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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원본을 국보1호로 합시다.
락이망우 ・ 2023. 8. 17. 20:09
「訓民正音」原本을
國寶 第1號로 지정할 것을
提議함
< 訓民正音 創制 558周年 紀念 特輯 >
「訓民正音」原本을 國寶 第1號로 지정할 것을 提議함
陳 泰 夏
明知大學校 敎授
全國漢字敎育推進總聯合會 常任委員長
최근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한글날]을 國慶日로 추진하고 있는 운동에 대하여 本會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신중히 결정할 일이요, 함부로 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1) 지금의 10月 9日 [한글날]은 世宗實錄의 記錄을 잘못 해석하여 [訓民正音]의 創制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날짜를 기념하고 있으니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2) 世宗大王의 [訓民正音] 創制는 엄연히 世宗 25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3年을 늦추어 世宗 28年으로 기념하고 있는 [한글학회]는 그 잘못을 世宗大王 靈前에 謝罪함과 동시에 온 國民에 謝過하고, 하루 속히 [訓民正音] 창제 연대를 世宗 25年(1443)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3) 현재 紀念하고 있는 10月 9日은 [訓民正音]의 創制나 頒布 날짜가 아니라, [訓民正音]이라는 책의 原稿가 탈고된 날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며, 그 날짜도 陽曆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잘못되었으며, 정확히 환산하면 10月 9日이 아니라, 9月 30日이어야 한다.
(4) [訓民正音]을 世宗 28年에 頒布하였다는 記錄은 世宗實錄은 물론 당시 어떤 文獻에도 없는 사실이, 이른바 [한글학자]들에 의하여 잘못된 것이다.
(5) 종래 [한글날] 기념행사는 全國民의 행사가 아니라, 마치 [한글학회]가 주도하고 기념하는 행사처럼 이끌어온 잘못된 처사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6) 歷史上의 記錄이 분명한데도 北韓에서는 [訓民正音]의 創制 紀念日을 南韓과 달리 1月 15日로 정하였고, 또한 訓民正音 創制年代도 1443年이 아니라 1444年으로 하고 있음은 한글이 세계 最高의 表音文字로서 외국 學者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있는 현실로 볼 때, 羞恥스러운 일이므로 하루 속히 南北韓 代表들이 共同으로 硏究하고 協議하여 [訓民正音]의 創制 年代와 創制 紀念日을 올바로 統一하여야 한다.
(7) 北韓에서는 [訓民正音] 創制 紀念日을 [한글날]이라고 칭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考慮할 때 [訓民正音] 創制日을 國慶日로 정하는 것을 서두르기 전에 먼저 世宗大王의 [訓民正音] 制字原理를 상세하고도 과학적으로 설명한 [訓民正音] 原本을 國寶 第1號로 지정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일 것이다.
[訓民正音] 原本(澗松美術館 所藏)이 현재는 國寶 第70號로 되어 있고, 南大門이 國寶 第1號로 되어 있는데, 그 서열이 國寶 자체의 가치기준에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을 세계에 宣揚하기 위해서는 [訓民正音] 原本을 國寶 第1號로 정하는 것이 국내외적으로 名實相符한 명분이 되며, 國益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南大門은 文化財는 될 수 있으나 國寶라고 할 수는 없으며, 더욱이 第1號라고 하는 것은 그 서열의 규정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많고, 그 규모나 건축미로 보아도 第1號로서 명분을 세울 수 없다.
앞으로 월드컵大會 등 國際的인 행사나 大統領이 外國을 방문할 때, [訓民正音]을 原本과 똑같이 影印하여 대외적인 홍보용 선물로 활용한다면 韓國文化가 더욱 全世界에 널리 알려지고 빛나게 될 것이다.
訓民正音 創制 558周年(금년에도 [한글학회]에서는 555주년이라고 하겠지만)을 맞이하여 [訓民正音] 原本을 國寶 第1號로 지정하여 줄 것을 政府 당국에 긴급 提議하는 바이다.
