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예의지국`은 안록산 토벌 허기(奇)장군에게 당현종이 내린 감사표 >의
퍼온 게시판 글을 생각하면서....
위의 글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이 지금의 한반도에 적용을 하니 무언가 맞지 않는 내용이 되어버린것 같다.
한반도의 신라와 백제, 지금 중국의 당의 현종시기, 터어키, 로마라는 말과 지역이 밀접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을 중앙 아시아에 놓고 보면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 요건이 된다.
먼저
“ 백제가 망하여 당나라 포로가 된 흑치상지 장군를 따라간 허세신 부족 태인 허씨는 측천무후의 심복 허경종의 구테타로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고 여기서 태인 허경종 족이 허씨라서 특별히 허나라 (許國 )라는 지역 장군으로 등장 시킨다
서역 지역인 돌궐 터어키와 로마군 정벌에 투입되었다
그러다가 흑치상지 장군을 측천무후가 처형시켜서서 허씨 부족은 아들 흑치준과 같이 터어키군 진영으로 망명하였다
755년 안록산의 난으로 전 당나라 국토가 안록산의 군사에 점령되고 당현종은 성도, 촉지역으로 피난하고 터어키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애타게 구명 요청을 하였다.”
라는 글 속에는 너무나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백제 속에 허세신 부족( 태인허씨 )이 있었다는 것은 허세신이 가야계의 종족이었는데
그것은 다음의 논문에서 허세신의 등장으로 유추할 수 있다
<‘왜계관료’의 경우 활동 지역을 기준으로 ‘왜계가야관료’와 ‘왜계백제관료’로 분류하였는데, ‘왜계가야관료’는 주로 530년 이후에 안라국에 파견되어 활동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인물은 근강모야신·이나사·마도·인지미·허세신·길비신·적신·하내직이다.>
‘왜계가야관료’를 매개로 한 안라국과 왜. 저자명 이연심 문서유형 학술논문 인용된횟수 1건 학술지 한일관계사연구 31권 pp.3~42, 전체 40쪽 1229-3687 KCI 권호별 논문보기 발행정보 한일관계사학회 |2008년 |한국 주제분야 인문과학 > 역사학 서지링크 교보문고
안라국은 안야국(安邪國), 즉 아라가야이며 아라가야는 559년경 신라에 정복당하고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이 되었다. 이때 가야는 백제의 영향권 내에 있었기 때문에 백제로 갔다가 다시 백제가 망하자 허세신 부족은 중앙조정인 당조정으로 옮긴 것이다.
신라계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한 태종 무열왕이 바로 당태종이 되며 중앙 황제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 끼어 있다가 백제와 훨씬 가까웠으나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뿔뿔히 흩어진 것이다. 당시의 백제는 세력이 큰 중앙조정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왜와의 관계사에서도 항상 중앙으로서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 현재 역사해석에서도)
일본사에서도 허세신은 코세노오미로 등장한다.
안라국의 허세신 부족중 허경종은 당 조정에서 재상의 직임에 있게 된다.
그 기록은 동문선의
상 도당 서(上都堂書)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옛날 고종(高宗)이 무재인(武才人)을 책봉(冊封)하여 황후(皇后)를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수량(褚遂良)ㆍ허경종(許敬宗)은 같은 재상직에 있을 때입니다. 수량은 임금께 그 처사가 옳지 못함을 힘써 간하다가 마침내 살육의 화를 입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종은 고종의 뜻에 순응하여, “이 일은 폐하(陛下)의 집안일일 뿐이옵니다. 재상이 알 바가 아니옵니다.”라고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경종의 말을 인용하여 마침내 무재인을 황후(皇后)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종은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부분발췌
이허겸(李許謙)
소성백(邵城伯)을 봉하였다. 그 선조는 신라의 대관(大官)인데 사명을 받들고 당 나라에 들어가니 천자가 아름답게 여기어 이씨(李氏)성을 주었다. 자손이 소성현에 옮겨 살았으니 곧 인주(仁州)이다.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에 추증되었고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허겸은 실제 허겸인데 하사성인 이씨를 합쳐 이허겸으로 하였던 것 같다.
