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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허겸(李許謙)
이허겸(李許謙, ? - ?)은 고려의 외척으로 현종비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의 외할아버지이며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이다. 김수로왕·허황옥의 후손이다. 비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다. 이자연(李子淵)과 이자상(李子祥), 이자겸(李資謙) 등의 선조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또는 경원(慶源,仁州).
손자 이자연(李子淵)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문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손자 이자상(李子祥)의 아들 이예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이예의 딸 정신현비 이씨는 선종의 비가 되었다. 고손자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되었다가 아들 인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이기도 했다.
1022년 세 명의 외손녀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가 모두 고려 현종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특별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상주국(上柱國)에 추증되었고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의 봉작과 식읍(食邑) 1,500호(戶)가 추서되었다.
이허겸 + 안산대부인(경주김씨) | ┏------------┓ 이한 이씨(딸)+김은부(사위) | | ┏------┓ ┏----------------------------------------┓ 자연 자상 원성황후(고려 헌종비) 원혜황후(헌종비) 원평황후(헌종비) | 호 | ┏------┓ 자겸 자량 | ┏---------------------------------------------┓ 지미 공의 지언 지보 지윤 지원(척준경의 사위) 의장
<고려 헌종>
현종(顯宗, 991년~1031년)은 고려 제8대 왕(재위: 1009년~1031년)이다.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시호는 현종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顯宗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태조의 아들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이다. [편집] 생애981년 경종이 사망하면서 그의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대종의 딸)는 궁에서 나와 살았다. 이 때 그 이웃에 왕욱(王郁, 태조의 아들, 헌정왕후의 숙부)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다보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정을 통해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992년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다. 이 아이가 왕순(현종)이다.
후일 왕순은 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에게 맡겨졌다. 어느날 성종의 명으로 왕순이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 때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다. 이 때 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에서 함께 살았고,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현종은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에 신혈사(神穴寺, 현재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겨갔다. 여러 차례 김치양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를 그 곳에 대피 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009년(목종 12년) 서북면순검사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다음해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갔다가 환도했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나중에 공주를 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실질적으로 고려의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서 거란을 물리치게 된다.
1014년 11월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궁궐을 수축하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재정을 보전하기 위하여 무신과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문신들을 잡아 대궐로 난입하여 현종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는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 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구주(龜州)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다.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農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편집] 가계현종의 비는 왕족 출신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가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고려 왕들은 현종에 의해 왕통을 이어 간 것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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