2001.10
금년(2002년)은
한글 반포 556돌이 아니라, 559돌이다.
[한글날]도 10월 9일이 아니다.
陳 泰 夏(진 태 하)
韓國國語敎育學會 會長 / 明知大學校 敎授
(1) 한글 창제를 3년이나 늦춘 대죄를 누가 책임져야 하나?
올해도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학회]를 비롯하여 각 언론매체에서 [556돌]이라고 보도하고 있음은 참으로 부끄럽고 통탄할 일이다.
한글을 어느 기관보다도 깊이 연구하고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한글학회]에서까지 [556돌]이라고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물론, 언론에서도 별고증 없이 [556돌]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世宗實錄 25년(1443) 12월조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이 달(12월)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는데, (중략)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이라 하여 분명히 한글은 이미 559년 전에 世宗大王이 창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해 곧 世宗 26년(1444) 2월에는 集賢殿의 崔恒·朴彭年·申叔舟 등이 한글로 중국의 韻書인 [韻會]를 번역하고, 또한 같은 해 2월에 集賢殿의 副提學으로 있던 崔萬理가 한글의 창제 사용에 대하여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세종 27년(1445) 4월에는 125장이나 되는 장편의 [龍飛御天歌]를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지었고, 세종 28년(1446) 12월에 世宗은 吏曹에 명하여 吏科 및 吏典에 필요한 인재를 뽑는 시험에 訓民正音을 아울러 쓰도록 한 사실들이 세종실록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訓民正音을 창제하여 3년간이나 널리 보급하여 쓴 뒤에, 새삼 반포하였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의도적으로 朝鮮朝 건국의 偉大性과 合理性을 나타내고자 특별히 편찬한 建國頌의 [龍飛御天歌]를, 한글을 반포하기 전에 그 시험작으로 편찬하였다는 것은 결코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訓民正音]의 창제를 3년이나 늦추어 놓은 [한글학회]는 국민 앞에 하루 속히 사죄하고, 역사의 사실대로 3년을 올려 놓아 올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2) 한글의 創制와 頒布 연대를 誤認하여 온 까닭
아직도 세종 28년(1446)에 訓民正音을 반포한 것으로 誤認하여 온 이유는, 世宗實錄 28년(1446) 9월조에 "是月 訓民正音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이 달 곧 세종 28년(1446) 9월에 訓民正音을 완성하여 반포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誤釋하게 된 발단은 崔鉉培 선생의 [한글갈]에 "是月 訓民正音成."에 대하여 "[實錄의 記法에 日字의 不明確한 事件은 그달 끝에 [是月]이라 記錄하는 것이요, 또 상고한 바에 依하면, 當年의 九月이 적은 달이었으므로, 上記 [訓民正音] 頒布의 記事는 陰 九月 二十九日임이 밝아졌다."(p.55)라 하였고,
李熙昇 선생의 [國語學槪說]에도 "[世宗實錄 25年 癸亥 十二月條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 한 記事에 依하면, [訓民正音]이 頒布된 해 卽 世宗 28年 丙寅(단기 3779;서기 1446)보다 3年 前에 새 文字가 이미 完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漢字의 釋을 우리 글로 飜譯하여 보고, 다른 편으로는 純粹한 우리 노래를 이 새 글로 創作하여 보아, 이만하면 하는 自信을 얻은 後(28年 丙寅)에 國內에 正式으로 公布한 것이라 생각된다."(p.32)라고 한 것을 보면, 뒤에 와서 [한글 전용]과 [國漢文 혼용]으로 대립되었던 崔鉉培 선생이나 李熙昇 선생이 모두 [是月 訓民正音成]을 잘못 해석하여 세종 25년에 제정하고, 28년에 반포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世宗實錄 28년(1446) 9월조의 "是月 訓民正音成"의 [訓民正音]은 문자의 명칭이 아니라, [訓民正音]이란 책의 명칭인 것이다.
