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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제가 신학교에 재학중이던 2007년 2월에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를 방문한 뒤에, 고려신학대학원 원우회에서 발행하는 회보의 청탁을 받아서 기고한 글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일본 고베 개혁파 교회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작지만 큰 교회
-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와 시가이 개혁파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
손재익 (고려신학대학원 3학년 휴학중)
내 평생 학교를 다닌 중에 이번만큼 등록금을 낸 것이 아깝지 않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섭리 가운데 원우회 학술부장을 맡으면서 원우회 임원 20여명 가운데 5명에게만 주어지는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 방문의 기회가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본이라고 하는 외국 땅을 밟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것으로 좋아할 일이 아니다. 4박 5일간의 일본여행이 내게 기쁨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육적인 즐거움에 지나지 않으리라. 오히려 내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고베 신학교를 통하여서,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잘 지키고 있으며 전수해 나가고 있는 이웃 교회를 직접 보고 체험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교회의 기도와 영성”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하여서 일본학생들과의 영적 교감을 경험하였고, 한국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만을 전해준 다른 한국인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점들을 지적함으로써 일본교회가 가지기 쉬운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준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여행을 다녀 온 직후부터 일본에서의 좋은 경험들을 글로 남기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필자가 신혼의 달콤함과 방학숙제의 압박에 시달리는 동안 차일피일 미루어 오다가 이제야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더 늦어지게 되면 그 당시의 생생함이 조금은 떨어지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여행을 다녀온지가 2개월1)이 넘었지만 그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역사의 주체이신 성령님께서 남겨놓으신 개혁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잘 지켜나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끊임없는 개혁의 삶을 살아가는 일본개혁파성도들과의 만남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와 한국 고려신학대학원의 관계
고베 신학교 교장이신 마끼따 교수2)님으로부터 우리 고려신학대학원과 자매관계가 된 배경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마끼따 교수님이 화란의 캄펀에서 공부하실 당시에 함께 공부했던 허순길 교수님의 제안으로 약 10년 전3)에 자매관계를 맺은 이후에 지금까지 매년 각 학교의 학생과 교수들이 각각 방문행사를 가진다고 하였다. ’05년의 경우 역사신학을 가르치는 모 교수4)가 우리 고신대학원에 방문하여서 “스코틀랜드 교회에서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한 바 있고, ’06년에는 우리 학교의 신원하 교수가 고베신학교에 방문하여서 강의한 바가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학생대표들이 한 해에는 일본학생들이 한국으로, 한 해에는 한국학생들이 일본으로 방문하는데 이번 2007년에는 한국학생이 일본에 방문하는 해였기에 방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가 속해 있는 교단은 우리 교단과 “우호관계”에 있다. 우리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일본기독개혁파교회(The Reformed Church in Japan)는 “우호관계”에 있는 교단으로서, 미국의 OPC나 PCA, 한국의 합동측과 같은 수준의 관계에 있다.5)
고베개혁파신학교에 대한 간략한 소개
고베개혁파신학교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기독교개혁교단의 직영신학교이다. 이 학교의 이름 가운데 “개혁파”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고려신학대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신학대학원”을 강조하는 듯한 우리와는 매우 대조적이지 않을까? 역시나 그들은 문부성(우리의 교육인적자원부에 해당함)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학교이다. 우리 말로 하면 소위 무인가 신학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정부의 인가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점심 식사 중에 잠시 나눈 대화 가운데 그러한 내용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부성에 등록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정부의 간섭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가 세속정부에 예속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무인가의 상태로 있으면서 신학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 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교분리에 대한 관점이 분명한 것이다. 잠시 교회의 對 정부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들은 현재 일본 정부가 극우로 나가는 것에 대하여 매우 우려를 하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고베개혁파신학교는 무인가이기 때문에 학위(M.Div)가 없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런 것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한 학생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뉘앙스를 매우 강하게 풍겼다. 말 자체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졸업을 하면 교단의 목사고시를 통해서 목사가 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는 식의 말을 했는데 거기에서 그 학생이 “학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달리 “유학”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교단교회의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학교의 경우 마치 학벌 콤플렉스에 빠진 것처럼 상당수의 학생들이 유학에 목말라하고 있는데, 그들은 교수가 될 사람이 아니라면 유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공부를 못하거나 공부에 관심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은 “공부하는 목사”로 구성된 교단이었다. 웬만한 목사들은 교수수준에 가깝다고 하였다. 일본기독교개혁파교단의 경우 목사들이 1주일 내내 공부만 한다고 하였다.
