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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대 강좌 8 - 1 강
비가 오는데 아무리 적게 내리는 가랑비라도 그릇이 반듯하게 놓여 있으면, 그 그릇에 결국 물이 고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져도 그릇이 엎어져 있거나 기우러져 있으면 물이 한 방울도 고이지 않습니다. 지금 8회째인데,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그릇들은 아주 변함없이 반듯하게 잘 놓여져 있어서, 저의 강의가 비록 큰 소득은 없고 가랑비 같은 소득이라 하더라도, ‘지금쯤은 아마 가득히 차지 않았겠나?’ 스스로 이런 기쁨을 가져봅니다. 변함없이 이렇게 공부에 열의를 보여주신데 대해서, 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17.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1) 이야기가 조금 남았지요? 대혜스님도 看話禪(간화선)을 주창 하시면서, 불교 일반에 대해서 다 짚고, 또 파헤칠 것은 다 파헤치고, 해석할 것은 다 해석하고, 그것도 당신이 깨달으신 최고의 지견으로 불교 여러 면을 우리들에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냥 보통 상식적인 불교가 아니고, 정말 禪의 경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마음의 움직임과 고요함의 문제』제가 이렇게 제목을 달아 봤습니다. 대혜스님께서 서장에서 극구 배척하고, 또 비방하고 어떤 경우는 좀 쌍스러운 표현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까지 부정하고 비방하고 배척하는 공부의 길. 다시 말해서 默照禪(묵조선). 묵묵히 앉아있는 것만으로서 공부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부류들을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우리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것인가? 마음의 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공부를 지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깨달으신 분은 결국은 바른 이치를 알았다는 것이지, 무슨 기상천외한 어떤 초 상식적인 세계를 봤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아니한 것은 우리가 따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깔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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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무리는 사대부로 하여금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면,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앉아서 日常事(일상사)를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르친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거두어서 고요히 앉아서 일상사를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라. 이것이 8~900년 전에 가르치신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우리 전통 선불교에서는 간화선 지침서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강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지금도 부지기수입니다.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앉아서 일상사를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간다. 그냥 푹 쉬는 겁니다. 쉰다고 그것이 쉬어지면, 그 길도 살 길이 될 런지 모르지만, 그것이 쉬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됨됨이가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거든요.
어찌 이것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비우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벌써 마음이 두 조각이 난 것이 아닙니까? 마음은 하나인데 거기서 주관과 객관을 일부러 나누는 것이 되는 겁니다. 철학에서 우리가 직자 와 대자. 나를 “나”라고 하는 것과 “나” 와, 그렇게 나누는 이론이 있는데, 그것도 불교에서 보면 틀린 이론이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쉰다. 그럼 마음이라고 하는 놈 따로 있고, 마음을 쉬게 하는 놈 따로 있다는 겁니다. 대혜스님 지적은 이것이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비운다?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 “비운다.” 그러지요? 그리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 그 마음을 제대로 쓰면 그냥 하나일 뿐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마음 하나뿐이라고요.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할 것 같으면 어찌 外道二乘(외도이승)의 고요한 단견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러니까 외도이승들. 공부 잘못하고 있는, 여기 이승이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外道라는 말은 이해합니다. 二乘이라는 것은 성문 연각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것은 附佛法外道(부불법외도). 불법 안에 붙어 있는 외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활발발하게 마음의 속성을 알아서, 마음의 속성대로 살아갈 줄 아는 삶을 선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을 그냥 억지로 가두고서 꼼짝 못하게 고요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공부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앞에서도 있었지만 아주 복잡한 세상사에 얽혀 살던 사람들은 잠깐 마음이 고요해지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지요. 편안합니다. 세상사 다 잊어버린 것 같고, 다 해결 된 것 같고 그래서 편안합니다. 그것이 맛은 좋지요. 그 순간 맛은 좋지만 그것이 공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깐 돌로 풀을 짓누르는 것과 같아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금방 발동해서 요동치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을 공부라고 하면 앞도 뒤도 맞지 않는 공부가 아니냐는 이야기지요. 이것은 크게 불교에 깊은 이해가 없더라도, 또 참선에 대한 경험이 설사 좀 부족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다 마음가지고 살잖아요. 그럼 자기마음 가지고 지금 수십 년 살았는데 마음의 속성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요.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四德(4덕)! 여기서 마음의 네 가지 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자기 마음의 밝고 오묘한 수용→ 明妙受用(명묘수용).
2. 究竟安樂(구경안락). 마음 그 자체로서 이것이 아주 완전한 안락입니다. 구경안락 이라는 말은 완전한 안락입니 다. 마음을 어떻게 하고서 안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가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그대로 안락입니다. 완전한 안락입니다.
3. 如實淸淨(여실청정). 여실청정 이라는 말은 그대로 확실한 사실과 같은 청정.
4. 解脫變化(해탈변화). 해탈변화가 뭡니까? 아주 활발발한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도 걸리지 않는 것이 해탈입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마음껏 작용 하는 것이 해 탈변화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6조 혜능스님이, 우리나라도 옛날 어떤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유사했지만, 忠孝(충효)가 절대적인가치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충과 효입니다. 그것만이 전부인양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思考(사고)에 의해서 조상의 전통과 그 마을과 그 묘와 그 제사. 이런 것을 고집하면서 철저히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것이 종교도 이만저만한 종교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은요.
옛날 육조스님 당시 때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이 마음은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아니 합니다. 그러니 그냥 있지 아니한 것이 우리마음의 속성이고, 그냥 있지 아니한 이 마음 이대로 모든 것의 근본이고 주인이다. 그러니 應無所住(응무소주). 반드시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써라. 머물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요. 충효에 머물러 있을 일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 어떤 가치에 마음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기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그만 자기의 가치관이 깨져버린 겁니다. 완전히 송두리째 깨져버린 겁니다. 깨짐과 동시에 진정한 자기가 거기서 살아난 것입니다. 눈을 환하게 뜨게 됐고 해탈 자유입니다. 여기에 해탈변화라고 그랬지요? 자유를 변화라고 표현 했는데 그 어떤 기준과 어떤 틀과 어떤 규제에도 매이지 아니 하고, 다 풀어져 버린 겁니다. 충효라고 하는 그런 가치관. 그런 규정. 그런 규제가 다 무너져 버린 겁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것이 해탈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음껏 변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천년만년 같이 살자고 약속했지만 그것이 어디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또, 달리 변화를 해봤자 별수도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그냥 더불어 일생을 해로하는 것이지요. 변화를 해봤자 별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최선입니다.
현재로서는 최선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꼭 거기에 시종일관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그 어떤 관념에 의해서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마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4덕! 자기 마음의 밝고 오묘한 수용. 구경안락. 여실청정. 해탈변화. 참 근사하잖아요? 이러한 묘함을 어찌 드러내겠습니까?
마음을 짓누르고, 짓누르고 한곳에다 붙들어 매고, 붙들어 매고. 그것이 화두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수식관이 되었든 비파사나가 되었든, 그렇게 마음을 붙들어 매고서야 마음의 훌륭한 이 네 가지 덕을 어떻게 드러낼 수겠습니까? 모름지기 본인이 스스로 보며 스스로 깨달으면, 저절로 옛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능히 옛 사람의 말을 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뭐라고 했든 간에 그것은 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方便語(방편어)입니다. 약 처방과 같은 겁니다. 세 살 먹은 아이가 감기에 걸렸으면, 아이에게 맞는 감기약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고인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다 그렇거든요. 경전이나 부처님말씀이나 조사스님말씀이나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에 비유를 듭니다. 이것은 마음에 잘 새겨놔야 됩니다. 만약 청정한 구슬을 진창 가운데 두어서 백 천 년을 지나더라도 또한 능히 오염시킬 수 없으니, 본체가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우리 마음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진창 가운데로 굴릴 수가 있습니다. 저 높은 상전의 머리 위에도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청정한 구슬. 아주 갚진 다이아몬드. 아주 귀한 사람의 목에도 걸릴 수가 있고 손에도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창 가운데도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라고요.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능히 혼미할 때에는 티끌세상의 번거로움에 미혹되지만, 혼미할 때에는 세상 더불어서 온갖 탐. 진. 치. 희로애락에 뒤범벅이 되지만, 이 마음의 당체는 본래 미혹된 적이 없으니
여기도 좋은 비유를 들었네요. 이른바 연꽃이 물에 젖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더러운 물일수록 연꽃이 더 아름답게 핍니다. 그렇지만, 그 더러운 물에 연꽃이 절대 젖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꽃. 그것이 불교의 사상을 제대로 다 표현하고 있잖습니까? 제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였다. 拈華(염화). 당신의 깨달음의 진면목을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무비스님이 염화시중을 갖다가 연꽃을 들어 보여 가지고, 연꽃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를 설명하면서 불교의 진수가 거기에 달렸다.” ←이렇게 해석해도 엉터리라고 비난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 것에 제가 관심 둘 바는 아니니까요. 그렇게만 이해해도 괜찮은 겁니다.
