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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9월 6일)
2002년 제6회 서울평화상에 구호단체 `옥스팜(Oxfam) 선정
2001년 IPI(국제언론인협회)-WAN(세계신문협회),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국에 선정
2001년 한국화가 황창배 사망
2001년 머리카락 굵기의 25만분의1인 극초미세 나노선(線) 국내개발
2000년 사상최대의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개막(~9.8)
2000년 오가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제5회 서울평화상 수상
1999년 한국-리비아 문화협정 체결
1999년 한국영화로는 12년 만에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거짓말`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
1999년 환경부 자연환경조사에서 국내 미기록생물 82종 첫발견 발표
1998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별세
1997년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 입적
1994년 전 문교부장관 박일경씨 별세
1994년 소설 `쇼군`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 사망
1994년 PKO 국군의료지원단 서부사하라 파견
1991년 라트비아 독립
1991년 에스토니아 독립
1991년 리투아니아 독립
1987년 영국의 언론인 헤일리 사망
19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 한일 정상회담 - 일황(日皇), 유감의 뜻 표명
1982년 아랍연맹, 모로코서 정상회담 개막 (~9.8)
1982년 8차 한국-벨기에 통상장관회담 개막
1982년 제37차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MF(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 개막(토론토)
1981년 폴란드, 동구 첫 자유노조대회
1980년 폴란드 키에레크 당제1서기 실각. 후임에 카니아 선출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으로 미 법무부에 기소
1977년 일본-북한, 민간어업협정 체결
1976년 소련 빅토르 이바노비치 벨렝코 중위, MIG 25A형 신예기 몰고 일본 북해도 하코다데에 비상착륙.
미국에 망명 요청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분할관리 합의서 교환
1975년 `보이스 오브 코리아` 잡지를 창간한 독립운동가 김용중 사망
1974년 최두선 별세
1969년 신민당, 박정희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
1968년 스와질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드골, 서방지도자로서는 전후 처음으로 폴란드 방문
1967년 청양 구봉광산 광부 양창선씨 16일 만에 구출
1966년 남아공 페르뵈르트 수상, 의회서 백인자객에 피살
1958년 중부에 13년만의 폭우
1956년 이중섭 사망
1952년 세계저작권조약(UCC) 발족
1951년 한국군에 여군 창설
1945년 장덕수. 조병옥. 김병로씨 등 한국민주당 발기 선언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주석 이승만)
1937년 일제, 수피아. 숭일 등 4개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처분
1926년 독일, 국제연맹 가입
1923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출생
1914년 독일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대패한 마른 전투 개시(-11일)
1903년 동요작곡가 윤극영 출생
1899년 천연두 예방규칙 반포
1899년 존 헤이 선언. 미국, 열강에 청국(淸國)의 문호개방 및 기회균등을 제의
1890년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원하경(언더우드) 출생
1872년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의 3제(帝) 베를린서 회담(3제동맹 체결)
1766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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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년 포르투갈의 마젤란, 스페인 국왕의 후원으로 사상최초로 지구 일주항해에 성공하여 지구가 둥금을 증명. 자신은 필리핀에서 전사하고, 출발인원 240명중 18명만 생환. 빅토리아 항구에 도착하다.
1566년 터키의 슐탄 슐레이만 1세 세상떠남
1683년 프랑스 정치가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세상떠남
1757년 프랑스 군인 겸 정치가 라파에트(Marquis de Lafayette) 출생
1766년 영국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화학자 존 달톤(John Dalton) 출생
1852년 영국의 첫 번째 자유 열람식 도서관이 멘체스터에서 개관되다.
1860년 미국 사회학자 제인 아담스(Jane Addams) 출생
1872년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의 3제(帝) 베를린서 회담(3제동맹 체결)
1880년 영국의첫 번째 크리켓 테스트 매치가 런던의 오발(Oval) 경기장에서 영국과 호주 대항으로 열리다.