학교의 건물 규모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학생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그런 학교이다. 고베의 외곽, 즉 신(新)고베에 위치한 이 학교는 약 1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이사해 왔는데 본관 건물과 기숙사 건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본관 건물에는 채플실, 교장실, 행정실, 강의실, 도서관 등이 있었고 기숙사 건물에는 학생식당과 기숙사가 있었다. 그 가운데 도서관은 본관건물 4층에 위치했는데 정확하게 몇 권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학교와 비교할 때 약 1/3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칼빈관련 자료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교수는 총 3명이다. 정식교수가 3명으로 한 명은 조직신학 전공의 마끼따 교장이고, 또 다른 분 역시 조직신학 교수이다. 나머지 한명은 OPC에서 파송된 미국선교사인데 일본에 온지 20년이 넘었다고 하였다. 그 분은 원래 전공은 해석학인데 이 학교에서 신약과 성경원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밖에 외래교수가 있는데 4명 정도이다. 외래교수들은 모두 목회를 하면서 학교에 와서 가르치고 계셨다. 3명의 정교수는 학교 내에 있는 사택에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학생들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단순히 사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수 뿐만 아니라 교수의 가족들과 학생들 사이에도 아무런 격이 없었다. 특히 OPC 선교사 가정에는 4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총 7명의 자녀가 있는데 나머지 3명은 미국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화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역시 학생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교수 사모들은 학생식당에서 가끔씩 봉사하시기도 하였다. 하루는 OPC 출신 교수의 사모님이 맛있는 쿠키를 구워서 대접해 주셨다.
전체학생은 30명에 조금 못미치는 정도였다. 그 중에 여학생은 3명이었다. 학생구성으로는 일본기독교개혁파교단 출신도 있지만 다른 교단 출신도 제법 있었다.6) 현재 고베신학교에는 총 4명의 한국유학생이 있었다. 그 중에 한명은 고신의 SFC에서 파송한 손만석 간사, 1명은 UBF 선교사, 1명은 CCC 선교사 나머지 1명은 경배와 찬양 소속 여학생이다.
학비는 우리 나라에 비하면 별로 비싸지가 않았다. 그런데 독특한 장학제도가 있었는데, 기독교개혁파교단 출신으로 기독교개혁파교단의 목사가 될 사람에게만 거의 전액에 가까운 장학제도가 있었다. 이 교단의 목사가 되지 않을 사람에게는 그런 혜택이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개혁주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신학교의 설립 목적이 절대적으로 교단목사 양성에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회에 참석한 느낌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른 모든 신학교와 마찬가지로 고베개혁파신학교 역시 점심시간 즈음에 경건회를 드렸었다. 자그마한 채플실에 약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함께 경건의 자리에 참여하였다. 순번제로 학생들이 사회와 설교를 하고 있었다. 경건회의 형식은 일반적인 예배와는 약간 달랐다. 그들은 경건회를 예배의 형태와 반드시 일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의 경건회는 예배형식과 다를 바 없지만, 고베신학교의 경건회는 아주 단순했다. 그들은 설교하고 찬송하고 광고하고나면 그냥 자연스럽게 경건회를 파했다.
그들의 경건회에는 시편찬송, 찬송, 성경봉독, 설교, 기도의 형태로 매우 단순하였고 현란한 음악과 드럼 연주로 귀를 따갑게 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채플실 뒤편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악기의 전부였고 채플실 내부는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설교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처럼 요란한 악기들로 내부를 채우고 있고 약간은 화려하다 싶은 강단은 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채플실 내부구조의 단순함은 이후에 방문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가이 개혁파 교회의 예배당 내부는 초라하게 여겨질 정도로 단순하였다.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이 강조되지 않게 하는 예배당 구조였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아주 단순한 테이블 외에 십자가상이나 꽃꽂이 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건회 뿐 아니라 새벽기도회 아니 아침기도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는데 오전 7시에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처럼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봉독하고 길게 설교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7시에 모여서 사회자의 인도로 성경을 한 장을 윤독하였다. 그리고 사회자가 기도제목을 알려주면 흩어져서 그룹으로 모여서 작은 소리로 서로 기도하는 시간이 바로 아침기도회였다. “주여~”, “아부지”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아름다운 시편 찬송
지난 2006년 고베신학교 학생들이 우리학교에 방문하였을 때 “칼빈의 시편찬송”을 선물로 주고 갔다. 그 때 통역을 맡은 우리 학생은 “시편 주석”으로 통역하였다. 왜냐하면 시편찬송이 뭔지를 들어 본적이 없다보니 통역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역시나 그들은 아름다운 시편찬송을 갖고 있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지은 시편찬송을 번역하여 불렀다. 채플실에 있는 유일한 악기인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에 맞춘 그들의 찬송소리는 그들의 고백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필자는 독특한 출신으로 구성된 한인유학생들에게 시편찬송에 대해 물었는데 다양하고 특이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가장 긍정적이고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인 학생은 CCC 선교사 출신의 학생이었는데 그는 고베신학교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을 배우게 된 것을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듯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여기에 오기전만 하더라도 “사영리” 하나면 모두 다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와서 이들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보고 엄청 놀랐고 매우 깊이 빠졌다고 하였다. 부정적인 대답을 한 분은 UBF 선교사 출신이었는데 이 분은 개혁파의 신학이 보수적인 것에 대해서 약간 불만이 있는듯 하였다. 그들의 보수적 신앙을 “폐쇄적”이라고 여기는 듯 하였다. 독특한 대답은 경배와 찬양 선교사 출신의 여학생에게서 들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말하기를 경배와 찬양이랑 시편찬송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솔직히 의문이다.