이것이 [訓民正音]이란 책의 명칭인 것은, 1940년 安東에서 [訓民正音]이란 책이 처음 발견되어 판명된 것이다.
현재 國寶 제70호로 지정되어 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訓民正音] 원본의 鄭麟趾 序文에도 이 책의 원고 완성 시기를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으로 명기하여 놓았다. [正統十一年]은 곧 世宗 28年(1446)이다.
그러므로 세종실록 28년 9월조의 "是月 訓民正音成"은 새로 만든 文字를 혼자라도 익힐 수 있도록 해설서 곧 참고서로서 [訓民正音]을 편찬하여 그 원고를 완성하였다는 뜻이다.
前人들의 誤釋에 대하여 金敏洙 교수가 이미 [국어국문학 제14집]에 "세종 28년 9월 상순은 [訓民正音]이란 책 자체의 완성 시기다. 따라서 10월 9일은 [訓民正音 解例 완성 기념일]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글 반포 기념일]은 되지 못한다. 세종 25년 12월은 한글의 창제뿐만 아니라, 반포한 시기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金 교수는 "따라서 12월 30일은 양력으로 따진 서기 1444년 1월 28일을 근거로 하여, 1월 28일이 [한글 창제 기념일]이요, [한글 반포 기념일]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금년은 한글 반포 552돌이 된다.
이 역시 잘못이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 마지막에 날자도 밝히지 않고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은 訓民正音이 12월 마지막날 곧 30일에 창제 완성되었음이 아니라, 훈민정음의 창제 작업은 당시 은밀히 진행되었으므로 史官들이 분명한 창제 완성 일자를 모르기 때문에, 부득이 12월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여 놓은 것인데, 이것을 기준하여 陽曆으로 환산해서 한글 창제 반포를 [1444년 1월 28일]로 하자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주장이다. 또한 金 교수는 무엇을 근거하여 1월 28일을 주장하는지는 몰라도, 陰 12월 3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월 19일이 된다.
北韓에서도 한글의 창제를 1444년 1월로 밝히고 있으나(최정후:조선어학개론, 평양, 1983), 金敏洙 교수와 같은 생각에서 잘못 환산한 것이다.
訓民正音(解例本)의 鄭麟趾 序文에 "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 기록되어 있는데, [癸亥年]은 곧 世宗 25年(1443)이고, [冬]은 12월만이 아니라, 실록의 기록을 보면 [冬十月], [春正月] 등과 같이 명기하였으니, [冬]은 곧 [10月, 11月, 12月]의 3개월내를 가리킨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 28년 9월조에 "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 以示之, 名曰訓民正音."이라 하여, 이미 癸亥年 곧 세종 25년 9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간단히 例義까지 들어 보였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그 결과를 알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세종 28년 12월에 다시 반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실록 또는 [訓民正音]의 관계 문헌 어디에도 [頒布]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지금처럼 신문·방송에 보도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닌데, 창제하여 3년이나 실험을 한 뒤, 백성들에게 반포하였다고 오인하여 온 것은,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前人들의 誤釋에 기인한 추측일 뿐이다.
(3) [한글날]도 10월 9일이 아니다.
과거에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경위를 [한글학회 50년사]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연구회]에서 1926년 11월 4일(음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세종실록 28년 9월조에 [是月 訓民正音成]에 근거하여 9월 끝날을 택하여 29일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②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명칭을 고치고, 1932년부터는 양력으로 바꾸어 10월 29일로 [한글날]을 정하였다.
③ 1934년에는 2년 전에 양력으로 환산한 기준이 [율리우스曆]에 의거함이 맞지 않다 하여, [그레고리曆]에 의하여 10월 29일을 10월 28일로 고쳤다.