만약 이 마음이 本來成佛(본래성불)이며 究竟自在(구경자재)하여 여실히 안락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으면, 갖가지 묘용이 또한 밖에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구족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지만, 기존의 것. 이미 있는 것. 본래 우리자신들이, 조건이 어떻든, 남녀노소 유식 무식 동서남북 흑인 백인 황인 할 것 없이 누구에게도 共(공)히,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부처로서의 덕. 부처로서의 생명. 무한한 생명. 무한한 덕. ←이것을 本來佛(본래불)이라고 합니다. 본래불이라 해도 좋고 본래 인이라 해도 좋고요. 그것이야 불이라고 하면 자꾸 또 한 걸음. 거리감이 생기니 본래 인. 사람이다. 그렇게 표현하는데, 그것입니다. 이것 하나 이해하자고 불교공부 하는 겁이다. 절대 어디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해지려면 장사를 잘 하세요. 절에 와서 기도한다고 부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대장경에는 기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기도불교는 중간에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불교입니다. 우리가 지금 왜 간화선인가? 正法(정법)으로 나가자 이겁니다. “불교를 正法으로 나가자.”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간화선인가? 불교에는 워낙 엉터리가 많고 거품이 많고 비불교적인 요소. 우리 필요에 의해서 만든 불교니까 그것은 부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만든 불교거든요. 만들면서 부처님한테 허가 받아서 만들었으면 몰라요. 전혀 허가도 받지 않고 만든 불교가 너무 많으니까 이 간화선 운동이 근래에 많이 일어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물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정말 내 자신을 찾자하는, 그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 보다는 어쩌면 불교의 정법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더 있지 않은가? 시대가 혼란하니까 불교마저 너무 혼란해 졌으니까 이것 좀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불교로 돌아가자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저의 나름대로 합니다. 그래서 이 대목이 본래 자기에게 있는 것. 갖가지 묘용이 또한 밖에서 오지 않는다. 어떤 뛰어난 지혜와 복덕과 자비와 신통묘용도 밖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우리들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것입니다. 기존의 부처로서의 덕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한 순간 부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한 순간 부자가 되자는 것! 육조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 마디가 그랬잖아요.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自具足(본자구족). 내 마음속에 이미 본래 모든 것이 다 갖추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신 속에 이미 다 갖추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그동안 어떻게 알았으랴. 당신도 저 밖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디 가서 빌면 한 보따리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눈을 뜨고 보니까 내 자신 속에 이미 갖추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何期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나는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구족되어 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대로 깨달으신 분은요. 한결 같습니다. 말씀이 똑 같아요. 틀리면 그것은 아니지요.
부처님께서 성도 하시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 너무 위대하고 존귀한 겁니다. 나 혼자만 이런가? 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서 그 이쁜 자식도 버리고 마누라도 버리고, 그 왕자의 지위. 얼마나 고귀한 자리입니까? 그것마저 헌신짝처럼 버리고, 왕자로서의 고귀한 금지옥엽 귀하게 자란 몸이 누구도 할 수 없는 6년의 피 나는 고행을 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는 부처가 되었다 이 겁니다. ‘저 사람들은 어떨까?’ 하고 지혜의 눈으로 모든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니, 이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성취한 지혜와 덕상과 온갖 자비와 신통묘용이 모든 사람이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추호의 차이도 없어요. 억만 분의 1의 차이도 없이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참 억울할 겁니다. 자기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것인데, 알고 보니까 전혀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냥 자빠져 있는 무지렁이 같은 인간도 똑 같이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참 억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최초로 奇哉奇哉(기재기재)라 야~!신기하고 신기하다. ←이렇게 찬탄을 했지 않습니까? 첫 마디가 그것이었습니다. 화엄경 여래 출현 품에서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결국 부처님도 화엄경에서 그렇게 표현했고 법화경에서도 그렇고, 대승경전 모두가 다 똑 같습니다. 선사들의 깨달음 속에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자 되려고 하면 그냥 장사하세요. 괜히 부처님한테 와서 달라고 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 이야기하는데 이런 소리 거침없이 해야 됩니다. 간화선 이야기하는 마당에서 한 소리를 가지고 다른데 저~기가서 그렇게 하면 그것은 또 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허허허 그렇습니다. 여기 대혜스님의 말씀에 이렇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놨습니다. 마음의 4덕을 이야기하고, 그 앞에는 마음의 動靜(동정)의 문제. 우리마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완전무결한 부처로서의 덕. 능력. 생명. 우리가 흔히 표현하듯이 無量光(무량광) 無量壽(무량수)라고 하는 것.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지극히 위대함을 아미타불이라는 그 이름을 통해서 드러냈지 않습니까? 정말 근사하지요? 경계에 쫓아가 버리면 무량광 무량수의 의미를 모르게 되는 것이고, 저기 무량수전에나 가서 자꾸 찾으려고 하고, 그 아미타불이라는 그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찾으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무량광이지, 참으로 무량수야.”이렇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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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금강경이 나오네요. 금강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無有定法(무유정법). 무엇이든지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깨달음을 성취했다. 그 다음에 그 위대한 부처님께서설법을 하신다. 이것도 어떤 고정된 것이 딱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여러분들 많이 보셨지요? 분필이 글씨 쓰는 것이지요? 잠 많이 자는 학생에게는 잠 깨우는 도구지 그것이 글씨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들은 몽당분필만 잔뜩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람을 잘 맞추기도 합니다. 자는 사람만 꼭 잘 맞춥니다. 그 사람한테는 잠 깨우는 도구지 글씨 쓰는 것이 아니라고요. 무유정법입니다.
시골에서 꿈을 안고 대학교에 진학해서 정말 꿈에 그리던 상아탑. 그 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얼마나 꿈에 부풀어서 공부합니까? 그런 꿈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책상이고 걸상이지만, 학교에 불을 지르는데 불쏘시개로도 좋아요. 데모할 때 바리케이드로도 아주 좋아요. 그런 사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유정법이라고요. “정한 법이 있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고, 정한 법이 없이 여래는 가히 설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설법한다고 해서 그 설법의 내용이라고 할까? 온갖 것이 다 어떤 고정된 것이 없는 겁니다. 그 때 그때. 그 상황, 그 상황. 그 중생들의 그 병, 그 병에 맞추어서 설했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네 가지로 분류를 하는데,처음에 世界悉檀(세계실단)그래요. 세계실단이란 세계법문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럼 뭐냐? 세속이야기 하는 겁니다. 스님들도 법문하는데 세속이야기 잘 하는 스님들이 있지요. 세속 사람들보다 세상이야기 더 잘 하는 스님들이 있어요. 아주 솔깃합니다.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이야기를요. 법문 끝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귀에 일단 솔깃한 겁니다. 爲人悉檀(위인실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인설법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하는 설법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가? 그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하는 설법이 상당이 많습니다. 부처님 법문 속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법문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그 사람이 탐욕이 많은지 분노가 많은지 어리석음이 많은지 거기에 따라서 설법해 주는 것을 위인설법이라고 그럽니다. 對治悉檀(대치실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對治는 그야말로 번뇌의 병을 고치는 겁니다. 아까 위인을 대치처럼 비슷하게 설명을 했는데, 爲人은 그야말로 사람을 위하는 것. 대치는 병을 고치는 입장입니다. 대치설법이라고 그럽니다. 세계실단. 위인실단. 대치실단. ←이것은 다 방편입니다.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 제일의 법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여기 선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것.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 고정된 것은 사실은 없지요.
만약 본체를 확정하여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 또한 도리어 옳지 않습니다. 무엇이 분명히 있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지만 존재의 바른 이해. 모든 존재의 바른 이해는 “중도로 봐야 그것을 바로 본다.”그랬습니다. 그것을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고 그럽니다. 중도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을 있다고 봐서도 안 되고, 책상을 꼭 공부하는 것으로만 봐서도 안 되고, 때로는 바리케이드로도 쓸 수 있다고 보니까 데모할 때 바리케이드로도 쓰는 겁니다. 불 지르는 데도 쓰고요. 분필을 꼭 글씨 쓰는 데만 쓴다고 보질 않고, 잠 깨우는 도구로도 쓴다고 보니까 잠 깨우는 도구로도 쓰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양면으로 이해하고 양면으로 수용할 줄 아는 견해를 중도정견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것이 다, 일체가 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 또한 도리어 옳지 않습니다. 일이 부득이 미혹함과 깨달음, 가짐과 버림 때문에 도리를 약간 說破(설파)했으나, 이는 오묘한 데 이르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방편의 말일 뿐입니다. 우리 자심의 네 가지 덕이 있었는데, 그 덕의 진정한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이렇게 봐야 됩니다. 꼭 고정불변하게 있다고만 보는 것은 바른 소견이 아니지요. 사실 본체는 또한 약간도 없습니다. 청컨대 당신은 다만 이렇듯 마음을 써서 일상생활 가운데 生死(생사)와 佛道(불도)에 집착해 있다고도 하지 말며, 생사와 불도를 버려 없는 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생사. 생사도 마찬가지. 불도도 마찬가지. ←이것을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이런 말을 이제는 알아들으시지요? 그런데 세속적인 논리로서는 말도 아닌 겁니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지...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동양에는 그런 논리가 아닌데, 서양의 학문이 들어오면서 흑백 논리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식도 거의 그런 식으로 젖어 들어서 그렇지, 우리 동양 사고에는 사실은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다 이해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리나라가 그만 서양의 思潮(사조)에 물이 들어서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 흑백 논리에 그만 사고가 전부 그렇게 젖어 들어버린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쳐야할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남자로서 남자 일도 할 수 있고, 때로는 여자 일도 할 수 있어야지요. 요즘 많이 그렇게 되어 가잖아요. 이제야 좀 철이 들었는가? 남자도 여자노릇 많이 하고, 여자도 전부 나와서 남자들이 하던 일 다 합니다. 그전같이 여자들이 직장에, 사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남자들이 일거리가 너무 많을 겁니다. 여자들이 일거리 다 뺏은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지요. 지금은 이런 소리가 우습게 들리지요?
그러나 지금부터 한 3~40년 전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밖에 나와서 사회활동 아니 했으니까 전부 남자들의 일이라고요. 그런데 꼭 남자들만 하게 돼 있나요? 여자가 해도 괜찮은 겁니다. 집일을 여자만 해야 되나요? 남자가 해도 괜찮은 겁니다. 본래 그렇게 알고 살았어야 하는데, 우리는 잘못된 사조 때문에, 그렇게 편협하고 치우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불교는 치우치고 편협 된 사고를 깨뜨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도라고 하는 것이지요. 불도다. 생사다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있다고도 하지 말고, 없다고도 하지 말라 이것이지요. 그러면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고 한 이것을 볼지언정 절대로 여기에 하는 방법 네 가지를 소개를 했는데, 화두의 네 가지 주의 점.
