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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일자 : 2022년 04월 16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 종일 맑고 무더웠으며 오후 늦게부터 강한 바람이 불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05도에서 영상 19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황산면사무소(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우항리사거리(남리 버스정류장)-황산 남리5일장 시장-우항리 시멘트 마을도로-시등마을회관과 팔각정-황산성당-초지능선-사각정-지독한 가시잡목-
황산초등학교 후문(초등학교 내 시멘트 포장도로)-황산초등학교(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갈림삼거리(남리길 1차선 포장도로 분기, 남리마을 표지석)-남리삼거리(명량로 2차선 포장도로 분기)-
덕암삼거리(남리 버스정류장)-덕암길 시멘트 포장도로-남리리 갈림사거리(좌측)-덕암길 1차선 포장도로-덕암마을 민가들-갈림삼거리(우측)-밭경작지와 개사육장-능선진입-무명안부-70.4
암봉(덤박산, 이정판, 돌탑과 벤취쉼터, 바위암릉)-준희님 응원판-잡목등로-논과 밭경작지로 우회-연당리 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사거리(우측)-비포장임도-능선진입-무명묘지-무명묘지-69.4
무명봉(띠지들)-무명묘지-무명묘지2-시멘트 포장도로-연당고개(35미터 이정판, 해남군나무은행, 이동통신탑, 남석길 2차선 포장도로)-비포장임도 능선진입(농업회사법인팜스코그린농장)-
김해김공 묘지-묘지지대-밭경작지(편백나무 조림지)-지독한 가시잡목-52.1봉(법광님 띠지)-비포장임도와 민가-비포장임도-관춘리 시멘트 포장도로-밭경작지-비포장임도-관춘길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밭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밭경작지-관춘리 관춘길 2차선 포장도로-관춘2육교(18번 공룡대로 4차선 포장도로 통과)-관촌길 2차선 포장도로-부곡리 갈림삼거리(관촌
버스정류장과 관촌리 표지석,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소정삼거리(소정삼거리 버스정류장)-소정마을 표지석-소정 버스정류장-68.2봉(신흥뫼산 우회)-평덕 버스정류장(평덕리 옥매관광농원
표지석)-옥연마을 표지석-옥연리 버스정류장(해남옥석공예전시장)-옥동삼거리(폐교된 옥동초교, 801번 명랑로와 삼원길 2차선 포장도로 갈림삼거리, 옥매 버스정류장)-801번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옥매교회 입간판(좌측)-명랑로 시멘트 포장도로-밭경작지-영랑로 시멘트 포장도로-밭경작지-능선진입-비포장임도-148 무명봉(돌탑들)-폐광산터-옥매산(사라진 167.9봉, 쇠말뚝
제거기념비와 돌탑)-무명안부-폐광산터 등로-돌탑들 등로-전망바위-조망처-뚜렷한 하산등로-옥매길 시멘트 포장도로-용암리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좌측)-신흥마을 옥매길 시멘트
포장도로-801번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원문 버스정류장(용암리 서해랑길 안내판)-사교와 신월 버스정류장-사교IC교(18번 공룡대로 4차선 포장도로 통과)-사교교차로-송정 버스정류장-
해남5코스 이정표(문내면사무소 4.2 Km와 충무사 4.8 Km, 우수영관광지 9.3 Km)-용암리 갈림삼거리(용암리 버스정류장, 우측)-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영암국유림관리소-낙원교회-
폐교된 문내초등학교(우측)-문내원동사거리(좌측 남석길 2차선 포장도로)-명랑로 시멘트 포장도로-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 갈림5거리-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마루금 우회)-춘수분재-
원동제 공사장-산들농원-석교 버스정류장 갈림삼거리(석교리 표지석과 반석교회 표지판)-석교길 1차선 포장도로-용암제 공사장-마루금 접속(석교리 1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묘지들-
잡목등로-71.8봉(구안산, 띠지들)-밭경작지-잡목등로-65.2 무명봉(띠지)-묘지3기-묵은 시멘트 포장도로-석교길 1차선 포장도로-심동마을 갈림사거리(심동 버스정류장, 심동마을회관,
육각정, 반석교회 입간판)-심동길 2차선 포장도로(마루금 우회도로)-석교리 갈림삼거리(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삼거리(마루금 접속)-능선진입-잡목등로-68.5 무명봉(띠지들)-빛바랜
억새지대-가숫고개(문내화원로 2차선 포장도로, 해들녁 육묘장)-비포장임도-갈림삼거리(우측 능선진입)-무명묘지-76.5봉 갈림삼거리-76.5봉(산승산, 띠지들)-갈림삼거리 복귀-
절충장군 함안조공 묘지-밭경작지-갈림사거리(문내화원로와 충평길 2차선 포장도로, 충평 버스정류장, 충평마을 도로표지판)-충평길 2차선 포장도로-성도의집(성도재가복지센터,
우측 밭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밭경작지-능선진입-밭경작지(농민과 대화)-한우축사-능선진입-46.8 무명봉(띠지)-축사2동-밭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잡목등로(충평제일저수지 방향
우회)-마루금 접속(담배밭)-능선진입-55.6 무명봉(띠지, 편백나무 군락지)-시멘트 포장도로-밭경작지-철망 밭경작지-능선진입-밭경작지-비포장임도-고당리 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좌우측 능선등로 우회)-수준점(46미터)-김해김씨세장산-갈림삼거리(우측 시멘트 포장도로)-89 무명봉-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동산(38.5봉)-고당리 일성길 갈림사거리-
일성길 갈림사거리(민가)-일성길 갈림사거리 2차선 포장도로-일성길 시멘트 포장도로(농막과 축사)-농막과 밭경작지(돌탑과 돌계단)-지독한 잡목 오르막 등로-뚜렷한 등로접속-
돌담-296.7미터 일성산 갈림삼거리(띠지들)-대나무와 산죽등로-일성산(336.7봉, 335.1미터 이정판, 인식불가 삼각점,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갈림삼거리 복귀-급경사 내리막 등로-
무명안부-가시잡목-무명안부-준희님 응원판-바위-293.6봉(이정판)-전망바위-219.3 무명 바위암봉-잡목등로-비포장임도 안부-김해김공 부부묘지-153봉(154 이정판)-17번
송전탑(조망)-바위너덜 등로-KT화원 이동통신탑-묘지들-밭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77번 관광레저로 4차선 포장도로(수정카센터)-시멘트 포장도로-바위와 비닐하우스-마늘밭-능선진입-
지독한 잡목등로-시멘트 포장도로-진주강공 묘지들-묵은 밭경작지와 공사장-잡목 능선진입-비포장임도 안부-묘지들-능선진입-116.7 무명봉(굵은 소나무)-무명안부-180.9봉(이정판)-
잡목등로-214.3봉(이정판)-가시잡목등로-270.8봉(깨진 호출봉 이정판)-248.3 무명봉(관목 참나무 가지2)-비포장임도-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176.1봉(이정판)-가시잡목등로-
화봉재(화봉마을 표지석, 도로표지판, 한주광로와 봉화길 갈림삼거리)-산행종료
산행거리 : 34.73 Km (황산면사무소에서 화봉재까지)
산행트랙 :
산행시간 : 13시간 07분 (05시 21분부터 18시 29분까지 모든구간 포함하여)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3시 50분 진도 여관에서 기상 해 샤워 후 전날 편의점에서 구매한 누룽지와 햇반 및 김치로 아침식사
04시 25분 여관에서 산행 날머리인 화봉재를 향해 출발
05시 00분 화봉재에서 예약한 화원면 택시를 만나 황산면사무소를 향해 출발(010-3613-2300, 32,000.-원)
05시 21분 황산면사무소에 도착해 산행 준비 후 곧바로 산행 시작
올때 - 18시 29분 화봉재에서 화원지맥 제3구간 산행 종료
19시 10분 해남군 문내면 봄호텔 투숙(50,000.-원)
19시 50분 호텔 근처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으로 저녁 해결(8,000.- 원)
21시 00분 모텔로 복귀 해 곧바로 취침
화원지맥이란 ???
화원지맥은 땅끝기맥 첨봉(352봉)에서 서북으로 가지를 쳐 화원반도를 떠받들고 목포앞바다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83.5 Km되는 산줄기로 영암호와 금호호의 남쪽 분수령이 된다.
덕음산(덕룡산, 327 봉) , 만대산(493봉), 금강산(488봉), 역마산(308.3봉), 성산(146봉), 형제봉(143.1봉), 국사봉(174봉), 옥매산(174봉), 일성산(335.1봉), 운거산(318봉), 금굴산(228봉), 깃대봉(229.3봉)을 지나며 이 산줄기의 이름은 반도를 지나는 특성을 살려 화원지맥이라 칭한다.
초여름 무더위에 가시잡목 지옥과 사투를 벌이고 드넓은 밭경작지와 포장도로로 이뤄진 이국적인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가장 진행하기 힘든 산행 한구간을 무탈하게 마무리했음에 감사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이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내려진 올바른 해답이 없기 때문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화원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전남 해남군과 그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 그리고 다음의 백과사전, 산림청,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어제 진도로 내려가 밀린 숙제처럼 남아 있던 짧은 진도지맥 마지막 구간을 조금 이른 시간에 잘 마무리하고 오늘 걸어야 할 화원지맥 제3구간 들머리 부근을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등로와 주변 환경들을 확인하며 몇장의 사진으로 남기다 보니 초반 약 5 Km 정도는 어제 작성한 트랙과 사진으로 보완을 해도 되는데 괜시리 후회될 것 같아 차량을 화봉재에 주차시키고 택시를 이용해 황산면사무소 앞으로 이동을 해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어짜피 내일까지 산행을 진행해 화원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기로 했기에 오늘 조금 늦더라고 화봉재까지 진행하고 내일 일요일엔 조금 일찍 산행을 마무리하고 귀가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보지만 또 어떤 변수에 의해 어떻게 계획이 변경이 될지 모르기에 늘 긴장의 연속이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거의 마무리하는 지점 근처에 가까이 다가서니 산행 후 후회하지 않토록 조금 더 열정적이고 정상적인 산행을 고집하는 산행으로 변해 스스로에게도 놀라는 시간들이다.
어제 진도지맥 산행을 일찍 마무리하고 애마를 이용해 확인한 황산면사무소에서 덕암마을까지 약 3.5 Km 정도는 제외하고 진행을 해도 될 듯 싶은데 산행 후 후회가 될 듯 싶어 어둠속에 다시 황산면사무소에서 시작해 가시잡목들을 뚫고 황산초교 뒷동산을 둘려 긴 도로를 따라 덕암마을까지 오니 여명이 밝아오고 능선 초입에 키우는 개들이 이방인의 출현에 발광을 하고 울부짖는다.
초반부터 가시잡목으로 호된 신고식을 하고 조금 더 전진하니 갑자기 거대한 바위암릉이 이어지고 곧이어 돌탑과 벤취쉼터가 설치되어 있는 70.4봉에 도착을 해 등로 우측으로 걸어 온 마루금을 확인하는 사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아침 일출이 시작되며 힘겹게 세상 구경을 시작한다.
일출 이후 지독한 가시잡목들로 인해 정상적인 마루금을 타지 못하고 길게 우회하기도 하고 짧게 끊어 지름길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가능하면 마루금과 비슷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하며 걷다 보니 농사철이 되면서 드넓은 밭경작지에서는 농작물들을 피해 밭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우회하는 횟수도 증가하였다.
그렇게 도로와 밭경작지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옥공예품점들이 많은 옥연리 마을 지나 폐광산터가 있는 옥매산에 오르니 정상은 이미 일제시대 때 사라지고 흉물스런 폐광산터만 아픈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사라진 옥매산 정상을 돌고 돌아 어렵게 통과하니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박무속에 펼쳐진 환상의 풍경들과 조망들을 즐기며 잠시 우울해졌던 옥매산에서의 기억을 잊어 본다.
바로 발 아래 잠시 후 걸어 만나야 할 용암리 들판과 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비산비야의 마루금을 따라 가면 그 끝자락에 희미한 일성산과 그 좌측으로 흐르는 마루금의 흐름이 보이고 중앙부 뒷쪽으로는 금호호와 산이면 그리고 영암호 지나 보여야 할 흑석지맥이 박무속에 숨어 있어 산객의 애만 태우는데 그 앞으로 펼쳐진 나즈막한 무명의 산이면 산줄기만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 있다.
폐광산으로 정상까지 사라진 옥매산에서 일망무제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다시 이어지는 도로와 밭경작지들로 연결되는 비산비야의 마루금을 찾아 우회도 하면서 어렵게 진행하니 드디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일성산 오름길에 도착을 하고 굵은 땀방울을 수없이 등로에 뿌리며 가시잡목들과 한판 큰 승부를 펼친 후 어렵게 정상에 도착을 하니 올라오며 수고한 보상이라도 해 주듯 환상의 풍경과 조망이 반겨주고 있다.