④ 1940년 7월에 安東에서 [訓民正音] 원본이 발견되었는데, 그 책 끝에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이란 기록에 의하여, 光復後 곧 1945년에 [九月 上澣]의 [上澣]을 끝날인 10일로 잡고,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한글날]을 확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崔鉉培 선생은 "正統十一年은 世宗 二十八年 丙寅에 該當하고, 上澣은 곧 上旬인 즉, 九月 十日로써 그 頒布日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이를 陽曆으로 換算하면, 十月 九日이 되니, 이 날로써 한글날을 삼을 것이다. 朝鮮語學會에서는 十月 九日로써 한글날로 改定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이 最後的 決定이 될 것이다."(한글갈. p.56)라고 한 바와 같이 잘못 밝혀 놓았다.
訓民正音의 반포 연도에 대해서는 그 근거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이미 앞에서 고증하였으니 부언할 필요가 없고, 날자를 陽曆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잘못되었음을 밝힌다.
1446년 음력 9월 29일을 [兩千年中西曆對照表]에 의하여 양력으로 환산하여 보니, 10월 29일도 10월 28일도 아니고, [10월 19일]이다.
그러므로 과거 1932년부터 10월 29일로, 1934년부터는 10월 28일로 고쳐, 1945년 전까지 20여년간을 전연 잘못 환산된 날로 [한글날]을 기념하여 온 것이다.
또한 1945년부터는 [10월 9일]로 [한글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비록 [訓民正音]이라는 책의 원고가 完成된 날이라 하여도, 世宗 28년(丙寅, 1446) 9월 上澣, 곧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양력으로 [10월 9일]이 아니라, 분명히 [9월 30일]이 된다.
여기서 부언할 것은 [上澣]은 1일부터 10일까지를 일컫는데, 그 중간을 택하지 않고 마지막날인 10일을 택한 것도 합리성이 없다.
이것을 명확히 고증하기 위하여 [兩千年中西曆對照表]에 의하여, 1446년 음 9월 10일의 干支를 찾아보니 [乙亥]일인데, 世宗實錄에도 이 해 陰曆 9월 10일이 [乙亥]일로 완전히 일치되었다.
한글학회에서는 무엇에 근거하여 어떻게 환산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주먹구구식으로 그 해의 음력 9월이 작은 달로 29일이라는 것만 알고, 9월 10일에 29를 더하여 [양력 10월 9일]을 찾아낸 것 같다.
그러므로 1945년부터 금년까지 50여년을 [10월 9일]로 한글 반포일이라고 매년 기념하여 왔는데, 실로 이 날은 한글 반포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訓民正音]이란 책의 원고가 완성된 날도 아니니,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여 온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비유해서 말하면 한 개인의 생일을 잘 몰라 좋은 날자를 잡아서 생일을 정할 수도 있지만, 한글 창제 기념일은 주먹구구식으로 환산한 까닭에 지금까지 엉뚱한 날을 [한글날]로 기념하여 왔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며, 문화민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정확한 한글 창제의 연대와 [한글날]은?
앞에서도 고증한 바를 간추려서 결론을 내리면, 지금까지 세종 25년(1443)에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 28년(1446)에 반포하였다고 오인하여 온 것을 즉시 시정하여, 역사 기록 어디에도 없는 [반포]라는 말을 쓰지 말고, [창제(創制)]라는 말로 통일하여, [訓民正音] 곧 [한글]의 창제는 世宗 25년(癸亥), 檀紀로는 3776년, 公元(西紀)으로는 1443년으로 확정하여야 한다.
이 기회에 北韓과도 협의하여 현재 북한에서 한글의 창제 연도를 1444년으로 정하고 있는 것도 1443년으로 수정하도록 하여, 조속히 南北韓이 한글 창제 연대를 통일하여, 다른 나라에서도 정확한 한글 창제 연대를 알도록 해야 한다.
[한글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기념하여 온 반포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10월 9일]은 더 지속해서 기념할 의미가 없는 날이므로 우선 폐기해야 한다.
