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2. 3. 21.~22.(월, 화) - 음력(2. 19.~20.), 일출 06:29~일몰 18:40
●산행지: 팔공지맥 2구간 졸업(효령재-합수점)
●산행코스: 효령재-291m봉-375m봉-응봉산-군위터널-326m봉-중앙고속도로-267.3m봉-적라산-중앙고속도로-178m봉-오로고개-330m봉-장구먹/장구미기-347m봉-곰재-문수봉/경운산-비재-우베틀산-좌베틀산(369m)-내밀재/남일재-태조산/냉산분기봉(621m)-땅재-다곡리갈림길-690m봉-청화산-572m봉-갈현-387m봉-장자봉-만경산-방지고개-197.7m봉-토봉-낙동강/위천 합수점
●먹거리: 생수3.5리터, 캔맥대자, 팩소주, 육포, 콜라2, 땅콩크림빵, 양갱3, 단백질바2, 허쉬너겟, 땅콩초코볼, 롯샌, 사탕30, 게비스콘6
●준비물: 하계텐트, 여름침낭, 바람막이, 메트2, 스틱, 헤드랜턴, 반장갑,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스패츠, 팔토시, 말방울, 세라컵, 경광점멸등,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마스크2, 양말, 여분의류, 띠지33
●거리: 약 72.5Km
●소요시간: 23.52h
●누구랑: 나홀로
●경비: KTX35,100, 식사125,550, KTX35,100
●날씨: 1~13,
●산행경과:
* 3. 21.(월) :
- 08:36 : 효령재/ 906번 지방도로/ 구미시 장천면 - 군위군 효령면 경계
- 10:14 : 응봉산(應峰山, 334.1m)
- 10:10 :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 10:41~56 : 적라산갈림길
- 11:49 : 적라산(赤羅山, 352.1m)/ 한적산(韓敵山)/ 삼면봉(구미시 장천면, 군위군 효령면 → 군위읍)
- 11:57~12:01 : 행동식
- 12:20 :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 12:30 : 177.8m봉
- 12:39 : 오로고개(五老峴)/ 930번 지방도로
- 13:35 : 임도
- 13:49 : 장고미기/ 장구먹/ 양회임도
- 14:00 : 진등산(333m)/ 삼면봉(구미시 장천면, 군위군 군위읍 → 소보면
- 14:52 : 348.8m봉/ 삼면봉(구미시 장천면, 군위군 소보면 → 구미시 산동읍)
- 15:39 : 곰재(熊峴)/ (구미시 장천면 → 산동읍)/ 923번 지방도로
- 16:02 : 270m봉/ 완전히 구미시 산동읍으로 진입
- 16:10~14 : 행동식
- 16:22 : 문수봉(341m)/ 경운산(慶雲山)/ 산불감시초소 2개/ 재난방송시스템
- 17:20 : 비재
- 18:12 : 304.4m봉
- 18:18 : 우베틀산(331.9m)/ 뾰족봉
- 18:37 : 베틀산(320.7m)/ 면계(구미시 산동읍 - 해평면)
- 19:01 : 좌베틀산(369m)/ 조계산
- 19:28 : 332.4m봉/ 시군계 삼면봉(구미시 해평면, 산동읍 → 군위군 소보면)
- 20:20 : 남일재(藍一峙, 200m)/ 내밀재/ 927번 지방도로
- 22:10~22:55 : 냉산갈림봉(618.1m)/ 삼면봉(군위군 소보면, 구미시 해평면 → 도개면), 냉산까지 1.3km
- 22:34 : 냉산(冷山, 691.7m)/ 태조산(太祖山)
- 23:30 : 당재(堂峙, 280m)/ 당재/ 920번 지방도/ 청화산까지 4.3km(1시간 30분)
* 3. 22.(화)
- 07:50 : 당재 출발
- 09:15 : 694m봉/ 삼시군봉(구미시 도개면, 군위군 소보면 → 의성군 구천면)
- 09:27 : 청화산(靑華山, 700.7m)/ 육각정자, 헬기장/ 1등삼각점(안계 12)
- 10:32~40 : 행동식
- 10:55 : 갈현(葛峴, 220m)/ 12번 군도
- 11:13 : 화산(342.7m)/ 삼각점봉
- 11:53 : 정수사 갈림봉(387m)/ 삼면봉(구미시 도계면, 의성군 구천면 → 단밀면)
- 12:31 : 장자봉(莊子峰, 422.1m)
- 12:56 : 십령(十嶺)/ 열재
- 13:30 : 435m봉/ 시군계 면계/ (시군면계 → 단밀면)/ 갈림삼거리, 돌탑 전망대
- 13:48 : 만경산(萬景山, 499m)/ 정상석 두개, 육각정자, 헬기장/ 타임캡슐
- 14:42~54 : 행동식
- 15:01 : 주선(注仙)고개/ 912번 지방도로/ 육각정
- 15:08 : 방지고개
- 15:32 : 굿고개/ 콘크리트 도로
- 16:41 : 솔티/ 양회임도
- 17:00 : 토봉(兎峰, 284.9m)/ 시군면계(의성군 단밀면 - 상주시 중동면)
- 17:30 : 새띠고개/ 양회임도
- 17:47 : 합수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팔공지맥 세부 구간거리
효령재-2km-291m봉-1.5km-375m봉-1.5km-응봉산(334m)-1km-326m봉-1.8km-중앙고속국도-2.7km-적라산-3km-오로고개 -2km-330m봉-1.7km-장구먹/장구미기-3.2km-347m봉-2.5km-곰재-1.7km-문수봉-2.3km-비재-2km-우베틀산-1.5km-좌베틀산(369m)-2.3km-내밀재-4.5km-냉산분기봉(621m)-1.3km-당재-1.7km-다곡리갈림길-1.5km-690m봉-1km-청화산-1.7km-572m봉-2.8km-갈현-1.2km-387m봉-1.9km-장자봉-2.9km-만경산-3km-방지고개-2.2km-197.7m봉-2.8km-토봉-2.4km-낙동강/위천 합수점
* 구간거리
- 효령재~비재 28.1km
-. 효령재~응봉산 5.2km
-. 효령재~오로고개 13.5km
-. 오로고개~비재 13.4km
-. 곰재~비재 4.8km
- 비재~합수점 41.3km
-. 곰재~당재 20.6km
-. 비재~당재 18.5km (냉산 왕복 2.7km 포함)
- 당재~합수점 25.6km (탈출 2.5km, 1h 미포함)
-. 당재~갈현 8.5km
-. 갈현~합수점 17.1km
* 식수 보충 및 참고사항
- 오로고개: 무량사 왕복 10분
- 곰재~장천면: 8.3km, 택시8,000원
- 곰재: 곰재농장 물보충 가능해 보임
- 구미시 장천면 개인택시: 054-471-5111, 010-2810-3232
- 비재: 산동 참 생태숲 뒤편 인가 있음.
- 냉산갈림길 하산 후 500m 이정표에서 필히 "땅재 1.1km" 방향으로 좌틀 하산
- 당재: 5분 이동하면 마을버스 정류장(막차 17:15분) 선산, 구미로 나올 수 있음.
- 선산택시: 054-482-5757, 17,000원
- 우물1리마을버스정류장~낙동면: 막차 17:25, 우물2리마을버스 종점 17:30 막차
- 낙동면 택시: 054-532-2116, 7449
- 상주여객(시내버스): 054-534-8250~1, 상주시외버스터미널 : 054-534-9001
* 팔공지맥 효령재 가는 교통편
- 서울경부~구미터미널: 07:30, 13:05, 18:50, 03.25h, 18,700
- 서울역~김천구미역: 05:30, 06:05, 06:35, 07:30, 08:00, 1.27h, 35,100
- 구미터미널~장천터미널:
- 장천터미널~효령재: 택시 1만원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우물2리~낙동면: 마을버스 막차 17:25, 0.10h
- 낙동면터미널~상주터미널: 940번, 0.30h, 1,700원
* 상주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상주시외버스터미널~동서울터미널: 15:10, 15:30, 16시, 17시, 19:10, 19:40, 2.30h, 19,200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팔공지맥을 지나는 동네
* 군위군(軍威郡)
경북 중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은 영천시, 서쪽은 구미시, 남쪽은 대구광역시와 칠곡군, 북쪽은 의성군과 접하고 있다. 남부의 대구권과 북부의 안동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대구의 통근권·통학권으로서 1일생활권에 속한다. 삼한시대 이전의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삼한시대의 변진 24국 중 여잠국이 이곳에 비정되고 있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노동멱현과 모혜현이 설치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노동멱현은 군위현으로, 모혜현은 효령현으로 개칭되어 숭선군(선산)의 영현이 되었다. 군위현과 효령현은 고려시대에 상주에 예속되었다가 1143년 일선현(선산)에 환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군위현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효령현을 병합하여 독립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설치하여 조선 후기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군위의 별칭은 적라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인접한 의흥군이 폐지되고 의흥면·우보면·산성면·부계면·고로면의 5개면으로 재편되어 군위군에 합병되었다. 1979년 군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고로면 화북리에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안각사가 있음에 따라 '삼국유사면'으로 변경하는 주민투표를 거쳐 2021년 1월 1일 고로면의 명칭을 '삼국유사면'으로 변경했다. 위천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642년(선덕여왕 11)의상대사가 세운 사찰로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 『삼국유사』를 낳은 유서 깊은 사찰 인각사가 있는데, 주위에 수십 층의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 아래에는 맑고 깊은 소(沼)가 있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백학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낸다. 지금도 운치 있는 절경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남동쪽에 있는 팔공산(1,192m)이 대구광역시·영천시와의 분수령을 이루며, 그 지맥이 이어져 동부군계에는 선암산(879m)·방가산(756m)·화산(828m) 등의 높고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군의 중앙부에는 매봉산(488m), 북부에는 선방산(437m)이 솟아 있으며, 이를 둘러싼 지역에는 100~300m의 구릉성산지가 발달하여 있다. 동부산지의 삼국유사면 낙전리·학암리 일대에서 발원한 위천이 동남산지의 팔공산 줄기에서 발원한 남천·사창천 등을 효령면 병수동에서 합류하여 북서부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나 군 전역에 산이 많아 농경지의 발달이 미약하다. 화산암류의 구릉지와 현무암의 풍화토인 사양토가 많아 토질은 척박하나 관개는 우수하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군의 동부지역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2개의 국도가 각각 군의 서부와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여 대구-안동, 영천-안동을 연결한다. 3개의 지방도가 각각 대구·선산·영천을 연결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구미시(龜尾市)
대한민국 중남부에 있는 도시로 1970년 국가 수출정책을 바탕으로 내륙 최대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발전했다. 주로 반도체·휴대전화·LCD·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 제품을 생산한다. 경부선 철도, KTX, 경부고속도로, 국도가 도시 안팎을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원활하다.동남쪽에는 칠곡군, 서쪽에 김천시, 북쪽에는 상주시, 동북쪽으로는 군위군과 의성군을 접하고 있다. 백두대간 줄기의 군봉(郡峰)이 남쪽으로 흘러 뻗어 형성한 연악산맥(淵岳山脈)의 지맥인 수선산(修善山, 684m)·복우산(伏牛山, 509m)·원통산(元通山, 476m)·옥녀봉(玉女峰, 520m)·비봉산(飛鳳山)·삼봉산(三峰山, 448m) 등이 솟아 남쪽으로는 금오산(金烏山, 977m)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동쪽에는 팔공연산(八公連山)의 지맥인 유학산(遊鶴山, 839m)·청화산(靑華山, 701m)·냉산(冷山, 692m)·베틀산(369m) 등이 솟아 곳곳에 고산준령이 있다. 퇴적암으로 된 천생산(天生山, 407m), 응회암질 암층으로 구성된 봉두암산(鳳頭岩山, 327m)과 유학산으로 이어지는 산계가 급한 경사와 상당한 기복량을 나타내며, 그들 사이를 이계천이 동서로 개석(開析)하면서 충적층을 이룬다. 또한 북서부지역의 중앙부에는 감천(甘川)·해평천 등 크고 작은 지류를 합치면서 낙동강이 남류하고, 유역에는 기름진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선산분지를 이루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도문리의 냉일재에서 발원해 남서류하면서 해평면 도문리·월호리·낙성리·해평리를 관류하는 습문천(習文川)은 해평면 부근에서, 장천면 오로리·금산리·상림리를 흐르는 금산천과 여남리·상장리를 남서류하는 한천이 도심지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지역은 전근대사회에서 선산·인동의 두 지역으로 발전해 왔다. 이들 지역의 초기 역사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임수동·인의동, 선산읍 생곡리 등지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 이후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진행되어 사회분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영토확장으로 인한 각축장이 되었다가 점차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어 일선군(一善郡: 선산지역)과 사동화현(斯同火縣: 인동지역)이 설치되었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이곳은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907년(효공왕 11)견훤이 일선군과 그 남쪽 10여 성을 점령한 이래 후백제의 영역에 들어감으로써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936년(태조 19) 양국의 군대가 선산읍 동쪽 일리천(一利川)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여 여기서 승리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때 이 곳의 호족 김선궁(金宣弓)이 왕건에게 귀부해 큰 공을 세워 중용되었고, 이후 그의 후예들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선주(善州)로 개편되어 자사(刺史)가 임명되었으나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일선현으로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어 해평군·군위현·효령현·부계현을 속현으로 거느리다가 지선주사(知善州事)로 승격되었다. 인동현은 1018년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어 고려 말까지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가 설치되어 독립행정단위가 되었다. 한편 1235년(고종 22)이유정(李裕貞)이 군대를 이끌고 해평에서 몽고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했고, 1380년(우왕 6)과 1383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아 크게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 때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선주 읍성(邑城)이 축조되어, 백성들이 안주하게 되었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시 선주는 선산군으로 개명되었고, 인동현은 현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기 군수·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선산군은 2년 뒤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당시 이 곳의 토지는 선산지역이 비옥한 반면 인동지역은 비옥·척박이 반반이며, 풍속은 선산은 화려하고 학문을 좋아한 반면 인동은 검솔하고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한편 고려 후기 이래 이곳의 선산김씨·해평윤씨·인동장씨들이 명문으로 등장했고, 길재(吉再)의 성리학이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인재(人才)의 부고(府庫)’인 영남지방 중에서 “영남의 인재 가운데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 半在一善).”라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장현광(張顯光)과 같은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선산군·인동군이 되었으나, 1914년인동군은 폐지되어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구미시는 과거 선산도호부 및 인동도호부의 일부 지역이 시로 발전한 곳이다. 구미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곳의 이름이 선산도호부의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선산과 인동이 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는 경상북도에 속했다. 1914년 상구미면·하구미면이 구미면으로 통합되고, 인동군은 폐지되어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1963년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구미가 현재와 같은 공업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69년 경상북도가 지방공업 개발장려지구로 지정, 섬유단지인 1단지와 전자공업단지인 2단지를 조성하면서부터이다. 그후 1977년에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인동지역이 개발되면서 1978년 구미읍과 인동면이 통합, 구미시로 승격되어 국내 최대의 내륙공업도시로 성장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국가경쟁력강화와 도시와 농촌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선산군과 통합되어 새로운 구미시가 되었다.[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의성군(義城郡)