1890년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원하경(언더우드)출생
1892년 영국 물리학자 에드워드 애플톤(Edward Applet!!on) 출생
1899년 존 헤이 선언. 미국, 열강에 청국(淸國)의 문호개방 및 기회균등을 제의
1899년 천연두 예방규칙 반포
1901년 미국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무정부주의자에게 저격을 당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다.
1903년 동요작곡가 윤극영 출생
1914년 독일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대패한 마른 전투 개시(-11일)
1923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출생
1926년 독일, 국제연맹 가입
1937년 일제, 수피아. 숭일 등 4개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처분
1941년 독일의 나치는 모든 유태인들에게 다비드의 노랑색별을 강제적으로 달게끔 만들다.
1943년 스웨덴 영화배우 브리트 에클랜드(Britt Ekland) 출생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주석 이승만)
1945년 장덕수. 조병옥. 김병로씨 등 한국민주당 발기 선언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대 교장에 元容德 참령 취임
1947년 영국 바순연주자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출생
1950년 대한민국 여군 창설- 6·25전쟁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을때,
국방부 일반명령 제58호에 의거《여자의용군교육대》가 처음으로 발족되었다.
1950년 영천(永川) 전투, 10일까지 계속. 적 15사단 섬멸 및 적 포병 1개연대 전멸.
1951년 국군, 女軍團 창설
1952년 세계저작권조약(UCC) 발족
1952년 영국 배우 겸 가수 로렌스(Gertrude Lawrence) 세상떠남
1956년 서양화가 이중섭 세상떠남
1958년 중부에 13년만의 폭우
1965년 인디아 서부파키스탄을 침공하다.
1965년 주월 한·미 군사실무협정 체결
1966년 남아공 페르뵈르트 수상, 의회서 백인자객에 피살
1966년 남아프리카의 첫번째 수상 헨드릭 베르워드(Hendrik Verwoerd) 세상떠남
1967년 드골, 서방지도자로서는 전후 처음으로 폴란드 방문
1967년 청양 구봉광산 광부 양창선씨 16일 만에 구출
1968년 스와질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9년 신민당, 박정희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
1970년 아랍게릴라, 여객기 4대 잇따라 하이재킹
1974년 최두선 별세
1975년 '보이스 오브 코리아' 잡지를 창간한 독립운동가 김용중 사망
1975년 터키의 Lice에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여 약 3.000명이 죽다.
1976년 소련 빅토르 이바노비치 벨렝코 중위, MIG 25A형 신예기 몰고 일본 북해도 하코다데에 비상착륙.
미국에 망명 요청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분할관리 합의서 교환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으로 미 법무부에 기소
1977년 일본-북한, 민간어업협정 체결
1980년 폴란드 키에레크 당제1서기 실각. 후임에 카니아 선출
1981년 폴란드, 동구 첫 자유노조대회
1982년 8차 한국-벨기에 통상장관회담 개막
1982년 아랍연맹, 모로코서 정상회담 개막 (~9.8)
1982년 제37차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MF(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 개막(토론토)
19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 한일 정상회담 - 일황(日皇), 유감의 뜻 표명
1987년 영국의 언론인 헤일리 사망
1989년 컴퓨터 에러 때문에, 41.000명의 파리시민들이 교통위반 대신 살인, 공갈, 매춘을 알선하는
내용들로 가득찬 편지를 받았다.
1991년 소비에트 연맹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1994년 소설 '쇼군'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 사망
1994년 영국 작가,조각가 겸 필름 감독 제임스 클라벨(James du Maresq Clavell) 세상떠남
1994년 전 문교부장관 박일경씨 별세
1994년 PKO 국군의료지원단 서부사하라 파견
1995년 러시아, "조-러 조약"폐기 북한에 통보. 폐기통보 마감시한 95.9.10 조약효력 마감기일 96.9.10
1995년 북한 중앙통신, 8월 18일까지의 호우로 이재민 520만명.
사망 68명, 피해 총액 150억$이라고 보도. 126개국에 구호요청.
1995년 프랑스, 남태평양 Mauroa섬에서 TNT2만톤급핵실험 강행.
