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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바라는 것은 (로마서 15:22-29)
사람마다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자 되는 것,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행복한 가정, 출세하는 것….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의 바람은 주의 복음을 땅끝까지,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와 서바나는 바울에게 중요한 지명이며, 가슴에 품고 사는 꿈의 대명사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제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할 무렵에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바로 로마서입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기의 계획과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에도 가기를 바라고, 서바나(스페인)에도 가고자 하는 계획입니다.
예루살렘에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성도들이 모은 구제 헌금을 전달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5-26절)
그리고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2절)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행전 19:21)
바울은 중요한 도시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도시는 인구가 많고, 유동성이 강하고, 복음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복음 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힘썼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바울의 강한 소원과 계획을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계획과 소망을 주님께서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바울은 로마에 가서 로마의 성도들과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로마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서바나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8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 주기를
바람이라.” (24절)
성도의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 비교할 때 목적이나 차원이 다릅니다.
24절의 말씀에서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만남으로 사귐과 기쁨을 나누고, 서바나로 보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떨어져 있을 때는 기도로 교제하고, 만나면 기쁨을 나누고, 새로운 힘을 얻어 사역지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가 자신을 영접하여 기쁨으로 교제하고, 서바나로 파송하는데 힘써 주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3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였고, 로마로 가는 것과 서바나 전도까지 계획하였습니다.
그가 전도 여행을 다닌 여정들을 보면 참으로 먼 거리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위해 다닌 주행(主行) 거리가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닌 거리가 2만 km라고 합니다.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것과 같은 거리입니다.
걸어서 다니거나 배를 타고 다니던 당시에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바울의 주행(主行) 거리 - 주님을 위해 다닌 거리, 드린 시간들, 사용한 재정, 당한 고난과 수고는 엄청납니다.
여러분의 주행(主行)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날마다 바쁘고 여유가 없다고 하면서 주를 위해서는 얼마나 다니며, 얼마의 시간과 재정을 사용합니까
마태복음 10:30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하였습니다.
한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머리털 숫자를 알아서 뭣하나.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별 의미 없는 머리털 수를 세신다면, 우리의 삶에 중요한 다른 것들은 더더욱 세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행(主行) 거리에 관한 것들을 정확히 세고 계실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에서 19세기(1815-1914년)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선교 단체가 조직되고 전설적인 선교사들이 세계 구석구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이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열고,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영국의 윌리엄 캐리(Willam Carey,
1761-1834)입니다.
세계 선교에 관심이 없던 영국 교회를 깨우고, 자신이 가족들과 함께 인도 선교사로 갔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해야 할 의무의 탐구’라는 긴 제목의 책을 통해
마태복음 28:18-20의 명령이 초대교회 사도들에게만 적합하며 현재의 신자들에게는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을 반박하고, 세계선교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역설하였습니다.
32살인 1793년 인도 선교사로 가서 아들 하나를 이질로 잃었고, 아내도 정신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과 가족들까지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드렸습니다.
윌리엄 캐리도 주행(主行) 거리가 엄청난 종이었습니다.
** 윌리엄 캐리 선교사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고, 예화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두뇌가 아주 명석한 두 아들을 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살았던 캐리(Carey)라는 영국의 대부호가 있었습니다.
조지(George)와 윌리엄(William) 두 아들은 모두 영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장래 희망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먼저 형인 조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부호가 될 거예요.”
조지의 대답은 아버지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습니다.
이어서 동생인 윌리엄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인도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인도의 영혼들을 구원하겠습니다.”
윌리엄의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몹시 실망하였고, 어리석은 아들이라고 호통쳤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의 인생은 그들의 선택만큼이나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조지는 아버지처럼 대부호요 정치가로 명성을 날렸고, 윌리엄은 그의 바람대로 인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대영백과사전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생인 윌리엄 선교사에 대해서는 두 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 반면에, 대부호이자 정치가였던
형 조지에 대한 소개는 단 한 줄입니다.
‘윌리엄 캐리의 형’
상당히 감동적인 글이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우선 그의 집은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고, 윌리엄 캐리도 구두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공부도 어릴 때까지만 하였으나, 강한 학구열과 천부적인 언어 능력으로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의 고전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벵골어, 산스크리트어 등 동서양의 언어들을 두루 공부하여
훗날 여러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며,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도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전(행위록)에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쓸 것이 없어서, 구원받고 어느 교회 다녔다는 말만 기록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모든 이방인에게 전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전도 여행을 하며 수많은 도시들을 방문하였고, 전도 전략의 거점으로 로마에 가기를 바랐고, 당시에 땅끝으로
인식되던 서바나까지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의 가슴은 지중해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계획과 바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 안디옥, 로마, 서바나 같은 전략적인 도시와 수많은 지역의 교회들이 그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서바나에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후 96년 경 로마의 클레멘트의 기록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동방과 서방에 복음을 전하며 전 세계에 의를 가르치며 서방 경계에 이르렀다.