제일 먼저 북쪽으로 금호호와 바다를 이어주는 거대한 수로 뒤로 금오도 섬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294미터의 지령산이 그리고 우측 뒤 저 멀리 오래 전 군부대로 들리지도 못하고 먼 발치에서만 안타깝게 바라 봤던 흑석지맥의 소아산과 대아산 줄기가 희미하게 보이고 금오도 뒤로는 영산기맥의 끝자락인 목포에 솟아 있는 유달산이 희미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바로 이런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그 이름들을 불러 줄 수 있으니 올라오는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하며 다시 산길에 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성산을 내려 와 제법 옹골진 산세를 자랑하는 완만한 내리막 능선 등로를 따라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과 풍경을 감상하며 진행하니 점점 고도를 낮춰 153봉에 도착을 하고 17번 송전탑이 서 있는 전망대에서 북쪽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화원지맥 마루금이 제법 고도를 높혀 이어지는데 바로 앞에는 대부분의 선답자들이 구간 나누기를 할 때 이용했던 수정카센터가 있는 77번 4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제법 높게 이어지는 마루금을 따라 오늘 산행을 마무리해야 할 화봉재를 찾아 보지만 바로 앞 호암산 갈림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마루금은 보이지 않고 중앙부 뒤 저 멀리 내일 만나야 할 운거산 방향만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마루금 우측 아래로는 77번 4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화원면이 제법 도시의 모습으로 내려다 보이고 그 뒤 금호호로 이어지는 바닷길 넘어 지령산이 길라잡이 노릇을 하면서 존재감을 알린다.
어제 진도지맥을 깨끗하게 잘 마무리하고 이곳 황산면사무소 앞으로 이동을 해 애마를 타고 덕암마을까지 사전 답사를 해 그 사전답사를 한 내용으로 덕암마을부터 시작을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 내일까지 이곳 해남에 머물며 화원지맥을 마무리하고 귀가하기로 결정을 했기에 오늘 조금 늦더라도 지난 번 산행을 마무리한 이곳 황산면사무소 앞에서 정상적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애마를 봉화재에 두고 택시를 이용해 새벽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황산면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중앙부 서쪽에 위치한 면으로 해남반도에서 화원반도로 옮겨가는 길목에 위치한 면이다.
남쪽에는 남해가 있고 북쪽에는 금호호가 있으며 남동쪽에는 고천암호가 있는데 저산성 산지가 널리 분포하고 있어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며 서쪽을 제외한 3면의 바닷가와 호숫가에는 농경지가 널리 펼쳐져 있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산일면과 황일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가 뒤에 황일면은 황원면(黃原面)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14년 황원면과 산일면이 합쳐져서 황산면(黃山面)이 되었으며 지명은 두면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사용하였다.
현재 13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개 1914년에 여러 동리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으며 지명을 조합하지 않고 한 마을의 이름을 대표로 내세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항리(牛項里)는 본래 그곳의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목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여 우항이 되었다고 하며 조선지지자료(해남)에 우항제(牛項堤)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은 새벽에 너무 어둡게 찍혔기 때문에 어제 오후 들려 담은 사진으로 대신해 본다.
아직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이라 불이 꺼져 있는 황산면사무소 건물은 어둡기 그지없고 그 앞 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 역시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고요하기만 한데 어둠속에 보이는 이곳 황산면 우황리 마을 풍경이 마치 이 산객이 어릴적 시골에서 만난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오래된 나즈막한 건물들을 좌우측에 두고 빛을 서서히 잃어가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어가니 남북으로 교차하는 공룡박물관길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사거리 건너 우측으로 우항리공룡화석지라는 표지판이 눈길을 잡고 도롯가 우측 옆으로는 남리정류장이라는 버스정류장이 보여 우황리공룡화석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가 보인다.
우황리공룡화석지의 정식명칭은 해남 우항리 공룡과 익룡 및 새발자국화석산지(海南 右項里 恐龍과 翼龍 및 새발자국化石産地)로서 1998년 10월 1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이 화석군 및 퇴적층군은 해남읍에서 서쪽 방향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금호방조제 가장자리를 따라 약 5Km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은 과거에 해남만의 남쪽에 위치한 바닷가였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수행된 발굴 및 연구에 의해 다양한 공룡발자국 화석 514점, 익룡류발자국화석 443점, 새발자국 화석 천여 점, 규화목 및 탄화목 화석 수십 점, 개형충 미화석 수만 점, 생흔화석 수십 점 및 새로운 발굴이 요구된 익룡 및 공룡뼈 화석 수십 점 등이 발견 및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 물갈퀴새의 발자국 화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에오새지방의 신생대 지층보다 4천만 년 정도 앞선 중생대 백악기 지층으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세계 유일의 대형 용각류 공룡발자국 화석, 세계 최대의 발크기와 발자국 개수(이전 세계 최대 30여 점, 우항리 443점)를 가지고 있는 테로닥틸로이드 종류의 익룡발자국 화석,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절지동물 보행흔을 가진 생흔화석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공룡과 익룡 및 새 발자국이 한 층에서 발견된 세계 유일의 화석지이기도 하다.
산행하기 바쁘고 또 늦게 끝나거나 도로 정체가 되기 전 일찍 귀가를 서두르다 보니 지방의 특색이 있는 이런 우황리공룡화석지를 둘러보지 못함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남리정류장이 있는 갈림사거리를 건너 계속 이어지는 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 앞으로 제법 규모가 큰 시등교회가 보이고 곧이어 도로 좌측 옆으로 황산남리5일장이라는 네온싸인 불빛이 보이는 곳 우측 골목길로 마루금이 이어져 짧게 고민하다 정상 마루금으로 들어가니 새로 지은듯한 커다란 공장건물에서 좌측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시등마을회관 건물과 육각정이 나타난다.
시등마을은 호구총수에 황일면 장등리(場嶝里)로 나타나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에도 황원 남이장 3일 개시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장이 있었던 것과 마을이 오래전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이 서게 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1914년 황원면과 산일면을 병합한 황산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주변에 장이 서게 되어 차츰 큰 마을이 되었다.
우황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리로서 산과 등성이가 많고 못이 많으며 우항리란 지명은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겨서 소목 또는 우항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기성과 우항이 있는데 우항마을에 지방민속자료 제7호인 정명식고가가 있고 천연기념물 제394호인 해남우항리 공룡과 익룡 및 새발자국화석산지가 있으며 마늘이 많이 재배되고 주소득원은 쌀이다.
그 육각정을 빠져 나가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나고 그 우측 위로 황산성당 삽자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주차장을 빠져 나가니 등로는 우측 풀밭으로 이어지고 살짝 이슬을 머금은 잡풀 밭으로 들어가니 좌측으로 사각정자 지나 지독한 잡목이 앞을 가로 막는데 어둠속에 난감하기만 하다.
이리저리 사라진 등로를 찾아 어렵게 진행하니 우거진 잡목 등로는 금새 끝이나고 갑자기 눈 앞으로 넓은 공터와 커다란 창고건물이 나타나고 그 좌측으로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콘크리트 계단이 나타나는데 바로 황산초등학교내로 통하는 계단이다.
그 계단을 통해 황산초교 교내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따라 정문 방향으로 걸어가니 금새 황산초등학교란 커다란 표지석과 비어있는 위병소가 보이는 정문 앞 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에 다시 도착을 해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황산초등학교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로서 1922년 4월 1일 황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고 1999년 9월 1일 황선서초등학교를 통폐합, 2000년 3월 1일 한자분교장, 징의분교장을 2000년 9월 1일 원호분교장을 편입하였다.
2001년 1월 1일 농어촌 현대화 시범학교로 지정되었고 2002년 6월 18일 도지정 학교급식 연구학교로 운영보고회를 개최하였으며 2004년 2월 29일 징의분교장을 통폐합하였다.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철쭉이고 컴퓨터, 배드민턴, 문예, 리코더, 영어, 중창, 종이접기 등의 계발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남해군 황산면 남리리 31번지에 있다.
황산초등학교를 정문으로 빠져 나와 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남리마을 입구가 갈리는 갈림삼거리가 보이는데 그 입구에는 남리마을이란 커다란 표지석도 서 있다.
그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시등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금새 좌측의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남리삼거리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그 이름이 바뀐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진행을 이어간다.
남리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법정리로서 명칭유래를 보면 남리(南利)는 고려 때부터 남리(南里)로 칭하고 압리(鴨里. 앞리에서 파생된 말)라고도 불렀다.
남(南)은 따뜻하고 풍요로움을 일컬으며 리(利)는 하늘이 지니고 있는 4가지 덕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의로움의 조화나 만물이 이루어지는 가을을 뜻하므로 남리는 따뜻하고 풍요로움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시등리와 신동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로 개설되었고 현재 남리마을, 시등마을, 관두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해남 3개 역 중 하나인 남리역이 있던 곳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6)의 해남현 조에 의하면 전라우도 벽사도제방에 딸린 소로역으로 해남현 서쪽 35리(약 13.75 Km)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리마을은 고려 때 승라주 역승(驛丞)에 속한 것으로 보아 마을 형성 시기는 600여 년 전으로 볼 수 있고 또 남리역은 동국여지승람에 해남 3역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32)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편에는 옛날 남리역이 있었는데 왜구로 인해 없어졌다 라는 기록이 있다.
입향조는 조선 중종 때 청주한씨 형제가 내려와서 한 사람은 진도로 가고 방(方)은 정착하였다고 전하며 호구총수(戶口總數, 1789)에는 남리리와 시등리는 황일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시등마을은 호구총수에 황일면 장등리(場嶝里)로 나타나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에도 황원 남이장 3일 개시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장이 있었던 것과 마을이 오래전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이 서게 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1914년 황원면과 산일면을 병합한 황산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주변에 장이 서게 되어 차츰 큰 마을이 되었다.
남리삼거리를 지나니 여명이 밝이오기 시작하고 이제 진행 방향으로 덕암삼거리 지나 우측 저 멀리 덕암마을과 그 뒷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언듯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저곳까지는 어제 애마를 이용해 확인을 했던 곳이라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진행해야 할 서쪼과 그 좌우측을 둘러봐도 제대로 된 높은 산 하나 보이지 않고 비산비야의 구릉지로 이뤄진 풍경이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며 이국적인 풍경으로 남겨진다.
그렇게 한동안 더 특이할 것 없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덕암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좌측 옆으로는 남리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시멘트 포장도로와 1차선 포장도로가 갈리는 두개의 도로가 나타나는데 첫번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루금이 이어진다.
덕암리는 원래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연당리와 합병되어 덕암마을이 된 곳으로 연당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리로서 면소재지의 정서쪽에 있으며 북으로 해안선을 끼고 산이면을 바라보고 서로는 문내면과 접하여 있다.
북으로는 진도로 통하는 도로변이 지나는 지역이고 논과 들, 등성이가 많으며 연당리란 지명은 연못이 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당이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연당과 덕암이 있는데 농업이 주업이며 주소득원은 쌀이다.
남석길 2차선 포장도로가 아닌 그 바로 직전의 덕암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인 북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낡은 가옥들과 사업장들이 몇채 보이고 곧이어 농업법인의 커다란 유통 창고 지나 도로 좌우측으로 드넓은 밭경작지들이 펼쳐지는데 배추와 고추농사가 주를 이루고 일부 밭에는 아직 아무 농작물도 파종하지 않고 빈 경작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잠시 후 도로 우측으로 거대한 축사농장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몇개의 거대한 축사들이 더 나타나는데 대부분 항우 사육 축사들이었다.
한동안 더 그렇게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거대한 축사 몇개를 통과하니 눈 앞으로 다시 축사가 보이고 그 축사 지나 좌측의 덕암마을로 꺽이는 지점 직전 우측을 보니 드넓은 밭경작지 지나 파란 초지지대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평지처럼 보이는 대평원 우측 뒤로 희미한 봉우리 몇개가 나즈막하게 박무속에 보여 지도를 찾아 보니 어제 넘어 온 국사봉 방향의 산줄기처럼 보인다.
도로 좌우측으로 펼쳐진 드넓은 밭경작지와 지난 주와 오늘 새벽에 걸었던 마루금을 살펴보고 계속 전진하니 이제 도로 좌측 앞으로 축사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1차선 포장도로가 분기하는데 그 도로가 바로 덕암마을로 통하는 화원지맥 마루금이기에 지금까지 걸어 온 덕암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우측 직진으로 보내고 좌측의 1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덕암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 밭경작지 넘어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방향으로 비포장임도가 개설되어 있는데 그 방향이 바로 마루금이다.
덕암은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연당리의 자연마을 중 한 곳인 덕암에서 차용된 이름으로 덕암마을의 입향조는 경주정씨라고만 전해진다.
연당리란 지명은 연못이 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당이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연당과 덕암이 있다.
덕암마을 초입의 민가 몇채와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지나 우측으로 분기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민가와 고추밭경작지 사이로 전진하니 능선 진입로 입구에 작은 개 사육장이 나타나는데 이방인의 출현에 몇마리의 개들이 울부짖고 주민들에게 피해가 될 것 같아 재빨리 잡목들을 헤치고 능선으로 들어가니 산속은 아직도 어둠침침하다.