1.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며, 진짜 없어서 없다고 하는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없다고 하는 가? ←이렇게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라 이것이지요.
2. 언어 위에서 살 계획을 세우지 말며, 이것은 그 말을 그만 살림살이로 삼는 것. 그런 예 도 많으니까요. 거기에, 화두에 파묻히다 보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3. 입을 여는 곳을 향하여 承當(승당)하려 하지 말며,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없다.”고 하는 거기에 뭔가 깨달으려고 하지 말라. 承當이라고 것은 깨달음을 말합니다.
4. 부싯돌 치는 불과 번쩍이는 번갯불을 향하여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장자를 내리친다든지 할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에서 알려고, ‘그것이 뭔가?’ 하고 그 순간에 눈을 뜨려고 하는 그런 의도적인 생각. 자연스럽게 한 방망이 얻어맞고 눈을 뜨면 좋은데, 거기에서 의도적으로 내가 거기서 뭔가 눈을 뜨려고 하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벌써 10만 8천리로 미끄러져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마음을 개입시켜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화두 10종병이라는 것도 있고,
또 화두의 8가지 병을 열거한 데도 있습니다. 여기는 네 가지 주의 점만 소개를 했습니다. 대혜스님은 아주, 극축법문 그래요. 더 이상 나아 갈데없는 최고수준의 법문을 하시면서, 또 사이사이에 그것이 제대로 납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화두를 들라.” 그것도 “無자 화두를 들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소견은 최고의 소견을 유지 하면서 “화두를 들라.” 간단하게 표현하면 최고의 안목을 갖고 있으면서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면서도 모든 존재의 문제. 일체 것에 대해서 최고의 안목. 최고의 안목을 갖고 늘 보라는 것이 대혜스님의 지도 방법이지요.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 것을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할 것이지, 또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기다리거나 또 쉬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점점 교섭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깨달으려고 화두 드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맞아요. 깨닫기 위해서 참선하고, 깨닫기 위해서 우리 서장강의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장강의 들을 때는 제 말만 잘 새겨듣지 ‘깨달아야 할 텐데’ ‘깨달아야 할 텐데’ ←이러면 깨달음도 어디로 가 버리고, 서장강의도 어디로 가 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버립니다. 오로지 강의에 빠져 버려야 됩니다. 그럼 깨달음은 잊어버리게 된다고요. 그래야 공부가 제대로 됩니다. 화두 드는 것도 깨닫기 위해서 화두 들지만, 화두들 동안은 깨달음이고 뭐고 중생이고 부처고 다 없어져야 됩니다. 없고 오로지 話頭一念(화두일념)만 딱 되어야 그것이 정상적으로 공부가 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또 쉬기를 기다리지 말라. 이런 주의를 내리신 것입니다.
서장 대 강좌 8-2 강
인용한 내용들을 여기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인용문하고 자기의 소견의 문제. 우리 일상사와 공부. 아침에 일어나고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밥 먹고 출근하는 그런 일상사와 공부의 문제를 조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p. 141. 18.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 (2)
편지를 받아 보니, 지난 번 저의 편지를 본 뒤부터 매번 시끄러운 가운데서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항상 점검하고 있으나, 이것은 출근해서 사무를 보거나 자기 맡은 일을 하면서 사이사이에 계속 ‘내가 이거 화두를 들고 있는가? 어떤가?’ 점검한다는 것입니다. 공부에 힘을 붙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해보니까 일은 일이고 공부는 공부고, 공부가 제대로 따로 안 되는 겁니다. 다만 그 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공부를 해서 마친 자리입니다. 이것이 아주 뜻이 깊고 궁극의 말씀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 지금 사무를 본다. 운전을 한다. 아니면 호미를 들고 밭을 맨다. 철저히 그 일을 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난 자리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 것이 일상사거든요. 우리가 지금 아무 다른 생각 없이 집에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일이 있든 지간에, 다른 생각 없이 철저히 강의 잘 듣고 메모 잘 하고 글 잘 따라서 읽고, ←이렇게 해서 더 이상의 생각이 없으면 끝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100% 현현해요. 100% 내가 작용하고 있어요. 나의 100%삶이 거기에 있습니다.그런데 ‘아이고 오늘은 기대했던 것 보다 재미가 별로구만.’ 하고 다른 생각하고 있으면 공연히 시간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100% 자기의 삶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지 全機生(전기생) 全機死(전기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기생 전기사. 철저히 죽고 철저히 살라. 더 이상 틈을 주지 말라. 어떤 일에든지 더 이상 틈을 주지 말고 철저히 거기에 몰입할 때, 거기에 나의 100% 삶이 표현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되었지 더 이상 뭐가 있습니까? 더 이상 뭐가 있는가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그 사람은 틈이 생긴 것이고, 틈이 생기면 100% 삶이 아닙니다. 전기생 전기사가 아니라고요.죽을 때 재대로 못 죽어요. 죽을 때 팍 죽고, 살 때 아주 확실하게 살고요.
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공부를 해마친 자리입니다. 만약 다시 힘을 써서 점검하면, 거기 괜히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나? 어떤가?’ 그냥 공부하면 될 텐데 왜 ‘내가 지금 공부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점검하면 또한 도리어 멀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공부에 틈이 생긴 사람입니다. 그냥 몰입해서 하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점검하지 마세요. 점검하면 벌써 틈이 생겨서 놓친다고요. 저의 말을 놓쳐요. 점검하는 것이 공부 잘하는 것 같지요? 천만입니다. 점검할 겨를도 없어야 됩니다. 점검할 생각이 전혀 안 떠오르고 그냥 몰입해버리면, 그 사람은 아주 철저히 공부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좋은 말이 있습니다. 옛날 魏府(위부)의 老華嚴(노화엄)이. 회동선사인데위부 사람이고, 화엄경을 가르치다가 늦게 흥화존장 스님을 참배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화엄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노화엄이라고 합니다. 노화엄이 말하시기를 “불법이 일상 생활하는 곳과 行住坐臥(행주좌와)하는 곳과 차 마시고 법 먹는 곳과 말로 서로 묻는 곳과 작용하는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밑줄 그으는 소리가 왜 안 납니까? 밑줄 그을만하고 마는... 하하하 불법이 일상 생활하는 곳과 행주좌와하는 곳과 차 마시고 법 먹는 곳과 말로 서로 묻는 곳과 작용하는 곳에 있다. ←여기에 하는 곳에 있다. 라고 이렇게 표현은 했는데 이것이 조금 표현이 덜 됐습니다. “묻고 작용하는 그 것이다.” 묻고 작용하는 그 곳에 있다 가 아니고, 일상생활 하는 그것이다. 행주좌와 하는 그것이다. 법 먹는 그것이다. 말로 서로 묻고 작용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하세요. 이것이 더 직접적입니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이것이 불법인가?’
‘이것이 내가 마음을 100% 다 쓰는 일인가?’ ←이렇게 마음을 틈을 주면 도리어 옳지 않게 됩니다. 정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우리가 화장실가고 식사하고 누워 자고, 손님 오면 접대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피할 수 없는 것 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승속을 막론하고, 선방에 있으나 시중에서 장사를 하나 이 일은 똑 같습니다. 기본적인 이 일은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한다고 한 것이 도가 뭐냐?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 일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 그 일 아니하는 사람 있으면 한 번 나와 보라고요. 없습니다. 부처고 조사고간에 없습니다. 어느 부처 어느 조사도 그 일은 다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이 바로 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절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점검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공부 이 정도면 오늘 도 끝났습니다.
조사가 이르기를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이것도 역시 그냥 하면 하지, ‘서장, 이것이 불법을 제대로 표현한 것인가? 어떤가?’ 이런 사이에 뭔가 분별심이 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비어지고 밝아 저절로 비친다.”고 했습니다. 虛明自照(허명자조)한다. 신심명에 있는 말인데 참 좋지요? 허명자조 한다. 환하게 그냥 있는 대로 그대로 보는 겁니다. 안경에 색칠한 선글라스가 아니라 투명한 안경으로모든 사물과 사건을 그대로 보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붉은색은 붉게 보고, 푸른색은 푸르게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허명자조입니다.
모든 이치를 달리 보지 않고 이치대로 꿰뚫어 보는 것이지요. 내 욕심이 개재되니까 이것을 어떻게 비꼬아 가지고, 틀어가지고, 분재하는 사람들처럼 그냥 잘 자라게 놔두면 좋을 텐데 나무를 공연히 캐다가 막 그냥 철사로 얽어서 한 5~6년쯤 지나면 그 얽어놓은 대로, 비꼬아진 대로 굳어지거든요.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정상적으로 살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뭐 이상하게 뭘 한 번 해볼까하는 그런 마음으로 불교에 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실지로 그래요. 그러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비꼬아지는 것입니다.
방거사가 나왔네요. 또 방거사가 말하기를 “일상사가 특별한 것이 없어서 오직 내 스스로 짝하여 어울리도다! 일상사가 그대로 도라는 말이지요. 일체에 가지고 버림이 없고, 곳곳에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렇게 가질 것이 많고 버릴 것이 많은지, 일일이 만나는 족족 ‘저 놈은 미운 놈.’ 고개 돌리고, ‘저 사람은 반가운 사람.’ ‘이것은 나한테 이로운 것.’ ‘이것은 나한테 해로운 것.’ 끊임없이 저울로 달고 취사선택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저울로 달고 취사선택 하는 것이 중생놀음입니다. 중생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냥 그대로 좀 봐 주면 좋은데...일체에 가지고 버림이 없고, 곳곳에 어긋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누가 이름 하였는가? 옳다 그르다하는 것을 누가 이름 했는가? 언덕과 산이 한 점 티끌에 끊어졌도다! 이것은 번역을 옳고 그름을 누가 이름 했는가? ←이것 보다는 밑에 원문 볼까요? 원문 봅시다. 중간 단락.