1997년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 입적
1997년 다이아나 전 황태자비의 장례식이 영국 런던의 웨스트미스턴 성당에서거행되었다.
1997년 마더 테레사수녀 세상떠남
1998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별세
1999년 한국-리비아 문화협정 체결
1999년 한국영화로는 12년 만에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거짓말'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
1999년 환경부 자연환경조사에서 국내 미기록생물 82종 첫발견 발표
2000년 사상최대의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개막(~9.8)
2000년 오가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제5회 서울평화상 수상
2001년 머리카락 굵기의 25만분의1인 극초미세 나노선(線) 국내개발
2001년 한국화가 황창배 사망
2001년 IPI(국제언론인협회)-WAN(세계신문협회),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국에 선정
2002년 제6회 서울평화상에 구호단체 '옥스팜(Oxfam) 선정
●1915 아동문학가 강소천 태어남 대표작: 꿈을 찍는 사진관, 호박꽃초롱
1937 수피아여고 등 4개교, 신사참배거부로 폐교
1945 건준 조선인민대표자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발표
1951 여군 창설 리지웨이 장군, 정전회담 판문점 개최 제의
1956 서양화가 대향 이중섭 세상 떠남 대표작: 흰 소, 천도화와 어린이들
1960 일본 친선사절단 내한
1967 충남 청양 구봉 광산 사고로 매몰된 광부 양창선, 16일만에 구출
1976 판문점 분할경비 합의서 교환
1977 미국 법무성, 의회로비활동과 관련 박동선을 수뢰혐의로 기소
1977 일본, 북한과 민간어업협정 체결
1981 경남 통영 근해서 제1영산호가 화물선과 충돌로 침몰. 선원 18명 실종
1984 전두환 대통령 일본 방문 히로히토 일본천황, 과거의 한일관계에 대해 유감 표명
1992 남북한과 일본 여성 대표, 종군위안부 문제 공동대처 결의
1860 미국 여류 사회사업가 제인 애덤스 태어남 1931년 노벨평화상 수상
1901 윌리엄 매킨리 미국대통령, 저격당함(9월 14일에 세상 떠남)
1926 독일, 국제연맹에 가입
1964 콩고 반란군, 스탠리빌에서 콩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
1965 파키스탄, 인도와의 전쟁상태 선포
1966 남아프리카공화국 헨드릭 버위로 수상, 케이프타운서 피살
1970 아랍 게릴라(PELP), 유럽상공에서 뉴욕행 민간 여객기 4대를 납치
1979 소련의 지하핵실험으로 시베리아에서 강도 7.1의 지진 기록
1987 베네수엘라 마카라이시에 폭우, 1,000여명 사망
1988 소련 리투아니아 공화국 이글날리나 원전에 화재
1991 소련, 고르비와 옐친, TV회견서 정치범 모두 석방을 약속
●오늘의 인물 (9월 6일)
이중섭이 그린 `자화상`(1955).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화가 이중섭(李仲燮)의 삶은 6·25를 전후해 둘로 나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던 젊은 시절과 월남(越南) 이후 겪어야 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삶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각광받던 이중섭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5년. 10년 만이었다. 곧 그를 쫓아온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하고 함남 원산에 둥지를 틀었다. 짧았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그러나 분단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업가로 원산에서 승승장구하던 형이 처형당한 것이다. 1950년 12월 중섭은 가족과 함께 원산을 떠났다. 고행의 시작이었다. 부산을 거쳐 제주에 일시 머문 중섭은 대표작 ‘황소’와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그리며 모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52년 7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홀로 된 중섭은 고독을 곱씹으며 방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붓을 잡았다. 대폿집에서도 그렸고, 부두에서도 짐을 부리다 짬이 나면 그렸다.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다.이 시기 거의 매일 계속되는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은 중섭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1956년 9월 6일 중섭은 마침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고달픈 생애를 접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3일간이나 방치됐고, 침대에는 밀린 18만원의 입원비 계산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2001년 한국화가 황창배 사망
1998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별세
1997년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 입적
1994년 전 문교부장관 박일경씨 별세
1994년 소설 `쇼군`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 사망
1987년 영국의 언론인 헤일리 사망
1975년 `보이스 오브 코리아` 잡지를 창간한 독립운동가 김용중 사망
1974년 최두선 별세
1966년 남아공 페르뵈르트 수상, 의회서 백인자객에 피살
1923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출생
1903년 동요작곡가 윤극영 출생
1890년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원하경(언더우드) 출생
1766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출생
●오늘의 관심뉴스는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지만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갸륵하여 화제가 된 기사입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어떠하더라도 그 위피에서 항상 아름다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주변에 우리를 바라보는 모든 분들은 그것을 가치라고 평가한다는 것을 새삼알게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 그것보다는 지금 현 위치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수고하세요!
