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의 해맑고 장난기 어린 표정과 천태만상 모습은 일상의 속박에 찌들어 여유 없는 중생들의 삶에 한줄기 시원한 감로의 비를 뿌리는 듯하다
아! 하는 감탄과 웃음 속에 숨어있는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광흥사 응진전의 나한의 모습을 보면 갈등은 없다 서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갈 뿐이다…이것이 바로 세상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안동 광흥사에 가면 갈등을 풀어줄 나한들이 계신다. 광흥사는 한때 잘 나가던 조선 왕실의 불당으로 중중, 명종, 선조 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보급 불경(佛經)을 간행한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런데 1565년 3월 초 광흥사에서 유생과 스님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스님들이 유생을 받들어 모시지 않는다’고 유생들이 스님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참다못한 스님들은 학가산을 너머 봉정사에 도움을 청하여 두 절의 스님들이 유생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어 쫒아버렸다. 이에 경상감사 이택이 스님들이 죄를 엄하게 물을 것을 청했으나 명종이 “유생들의 요구는 잘못되어 죄 줄 수 없다”고 하자 사헌부는 “스님들을 죄주어 다스림은, 앞으로의 근심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라며 처벌을 주장해 결국 스님들은 벌을 받았다. 이는 조선시대 유교의 불교 길들이기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자신들의 힘만 앞세운 것이니 당시 불교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수난은 계속되지만 …
광흥사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46년 야소교(耶蘇敎, 천주교와 개신교, 정교회 등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를 통틀어 이르는 말) 광신자의 방화로 대웅전 등 전각과 많은 문화재가 몽땅 불타 버렸다. 1952년 11월1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연희대학교 민영규 교수는 “광흥사는 6년 전 야소교 신자들의 방화로 말미암아 거기에 비장해 둔 월인석보, 훈민정음 판목 400여 장 등 중요 문화재가 한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나마 화마에서 살아남은 응진전 나한들의 복장에 있던 <훈민정음해례본> 등 많은 경전이 1990년을 전후로 강·절도범에 의해 강탈당했다. 그래도 2013년 명부전 시왕의 복장에서 수습된 <월인석보> 등 500여권이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유교에 치이고, 야소교도들에 의해 불 태워지고, 강·절도에게 강탈당했지만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 바라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16나한이 있어 좋다. 우리 조상들은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을 해학에서 찾아내어 미래를 꿈꾸는 씨앗으로 삼았기에 이런 재미난 모습의 나한이 등장했다.
광흥사 웅진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가섭, 아난과 16나한이 계신다. 그 가운데 16나한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푸르거나 흰 눈썹이 접히면서까지 길게 자랐거나 한명의 동자를 데리고 있다. 2600여 년 전 인도 마리산에 있던 나한들이 광흥사 응진전에 오신 듯 재미난 모습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주리반특가존자의 몇 번이나 접은 흰 눈썹과 얼굴, 목의 주름은 신통과 나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동자들이 바보존자라고 놀리니 ‘뭐 공부 잘하면 뭐하니? 나처럼 깨달으면 마음의 즐거움과 신통은 절로 나오는데’ 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하다. 동자가 붉은 모자를 쓴 아시다존자에게 홍시를 바쳤다. 존자는 못마땅하여 ‘안 먹어’ 하고 손 사례를 치며 삐쳤다. 왜 그런가? 동자가 버릇없게 쟁반에 담아 드리지 않고 손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역시 안동은 양반 동네인 것 같다.
“부처님은 실제로 계신다”
동자가 나가세나존자에게 ‘존자님 경전공부 하세요’ 하니, 존자는 귀를 막고 못들은 척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나 지겹도록 공부했다. 옆의 존자님께 드리렴’ 하니 그 옆의 반특가존자도 푸른 눈썹을 길게 내리고 못 들은 척 눈을 감고 참선에 몰입한다. ‘참선하는 게 낫지 책보는 것은 골치 아파서 나는 오직 교외별전 불립문자야’ 한다. 나가세나존자는 경전에 통달한 분으로, 기원전 2세기 후반 인도 서북지역을 통치한 그리스 메난드로스왕(밀린다왕)과의 대화로 유명한 존자다.
<밀린다왕문경>에서 왕이 “부처님께서 현실에 존재하냐”고 묻자, 존자는 “부처님은 실제로 계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부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존자는 “여기, 거기에 계신다는 말로는 보여드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이 법을 몸으로 삼고 있는 분으로서 보여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대왕이여 법은 붓다에 의해 설해진 까닭”이라고 했다. 이러한 문답을 통해 나가세나존자는 3일 만에 왕을 불교에 귀의케 했다.
동자가 설날 벌나파사존자에게 세배를 하고 복주머니를 들고 기다린다. ‘존자님 세뱃돈 주세요.’ 존자는 ‘허참 큰일 났네 옷을 뒤져봐도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지 손은 관자놀이를 짚고 웃옷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빈도라발라타사존자의 모습도 보인다. 인게타존자는 참선을 너무 하셨나? 선정에 든 모습이 심장이 멎은 분 같이 온 몸이 파랗지만 참으로 거룩해 보인다. 동자는 스승의 건강이 염려되어 얼른 차 주전자를 들고 차를 드린다.
벌사라불다라존자는 서수의 긴 외뿔을 잡은 근엄한 표정인데, 이 동물은 희고 고른 이빨을 드러내고 장난기 섞인 눈동자와 ‘메롱’하듯 혀를 길게 내밀어 상대방을 놀리고 있어 재미있다. 또한 엄마 서수는 존자와 놀고, 애기 서수는 동자의 품에 안겨 노는 모습이 정겹고 여유롭다.
익살스런 모습의 낙거라존자와 황룡
낙거라존자는 심심하여 용이나 골려주어야겠다 생각하고 잠자는 용의 여의주를 몰래 감추어 버렸다. 존자의 장난임을 알아차린 황룡은 여의주를 빼앗으려 하나 억센 손아귀에 붙들려 옴짝 달싹하지 못한다. 이젠 존자도 힘이 들었는지 눈은 크게 뜨고 입을 꽉 다물며, 팔과 목에 힘을 주니 근육이 솟아오른다. ‘존자님 내 것 주세요?’ ‘그럼 내 말 잘 들을 겨?’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존자와 황룡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나한의 해맑고 장난기 어린 표정과 천태만상의 모습은 일상의 속박에 찌들고 여유 없는 중생들의 삶에 한줄기 시원한 감로의 비를 뿌리는 듯하다. 아! 하는 감탄과 웃음 속에 숨어있는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 광흥사 응진전의 나한의 모습을 보면 갈등은 없다. 서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갈 뿐.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