학술발표회
2월 9일 금요일에 학술발표회가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수업이 있었고 점심 때 경건회에 함께 참석해서 우리학교의 원우회장이 설교를 하였고, 점심 식사 후에 오후에 학술발표회를 하였는데 당연히 오후 수업은 휴강이었다. 원우회장의 차분한 설교는 일본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일본학생들의 칭찬이 대단하였다. 오후 학술발표시간에는 필자가 “한국교회의 기도와 영성”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였다. 모든 발표를 마친 이후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통역을 맡은 한인학생이 필자에게 아주 좋았다고 하였고 실제로 일본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함께 참석하여 끝까지 경청하였던 마끼따 원장은 한국교회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신학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발표는 처음 들었다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칭찬을 들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그동안 한국에서 온 교수들이나 목사들이 한국교회에 대해 지나친 자찬(自讚) 일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느끼는 바와 같이 아마도 이 학교나 일본기독교의 초청을 받아 온 한국인들이 한국교회는 마치 대단한 교회인양 극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필자가 한국교회의 기도를 매우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그에 대해 신학적인 지적을 하니 역시나 한국교회에도 문제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놀란 것이었다.
신학교 중심의 교회
일본고베개혁파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교단은 철저하게 신학교 중심의 교회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방문한 시나이 개혁파 교회의 주보를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11일 주일에 시나이 현에 있는 개혁파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그 교회의 주보에는 신학교에서 온 편지가 실려 있었고 신학교의 각종 소식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신학교 중심의 교회를 엿보게 해 주는 중요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기독교개혁파 교단7)은 철저히 신학교 중심인 듯 하였다. 이 교단은 약 160개 정도의 교회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교회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교회가 10가정 남짓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160개 정도의 교회라고 할 때에 한국의 160개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적은(?) 교단이 신학생들을 돕고 신학교를 돕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철저한 개혁신앙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교단은 마치 우리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교단과 비슷한 것 같다.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우리 나라에 약 100개 정도의 교회에 5000명 남짓되는 성도의 적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라는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권징이 살아있는 교회
이 교회는 교회의 표지를 드러내는 교회이다. 철저한 복음적 설교가 시행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시가이현 교회의 설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복음적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주보를 살펴보니 연속강해 설교였었다. 그리고 성실한 성례가 시행되고 있었다. 매월 2회의 성례가 시행된다고 하였는데 직접 참여해 보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꼭 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권징 역시 시행되고 있는 교회였다. 어떤 학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최근에 모 교회의 장로가 예배기도 중에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여서 권징받은 일이 있다고 하였다.8)
목사를 중요시하는 교회
그들이 한 말 가운데 “우리 교단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교인이 줄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 아닌 목사후보생의 감소였다. 그들은 그만큼 목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목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하는 칼빈의 프랑스신앙고백서의 내용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은 목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지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시가이현 교회는 약 7-8 가정으로 구성된 교회인데 최근에 신축한 교회 건물이 있을 뿐 아니라 목사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7-8가정으로 목사의 생계를 책임지기에 매우 어려워 보였다. 왜냐하면 연로한 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생계를 철저히 책임졌는데 이는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목사의 사례가 좀 적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빠뜨리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하였고 대부분의 교회가 비슷한 수준의 사례비를 책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목사들은 교회의 관심과 배려로 “공부”하는 자들이었다. 앞서 일본기독교개혁파교단은 공부하는 목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이들은 웬만하면 교수할 수 있는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매주일예배 외에는 공식 모임이 없다는 이유도 있다. 목사는 1주일 내내 1-2편의 설교작성을 위해서 노력하고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교회도 주일 오전 예배 외에는 목사의 설교가 없었다.