-----오-늘-의--관-심-뉴-스--------------------
"옥바라지 고생 어머니 환갑 도와주세요"[뉴시스 2007.09.05 17:04:52]
【대전=뉴시스】"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 못난 놈을 위해 당신 몸 돌보지 않고 옥바라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환갑입니다. 도와주세요…"지난달 27일 충북 증평우체국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광주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김모씨(28)가 5일 환갑을 맞는 어머니를 도와달라는 편지였다.
편지에서 김씨는 "군대 제대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무작정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힘든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어두운 유혹에 빠져 죄 값을 치르고 있는 죄인"이라며 "5일이 어머니의 환갑인데 그동안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못난 자식을 위해 옥수발을 하시며 당신 건강은 뒷전에 두시고 오직 못난 자식 걱정만 하고 계신 어머니의 환갑이 돌아오는데 수감 중인 몸인지라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해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전했다.김씨는 "밖에서 가끔 인터넷으로 우체국 쇼핑몰을 이용하던 것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동안 어머니께서 영치금으로 넣어주신 돈을 쓰지 않고 아껴 모아둔 돈으로 우표를 구입했는데 구입한 우표를 대신해 인삼한과 한 상자를 어머니 환갑 선물로 구입하고 싶다"면서 "저의 어려운 환경과 마음을 저버리지 말고 이번 어머니의 환갑이 조금이나마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청을 들어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증평우체국에 보냈다.이에 박종영 증평우체국장은 같은 달 29일 답장에 "우체국쇼핑을 기억해 준 감사한 마음으로 증평우체국 직원들이 합심해 마련한 인삼한과와 회갑축하 꽃다발을 배달과 함께 어머니에게 자식의 효성과 따뜻한 마음을 전달해 드리겠다"며 "님께서 보내주신 우표는 다시 동봉하니 어머니에게 편지쓰는 데 사용해 달라"고 답장했다.
김씨의 누나는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애틋한 줄 몰랐다"며 "우체국에서 동생의 편지에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고 어머니 환갑 생일 선물까지 해 주니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한편 이날 오전 9시 부천우체국 김극수 집배실장이 직접 증평우체국에서 보내 온 인삼한과와 생신축하 꽃바구니, 부천우체국에서 준비한 믹서기, 그릇세트 등을 김씨의 누나에게 전달했으며 전북이 고향인 어머니 이씨(60)는 경기 부천으로 올라와 생일을 맞았다.박희송기자 hspar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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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다이애나 황태자비 장례식 진행
1997년 8월 3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세기적인 장례식이 9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진행되었다. 영국 왕실이 1996년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장으로 전통적인 왕실 전용 사원인 '웨스트민스터'를 선정한 것은 그녀의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에 대한 배려와 전 세계의 애도 물결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 날의 세기적인 장례식은 BBC방송을 통해 전 세계 187개국에 생방송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실 가족,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 현직 영국 총리 등 내각 각료, 당시 미국 대통령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 프랑스 대통령 영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 등 2천 여명의 세계 각국의 유명인사가 조문 사절로 참석했다. /1981년 찰스 황태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통해 부부가 된 다이애나는 1982년에 윌리엄(William)과 1984년 해리(Harry) 왕자를 출산했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1992년에 별거를 시작한 뒤, 1996년 공식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영국의 스펜서(Spencer) 가문 출신인 다이애나 비는 수 백만 명의 애도 인파를 뒤로 한 채,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가문의 고향 노샘프턴셔의 앨소프에 조용히 잠들었다.