선답자의 산행 띠지로 이곳이 정상 마루금임을 확인하고 조금 더 걸어 전진하다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진행하니 무명안부 건너 작은 돌탑이 보이는 거대한 바위암릉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 바위암릉을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방금 전 떠 오른 일출로 인해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해가 떠 오른 방향을 자세히 살펴보니 첫구간 때 넘었던 금강산 주위의 산줄기가 아닐까 보여진다.
바위암릉에서 우측으로 막 떠 오른 일출을 감상하고 일출이 시작되는 바로 아래쪽으로 비산비야를 이루는 화원지맥 마루금도 찾아 본 후 조금 더 전진하니 다시 꽃이 지기 시작한 진달래나무와 잡목들이 보이는 짧은 능선 지나 또 다른 거대한 바위암릉이 나타난다.
그 바위암릉을 따라 오르니 제법 높은 돌탑 하나와 정상부에 운동기구 및 벤취쉼터가 보이고 나뭇가지에 준희님이 이정판을 걸어 둔 70.4봉에 도착을 하는데 최근의 다음지도에는 이곳을 덤박산이라 하였다.
덤박산이라 불려지는 70.4봉 정상에서 방금 전 막 떠오른 일출이 보이는 동쪽을 살펴보니 바로 눈 앞으로 미륵2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 낮게 펼쳐진 논경작지를 따라가면 오늘 산행을 시작한 황산면사무소 방향의 마을들과 그 우측으로 지난 구간 걸었던 수장산 방향 넘어 땅끝기맥의 덕룡과 주작산 그리고 우측 가장자리 방향으로 두륜산이 보이기 시작해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지도를 펴 보니 맞는 듯 싶다.
그러면 해가 떠 있는 바로 아래 솟아 있는 봉우리 방향은 바로 해남 위쪽으로 첫구간 때 걸어 넘었던 금강산 방향이 맞을 듯 싶은데 확신은 할 수 없을 정도로 박무가 심하다.
그 덤박산이란 70.4봉에서 진도지맥도 보인다고 알고 있었는데 조망이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좌측인 서쪽으로 출발하니 바위암릉이 끝나는 지점 좌측 나뭇가지에 준희님의 응원판이 걸려있어 사진에 담고 능선으로 드니 키 작은 소나무와 진달래나무 그리고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어 진행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도 희미한 등로를 따라 선답자들의 흔적을 찾아 진행하다 보니 잡목들이 우거져 도저히 진행이 불가능한 안부 지점을 통과하고 조금 더 전진하다 도저히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우측으로 보이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논경작지가 펼쳐져 그 논둑을 통해 마루금 우측으로 우회하니 다시 밭경작지와 묵은 공터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니 원마루금과 만나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산행을 이어간다.
남서 방향인 직진으로는 거대한 축사 건물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마늘밭이 드넓게 펼쳐진 그 갈림사거리에서 우측인 북서 방향으로 나 있는 비포장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비포장임도를 따라 한동안 걸어 오르니 우측으로 넓은 초지지대가 펼쳐지는 곳에서 비포장임도를 좌측으로 보내고 우측 언덕으로 올라 초지지대를 좌측에 두고 잡목 경계 등로를 따라 오르니 무명묘지 지나 잡목들이 우거진 능선으로 진입된다.
이리저리 키 작은 잡목들을 헤치며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인 무명묘지 한기 지나 등로는 좌측으로 휘어지고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들을 헤치며 어렵게 전진하니 등로는 다시 좌측으로 휘어져 방금 전과 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향하는데 잠시 더 전진하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는 69.4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을 남기며 긴 한숨을 내쉰다.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속에 걸려있는 띠지들이 보이는 69.4 무명봉 지나 아직 곱게 피어 있는 분홍빛 진달래꽃을 감상하며 걸어가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등로는 우측인 남서 방향으로 틀어지고 다시 무명묘지 2기를 더 만난 후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이동통신탑과 해남군나무은행 이정판 및 반바지님이 종이코팅지에 35미터의 연당고게라 적어 놓은 연당리 남석길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연당고개란 이름은 정식 명칭은 아닌듯 보이는데 아마도 이곳이 연당리라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니 연당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리로서 면소재지의 정서쪽에 있으며 북으로 해안선을 끼고 산이면을 바라보고 서로는 문내면과 접하여 있으며 북으로는 진도로 통하는 도로변이 지나는 지역이다.
논과 들, 등성이가 많고 연당리란 지명은 연못이 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당이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연당, 덕암이 있고 농업이 주업이며 주소득원은 쌀이다.
연당고개라 불려지는 남석길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비포장임도를 따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녹색철망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넘어로는 거대한 건물들이 보인다.
언덕으로 올라 김해김공 묘지가 있는 곳에서 등로는 우측인 서쪽으로 틀어지고 잠시 잡목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몇기의 묘지들이 연속으로 나타나는 언덕으로 올라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곳에서 등로는 다시 좌측인 남쪽으로 휘어져 이어진다.
잠시 잡목들을 헤치고 내려오니 밭경작지에 편백나무 어린 묘목들이 식재되어 있고 그 조림지 지나 건너편 잡목능선으로 걸어가며 좌측을 보니 방금 전 좌측에 두고 진행한 건물들은 팜스코라는 거대한 축사 건물들인데 위생 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 생각보다 분뇨 냄새는 별로 나지 않는다.
다시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들을 뚫고 나즈막한 능선으로 오르니 산벗들이 피어 있고 법광님 산행 띠지 한장이 유일하게 걸려있는 도상 52.1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우거진 잡목들을 헤치며 남쪽으로 어렵게 진행하는데 도상 표기된 봉우리가 아니였다면 굳이 올라 올 이유가 없는 봉우리이다.
너무나 힘들게 52.1봉 지나 내려가는데 등로 자체가 사라지고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도 실종된 잡목지대에서 트랙을 확인해 보니 선답자들도 제각각 다른 루트를 통해 어렵게 진행한 듯 보여 좌측으로 잡목들을 뚫고 내려가니 납골묘가 나타나고 벌목된 곳을 지나 너와집과 커다란 창고 건물이 있는 곳으로 어렵게 내려가니 강아지 한마리가 울부짖는다.
마루금을 우측에 두고 비포장임도를 따라 조금 우회하며 진행하니 드넓은 밭경작지 끝자락에 가시잡목들로 벽을 치듯 서 있는 곳에 도착을 해 좌측으로 이어지는 비포장임도를 타고 드넓은 밭 우측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가니 청보리밭이 펼쳐지는데 이제 보리도 이삭을 피우며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보리밭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우회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좌측으로 잘 정리된 밭경작지가 보이는 곳에서 다시 마루금을 만나 좌측 밭경작지 방향으로 어려운 산행을 이어간다.
잘 정리된 밭경작지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는 다시 능선으로 진입하는데 비포장임도로 이어지고 나즈막한 언덕을 넘어가니 무명묘지 지나 다시 잘 정비된 넓은 밭경작지 우측으로 드넓은 초지지대도 보인다.
사방팔방으로 드넓게 펼쳐진 초지지대와 밭경작지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관춘마을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잠시 후 걸어 올라야 할 옥매산 정상과 그 직전 우회하게 되는 신흥뫼산으로 표기된 68.2봉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보며 밭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니 관춘길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갈림삼거리인 관춘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밭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거니 비닐하우스를 씌운 고추밭이 나타나는데 농부 부부가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어 조심스럽게 조용히 통과한다.
계속 이어지는 밭경작지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교대로 두어번 더 통과하니 이제 관춘길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나고 그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전진하니 관춘2육교를 통과하는데 그 아래로는 18번 공룡대로 4차선 포장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육교이다.
18번 공룡대로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널 수 있는 관춘2육교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관춘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진행 방향으로 소정과 연흠마을 및 신곡마을로 이뤄진 부곡리가 보이고 그 마을들을 바라보며 남동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니 도롯가 어린 배추들에 스프링 쿨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고 있어 도로가 흥건히 젖어 있기에 조심해 진행을 이어간다.
다시 계속 관춘길을 따라 걸어가니 고공수로가 보이고 고추밭 비닐하우스 지나 관춘 버스정류장과 관푼리 방향이 표기된 멋진 표지석이 서 있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이제 그 명랑로를 따라 우측인 서쪽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관춘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리로서 북쪽으로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수간문과 섬이 있고 몇 개의 산이 있는 지역이며 관춘리란지명은 갓점이 있었다 하여 갓점골 또는 관춘, 입점이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관춘, 내산(두리, 내외리), 성만, 신성(신흥수), 산동, 평덕이 있으며 유적지로는 도장사 삼존불이 있다.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주유소와 한아름영농조합법인 그리고 황산제재소 넘어 소정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으로 부곡리로 갈 수 있는 부곡길 2차선 포장도로가 분기되고 그 옆으로 소정삼거리 버스정류장도 보이는 갈림삼거리이다.
소정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 곳인 소정에서 타용된 이름으로 소정마을은 광복 후에 부곡마을에서 분리되었고 1900년 경 삼덕농장과 옥동농장이 간척지화 될 때 몇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최초 입향조는 문화유씨 유동로라고 전한다.
부곡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리로서 논과 들이 많고 갓바우, 비롱 등의 섬이 있으며 지명은 물이 풍부하다 하여 명명하였고 자연마을로는 부곡, 신곡, 춘정이 있다.
소정삼거리 지나 오래된 민가와 상가들을 좌우측에 두고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소정마을이란 표지석이 서 있고 조금 더 걸어가니 진행 방향 도로 좌측 옆으로 잠시 후 올라야 할 신흥뫼산이라 불리는 68.2봉과 그 뒤로 암봉으로 솟아 있는 옥매산이 박무속에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진행 방향으로 마루금과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살펴보며 계속 도로 따라 전진하니 도로 좌측으로 소정과 연홈마을이 보이는데 연홈마을은 이제 그 이름이 사라진 듯 보이고 도로 옆으로는 소정이란 버스정류장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역시 부곡리에 속한 마을로서 부곡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법정리로서 명칭 유래를 보면 부곡(富谷)이란 명칭은 마을의 형국과 관련이 있다.
간척공사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는 형세를 동남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수(浮水), 부실, 부옥촌, 부뜰이라 불렀는데 후에 부곡이라 개칭되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부자 양반만이 살았다고 하여 부곡(富谷)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원면의 춘정리, 부곡리, 소정리, 외립리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부곡마을, 신곡마을, 소정마을, 춘정마을, 성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부곡은 부곡촌으로 춘정과 성산은 내립암 지역으로 황일면에 속하였다.
소정마을과 소정 버스정류장이 보이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에서 좌측 옛날 연홈마을 방향으로 들어가 나즈막하게 올려다 보이는 68.2봉을 다녀와야 하지만 잡목들이 심해 그곳으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눈길은 자꾸만 좌측 능선으로 향하며 결국 산행 후 후회만 남게 되었다.
이제 도로 우측으로는 고공수로 넘어 드넓은 관춘저수지가 펼쳐져 있고 그렇게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지나 온 방향도 확인하며 걸어가니 이제 진행 방향 도로 좌측 앞으로 잠시 후 올라야 할 옥매산이 많이 가까워진 모습으로 올려다 보인다.
잠시 후 우측으로 평덕리 옥매관광농원으로 갈 수 있는 방향이 표기된 커다란 표지석과 좌측으로는 평덕 버스정류장이 설치된 곳에 도착을 한다.
평덕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관춘리는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성리, 내외리, 평덕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로 개설되었으며 현재 관춘마을, 산동마을, 신성마을, 평덕마을, 성만마을, 내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관춘리(冠春里)의 명칭 유래를 보면 마을의 생김새가 갓을 쓴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갓점골 또는 입점이라고도 불렀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관촌리(冠村里)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로써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평덕마을은 원래 독립된 리였었는데 관춘리에 병합되어 지금은 자연마을이 된 곳으로 경주정씨 정자선이 고종 때 마을에 들어왔다고 전하는데 호구총수에 이미 평덕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있어서 마을 형성은 그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곳 평덕마을 입구는 바로 우회하며 통과한 신흥뫼산이라 불려지고 있는 68.2봉으로 올랐다 내려오는 마루금이 만나는 지점이라 더욱 아쉬움이 큰 시간이다.
원 마루금과 다시 만나는 평덕마을 입구와 버스정류장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니 좌측으로 해남옥석공예마을이란 입간판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옥연마을이란 오석의 표지석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도로 좌우측으로 공예전시판매장이란 가게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고 도로 좌측 민가 뒤로는 바위암봉으로 이뤄진 옥매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기 시작하며 문득 저 옥매산에서 옥이 많이 생산되어 옥공예 가게와 전시장이 많은 것은 아닐까 생각 해 보는 시간이다.
잠시 후 옥연리 버스정류장이 보이는데 옥연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를 옥연이라고도 불렀다는 자료가 눈에 들어 온다.