통치자들에게 증언한 후 그의 믿음에 당연한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여기서 ‘서방 경계’란 로마라는 설이 있으나, 클레멘트 자신이 로마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곳을 서방 경계라
일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서바나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후 170년 경 무라토리 정경(1740년 이탈리아 학자 무라토리가 발견)에도 그런 언급이 있습니다.
무라토리 정경은 이단을 제외한 기독교 최초의 정경 목록으로, 신약 성경 27권 중 23권이 일치합니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를 위해 이루어진 일들에 관하여 그의 앞에서 상세히 편집하였다.
그것은 두 가지 사건 즉, 베드로의 죽음과 바울이 로마를 떠나 서바나로 향한 일을 같이 생략하면서
상세히 보인 바와 같다.”
성경에 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바울이 그렇고 성전을 사모한 다윗이 그렇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바라던 서바나 전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서바나에 갔는지는 천국에서 바울에게 확인하기로 하고, 바울은 아름다운 소망과 계획을 품고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소망과 계획을 가지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며 사는 것은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바람과 소망을 포함하여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해 주옵소서, 아이들 잘 자라게 하옵소서, 회사나 사업이 잘되게 하옵소서로 끝나지 말고, 건강하여
주의 일 열심히 하게 하옵소서, 아이들 잘 자라서 하나님의 일꾼되고 세상을 살기 좋게 하는 인물이 되게
하옵소서, 잘되어 하나님의 사업과 구제와 베푸는 손길이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합시다.
TV 프로그램 가운데 ‘나는 자연인이다.’가 있습니다.
깊은 오지나 무인도 등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사는 모습이 좋은 면도 있지만 대개 혼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단순히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고 그렇게 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오래, 건강하게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사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 영화 버킷리스트(the Bucket list)의 이야기를 하고 마칩니다.
** 버킷리스트 영화 소개 동영상 보기 (클릭)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48968364
자동차 수리공으로 평생을 보낸 카터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는 한 병실에서 나란히 시한부 선고를 받습니다.
이 둘은 너무나도 다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카터는 역사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흑인에다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평생을 자동차 정비공으로
살았습니다.
콜은 자수 성가하여 병원을 소유하고, 전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을 만큼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의 결혼도 다 실패하고,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여 가진 돈 만큼 외로움의 크기도 컸습니다.
두 남자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지만, 번갈아 항암치료를 받으며 고통받는 서로를 위로합니다.
그들의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없다는 공통점과 연민으로 둘은 친구가 됩니다.
카터는 45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 철학 교수님이 과제로 내 준 버킷리스트를 떠올립니다.
버킷리스트(Bucket list)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의미하는데, 중세 때 자살하거나 교수형 집행시
목에 밧줄을 감고 양동이를 차버리는 것(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두 사람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하고 싶던 일을 다 하기로 다짐하고 병실을 뛰쳐나가 버킷리스트를 하나
하나 실행에 옮깁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냥하기, 머스탱으로 카레이싱하기, 스카이 다이빙하기,
만리장성을 오토바이로 달리기, 피라미드 보기, 로마 여행
눈물 날 때까지 웃어 보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죽으면 화장한 재를 커피 깡통에 담아 경관 좋은 곳에 두기
콜은 딸과 화해하고 외손녀와 키스를 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를 지웁니다.
콜은 카터의 장례식에서 ‘모르는 사람 도와 주기’도 지웁니다.
나중에 콜이 죽은 후 자기의 유골을 커피 깡통에 넣어 히말라야 산 정상에 카터의 유골과 함께 놓입니다.
콜의 비서가 깡통을 산 정상에 갖다 둡니다.
그렇게 하여 ‘장엄한 광경 목격하기’도 완성합니다.
여러분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입니까?
그 가운데 주를 위해, 맡은 사명을 위해 계획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가슴에 품고 살았던 로마와 서바나 같은 버킷리스트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 꼭 해야 할 아름다운 계획과 소망을 품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버킷리스트 / 장엄한 광경 목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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