경북 중앙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은 청송군과, 서쪽은 상주시와 접한다. 남쪽은 군위군, 구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에는 안동시와 예천군이 있다. 경상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도내 다른 지역과의 거리가 대부분 80km 이내이다. 중앙선 철도가 군을 관통하고, 중앙고속도로와 대구-안동, 의성-영천, 봉양-다인 등 육로교통편이 사통발달 해있다. 지금의 의성군은 옛 의성현과 옛 비안현이 합해 이루어진 군이다. 옛 의성현은 지금의 의성군의 동부에, 옛 비안현은 서부에 해당한다. 옛 의성현은 삼한시대에 소문국이 독자적인 세력을 지니고 발전했던 곳인데 신라가 세력을 넓혀 185년(벌휴왕 2)에 이곳을 공격해 소문군을 설치했다.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757년(경덕왕 16)에 문소군으로 개칭하고 진보현·비옥현·안현현·단밀현을 영현으로 관장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일계현과 고구현을 합병해 의성부로 승격했으나, 1018년(현종 9)에 안동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의성현이 되었으며, 1199년(신종 2)에 강등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의성현을 유지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입지였던 우곡면을 비안군에, 두입지였던 소야천면을 의흥군으로 이관하여 면적이 줄어들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춘산면·가음면·옥산면·점곡면은 그대로, 북부면·나부면이 의성면으로, 내사면·외사면이 사곡면으로, 단촌면·구산면이 단촌면으로, 산운면·상천면이 산운면으로, 소문면·억곡면이 소문면으로, 금뢰면·봉양면이 봉양면으로, 안평면·석전면과 비안군 외북면이 안평면으로 통합되었다. 비안군의 18개면은 비안면·구천면·단밀면·단북면·안계면·신평면·다인면 등 7개면으로 폐합되어 의성에 편입되었다. 1934년에 산운면과 소문면을 통합해 금성면으로 개칭하고, 1940년에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89년에 신평면 안사출장소가 안사면으로 승격되었다. 대체로 군의 동쪽은 높은 산지이나, 서쪽으로 가면서 낮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보현지맥의 영향을 크게 받는 동부는 갈라산(葛羅山, 570m)·황학산(黃鶴山, 782m)·구무산(676m)·산두봉(山頭峰, 719m)·선암산(船巖山, 879m) 등 높은 산들이 남북으로 이어지며, 북서부에는 보현지맥에서 분기된 일월산맥(日月山脈)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뻗어내려 독점산(獨店山, 311m)·문암산(門巖山, 460m)·곤지봉(混池峰, 328m) 등이 연봉을 이룬다. 서남부에도 만경산(萬景山, 499m)·장자봉(莊子峰, 422m)·청화산(靑華山, 701m) 등 가파른 산이 많으나, 군의 중앙부와 남부는 대체로 300~400m 높이의 완만한 구릉성 산지가 발달해 있다. 하천은 대부분 낙동강의 지류로서, 고도가 높은 동부산악지대에서 발원해 북류하거나 북서쪽으로 흐른다. 구무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은 의성읍을 지나 쌍계천(雙溪川)과 합류하여 위천(渭川)으로 흘러드는데, 위천은 다시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에 유입한다. 그리고 황학산 남쪽에서 발원한 미천(眉川)은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망율천(望栗川)과 합류하면서 북쪽으로 흘러 안동시역 내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그밖에 소규모 하천들은 대부분 위천으로 유입해 낙동강 수계를 형성한다. 의성군은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중앙선이 남북으로 지나며 단촌역·의성역·탑리역이 있고 안동-대구, 예천-영천을 잇는 국도가 나 있다. 군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면 교통이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상주시(尙州市)
경북 서북쪽 내륙에 있는 도농복합형 도시로, 동쪽으로 구미시와 의성군, 서쪽으로 보은·옥천·괴산군, 남쪽으로는 김천시와 영동군, 북쪽으로는 문경시와 예천군에 맞닿아있다. 백두대간 자락에 있어, 속리산·대야산·백화산·갑장산 등 임야가 전체 면적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이라하여 쌀·곶감·명주가 유명하다. 특히 곶감은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이상을 차지하는 상주시 대표 농산물이다. 삼한시대에는 상주시 지역에 사벌국(沙伐國:또는 沙伐梁國, 沙弗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그후 3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사벌주·상주(上州)·상주(尙州) 등 신라의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상주(尙州)가 설치되어, 1주(州), 10군(郡), 3현(縣)을 관할했다. 고려시대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상주목(尙州牧)·귀덕군절도사(歸德郡節度使)·안동대도호부 등으로 개칭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전국에 8곳의 목을 설치할 때 상주목이 되었다. 당시 상주목은 7개의 속군(屬郡)과 18개의 속현(屬縣)을 거느린 대읍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392년(태조 1)에 경주로부터 관찰사영이 상주로 옮겨와 경상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중인 1596년(선조 29)에 관찰사영은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한 대구로 옮겨갔다. 상주의 별호는 상락(上洛)·상산(商山)·타아 였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상주의 두입지였던 영순면·산동면·산서면·산북면·산남면이 문경으로, 단동면·단서면·단남면·단북면이 비안으로 이관되어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 때에 상주군의 24개면이 15개면으로 폐합되고, 함창군이 폐지되어 공검·함창·이안의 3개면이 편입됨으로써 다시 영역이 넓어졌다. 1931년에는 내동면·내서면·내남면·내북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이루어진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에는 상주읍이 시로 승격, 상주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상주군과 도시기능을 담당했던 상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상주시를 이루었다. 낙동강이 흐르는 동부일대를 제외하면 이 지역의 대부분은 백두대간의 영향으로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시의 동부지역 일대에는 넓은 평야가 발달했다. 동쪽에 삼봉산(三峰山, 448m)·건지봉(421m), 서쪽에 속리산(俗離山, 1,058m)·형제봉(803m)·팔음산(762m)·포성봉(933m), 남쪽에 갑장산(806m)·국수봉(793m), 북쪽에 남산(南山, 822m)·작약산(芍藥山, 763m), 시의 중앙에 노음산(露陰山, 729m)·천봉산(天鳳山, 436m) 등이 솟아 있다. 주요하천으로는 국수봉과 김천시의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북동류하면서 공성면·청리면을 거쳐 중심시가지에서 북천과 합류, 낙동강에 흘러드는 병성천(屛城川)과, 소백산맥의 형제봉에서 발원하여 화서면·외서면·이안면을 거쳐 함창읍에서 영강(潁江)과 합류하는 이안천(利安川)이 있다. 또한 서남부를 지나 영동군으로 흘러가 금강에 합류하는 석천(石川)이 있다. 경북선이 시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여 김천에서 경부선과, 북쪽으로는 영주에서 중앙선 및 영동선과 연결되어 내륙 산간지방까지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 도로는 문경과 김천을 연결하는 국도가 시를 남북으로 지나고, 보은과 구미를 연결하는 국도가 동서방향으로 나 있다. 그밖에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팔공지맥에서 2022년도 진달래꽃을 보는군요.
이번에도 구미에 있는 친구가 들날머리 택배를 해준다니 한결 수월합니다.
비박지는 일단 경운산과 청화산으로 잡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땅재 버스종점 인심사납다는 식당이 유일합니다. 나머지는 행동식으로 꾸려야 하겠고,,,
물을 구할 수 있는 곳도 오로고개 외에는 주선고개에서나 구할 수 있을것 같네요.
꽃피는 봄에 주기를 짧게 가져가볼까 하고, 4월초에 앵자지맥, 4월 말에 호미지맥, 5월초에 호미 졸업, 봄모임에 모악지맥까지 스케쥴을 잡았습니다. 6월초 웅석지맥, 6월말 백운지맥, 7월에 황병지맥, 성지지맥 순으로.... 이후 칠봉, 천황, 신선, 화왕, 명성, 거제, 식장, 갑산, 금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계절별 맞춤으로 조언 부탁드립니다.^^
처음 계획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준희선생님께 출항보고를 하며, 의견을 조율해보니 이틀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시네요. 청화산에서 비박을 하면 팔공의 모든 것을 다 건질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그래서 급거 여유롭게 내려갈려던 계획을 05:30분발 첫차로 변경하고, 친구에게 당재에서 보급을 한번 더 부탁했습니다.
당재에 늦게 도착해도 보급을 받을 수 있고, 간단한 등짐으로 첫 구간을 건널 수 있으니 밤 늦게라도 당재에 도착하여 친구에게 보급 받고, 청화산에 올라 비박을 하기로 정했습니다. 이튿날 청화산에서 합수점까지는 약 21.5km이니 일출을 보고 출발한다 해도 크게 부담되는 거리는 아닙니다.
앉으면 눕고싶고 누우면 디비자고 싶다더니 꾀만 잔뜩 늘어서 당재에 내려 구미 친구집에 가서 자고 담날 아침 다시 당재로 택배받아 가벼운 등짐으로 팔공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식장으로 새띠고개를 넘어오라고 마지막까지 친구를 머슴부리듯 부려먹었습니다. ㅋ^^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효령재/ 906번 지방도로/ 구미시 장천면 - 군위군 효령면 경계
구미시 장천면과 군위군 효령면을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이 곳에서 명곡천(明谷川)이 발원하여 한천으로 유입되어 구미 낙동강으로 합류된다.
- 도로에 내려서서 왼쪽으로 약간 올라가면 가드레일 끝나는 지점에 「구미시/ 장천면」 교통표지판과 목장승 3개가 서 있는 곳이 들머리라는데 목장승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 구미시 장천면(長川面)
구미시 장천면은 신라 초기에 상주와 더불어 국경 지대에 있어 백제와 분쟁이 잦았던 곳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산에서 장천을 거쳐 인동, 군위, 안동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였고 임상역(林上驛)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 출신인 황사중, 김윤부 등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매복하였다가 왜적 10여 명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개편하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의 길이가 길다하여 장천이라 하였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으로 구미시 장천면이 되었다. 구미시 최동단에 있는 지역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장천면 동부에서 남북 방향으로 지나며, 대구와 상주 방면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남서부 지역은 교통이 편리 하고 북동부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다. 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이 밖에 고추, 마늘, 참외, 수박 등 특용작물 재배가 성하며 한우 사육도 활발하다. 특히 30년 전부터 재배해온 청양 풋고추는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하여 소바자에게 인기가 높고, 점질토양에서 재배한 수박은 다른 지역 수박보다 당도가 월등히 높다. 한우는 270여 농가에서 1,700두 가량 사육하고 있는데, 맑은 물과 신선한 초지 공급으로 육질이 뛰어나다.
구미시 장천면 명곡마을과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녹동마을을 좌우로 두고 길이 없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잔펀치를 계속 오르내린다. 375.9m봉 직전의 능선 안부에서 군위군 효령면사무소 방향의 등산로가 뚜렷한데 그쪽으로 직진하면 알바이다. 375.9m봉을 통과해야만 응봉산으로 이어지는 지맥 능선이니 알바하지 않도록 조심할 지점이다.
♤ 응봉산(應峰山, 334.1m)
군위군 효령면과 구미시 장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성황당 안부에서 140여m 고지를 쳐 올려 시그날이 수없이 달린 응봉산에 오른다. 오랜만에 이름이 달린 봉우리이다. 응봉산에서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좌틀하여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는데, 급경사 내리막이다.
- 준희선생님의 산패가 달려있다.