옥동리(玉洞里)는 옥연이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이 옥매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으로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옥동리의 옥과 마을 중앙이 제비집을 닮았다 하여 제비 연(燕)을 붙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옥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 다양한 가게들과 민가들이 보이는 옥연리 마을을 관통하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옥동 버스정류장이 있는 옥동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우측으로는 폐교가 된 옥동초등학교 부지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삼원길 2차선 포장도로가 분기하는 갈림삼거리이다.
옥동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리로서 해발 177m의 옥매산이 문내면 용암리와의 경계에 솟아있고 남으로 해안선을 드리우고 있으며 진도군이 접하여 있는 지역으로 많은 섬이 있다.
옥동리란 지명은 옥매산 밑이 되므로 옥동 또는 옥연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옥동, 옥연, 삼호가 있는데 마늘이 많이 재배되어 쌀과 함께 주소득원이 되고 있고 옥석 공예품이 유명하다.
이제서야 왜 이곳 옥동리에 옥석 공예품들을 생산하는 가게들이 많은지 궁금증이 해결되고 그 갈림삼거리 지나 조금 더 거어가니 좌측으로 옥매산으로 오를 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하는 입구에 드디어 옥매교회 입간판이 서 있다.
옥동삼거리를 지나니 명랑로는 이제 801번 명랑로로 바뀌고 옥매교회 입간판이 있는 곳에서 좌측 1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들어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 도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른다.
잠시 걸어 오르니 새로 지은 옥매교회를 손질하는 목사님을 만나 잠시 이야기 나누고 고추 비닐하우스 밭경작지를 통해 오르니 진행 방향으로 옥매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연두빛 새순들과 흰색 산벗꽃들이 피어 너무나 아름답다.
다시 좌측 밭둑을 통해 진행하니 새로운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오르니 옥매산 입구 바로 아래 밭경작지에서 부자지간에 트랙터로 밭 농사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드디어 마지막 밭경작지에 도착을 하고 농부에게 방해되지 않토록 조용히 능선 입구로 올라 뒤돌아 보니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도로와 밭경작지로 이어진 마루금이 박무속에 펼쳐져 있고 사진 중앙부에는 오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68.2봉 일명 신흥뫼산이 솟아 있고 그 좌측 옆으로는 관춘저수지도 보인다.
기온이 오르며 안개가 껴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지나온 마루금을 확인할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지나 온 방향으로 비산비야를 이루고 있는 마루금을 박무속에 확인하며 조금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생각보다 뚜렷한 등로가 열려있어 편안하게 걸어 오른다.
잠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좌우측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비포장임도가 나타나고 사진에 담고 키 작은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오르니 잠시 후 우측에서 올라 오는 뚜렷한 등로를 만나 다시 편안하게 오르는데 아마도 방금 전 만났던 비포장임도에서 직진으로 오르지 말고 우측 대나무 군락지 뒤로 올랐으면 좋은 등로가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으로 작은 돌탑들이 계속 보이고 등 뒤로는 잡목 사이로 지나 온 마루금과 옥연리의 들판이 내려다 보여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주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우측으로 크게 꺽이는 지점에 몇개의 커다란 돌탑들이 서 있어 잠시 사진에 담으며 물 한잔 마시고 진행을 이어간다.
처음에는 왜 이곳에 이런 돌탑들이 많은지 궁금했었는데 자료를 찾아 보니 이곳 옥매광산에서 죽어 간 광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돌탑이었음을 보고는 마음이 숙연해지는 시간이다.
돌탑들을 지나니 분홍빛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핀 뚜렷하고 부드러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곧이어 관목의 소나무 사이로 전진하니 이곳 역시 곳곳에 작은 돌탑들이 계속 눈에 들어 오고 곧이어 흉물처럼 파헤쳐진 거대한 옥매광산이 옥매산 정상까지 사라지게 만든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상이 사라진 옥매광산터를 살펴보고 조금 더 걸어가다 우측으로 오르니 쇠말뚝 뽑기 기념비와 돌탑 하나 그리고 옆으로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박혀있는 곳으로 올라 광산터로 인해 이미 사라진 옥매산 정상을 대신해 본다.
옥매산(168m)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168m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화반석(華班石)이 황원현의 매옥산(埋玉山)에서 나온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매옥산이 뒤에 옥매산으로 바뀌었고 옥돌이 매장되어 있는 것에서 지명이 유래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지형도에는 규석갱(硅石坑)이 표기되어 있고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옥매광산의 근로자가 1,200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대동여지도(20첩 4면)에는 옥매산(玉梅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제시대 때 너무 많은 옥을 파 내다 보니 옥매산 정상이 사라지고 그 높이마저 낮아져 변경된 이곳 쇠말뚝 뽑기 기념석이 서 있는 곳에서 물 한모금 마시며 북동쪽을 살펴보니 우측 앞쪽으로 옥동리를 통해 이곳 옥매산으로 올라 온 화원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좌측 앞으로는 잠시 후 옥매산을 내려가 통과해야 할 용암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정중앙부에는 성만저수지 지나 좌측부터 우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나즈막한 산줄기가 보여 살펴보니 금호호 앞으로 솟아 있는 나즈막한 지북산과 도장산을 필두로 덤박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나즈막한 무명 산줄기이다.
그 뒤로 펼쳐져 있을 흑석지맥의 산군들이 제법 높고 웅장하기에 찾아 보지만 박무로 인해 금호호도 보이지 않으니 아쉬움을 남기고 옥매산 정상를 대신하고 있는 쇠말뚝 뽑기 기념비가 있는 봉우리를 출발한다.
하지만 옥매산 정상부를 지나면서 선답자들이 걸어 둔 단 한장의 산행 띠지도 만나지 못하고 이정판도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정상부가 완전히 사라져 깊게 패여있는 폐광터가 흉물스럽게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사진에 담으며 전진하니 굵은 로프가 설치된 등로를 따라 나즈막한 무명안부로 내려가고 다시 분홍빛 진달래꽃이 만개한 짧은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정상부가 완전히 사라진 옥매산 정상의 폐광터가 다시 보인다.
옥매산은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질학적으로 진도의 해양판과 화원반도의 등줄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에 해당한다고 한다.
옥매산은 조선시대에 옥(玉)을 생산하고 전라우수영의 관아나 군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국가 봉산(封山)이었으며 또 명량대첩의 승전지로 잘 알려진 울돌목의 입구에 있어 왜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강강술래를 하였다는 설화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장식용 석재가 채취되었고 1924년부터는 명반석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하였는데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이용되었다.
당시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6년까지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10만 톤이 넘는 명반석이 채굴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군용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원료를 채석하기 위하여 대규모 광산으로 개발하자 실제로 옥매광산 인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근로자가 1,200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옥매산 정상은 해발 173.9m였지만 채굴이 진행되면서 깎여 나갔고 지금은 168m의 다른 봉우리가 정상이다.
옥매산의 명칭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해남)에 화반석(華班石)이 황원현의 매옥산(埋玉山)에서 나온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원래는 매옥산이었으나 이후 옥매산(玉埋山)으로 바뀌었으며 이렇듯 옥(玉)이 매장되었다 하여 옥매산(玉埋山)이란 산 명칭이 유래되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0첩 4면)에는 옥매산(玉梅山)으로 기재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는 규석갱(硅石坑)이 표기되어 있다.
옥매산은 땅끝기맥에서 뻗어내린 화원지맥에 속하고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백악기의 석영섬록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표 암상은 석영반암이다.
옥매산 주변에는 옥동리 등 옥 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옥동리 옥연 마을에서는 옥매산에서 생산된 옥을 이용해 공예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옥공예품 생산 공장이 있으며 옥공예품은 모양과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적으로 팔린다.
2012년 8월 15일 해남옥매산쇠말뚝뽑기추진위원회는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제거하여 평안을 기원하고 1945년 8월 일제에 의해 완도군 청산도 인근 바다에서 해몰된 옥매산광산 노동자들을 추도하는 행사를 가졌다.
해남옥매산쇠말뚝뽑기추진위원회는 산신제, 살풀이, 기풀이에 이어서 본 행사로 고유제, 쇠말뚝 뽑기와 복원 의례, 내력비 세우기 그리고 식후 행사로 평안기원제, 축하 행사 등을 개최하였다.
옥매산 등산로 곳곳에는 옥매광산 광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쌓은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 있으며 옥연리 마을에서 정상까지 왕복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어둠속에 진행하게 되면 주의가 필요해 보이는 폐광터를 살펴보며 다시 진행을 이어가니 우측 위로 언덕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위로는 많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어 그곳으로 짧고 가파른 오르 막 등로를 따르니 돌계단이 나타나는데 돌에 다양한 무늬들이 보이는 옥이라 생각되는 돌들이 보인다.
옥공예는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옥으로 장식품과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예를 말하는데 동양 문화권을 대표하는 보석으로 손꼽히는 옥(玉)은 아름다운 색채에 재질도 단단하여 예로부터 장신구·장식품 등의 귀중품이나 생활용품으로 가공되어 왔다.
그 색깔은 흰색, 노란색, 검은색, 녹색, 파란색, 적갈색 등으로 다양한데 우리 민족이 특히 좋아하는 비취는 녹색의 투명한 옥을 말한다.
옥은 삼국시대부터 즐겨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물품을 만드는 경공장에 장인 열 명을 배속할 정도로 옥공예가 발달했다.
전라남도 해남 지역은 예로부터 옥공예가 발달하였는데 이는 옥매산이 있어 품질이 좋은 원료를 구하기가 비교적 쉬웠던 덕분으로 옥매산은 옥돌이 매장되어 있다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을 정도로 옥 생산지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옥매광산의 노동자가 1,200명에 달하였다고 하고 특히 옥매산이 있는 황산면 옥동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옥공예품 생산지로 명성을 떨쳤으며 1970년대만 해도 옥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400여 명 있을 정도였다.
해남 지역 옥공예의 유래는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우수영에서 옥공예품을 만들어 궁중에 진상하였고 국가의 표상으로 사용하는 옥새도 해남의 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해남은 뛰어난 옥공예품 생산지로서 명성을 유지하였으나 지금은 옥동리에 사는 김육남, 박상훈, 박윤옥 등 세 명이 해남 옥공예 장인의 전부이다.
이 옥공예 명인 세 명은 2015년 6월 29일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옥공예 명인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작업실에서 옥공예품을 제작하여 매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과 생활용품 제작으로 해남 옥공예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옥게단을 타고 언덕으로 올라 북서 방향으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돌탑들이 계속 나타나고 잠시 진달래꽃과 관목의 소나무들 그리고 약간의 잡목들 사이로 뚜렷하게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다시 많은 돌탑들이 보인다.
몇장의 사진들을 담고 그 돌탑들을 통과하니 만개한 분홍빛 진달래꽃들이 지기 시작하며 등로에 떨어져 있어 오랫만에 꽃 사진들을 담으며 여유롭게 전진하니 갑자기 눈 앞이 열리면서 전망바위에 도착을 하는데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과 조망이 열리지만 박무로 인해 약간은 아쉬움도 남는다.
제일 먼저 오늘 걸어 만나야 할 화원지맥 마루금 상 일성산이 박무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북쪽을 살펴보니 용암리의 드넓은 들판 우측 뒤로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마루금이 펼쳐지고 좌측으로 돌아 이어지다 중앙부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일성산에서 좌측으로 77번 도로 지나 화봉재로 이어지는 마루금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 온다.
이제 눈을 서쪽과 서남 방향으로 돌리니 옥동리 들판 넘어 남해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그 바다 건너 우측 뒤로 주탑이 보이는 진도대교와 그 바로 좌측으로 진도타워도 보이고 그 좌측으로 올망졸망 진도지맥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좌측 가장자리 방향으로는 녹도가 중앙에 떠 있고 그 뒤로 희미한 진도지맥 마루금이 보이는데 그 좌측 아래로 보여야 할 점찰산 부근은 나뭇가지와 능선에 막혀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박무속에 아쉬운 풍경과 조망들을 즐기고 다시 뚜렷하게 나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우측으로 동백나무들과 키작은 진달래나무에 분홍빛 진달래꽃들이 피어 있어 화사하게 등로를 밝혀주고 있다.
그렇게 내려가니 계속 진행 방향으로 드넓은 들판과 용암리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보이고 사진에 담으며 진행하니 약간의 습지지대를 지나 우측으로 사면치기하듯 등로가 이어진다.
한동안 더 우측으로 사면치기 하듯 걸어 내려가니 옥매길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고 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드넓은 파밭과 용암리 마을 넘어 저 멀리 일성산으로 이어지는 비산비야의 마루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 이어지는 옥매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며 비산비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확인하니 워낙 길라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목표가 없으니 어느곳이 어느곳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갈ㅇ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좌측의 신흥마을 방향으로 나 있는 옥매길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드디어 민가들이 나타나고 주민들과 농민들이 밭경작지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어 방해가 되지 않토록 조용히 걸어 진행한다.
용암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 있는 리로서 구릉성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고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서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고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용암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용암, 너더리, 배나뭇골, 신흥리, 작은몰마을 등이 있는데 용암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용암리의 그것과 같고 너더리마을은 넓은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나뭇골마을은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신흥리마을은 배나뭇골 북쪽에 새로 번창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작은몰마을은 너더리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민가 사이로 보이는 밭경작지에는 드넓은 양배추가 제법 자라고 있고 그 밭둑마다 자연 유채꽃들이 노란 꽃들을 피워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풍경들을 선물하고 있다.