●소련, 발트 3국 독립 승인(1991.09.06)
1991년 오늘 소련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이른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소련의 최고집행기구인 '국가평회의'는 이날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1939년 체결된 독일-소련 밀약에 따라 그 이듬해 소련에 강제합병됐던 발트지역 3개 공화국이 51년 만에 독립국가로 국제무대에 재등장하게 됐다.우리 나라 정부는 곧바로 세 나라를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곧 외교관계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 호남선 복선화 완공(1988)
대전에서 목포에 이르는 국토의 동맥 호남선 철도! 1988년 오늘 호남선 복선화 공사의 마지막 구간인 전북 익산에서 전남 송정리 사이 1.1km 구간이 완공됐다. 이로써 호남선의 하루 철도운행능력이 35회에서 70회로 두배로 늘어나고 운행시간도 크게 단축됐다.
라의 석방과 함께 사건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동평화협상을 와해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하이재킹된 여객기 4대 가운데 이스라엘의 엘-알(EL-AL) 항공기는 기내에서 범인이 사살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팬아메리칸 항공의 보잉747점보여객기는 7일 아침 카이로로 강제 착륙돼 하이재킹된 여객기 중 최초로 폭파됐다. 불행 중 다행히도 승객들은 폭파전 게릴라들에 의해 비행기 밖으로 내보내진 후였고 폭발 후 범인들도 체포되었다. 이에 국제안보리 이사회가 9일, 만장일치로 인질의 즉각석방 요구를 결의하며 각국의 적십자국제위원회가 교섭을 시작했지만, 하이재킹된 스위스 항공 707기와 TWA사의 707기가 12일 요르단 사막의 한 비행장에서 또 폭파됐다. 이에 게릴라들은 이 비행기폭파가 서방 3국(미국ㆍ이스라엘ㆍ영국)정부가 그들의 요구에 수긍하지 않고 지연시킨데 대한 1단계 경고조처였다고 말했다.이후 9월 26일ㆍ27일 양일간에 걸쳐 피납됐던 나머지 인질들이 전원 석방됨으로써 20일간에 걸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사상최대 공중납치 사건이 마무리됐다.
●1970년 아랍게릴라, 여객기 4대 잇따라 하이재킹
1970년 9월 6일 유럽 각 도시를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여객기 4대가 잇달아 납치되는 세계항공 역사상 최대의 연속 하이재킹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7일,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범행에 대한 성명을 발표, 구류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석방과 함께 사건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동평화협상을 와해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하이재킹된 여객기 4대 가운데 이스라엘의 엘-알(EL-AL) 항공기는 기내에서 범인이 사살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팬아메리칸 항공의 보잉747점보여객기는 7일 아침 카이로로 강제 착륙돼 하이재킹된 여객기 중 최초로 폭파됐다. 불행 중 다행히도 승객들은 폭파전 게릴라들에 의해 비행기 밖으로 내보내진 후였고 폭발 후 범인들도 체포되었다. 이에 국제안보리 이사회가 9일, 만장일치로 인질의 즉각석방 요구를 결의하며 각국의 적십자국제위원회가 교섭을 시작했지만, 하이재킹된 스위스 항공 707기와 TWA사의 707기가 12일 요르단 사막의 한 비행장에서 또 폭파됐다. 이에 게릴라들은 이 비행기폭파가 서방 3국(미국ㆍ이스라엘ㆍ영국)정부가 그들의 요구에 수긍하지 않고 지연시킨데 대한 1단계 경고조처였다고 말했다./이후 9월 26일ㆍ27일 양일간에 걸쳐 피납됐던 나머지 인질들이 전원 석방됨으로써 20일간에 걸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사상최대 공중납치 사건이 마무리됐다.