祖師云分別不生(조사운분별불생)하면 虛明自照(허명자조)라하며 又龐居士(우방거사)가 말하기를 日用事無別(일용사무별)이라 일용사가 별것이 없다. 唯吾自偶諧(유오자우해)로다 오직 내 스스로 짝해서 그대로 살아간다. 頭頭非取捨(두두비취사)요 낱낱이 취하고 버릴 것이 없고, 處處勿張乖(처처물장괴)니라 곳곳에서 맞거나 어긋나는 것이 없다. 朱紫(주자)를 誰爲號(수위호)오 ←이 말이거든요. 朱는 좀 낮은 벼슬. 紫는 좀 높은 벼슬입니다. 허리띠 색깔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장관. 차관 ←이렇게 알면 됩니다. 장관이니 차관이니 그것을 누가 이름 했는가? 그냥 임명장을, 장관임명장 줬으니까 장관이고, 차관임명장 줬으니까 차관입니다. 그 사람이 장관의 씨가 따로 있나요?차관의 씨가 따로 있나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丘山(구산)이 絶點埃(절점애)입니다. 큰 산 작은 산. 작은 산 큰 산이 絶點埃라. 전부 먼지 하나하나가 쌓여서 크게 쌓이면 큰 산 되고, 작게 쌓이면 작은 언덕이 되는 것이지요. 다 먼지입니다. 근본은 먼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못 보기 시작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길을 가다가 비석을 잘못보고 도둑놈인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 강탈하는 도둑놈인줄 알고는 냅다 도망가는 겁니다. 도망가다가 어두운 길이니까 자빠지고 넘어지고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다리도 부러지고 팔도 부러집니다. 만약에 환하게 밝은 길이면 지나가다가 비석이 있으면 누구 비석인가 가서 보자하고, 가서 잠깐 쉬기도 하고 읽어도 보고 누군가 알아도 보고 ‘아, 이 사람 우리하고 종씨네’ 이렇게도 이야기가 나올 수가 있고 얼마나 그것이 좋습니까? 그런데 어두우니까 그 좋은 비석. 거기서 쉬어 가야할 그 비석의 자리가 도둑놈이 서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가다가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물과 사건을 제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잘못 보는 관계로, 잘못 보는 관계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리 상으로 遍計所執性(변계소집성)이다. 依他起性(의타기성)이다. 이런 어려운 말을 씁니다만, 뱀도 그렇잖아요? 짚으로 밧줄을 꼬았는데 한 동가리가 긴 것이 길에 있거든요. 어두운 데서 보니까 큰 뱀인 줄 알고, 알고 냅다 도망가는 겁니다. 그것은 뱀도 아니고 밧줄도 아니고 그냥 짚입니다. 근본은 짚이라고요. 丘山(구산)이 絶點埃(절점애)입니다. 큰 산 작은 산이 전부 한 점의 먼지가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고, 짚 하나하나가 쌓여서 밧줄이 되고요. 그 밧줄을 우리가 잘못 보면 뱀으로 보고요. 그래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들로 됐다 이 말입니다.
神通並妙用(신통병묘용)이여 運水及搬柴(운수급반시)라 아~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말, 이거 10자만 외우세요. 神通並妙用이여, 신통묘용이 무엇인가?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켜는 것이다. 번역 아주 근사하게 했네요.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켜는 그것이 신통묘용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합니다.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켜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한다고요. 그것이 신통입니다. 그것이 신통묘용이라고요. 리모콘 착 누르면 영화가 착 펼쳐지지요? 탁 눌러버리면 또 탁 꺼지지요? 얼마나 신통묘용입니까?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켤 줄 아는 그 사실이 신통묘용입니다. 기상천외한 옛날에 유리겔라 같이 그렇게 사기 치는 그런 이상한 것을 생각하고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적지 않습니다.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라고 금강경에서 그랬잖아요? 일체법은 뭡니까? 일체법의 제일 큰 항목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제일 큰 항목입니다. 우리 살림살이 그것밖에 더 있나요? 남 모함 하는 것. 자기 허물은 은폐하는 것. ←이런 것이일체법입니다. 제일 큰 항목입니다. 우리 살림살이 그것이라고요.그런데 뭐라고요? 皆是佛法이다 그랬어요. 그것이 도다 그랬어요. 諸法無行經(제법무행경)이라고 영명연수선사가 인용한 受菩薩戒法序(수보살계법서)라고 하는 거기에 보면 야~ 탐 진 치 삼독이 즉시 도니라 이런 차원 높은 소리를 했습니다. 어떤 선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금강경을 좀 더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고하는 것을 좀 더 부연하면, 탐 진 치 삼독이 다 불법이니라. 그렇게 주해를 달 수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원문을 갖다놓고 제법무행경을 갖다 주해를 달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가 좀 되는 겁니다. 일체법이라는 제일 큰 항목들이 그것입니다.물론 자질구레한 항목들도 많지만,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번뇌가 일체법입니다. 그런 탐 진 치 삼독의 번뇌로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실. 우리가 번뇌를 없앤다. 없앤다하고 그것을 잠재워야 된다. 떠나야 된다. 떠난 사람 누구 있으면 한번 나와 보세요. 그것이 우리 살림살이라고요.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기 차원 낮은 아주 저급한 불교에서는 그것을 떠나야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전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그 동안 불교공부 하면서 그런 것을 없애야 된다고. 어떻게 하더라도 탐 진 치 삼독을 버려야 된다고, 8만4천 번뇌를 제거해야 된다는 소리 많이 들었지요? 아주 저급한 유치원 불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간화선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금강경만 해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요.
아 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고 했잖아요? 일체법이 뭡니까? 탐 진 치 삼독이 제일 큰 불법입니다. 그리고 諸法無行經에서도 탐 진 치 삼독이 즉시 도다. 그것이 그대로 불도라고 그랬습니다. 아~ 참 대단 하지요? 이제 마음 놓고 사세요. 정말입니다. 마음 놓고 사세요. 정말 이런 이치가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마음 놓고 사는 사람은 크게 탐 진 치 삼독 부리지도 않습니다. 혹 한 번씩 조금씩 부리지요.그러다가 보면 어느 사이엔가 탐 진 치 삼독이 다 사라집니다. 그것을 노리고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절대 그것을 목표로 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더 왕성해도 상관없습니다. 줄어들어도 상관없고요. 줄어들고 왕성하고에 초점을 맞추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 하다보면 줄어든다 이겁니다. 가벼워집니다. 아주 가뿐해집니다. 뭘 그렇게 욕심 부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쯤 된. 소견이 그쯤 된 사람은 그렇게 욕심 부릴 일이 없습니다.
“평상심이 도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평상심이 뭡니까? 좋은 것 있으면 갖고 싶은 것이 우리 평상심 아닙니까? 평상에 늘 그러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의 그릇이 된 사람이 딱 오면 아주 애착을 합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저 놈을 잘 가르쳐서 도를 깨닫도록 해야지.’ 이 얼마나 큰 욕심입니까? 우리가 백화점 진열장 앞을 지나 가다가 마음에 든 옷이 착 걸려있다면 몇 번 보는 듯 했는데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물건 앞에 서 있습니다. 자기도 언제 들어갔는지 몰라요. 그것이 인간사입니다. 그것이 절대 잘못 된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부처는 그럴 줄 알아야 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냥 홀딱 반해서 정신 다 잃고, 그것이 더 심하면 돈도 없이 들고 뛰는 겁니다. 허허허허허허 아니면 카드를 가지고 그냥 막 긁는 겁니다.
그것 인간사 아닙니까? 우리가 각자 좋아하고 취미가 달라서 그래요. 도인들은 법기가 오면 그걸 그냥 자기 사람 만들고, 어떻게 하더라도 저놈을 도를 깨우쳐서 법을 오래오래 전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안달합니다. 밤잠 못잡니다. 그것 사람 만들려고... 백화점 진열대 보고 자기도 모르게 들어가서 돈도 없는데 그 물건을 덥석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지 뭡니까? 그것이 뭐가 다릅니까? 저는 그전에 蘭(난)을 좋아해서 그때 서울에 잠깐 있을 때입니다. 종로 서점엔가 거기 가서 난 책을 봤어요. 한난만 쭉 해놓은 책이 있습니다. 그때는 사진 기술이 별로일 때인데도 그래도 일본에서 들어온 책이어서 상당히 표현이 잘 되었더라고요. 그때 돈이 없어서 못 샀는데 그 날 저녁에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야~,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다. 그 이튿날 어떻게, 어떻게 구해서 가서 당장 샀지요. 그렇게 된다니까요. 그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각자 좋아하는 데로의 일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놓고 다 이야기 합시다. 다 그런 것입니다. 거기서 거기라고요. 그러니까 탐 진 치 삼독이 즉시 도다.
