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기념일 강론 자료
I. 개 요
오늘은 4. 19 혁명 기념일입니다. 4. 19는 우리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 처럼, 우리나라의 건국 이념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의 굳건한 토대 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 기초를 놓아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있는 요즈음, 죄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되신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또한 죄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희생된 4.19의 순국 연령들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 기억에서 자칫 잊혀져가고 있는 4.19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생각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우리 믿는 자들 안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나라와 국가 사회 전체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부활이 되도록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II 4.19 혁명의 의미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 중에서)
우리나라는 헌법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55년 전에 200여명의 고귀한 중고, 대학생들의 희생자를 낸 4.19혁명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기며 그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1) 4.19혁명의 영향
(1) 학생운동의 활성화
4.19혁명은 이후 학생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4.19혁명의 주체로서, 학생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혁명 이후 시민들을 안정시키고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수습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한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온 후 ‘학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학원에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해 학생회 건설 등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학원에서 주체적 자리를 확립한 후, 학생들은 학원을 벗어나 사회로 눈을 돌려 농촌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통일을 위한 사회운동에도 뛰어들었다. 4.19혁명의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 학생들의 주권의식과 민주의식을 일깨운 것이다.
< 희생자 사망자 185명. 부상자 6259명 >
- 이야기 한국사 ,21세기 역사 바로 알기 위원회 편. 자료 인용>
(2) 민주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변화
4.19혁명은 간접민주정치의 결함을 시민의 힘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로 여실히 드러난 간접민주정치의 폐단은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이에 국민들은 거리로 나서 혁명을 일으켰고 이는 국민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간접민주정치가 부패하면 국민들에 의한 압력정치. 즉, 직접민주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민주정치에 대해 인식하고 각성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80년대까지 이어지는 민주화를 향한 기나긴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3) 새로운 가치관과 질서의 등장
이승만과 자유당정권 부패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인(人)의 장막이었다. 이승만은 시위가 격화되는 상황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승만 측근의 소수 정치적 권력자들만이 정치적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19혁명은 이러한 인의 장막을 해체하고 정치적인 의사소통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또한, 독재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타파했다. 자유당 정권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4.19혁명을 통해 학생과 청년들의 새로운 가치관과 가치체계가 사회 전반에 걸쳐 수용되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4) 전근대적, 봉건적 경제질서의 타파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3.15부정선거만큼이나 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당시의 경제적 문제다. 정부 수립 이후 진행된 농지개혁은 전근대적 지주-소작농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평가되지만 영세한 농민들의 불만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또한 제조업과 상업, 금융업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제의 식민지수탈 조직과 유사한 방식의 경영방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자유당 정권 하에서 성행하던 정경유착과 특권층에게 제공되던 불로소득 등은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체제가 전근대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4.19혁명은 위와 같은 봉건적 독점체제를 흔들었고 불공정하던 전근대적 경제체제를 합리와 절검에 따른 자본주의로 변화시켰다. 또한 이러한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제2공화국의 민주당과 진보, 혁신계열은 새로운 경제계획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2) 4.19혁명의 의의
(1) 대한민국 국민들의 발전된 민주의식의 표현
해방 이후 도입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투쟁과 경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이식된 것일 뿐이었다. 당시의 국민들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모방, 도입하면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안일한 생각은 자유당 정권의 11년 8개월간의 장기독재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에 국민들은 각성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남의 제도를 모방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민의 권리와 진정한 민주주의는 고통이 따르는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4.19혁명이며, 이는 4.19혁명이 대한민국 국민의 발전된 민주의식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이 가져온 결과임을 보여준다.
(2) 주권재민(主權在民) 의 확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적 정부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독재정권이었다. 이러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횡포 항거하여 일어난 시민들의 혁명은 곧 ‘공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권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확인한 것이며 국민을 탄압하고 억누르며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러한 4.19혁명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실릴 만큼 우리사회가 지향해야할 최고의 가치로 남아있다.
(3) 좌절된 ‘미완의 혁명’
4.19혁명은 독재정치를 휘두르는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들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4.19혁명은 명확한 한계를 가진 ‘미완의 혁명’이기도 했다. 4.19혁명은 주도적인 기구나 세력 없이 학생들과 민중들로만 이루어진,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강한 혁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혁명이 끝난 후, 정권은 4.19혁명의 정신을 조직적으로 이어받은 세력이 아닌 야당인 민주당에게 넘어갔고 민주당은 혁명 이후 터져 나오는 시민들의 요구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여러 갈등의 조짐을 보이는 사이에. 군인들에게 구테타의 빌미를 제공하게되고, 결국은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된다.
참고 : 4.19혁명의 결과와 영향 및 의의 참조 인용
(2024. 4. 19. 북여주 성당.전가브리엘 주임신부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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