♤ 325.9m봉
응봉산에서 중앙고속국도 군위터널 위를 통과해서 325.9m봉으로 오른다. 이 곳에서 금정산 방향으로 직진하면 알바이다. 325.9m봉 직전 10m지점에서 우틀로 지맥 능선이 이어진다. 알바 유의지점이다.
- 돌무더기가 있는 325.9m봉 정상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 상주-영천간 중앙고속도로
오른쪽 아래로 고속도로 암거가 보인다. 암거를 연속 세개를 통과하여 정면의 전봇대 사이로 들어서서 좌능선 숲길로 267.3m봉에 오른다.
- 여영님 산패와 삼각점이 있다.
♤ 적라산갈림길
갈림길에서 적라산은 오른쪽으로 280m(약 7분) 떨어져 있다. 지맥길은 왼쪽 내리막이다.
♤ 적라산(赤羅山, 352.1m)/ 한적산(韓敵山)/ 삼면봉(구미시 장천면, 군위군 효령면 → 군위읍)
경북 군위군의 군위읍 무성리와 효령면 불로리 경계에 있는 밋밋한 산이다. 적라산은 행정구역상 좌측은 계속 구미시 장천면이지만, 우측은 군위군 효령면에서 군위군 군위읍으로 바뀌는 삼면봉이다. 지명은 군위의 이칭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 한적산으로 기록되고 통용되었다. 관련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군위)에 "한적산(韓敵山)은 현 남쪽 15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유사한 기록이 『여지도서』(군위)에 나타난다. 이후 표기자의 변화 없이 『해동지도』(군위)에 한적산(韓敵山)이 기재되다가 『대동여지도』에서는 일부 표기자가 변화되어 한적산(韓赤山)으로 표기되었다. 『1872년지방지도』(군위)에는 현재의 산지명인 적라산(赤羅山)이 기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지지자료』(군위)에는 적라산(赤羅山)이 남면 중무동 남록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의 "적라산(赤羅山): 군위군 군위면, 효령면과 선산군 장천면 경계에 있는 산. 군위군의 옛 이름을 땄음"이라는 기록을 통해 구체적인 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옛날, 이 적라산 아래 조모씨가 살고 있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이름있는 지관에게 묘터를 부탁하였더니 그 풍수가가 적라산의 한 곳을 정해 주면서 "이 산 아래 흐르는 물에 나무 오리를 만들어 띄워 놓아 그 오리가 하늘로 날아가면 장차 높은 벼슬에 오를 것입니다."고 하였다. 조씨는 풍수가가 말한 대로 부친의 장사를 정성껏 지내고 나무로 오리 모양을 만들어 하늘에 기도하면서 물 위에 띄워 놓았다. 조씨는 매일 그 나무 오리를 바라보며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과연 가을이 깊어질 무렵, 나무 오리가 털이 나는듯 하더니 날이 갈수록 깃이 자라 조금씩 퍼덕거리지 않는가? 이상하기도 하며 기쁘기도 하여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갔다. 마침 그때 서울에 과거 시험이 있어 조씨는 그 과거에 무난히 합격하였고 벼슬길에 오르더니 벼슬이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런데 이 조씨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벼슬이 높아지는 데만 욕심이 많아 다른 사람을 도울 줄을 몰랐다. 풍수가가 생각해보니 그냥 두었다가는 나라에 해를 끼칠 것 같은지라 임금님께 상소하기를 "조 아무개는 장차 나라에 역모를 할 것입니다" 고 하였다. 이 상소를 본 임금님은 사람을 보내 전후 사실을 조사하여 그를 멀리 귀양 보낼 뿐 아니라 조씨 부모의 묘를 파내고 적라산의 지맥을 끊어버렸다. 그 후로는 적라산의 정기가 없어져서 이 고을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 준희선생님의 정상 산패와 3등삼각점(군위 301/2004 재설)이 있다.
고속도로 절개지까지 내려와 계단을 내려서려니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해야 합니다. 수로를 따라 왼쪽으로 내려섰습니다.
♤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좌측편으로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암거가 있으나 보통은 우측으로 내려 골프장을 우회하여 오로고개에 오른다.
고속도로 암거(굴다리)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오로고개가 보이지만 왼쪽 고속도로 옆으로 올라가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보다 맥길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930번 도로에서 해피아일랜드 골프장 좌측능선으로 지맥길을 올라서서 177.8m봉에 올라 오로고개로 내리는 방법이다.
- 해피아일랜드 골프장 좌측 능선으로 이어진 지맥길을 따라간다. 등로 우측의 골프장 전경, 그 우측으로 중앙고속도로와 그 밑을 지나는 930번 도로 굴다리가 보인다.
산패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177.8m봉
천주교 묘지가 조성된 정상에서 내려서면 골프장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녹색의 대형 저수조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조를 지나 왼쪽으로 가지않고 능선을 따라 약간 더 내려서면 골프장 주차장으로 나온다. 해피아일랜드 골프장 정문을 나서면 오로고개이다.
구미시에는 금오지맥 선산읍의 오로리와 팔공지맥 장천면의 오로리 두군데의 오로리가 있군요.^^
♤ 오로고개(五老峴)/ 930번 지방도로/ 구미시 장천면 - 군위군 군위읍 경계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와 군위읍 무성리, 수서리를 연결하는 930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오로고개의 해피아일랜드 골프장 입구이다. 길 건너편에 무량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군위읍으로 통하는 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지난다. 이곳 오로리는 장천면 오로지(五老池) 안쪽에 위치하며, 군위군과 경계로 지 가산(芝 歌山)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아늑한 곳에 터를 잡아 전통적인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바른 작은 동네로서, 서기 1,500년대 말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에 살던 밀양박씨 박준(朴雋)선생이 이곳에 피난와서 살게 되어 세거한 곳이다. 선생은 호를 노은(老隱)이라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동리 첫 글자와 자신의 호의 첫 글자를 따서 오로실(五老室)이라고 동네 이름을 지었다. 후에 선생의 현손 5형제가 동네 입구네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를 각각 한 그루씩 심어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성하다. 마을에는 박준선생의 추묘소인 노은당(老隱堂)이 있으며, 그 5세손인 박영달선생의 후손들이 건축한 춘우정(春雨亭)이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동구의 다섯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오로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 골프장 입구에서 남서 방향인 장천면 오로리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고개마루로 약간 이동하여 '고향'이란 간판을 지나, '50km' 속도제한 표지판 직전, 공장 옆 옹벽 오른쪽이 들머리이다.
오로고개에서 차로 1시간 거리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김수환추기경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 故 김수환추기경님 생가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 사랑과나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김수환추기경이 군위 초등학교를 거쳐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김 추기경의 집안은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 김 요안은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옥중 순교하였고, 부친은 로베르 신부의 일을 도우는 등 가족 모두가 유명한 신자 집안이었다. 김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일깨우고 배우고자 생가 주변에 전시관 기도처 등을 조성하였다.
지맥은 진등산(333m)에서부터 아래쪽은 계속 구미시 장천면이지만 위쪽은 군위군 군위읍에서 소보면으로 바뀌어 장천면과 소보면 시군계이자 면계를 따라 장고미기를 지난 348.8m봉까지 이어지고, 348.8m봉에서 아래는 계속 구미시 장천면이지만 윗쪽은 군위군 소보면에서 구미 산동읍으로 바뀌어 완전하게 구미시로 진입하여 장천면과 산동읍 경계를 따른다. 이후 곰재를 지난 270m봉에서 완전하게 구미시 산동읍으로 진입하여 백현리와 인덕리의 리계를 따라 경운산으로 오른다. 82번 철탑을 지나 오른 270m봉 부터는 베틀산에서 해평면과 만날 때까지 구미시 산동읍을 관통하여 북서향으로 진행한다.
♤ 장고미기/ 장구먹/ 양회임도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에서 장구미기 임도 오른쪽 임도는 내장수지(內長壽池)와 장수동을 거쳐 군위 I.C.로 이어지는 고개로 장구의 모가지처럼 잘룩하게 생겼다고 해서 장구메기(장구머기)라고 부른다. 장구미기 내려서기 전에 왼쪽 아래 소나무 사이로 마을이 보이는데, 장천면 오로리의 장고미기마을이다. 개념도상 장구먹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 삼거리에서 원 정맥길은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야 하나, 등로가 희미하여 임도를 따라 직진으로 오르기도 한다.
장구매기에서 임도를 따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고 능선에 올라 아무런 표시도 되어있지 않고 묘지가 있는 곳인데 좌틀하는 지점입니다.
♤ 진등산(333m)/ 삼면봉(구미시 장천면, 군위군 군위읍 → 소보면)
장구미기 임도로 내려서서 어긋난 사거리 정상 등로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다시 90도 좌틀하는 지점이다.
- 330m봉 아래에 지다란 전파송출탑이 있다.
♤ 군위군 소보면(召保面)
군위군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군위읍과 의성군 봉양면, 남쪽은 구미시 장천면과 산동읍, 서쪽은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북쪽은 의성군 비안면과 구천면과 경계를 이룬다. 대체로 100~300m의 구릉성산지를 이루고 있다. 위천과 곡정천 및 그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곡류하며, 이들 하천연안에 평야와 취락이 주로 분포한다. 경지면적이 군내에서 가장 넓고, 쌀·사과·찰옥수수가 주로 재배되고 있다. 군위군에 딸린 소소보부곡인데, 고려시대 이전의 연혁이 문헌에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조선시대 화곡면, 소소보면, 석본면으로 군위현에 속하다가, 고종 32년 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소소본면의 10개동(대흥, 농암, 상소, 하소, 범바, 부흥, 달천, 언실, 모로, 상우), 석본면의 7개동(서경, 괘겸, 평지, 산법, 하계, 상원, 안령), 화곡면의 12개동(화실, 사촌, 달산, 낭성, 백현, 보촌, 복성, 율리, 사지, 두개, 수철, 대량), 선산군 산동면의 3개동(신흥, 산개, 오류)을 병합하여 소보면이라 칭하고 있다.
장고미기에서 올라선 진등산(333m)에서 소보면과의 경계이자 시군계를 따라 1시간 가량 진행했습니다.
♤ 348.8m봉/ 삼면봉(구미시 장천면, 군위군 소보면 → 구미시 산동읍)
지금까지 왼쪽 구미시 장천면, 오른쪽 군위군 소보면을 경계를 지나오다, 우측이 구미시 산동읍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맥은 완전하게 구미시 안으로 진입하여 우 산동읍 좌 장천면 경계로 진행한다. 지맥은 구미시 장천면과 산동면을 통과하며 이후 좌베틀산에서 내밀재로 진행 중에 만나는 시군계 삼면봉인 332.4m봉에서 다시 군위군 소보면과 만나게 된다.
- 여영님의 347m봉 산패가 있다. 삼면봉에서 왼쪽으로 진행한다.
장천면 택시를 불러 장천면에서 구미로 나와 끊어가기 용이한 지점입니다.
♤ 곰재(熊峴)/ 읍면계(구미시 장천면 - 산동읍)/ 923번 지방도로
곰재는 구미시 장천면 상림리에서 산동읍 백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도로변에 '곰재농장' 대형 표지석이 있다. 지맥은 이곳에서 장천면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새롭게 산동읍을 맞이하여 완전하게 산동읍 안으로 들어선다. 곰재는 옛날 곰이 많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어떤 포수가 고갯마루에서 곰을 보고 몸을 피하였는데, 실제 그 곰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행인이 죽은 곰을 주워 큰 이득을 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웅현 아래에 곰재못이 있다.
- 도로를 가로질러 맞은편으로 들어서는 임도 들머리에 '곰재농장' 입간판과 '산지일시사용신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문수봉으로 가는 임도를 따른다.
♤ 구미시 산동읍(山東邑)
구미시 산동읍은 동쪽으로 장천면과 군위군 소보면, 남쪽으로 인동동, 서쪽으로 고아읍과 해평면, 북쪽으로 군위군 소보면과 접한다. 구미시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봉화봉(烽火峰), 서쪽으로 덕곡(德谷) 고개, 북쪽으로 인덕천(仁德川)이 있다. 베틀산·비재봉·곰재봉을 잇는 능선을 중심으로 하여 북동쪽 비탈면은 경사가 급한 편으로 위천의 지류인 곡정천(谷亭川) 상류부를 이루고, 남서쪽 비탈면은 100m 미만의 낮은 구릉성 지형을 이룬다. 남부의 하계망은 그물 형태를 이루며, 이를 이용하여 만든 소류지가 곳곳에 분포한다. 1413년(태종 13) 몽대방(夢臺坊)·산외방(山外坊)이라 칭하였고, 1914년에 선산군 산동면이 되었다. 1973년에 도산1리와 도산2리가 군위군 소보면에 편입되었고,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구미시에 편입되었다가 2021년 1월 1일 산동읍으로 승격되었다. 도중리, 동곡리, 백현리, 봉산리, 성수리, 송산리, 신당리, 인덕리, 임천리, 적림리 등 10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도중리는 도림(道林)과 중평(中坪)에서 한 음절씩 땄고, 동곡리는 동촌동과 질곡동에서, 백현리는 자연마을인 백곡(柏谷)과 웅현(熊峴)에서, 봉산리는 자연마을인 봉림(鳳林)과 오산(梧山)에서 한 음절씩 땄고, 성수리는 자연마을인 용수(龍水)와 수성(水星)에서, 송산리는 자연마을인 정송(正松)과 명산(明山)에서 한 음절씩 땄다. 신당리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감미동, 우항동, 관동, 복래동, 원당동, 신동, 헌덕동, 구미동 각 일부를 병합할 때 신동과 원당에서 한 음절씩 땄고, 인덕리는 1914년 구교동, 용인동, 기복동, 문수동, 헌덕동 각 일부를 병합할 때 용인과 헌덕에서 한 음절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임천리는 많은 군자가 벼슬을 버리고 한거임천(閑居林泉)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적림리는 숲이 마을을 겹겹이 둘러싸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봉산리와 신당리 일대에 들어선 산동농공단지, 구미국가산업단지 제4단지, 교육기관, 다양한 농산물 생산 등 산·학·농이 함께 어우러져 발전 잠재력을 고루 갖춘 지역이다. 국도 25호선과 67호선이 지나며, 3개의 지방도와 군도(郡道)가 연결되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나 북부 산간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다. 주민의 65%가 1차 산업, 20%가 2차 산업, 15%가 3차 산업에 종사하며, 특산물로 금오산 멜론·인덕 참외·산동 포도가 있다.