又先聖(우선성)이 云(운) 但有心分別計較(단유심분별계교)하면 다만 마음을 두어서 분별하고 계교할 것 같으면, 自心顯量者實皆是夢(자심현량자실개시몽)이라 내 마음에 나타난 것. 顯量이라고 합니다. 내 마음에 나타난 것이 다 꿈이다 이겁니다. 분별 계교할 것 같으면 거기에 개입 시켜서 이래저래 마음 쓰면, 이것을 이럴까? 저럴까? 切記取(절기취)어다 간절히 기억해서 취할지어다. 기억하고 기억할지어다.
p.143
피할 수 없을 때에 마음을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이것이우리 일상생활에서이지요.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하라는 말입니다. 식사 하면 바로 식사하고, 잠자면 딱 잠들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먹고 자고 하는 일이...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때에 일체가 나타나 이루어질 것입니다. 철저히 죽고 철저히 살고 철저히 자고 철저히 먹고, 그냥 먹으면 먹는 일에 그냥 몰두하고, 자면 자는 일에 그냥 몰두하고, 직장에서 자기 맡은 일 하면 맡은 일에 몰두하고...또한 영리함을 아는 것도 쓰지 말며, 둔함을 아는 것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아, 이거 공부에 둔한가? 영리한가?’ ‘왜 이렇게 나는 둔한가?’ ←이런 생각도 하지 말라. 그 생각하는 사이에 공부 좀 더 하세요. 자기 점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냥 하는 겁니다. 자기 생긴 대로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지, ‘내 아이큐가 얼마나 되는가? 가서 한 번 알아볼까?’ ‘내 공부를 이렇게 하면 되는가? 어떤가?’그런 시간에 공부 더 하시라고요. 모두 그 영리하고 둔한 일에 관계가 없으며, 그 고요하고 어지러운 일에 관계가 없습니다. 정히 피할 수 없을 때를 만나서 갑자기 識心(식심)을 잃으면 몰두하면 이 말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뼉을 치고 크게 웃게 될 것입니다. 박장대소를 하게 되는데 그 박장대소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디에든지 몰두할 때, 몰두할 때 그것이 깨달음과 가까워지는 것이지, 대혜스님이 보기에 그래요.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냥 빠져 들어가면 될 텐데, 좀 들어가다가 그만 괜히 거기서 사량 분별을 하는 겁니다. 사량 분별을 하고 이것저것을 자꾸 저울질 하고,헤아리고, 거기에서 공부가 늦어지고 공부가 딴 길로 가더라는 말입니다.
이 일에 한 털끝만치라도 공부하여 증득함을 추구하면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움키고 만지는 것과 같아서 허공을 아무리 만져보세요.허공을 만져지는가요?이럴 때 한번 손들어서 만져보세요. 공부하여 증득하는 것을 추구하면 허공을 손으로 만지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그럼 어떻게요? 다만 더욱 수고로울 뿐이다. 피로하기만 하지요. 안 만져지면 자꾸 만지려고 하니까 피로만 할 뿐이지요.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라니까요.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지 공부하여 증득함을 추구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주 최 상승 법문입니다. 왜 간화선인가? 간화선을 어떻게 잘 하라고, 물론 그런 말도 여기 보면 있습니다. 화두 잘 들라고 하는 그런 말도 있지만, 화두 들고 말고 하는 그런 차원 넘어서 이것은 최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깨달으려고 하면 괜히 피로할 뿐이다 이겁니다.
응접할 때에는 다만 응접하고, 靜坐(정좌)가 필요하면 다만 정좌하되 앉을 때에는 앉는 것에 집착하여 구경을 삼지 말아야 합니다. 앉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을 해서, 제가 수십 번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결과부좌 하면 더 근사한가 싶어서 되지도 않는 결과부좌 하다가 관절염만 앓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체질에는 반가부좌가 맞으니까 꼭 반가부좌만 하지 결과부좌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인도사람 체질에 결과부좌가 맞는 겁니다. 참선 좀 배웠다고 결과부좌 틀고 앉으면 공부 잘 되느냐? 그러면 선요에 고봉스님 같은 이는 3년 동안 선방에 들어가서 한 번도 앉은 적이 없습니다. 화장실 가고 식사 하는 동안 잠깐 앉았습니다. 그 외에는 3년 동안 한 번도 앉은 적이 없다고요. 계속 돌아다녀요. 그러면 그 사람은 공부 하나도 못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공부 제일 잘한 사람입니다. 앉는 것 하고 관계없는데 앉는 것만 그렇게 고집한다니까요. 그것에 그렇게 어떤 가치부여를 할 것이 아니라, ‘아, 앉는 것도 때로는 행 주 좌 와 ←이런 여러 가지 모습 중에 한 방편이다.’ 그렇게 알면 되는 겁니다. 우리 몸뚱이를 어떻게든 둬야하니까요. 세워 놓든지 눕혀 놓든지 걸어 다니게 하든지 앉혀 놓든지 뭔가 해야 하니까요. 그 중에 앉는 것이 제일 쉬우니까 그래서 앉는다는 얘기가 나왔지, 여기서 지적 했듯이 앉는 것을 究竟(구경)을 삼으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릇된 스승 무리들이 많이 黙照禪(묵조선)을 究竟法(구경법)으로 삼아서 후진들을 의심하고 그릇되게 하므로, 후진들을 크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힘써 꾸짖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말법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대혜스님께서 이런 묵조선과 간화선의 관계에 대해서 하신 말이지만, 이것은요.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불자로서 불법이 정말 얼마나 많이 펼쳐져야 하고, 또 얼마나 정법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전해져야 하는가 하는 이런 우리들의 문제를 이끌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제가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출가한 사람이, 그리고 도 닦는다는 사람이, 남하고 원수 맺으면 되겠습니까?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혜스님 같은 도인도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고 욕하고,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은 바로 잡아야 되겠다. 이렇게까지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말법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 그랬습니다. 교화의 정신입니다. 정법구현을 위해서, 정법선양을 위해서 이런 강력한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표현입니다.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얼마나 절박한 심정을 하는가? 바다에서 배가 난파가 되었다면 같이 타고 가던 사람들이 다 물에 빠져 죽었어요. 자기도 지금 겨우겨우 바다에 떠다니고 있는데 옆에 보니까 송장이 하나 떴어요. 송장을 보니까 자기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그 송장이라도 올라타고 저 육지를 향해서 헤엄쳐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사니까요. 그것이 우리의 상식적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평소에 송장을 보면 저만치 도망가는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그런 송장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송장을 올라타고 헤엄쳐서 육지에 가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이와 같은 절박한 마음으로 중생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전법활동을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은 죄수가 이제 감옥을 벗어나야 살지, 안 그러면 내일 모레면 곧 죽을 겁니다. 옛날에 감옥에는 화장실이 도망갈 수 있습니다. 똥통 속으로 들어가서 한참동안 똥통 속으로 잠수해서 헤엄쳐서 저쪽 공기통으로 나가고 도망을 가서라도 살아야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 ←이러한 마음으로 중생제도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전법하고 포교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대혜스님은 자기하고 잘 아는 사람들과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얘기가 그 얘기하고 같은 겁니다.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고 정법선양을 하겠다고 그럽니다. 正法宣揚(정법선양).
이 시대에 불교가 어떻게 보면 자꾸 위축되어가고, 또 그것은 우리 불자들이 정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삿된 법. 유사불교. 가짜불교. 거품불교. 이런 데에 너무 많이 정신을 빼앗기고, 모르니까요. 그것이 불교인양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 우리가 처해 사는데, 이것을 좀 제대로 아는 분들이, 공부하신 분들이, 또 서장 강의를 들으신 분들이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정말 똥통 속으로 저만치 헤엄쳐서 빠져나가서라도 이 생명하나 건져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전법활동하고 포교활동을 해야 됩니다. 반드시 정법으로 해야 됩니다. 사법 가지고 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송장을 타고서라도 헤엄쳐 나가서 살아야 되겠다는 이런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정법을 전해야 됩니다. 경전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보살의 정법선양에 대한 마음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서장 대 강좌 8 - 3 강
서장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그 사람의 근기와 불교적 수준에 맞추어서 대혜스님이 답장을 썼기 때문에, 앞에 진소경에게 보낸 편지. 앞에서 공부한 그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차원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여기 조대제 도부에게 답한 편지는 보면 우리가 발심은 무엇인가? 이런 것도 이야기를 했고, 信心(신심). 가장 기본이 되는 신심이 아주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신심이야기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신심이니 뭐니 하는 이런 차원이 아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분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또 이 가운데 신심이 좀 부족하면 이런 것을 가지고 보충 할 수도 있기는 있습니다.
