김 노인은 다리가 뻣뻣해지는 피곤을 느껴서 연석에 탈썩 주저앉았다. 김 노인은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움츠리고 앉은 채, 길 건너 회색 건물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김 노인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도시 서쪽 하늘에서는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올라 북쪽으로 향했다. 김 노인은 일순 그 비행기가 한 마리의 까마귀로 보였다. 까마귀는 홀로 힘겹게 날고 있었다. 아마도 까마귀는 무리에서 홀로 남겨진 모양이었다. 김 노인은 마치 자신이 까마귀가 되어 날고 있는 것 같았다. 까마귀는 온힘을 다해 가슴 벅찬 날갯짓을 해댔다. 얼마나 날아갔을까? 김 노인은 행인이 툭 부딪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행인은 휙 한번 뒤돌아보더니 말없이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나 김 노인은 괘념치 않았다. 이내 김 노인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들이 그리워졌다. 김 노인은 아들이 살아 있다면, 그래서 아들을 만나게 된다면, 아들에게 뭔가를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그것이 딱히 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김 노인은 숨을 길게 토해내면서 머리를 좌우로 서서히 흔들었다. 김 노인은 갑자기 비행장의 홍군이 보고 싶어졌다. 김 노인은 모자를 고쳐 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달려오던 빈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이윽고 공항에 이르자 김 노인은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항 대합실로 성큼 들어섰다. 김 노인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 노인을 보자 무슨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머리를 돌리고 피해갔다. 항상 먼저 인사해 오던 비행사 직원들이나 청소부 아줌마들도 김 노인을 모른 체했다. 김 노인은 여행사의 홍군을 보자 얼른 그에게 다가 갔다. 그런데 홍군은 김 노인을 보자마자 지켜야할 자리마저 비우면서 피해 갔다. 김 노인은 비행장을 쓸쓸히 돌아 나왔다.
김 노인은 밤늦도록 선술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뜻 사위가 집 앞 언저리에서부터 방안까지 부축해준 것 같았다. 아마도 딸네 집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한참 배회했던 것 같았으나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곤한 잠에 빠져 들었던 모양이었다. 김 노인이 자리에서 오래간만에 깊고 온전하게 잠들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김 노인은 아침나절 내내 편안한 마음으로 방안에 누워 지냈다. 모처럼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큰 사위가 담당형사와 또 다른 한 형사를 앞세우고 집에 들이닥친 것은 김 노인이 맛있게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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