♤ 구미시 환경자원화시설
구미시 산동읍 백현리에 위치하고 있는 구미시 환경자원화시설은 2007년에 착공하여 2011년 1월부터 구미시에서 발생하는 생활쓰레기를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현대 시설을 갖춘 곳이다.
오른쪽으로 턴하는 지점인데 특별한 표식이나 산패는 보지 못했고 조금 가다보니 임도로 내려서기 전에 소원성취 탑이 있던데 사진은 100장이 꽉 차서 올리지 못합니다. ㅋ
♤ 270m봉/ 완전히 구미시 산동읍으로 진입
곰재에서 경운산 문수봉으로 약 25분 진행하다가(임도를 따르기도 함) 임도를 건너 왼쪽 숲으로 들어서서 경운산 문수봉으로 오른다. 82번 철탑을 지나 270m봉에서 우틀하여 장천면과의 경계를 벗어나 완전하게 산동읍으로 진입하여 북상하며 이후 베틀산에서 해평면과 만난다.
철계단을 올라가 초소 아저씨에게 물도 한잔 얻어마시며 주변을 빙둘러 구경하며 설명을 들었습니다.
♤ 문수봉(341m)/ 경운산(慶雲山)/ 산불감시초소 2개/ 재난방송시스템
경운산은 구미시 산동읍 인덕리, 동곡리, 백현리 경계에 있는 경운대학교 뒷산이다. 산 아래에 문수사란 절이 있어 정상의 원래 이름은 문수봉이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문수봉이라 불리던 이 산은 경운대학교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경사로운 구름이 머무는 산, 즉 경운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공인이 된 지명인지는 알 수 없다. 문수지와 경운대학교, 그리고 오른쪽으로 산동참생태숲, 문수지 너머로 인덕리와 구미 C.C. 선산컨트리클럽이 조망된다. 구미시 산동면, 옥계동 넘어 오른쪽 멀리 구미 금오산이 바라 보인다. 속리산과 주왕산, 그리고 팔공산 등 멀리 영덕의 산까지 바라보이는 사방이 확 트인 곳이다.
- 좌틀로 내려선다.
♤ 경운산 임부암(姙婦岩) 전설/ 전망데크
옛날에 지금의 선산 지역에 왕비가 있었는데, 임신을 하면 낙태를 거듭하였여 왕이 전의들에게 물은 즉, 왕비의 몸에 음기가 약하여 그러함에 음기가 센 곳을 지나는 바람이 우측으로 돌아 몰아치는 수직의 암벽에 나신(裸身)으로 기대어 그 음기를 받으면 태반이 튼튼하게 되어 무사 출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음기가 세기로 소문난 현재의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위치한 숭선골에 병풍처럼 펼쳐진 경운산(慶雲山, 현재 이름) 정상 문수봉 바로 아래에 있는 깍아 내리는 듯한 암벽을 찾아, 절벽 옆에 조그마한 궁을 지어 거처지를 만들고, 계곡에 장군과 맹수를 배치하여 사람과 동물의 접근을 막았다. 왕비는 경운산에서 생산되는 송이, 영지, 도토리 등 산채를 먹으며 나신(裸身)으로 절벽에 기대어선 채 임신을 하여 10개월 후 건강한 왕자를 출산하였다. 태어난 아이가 영명하여 자라서 왕이 되어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비의 모성애에 감복한 경운산 산신령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그들의 형상을 띈 바위를 만들었으니 임부(妊婦)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임부암(妊婦岩)이라고 칭하였고 임부(妊婦)가 기대어 섰던 절벽을 임애암(妊崖岩)이라 칭하였다. 주변을 지키던 장군의 모습을 바위로 만들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장군암(將軍岩)이라고 이름지었으며 맹수의 모습도 바위로 만들었으니 금수암(禽獸岩)이라고 이름하였다. 맞은편 산에서 왕이 목욕하던 작은 연못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지켜본 거북의 형상을 따서 만든 바위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귀암(龜岩)이다. 후세 사람들이 왕의 거처를 인덕궁(仁德宮)이라 이르고, 왕이 매일 태양과 달이 중천에 떠올랐을 때 몸을 씻었던 작은 웅덩이를 제왕지(帝王池)라 하였다. 후일 태반이 약한 여성들이 임부암 곁에서 나신으로 음기를 쐬며 임신을 하여 튼튼한 아기를 낳았다. 태어난 왕손이 영명하였다 하여 입시철이면 많은 학부모들이 이곳 임부암을 찾아와 자녀들의 합격을 기원하였으며 제왕지에는 몸이 허약한 사람들이 찾아와 해와 달이 중천에 떠올랐을 때 목욕을 하며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 비재
구미시 산동읍 동곡리에서 백현리를 잇는 923번 지방도 2차선 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산동읍에서 둘레길 형태로 조성한 산동참생태숲이 지나가며 경운대학교로 이어지는 임도가 있는 곳이다. 산동참생태숲 표지석이 서있다. 비재는 옛지도(1917 일제 발행) 상에는 星領(ピルリョン)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별고개로 불렸다고 하는데, 비재라는 이름을 얻은 연유는 찾을 길이 없다. 왼쪽 아래 동곡리에는 산동논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 산동참생태숲 표지석에서 도로를 건너 맞은편 전봇대 옆 등로가 들머리다.
♤ 304.4m봉
개념도와 온라인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에는 이 봉우리를 '우베틀산'으로 표시하고 있지만, 베틀산 입구 베틀재에 구미시에서 설치한 이정표에 의하면, 베틀산 0.3km 직전봉(개념도 상 뾰족봉)을 우베틀산으로 표시하고 있으므로, 행정기관에서 정한 봉우리 표시를 따르기로 한다. 우베틀산은 산동면 소재지에서 바라볼 때 가장 우측에 있는 봉우리라서 우베틀산이라고 부른다.
- 바위 두개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좌측으로 몇발자욱 나서면 암릉 조망대가 나온다. 서편 산동읍 도중리 구미 하이테크벨리 국가산업단지가 훤하고, 그 너머로 구미 시내와 금오산이 위치하고 있다.
♤ 우베틀산(331.9m)/ 뾰족봉
개념도 상 뾰족봉(332m)으로 표시된 봉인데, 이정표(←베틀산 0.7km, →동곡리 4.9km) 지주목에 누군가가 우베틀산이라 적었다가 가위표로 지우고, 그 밑에 뾰족봉이라고 다시 적어 놓았다. 이곳을 지나 내려선 후 오르는 봉우리가 베틀산이고 베틀산을 중심으로 우베틀산, 좌베틀산이라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구미시에서 세운 이정표에도 이 곳을 우베틀산으로 지명하고 있으며, 서래야 박건석님의 ‘우베틀산(332m)’ 코팅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서, 이 봉우리를 '우베틀산'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우베틀산에서 급경사 내리막을 2분여 내려서면 저 아래로 철계단이 보이기 시작하고 철계단을 내려서면 로프가 등로 좌측편에 매여있고 곧 이어 둥근 통나무 원목 계단길을 내려선다.
- 벤치 두개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 베틀재/ 임도(234m)
산동읍 도중리에서 산동읍 백현리로 넘어가는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안부로 내려 선다. 임도의 이정표(↓우베틀산 300m, ↑베틀산 300m/ 좌베틀산 1.2km, ←도중리 1.9km) 상 이 재가 우베틀산과 베틀산 중간 지점으로 표시하고 있고, 지주목에 붙어있는 '베틀산 등산로' 안내판에는 이 곳을 '베틀 1, 해발고도 234m' 지점으로 표시하고 있다. 임도 좌우로 스텐레스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굴바위
스텐 계단을 올라서면 바위가 마치 엄청나게 큰 상어가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가 나타난다. 무속인들이 굿을 하는 장소인지 여러 기물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옛날에 산의 형태를 보고 베틀을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이 아래 지역이 해평면이다. 그 옛날 바닷물이 가득 잠겨있을 때 뾰족이 섬같이 솟아 나온게 있었는데 바닷물이 빠져나가 물이 들어날 때 평평한 땅은 해평(海平)이고 섬은 베틀산이 되었다는 유래가 내려온다.
지맥은 중앙의 베틀산에서 해평면과 만나고 이후 좌베틀산을 넘어선 332.4m봉에서 군위군 소보면을 만나기까지 좌(左)해평면 우(右)산동읍의 경계를 따라 진행한다.
♤ 베틀산(320.7m)/ 면계(구미시 산동읍 - 해평면)/ 조계산/ 비틀산
구미시 해평면 금산리에 위치한 산으로 과거에는 조계산으로 불리기도 했고 경상도 방언으로는 비틀산이라고도 한다. 3개의 베틀산 중에 중앙에 있는 산이다. 산동읍을 지나온 지맥이 베틀산에서 해평면과 만나 이후 산동읍과 해평면의 경계를 지난다.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암릉과 풍화동굴 등이 산재하고 있다. 해평면 금산리에서 볼 때 가운데 베틀산을 중심으로 북쪽 방향의 왼쪽에 위치한 좌베틀산과 남동 방향의 오른쪽에 위치한 우베틀산이 연봉을 형성하고 있다. 산중턱 바위절벽 곳곳에는 역암· 사암의 풍화나 해식작용으로 생긴 해식굴이 널려 있고, 동화사 부근에는 높이 6m 정도의 거대한 마애불입상이 동쪽을 향해 새겨져 있다. 동화사로부터 20분 거리에 있는 좌베틀산 정상에서는 구미 지역의 대표적 산인 금오산, 냉산(冷山), 청화산 등이 보인다.
- 좌베틀산까지의 거리를 900m로 표시하고 있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 구미시 해평면(海平面)
구미시의 북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북쪽에서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는 지형이다. 도개면 경계에 냉산이 솟아 있고, 산동읍 경계에 조계산의 여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솟아 군위군과 경계를 이룬다. 남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며, 강변에 경지 정리가 잘된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신라 때 병정현·파정현이었다가 고려 성종 때에 해평현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초기에 인동현에 예속되었다. 그 뒤 해평방·산내방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평방과 산내방을 통합하여 선산군 해평면이 되었고,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으로 구미시 해평면이 되었다. 낙동강을 낀 비옥한 평야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특산물로 금오산 청결미, 해평 참외, 냉산 수박, 해평 땅콩 등이 생산된다. 해평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국도 25호선 확충 등이 계획되어 있다. 문화재로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 선산 낙산리 고분군(사적 336호), 숭신산성·보천사·의구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5호)·낙봉서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2호) 등이 있다.
♤ 좌베틀산(369.6m)/ 조계산
해평면 금산리에 있는 베틀산 중 가장 높은 실질적인 주봉(主峰)이다. 예전에는 조계산이라고 불렀다. 대동여지도에는 조계산(曺溪山)으로 나오고, 1917년 발행 지형도에는 機山으로 나오는데, 베틀기(機)자이다. 해평 금산리에서 볼 때 왼쪽으로 동화사 뒤에 있는 산이 좌베틀산(369m), 가운데가 베틀산(320.7m), 남동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오른쪽 산이 우베틀산(304.4m)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암릉과 해식굴(海蝕窟) 등이 산재하여 산행이 재미있다. 고려시대 문익점은 중곡에서 목화씨를 전래시켜 재배에 성공하였는데 문익점의 둘째 손자인 문영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첫째 손자는 문래(文萊), 조선시대 태종 때 일선부사로 부임한 문영은 처가가 있는 선산현 해평면 월호동에 자리잡는다. 화려한 벼슬보다 민생을 위한 산업발전에 힘을 기울이는데 보람을 가지고 문영은 할아버지(문익점)의 뜻을 높이 받들어 베짜는 기계 만들기에 전념한다. 오랜 연구 끝에 문래의 동생인 문영(文英)은 조계산(해평면 금산리의 뒷산)의 모양과 공상다리(오상리 국도에 놓인 다리) 모양을 본따서 만든 베틀로 문영베(무명)를 짜는데 성공한다. 이 때부터 조계산을 베틀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베틀산 주봉인 좌베틀산과 우베틀산, 본베틀산 등으로 구분이 되며 높고낮은 여섯개의 봉우리가 있다. 한편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데 산 위에서 여인의 베짜는 소리가 들려왔다거나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여 베를 짰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정상 나무가지에는 수많은 시그날들이 달려있다. 그 오른쪽으로 등로가 선명하면서 시그날이 여럿 달려 있지만, 지맥길은 정상에서 왼쪽 상어굴바위, 동화사 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야 한다.