그렇게 옥매길이란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주민 한분이 말을 걸어 오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옥매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줘 실질적인 전설을 알게 돼 감사한 인사를 드리고 계속 걸어 내려가다 등로 좌측을 올려다 보니 드넓은 양배추 밭경작지 넘어 저 멀리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옥매산이 오를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올려다 보인다.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지나 좁은 마을 민가 사이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각 가정마다 거대한 농기구와 농기계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들이 보이지만 또 조금 더 전진하니 잡목들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폐가들도 보이기 시작해 각기 다른 두 얼굴이 공존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 사이로 펼쳐진 드넓은 양배추밭과 배추밭 및 마늘밭을 살펴보며 걸어가다 도로 좌측인 서쪽으로 양배추 밭 지나 나즈막하게 펼쳐진 산줄기이 보여 살펴보니 좌측 끝자락으로 진도타워와 진도대교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 100미터도 안되는 높이의 산줄기들이 문내면 방향의 우수영으로 이어지는 무명의 산줄기이다.
이제 도로 좌우측으로 고추 묘목들이 식재된 비닐하우스를 지나 축사를 통과하니 801번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건너편으로는 해남대명유통 건물과 뒷쪽으로는 방금 전 지나 온 옥매산 정상과 용암리 들판이 보이며 진행 방향으로는 도로 좌측으로 유채꽃이 피어 황홀경을 안겨주고 있다.
이제부터 다시 801번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한동안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걸어가며 도로 좌측 뒤를 보니 노란 유채밭 뒤로 방금 전 다녀 온 옥매산이 조금씩 멀어지며 가슴 아픈 사연도 농도를 엷게 만들고 있다.
도로 좌우측으로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 풍경과 조금은 변해가는 가옥들 그리고 우측으로 보이는 고공수로와 18번 공룡대로 4차선 포장도로를 속도감 있게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을 들으며 가끔은 어릴적 배가 고프면 따 먹었던 쌉쌀한 노란 유채꽃도 먹으며 계속 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으로 커다란 서해랑길 해남4코스와 5코스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여 살펴보니 이곳은 해남5코스에 해당되며 도로 좌측으로는 원문이라는 버스정류장도 보인다.
원문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1630년경 나주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나주정씨 정관(鄭觀)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인근 옥매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호구총수에 원문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주도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이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타고 있던 배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마을 주민 10여 명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원문마을이 있는 용암리의 명칭 유래는 마을 뒤 대덕산에 용바위가 있어 용바우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한자화하여 용암(龍岩)이라 하였다.
용암리는 본래 해남군 문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문리, 원동리, 용암리와 석교리, 사교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문내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용암마을, 원동마을, 신흥마을, 사교마을, 원문마을, 신월마을, 이목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용암, 원동, 원문이 황일면에 석교가 황이면에 속한 것으로 나오며 원동은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삼기원(三岐院)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화원목장(花原牧場)의 원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버스정류장과 서해랑길 안내판을 확인하고 계속 이어지는 801번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생각보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 차량으로 인한 어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다.
잠시 후 예쁜 민가도 만나고 정윤정미소라는 최신식 건물도 통과하니 도로 양쪽으로는 야생의 노란 유채꽃이 마치 가을날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것처럼 화사하게 반겨 줘 지루함 모르게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도로 우측 18번 공룡대로 4차선 포장도로와 가깝게 접근이 되면서 차량소음이 심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곳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제법 손바닥보다 더 크게 자라 황토빛을 덮어 버린 드넓은 양배추밭과 그 뒤로 드넓은 들판 넘어 나즈막한 산줄기들이 보였다 사라지고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사진 우측 가장자리 방향으로 진도대교의 아치와 진도타워가 보이고 사진 중앙부 우측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금골산 좌측으로 끊어질듯 이어지는 진도지맥 산줄기를 따라 점찰산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는 풍경이 신비롭기만 하다.
생각지도 못한 도로 좌측으로 펼쳐진 진도지맥 마루금을 확인하고 기분 좋게 걸어가니 눈길은 계속 도로 좌측인 서쪽과 남서방향을 찾게되고 몇장의 사진으로 더 남긴 후 좌측으로 펼쳐진 작은 사교저수지를 통과하자마자 도로 우측으로는 신월 버스정류장이 좌측으로는 사교 버스정류장과 사교마을이란 커다란 표지석도 보인다.
사교마을과 신월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사교마을은 1620년경 논산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파평윤씨 윤성식(尹成植)이 입향조라고 전하고 신월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삼덕포를 간척하여 생긴 간척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여러 성씨들이 모여 정착한 마을이라고 한다.
1950년대 가구 수가 줄고 마을 운영 능력이 없어지자 이웃마을인 사교와 합쳐 약 25년 간 사교리 3반에 속하였다가 경제가 좋아지고 젊은 사람들이 늘어 마을 규모가 커지면서 1976년 다시 분리하였다.
사교마을과 신월마을이 있는 용암리의 명칭 유래는 마을 뒤 대덕산에 용바위가 있어 용바우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한자화하여 용암(龍岩)이라 하였다.
용암리는 본래 해남군 문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문리, 원동리, 용암리와 석교리, 사교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문내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용암마을, 원동마을, 신흥마을, 사교마을, 원문마을, 신월마을, 이목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용암, 원동, 원문이 황일면에 석교가 황이면에 속한 것으로 나오며 원동은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삼기원(三岐院)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화원목장(花原牧場)의 원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교마을과 신월마을을 지나 다시 도로 우측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비닐하우스와 물통들 그리고 좌측으로는 배추밭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사교교차로라는 도로표지판이 나타나고 그 한쪽으로는 화재로 완전히 주저 앉아 있는 승용차 뼈대만 남아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잠시 후 도로 좌우측으로 18번 공룡대로와 접속할 수 있는 접속도로를 통과하자마자 우측 도롯가에 옥매광산118인 희생광부추모비란 표지판이 보이고 곧이어 18번 공룡대로를 통과하자마자 사교교차로와 좌측 방향으로 해남우수영항으로 갈 수 있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옥매광산118인 희생광부 추모비를 찾아보니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으로 자료가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해남 옥매산의 광산노동자들이 1945년 8월 21일 제주에서 귀환하던 중 바다에 빠져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사이에 있는 옥매산(玉埋山)은 조선시대부터 옥으로 이름난 산이었기에 1910년 니시자키 쓰루타로(西崎鶴太郞)를 시작으로 일본인들이 옥매산 광산을 본격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7월부터는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淺田化學工業株式會社)가 경영을 이어갔다. 한편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의 보루로 삼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고 이를 위해 수많은 조선인들인 투입되어 진지 동굴 등 군사 시설물을 집중적으로 구축하였다. 1945년 4월에 두 차례에 거쳐 약 220여 명의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이 제주도로 이송되었는데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경찰과 헌병의 포위 속에 진행된 강제징용이었다.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져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선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일제는 제주도에 진지 동굴과 해안 동굴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숙련된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의 발파 기술과 굴착 경험이 필요하였다.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이 파견된 곳은 제주도 모슬포 인근 지역과 구좌읍 해안 동굴과 산방산 등이었으며 12시간의 고된 노동에 돌아온 것은 주먹밥 하나에 소금뿐이었고 숙소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고 옥매산 노동자들은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기에 해방의 혼란 속에서 어렵사리 배를 구하였고 8월 20일 새벽 1시경 조선인 222명과 일본인 관리자 3명을 태운 35톤급 목선은 해남으로 출발하였다. 추자도와 보길도의 중간 지점에 이르던 아침 8시경 기관실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불은 진화되지 못하였고 그렇게 4시간 동안 표류하여 노동자들은 침몰하는 배를 피해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하였다. 화재 8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 목포에서 진해로 가던 군함이 이들을 발견하고 구조하기 시작하였으나 구조된 일본인 한 명이 대부분이 조선인이라 하자 지금껏 구조한 사람들만을 태운 채 떠나 버렸다. 전원 구조가 아니었으며 구조된 사람들도 청산도에 내려 주고 가 버려 그렇게 구조되지 못한 118명은 고향을 밟지 못한 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118명이 한꺼번에 사망하였기에 인근 마을들은 모두 비통할 수밖에 없어 마을에서는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두 달 동안 굿을 하였다. 자손들은 음력 7월 16일을 제삿날로 정하고 매년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산 사람 또한 화재로 인한 화상이나 정신적 충격 등 병으로 숨진 사람이 많았다.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의 유가족들은 공론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2005년 한 일간지에 2면에 걸쳐 기사가 실린 이후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해남에서는 지역신문인 해남신문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정부 차원에서는 2005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2년 8월 15일 옥매산에 박힌 쇠말뚝을 제거하는 행사가 치러졌으며 쇠말뚝 제거 행사를 계기로 옥매광산유족회가 결성되었다. 옥매광산유족회 회장은 2012년부터 박철희가 맡고 있으며 2018년 현재 회원은 60명으로 1945년 사고 이후 해남을 떠나 연로하거나 수소문이 안 되는 유가족이 많았다. 2015년에는 지역극단 미암이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을 모티브로 그들의 귀향이라는 연극을 제작하여 공연하였고 2017년에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자연·문화유산 보전단체 내셔널트러스트가 옥매광산 건축물을 올해의 꼭 지켜야 할 자연 문화유산으로 선정했으며 옥매광산유족회는 옥매광산 건축물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는데 이 또한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을 잊지 않고 추모하기 위한 하나의 일환이다. 2017년 해남우리신문을 비롯하여 해남 군민 100인의 제안으로 해남옥매광산 희생광부 추모조형물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추모비 조성을 위해 해남 군민 1인이 1만 원씩 내는 성금모금행사가 진행되었다. 총 1,200여 명의 군민과 각 기관단체에서 1400여만 원의 건립 기금을 모금해 조형물 조성 비용을 충당하였다. 2018년 8월 26일에 추모제가 열리는 황산면 선착장 앞에 만들어진 추모 조형물은 배 모양 조각물 위에 희생된 118명의 광부를 상징하는 118개의 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해남에서는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거나 전쟁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하였기에 옥매광산유족회 또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현재 다들 고령의 나이이기에 해남 지역은 물론 광주 전남 지역의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공론화와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위 내용은 지금까지 그 어느곳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새로운 아품의 현장이었기에 조금은 마음의 무게가 더해지는 시간이었다.
사교교차로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양쪽에는 여전히 노란 유채꽃이 피어 이곳 해남은 서울과는 다른 계절이 지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더 한가한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으로 송정 버스정류장 넘어 송정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송정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석교리의 명칭 유래는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어 독다리나 독나루 또는 석교라 불렀다.
본래 해남군 문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덕리, 일정리, 신창리, 석교리와 사교리·충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석교마을, 심동마을, 신창마을, 일정마을, 목삼마을, 삼덕마을, 송정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송정마을에 관한 자료는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송정마을을 지나 계속 그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갈림삼거리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민가들이 보이는 곳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되는 곳에 서해랑길이란 이정표가 서 있어 확인해 보니 좌측으로 우수영관광지 가는 길과 진행 방향으로는 문내면사무소와 충무사로 가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다.
이정표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용암리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곧이어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마루금은 좌측의 명랑로를 버리고 우측의 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이어간다.
우측 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영암국유림관리소 건물이 보이고 곧이어 좌측으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낙원교회가 나타난다.
그 교회를 통과하니 문내원동사거리란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폐교된 문내동초등학교 부지와 입구가 나타나는데 입구는 통행을 봉쇄한 상태이다.
그 폐교된 문내동초등학교 입구를 지나자마자 문내원동사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마루금은 좌측의 남석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이어간다.
좌측인 남서 방향으로 보이는 석교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살펴보니 등로는 우측 명랑로 1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어 좁은 도로를 따르니 문내원동고물상이 나타난다.
그 도로를 따라 걸어가다 도로를 벗어나 우측의 민가와 밭경작지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하지만 농사철이 되면서 농부들이 밭경작지에서 일을 하고 있어 진행하기에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마음 편히 명랑로 1차선 포장도로를 타거 걸어가니 원동 버스정류장이 설치된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5거리에 도착을 한다.
원동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1520년경 장흥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밀양박씨 박동길(朴東吉)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원동마을이 있는 용암리의 명칭 유래는 마을 뒤 대덕산에 용바위가 있어 용바우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한자화하여 용암(龍岩)이라 하였다.
용암리는 본래 해남군 문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문리, 원동리, 용암리와 석교리, 사교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문내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용암마을, 원동마을, 신흥마을, 사교마을, 원문마을, 신월마을, 이목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용암, 원동, 원문이 황일면에 석교가 황이면에 속한 것으로 나오며 원동은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삼기원(三岐院)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화원목장(花原牧場)의 원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동 버스정류장이 있는 갈림5거리에서 원동통닭 건물이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올라 원마루금으로 진행을 할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특별히 이름있는 봉우리도 보이지 않고 나즈막한 야산에 잡목들이 우거져 있어 포기하고 마음 편히 북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기로 하지만 결국 산행 후 많은 후회만 남기고 말았다.
