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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사회(Tool For Conviviality)》
저자 이반 일리치|역자 박흥규|생각의나무 |2010.10.30 /원제 Tools for conviviality
책소개
미래사회에 대한 이반 일리히의 비전, 절제의 사회!
산업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책『절제의 사회』. '산업적 생산양식 자체의 존재방식'과 '가치의 제도화'를 드러내는 학교시스템을 비판한 <학교 없는 사회>에 이은 작업으로, 현대의 파국을 넘어설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산업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규모와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현대기술이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절제의 사회'를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절제'는 책임 있게 도구를 제한하는 하나의 현대사회를 뜻하는 기술적 용어다.
저자소개
이반 일리치
법학자이지만 여러 예술가들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작가. 그는 1952년에 태어나 영남대학교와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또한 미국 하버드대학교, 영국 노팅엄대학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법학을 연구했으며, 일본 오사카대학교, 리츠메이칸대학교, 고베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창원대학교 교수를 거쳐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척박한 이 시대에 르네상스적 인물이라고 평가되고 있는 저자는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인문 · 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내 친구 빈센트』 그리고 풍자 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의 평전인 『오노레 도미에 -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 고야를 반권력의 화신으로 본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무엇이 정의인가?』(공저) 등이 있다. 또한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 · 소개하기도 하였다.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으며,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사제 확대정책에 반대한 것, 피임정책을 지지한 것 등 일련의 교회 정책에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났다.
사제직을 떠난 후 『학교 없는 사회』를 비롯하여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서독의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 중세사를 강의하는 등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2002년 12월 2일 독일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출판사 서평
산업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이반 일리히의 비전, 절제의 사회
매우 현대적이고 산업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규모와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한계 내에서만 기계가 노예를 대신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기계가 새로운 노예주가 된다. 오로지 그런 한계 내에서만 교육은 인간이 만든 환경에 인간을 적응시킬 수 있다.……이러한 한계를 일단 인식하게 되면 사람, 도구, 새로운 집단 사이의 삼각관계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사회, 현대기술이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를 나는 ‘절제의 사회’라고 부른다.
「서론」 중에서
이반 일리히는 이미 1970년대에 산업주의를 인류의 재앙이며, 중단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하였다. 2008년의 세계적 경제 위기를 비롯하여 끊임없이 위기를 양산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현 상황은 이반 일리히가 제기했던 수많은 예언자적 문제의식을 절감하게 한다.
이반 일리히는『학교 없는 사회』에서 오늘날 ‘산업적 생산양식 자체의 존재방식’ ‘가치의 제도화’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학교시스템을 비판하였다.『학교 없는 사회』에 이은 작업인『절제의 사회』는 현대의 파국을 넘어설 수 있는 이상적인 현대사회의 비전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일리히의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 1971년에 쓴 최초의 글은「공동적 제한의 필요성: 기술에 대한 사회통제」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어 1972년경에 발표된 두 번째 글의 영어판은「정치적 전복」, 불어판은「제도적 전복」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책『절제의 사회』가 최종 원고로 출판되었다. 두 번째 글의 제목은『절제의 사회』에서는 그 결론 부분인 5장의 제목이 되었다.
이반 일리히는『절제의 사회』에서 대량생산이 더욱더 가속화되어 환경과 적대하고, 사회구성원들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인간을 서로 소외시키면 사회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따라서 산업성장이 균형을 이루고, 여러 가지 보완적이며 명백하고 동등한 과학적 생산양식에 의해 계속 견제되는 현대사회를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
이반 일리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전망하면서 과학적 발견이 최소한 두 가지의 반대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 하나의 방향은, 기능의 전문화, 가치의 제도화, 권력의 집중화, 그리고 인간을 관료제나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하는 다른 방향은 개인의 능력과 통제력과 창의력을 확장시켜, 각 개인이 바라는 힘과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반 일리히는 매우 현대적이고 산업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규모와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런 한계 내에서만 기계가 노예를 대신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면 기계가 새로운 노예주가 된다. 오로지 그런 한계 내에서만 교육은 인간이 만든 환경에 인간을 적응시킬 수 있다. 흔히 보편적인 것이라고 보는 학교, 병원, 교도소는 이러한 한계 너머에 존재한다.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오로지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물의 분배를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일단 인식하게 되면 사람, 도구, 새로운 집단 사이의 삼각관계를 만들 수 있다. 이반 일리히는 현대기술이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를 ‘절제의 사회’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반 일리히가 선택한 ‘절제convivial’라는 단어는 책임 있게 도구를 제한하는 하나의 현대사회를 뜻하는 기술적 용어다.(‘conviviality’는 기존에 ‘공생’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일리히 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이를 ‘자율적’ 공생으로 번역해야 그 뜻이 보다 선명해진다. 이에 역자는 일리히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일리히가 말하는 자율의 핵심적 내용이 ‘절제’이기 때문에 ‘conviviality’를 ‘절제’로 번역하였다.)