- 정상에는 돌탑과 2등삼각점(선산22/ 1981 재설), 베틀산등산로 안내판, 정상이정목(현위치: 베틀7, 해발고도 369m, → 베틀산 900m/ 우베틀산 1.4km, ←상어굴 500m)이 설치되어 있다.
♤ 332.4m봉/ 시군계 삼면봉(구미시 해평면, 산동읍 → 군위군 소보면)
왼쪽은 계속 구미시 해평면이지만 오른쪽이 구미시 산동읍에서 군위군 소보면으로 바뀌게 되는 시군 경계봉이다. 괴목이 서 있는 잘록이 안부에 능선길 좌우로 희미한 산길이 보이는데 해평면 도문리의 정운지와 산동읍 송산리의 백곡지를 잇는 고개이다. 이 안부에서 한차례 급경사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큰 반석바위가 덩그렇게 놓여있는 정상이 바로 시군경계인 삼면봉이다.
- 왼쪽 서쪽 잡목 사이로 도문리의 소상골마을과 정운지, 도문리의 도문동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 남일재(藍一峙, 200m)/ 내밀재/ 927번 지방도로
구미시 해평면 창림리, 도문리와 군위군 소보면 도산리를 잇는 경계로 927번 2차선 아스팔트 지방도(도신로)가 넘어가는 고개이다. 남일재는 구미시 해평면 도문리 내미리마을에서 군위군 소보면 도산리 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지만,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고지도에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한국지명총람》에 "남일재(내미티, 남일티, 藍一峙) : 냄일에서 해평면 도문동, 습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중략) 냄일(새마을, 藍一) : 남일재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기록과, 같은 문헌의 선산군 해평면 도문동 기록에 "내밀재(남일재) : 남일에서 산동면 도산동의 칠풍으로 넘어가는 재. (중략) 냄일이(남일, 남일리) : 습문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 내밀재 밑이 됨"라는 기록이 있어 이칭인 '내밀재', '남일티', '남일치', '냄일이'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개 지명에서 파생된 촌락지명도 확인할 수 있다.
♤ 구미시 해평면 창림리 남일마을
남일마을은 칠풍 남방 1.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냄일이란 이름은 이 마을 서쪽 해평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에 옛날에는 산적이 나타나므로 밤에는 넘기 어려워 어둡기 전에 넘어야 되겠다는 뜻으로 내머리재가 내밀재로 그 가까이 있는 마을이 냄일로 불리워졌다.
♤ 냉산갈림봉(618.1m)/ 삼면봉(군위군 소보면, 구미시 해평면 → 도개면)
냉산 분기봉에서 왼쪽이 구미시 해평면에서 도개면으로 바뀌고, 오른쪽은 군위군 소보면이 땅재를 지나 의성군(구천면)과 만날 때까지 계속된다. 돌무덤이 있는 서낭당 고개에서 약 750m 거리를 250고지 이상 계속 쳐 올려야 한다. 냉산과 땅재로 갈리는 삼거리로 냉산은 갈림봉 좌측편으로 1.3km 정도 벗어나 있다.
- 냉산까지 1.3km로 왕복 40분 소요된다.
냉산갈림봉으로 가면서 냉산 아래 도리사의 불빛이 계속 보였는데 정상에서 700m거리니깐 상당해 높은 지대에 있었습니다.
♤ 냉산(冷山, 691.7m)/ 태조산(太祖山)/ 삼각점봉
냉산은 구미시 해평면(海平面)과 도개면(桃開面), 군위군 소보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선산) 」에 "냉산(冷山)은 선산도호부의 동쪽 13리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그렇게 불리웠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여지도서(선산) 」, 「대동여지도」, 「1872년지방지도(선산)」에 냉산(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의 "냉산[冷山, 냉산성(冷山城), 배너미산, 태조산(太祖山), 숭신산성] : 숭신산성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이곳에 웅거하면서 후백제 견훤과 싸웠음"이라는 기록을 통해 냉산의 이칭인 배너미산, 태조산과 함께 냉산 정상에 냉산성 혹은 숭신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미 냉산이 태조산으로 불린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 산에 어가(御駕)를 두었던 데서 유래한다. 실제 왕건은 925년 팔공산 전투에서 명장 신숭겸을 비롯한 여러 장수를 잃는 등 견훤에게 패한 후 이 산에 숭신산성(일명 냉산성)을 쌓아놓고 929년과 930년 안동전투에서 잇따라 견훤의 후백제군을 대파한다. 이후 견훤이 왕위 계승자로 금강을 지명한 데 불만을 품은 신검은 935년 동생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로 유폐한 후 왕건의 고려군과 맞섰지만, 냉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인근 선산읍 일대와 고아읍 일대 일리천전투에서 결국 참패하고, 이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냉산을 후세 사람들이 태조산으로 부르게 됐고, 도리사의 일주문과 안내판 등에도 태조산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충남 천안의 진산으로 통하는 태조산(421m) 역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어서 붙은 산 이름이라는 점은 참고 할 필요가 있겠다.
- 냉산에 3등삼각점(안계 318/ 2003 복구)이 있다. 좌측 아래 도리사와 낙동강 방향을 내려다 보고, 다시 냉산 분기봉으로 되돌아 나간다.
♤ 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
선산(善山)의 옛 이름이 일리군(一利郡)이므로 일리천(一利川)은 구미시 인동면에 위치한 낙동강 지류로 비정하고 있다. 936년(태조 19)에 지금의 경북 구미 지방에서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로 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 고려와 후백제만이 대적하고 있었다. 당시 후백제의 상황은 견훤(甄萱)이 고려에 투항하고 아들 신검(神劍)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936년 6월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후백제의 신검을 칠 것을 청하여 태조가 이에 응해,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박술희(朴述希)를 보병과 기병 1만 명과 함께 천안부(天安府)로 보냈다. 천안부는 후백제군이 추풍령을 넘어와 김천(金泉)과 선산을 거쳐 군위(軍威)와 칠곡(漆谷) 일대로 진출하는 루트를 방어하는 거점이었다. 9월에는 태조 자신이 3군(三軍)을 이끌고 천안부에 이르러 합세해 일선군(지금의 선산군)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두 나라 군대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고려군은 마군(馬軍) 4만 명, 보병 2만 3,000명, 기병 9,800명에 여러 성의 군사 1만 4,700명 등 총 8만 7,500명으로 후삼국시대 삼국의 쟁패 과정 중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다. 참가한 장군은 명주대광(溟州大匡) 왕순식(王順式),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김철(金鐵)·홍유(洪儒)·박수경(朴守卿)·견권(堅權)·박술희·긍준(兢俊)·공훤(公萱) 등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장수 이름만도 38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의 중요성을 알 만하다. 이러한 대규모 병력동원은 견훤의 요청에 따른 역자징치(逆子懲治)의 의미를 넘어선 것으로서 그 목적이 후백제의 멸망에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후백제는 고창전투(古昌戰鬪) 이후 후삼국 주도권의 상실과 그 만회의 실패, 운주전투(運州戰鬪)에서의 패전과 운주(홍성) 이북 지역 상실, 정변에 따른 후유증, 견훤의 고려귀부, 신라의 고려에의 투항·병합 등으로 대내외적 조건이 악화일로에 처해져 있었다. 특히, 견훤의 참전은 후백제군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갈등도 야기시켰을 것이다. 또, 신검에 의해 금강(金剛)이 제거되면서 전주(全州) 지역의 호족(豪族)들도 후백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은 광주(光州) 지역 호족에 기반을 둔 신검보다 전주지역 호족을 외척으로 둔 금강을 지지하였다. 지방 호족들이 이탈하면서 후삼국 성립 이후 우위를 지켰던 후백제는 군사력 면에서도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후백제의 좌장군(左將軍)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이 싸워보지도 않은 채 항복하고 오히려 태조에게 “신검이 중군(中軍)에 있으니 좌우로 협공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신검을 공격할 계책까지 진언하였다는『고려사』의 기록에서 당시 고려군의 강력한 병세에 위압된 측면도 있지만, 신검정권에 대한 후백제의 호족과 장군들의 반발도 알 수 있다. 태조는 대장군 공훤에게 명해 곧바로 후백제의 중군을 치게 하고 3군이 일제히 전진해 공격하니 후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후백제군은 지휘부가 무너지면서 내분이 발생하여 자멸에 이르렀다. 장군 흔강(昕康)·견달(見達) 등을 비롯해 3,200명이 포로가 되고 5,700명이 전사하였다. 신검은 패잔병을 이끌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영동-금산을 거쳐 논산에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고려군은 황산군(지금의 연산)으로 진입하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진군해 주둔하였다. 탄령은 탄현(炭峴)으로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 대전 동쪽의 마도령, 금산군 진산면 숯고개 등으로 보고 있다. 신검은 부여와 대전, 영동 등에 배치된 병력을 규합하여 고려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와 저하된 사기를 감안하여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문무관료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生谷里), 신기리(新基里)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는 낙동강 건너 냉산을 마주보며 동서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견훤과 싸운 왕건이 크게 이김으로써 붙여진 '태조방천'이 지금의 일선교 근처에 있다. 생곡리 앞 낙동강 가에 있는 작은 산은 고려 태조가 머물면서 군영을 차려 전투를 독려한 곳이라 하여 '어성정'(御城亭)이라 한다. 생곡리를 지나면 신기리에 또 하나의 태조산이 있다. 이는 후백제를 정복할 때 왕건이 말을 멈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산 북쪽 5리 초곡의 작은 산 위에 어성정이 있었으며 지금도 진영 터가 남아 있다. 왕건이 군사를 사열할 때 그 수가 많아 대열의 끝이 마을 앞까지 뻗친 곳은 대지미 마을이다. 원래 태조미(太組尾)라고 했는데, 음운 변화를 거치며 대지미가 되었다. 대지미마을이 있는 선산 일대는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정권을 잡은 견훤의 아들 신검과 일리천 전투를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죽고 죽이는 처참한 현장을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했을 백성들의 아픔이 그 이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풍진마을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실제 마을 뒤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앞쪽에는 낙동강이 흘러 절경을 이룬다.
마을 입구마다 신라불교의 초전지라는 안내판이 서있더군요.
♤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道開里)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는 옛날 소를 방목하면 3개 군과 면의 풀을 모두 뜯어 먹는다고도 할 만큼 구미의 끝 마을로 의성군 구천면과 군위군 소보면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청화산과 냉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마을은 남쪽에 흐르는 하천을 따라 형성돼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송천, 갱분, 갈티, 아름마, 웃마 등이 있다. 도개리에는 신라시대에 모례장자(毛禮長者)가 살던 곳으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이곳 모례장자 집에서 불교를 포교하면서 불도가 열렸다 하여, 마을 이름을 도개(道開)라 하였다. 송천은 마을 앞에서 두 내(川)가 합쳐지는 곳이며, 폐교된 송도초등학교, 모례장자의 집터, 모례정(毛禮井) 등이 있다. 갱분은 남쪽에 위치하며 광복 전에는 두 집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많은 가구가 들어선 마을이다. 갈티는 좌우로 산이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 산에 칡이 많이 있다고 해서 갈현이라고 부르던 것이 갈티로 바뀌었다. 아름마는 하리(下里)라고도 하며, 웃마는 상리(上里)라고도 한다. 문화재로는 경북문화재자료 제296호인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 도개리 중앙에 있다. 신라 최초의 불교신도인 모례(毛禮)의 집 안에 있던 우물이라 전해진다. 모례는 모록(毛祿)이라고도 하며,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라로 왔을 때, 집 안에 굴을 파서 3년 동안 묵호자를 숨겨주었다 한다. 또한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수행인 3명을 데리고 신라로 왔을 때에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삼국유사에서는 묵호자와 아도화상이 동일인물이라 전한다) 모례가정은 길이 3m의 직사각형의 돌을 큰 단지 모양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밑바닥은 두꺼운 나무로 판자를 깔았다. 우물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모례가 유적지 주변 일대에는 주륵사지(朱勒寺址), 죽림사지(竹林寺址), 보천사지(寶泉寺址) 등의 대가람지가 있고, 낙산동 삼층석탑, 원동 삼층석탑, 교동 삼층석탑, 죽장사 오층석탑 등의 석탑이 건립돼 있다. 이처럼 한 지역에 불교 유적이 조밀하게 분포되는 경우는 희귀하다. 이들 유적의 연대는 대략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있으며 이 시기는 아도를 성인으로 추모하기 시작한 신라 중대에서 하대에 이르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유적지들로 추정해보면 모례가를 중심으로 한 일선 지역이 불교 성지로 인식되면서 사원과 석탑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 도리사(桃李寺)
냉산 남쪽 기슭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이 417년 신라 눌지왕 때 신라 최초로 창건한 절인 도리사가 있는데, 아도가 도리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은 ‘모례의 집에서 생활한 지 3년이 된 아도는 홀연히 집을 떠나 부근의 냉산으로 들어가 산속을 걷다가 눈 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이 길지임을 깨닫고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도리사이다”라고 전해지는 설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가 창건했다는 바로 그 도리사는 아니며 본래의 도리사는 폐사됐고, 후대에 도리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하여 중창한 절이 현재의 도리사이다. 현재 냉산의 남쪽 즉 현 도리사로 올라가기 전 계류변에 장대한 석축지가 있는데, 이곳을 마을에서는 옛 도리사지라 한다. 이러한 추정은 ‘금당암은 도리사 북쪽에 있다(金堂庵在桃李寺北)’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사지는 대웅전, 누각 등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고, 와편도 흩어져 있다. 도리사 일대에는 주목할 만한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도리사 석탑,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 진신사리, 아도화상 사적비,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 도리사 극락전,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아도화상 좌선대 등이 있다.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 진신사리에 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도리사 사적기’에 의하면, 마을 주민 김계장(金界丈)이란 사람이 냉산 기슭에 있는 석적사지(石積寺址)의 불사리탑에서 불사리 1과를 얻었는데, 그 크기가 이의(苡薏)만 하고 색깔이 백옥 같아 당시 도리사의 체안대사(體眼大師)가 석옹탑(石甕塔)을 건조해 불사리를 봉안했다. 이 석옹탑이 현재 상부의 연봉형 보주(寶珠)에 ‘세존사리탑’이라는 음각명이 있는 석종형 부도로, 1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탑의 사리공에서 출현한 금동육각사리함은 석적사지에서 수습된 것이므로, 도리사 세존사리탑의 조성 연대와는 다르다. 금동육각사리함은 우리나라 초유의 육각사리함이라는 점, 그리고 각부의 문양으로 미루어 8세기 중엽에서 뒤지지 않는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냉산갈림길에서 땅재로 약 500m 내려서면 "땅재군위쪽입구 1.0km"와 "땅재 1.1km" 이정표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틀하여 "땅재 1.1km"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직진하면 바닥에 닿았다가 당재까지 한참을 다시 올라오게 된다. 땅재에서 합수점까지는 25.6km로 마을버스로 선산읍으로 나가(약 15분 소요) 마지막 구간을 끊기에 용이한 지점이다. 선산에서 동서울행 (막차 18:20분, 요금 14,300원)이 있었으나 코로나로 노선이 없어져 구미역으로 나가야 한다.