그 다음 [한글날]을 정함에 있어서는 訓民正音의 창제에 대한 기록으로서 世宗實錄 25년 12월조의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와 訓民正音 원본의 鄭麟趾 서문에 "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기록된 것에 의거하여 날자를 정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한글날]을 1월 15일로 정한 것도 잘못된 것이니, 새로이 [한글날]을 정할 때는 북한의 학자도 참여시키어 객관적이고도 합리성 있는 토론을 거쳐다시는 異論이 발생되지 않도록 명확히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案이 나올 수 있으나, [癸亥 冬]의 중간을 취하여 陰 10월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양력으로 [11월 6일]이 된다.
만일 이 날을 [한글날]로 새로 정하면, 너무 공휴일이 많다는 이유로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거한 것도 다시 부활할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 동안 일개 학회의 오류로 인하여 한글의 창제 연대와 [한글날]을 크게 잘못 기념하여 온 것을 소상히 밝히고, 조속히 올바로 시정하여 줄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
世宗 28년(1446) 한글 반포설은 전연 무근
고증 자료 연대 | 근거 자료 인용 | 자료 설명 |
세종 25년(1443) 12월 |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세종실록 권 102) | 세종 25년에 분명히 한글이 창제된 내용을 자세히 설명. |
세종 26년(1444) 2월 丙申 | 詣議事廳, 以諺文譯韻會 (세종실록 권 103) | 최항·박팽년·신숙주 등이 한글로 中國의 운서인 [韻會]를 번역. |
세종 26년(1444) 2월 庚子 | 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세종실록 권 103) | 최만리 등이 반대 상소문에서 중국의 운서를 한글로 고치는 것을 지탄. |
세종 27년(1445) 4월 戊申 | 進龍飛御天歌十卷. (세종실록 권 108) |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건국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를 국한문으로 지어 올림. |
세종 28년(1446) 9월 | 是月, 訓民正音成.……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 以示之, 名曰訓民正音. (세종실록 권 113) | 1940년 安東에서 발견된 [訓民正音] 원본에 실린 정인지의 序文과 같음. 이 序文에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은 곧 세종 28년 9월로 세종실록과 일치함. 그러므로 세종실록의 [訓民正音]은 책의 명칭임이 분명함. |
세종 28년(1446) 12월 己未 | 殿旨吏曹, 今後吏科及吏典取才時, 訓民正音, 拄令試取. (세종실록 권 114) | 吏曹에 명하여 吏科 및 吏典에 필요한 인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아울러 시험보도록 함. |
세종 29년(1447) 2월 | 殿下覽而嘉之, 賜名曰龍飛御天歌,……後爲音訓, 以便觀覽.(龍飛御天歌 崔恒 跋) | 세종 29년 2월에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어 10월에 발간함. |
[한글날]은 10월 9일과 무관하다.
한글날의 변천과정 | 변경 내용 | 참고 | 정확한 양력 날자 |
1926년 11월4일 (음 9월 29일) | 조선어 연구회(한글학회 전신)에서 [가갸날]로 정함. 9월의 끝날인 29일을 취함. | 세종실록 28년 9월조의 [是月 訓民正音成]에 근거하면서부터 오류를 범함. | 마지막 29일을 취한 것은 잘못이나, 양력 11월 4일은 틀림 없음. |
1928년 |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침 | ||
1932년 |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로 고침. | 당시 수학 전문가 이명칠·권상로에게 의뢰. | 1446년 음력 9월 29일은 양력 10월 19일임. |
1934년 | 그레고리오曆에 의거하여 10월 28일로 변경. | 그 전에는 율리우스曆에 의함. 역시 틀림. | |
1945년 | 9월 상순의 끝날인 10일을 취하여, 양력으로 10월 9일로 변경. | 1940년 7월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의거. | 1446년 음력 9월 10일은 양력 9월 30일임.(10월 9일은 주먹구구식 산법에 의함.) |
1946년 |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함. | 1990년 공휴일에서 제거. | |
2014년 | 다시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