‘절제의 사회’를 구축하는 ‘절제의 도구’를 통한 인간화의 길
도구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성장할 수 있다. 그 결과 먼저 도구는 인간의 주인이 되고, 이어 인간을 처형하는 사형집행인이 된다. 도구는 인간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가령 쟁기는 인간을 정원의 주인으로 만들지만 모래광풍이 부는 황진지대에서 도피하게도 했다. 자연의 복수는 선조보다 생존능력이 부족한 자손을 낳을 수 있고, 후손에게 더욱 적합하지 않은 세계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은 마법사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 전문화는 인간의 일상을 너무나도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고, 그의 활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진보에 대한 중독은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누구도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는 경주에 나서도록 한다.「본문」중에서
일리히는 책임있게 도구를 제한하는 사회로서 절제의 사회를 상정하였다. 이는 절제의 사회를 수립하기 위해 도구를 재구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리히는 ‘기술’을 보다 넓은 개념으로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아니다. 일리히가 말하는 도구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인 수단으로 기술적 도구뿐만 아니라 제도도 포함된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인 도구가 산업주의에 와서 목적 자체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일리히 사상의 핵심이다. 가령 학교라는 도구(제도)는 본래 공부를 위한 수단인데, 산업주의 사회에서는 학교에 가고 거기에 속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고, 그곳에 간 극
소수만 성공하고 대다수는 실패하여 그 목적에 반하게 되었다고 일리히는 비판한다.
『절제의 사회』2장에서 일리히는 도구를 단순한 기자재, 거대한 기계, 생산적 제도들로 나눈다. 일리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의 도구=사용가치의 도구와 인간이 조작하는 산업주의적 도구=교환가치의 도구 사이의 구별이다. 후자에는 교환가치를 넘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조작적 도구인 기술이 포함된다. 일리히는 3장에서 산업주의적 도구사회 속에서 도구를 통한 발전과 진보가 생태계, 사회, 개인 등의 모든 균형을 잃게 하고, 불가피하게 생물학적 퇴화, 근본독점, 과잉계획화, 양극화, 폐물화, 좌절 등이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균형의 파괴를 회복하기 위해 4장에서 과학의 비신화화, 언어의 재발견, 법절차의 회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일리히는 산업주의적 사회를 반대하고 반산업주의적인 절제의 사회를 옹호하는데, 그가 반대하는 산업주의적 사회란 인간에게 교육이란 미명으로 학교를, 건강이란 미명으로 병원을, 편리와 속도란 미명으로 자동차를 강제하는 것과 같은 사회를 말한다. 반면 그가 옹호하는 절제의 사회는 인간이 스스로 배우고 병을 고치며 걷거나 스스로 바퀴를 굴려 이동하는 자율적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절제의 사회 안의 도구, 절제적 도구는 어떠한 특성을 갖는가. 절제적 도구는 일정 수준 이상의 권력과 강제와 계획을 배제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각자에게, 각자의 상상력의 결과로서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드는 최대의 기회를 부여하는 도구다. 널리 공유된 정보와 그 사용능력의 결합은, 이런 절제적 도구가 지배적인 사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지식이 산업주의적으로 제조되고 판매된 탓에,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배우기 위한 절제적 도구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반 일리히는 책을 예로 든다. 책은 공부의 균형을 엄청나게 확장한 두 가지 대발명인 알파벳과 인쇄기의 결과로, 두 가지 기술 모두 거의 이상적일 정도로 절제적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것들 사용법을 배울 수 있다. 책은 값싼 재료로 만들어져 누구나 원하는 대로 들고 다닐 수 있고 놓아둘 수도 있다. 그것들은 제3자에 의해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제도의 조작적 성질과, 조작을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학교교육이 그런 이상적인 절제적 도구를 더욱 일방통행적인 훈육에 봉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이처럼 이반 일리히의 산업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비전들은 절제의 도구를 활성화시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일리히의 비전으로 한국사회의 병을 진단해본다
이반 일리히는 너무 앞서갔기에 당대에 오히려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예견은 현대사회 속에서 너무도 적절하게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의 압축성장을 경험한 한국사회에 이반 일리히의 수십 년 전의 외침은 한물간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한국사회는 1970년대에 본격화된 산업주의는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끝을 모르고 치달리고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더 이상 수행될 수 없는 것으로 거부되는 토건국가식 과잉개발이 여전하며, 경제의 양적 성장은 크게 진전되었으나 그 질은 낮은 수준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폐해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에 이반 일리히가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이반 일리학 비판하였던 학교, 병원, 교통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심각하게 우려되는 문제들의 핵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히의 이상적 현대사회의 비전인 ‘절제의 사회’를 그대로 현실화하는 것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 산업사회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그의 식견은 현 사회의 병리적 상황을 명확하게 해줌으로써 그 치유의 가닥을 찾고, 파국을 넘어 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성을 환기시켜주는 데 적절하다. 특히 순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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