밤늦게 친구가 당재로 박짐을 가져왔습니다. 청화산까지 가기가 쉽지 않아 버스정류소에 텐트를 치려는데 순리대로 하자며 한사코 뜯어 말립니다. 구미 도량동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 다시 당재에 택배해 주겠다며,, 결과적으로 박짐은 필요가 없었답니다. 사실, 청화산에서 일출을 보려고 비박을 준비했는데 날씨가 흐려 일출은 기대할 수 없었고, 야근으로 날밤을 꼴딱 새고 나왔는지라 박짐을 지고 청화산에 올라설 자신도 없었지만 당재에서 합수점까지 25km 거리를 박짐을 지고 이동하기란 고단한 노동이란 생각도 들었답니다.
♤ 당재(堂峙, 280m)/ 920번 지방도
땅재는 청화산과 냉산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고개로,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와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를 잇는 2차선 920번 지방도가 지나며 다곡리 뒷편으로 낙동강이 어렴풋이 보인다. ‘召保’라 새긴 커다란 돌표석이 군위군 소보면을 알린다. 남일재와 달리 차가 제법 많이 넘어 다닌다. 고개 서쪽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당재다. 이 고개는 조선 성종 때부터 큰 당나무와 서낭(돌무더기), 당집(성황당)이 있어서 당고개, 당현(堂峴) 또는 당재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 당재라는 말이 변하여 땅재로 굳어지게 되었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땅재’로 표기되어 있다. 이동통신 중계탑에서 우측으로 도로에 내려서서 왼쪽 구미시 도개면 교통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약간 이동하여 고갯마루에 오르면 땅재이다. 땅재를 넘어서면 바로 다음 구간 들머리인 청화산 입구가 나온다.
- 청화산까지 4.3km(약 1시간 30분)이며 들머리 우측 나무 가지에 준희선생님의 「팔공지맥/ 여기가 땅재입니다」 산패가 붙어있다.
팔공지맥 석심산에서 만나 그토록 길게 이어온 군위군과 작별하는 지점으로 청화산 정상 0.85km 직전입니다. 처음엔 정상인가 싶었고, 고지대임에도 오른쪽에 묘지가 있어서 놀랐던 곳인데 특별한 이정표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694m봉/ 삼시군봉(구미시 도개면, 군위군 소보면 → 의성군 구천면)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고 두번째 헬기장(660m)에서 약간 더 오르면 현위치 표시목(청화산 7)이 서 있는 삼시군봉(694m)이다. 지금까지 왼쪽으로 구미시 도개면, 오른쪽으로 군위군 소보면으로 이어 온 지맥이 이 곳에서 오른쪽이 군위 소보에서 의성군 구천면으로 바뀌는 삼시군 경계봉이다. 우측편으로 청산리로 갈린다는 이정목과, 장군정과 갈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정상 우측에는 묘지가 위치하고 있다.
♤ 의성군 구천면(龜川面)
구천면은 의성군 남서부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 비안면, 서쪽으로 단밀면, 남쪽으로 구미시 도개면, 북쪽으로 단북면·안계면과 인접하고 있다. 1721년(경종 1) 위성리에 세워진 구천서원(龜川書院)의 이름을 따서 구천면이라 하였다. 남부는 산지, 북부는 평야 및 준평원(準平原)으로 이루어졌다. 남쪽 청화산(靑華山)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남부 산지를 구성하고 있으며, 위천(渭川)의 지류인 비산천(飛山川)이 발원하여 흐르고 있다. 구천면은 지방도 923호선 및 군도 14호선, 군도 18호선이 통과하며, 면소재지 유산리에서 교차한다. 면소재지는 원래 위성리에 있었는데 8·15 해방 직후 유산리로 옮겨 왔다. 북부 농경지에서 벼농사가 많이 이루어지며, 황토 논에서 생산된 쌀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산사과, 고추 등 작물 재배로도 이름이 높다.
♤ 청화산(靑華山, 700.7m)/ 육각정자, 헬기장/ 1등삼각점(안계 12)
청화산은 경북 구미시 도개면과 의성군 구천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일선지(一善誌)」에 「화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청화산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북쪽 골짜기 산 아래 청운동 마을과 남쪽 산 아래 신화동 마을, 동쪽에 화실이란 마을이 있어 자연스럽게 청산, 화산이라 부르다가 청화산이 된 것 같다. 청화산 주봉은 박봉(일명 용두봉)이다. 서북쪽 아래에는 가뭄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용샘이 있다. 그리고 다곡리에서 보면 주로 보름달이 솟아오르는 곳이라 해서 달뜨기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청화산의 ‘화’자는 꽃(華)이 아닌 불(火)로 표기하다가 꽃(華)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산 이름에 불 화(火)자가 있어서인지 예로부터 유난히 산불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어느 선비의 제안으로 불을 뜻하는 화(火) 대신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바꾸게 되었는데, 이름을 바꾸고 난 뒤에도 산불이 자주 발생한 산이라고 한다. 청화산내 지명으로 마당미기, 방앗골, 수리덤, 점티골, 칭이골, 벌샘, 옷샘, 불당골, 위기소, 통시웅덩, 대목바위, 등이 있는데 모두가 깊은 전설을 가졌다. 백련사지가 상상봉에 남아있는데 빈대가 많아서 절이 없어졌다고 전하며 군위땅이다. 용솟음마루는 메워서 헬기장으로 변했는데 여기서 내려다보면 의성 서부 7개 면, 상주 일부, 구미시, 군위 등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막힌 가슴이 뻥뚫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청화산자연휴양림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다. 청화산 정상은 의성군에서는 용솟음봉으로, 구미시에서는 박곡봉으로 부르고 있다.
- 1등삼각점(안계 12/ 1981 재설)이 있다. 전망바위에서 3분 정도 더 오르면, 육각정자가 있는 청화산 정상이다.
♤ 갈현(葛峴, 220m)/ 12번 군도
갈현은 낙동강 왼쪽(동쪽)의 구미시 경계부에 위치한 주요 고개로,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와 의성군 구천면 장국리(국수골), 청산리를 있는 12번 군도가 지나지만, 교통량은 뜸한 편이다. 장자봉(422.1m)과 청화산(701m) 사이 오목사면(concave slope)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부터 칡이 많아 갈현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지금도 도로 주위에 칡넝쿨이 많이 뒤엉켜 있다.
♤ 화산(342.7m)/ 삼각점봉
갈현에서 20분 빡시게 치고 오른다. 지도에 화산으로 표시되고, 4등삼각점(411 재설/ 1978. 8 건설부)이 있다. 좌측 능선으로 내려선다.
- 준희선생님 팔공지맥 342.7m봉 산패가 있다.
♤ 정수사/ 백마산 갈림봉(386.5m)/ 삼면봉(구미시 도개면, 의성군 구천면 → 단밀면)
지맥의 왼쪽은 계속해서 구미시 도개면이고 이 봉은 오른쪽 편이 의성군 구천면에서 의성군 단밀면으로 바뀌는 삼면봉이다. 오른쪽이 능선길이지만 지맥길은 좌틀하여 급하게 꺽어내려 문암산갈림봉 정상으로 올라선다.
♤ 의성군 단밀면(丹密面)
단밀면은 의성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동으로는 안계면과 구천면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상주시 낙동면과 접한다. 서남쪽으로는 구미시 도개면에 인접하며, 북쪽으로는 단북면과 상주시 중동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단밀면은 대부분 100~300m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부의 위천(渭川)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 지대가 단북면을 경계로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상주시 낙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면의 중앙부에서 낙동강의 지류가 동서로 흘러 그 유역에 좁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면의 한가운데는 만경산이 우뚝 솟아 위천과 낙동강이 서북쪽을 둘러싸고 있다. 교통은 지방도 912호선이 면사무소 부근 단밀교에서 낙단 대교로 이어진다. 벼농사 중심의 전통적인 농업을 하고 위천과 낙동강이 흘러 그 유역은 땅이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며 낙동강이 흐르는 낙정 지역은 옛 나루터로 관수루와 함께 휴양 단지가 조성되고 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다.
♤ 장자봉(莊子峰, 422.1m)/ 삼각점봉
경북 의성군 단밀면 용곡리와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장자봉의 동쪽 사면은 의성군 단밀면 용곡리에 해당되며 서쪽 사면은 구미시 도계면 신곡리에 속한다. 예전에 어느 선비가 이곳 정상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꿈에 중국의 대학자인 장자가 나타나 이곳을 장자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자봉을 포함하여 만경산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의성군과 구미시를 구분짓는 행정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구미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지 가운데 하나로 북쪽 사면은 위천의 분수계를 이루며, 서쪽 사면과 남쪽 사면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소지류 하천의 발원지에 해당된다. 장자봉은 높이에 비해 산세가 다소 험준한 편이다.
- 장자봉에는 준희선생님 산패와 새마포산악회 표지판, 고 한현우님 코팅지가 달려있다. 정상석 바로 옆에 삼각점이 있는데 이끼에 덮혀 식별이 어렵다. 찾기가 힘들다고도 하고...
♤ 소요유(逍遙遊)
장자 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생에서 ‘일’을 권한 게 아니라 ‘소풍’을 권했다. 우리는 ‘일’하러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성공’ 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목적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에 무엇을 잘했는지 모르지만, 하늘로부터 삶을 선물 받았다. 이 우주에는 아직 삶을 선물 받지 못한 억조창생의 ‘대기조’들이 우주의 커다란 다락방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아 이렇게 지금 지구에 와 있지 않은가! 삶을 수단시하지 마라. 이 삶이라는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이 여행 자체를 즐겨라.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인생이란 소풍이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소풍을 보내면서 끊어준 열흘짜리 휴가증이 중심우주와 우리가 사는 외곽우주가 서로 흐르는 시간대가 달라 인간수명이 백 년인 것이다.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거나 조급한 흔적이 눈곱만큼도 없다 ‘소(逍)’자는 소풍간다는 뜻이고, ‘요(遙)’자는 멀리간다는 뜻이며 유(遊)자는 노닌다는 뜻이다. 즉, '소요유’는 멀리 소풍 가서 노는 이야기이다. ‘소요유(逍遙遊)’는 묘하게도 글자 세 개가 모두 책받침 변(辶으)로 되어 있다. 책받침 변(辶)은 원래 ‘착(辵)’에서 온 글자인데, ‘착’이란 그 뜻이 ‘쉬엄쉬엄 갈 착(辵)’이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내리 세 번을 쉬어야 한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 참으로 기막힌 장자의 단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 관수루(觀水樓)
장자봉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단밀면 낙정리 관수루는 낙단교와 낙정 양수장 사이에 있는 누각으로 고려시대에 건립되었고, 1734년(영조 10)에 상주목사 김태연이 다시 세워 현판을 달았다. 1843년에 수리하였다가 1874년(고종 11)에 유실되었는데, 1889년에 복원되었다. 권상일(1679~1760), 유주목(1813~1872) 등의 중수 기문과 이규보(1168~1241), 김종직(1431~1492), 이황(1501~1571) 등이 지은 15편의 시가가 있었던 누각으로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 십령(十嶺)/ 열재
십령은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동산리와 의성군 구천면 위중리, 용곡리를 잇는 옛고개로, 십령의 유래를 보면 조선 말기 동학난 때 사회가 한창 불안하여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니 관군은 이를 토발하러 나섰고, 그 틈을 타서 도적떼들이 우글거렸고 외진 산길을 들어와 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곳 열재(십령)도 산적들과 짐승이 자주 출몰하여 한두 사람이 재를 넘기는 위험하고 열 사람이 같이 넘어야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하여 열재라 불렸는데, 한자 표기로 십령(十嶺)이다.