도롯가에 피어있는 노란 유채꽃을 친구 삼아 걸어가니 도로 주변으로는 드넓은 양배추밭들이 펼쳐지고 피하려고 하지만 눈길은 자꾸만 우측으로 이어지는 나즈막한 마루금으로 쏠리고 있다.
잠시 후 춘추분재라는 가게를 지나 원동제 앞 수로공사장을 통과하니 도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되고 그 윗쪽으로 거대한 축사 건물 바로 뒤로 나즈막하게 이어지는 원마루금이 자꾸만 눈짓을 보내지만 애써 외면하고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다.
잠시 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도로 우측 마루금 가까이 보였던 축사는 산들농원이고 그 산들농원 바로 좌측으로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시설들도 올려다 보인다.
그 농장을 지나 한동안 더 특색없는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저 멀리 우측으로 1차선 포장도로가 분기되는 갈림삼거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다가가 확인해 보니 석교리란 표지석과 석교 버스정류장 그리고 우측으로 반석교회로 들어가는 이정판이 서 있는 갈림삼거리로서 이곳에서 지금까지 걸어 온 명랑로 2차선 포장도로를 좌측의 직진 방향으로 보내고 우측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오른다.
석교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 있는 리로서 구릉성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고 작은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곳이며 앞에 돌다리가 있어 석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석교, 개건너, 시목동, 버드나뭇골마을 등이 있는데 석교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석교리의 그것과 같고 개건너마을은 석교의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시목동마을은 감나무가 무성한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으로 감남골이라고도 하며 버드나뭇골마을은 버드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석교 버스정류장이 설치된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석교길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의 용암제란 작은 저수지도 수로를 새로 만드는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오르며 좌측 앞을 보니 마루금 아래 드넓은 태양광 발전 시설물들이 설치된 풍경들도 눈에 들어 온다.
이제 도로 양쪽으로 파란 나뭇잎들이 피기 시작하는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오르니 드디더 갈림사거리의 원 마루금에 도착을 하고 물 한모금 마시고 좌측의 작은 녹색 철망과 출입금지를 알리는 로프를 만나기 직전 좌측의 잡목 능선 입구에 선답자들 산행 띠지들이 보여 그곳을 통해 다시 정상 마루금으로 어렵게 산행을 이어간다.
능선으로 오르니 생각보다 잘 정리된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 주변으로는 키 작은 가시잡목들이 우거져 있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진행하니 몇기의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를 지나 잡목능선으로 들어가니 결국 등로는 사라지고 우거진 가시잡목들이 옷가지들을 잡아 당겨 진행이 쉽지 않은데 기온이 오르고 강렬한 태양빛이 내려 쬐며 굵은 땀방울이 등산복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래도 등로 위에는 키 작은 철쭉꽃이 활짝 펴 웃어주고 있어 반갑게 사진에 담으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잡목 등로를 헤치며 오르니 관목의 참나무에 몇장의 선답자들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도상 71.8봉에 도착을 하는데 다음지도에는 구안산으로 표기된 봉우리이다.
구안산이란 71.8봉 지나 등로는 서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크게 꺽여 진행되고 오를때보다는 조금 더 뚜렷한 관목의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어 어렵지 않게 내려가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지치기가 전혀 되어있지 않고 어지럽게 자라고 있는 편백나무와 키 작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만나 까다롭게 진행을 이어가니 갑자기 작은 밭경작지가 보이는 무명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 능선을 타고 오르니 홀대모 띠지가 걸려있는 65.2 무명봉 넘어 묘지 3기를 만나고 곧이어 묵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우측으로 따라가니 석교길 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그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내려가니 심동길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심동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우측으로는 반석교회 입간판과 함께 심동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심동 갈림사거리에서 마루금은 심동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걸어가 앞에 보이는 우측 대나무 숲으로 들어 진행을 해야 되지만 잡목들이 우거져 있고 이름있는 봉우리도 없기에 우측 가까이 지나는 심동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심동마을 지나 좌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올라 마루금에 접속하기로 한다.
심동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1300년경 김해김씨 김흥남(金興南)이 당화를 피하여 은신하러 왔다가 정착하였다고 전하는 마을이다.
심동 버스정류장과 진행 방향으로 육각정자도 사진에 담고 우측 심동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심동마을을 통과하니 좌측으로 첫번째 심동마을로 통하는 시멘트 포장도로 분기점 지나 담배와 고추농사를 짓고 있는 밭경작지 사이로 두번째 시멘트 포장도로 분기점이 나타난다.
잠시 후 세번째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되는 지점의 드넓은 양파와 마늘밭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타고 오르니 언덕으로 올라 마루금에 접속하고 우측 잡목 능선으로 오르니 초반부터 잡목들이 우거져 진행이 쉽지 않다.
괜시리 마루금을 선택해 올라왔다고 후회하며 우거진 가지잡목들을 헤치며 너무나 힘들게 전진하니 크지만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는 편백나무와 잡목들 그리고 화사하게 피었다 시들어 가고 있는 진달래나무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을 너무나 어렵게 헤치며 오르니 달랑 두장의 산행 띠지만이 반겨주는 68.5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지독한 잡목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억새능선이 짧게 나타나고 진행 방향으로 76.5봉을 확인하며 다시 잡목숲을 따라 내려가니 우측으로 거대한 비닐하우스가 내려다 보이고 나무들이 조림된 짧은 장소를 지나 문내화원로란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가숫고개에 도착을 한다.
우측으로 해들녘 육묘장이 보이고 지나온 방향으로 석교리와 진행 방향의 충평리의 경계 지점인 이곳을 왜 가숫고개라 했을까 궁금해 자료를 찾아 보지만 보이는 자료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문내화원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가숫고개에서 지도를 확인하니 진행 방향으로 76.5봉을 우회하고 우측으로 문내화원로를 따라 진행하면 금새 다시 갈림사거리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송평길 2차선 포장도로 위 마루금과 접속이 가능하기에 편안하게 진행하려다 진행 방향으로 보니 넓은 비포장임도로 된 진입로가 보여 다시 정상 마루금을 따라 능선으로 진입한다.
비포장임도를 따라 잠시 오르자마자 임도는 좌측으로 휘어져 가고 마루금은 우측의 관목 소나무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북서 방향으로 이어진다.
잠시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그것도 잠시 묘지를 지나자마자 우거진 잡목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좌측의 76.5봉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배낭을 벗어 놇고 76.5봉으로 오르니 더욱 지독하게 우거진 가시잡목들이 발목을 붙잡아 나무나 힘들게 오르니 오래된 몇장의 선답자들 산행 띠지들만 정상을 지키고 있다.
그 76.5봉을 오르던 등로와 달리 조금 더 뚜렷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 벗어 놓은 배낭을 짊어지고 이제는 동쪽 방향으로 여전히 우거진 가시잡목들을 헤치며 힘겹게 내려가니 절충장군함안조씨 묘지들을 만나 뚜렷한 등로를 타고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내려간다.
잠시 후 배추밭에 스프링쿨러를 이용해 물을 뿌려주는 밭경작지로 내려가니 스프링쿨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옷이 젖고 재빨리 아래로 보이는 충평길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니 우측 바로 옆으로 갈림사거리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충평마을 도로표지판과 충평 버스정류장 그리고 도로 건너편으로 공장 건물들도 보인다.
그 갈림사거리에서 좌측 방향인 북쪽으로 충평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언덕 좌측으로 성덕으집이란 건물들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직진의 도로를 버리고 우측 드넓은 밭경작지와 양파밭 사이의 밭둑을 통해 걸어가니 금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난다.
그 충평리에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다 드넓은 마늘밭과 양파밭을 만나 그 밭 가장자리를 따고 걸어 진행하니 묘지지대가 나타난다.
묘지지대를 지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양파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가장자리를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 지점에 도착을 해 능선으로 진입하기 전 뒤돌아 보니 어렵게 다녀 온 76.5 잡목봉과 그 아래 도로 및 성도의 집 지나 이곳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마늘과 양파밭이 펼쳐진 모습이 보인다.
능선으로 진입하니 생각보다 등로가 잘 나 있어 편안하게 언덕을 넘고 다시 나타나는 드넓은 밭경작지에서는 노부부가 일을 하고 있어 인사 드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앞에 보이는 축사 건물 좌측으로 올라 잡목들이 우거진 능선으로 다시 오른다.
능선으로 올라 가시잡목들이 보이지 않고 관목의 활엽수들이 무질서하게 자라는 등로를 따라 언덕으로 오르니 46.8 무명봉에 홀대모 띠지 한장이 걸려있고 그곳에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내려가니 방금 전 통과한 한우축사와 그 아래 또 다른 거대한 한우 축사 두동 사이로 내려가 좌측으로 그 축사를 빠져 나간다.
한우 축사를 좌측으로 빠져 나가니 한우들이 이 무더위에 왜 그러고 다니느냐며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해 괜시리 마음에 걸리고 곧이어 나타나는 드넓게 펼쳐진 비닐을 씌운 밭경작지 사이 저 멀리 잠시 후 너무나 힘들게 올라야 할 일성산과 그 좌측으로 이어지는 293.6봉이 빤히 보이기 시작한다.
대파를 수확한 밭과 담배를 모종한 비닐하우스 밭경작지 사이로 보이는 밭둑을 따라 걸어가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짧게 오르니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 사이 능선으로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들로 인해 진행이 불가능해 보여 좌측으로 보이는 비포장임도를 따라 잠시 우회하기로 한다.
하지만 잠시 후 임도는 좌측의 충평일저수지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어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잡목 능선으로 어렵게 치고 오르니 여전히 담배를 심어 놓은 밭경작지 가장자리로 진행되고 묘지지대 지나 편백나무 군락지의 능선으로 진입하니 조금은 편안하게 진행된다.
그 편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내려가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바로 앞 밭경작지는 새롭게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통과가 난감하고 그 뒤 저 멀리 잠시 후 올라야 할 일성산과 그 좌측으로 이어지는 293.6봉 줄기는 연두빛으로 갈아 입으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마늘밭 옆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진행해야 할 일성산과 그 좌측으로 이어지는 293.6봉 줄기를 확인하고 앞으로 전진하니 최근에 설치된 듯 한 철망을 두른 밭경작지가 나타나고 어쩔 수 없이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니 지독하게 우거진 가시잡목들로 인해 개고생을 하고 다시 능선으로 들어간다.
편백나무 군락지가 짧게 나타나고 언덕을 넘으니 다시 담배와 고추를 모종한 드넓은 밭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밭 가운데 둑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마늘밭과 담배가 모종된 밭이 나타나고 그 경계지점을 관통하며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조금은 가까워진 우측으 ㅣ 일성산과 좌측으로 이어지는 293.6봉 줄기가 보기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마늘밭을 통과하니 작은 콘테이너 박스 옆으로 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도로 건너 북쪽방향으로 나즈막하게 올려다 보이는 무명봉을 찍고 내려와야 하지만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냥 신창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인 북쪽으로 진행을 이어간다.
도로 좌측으로 진행해 온 방향도 살펴보고 우측으로는 진행했어야 할 나즈막한 무명봉도 확인하며 도로 따라 걸어가니 46미터란 수준점이 도로 옆에 보여 사진에 담고 조금 더 전진하니 진행 방향으로 일성산과 그 좌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조금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 온다.
잠시 후 김해김씨세장산비가 서 있는 곳에서 우측 능선에서 내려오는 마루금이 도로 지나 좌측의 나즈막한 능선으로 다시 올라야 하지만 특색있는 봉우리도 없기에 그냥 도로따라 진행한다.
잠시 후 도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하고 그 윗쪽으로는 다시 김해김씨세장산과 묘지들이 보이는 마루금이 지나고 우측으로는 고당리 마을로 진입하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원 마루금은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한 후 우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금새 다시 만나기에 그냥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우측 고당리 방향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연두빛으로 변해가는 자연속 저 멀리 일성산이 조금씩 더 가깝게 다가오면서 뚜렷하게 올려다 보이고 곧이어 드넓은 비닐하우스 밭경작지가 펼쳐지는데 대부분이 고추모종을 심어 놓은 밭경작지들이다.