기행문을 마치면서
일본이라고 하면 흔히 기독교가 약한 국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 전체를 놓고 보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본에도 작지만 큰 교회는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고베개혁파신학교와 그 학교가 소속된 교단이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종교개혁의 유산을 잘 간직하고 보존하고 있는 귀한 교회가 일본에도 있다. 그렇기에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에 대해 마냥 민망히 여길 필요는 없다.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 성령과 함께 세우신 이 교회는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보존되고 있다. 진리를 지키시고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우리의 왕이시다.
1) 이 기행문은 필자가 여행을 다녀온 2개월 후에 작성한 것을 고신원보사의 청탁을 받고 일부분 수정한 것이다.
2) 마끼따 교수는 국내에도 약간은 소개된 바 있는 분으로,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Kampen (Drs.)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그는 목회를 하다가 1987년부터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겸 교장으로 수고하다가 이번 2007년 3월을 기해 사임하고 목회지로 돌아간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로는 고베 신학교에서 유학한 이종전 목사가 번역한 다음의 책이 있다. 마키다 요시카즈, 이종전 역, “개혁파 신앙이란 무엇인가?”(인천: 아벨서원, 2002). 이 책은 일본개혁파교회의 신앙고백을 이해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3) 우리가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교류행사의 가장 첫 해에 방문한 바 있는 임 모 목사(전 SFC 간사, 현재 선교 준비중)가 손만석 간사를 방문하기 위해서 와 있었는데, 정확하게 10년 전에 이곳 학교에 방문했었다고 하였다.
4) 이 교수는 현재 목회와 강의를 겸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는 현재 고베신학교 1학년에 재학중인데 이번 행사 시에 일본 학생 대표로 발표하였다. 나이가 40이 넘었지만 외모는 10대 소녀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5) 『헌법』(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1992), 헌법적 규칙 제6장 제4조 “우호관계”, 275-276,
6) 재미있는 것은 이 학교의 원우회장은 일본기독교개혁파교단 출신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7) 이번 교류행사의 일본측 행정을 담당했던 손만석 씨(대구지역 SFC 간사로 수고하다가 SFC의 파송으로 현재 일본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하고 있다.)를 통해서는 일본개혁파교회는 약 250여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으나, 이후에 마끼따 교장으로부터 들은바로는 약 160개 교회라고 했으며, 마끼따 교장에 따르면 아마도 손만석씨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근 기독교보 기사에 잠시 실린 부분을 참조하면 약 140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김기태 선교사(부산대 SFC 출신, 고려신학대학원 졸)가 본 교단 소속 파송 선교사로서 일본개혁파교회 중부노회 협력선교사로 하마마츠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현재 개혁파교회를 담임하는 유일한 한인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보 2007년 3월 24일자, 제785호, 11면)
8) 여기에서 놀라운 것 하나는 개체교회에서 일어난 이 소식을 고베신학교 전체학생들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와 신학교가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하겠다.
첫댓글 위 글은 2007년 2월에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와 그 교단의 한 교회(기도소)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경험을 적은 글입니다. 일본 고베 개혁파 교단은 개혁주의 정신에 매우 충실한 교회였습니다. 네덜란드개혁교회와 미국정통장로교회(OPC)의 영향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단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교회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1가지 아쉬운 점은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으로 이 교단이 목사의 급격한 감소로 인한 무목교회(목사가 없는 교회)의 증가로 여성목사 안수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숫자의 급감은 한국교회에서는 매우 낯선 일이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이미 점점 나타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구요. 목사의 부족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지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복음의 힘과 능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는 아직 그렇지 않지만 언제 어느 때에 그렇게 될지 모릅니다. 목사직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직분을 위한 교회적 지지가 약해지게 될 때 젊은 청년들이 목사가 되기를 꺼려하는 일이 생겨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의 방문은 일본 고베 개혁파 신학교와 한국 고려신학대학원의 자매 관계로 인한 것으로 당시 저는 고려신학대학원 대표로 "한국교회의 기도와 영성"이라는 소논문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