p. 145. 19. 조대제 도부에게 답함
보인 편지를 일일이 다 이해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모두 부처가 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은 무슨 마음인가 하니 세상 번뇌 망상의 마음이 아니고 위없는 큰 菩提(보리)를 발한 마음이다. 보리심을 발한 마음입니다. 보리심을 발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 마음입니다. 만약 이 마음이 있으면 성불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한 번 마음 냈으니까 그것은 씨앗을 심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을 낸 사람은 다 성불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니, 길이 일체 善法(선법)을 기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욕의 흐름에서 벗어나 위없는 열반의 도를 열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화엄경에 있는 말인데, 신심 하면 의례히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信爲道元功德母(신위도원공덕모) 長養一切諸善法(장양일체제선법). 그렇지요. 우리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이 자리에 모였고, 또 이런 시간을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새록새록 어떤 先知(선지)가 되었든,지혜가 되었든, 아니면 신심이 되었든, 불교에 단순한 관심사가 되었든 간에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야~, 불교 괜찮다.’ ‘아~, 선불교가 특히 아주 괜찮은데’ 이런 마음이 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그런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잘 한다고요. 그래서 어떤 데는 “믿음은 大地(대지)와 같다.” 곧 봄이 오지요? 대지에서 온갖 식물이 싹을 틔우고 자라지 않습니까? “믿음은 대지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지금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이런 시간을 마련했고, 이런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 모르는 사이에 저 아뢰야식 속에서 아주 신선한 정법의 새싹이 자라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 참, 믿음의 힘은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아함경 같은 것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부처님이 갠지스 강 동쪽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갠지스 강 건너 저 서쪽 마을에 어떤 신심 있는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하던 일을 마치고 얼른 뛰어와서 부처님설법을 듣고 싶은 그런 마음에서 막 그냥 뛰어온 겁니다. 뛰어와서 강을 건너려고 하니까 강이 상당히 깊어 보이거든요. 강가에 있는 사람은 별로 신심이 없는지 그냥 고기만 잡고 있는 겁니다. “제가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어디로 건너면 얕은 곳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여기가 제일 얕은 곳”이라고 “아마 무릎 정도 밖에 물이 안 찰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저 부처님한테 가서 설법 듣고자 하는 그 욕심하나로, 그 신심하나로 그냥 다리 걷고 물위로 텀벙텀벙 건너가는 겁니다. 물위로 건너가니까 저 강 건너 갠지스 강가에서 부처님이 자주 설법하셨잖아요. 경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부처님이 한창 열을 올려서 설법하시는데, 젊은 청년하나가 갠지스 강 그 깊은 물. 그 깊은 물을 척척척 걸어 올라오는 겁니다. 부처님 설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 설법에 아무 관심 없어요. 그 청년의 신통에 관심이 다 가서 부처님 설법이고 뭐고 전부 거기를 보고 저것 보라고. 저것 보라고 저런 사람이 있다고. 저 갠지스 강 깊은 물을 그냥 사정 없이 건너오는 사람이 있다고. 이래서 부처님도 할 수없이 설법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부처님도 설법을 중단하고,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금방 건너와서는 부처님한테 예배하고 부처님 설법 들으려고 앉는 겁니다. 모두 궁금할 것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무슨 신통력으로 그 깊은 갠지스 강을 그렇게 건너왔느냐? 부처님이 대중들의 마음을 이해시키려고. 부처님이야 다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대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물었지요. 그렇게 물으니까 “부처님이 여기서 설법 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얼른 와서 설법을 들어야 되겠다 해서 강가에 고기 잡는 사람에게 물으니 얕은 곳을 가리켜 줍디다. 그래서 얕은 곳이라고 하기에 그냥 다리만 걷고 이렇게 건너왔을 뿐이지, 저는 아무런 신통도 없고 그저 농촌에서 농사짓는 청년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부처님도 설법이 바닥이 났는데 ㅎㅎㅎ 잘 됐다 싶어 가지고 하하하 “보라 믿음의 힘은 그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그 믿음과 그 신심. 그리고 법문을 듣고자 하는 환희심. 그것 하나로 단순하게 얕은 강이라고 하니까 그냥 얕다고 생각하고 건너왔을 뿐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도 생긴다.”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신심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아주 차원 높은 공부하다가 다시 유치원으로 떨어져 가지고... 하하하허허허 유치원생에게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제대로 다지지 못하신 분들은 또 다질 기회도 되는 것이지요. 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팡이와 같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잘 짚고 다니는데 상당히 의지가 됩니다. 지팡이 없으면 길을 못 나설 정도로 상당히 의지가 됩니다. 여러분! 불교에 대한 믿음! 부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을 신심이라고 하지요? 소박한 신심도 좋습니다. 선불교적인 그런 차원 높은 것을 두고도 아주 소박한 신심이라 하더라도 신심. 그것 하나 없으면요? 인생 허전합니다. 정말 허전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소박한 믿음이라 하더라도 믿음하나 가지고, 법당에 있는 부처님. 나무로 깎았든지 돌로 했던지 그것은 나는 알바 없고, 내가 다니는 원찰. 그 원찰. 그 원불. 나는 그 부처님께 가서 예배하고, 친견하고 거기 가서 절하고 기도하고 그런 신심도 참 좋은 겁니다. 그런 신심이라도 우리가 신심을 가지고 있을 때 나를 지탱시켜주고 붙들어주고, 몸 아픈 사람들의 지팡이와 같은 역할을 얼마든지 한다는 것을 절대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도 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길이 일체 善法(선법)을 기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욕의 흐름에서 벗어나 위없는 열반의 도를 열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믿음은 능히 智慧功德(지혜공덕)을 더하고 자라게 하며, 믿음은 능히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원찰. 원불에게 가서 소박한 신심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그 마음이라도 끝내는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하지요. 우리가 아주 차원 높은 그야말로 불교 중에서도 아주 극 명품 불교를 공부 하더라도 그래도 또 한편 이런 소박한 신심을 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선불교는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그 소리를 식은 죽 먹듯이 하고 듣는데, 그런 면이 있는가하면 그러나 법당에 나무로 깎아놓은 저 부처님이 나에게는 진짜부처님이야. ←이런 소박한 마음으로 가서 기도하고 절하는 그런 믿음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兩邊(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하는 그런 고차원적인데 치우치지도 않고, 또 소박한, 단순한 시골 할머니들이나 믿을 수 있는 그런 믿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불무중생.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는 고차원적인 안목도 또한 가지고 있고, 두 가지를 다 수용하면서 두 가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고 하지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 수용할 줄 아는 마음. 선불교 공부 좀 했다고, 서장 강의 몇 번 다녔다고 괜히 목에 힘주고, 단순한 불교 신앙인들을 무시하거나 낮추어 볼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언젠가 뭐라고요? 여래의 경지에 오른다. 보인 편지에 둔한 사람이 능히 철저히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마음 밭에 부처 종자나 심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비록 淺近(천근)하나 또한 深遠(심원)하니 다만 긍정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서로 속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이고, 나는 참선할 근기가 못돼, 후원에 가서 하소임이나 살고, 공양주나 살고 채공이나 살고 공부하는 스님들 뒷바라지나 하고, 이렇게 해서 복이나 짓고, 그래서 어느 날 근기가 성숙하면 그때 나도 참선도 하고 경전도 보지, 내 둔한 머리에 복 짓는 것만으로도 오감하다.” 이런 마음 가진 스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다 보면 벽에 부딪치거든요. 누구나 벽에 부딪칩니다. 벽에 부딪치면 이런 생각을 내는 겁니다. 여기 나와 있는 대로요. 이 사람이 아마 그런 편지를 대혜스님에게 보냈나 봐요. 선근의 종자나 심어서 그런 말을 했지요? 차라리 마음 밭에 부처 종자나 심겠다고, 佛種(불종)을심겠다고 그랬습니다. 부처 종자. 그냥 평범한 불자 노릇이나 해서 인연이나 맺어놓자. 절대 그런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淺近(천근)하다는 말은 아주 얕은 소리 같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深遠(심원)하다. 상당히 높은 차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은 저기 유치원생들에게나 해당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미뤄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여기서, 대혜스님이 뭐라고 했든지 간에, 뭐라고요? 마음 낸 사람은 다 부처가 된다. 알고 보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면, “이미 다 부처다.”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일. ←이것만이 남아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이미 수 억만금이 나가는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손으로 가서 만지느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확인 하느냐? 못하느냐? ←이것만 남아있습니다. 가지고 있긴 있습니다. 확인 아니 해도 내 주머니에 있습니다. 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절대 얕은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좀 건방져야 됩니다. 좀 건방지고 좀 넘쳐야 됩니다. 불법에는 좀 건방지고 좀 넘치고 소견이 좀 대단한 것 같이 하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절대 자기 자신을 비하한다든지, “나는 근기가 없다.” “소견이 좁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제일 금물로 칩니다. 왜냐? 箇箇(개개)가 다 丈夫(장부)인데요. 不向如來行處行(불향여래행처행)입니다. 부처가 가는 곳을 나는 안 간다 이겁니다. 부처가 가는 곳을 가는 것만도 사실은 장부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가는 곳을 나는 안 간다 이겁니다. 그것은 그 부처가 가는 길이지, 내 부처는 내 갈 길이 따로 있다 이것이지요. 그렇게 표현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되어야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집에서나 사회에서나 아무리 천시 받고 제대로 취급을 못 받아도 그것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존재입니다. 최후에 설한 경전이 법화경이라고 하는데, 법화경에는 500제자 수기 품이 있고 그냥 수기 품이 있고, 유학 무학 인지 품이 있고, 수기만을 전문으로 다룬 3개의 품이 있고 그 외의 품에서도 수기를 많이 했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열반을 앞두고 유언삼아 물려줘야할 일. 최후로 가르쳐줘야할 일이 수기입니다. 그 수기의 내용은 거기에 보면 “너희들이 언제 어느 때, 무슨 이름으로 어느 나라에서 부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글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뜻은 “너희들은 이미 부처다.” 부처라는 내용입니다. 왜 그런가하니 거기에 방편 품에 보면 부처님 앞에 와서 절 한번 하는 사람도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무 불” ←이렇게 한 마디 하는 사람도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절하기 싫어서 부처님 앞에 와서 손 한번 번쩍 들어요. 친구 만나서 하듯이 손 한번 번쩍 든 사람도 개이성불도입니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어린아이가 저 모래사장에 가서 물이 없으니까 오줌을 싸서 모래를 뭉쳐서 불상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이 불상이라고 하고, 거기에 대고 절을 하는 그런 장난을 하는 아이도 개이성불도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부처되는 인연이 될 것이며, 무슨 부처되는 공덕이 되겠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비하면 부처 천만 번 되고도 남지요. 안 그러겠습니까? 그럼 그 속뜻은 뭐냐? 이겁니다. 이미 다 부처입니다. 그렇게 아니해도 부처입니다. 부처를 비방해도 부처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요. 정말 빙산의 일각. 조금 억만 분의 1을 알고 있을까 말까입니다. 불교 공부를 함으로 해서 자꾸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는 폭이 넓어져가고, 깊이가 깊어져 가는 겁니다. 이 일입니다. 불교 공부는 그것입니다. 이미 완전무결한 존재인데 이 완전무결한 사실을 폭을 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이해해가는 일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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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도를 배우는 선비가 가끔 느리게 할 곳은 급하게 하고 이것도 중요한 말입니다.급하게 할 곳은 도리어 놓아 느리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知所先後(지소선후)면 則近道矣(즉근도의)니라. 유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아는 사람은 도에 가깝다그랬습니다. 앞뒤를 잘못 계산해서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둑에도 보면 똑 같은 수인데, 수순 틀려버리면 그만 져버린다고요. 결국 그 자리에 놓는데 순서가 있습니다. 어디에 먼저 놔야 되느냐? 수순 따라서 승패가 갈라진다고요. 그와 같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평범한 삶을 사는데도 정말 먼저 해야 할 것.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 이것을 늘 우리가, 취사선택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취사선택의 삶을 하루 종일 살고, 1년 내내 살고, 평생 내내 취사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렇듯이 정말 한 시간의 삶도, 하루의 삶도 무엇이 먼저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것을 냉정하게 저울질해서 취사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어디에 가면 나에게 진정 이로울 일인가?