진행 방향으로는 민가와 축사들이 보이고 그 뒤로 일성산과 293.6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산줄기가 마치 병풍을 두른 듯 고당리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잠시 후 원마루금과 합류하는 일성길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사거리 지나 우측은 고추밭이 좌측은 배추밭이 펼쳐진 곳에서 다시 한번 더 진행 방향을 올려다 보니 민가와 축사 건물들 뒤 저 멀리 일성산과 좌측의 293.6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능선이 연두빛으로 물들며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도로가 마루금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이제 우측에는 고추밭을 좌측으로는 파란 양파밭을 두고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다 보니 눈길은 자꾸만 진행 방향의 일성산과 293.6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흐름으로 가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산행임을 직감하면서 조금은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니 갑자기 일성길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고당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 있는 리로서 구릉성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고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농촌마을이며 옛 당집이 있었으므로 고당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고당, 고전, 건네, 새태, 옥터마을 등이 있는데 고당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고당리의 그것과 같고 고전마을은 고당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건네마을은 고전 남쪽의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태마을은 고당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옥터마을은 과거 이곳이 황술현의 감옥 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갈림사거리 지나 우측 앞으로는 민가가 좌측 앞으로는 거대한 축사 건물들이 올려다 보이는 구불구불한 일성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건물들 뒤로 우측의 일성산에서 좌측의 293.6봉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마루금이 아름답게 올려다 보이는데 보기와는 달리 저 능선을 통과하는데 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민가 지나 비탈진 밭경작시와 묘지 사이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이제 축사 건물까지 통과하고 곧이어 능선으로 진입하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새로 조성된 듯한 농막과 정원단지 그리고 고추밭이 펼쳐지고 개 한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울부짖고 있어 재빨리 그 농막 뒤 비포장임도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약간 돌아 선답자들이 진행한 루트를 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 농막 뒤로 보이는 비포장임도를 타고 고추밭 옆으로 오르며 올려다 보니 잡목속에 잎까지 돋아나 쉽지 않은 산행임을 직감하는 시간이다.
좌측 농막에서는 주인이 와 있는지 트럭도 보이고 사람 목소리도 들리는데 내다 보지 않고 제지도 하지 않아 재빨리 우측의 고추밭 비닐하우스 옆 비포장임도를 따라 올라 능선으로 들기 전 잠시 뒤돌아 보니 고추밭과 농막 그리고 그 주변으로 새롭게 조성된 정원 넘어 고당리 마을로 이어지는 마루금 따라 저 멀리 문내면 방향의 이름없는 산군들이 보이고 좌측 뒤로는 희미하게 진도지맥의 주능선들도 보이기 시작하는데 거리감 때문인지 점찰산은 확실하게 분간하기 어렵지만 좌측 가장자리 방향의 높게 솟아 있는 곳이 점착산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에 들떠 힘든줄 모르게 오르는데 잘 따라 왔던 새로 난 비포장임도는 능선으로 들어가자마자 좌우측으로 진로를 변경하고 진행 방향인 직진으로는 잡목들이 우거져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 등로의 잡목들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방향만 보고 능선으로 오르니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초반에는 그럭저럭 진행이 가능해 보여 자신감있게 오르니 점점 더 경사도가 가팔라지기 시작하고 잡목들도 우거지기 시작하며 등로에는 덩굴식물들이 감싸고 있는 제법 굵은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어 참으로 고달픈 오르막 등로가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산객이 오를 수 있을만큼의 좁은 공간들은 보여 이리 피하고 저리 헤치며 조금 더 오르니 커다란 바위벽이 앞을 가로막는 곳부터 경사도가 급해지기 시작하면서 힘든 드는데 속도는 전혀 나지 않는 최악의 등로와 산행 시간이 되었다.
그 바위지대를 어렵게 통과해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으로 트래버스 하듯 이어져 원마루금과 방향만 확인하며 우측으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드디어 우측 아래에서 올라 오는 뚜렷한 등로를 만나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 한모금 마시고 올라간다.
덩굴식물들이 뒤덮고 있는 바위 사이로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들이 보이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가장 무더운 오후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일성산으로 향하는 마루금을 찾아 올라 드디어 우측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등로를 만나니 구세주를 만나듯 반갑기만 하다.
잠시 물한모금 마시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낸 후 뚜렷하게 나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돌담이 나타나고 돌담 넘어 조금 더 완만해진 등로를 타고 오르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296.7미터의 일성산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배낭 내려 놓고 편안하게 우측의 일성산 정상부로 향한다.
일성산 정상부로 걸어가니 한동안 파란 잡풀 등로가 이어지더니 대나무 군락지가 보이는 곳에서 경사도가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키 작은 산죽지대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금새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드높게 설치되어 있고 그 철망에 준희님이 걸어 둔 335.1미터의 정상판과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336.7미터의 일성산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일성산(335.1m)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면 장춘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335m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황원(黃原) 봉수는 현의 서쪽 60리에 있고 남쪽으로 진도군 점찰산에 북쪽으로 무안현의 유달산에 응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기사 내용이 여지도서(해남)에는 황원 일성산(日城山) 봉수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내용을 통하여 황원 봉수와 일성산 봉수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다른 봉수는 산 이름과 함께 언급되는데 이 일성산 봉수만큼은 황원 봉수로만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해남)에서는 봉수의 이름이 산 이름으로 언급되기 시작하고 해동지도(해남) 등 고지도에 일성산(日星山)으로 한자가 바뀌어 표기되며 조선지형도에는 일성봉(日星峰)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관련 지명으로 일성제(日星堤)가 있다.
정상판을 사진에 담고 둘러보니 두개의 다른 삼각점이 박혀있는데 둘 다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들이다.
일성산 정상부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몇장의 추억까지 남긴 후 정상에 서 있는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주변을 한바퀴 돌려 풍경과 조망ㄷ르을 살펴보고 많은 사진들을 남긴다.
제일 먼저 잡목 사이로 북서 방향을 살펴보니 성산리와 신덕리 방향의 들판 지나 화원면이 바로 붙어 있고 그 뒤 좌측부터 내일 만나야 할 초종골산에서 매봉산 지나 운거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의 흐름이 보이고 우측 뒷쪽으로는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는 지령산이 여전히 아름답게 솟아 있다.
이제 북쪽으로 눈을 돌리니 성산리의 드넓은 들판 지나 금호호로 연결되는 강물인지 바닷물이 보이고 그 바로 뒷쪽으로 금호도와 좌측 유ㅜㄱ비 장향으로 지령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금오도 우측으로는 지맥 산행과 아무 상관이 없는 해남군 산이면 방향이 살짝 드러나 있고 그 금오도 우측 뒷면으로는 흑석지맥 상 군부대로 들리지 못하고 우회하며 아쉬워했던 소이산과 대이산 줄기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 오고 좌측 뒤로는 목포 바닷가와 영산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목포의 유달산도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눈을 남쪽 방향으로 돌리니 방금 전 타고 걸어 온 비산비야의 마루금 뒤로 121미터의 서승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우측 뒤로 진도대교의 울돌목에서 점찰산 지나 여귀산까지 이어지는 장쾌한 진도지맥 마루금이 희미한 박무속에서도 확실하게 존재감을 알리고 있어 많은 사진에 담아 본다.
사진 중앙 바로 우측의 나뭇가지 뒤가 진도와 진도지맥의 최고봉이 점찰산이 있는 곳이고 그 우측 방향으로 더욱 흐릿하게 펼쳐진 여귀산도 보일듯 말듯 서 있는데 어제 진도지맥 마지막 졸업 산행에서 길라잡이 노릇을 해 주던 여귀산이기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날씨만 좋았다면 진도지맥 마루금을 조금 더 상세히 그 속살까지 볼 수 있었을텐데 아쉬움을 남기고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 더 많은 사진들을 담은 후 다시 올라 왔던 등로를 타고 내려가 일성산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벗어 둔 배낭을 찾아 두 어께에 짊어지고 출발하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 지나 연속으로 통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설치된 통나무계단을 지나 연속으로 나타나는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통과하니 갑자기 관목의 홀엽수 나뭇가지 높은 곳에 준희님의 응원판이 걸려있어 사진에 담고 곧바로 출발한다.
준희님의 응원판을 사진에 담고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올라 커다란 바위와 잡목들이 보이고 선답자의 산행 띠지 한장 걸려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일성산으로 오르던 등로와는 달리 여전히 잡목들이 보이지만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다.
잠시 후 키 작은 산죽과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사이로 희미하게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다시 진행 방향으로 가시잡목이 우거진 안부 지나 올라야 할 293.6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약간의 가시잡목들이 보이는 안부로 내려가 주의하며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오르다 잠시 바위 앞에서 뒤돌아 보니 잡목 사이로 방금 전 머물다 내려 온 일성산 정상부가 빤히 올려다 보여 사진에 담고 다시 진행을 이어가니 선돌같은 특이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아래에서 봤던 봉우리가 아닌 능선상 봉우리 같은 곳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93.6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긴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293.6봉은 나뭇가지들에 막혀 풍경과 조망이 전혀 앖었는데 그곳 정상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전망바위가 나타나 일망무제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들을 감상하며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먼저 남쪽과 남서 방향을 살펴보니 좌측 끝자락이 진도의 끝자락으로 그 우측으로 오르면서 산세가 점저ㅏㅁ 높아지고 가운데 가장 높은 곳 바로 좌측으로 여귀산과 그 바로 우측으로 쌍봉처럼 보이는 진도의 최고봉이자 진도지맥의 최고봉인 점철산이 보이고 사진 중앙부 먼쪽으로 진도타워와 진도대교가 마치 하나처럼 보이고 있다.
진도타워 우측으로는 신안의 상태도와 장산도 방향의 산줄기들인데 생각보다 제법 길게 펼쳐져 있어 몇번이나 확인을 해 보는 시간이다.
남서 방향으로는 장춘리의 개초저수지가 생각보다 크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산호리 들판 지나 남해바다가 펼쳐지고 바다 중앙부 먼 곳으로는 희미하게 신안군 장산면의 장산도가 좌우측으로 길게 펼쳐지듯 보인다.
개초저수지 지나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는 산호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에 속하는 리로서 산호리의 자연 지형은 동으로는 장춘과 성산을 경계로 목포와 연결되는 지방도로가 놓여 있고 논과 들이 많아 농업이 주업을 이루고 있다.
산호리는 행정 구역 폐합 당시 산수리, 석호리, 내박리, 온수리를 병합하였는데 산수와 석호의 이름을 따서 산호리라 이름 붙여졌다. 자연마을은신용, 온수(溫水), 신촌, 산수(山水), 학상, 석호(石湖)가 있으며 온수마을은 물이 따뜻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제 눈을 서쪽에서 북서 방향으로 돌리니 우측 앞으로 153봉 지나 77번 도로로 내려섰다가 다시 호암산 갈림삼거리 넘어 180.9봉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70.8미터의 호출봉으로 이어지는 오늘 걸어 넘어야 할 화원지맥 마루금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호출봉 뒤 우측으로 산행 날머리인 화봉재가 있지만 호출봉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내일 마지막 구간에서 만나야 할 산들과 산줄기인데 보기에는 큰 고도 차이 없이 진행 되지만 가까이 다가가 속살을 마주하면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멋진 풍경과 조망들을 즐기고 그 전망바위를 조심하며 내려가니 다시 굵은 소나무와 관목의 활엽수들 그리고 키 작은 가시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로 바뀌지만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등로가 나 있어 걱정만큼 어렵지는 않다.
몇장의 선답자들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나무벽을 뚫고 전진하니 잠시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지대가 펼쳐지고 이리저리 좁은 공간이라도 찾아 너무나 힘들게 빠져 나가니 갑자기 잡풀들이 무성했다 말라있는 넓은 비포장임도에 도착을 하고 한숨 돌려 물 한모금 마시고 우측 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 방향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비포장임도로 오르자마자 임도는 끝이나고 다시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등로가 이어지는데 이곳 역시 선답자들이 지나간 희미한 흔적들이 있어 조심하며 찾아 전진하니 등로는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편안하게 진행하니 김해김공 부부묘지가 나타난다.
그 묘지를 통과해 평이하게 조금 더 걸어가니 자갈 너덜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 우측 옆의 굵은 느티나무 가지에 신선님이 154봉이란 이정판을 걸어 놓은 153봉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 상 정상은 좌측 위 지점인데 그곳으로는 잡목과 바위 너덜들로 인해 오르기 까다로워 이곳에 이정판을 걸어 둔 듯 보인다.
하지만 오래전 걸었는지 이정판 상 해발고도가 최근의 국토지리원 지도 상 고도와는 달라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해발고도가 다르게 표기된 이정판이 걸려있는 153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17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곳 역시 멋진 전망처이기에 잠시 발걸음 멈추고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그 이름들을 불러 준 후 진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제일 먼저 북서 방향을 살펴보니 우측 아래로 많은 선답자들이 제3구간의 날머리로 잡고 있는 장춘리 77번 관광레저로 4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이 산객은 오늘 더 걸어 넘어야 할 우측 앞쪽으로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158미터의 호암산 지나 좌측으로 부드러운 등로가 이어지고 좌측 가장자리 방향으로 270.8미터의 호출산이 보이는데 그 뒤로 보여야 할 176.1봉과 산행 날머리인 화봉재는 그 앞의 높은 호출산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호암산 뒷쪽 우측으로는 내일 만나야 할 화원지맥 마루금이 길게 펼쳐져 있어 조금 더 확인을 하고 사진에 담는다.
이제 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사진 정 중앙부에 화원면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내일 걸어 만나야 할 화원지맥의 운거산이 보인다.