인주(仁州)가 인천(仁川)인데 이를 살펴보면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인천은 곧 예전 미추홀국(彌鄒忽國)이다. 고구려 때에는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고, 고려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는 황비(皇妣)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의 친정 고을이기 때문에 승격하여 경원군(慶源郡)을 만들었고, 인종(仁宗) 때에는 황비(皇妣)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친정 고을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지주사(知州事)를 만들었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고 높이어 승격하여 경원부(慶源府)를 만들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 고을의 명망 있는 문족(門族)으로서 문씨(門氏)ㆍ이씨(李氏)를 말한다. <실록 지리지 >
이들이 중앙에서 문제가 생겨 흑치 부족과 허씨 부족이 흑치의 고향인 백제지역으로 옮겨서 세력을 가지고 있다가 안록산의 난 때에 현종이 불러서 또 한번 신라지역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주고다시 돌아가 자리를 잡은 곳이 인주(仁州) 즉 인천(仁川)인 것이다.
이것을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풀고 싶다.
백제는 비잔티움 (로마)으로
신라는 사산조,
당조는 통일신라전기, 우마이야왕조.
인천은 터어키( 허기, 이기, 허이기 )지역 ....
이러한 산재된 요소를 가지고 한반도에서 풀어 놓았기 때문에 위의 글처럼 되었던 것이다.
더많은 내용이 있으나 간략하게나마..
첫댓글 김씨와 허씨와 허국, 허씨와 리씨의 관계, 인천과 미추홀과 비류백제, 염분이 많은 지역, 이런 문제가 조금씩 풀어질 수가 있겠군요. 김수로 왕고 왕후 허황옥, 김수로의 맏아들은 김해 김씨, 다음 아들은 왕후의 허씨, 안록산의 란을 맞아 현종을 호종한 신라의 사신 허기가 황제의 촐지방 피란을 끝까지 수행하여 인천을 식읍으로 받고, 황제의 성 리를 받아 인천 리씨가 되었다. 같은 뿌리이다. 가지고 있던 헝 앞에 또 성을 붙이는 사례를 더 찾아야 겠다.
허기(許奇)는 허황옥의 23세손으로 나오는군요. 허기는 당 현종에게 사성되었으니 李奇라고해야 마땅하고, 허겸(許謙)은 고려 현종에게 사성되었으니, 李謙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특별히 李許奇, 李許謙은 복성 李許가 되었고, 둘 다 황제 또는 임금에게 사성되었다. 이 두 사람은 물론 같은 뿌리이기는 하지만, 허기는 김해 허씨이고, 허겸은 태인 허씨이다. 태인은 전라도인데, 전라도는 백제 땅이다. 그런데 둘 다 인천/인주 리씨이고, 식읍이 소성이며, 그곳이 인천이다. 그러므로 백제 땅이라야 맞다.
허기는 아찬 벼슬을 가지고 갔다고 했으니 6두품의 최고관등이라고 하네요. 그러면 허기에게 '장군'이란 말은 적절하지가 않군요.
어쨌던 허기가 소성후에 봉해졌으니, 소성이 미추홀이고, 인주이고, 인천이니...또 미추홀은 백제 비류왕과 관련이 있고, 소금기가 많은 곳이다. 그곳은 내륙에 소금기가 많은 곳은 소금호수가 있는 부근이 아닐까? 소금[Tuz] 호수가 있기는 하네요. 북위 38.5도 동경 33.4도에... 구글지도에 하얗게 나오는군요. 정말 소금이 많은 땅인가봐요. 그곳이 터키이니 터키가 허기가 봉해졌던 데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일리가 있겠군요. 터키어로 dede[할아버지. 조상]의 데데의 ㄷ에다 허기의 ㅎ이 합쳐진 소리는 터 소리가 나니. 억지일까?
세심하게 많은 것을 찾아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안라국 즉 아라가야(함안)가 지금의 유프라테스강 가의 도시중 하나인 알라카(Alaka) 인지도 추증만 할 뿐입니다. 미추홀도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이자 카프카스와 연결되는 지역, 아나톨리아 반도로 추증만... 더 추적해볼 여지가 있는 사안입니다.
그리고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천자즉 황제가 되면 새로운 시작으로 성을 바꾸는 것은 없을까요. 당대의 김씨성이 통일하고난 후에 이씨로..... 이씨성이 주씨성으로... 여지껏 조작으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을것 같아서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