▶ 구봉광산 광부 16일 만에 구조(1967)
충청남도 청양 구봉광산 125m 땅 속에 매몰됐던 광부 양창선 씨가 1967년 오늘 극적으로 구조된다. 갱 속에 묻힌 지 16일 만이다. 양씨는 8월 22일 낮 12시 40분 지하 125m에서 배수작업을 하다 갱구가 무너지면서 갇혔다. 양씨는 갱 안에서 생존계획을 짠 뒤 최소한의 운동과 함께 물을 마셔 탈수를 막아 생존할 수 있었다. 양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진단을 받은 결과 건강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양화가 이중섭 세상 떠남(1956.09.06)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이중섭이 1956년 9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936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근대 서양미술을 공부했다.이중섭은 서양화법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도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흰 소 그림을 많이 그렸다. 6·25전쟁과 가난 때문에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그리며 달랬는데 형편이 어려워 도화지를 살 돈이 없을 때는 담배를 싼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주요 작품으로 '흰 소', '투계', '닭과 가족', '봄의 어린이', '바닷가의 아이들' 등이 있다.
●1956년 이중섭 사망
화가 이중섭(李仲燮)의 삶은 6·25를 전후해 둘로 나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던 젊은 시절과 월남(越南) 이후 겪어야 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삶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각광받던 중섭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5년. 10년 만이었다. 곧 그를 쫓아온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하고 함남 원산에 둥지를 틀었다. 짧았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분단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업가로 원산에서 승승장구하던 형이 처형당한 것이다. 1950년 12월 중섭은 가족과 함께 원산을 떠났다. 고행의 시작이었다. 부산을 거쳐 제주에 일시 머문 중섭은 대표작 ‘황소’와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그리며 모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52년 7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홀로 된 중섭은 고독을 곱씹으며 방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붓을 잡았다. 대폿집에서도 그렸고, 부두에서도 짐을 부리다 짬이 나면 그렸다.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다.이 시기 거의 매일 계속되는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은 중섭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1956년 9월 6일 중섭은 마침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고달픈 생애를 접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3일간이나 방치됐고, 침대에는 밀린 18만원의 입원비 계산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양화가 이중섭 타계(1956)
국민화가 이중섭이 1956년 오늘 타계했다. 이중섭은 일본에 보낸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양에서 출생한 이중섭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에서 태양상을 받았다. 1945년 귀국해 원산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6.25전쟁 때 월남해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부산,제주,통영 등을 전전하며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으로 삼기도 했고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단 한 번 개인전을 가졌다.
▶ 여군 창설 4주년 기념식(1954)
1954년 오늘 육국본부 광장에서 여군창설 4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육군참모총장 대리 이응준 준장과 미 사령관이 여군들에게 축사와 훈시를 하고 여군부장 김은숙 대령이 공이 많은 여군들에게 상장을 수여한다. 기념식이 끝난 뒤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군악대를 선두로 여군들의 씩씩한 시가행진이 펼쳐진다. 우리 나라의 여군은 62.5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6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발족됨으로써 창설됐다.여자의용군 교육대는 1951년 11월 해체됨과 동시에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여군과로 편입됐다. 여군은 1970년에 여군단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 민국 국군 여군 부대 창설(1950.09.06)
1950년 9월 6일 6·25전쟁 중이던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로써 한국군 조직에 최초로 여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51년 11월 여자의용군교육대가 해체되면서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여군과로 편입되었고, 1955년 7월 여군훈련소가 설치되어 여군의 훈련을 전담했다. 1959년 1월 여군과가 육군본부 여군처로 개편되었으며, 1970년 12월 여군단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본래 여군은 남성들의 전투활동을 지원·보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창설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다양한 교육내용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통해 실제상황에 대처할 만한 능력을 소유한 군대로 발전했다.