나에게 진정 이로울 일인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법화경 서두에 보면 부처님이 덕이 높은 많은 제자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덕이 뭐가 그렇게 덕이 높으냐? 그 표현 중에 逮得己利(체득기리)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로울 것을 제대로 챙길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 자기에게 이로울 것을 제대로 챙길 줄 아는 제자들이다. 제자들의 덕을 표현하는데 체득기리. 진정 자기에게 이로울 것이 무엇인줄 아는 사람들. 그것이 아라한들의 덕을 찬탄하는데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느리게 해야 할 곳을 급하게 하고 급하게 해야 할 곳을 도리어 놓아 느리게 합니다.방거사가 이르기를 “하루아침에 뱀이 잠방이에 들어가면 시험 삼아 종사에게 어떤 시절인가 물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無常殺鬼(무상살귀)입니다. 죽음이 가까워오는데 이 시절이 무슨 시절이냐? 죽음이 코앞에 당도 했는데 지금 무슨 시절이냐? 이겁니다. 그렇게 빈둥빈둥 놀고, 그대로 탐욕 부리고, 탐 진 치 삼독이 도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평소에 살아온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야 옳으냐? 한번 정신 차리고 정말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나에게 진정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하는가? 이런 것을 좀 깨우쳐주는 말씀이지요.
어제 일도 오늘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전생 일을 어찌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내생에 공부하지...’ 천만에요. 어제 일도 모르는데 내생에 사람이 될지 불교를 만날지 못 만날지 그것을 어떻게 보장합니까? 아무도 보장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조금이라도 눈이 열렸고 귀가 열려서 조금이라도 듣고 보고 할 때, 이럴 때 바짝 좀 공부하라는 겁니다. 더 이상 보장 안 됩니다. 내일 공부 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보장 안 됩니다. ‘아이, 내일 왜 보장이 안 되어있어?’ 사실은 거의 오늘과 별 다를 바는 없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보장은 못합니다.
결코 금생에 공부하여 투철하고자 한다면, 부처[佛陀]도 의심하지 말고 祖師(조사)도 의심하지 말고, 삶[生]도 의심하지 말고 죽음[死]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더 이상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 이겁니다. 생사 문제다. 부처다. 중생이다. 조사다 이런 것에 휘둘리지 말고, 부처니 조사에 삶과 죽음에도 휘둘리지 말고 뭐라고요? 모름지기 결정적인 믿음을 가지며, 결정적인 뜻을 갖추어서 생각 생각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如救頭燃(여구두연)이라고 처음에 절에 오면 외우는 글이 있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빠른데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머리에 불이 붙었다면 제일 급한 일 아닙니까? 제일 급한 일입니다. 제일 급한 일이기 때문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그러한 마음으로 하라”고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방에 어린아이를 눕혀놓고 부엌에서 밥을 짓습니다. 옛날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불을 한 곳에만 떼는 것이 아닙니다. 국 끓이는 불 따로 떼고 밥하는 불 따로 떼고 찌개 하는 불 따로 떼고, 옆에는 삼나무가 잔뜩 쌓여있고, 갑자기 어린아이가 “아~앙”하고 방에서 우는 겁니다. 그런데 불을 떼다가, 불이 밖으로 나오려고 그래요. 조금만 놓치면 금방 불이 탑니다. 삼나무에 불이 옮겨 붙는다고요. 그래도 어린아이가 울면 거기로 쫓아갑니다. 불이 나든 말든, 밥이야 넘든 말든, 밥이야 타든 말든 우는 어린아이한테 쫓아갑니다. 우리가 그 만치 도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울면 진리는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는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우리가 진리의 어머니를 향해서 진리의 어머니를 찾느라고 한 번도 울어보지 못 했습니다. 울면 금방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하고 무슨 관광하듯이 슬슬 설렁설렁 그렇게 우리가 불교에 임하니까 이것이 알듯 말듯 하면서도 그쯤알고 마는 겁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울음을 터트릴 줄 알면... 사람 때문에 울기는 많이 울지요. 돈 때문에도 울고요. 도 때문에 한 번 울어보세요. 도가 금방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라고 하는 어머니가 금방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우는데 불이 나든 말든 어린아이에게로 쫓아가지, 그것 언제 쳐다볼 겨를이 있습니까?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장 대 강좌 8-4 강
이와 같이 공부를 해 가도 철저하지 못할 때에야 바야흐로 근성이 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둔하다 영리하다. 불법공부는요. 사회의 학문과 달라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공부 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심성이 밝은 사람. 타고난 종교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데 자꾸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종교성이 상당히 발전이 됩니다. 종교적인 성향이 아주 발전되어서 이런 것을 얼른 알아듣고 여기에 상당한 가치 부여를 하고, 다른 세속적인 가치에 별로 관심 없고, 여기에만 아주 심취해서 여기서 어떤 법희선열을 평생 맛보며 사시는 그런 분들도 많습니다.
만약 당장에 곧 말하기를 ‘나는 자질이 둔해 능히 금생에 철저하지 못하고, 부처 종자를 심어서 인연을 맺겠다.’고 한다면, 이는 가지 않으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 옳지 않습니다. 바른 말 했네요. 부처 종자를 심어서 인연이나 맺겠다. 이런 생각 하시는 분 많지요. ‘아이고 내 같은 사람이, 특히 세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면서 무슨 공부 되겠나? 그저 적당히 어떤가? 그저 구경이나 하지 인연이나 좀 맺어놓자.’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지 않으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 옳지 않습니다. 집에 가야할 판인데 가지도 않고, ‘왜 집에 도달 안 되나?’ ‘왜 집에 도달 안 되나?’ 교실에 앉아서 ‘왜 집에 안 가지나?’ ‘안 가지나?’ ←이렇게 엉터리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고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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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매번 道 믿는 사람을 위하여 점점 하루 가운데 힘 덜림을 아는 곳이 문득 부처를 배워 힘을 얻는 곳이라 말하였습니다. 공부하다보면요. 처음에는 상당히 어려워요. 그래도 자꾸자꾸 하다보면 쉬워져요. 듣는 것도 얼른얼른 알아듣고 참 쉬워진다고요. 그것이 힘이 덜리는 것입니다. 운전 처음에 배울 때는 얼마나 신경을 많이 씁니까? 옆에 아무 것도 볼 겨를이 없지요. 한 두 시간 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힘을 줬는지 팔이 뻐근합니다. 그런데 익숙해지면 볼 것 다 보고 이야기할 것 다 하고, 산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다 보고 옆에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콧노래 부르고 라디오 소리 다 들어가면서 해도 하나도 피곤하지도 않고 그런 겁니다. 힘을 얻는 곳이 힘이 덜리는 곳이고, 힘을 덜 드는 곳이 힘을 얻는 곳. 그것이 得力입니다. 여기 得力處가 生力處고 생력처가 득력처라는 말씀을 서장에서 상당히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 얻는 곳은 남이 모르며, 또한 잡아내서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요.여기 운전 잘하는 사람. 운전 못하는 사람 전혀 표시 없잖아요. 아무 표가 없는 겁니다. 그냥 자기가 체득하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혹 비행기를 운전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道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겁니다. 盧行者(노행자)가 道明上座(도명상좌)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육조스님. 노행자가 밤에 오조스님한테 법을 전수 받고, 가사와 발우떼를 가지고 도망을 갔지요? 도망을 가는데 도명상좌라고 하는 장군 출신이 제일 먼저 뛰어와서 붙잡았어요. 노행자는 겁이 나서 그 가사와 발우를 가져가려면 가져가라고 바위에다 얹어놓고 숨어있었다고요. 그랬는데도명상좌가 그것을 잡으려고 딱 생각하니까 아니거든요. 그 때부터 벌벌 떨리기 시작한 겁니다. 도저히 그것을 가져갈 일이 아닌 겁니다.
그 발우떼하고 가사 가져가서 뭐하게요. 그냥 가서 맞추면 되는데요. 승복집에 가서 사면되는데요. 그것을 가져갈 일이 아닙니다. 그 순간 그것을 깨달은 겁니다. 뭔가 전기가 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을 뺏으려왔는데 도저히 손이 가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저히 가져가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하는 말이, “내가 이 발우떼를 뺏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 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眞心반 假心반으로, 허허 진심도 섞여있고 약간 거짓도 섞여있어요. 어쨌든 그렇게 외치니까 노행자가 나왔어요. 나와서 노행자가 도명상좌에게 법을 일러주지 않습니까? 不思善 不思惡하라. 선에도 치우치지 말고 악에도 치우치지 말라. 지금 보니까 여기까지 뺏으러 온 것은 악이고, 이것은 세속적인 마음이다. 그런데 이 순간에 와서 뭔가 느끼고는 그것을 도저히 가져가지 못하는 마음은 선이다. 그래 선에도 치우치지 말고 악에도 치우치지 말라.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랬을 때 그대의 본래면목. 그대의 참 모습이 무엇일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있는 당신의 實體. 당신의 眞面目. ←이것이 무엇일까? 이런 근사한 법문을 듣고는 거기서 환히 밝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다른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이 잡으러 오니까 도명상좌도 거기서 ‘아 이분을 보호해 줘야 되겠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묻고 얼른 돌아가서 그 쫓아오는 사람들을 전부 막고, 이분이 도망갈 수 있도록 보호해 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에게 지금 일러준 이것 외에 또 다른 은밀하고 비밀한 법의 요체가 혹시 있습니까?”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그런 운명입니다. 그러니 “다른 또 일러줄 것이 없습니까? 아주 은밀한 법이 있으면 일러 주십시오.”하니까 그 다음의 대답입니다.