- 넓은 안부 공터와 묵은 묘 두기가 있다. 등로 우측 나뭇가지에는 ‘팔공지맥/ 여기가 심령입니다./ 준희선생님 산패의 심령은 십령의 오기인 듯 보인다.
♤ 십령에 얽힌 선산 노씨와 의성 조씨의 전설같은 이야기
조선 말기 3월말 보리고개에 60이 넘은 노인이 9살의 손자를 데리고 도개에서 의성쪽을 넘고 있는데 산속에서 바람소린지 사람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자세히 들으니 분명 사람소리 였다. 젊은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데 상투를 튼 남자가 아기를 잡아 먹으려고 발버둥이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남편이 몇날 며칠을 굶어 눈이 뒤집혀 아기를 고기인 줄 알고 잡아 먹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손자가 우리가 싸가지고 가는 떡을 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일부를 나누어 주고 가는데 손자의 말이 너무 기특하고 배고픈 사람을 구해야하겠다는 생각에 떡을 전부 다주었다. 자기들이 너무 굶주려 이 고개 넘어 의성땅에 사는 친지들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소판돈을 주고 가잔다. 소판돈을 주고가는 조손에게 젊은 남녀는 어디 사는 누구냐고 알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그 조손은 그냥 길을 떠났다. 이 노인은 성이 조씨(趙氏)로 이 고장에서 꽤나 잘 살았으며 널리 보시공덕을 많이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손자는 어느덧 30이란 나이를 먹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거늘 조씨가(趙氏家)도 살림이 기울어 생계가 어려웠다. 열재에서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이 지역에서 노부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난날 열재에서 도움을 받았던 그 은인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인을 찾기 위해 지난날 구원을 받았던 십령(열재) 아래에 주막을 내고 술을 파는게 아니라 이 고개를 넘는 과객들에게 쉬어가게 하고 술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달이가고 해가가고 몇해가 지나도 그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봄철도 지나고 초여름의 긴긴해가 늬엿늬엿 넘어갈 때 덥수룩한 나그네가 지나간다. 지나가는 나그네 차림은 궁색하였으나 기품은 있어 보였다. 들어와서 좀 쉬어가라고 청하는 부인의 말에 "말씀은 고마우나 해는 지는데 갈길이 바쁘다"하면서 그냥 가려고 한다. 부인의 재삼 간청에 "돈이 없으니 술먹을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다. 다시 간청하는 부인의 말에 나그네는 발길을 돌려서 주막집에 들려 쉬기로 한다. 후히 대접을 하고 어느 손님에게나 마찬가지로 지난날의 얘기를 하면서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그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있다가 20년 전의 9살 때의 기억을 더듬어 얘기를 하니 초로의 부인이 젊은이를 와락 껴안으며 그리도 목메이던 은인을 찾았다. 지난날 죽음의 경지에서 구출해준 은인을 잊지 못하여 이곳에 주막을 차리게 된 동기까지 이야기 한다. 조씨도 지난날 화려했던 가세가 기울고 어렵게 살아가는 지금의 실정을 이야기하니 주막집 내외는 의논하여 조씨를 크게 도와서 보답의 기회를 찾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산의 노씨와 의성의 조씨는 그 후손들도 친형제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십렵 중턱에는 조그마한 집 한채가 문짝이 떨어져 나간 채로 있다고 한다.
♤ 435m봉/ 시군계 면계/ (시군면계 → 단밀면)/ 갈림삼거리, 돌탑 전망대
통신탑이 있는 470m봉으로 분기하는 삼거리로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있다. 냉산갈림봉부터 이어온 지맥 왼쪽의 구미시 도개면과 의성군 단밀면의 시군계이자 면계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용암동열재 방향을 버리고 우직진이 지맥길이다. 지맥은 여기서부터 온전하게 의성군 단밀면 안을 관통하여 주선리, 생송리와 팔등리를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로 진행한다.
♤ 만경산(萬景山, 499m)/ 정상석 두개, 육각정자, 헬기장/ 타임캡슐
만경산은 구미시 도개면과 의성군 단밀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구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 사면은 위천의 분수계를 이루고, 서쪽 사면과 남쪽 사면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소지류 하천의 발원지에 해당된다. 사방의 일만 가지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만경산은 단밀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실제로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낙동강의 장엄하고 도도한 흐름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계평야와 위천, 구미의 냉산과 금오산, 상주의 나각산과 갑장산 등 사방의 어려 고을을 일목요연하게 감살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1617년 간행된 「상산지(商山誌)」에서는 만경산을 만악산(萬嶽山)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넓은 반석과 높은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하며 옛 성터의 흔적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만경산을 오르다 보면 등산로를 따라 돌로 쌓은 석축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이 기록에 신빙성이 있는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에 "만악산(萬嶽山)은 단밀현(丹密縣) 남쪽에 있으며 주(州) 북쪽 47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해동지도(선산)』에 '만경산(萬頃山)', 『해동지도(상주)』에 '만경산(萬景山)'으로 표기되고 있어 '악(嶽)'에서 '경(頃)', '경(景)'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만경사(万景寺)'가 기록되어 있어 만경산에 있던 사찰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는 "만경산 : 선산군 도개면 동산동, 신곡동과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 위중동에 걸쳐 있는 산"과 같은 문헌의 단밀면 생송리 기록에 "만경광산(萬景鑛山) : 만경산 상봉에 있는 금광 (중략) 만경약수(萬景藥水) : 만경광산 밑에 있는 약수"라는 내용을 산의 구체적인 위치와 함께 '만경'을 전부지명소로 하는 파생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다.
- 헬기장 우측에 오석으로 된 정상석이 있으며 정상석 옆의 소원성취 타임캡슐(서기 3000년 1월 1일 개봉)을 묻은 오석 표지석이 있다. 팔공지맥의 끝자락인 낙동강과 만나는 위천 두물머리도 보인다. 이정표상 시치골 방향인 새마포산악회 표지판이 걸려있는 곳 좌측 등로로 내려선다.
♤주선(注仙)고개/ 912번 지방도로/ 육각정
의성군 단밀면 면소재지에서 낙단보가 있는 낙정리로 이어지는 912번 지방도가 지나는 2차선 도로이다. 안계에서 낙단보를 건너 상주로 지나다니는 도로이다. 차량들이 꽤 다닌다. 도로를 건너 양회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 방지고개
주선고개에서 양회임도를 따라 5분 정도 올라서면 방지고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양회임도를 버리고 왼쪽으로 임도를 따른다.
- 주선고개에서 곧바로 산으로 올라설 수 있으나 거리가 짧아 양회임도를 따라 방지고개로 가는 경우가 많다.
♤ 굿고개/ 콘크리트 도로/ ASF울타리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송상마을과 세제리 기동마을을 연결하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이다. 굿고개 왼쪽 아래에 굿골이 위치한다.
- 도로 건너 초입 좌측 나무에 '팔공지맥 / 여기가 굿고개입니다 / 를 알리는 준희선생님 산패가 걸려있다.
♤ 197.7m봉/ 삼각점봉/ 왕복 8분
지맥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197.7m봉, 삼각점봉을 다녀온다. 굿고개 직후 당진-포항고속도로를 지나고 왼쪽으로 우회하여 묘지를 통해 능선으로 올라서는 지점에서 오른쪽 197.7m봉을 다녀와야한다.
- 197.7m봉에서 직진하면 알바, 필히 되돌아 나와야 한다.
솔티에서 팔공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으로 올라서는데 약 20분 소요, 토봉에서 합수점까지 내려서는데 약 40분 소요됩니다.
♤ 솔티/ 양회임도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와 생송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양회임도이다. 이곳 팔등리에는 솔티골과 솔티지 등의 지명이 있다. 소나무와 무관치는 않아보인다.
♤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八嶝里)
팔등리는 단밀면 북쪽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경북 의성군 단북면 신하리, 서쪽으로는 경북 상주시 중동면, 남쪽은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서제리와 경계를 하고, 북쪽으로는 다인면 용무리와 이웃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팔등이 있다. 마을 남서쪽을 토봉(兎峰, 284.9m)이 감싸고 있으며, 동쪽에서 위천이 흘러 내려 서쪽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위천과 마을 사이에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팔등리는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산을 넘거나 위천의 나루를 건너야 했고 첩첩한 서쪽의 산등성이를 여덟 개나 넘어야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팔령(八嶺)·팔은(八隱)·팔동(八洞)으로도 불렀다. 팔은(八隱)이란 동쪽과 북쪽은 위천이, 남쪽과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팔동(八洞)이란 마을이 하나가 아니라 8개로 나뉘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여덟 고개 넘어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멀리 위천과 낙동강의 합수점이 보이는 지점입니다.
♤ 토봉(兎峰, 284.9m)/ 시군면계(의성군 단밀면 - 상주시 중동면)/ 삼각점봉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팔공지맥은 토봉에서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로 들어서서 새띠고개를 거쳐 위천 종점에서 강물에 떨어진다. 낙동강과 위강의 이수가 합류하고 속리산.일월산.팔공산 등 삼산의 지맥이 한곳에 모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일대를 일컬어서 이수삼산이라고 한다. 이 곳은 이른바 이수(二水: 낙동강·위강), 삼산(三山: 속리산·팔공산·일월산)이 취정(聚精)한 명승지라 한다. 문화유적은 우물리에 수암종택·청룡사(靑龍寺)·봉황성(鳳凰城)이 있으며, 간상리에는 동구 밑에서 정월 보름부터 3일간 동신제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는 봉황성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위강이 좌.우로 흘러내려 동.서.남 삼면이 강이고, 북쪽은 영양의 일월산이 내려와 비봉산이 되었고 서쪽의 강건너 나각산은 속리산이 동남으로 이백리를 뻗어 강에 다달아 멈춰서면서 솟아 올랐고 동쪽의 토봉 일명 쉰등은 팔공산이 군위에서 위강과 같이 북으로 역류를 해서 끝을 맺은 지역으로 한마디로 강은 대강이고 산은 모두 명산이다. 봉황성은 봉황대 북편에서 동으로 위강 절벽까지 건너막은 토성으로 성은 언제.누가.무엇 때문에 쌓은지는 알수가 없으나 봉황성 절벽에는 임진왜란때 피난을 했다는 전설이 담긴 양처사굴이 북쪽의 낙동강 동면에는 층암절벽 천인대가 솟아있고 연하여 토진벼루.물양절벽이 있으며, 하류에는 쉰등골벼루.뒤뛰미절벽.관수루절벽 등이 저마다 높고 낮고 길고 짧게 일품을 자랑하고 있다. 위강 유역에는 재궁절벽.타맥대절벽.솟골절벽 등이 20리 장강 좌우에 그림같이 펼쳐져 있어 누구나 산행 후 한번쯤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곳이며,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는 모래톱에는 사시사철 철새들이 노니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 정상석 측면에 팔공산 끝자락이란 표시가 새겨져 있다. 준희선생님 팔공지맥 284.9m봉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 상주시 중동면(中東面)
상주시 중동면은 상주시 최동단부에 위치하여 남·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동문동(東門洞)·낙동면(洛東面), 북·동쪽은 예천군·의성군에 접한다. 3면이 낙동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면역의 대부분이 건지봉(乾芝峰, 421m)·비봉산(飛鳳山, 230m) 등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저지는 죽암리(竹岩里) 등 남단부에 약간 분포할 뿐이므로 경지율은 낮다. 3면이 낙동강과 위천이 굽이쳐 흐르고, 산자수명한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명소로, 3세기 신라 첨해왕 때 중동으로 칭하여 상주에 속한 이래, 고려ㆍ조선시대에는 상주목 관할 중동현(中東縣) 이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중동면(中東面)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띠고개 만나기 전에 왼쪽 사면으로 급경사를 내려서면 합수부로 떨어지기야 하겠지만 몸이 피로한 막바지에 급경사를 내려서는게 위험해 보이고 새띠고개에 가서 양회임도를 따라 내려서는게 나아 보인다. 새띠고개에는 왕릉만한 묘가 있는데 97m봉 아래쪽은 통훈대부의 묘이고, 새띠고개 바로 옆에 큼지막한 묘 세기가 있는데 ???, 공인, 풍기군수 순이었다.
♤ 새띠고개/ 양회임도
토봉을 지나면서 의성군 단밀면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이 되는 곳이다. 왼쪽으로 조금 진행하니 합수점이 보이고 건너로는 보현지맥의 끝자락인 중동면 우물리가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으로 방향으로 조심해서 내려간다. 이어 양회임도가 넘어가는 새띠고개에 닿는다. 새띠고개에서 보통 왼쪽 포장임도를 따라 합수점으로 가지만, 직진 방향 임도를 따라 마지막 봉우리인 97m봉을 향해 약간 더 오른다.
- 이정목(↑의성경계 0.6km, ←수암종택 3.7km)과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걸려있다.
