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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에는 전쟁이 끝날 거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아침에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F가 함께 갇혀 있던 수감자들에게 말했다.
“누가 그래?”
“꿈에서 하느님의 예언을 들었어.”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F는 기나긴 전쟁이 이제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뉴스에서 들리는 전황은 F의 굳은 믿음과 달리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간이 흘러 3월 말이 가까워왔고 F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3월 29일이 되자 F는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30일에는 의식을 잃었고, 31일 사망했다. 사인은 발진티푸스였다. 물론 병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사실상 전쟁이 끝나 수용소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안 그가 ‘희망의 상실’로 삶의 끈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그 역시 1942년부터 수용소에서 수용되어 있는 신세였지만, 그의 죽음을 무심히 넘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검토해 보니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었다. 많은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다가 참담한 현실에 직면해 용기를 잃고 덮쳐오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신체의 저항력을 잃고 일거에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 의사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지만, 그걸 놓치고 나면 바로 무너져버리고 인간으로서 존재가치를 잃어버린다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용소에서 풀려나와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정신과 의사는 빅터 프랑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년)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의과대학에서 정신과를 전공했고 특히 우울증과 자살에 관심이 많았다. 초기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와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평소 호기심이 많던 프랑클은 용감하게 프로이트에게 자기 생각을 편지로 보냈고, 프로이트도 상냥하게 답장을 줘서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또 17세 때 학교 숙제로 쓴 논문이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24년에 《정신분석 국제 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에 발표된 적도 있었다.
1937년 정신과 전문의가 된 빅터 프랑클은 3만 명의 자살위험성이 있는 여성들을 관리·치료했고, 이후 자신의 클리닉을 개업했다. 정력적으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기 시작할 때,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해 버렸다. 이때부터 유대인 의사들은 순수 독일민족 ‘아리안 족’의 치료를 금지당했고, 이후에는 유대인만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다. 우생학적 관점을 앞세워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희생될 위험에 처한 수많은 유대인 환자들을 자신의 의학적 소견으로 구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에도 1942년 9월 결국 그는 아내, 부모와 함께 테레지엔슈타트의 유대인 거주지 ‘게토’로 강제 이송되어 일반의로 근무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사람들이 강제 수용된 심리적 충격에서 벗어나도록 강연해 나갔다. 늙은 아버지의 사망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프랑클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루 한 컵의 물이 배급되면 반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와 면도를 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환경이었지만 그는 면도를 거르지 않았고, 덕분에 건강해 보일 수 있어서 가스실로 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2년 후 그와 그의 아내는 1944년 10월 19일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옮겨졌고, 여기서는 의사가 아닌 일반 수용소 수감자로 강제 노역을 했다. 1945년 3월에야 튀르크하임의 수용소로 옮겨져서 1945년 4월 27일 전쟁이 끝나 해방될 때까지 의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센 수용소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고, 어머니 엘사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동생 월터는 강제 노역 중에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여동생 스텔라는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살았다. 프랑클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각기 다른 수용소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견뎌나가야만 했다.
수용소에서 프랑클은 그동안 연구해 온 심리학 이론과 정신의학적 개념을 집대성한 원고를 옷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지만, 그 옷을 잃어버리면서 원고도 함께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프랑클은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책을 쓰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 원고를 갖고 있었다면 그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몽땅 잃어버린 덕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는 F의 사례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면서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 즉 이 끔찍한 경험을 개인의 성장에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는 프랑클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고 그가 세운 이론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 생각은 그가 끝내 살아남을 수 있게 한 힘이었다. 2년 반 동안 네 군데의 수용소로 옮겨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마음이 그를 살렸던 것이다. 부모와 아내, 남동생을 모두 잃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는 아내와 이송된 수용소가 갈리는 바람에 아내가 사망한 것도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전쟁이 끝난 후 빈으로 돌아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아내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고, 몇 주일 동안 큰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목숨을 건져서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우울증과 자살을 치료하던 프랑클 본인이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살아남은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죽을까 봐 크게 걱정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서서히 우울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면서, “어떤 큰일을 겪는 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이건 간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프랑클은 수용소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로고테라피 이론을 세운 책을 출간했다. 독일어판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체험기] (왼쪽), 영어판 [인간의 의미 탐구] (오른쪽)
그 생각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면서 프랑클은 자신의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불과 9일 만에 초고를 완성한 이 책의 독일어판 제목은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체험기(Die Psychotherapie in der Praxis)]였고, 영어판 제목은 [인간의 의미 탐구(Man's search for meaning)]였다(한국에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출간). 이 책은 이후 그가 쓴 31종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졌고,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것은, 즉 고결한 사람이 되느냐, 인간의 존엄을 잃고 짐승 같이 되느냐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유, 즉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삶의 길을 선택할 정신의 자유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그 자유를 잃게 되면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홀로코스트 경험 같은 끔찍한 시련도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할 중요한 가치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이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 책을 내고 난 후 1946년 2월 빈의 폴리클리닉 병원의 신경과 과장으로 취임했는데 그곳에서 엘리를 만나 사귀었고 1947년 7월 첫 아내의 공식적 사망 통고를 받은 후 7월 18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후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의 경험과 책에 대해 강연했지만 빈 대학에서는 정식 교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독특한 정신치료의 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현재 약 31개국에 로고테라피 훈련 및 치료 연구소와 전문 도서관이 있다.
이후 그는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고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1997년 9월 22일 93세에 사망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1991년 미국 의회도서관과 ‘이 달의 책 클럽(Book of the Month Club)’에 의해 미국에서 나온 10권의 영향력 있는 책 중 1권으로 선정되었다. 1997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이 책은 24개 언어로 1억 부가 팔린 것으로 추산되었다.
빅터 프랑클은 로고테라피 이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면의 본질에 삶의 가치를 두고 자신에게 한 발짝 타협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어라. 그대를 절벽 끝으로 내모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바로 당신 스스로이다.”
프랑클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 상황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약 없이 언제 가스실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미리 희망의 끈을 자르고 죽어버릴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가스실에 끌려가더라도 당당히 기도하며 인간의 긍지를 가진 채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왜’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인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삶에게 ‘왜 살아야 하지’라고 질문하기보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삶에게 ‘답을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올바른 행동과 태도를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고 현실적인 방법이 나올 수 있다.
빅터 프랑클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인류의 최악의 비극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 경험을 그저 개인적인 비극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년 간의 수용소 생활 중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 안에서 로고테라피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중요성, 그리고 삶의 의미 추구를, 자신의 생존 경험 속에서 삶의 정수처럼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온 이론이자 치료법이었기에 학계와 대중은 그의 책과 로고테라피 이론을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빈에서 태어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어 제3의 빈 심리학파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그 태생은 훨씬 극적인 면이 있다. 천재적인 학자가 환자 몇십 명을 진료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서 몇 년간을 버티면서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겪은 찰나의 감정과 사고의 엑기스가 바로 로고테라피의 씨앗이 된 것이다. 프랑클의 삶 자체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과 ‘그 의미를 삶에게 들려주는 실천’을 몸소 해낸 것이다. 이러한 언행일치가 바로 그의 이론을 빛나게 하며 후학들의 귀감이 되는 핵심적 부분이다.
빅터 프랭클 저청아출판사
빅터 프랭클 저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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