[한글 사이트]
<한겨레>는 '여군의 어제 오늘 내일', '인터뷰 : 엄옥순 여군학교장', '입영열차 타는 여성 대졸자' 등 여군 관련 기사를 제공한다. 아태여성정보통신 센터에서는 최초의 여군 장교 박을희의 회고록을 제공한다. 육군여군학교 홈페이지에서 여군의 역사, 육군 14개 병과의 임무와 여군의 혜택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영국 판보로 에어쇼 사고, 29명 사망(1952)
1952년 오늘 열린 영국 판보로(Farnborough) 항공쇼! 수많은 관람객이 모여든 가운데 초음속 전투기 DH-110 '시 빅센(Sea Vixen)'호의 묘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 전투기가 갑자기 공중에서 폭발하면서 동체가 산산조각난다.
비행기 파편이 관중들에게 떨어지고 항공쇼 현장은 끔찍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사고로 관람객 28명이 숨지고 최신예 전투기를 선보이는 행운을 안았던 조종사 존 데리도 목숨을 잃었다.
●매킨리 피습사건 발생(1901. 9. 6)
1901년 9월 6일 미국 대통령 매킨리가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에서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촐고츠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매킨리 집권 당시 미국은 1895년에 일어난 쿠바 독립운동과 그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가혹행위에 대한 소문들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매킨리는 이 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스페인과 전쟁(미국-스페인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협상에서 매킨리는 패전국 스페인의 해외식민지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둘 것을 주장했고, 이로써 미국은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 매킨리는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미루었던 국정 운영에 박차를 가하던 중 총격 테러를 당해 그로부터 8일 후 사망했다.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영어 사이트]
The Internet Public Library에서 매킨리 관련 문헌들을 비롯해 초기의 기록영화 등의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백악관 공식 사이트에서 매킨리에 대해 소개한다.
●애덤스 Jane Addams(1860.09.06~1935.05.21)
●애덤스 Jane Addams1860년 9월 6일 태어남 / 1935년 5월 21일 죽음
애덤스 "미국의 미래는 가정과 학교에 달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그들이 배운 대로 성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제인 애덤스
애덤스는 북아메리카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헐 하우스의 창시한 미국의 사회개혁가·평화주의자이다. 애덤스는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을 여행하던 중 런던의 화이트채플 산업지구에 있는 사회복지기관인 토인비 홀을 방문하고, 미국에도 그와 비슷한 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귀국 후 애덤스는 시카고 노동자지구의 빈 집을 얻어 헐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1889년 9월 18일 이사했다. 헐 하우스는 자원봉사자나 미래의 사회사업가들에게 사회에 봉사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고 일하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이밖에도 애덤스는 최초의 소년심리원법과 공동주택법, 여성노동자의 1일 8시간 노동제 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사법제도 정립을 위해 힘썼으며,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옹호했다. 1910년에는 전국 사회사업가 회의에서 최초의 여성 의장이 되었으며, 1915년 국제 여성회의 의장이 되어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연맹'을 설립했다.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와 함께 1931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한글 사이트]
<조선일보>는 애덤스가 포함된 미국 ABC 방송 선정 20세기의 여성들에 대한 기사를 제공한다. 흰돌교회 홈페이지에서 제인 애덤스를 비롯한 위인들의 어록을 제공한다.
[영어 사이트]
헐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는 제인 애덤스가 이끌었던 사회복지사업들을 소개하며, 사진과 링크 등 관련 자료를 제공한다. Chicago Public Library에서도 헐 하우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헐 하우스와 애덤스 관련 도서목록을 제공한다. Nobel e-Museum에서 193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애덤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영국 청교도, 신대륙으로 떠나(1620.09.06)
1620년 9월 6일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배 한 척이 닻을 올렸다.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로부터 박해(괴롭힘을 당함)를 받던 청교도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 이 배는 9주에 걸친 항해 끝에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 동해안에 이르렀다.새 땅에 발을 디딘 청교도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불렀다. 이들의 북미 대륙 생활은 쉽지 않았다.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그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다. 이듬해 봄 살아남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길을 닦는 등 본격적으로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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