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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 황금찬 시인 문학특강
내용 요약 : 박수진 1. 문학과 시에 대한 생각 * 향기로운 꽃은 바람 앞에 서 있지 않고 아름다운 꽃은 몸을 흔들지 않아도 벌나비를 모은다. ⇒ 내 글을 자랑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알리려 쏘다니는 시간에 생각을 가다듬고 글을 쓰는 편이 낫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문학상이 있다. 그러나 상을 찾아다니면 추해진다. 상이 사람을 찾아다니도록 해야 한다. * 문학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시인의 한 마디는 때로 하늘을 감동시킨다. * 나라가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참된 시인이 없어서이다.
* 음악과 문학은 듣기 좋아야 생명력이 있다. 예술작품은 자신이나 독자에게 구원성이 있어야 한다 2. 시창작법과 시인 정신 * 글을 쓸 때 듣고 본 대로만 쓰지 말라 보고 느낀 대로만 쓰지도 말아야 한다 시(문학)은 사실을 미적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많다. ⇒ 작품은 없고 얼굴과 이름만 알리려고 나다니는 사람이 많다. 또 과거에는 시를 썼지만 현재는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은 엄밀하게 말해 ‘과거의 시인’이지 ‘현재의 시인’은 아니라고 했다. * 당나라 백낙천(백거이, 772~846)의 ‘비파행’(琵琶行)을 보라. 늙은 퇴기의 비파연주를 청해 들으며 그 연주에 매료되었지 않은가? ~ 홀연히 물 위로 비파소리 들려오니, 주인도 손님도 자리를 뜨지 못하네 ~ 비록 늙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퇴기가 되었으나 농익은 비파 연주를 멈추지 않아 사 람을 감동시켜 당대 최고의 시를 탄생시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늙어서도 연주하듯 늙어서도 써야만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쓸 것이다. *** 3. 문화에 대한 향수, 미에 대한 집착과 갈구(두 편의 일화) * 로마에 가면 유명한 식당 ‘알베르토’에 가보라. 그곳에는 날마다 하루의 주빈을 정해 그로부터 말을 청해듣는 오래된 풍습이 있다. 주빈을 정하는 데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무작위로 한 사람을 그날의 주빈으로 모시면 모든 손님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기립박수로 그의 입장을 맞는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주빈으로부터 인생이든, 예술이든, 건강이든 간에 유익한 이야기를 청해 경청한다. 그 문화, 그 자세가 부럽고 아름답지 않은가? ⇒ 함부로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 말만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보면 하와이 호눌룰루 동물원에 설치한 ‘가장 사나운 짐승’ 팻말의 빈 동물우리처럼 신선한 충격이다. *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고급호텔을 한두 해 사이에 세 번이나 관광차 투숙한 외국인 고객이 있었다. 그 외국 신사에게 지배인이 궁금해 여러 차례 찾아오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는 사업가도 돈많은 여행가도 아니었다, 해질 무렵 길거리에서 발견하는 함박웃음, 웃음짓는 한국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세 번 씩이나 서울을 찾았다는 외국의 어느 시인. 저녁 무렵이면 길거리에 나가 그 웃음을 찾는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미에 대한 갈구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우리는 어떤가. 한 번 가본 곳은 모든 것을 다 본 양 뒤돌아보지 않는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미의 껍데기를 대충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4. 요즘의 시는 시시하다. - 시 ‘완화삼’, ‘나그네’ 그리고 ‘남으로 창을 내겠소’ * 요즘의 시는 시시하다. 낭만과 철학과 이야기가 없다. 1940년대는 일제가 우리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하던 암흑기 중의 암흑기였다. 우리말 우리글을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되었다. 1941년이 되자 청록파 시인 등 걸출한 시인들을 배출한 ‘문장’지도 폐간을 맞게 되었다. 이 잡지를 통해 문단에 나온 젊은 시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해 보라. 이에 조지훈은 문학동지이나 벗인 네 살 아래의 박목월을 찾아 훌쩍 경주로 간다. 경주에서 목월의 환대 속에 며칠을 보낸 뒤 이별의 아쉬움과 슬픔을 담은 시 ‘완화삼’을 써 보낸다. 완화삼(玩花衫) - 木月에게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더 이상 우리말로 시를 쓸 수 없는 시인의 슬픔이 묻어있는 기막힌 시이다. 