♤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
새띠는 임진왜란 후에 성산이씨와 남원양씨가 정착하였으며 이곳 합수점의 넓은 강변에 옛날에 모래를 많이 쌓았다하여 사대(沙帶)라고 불렀으며 또한 이곳이 잡목의 밀림지대인 관계로 새떼가 많이 모여 부락민들이 새떼골이라 부르던 것이 새띠마을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팔공지맥 종점
위천은 청송, 영천, 군위 경계인 군위군 삼국유사면에서 발원해 의흥, 우보면을 지나 효령에서는 팔공산에서 발원한 남천과 합류해 군위읍 소보면을 거쳐 의성 땅인 비안면 옥연리로 흘러든다. 이 물길은 다시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에서 발원해 가음ㆍ금성ㆍ봉양(도리원)을 거쳐온 쌍계천과 비안면 쌍계리에서 합류한 후 안계평야를 지나 상주시 중동면 새띠마을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 종점에서 포장 임도를 따라 새띠고개 방향으로 되돌아 나간다. 새띠고개로 되올라, 우물교로 향한다.
구미에서 출발하는 친구를 솔티에서 한시간 전에 불러도 되는건데 굿고개를 지나면서 불러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습니다. 차를 아래에 두고 새티고개로 올라왔더군요. 차를 가지고 합수점까지 들어오라고 하고 졸업장으로 향했습니다. 보현할 때 안개에서 상주로 나가며 관수루를 지나다 한우고기집을 본 기억이 있어, 뒤풀이를 하러 관수루도 구경할겸 그리 나가자고 했더니 역 근처에서 국밥이나 한그릇 먹잡니다. 그럴 순 없고, 낙동리에도 한우집을 본 기억이 있어 낙동리로 가자고 보챘지요. 한우촌에 차를 세우고 낙동강에 올라보니 이게 웬걸 낙단대교 건너편에 관수루가 보이네요.^^
첫댓글 준비를 많이 해 가지고 내려갔는데 친구님의 헌신적인 봉사와 배려로 편안하게 잘 마무리하고 올라 오신듯 보입니다.
첫날 냉산 지나 당재까지 갔으니 상당히 길게 타시면서도 짙은 어둠속에 보이는 것이 없는데도 마루금에서 떨어져 있는 냉산까지 들려 내려 오셨구요
저 토봉오를 땐 정말 토하는 것 아니냐며 너무 힘들게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그래도 정상에서 살펴보는 조망들이 아름다워 봐 줄만 하였지요
마지막 낙동강으로 내려가는 곳에는 작은 사다리가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며 썩어 사라졌는지 낙동강 물은 만나지 못하였나 봅니다.
길게 두번에 걸쳐 팔공지맥 완주를 축하 드림니다.
칠갑산선배님!
쇠치지맥 올려주셨는데 산불 피해지역이라 궁금하면서도
아직 후기를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팔공지맥을 하며 보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습니다.
냉산을 지나며 혹시나 야간에 비안면 석불암의 불빛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애타게 찾아보았습니다만 감을 잡기 어려웠고 청화산에 올라서야, 그리고 만경산에 다가가서야 비로소 의성 안개들과 보현지맥의 장면이 확연하게 다가왔답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건 베틀산은 의외로 산이 작았다는 점,
문수봉/ 경운산에서 동서남북 조망이 제일 멀리 기억에 남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합수점 낙동강 물가로 내려가기 쉽지 않더군요.
축대를 쌓아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갔다 올라오기가 부담시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달밤에 체조하는 산길로 가지마시구,
대 낯에 널럴~하게 세상구경은 어떠실까?
비실이의 나와바리 팔공지맥완주를 축하드립니다.
비실이대선배님!
나와바리 팔공지맥, 보현지맥, 금오지맥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전폭적인 지원으로 한결 쉽게 끝낼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밤을 세워 가다가 건강을 생각해 심야에 잠을 자는 방법으로 변경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단점은 텐트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준희선생님께서 비닐을 잘라서 다니는걸 연구해 보라고 하시네요.
나무에다 빨래줄을 좌우로 걸고 비닐을 걸쳐 A텐트를 만들면 바람도 막고,
무게의 무담도 더는 일석이조의 방법인데 철물점에서 적당한 비닐을 구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엔 호미지맥과 앵자지맥을 두고 어느걸 먼저 할지 마카 고민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밤에 다니는 산행을 속덴 말로 노가다 산행이라고 합니다.
비실이부부님 말씀을 대변하는 댓글 같습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
비슬이부부님 언급이 계셔야 겠지요!
그래서 저는 산행기를 접합 때 밤으로의 긴 여로는 회피를 한답니다.
나름대로 산행여로를 계획하고 진행에 찬사를 보네며
긴 여정에 고생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산행을 멋지게 가시네요,
해가뜨면 출발하고,
해 넘어가기전에 하산을 완료한다.
장모님의 명령이어서
비실이의 산행철칙이 되었습니다,
산에서의 음기응변 방법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보급한 음기응변 (요즘은 비박,백배킹) 장비 입니다.
가볍고 성능 좋은데 최근 보급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설악산,지리산 두루 이용했는데,
약 10년전 제품 같습니다.
심마니 비닐과 같은 역할 하지요! ㅎㅎ
등산학교 시절 배운 음기응변 방법 입니다.
물론 준비물 입니다.
산자락선배님!
의견 개진에 죄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노가다도 필요하면 해야된다고 본답니다.
편식을 하기보담 전천후가 낫습니다.
오미자는 다섯가지 맛이 있어 약이 되고,
마늘도 에린맛 쓴맛 단맛이 복합되어 양념이 됩니다.
야간 산행은 주간산행에서 얻지 못하는 경험과 보지 못하는 야경을 구할 수 있습니다.
주야불문, 계획에 따라 필요하면 건너야 하는 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고요.
다만, 편견을 벗어도 건강과 체력이 허락치 못하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게 야간산행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어느날 설악산에서 만난 월간산 기고 기자님이 생각납니다.
나의 장비가 여느 산꾼이 알아 주랴? ㅎㅎ
그게 답 같습니다.
일주일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 장면을 위해~~~~
퐁라라 운영자님 팔공지맥 완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토산 낙동강 상주보가 눈에 아른거립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세르파대장님!
기억에 많이 남는 팔공지맥이었습니다.
1구간 화산과 팔공산 그리고 가산의 세개 산성을 지나는 것도 황홀했구요.
특히나 그 유명한 팔공산을 처음 가봐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2구간은 당연 태조산/ 냉산이었습니다.
도리사를 가보긴 했어도 차를 타고 가서 그런지 그리 높은 위치에 있는 지는 몰랐네요.
그리고 1천년 전 태조산에서 낙동강 옆 일리천을 바라보고 전투를 지휘한 장군들을 떠올렸습니다.
후백제 신검의 군대도 만명에 가까웠으니 그들은 기양지맥의 산 위에 진지를 구축하지 않았을까 싶었구요.
마지막 토봉에서 합수점 새띠고개로 내려서는 순간은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162지맥 중에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명장면이었습니다.
비실이대선배님과 구미 친구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졸업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드디어 팔공지맥 완주 축하 축하 드립니다
이틀동안 장거리 산행 대단 하시고 한편으로 존경스렵스렵습니다
나홀로 산행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것은 아닙니다
산을 모르고 지맥길을 모르고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산꾼들은 모두 산을 좋아하고 산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일 또 배낭을 메고 산에 있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삶 일부분이 아닐까요
우리 고장 근처에 있는 팔공지맥 완주에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늘 안산 하시고 행복한 지맥 이어 가시기를 빕니다^(^
와룡산선배님!
팔공지맥은 길이는 작지만 보현지맥에 비해 훨씬 강렬한 느낌이 있더군요.
작은 차이도 알아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가령 같은 구미라도 선산읍의 오로리는 금오지맥이고, 장천면의 오로리는 팔공지맥이요.
상주 중동면 우물리는 우물1리는 보현지맥이요, 우물2리는 팔공지맥이라... ㅋ
말씀하신 명제에 관해선 저도 공감하고,,,
장자봉에 계백대선배님의 포스팅 장자의 소요유를 옮겨 붙였습니다. ㅋㅋ
먼저 진행하신 분들의 노고가 있어 저는 사전에 공부한 부분을 확인만 하면 되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팔공산 군위하늘정원이나 청화산에서 비박이 넘 좋을것 같더군요.
생각난 김에 친구에게 고맙다고 전화한번 더 넣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 님 팔공지맥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등산 모자 속에 숨은 표정은 가장 늦게 나타나기에
궁금증이 들기도 하고 때로 두려움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부분을 가려주기도 하는 멋스러운 모자.
그러나 모자를 벗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벗은 그것을
가슴에 대고 공손히 인사를 하거나 겸연쩍어 합니다.
너무 푹 눌러쓴 모자에 우리는 때로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 감춘 생각이 보이지 않기 때문 우리는 종종 우월의식 혹은
권위주의라는 챙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지는 않은지요?
환기를 시키듯 권위주의를 벗어버리는 용기도 필요할 듯싶습니다
계백대선배님!
100km 전후 지맥 15개를 선정하고
출발한 지가 엊그제인데 이제 호미지맥 하나만 남겨 두었습니다.
호미지맥 1구간은 성황재에서 끊고
오천읍에 나가 잠깐 충전하고 3일째 장승백이 까지 가볼까 합니다.
2구간은 장승백이/세계원재에서 하루 거리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즉. 1구간은 2박3일로
그리고 2구간은 전날 포항에 내려가 첫차로 세계원재로 가서 하루에 마쳐볼까 싶습니다.
언제 출발하느냐 그 문제만 남았네요. 찾아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의미를 길어 올리고 팔공을 깔끔하게 매듭지으셨네요.
치밀한 준비와 변함없는 열정이 구경꾼의 시선에 감탄을 자아냅니다.
친구! 그 의미가 돋보였던 일정이었습니다.
들머리 효령재, 중간 기착지 당재, 날머리 새띠고개.
매듭마다 친구분의 고마운 택배로 인해 한결 행복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머슴 부리듯 하셨지만 상전처럼 고마워 해야 할 듯합니다.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또 하나 있었네요.
어둠 속에 등대가 되어 산길을 밝혀준 도리사 불빛.
청화산에서 일출을 보려고 야심차게 준비한 비박 계획표.
그 비박계획을 접는 구실거리가 구구절절입니다.
날씨가 흐렸다, 야근으로 날밤샜다, 박짐이 부담됐다....ㅎ ㅎ ....
열심히 계획하고 열정적으로 실행하면서
장자의 逍遙遊 사상도 음미하셨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이 천지간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막판 어느 종가의 제실(경목제)까지 선물로 다가옵니다.
공경하고 화목하게, 이 세상 이 산들을 경영해 가라는 무언의 메시지....
팔공에서 흘린 땀방울이
퐁라라님 앞날에 큰 등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범산선배님!
나약한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팔공지맥은 석심산부터 청화산 직전 삼시군봉인 694m봉까지 줄곧 군위와 괘를 같이하는데요.
갑령 전후로 영천시(신녕면) 안쪽을 잠깐 통과하고,
한티재 직후 부계봉에서 모래재 직후 726.9m봉까지 칠곡군(동명면, 가산면) 안쪽을 통과하고,
곰재 직전 348.8m봉에서 시작해 좌베틀산 직후 만나는 삼면봉인 332.4m봉까지 구미시(장천면, 산동읍, 해평면) 안쪽을 통과 하네요.
이 지점 좀 더 명확하게 접점 경계를 보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어제는 비번이라 친구와 추읍산을 다녀왔는데요.
정상에서 칠읍산을 둘러싼 일곱개 읍(용문, 양평, 퇴촌, 광주, 이천, 여주, 지평)을 둘러보았습니다.
양자산과 앵자봉, 해협산, 정암산으로 이어지는 앵자지맥도 살펴보았구요.
양자산에서 백병산으로 내려서는 강하면에 김부겸부총리가 퇴임 후 거처를 마련한다니,
충무공 퇴촌 조영무와, 동오리 하정 류관선생 이후 최고위급 관리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72km 거리를 만 하루 걸려 또 하나의 산줄기를 뒤안길로 두셨네요.
팔공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멋진 산하를 누비신 셈입니다.
이로써 장도의 산줄기 답사는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느낌입니다.
위천 합수점에 이른 허전했던 심정도 느껴봅니다.
수고많으셨구요..
이어지는 안전한 여정을 기대합니다.^^
방장님!
호미지맥 삼강봉을 가기위해선
언양에서 숙박하고 소호리 가는 첫차로 소호분교에 내려야 하는데요.
06:15분 첫차로 소호분교에 내려 삼강봉 분기점까지 가는데
바빠죽겠는데 꼭 백운산까지 다녀오네요. 참 나~
언양을,,,
북쪽에선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들어가는군요.
남쪽에선 통도사 신평버스터미널에서 들어가고요.
첫날은 사일고개에서 원고개 사이에서 비박해야 합니다.
ㄷ 자로 마석산을 통과해 육의당에 내려가 자도 좋을 것 같구요.
그러자면 마석산을 야간에 통과하게 되겠네요.
둘쨋날은 열심히 가면 토함산 추령 지나,
함월산 넘고 성황재 국도에 있는 휴게소까지 갈 수 있을까요.
마지막 3일 째는 성황재에서 장승박이 세계원재까지 간다면 좋겠습니다.
소호분교에서 원고개가 42.2km,
원고개~성황재가 26.6km,
성황재~세계원재가 17.7km입니다.
알바없이 그리고 열박재 고속도로 넘는데 더듬거리지 않고,
사일고개나 원고개에서 먹거리 보충이 원활하게 가능해야 합니다.
기온이 좀 더 올라오길 기다려 4월 중순 이후 출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