“네가 만약 자기 본래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은밀한 뜻이 다 너에게 있다.” 자기의 본래면목에 눈을 돌이키면 은밀하던지 비밀하던지 秘要(비요)의 창고든지 그것은 전부 “너 자신에게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말이다. 그런 법문입니다. 그런 전후 사정이 다 있는 것이지요. 은밀한 뜻이라는 것은 문득 일상에서 힘을 얻는 곳이며, 힘을 얻는 곳은 곧 문득 힘을 더는 곳입니다. 이것이 자기만이 아는. 이것은 오로지 자기 살림살이 이고, 자기 것입니다. 남이 이해해주고 알아주고 대접해주는 것 하고는 하등의 관계없는 겁니다. 공부 잘 했다고. 도통 했다고 누가 존경하고, 도통 했다고 누가 알아주고 도통 했다고 누가 돈을 갖다 주는 것 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옛날에 소산스님이라고 하는 이는 도는 아주 하늘만치 통했는데, 얼마나 박복 했던지 이름이 호가 소산입니다. 성길疏(소)자 뫼山자입니다. 부엌에 불 땔 나무도 없어서, 나무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듬성듬성 있다고 해서, 듬성듬성 있을 疏자거든요. 호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박복하고 가난하게 산 아주 훌륭한 도인도 있었어요. 그 분은 어떤 법맥이라든지 道談(도담)을 논하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데도, 물질적인 것은 인연을 짓지 못했으니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 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불교 인연해서 돈 벌려고 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러기로 하면 소산스님 같은 이는 그렇게 불 땔 나무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도하고 그것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부자가 되고 싶은 그런 秘策(비책)도 불교 안에 있기는 있는데, 지금 간화선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하하하 나중에 또 그 비책 가르쳐 달라고 뒤로 와서 만날까봐 겁납니다. 허허허
세상 티끌의 번거로운 일은 하나를 잡으면 하나를 놓아서 무궁무진합니다. 그렇지요. 세상사는 그렇지 않습니까? 무궁무진 하지요. 이것 하나 처리하고 나니 저 일이 또 터지고, 저 일을 막아 놓으니까 이쪽이 또 터지고, 인생사는 끝도 없습니다.‘그것을 다 끝내고 공부 하겠다.’ 다 끝내고 나서 중 되겠다.’ 그런 사람치고 중 된 사람 아무도 못 봤어요. 많이 있었어요. ‘아, 이 일만 끝내고’ ‘이 일만 끝내고 간다.’ 그 전에 무슨 고시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번에 내가 고시가 되던 안 되던 무조건 출가합니다.” 저한테 와서 그랬다고요. 됐는지 떨어졌는지 도대체 소식이 없어요. 하하하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겼겠지요. 그 일은 덮어놓고 또 다른 일이 생겼을 겁니다. 몇 번 왔다고요. 몇 번 와서는 사람도 괜찮아요.
고시 준비하는 사람이니까 심성도 좋고요. 괜찮은 상좌하나 들어오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대체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되고 싶을 때 그냥 돼버리는 겁니다. 그냥 돼버려야지, “이것 처리하고 저것 처리하고 하고나서 내가 시작한 것이니까, 한 10년 준비한 것이니까 이번에는 되던 안 되던 한 번 쳐보고나 들어오겠습니다.” 그래놓고는 아무 소식이 없는 겁니다. 돼서 안 오는지 안 돼서 안 오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네 가지 威儀(위의) 안에 일찍이 서로 버리지 않은 것은 行 · 住 · 坐 · 臥지요. ←四威. 시작 없는 때로부터 그와 더불어 맺은 인연이 깊었던 것이고,
세상사는 우리가 오랜 세월. 수 억만 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인연을 너무 깊이 맺었고, 반야의 지혜는 어떻습니까? 반야의 지혜는 시작 없는 때부터 아주 오랜 세월 이전부터. 수수 억 겁 전부터 그와 더불어 맺은 인연이 얕았던 연고입니다.그러므로 공부가 잘 안 되지요. 허허허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인연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불교공부가 되었든, 아니면 꼭 자기가 다음 생에 피아니스트가 되어서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싶은 그런 꿈이 있는 사람은 불교 공부하러 오지 말고, 바로 그 일부터 하세요. 자기가 하고 싶은 그것을 자꾸 익히는 겁니다. 끊임없이 익히는 겁니다. 끊임없이 익히면 그것이 薰習(훈습)이 되어서 다음 생에 아주 잘 됩니다. 여기에 이야기 해놨잖아요. 세상사는 왜 익숙하냐? 수수 억 겁 전부터 해왔던 것이 익숙한 겁니다. 불교공부는 왜 잘 안 되냐? 수수 억 겁 전부터 안 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서툴다고요.
그런 말이 있지요. “내 생에 잘 하려면 금생에 잘 해야 된다.” 그래서 ‘전 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今生受者是라. 금생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전생에 했던 일입니다. 어느 정도 했던 일이라고요. 전생에 우리가 모두 만났던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금생에 이렇게 만나는 것이지요. 欲知來生事인댄 今生作者是라. 내생에 그럼 내 인생이 어떨까? 내일의 내 인생이 어떨까? 내생은 모르니까 이야기하지 말고, 내일의 내 인생이, 아니면 내년에 내 인생이 어떨까? 지금 오늘 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내일의 내 인생입니다. 오늘 소득이 많았었으면 자고나서 ‘야, 오늘은 서장 강의 없나?’ 이런 생각이 들 거라고요. 그래서 교재도 한 번 펼쳐 보기도 하고, 또 요즘 불교 TV에 나오니까 한 번 틀어서 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또 듣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내일의 내 인생은 바로 오늘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달려있다. 오늘 하고 있는 이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알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반야와 세상사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깐 선지식이 말하는 것을 듣고 한결같이 헤아리기 어려움을 알 것입니다. 만약 시작 없는 때로부터 티끌의 번거로운 인연이 얕고 반야의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면 무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냥 척척척 다 되는 것이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어려서부터 아주 그 자기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전생에 익숙하게 한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뭐 든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중 된 것을 보면 전생에도 아마 중노릇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 믿는데 세금 드는 일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딱 그려지면, 거기에 매진하세요.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다른 어떤 남이 비까번쩍하게 잘 하는 것에 기웃거릴 필요 없습니다. 각자 자기의 가치관이 있는데, 자기 소신이 확실하면 뭘 그렇게 남 잘 먹고 잘 살고 좋은 차타고 벼슬 높아 지는데에 기웃거릴 것 뭐 있습니까?
처음에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고 특히 선불교를 하시는 분들은 인생의 高手들입니다. 세속적인 가치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下手들이나 하는 겁니다. 下手들. 인생의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지, 인생의 고수들은 그런 데에 기웃거리지 않는다고요. 남이 뭐라고 했든, 평가 기준이 어디 정해져 있나요? 평가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정말 출세간의 이런 공부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말 하늘을 찌를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됩니다. ‘나는 서장 공부하는 사람이야.’ ‘간화선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대통령 10번 하는 것 보다 낫다고요. 꼭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서장에 임할 때 의외의 소득. 기대하지 않았던 큰 소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별로 크게 긴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략을 하고 조대제 도부에게 답함 이라고 하는 공부를 다 한 것으로 오늘 서장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질문은 정리 않고 답변만 정리 했습니다.
탄허스님 화엄경 합론을 다 탈고를 하셔서 교열을 몇 달에 걸쳐서 함께 했는데, 제가 눈물을 흘린 대목이 바로 四弘誓願을 설명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것은 아닌데 화엄경을 해설한 청량국사의 글입니다. 천하의 그 美文. 아름다운 글을 쓰기로 유명한 분이 청량국사인데요. 그 분이 화엄경 어느 대목에서인가 四弘誓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3가지 차원으로 사홍서원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맹세코 다 건지리다. 중생이 중생이기 때문에 내가 맹세코 그를 다 건지겠다는 안목이 있는가 하면, 중생이 본래 공한 줄 알고, 나도 공하고 중생도 공한 줄 알고 중생을 열심히 건지겠다는 차원이 있고 또, 한 차원 올라가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 중생인줄 알면서 내가 맹세코 다 건지겠다.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사홍서원을 그런 차원으로 쭉 끝까지 다 설명을 했습니다. 참 정말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그때 제가 깨달은 바가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四弘誓願이라 하더라도 번뇌가 곧 보리. 煩惱無盡誓願斷.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 하더라도 번뇌가 곧 보리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 生死가 곧 涅槃입니다. 그렇게 알고 번뇌를 열심히 끊어야 된다. 그것이 우리말로는 그런 모순의 말이 없습니다. 그런 모순적인 말이 없다고요. 특히 흑백논리로 비추어보면 그런 모순이 없는데,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그런 말이라야 설명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를 하면서 그런 말로 설명을 하고, 또 그런 말이 납득이 되어야지, 이것을 어떻게 흑백논리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질문하신 분도 본래 보리인 번뇌를 끊어야 된다. ←이렇게 알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또 본래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 참 모순이지요. 모순이지만, 그렇게 알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서장의 정신과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 8강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