또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차운산은 더러 차가운 산이라 주를 단 경우도 있지만 이는 슬픔이 가득한 시인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산인 것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나온 시가 바로 부제가 긴 박목월의 ‘나그네’이다. 나그네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어떤 사람이 공개수업을 하며 강나루를 성동구에 있는 고유명사인 ‘광나루’로 가르쳐 실소를 금치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건 이들의 시는 가슴 저린 시대적 배경과 우정이 짙게 배어 있는 낭만이 들어있다. 그리고 소극적인 저항의 의미도 담긴 훌륭한 작품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두 편의 시에는 “나그네‘, ‘술익는 마을’, ‘저녁노을’ 같은 시어가 많이 나온다. 그래서 저작권 또한 고인이 된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등록되어 있어 둘의 우정은 짐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또 어떤가. 우리는 이 시를 그저 자연친화 시의 범주에서 평가하고 어떤 이는 영국의 전원시인 워즈워드나 키이츠에 비교하며 가르치기도 하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그 이상의 뜻이 깊은 작품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강냉이가 일걸랑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이 시를 쓸 당시 김상용은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일제는 무형유형의 압력을 가하며 학원을 떠나 친일단체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박봉의 선생 보수보다는 비교도 안 될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그러나 시인의 양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학교에서조차 발을 붙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의지를 밝힌 것이다. 명예와 돈으로 꼬인 일제의 회유에 대한 답시인 것이다. 정몽주나 성삼문의 시조에 나타난 선비의 지조와 절개가 엿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시를 한 번 더 감상해 보자. 이렇게 지난날의 시는 깊고 간절함이 있었다. 멋이 있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요즘의 시는 낭만과 철학과 사연이 없다. 그래서 시시하다. 새로운 시의 정서 발굴이 필요하다.
5. 시의 기능, 시인의 보람 문예사조의 흐름을 살펴보면, 고전주의 ⇒ 계몽주의 ⇒ 낭만주의 ⇒ 사실주의 ⇒ 실존주의로 흘러왔다. 나는 그 중에서 낭만주의에 주목한다. 사실주의, 특히 과학적 자연주의는 1년 내내 실험실에 앉아 실험한 사실을 객관적 근거로 들이대는 실증주의이다. 우리 인간의 신비롭고 직관적이며 따뜻한 감성을 실증이라는 차가운 시선으로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객관성, 리얼리티, 증명이란 말에 매이다 보면 논리성에는 강하고 스스로는 안전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인간 내면의 깊은 속내는 들여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문학의 가장 큰 기능은 인간 영혼의 구원이다. 그 답은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품을 꼽는다면 프랑스의 소설 <레미제라블>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인데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같은 여인만 있다면 우리 사회에 악은 없어질지 모르겠다. ~ 여기 누가 소냐 같은 분 없으세요? -제가 커피 사 드릴게요 -~ 계몽주의 문학은 계도성의 두각으로 감동성 약화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1년동안 실험실에서 실험, 관찰한 내용을 글로 쓴다는 과학주의와 ‘출구없는 방’으로 일컬어지는 실존주의는 결코 인간 구원에 이바지할 수 없다. 더구나 현대는 기계문명의 시대이다. 물질문명과 과학이 곧 신의 위치에 가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많은 문제는 과학이 신의 위치에 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과학은 참으로 편리하고 인간생활의 편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과학의 힘으로 신이나 영혼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현대의 과학, 기계문명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 이유는 과학은 수단이 될지언정 목적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가 왜 오지?’, ‘물은 왜 흘러가지’에 대해 과학은 물리적 이유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 목적은 말할 수 없다. 그 목적은 오직 시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답은 시에 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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