이제 그 화원면 마을 뒤로는 금호호로 이어지는 바닷길 뒤로 지령산이 뚜렷하게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금호도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화원면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서북쪽에 위치한 면으로 화원반도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동쪽에는 금호호가 있으며 서쪽에는 넓은 바다가 북쪽에는 해남만이 있다.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넓은 농경지는 동쪽의 호숫가와 남서쪽의 바닷가에 주로 분포한다.
호구총수(해남)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장목면(場木面)과 장서면(場西面)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장동면(場東面)이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호구총수의 장목면은 장동면이 잘못 표기된 것으로 여겨진다.
장동면은 뒤에 일부가 분리되어 관저면(管底面)이 되었으며 이러한 지명은 이곳의 황원목장(黃原牧場)에서 비롯하였다.
여지고에 의하면 진도의 감목관을 이곳으로 옮기고 진도를 속장으로 하였는데 감목관이 있던 지역을 관저면이라 하고 그 서쪽을 장서면 그 동쪽을 장동면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3개 면(관저면과 장동면 및 장서면)과 문내면의 일부가 합쳐져서 화원면(花源面)이 되었다.
현재 15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고 관련 지명으로 화원반도가 있으며 조선지형도에서 화원반도를 살펴보면 남서쪽 일대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다수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해안선은 그보다 훨씬 단조로워졌고 농경지 작업으로 많은 섬들은 육지로 바뀌었으며 육지 속에 현존하는 지명은 과거에 그것이 섬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문내면의 증도(甑島), 작은시루섬(小甑島), 대맥도(大麥島) 등과 황산면의 피섬(血島), 긴섬(長島), 띠섬(茅島) 등은 그 예이다.
화원면과 내일 걸어야 할 화원지맥 마루금을 살펴보고 눈을 북동 방향으로 돌리니 좌측으로 금호도와 우측 아래로 금호호로 이어지는 물길이 보인다.
바로 앞으로는 기림산 지나 성산리의 드넓은 들판 그리고 금호호로 이어지는 물길 넘어 해남군 산이면의 비산비야로 이뤄진 풍경이 눈에 들어 와 사진에 담고 잠시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 뒤로 희미하게 흑석지맥 마루금도 눈으로는 보였는데 사진을 확인해 보니 사진으로는 분간하기 어렵다.
한동안 더 그 17번 송전탑이 서 있는 조망처에서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그곳을 출발하니 다시 잡목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허물어진 돌담들이 널부러져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곳을 지나 완전히 사라진 등로를 찾아 그저 방향만 확인하며 어렵게 바위 너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KT화원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곧이어 묵은 비포장임도가 보이더니 무명묘지들을 지나 잘 정리된 넓은 밭경작지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77번 4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며 확인해 보니 우측으로 민가 지나 우측 뒤 저 멀리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158미터의 호암산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밭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니 우측 아래 민가에서 기르고 있는 강아지 한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울부짖으니 주인이 나와 물끄러미 처다봐 미안한 마음에 강아지에게만 짖지 말라고 달래며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내려가니 드디어 많은 선답자들이 제3구간 날머리로 삼았던 77번 관광레저로 4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살펴보니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아 재빨리 통과하니 도로 좌측 옆으로 수정카센터 입간판이 서 있고 진행 방향으로는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가 올려다 보인다.
어제 진도지맥 마지막 구간을 마무리하고 오늘 길게 탔기 때문에 마음은 이곳에서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내일 귀가 시간 때문에 화봉재에 애마를 두고 산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앞으로 2시간 이상 더 진행을 해야 되는 순간이다.
지금 시간이 오후 3시 35분을 지나고 있으니 오후 6시 전후로 화봉재까지 진행 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77번 관광레저로 4차선 포장도로를 출발해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능선 방향으로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 위로 거대한 바위들이 쌓여 있고 진행 방향으로는 커다란 바위 뒤로 몇동의 비닐하우스들이 보인다.
비닐하우스와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등로를 따라 들어가니 다시 마늘밭이 나타나고 마늘밭 좌측 바위등로를 따라 능선으로 진행하니 절개지에 키가 작은 소나무들이 보이고 미끄러지는 마사토 절개지를 어렵게 올라 뒤돌아 보니 비닐하우스와 바위 그리고 숨어 보이지 않는 77번 관광레저로 4차선 포장도로 건너 내려 온 드넓은 밭경작지와 민가 뒤로 멋진 풍경과 조망을 즐겼던 153봉 옆 17번 송전탑이 보이고 그 좌측 뒤 저 멀리 일성산이 살짝 머리를 내밀고 있다.
지나 온 방향을 살펴보고 이제 눈을 남쪽으로 돌리니 발 아래 드넓은 들판 좌측으로 방금 전 건너 온 77번 관광레저로 4차선 포장도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도로를 따라 마을의 민가들이 보이는데 사진 정 중앙부로는 장춘리의 개초저수지와 그 좌측 뒤로 서승산이 그리고 우측 옆으로는 시게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인다.
다시 개초저수지 뒤 저 멀리 희미한 산줄기 하나가 눈에 들어 와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진도의 진도지맥 마루금으로서 가운데가 점철산처럼 보이기는 한데 거리가 멀고 약간의 박무가 있어 정확하게 그 이름까지 불러주지는 못한다.
절개지 위에서 지나 온 화원지맥 마루금과 좌측인 남쪽으로 진도지맥을 확인한 후 능선으로 진입하니 지독하게 우거진 키작은 소나무들이 등로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 이리저리 좁은 공간을 찾아 전진하니 다시 관목의 동백나무와 굵은 소나무들로 바뀌고 그 등로를 통과한다.
잡목 등로를 내려가니 넓은 잡풀지대 가운데로 낡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설치된 곳이 펼쳐지고 우측 언덕 넘어로는 드넓은 밭경작지가 펼쳐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어 그곳으로 오르지 않고 직진의 잡풀지대를 통해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니 묘지지대가 나타난다.
진주강공 묘지들을 지나 개활지를 따라 걸어가니 지난해 우거졌던 잡풀들이 말라있는 공터로 변하고 우측으로는 무슨 건물을 짓고 있는지 거대한 기초작업을 하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곳을 지나 개활지와 말라있는 잡풀공터를 통과해 잡목들이 우거진 능선으로 올라 그 입구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넘어 온 지독한 잡목 등로 넘어 153봉과 그 앞 17번 송전탑과 그 좌측 뒤로 일성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사진에 담고 이제 한동안 지독한 잡목과의 사투를 벌인다.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과 멍개가시나무가 보이는 능선으로 진입하니 등로가 완전히 사라져 방향만 보고 이리저리 선답자들이 지나간 듯한 희미한 흔적을 타고 사투를 벌이다 보니 노간주나무들이 많이 나타나 피부를 사정없이 찔러대고 유격 훈련하듯 굽혔다 뛰어 넘기를 반복하다 보니 갑자기 넓은 비포장임도가 나타난다.
한숨 돌리고 그 비포장임도를 건너 뚜렷하게 보이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후 많은 묘지들이 나타나기에 그 임도는 이 묘지들로 오르기 위해 정리를 한 듯 보였다.
묘지 뒤로 이어지는 관목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다시 잡목들이 우거지기 시작하는데 잠시 후 굵은 소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등로는 북쪽에서 좌측인 서쪽으로 크게 꺽여 진행된다.
좌측으로 관목의 활엽수 사이로 희미하게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채석장에서 나는 기계 소음들이 강하게 들려오기 시작하고 귀를 기울이며 전진하니 갑자기 안부가 나타나 확인해 보니 장춘리의 무명안부이다.
무명안부 지나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여전히 잡목들이 보이지만 지금까지 보다는 덜 우거져 진행에 조금은 여유를 가지며 걸어 오르니 등로는 점점 더 뚜력해지고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특별할 것 없이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굵은 활엽수 위에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 가운데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180.9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180.9봉을 출발하니 관목의 활엽수와 굵은 참나무들 사이로 잡목들이 보이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평이한 잡목 등로를 따르다 보니 풍경이나 조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즈막한 잡목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썩어가는 굵은 고사목들이 보이고 굵은 소나무가 보이는 지점을 통과하니 갑자기 눈 앞에서 커다란 물체 하나가 움직여 확인해 보니 몸집이 큰 하얀 올빼미 새끼 한마리가 날지도 못하고 최근에 이소를 한 듯 빠르게 걸어 도망을 간다.
어렵게 멀리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어린 올빼미를 사진에 담고 굵은 참나무를 통과하니 다시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14.3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긴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214.3봉 역시 나무들로 막혀 전혀 풍경과 조망이 없기에 사진만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니 이제 등로에는 제법 굵은 소나무와 활엽수들 사이로 잡목들이 보이고 그곳을 통과하니 잡목 사이로 뚜렷한 등로가 길게 이어진다.
잠시 후 굵은 참나무들이 보이는 좁은 공터봉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갑자기 지독하게 우거진 가시잡목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고 우측으로 돌아 진행하다 다시 좌측으로 휘돌아 올라가니 우거진 잡목들 넘어 굵은 나무 아래 준희님이 걸어 놨던 호출봉 270.8봉이란 정상판이 세조각으로 잘려져 등로에 나뒹굴고 있어 복원 작업도 되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차례로 올려 놓고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뒤돌아 서는데 누가 이런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쓴 웃음만 나온다.
이곳 270.8미터의 호출봉 역시 높이에 비해 잡목들에 막혀 풍경과 조망이 전혀 없기에 잘려진 정상판을 다시 한번 사진에 담고 북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잡목들이 사라진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바닥에는 드껍게 낙엽들이 쌓여 있다.
공터를 지나 우측으로 조금 더 휘어 걸어가다 등로 좌측을 보니 바로 앞에 화봉산 넘어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 가운데에 장산도가 펼쳐져 있는데 장산도 우측 가장자리 지점으로 강렬한 햇살이 비춰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고 있다.
아름다운 화봉산과 남해바다 그리고 장산도를 확인하고 굵은 소나무 사이로 키가 큰 진달래나무들이 등로를 잡목처럼 침범하고 있는 마루금을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간다.
그렇게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급경사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조심하며 그 급경사 등로를 내려가니 약간의 쓰레기들이 보이는 무명안부 지나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산호리와 신덕리를 이어주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비포장임도 같은 능선으로 오르니 이제 마지막 봉우리 하나만 남겨 놓은 시점에 오후 6시를 넘기고 있어 넉넉하게 잡아 30여분이면 목적을 한 화봉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뚜렷한 등로를 타고 능선으로 오르니 비폰장임도는 금새 사라지고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들이 앞을 가로막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힘들게 그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 등로를 헤치고 오르니 관목의 참나무 가지에 준희님이 이정판을 걸어 놓은 176.1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잠시 쉬면서 물 한모금 마시고 이제 서쪽 방향에서 우측인 북쪽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간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인 176.1봉에서 우측인 북쪽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니 처음에는 잡목 없이 뚜렷한 등로가 열리더니 점점 잡목들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곧이어 하얀 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칠레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진다.
어렵게 그 칠레나무 등로를 통과하니 이제 빼곡하게 들어 찬 관목의 활엽수 군락지를 어렵게 지나고 막바지에 진달래꽃들이 지기 시작하는 우거진 잡목등로를 헤치며 내려가니 드디어 화봉마을이란 표지석과 도로 표지판이 보이는 한주광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삼거리의 화봉재에 도착을 해 오늘 하루 산행을 마무리한다.
화봉재는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화봉리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화봉리는 들과 논이 많고 화봉산 밑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자연마을로는 초동과 화봉이 있는데 농업이 주로 이루어지며 주소득원은 쌀이다.
우측 옆으로 새벽에 주차시킨 애마로 가 스틱을 접고 배낭을 정리한 다음 문내면의 봄호텔을 예약하고 내려가니 또 하루가 저물어 간다.
어제 진도로 들어가 남아 있던 진도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새벽 일찍 이곳으로 올라 와 가시잡목으로 악명 높은 화원지맥 제3구간도 화봉재까지 잘 마무리하고 나니 발바닥에 불이 나는 듯 따갑고 온 몸엔 피곤이 밀려오지만 계획된 곳까지 어둡기 전에 내려올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다.
문내면으로 들어가 만족스런 봄호텔에 여장을 풀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 돼지국밥으로 저녁까지 해결한 후 잠자리에 드니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세상 모르게 단잠을 자게 되었다.
내일 하루 남아 있는 화원지맥도 잘 마무리를 하고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할 수 있기를 꿈 궈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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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년만에 이은 화윈지맥 3구간이군요.
길이 좋은곳은 한없이 좋고 안좋은 곳은 도저히 들어설 수가 없었던 구간이었습니다.
마루금을 포기한 곳도 있고 좀 찜찜하긴 해도 도로길도 많이 걸엇던 화원지맥 이었습니다.
진도지맥을 1년만에 마무리하고 해남으로 올라 와 연속 2주동안 마무리를 하였답니다.
말씀처럼 좋은 곳도 있었고 지독한 가시잡목으로 어려운 구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생각보다는 지날만 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지나가며 고생한 선답자들이 뚫어 준 결과이겠지요
그래도 힘들게 고생하며 마무리를 하다 보니 오랫동안 추억이 될 지맥이 될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