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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으로 되돌아 본 대구아동문학회와 나
- 아름다운 인연
최춘해(동시인, 본회 전 회장)
나는 1967년에 대구 아동문학회에 가입했다. 전에는 대구아동문학회에 가입하고 싶어도 등단을 못 했기 때문에 자격이 안 돼서 못 하다가 196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고 바로 가입하였다. 가입 당시에는 월례회를 창주 이응창 성생 댁에서 했다. 청구주택이다. 작은 정원도 있었다. 대지가 한 60평 정도 되는 집인데 당시는 무척 넓어 보였다. 셋방에 살 때였으므로 선망이 되었다. 그때는 회비도 안 내고 차나 다과를 회장님 댁에서 베푸셨다. 회원들은 원화여자중고등학교 선생님과 계성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다. 회장 이응창, 회원 김성도, 김진태, 윤운강, 여영택, 신송민, 정휘창, 윤혜승, 박인술, 전정남, 이재철, 채위식, 신현득 등이다. 창립회원인 이민영, 서월파, 서광민은 보이지 않았다. 총무는 정휘창이고 부회장이나 다른 직책은 없었다. 가끔 야외도 나갔는데 경비는 거의 회장이 베풀었다. 구미 송림사에도 가고 은해사에서 하룻밤 자고 대구 동화사로 넘어온 적도 있다. 그때 밀서리해 먹은 기억도 난다. 권기환, 신현득, 김선주, 필자 등은 젊은 편이어서 늘 뒷자리에서 경청하다가 회가 끝나면 다방이나 막걸리 집에 가서 우리끼리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67년부터 약 10년간의 일기장을 못 찾아서 1978년 이후의 일기장에서 대구아동문학회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1978년 11월 17일(금)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권태문 선생이 상주에서 제3동화집 <아픔이란 열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권태문 선생은 그 동안 상주에서 닦아 놓은 터전이 넓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출판기념회 할 때보다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서울에서 이원수, 박홍근, 이영호씨가 참석하고 광주에서 아동문예 주관인 박종현씨가 참석했다. 김천에서 윤사섭, 장정문, 심형준씨가 참석하고 대구에서 김상삼씨가 왔다. 학교에서, 미술협회에서, 그 밖에 여러분이 참석했다. 회비 및 찬조금이 170,000여 원이 접수되어 여비 및 기타 경비를 제하고 얼마쯤 여분이 있었다고 한다.
1978년 11월 19일(일) 토요일 저녁에 세종문화사 주최 문학 강연회가 있어서 김동리 박사 이원수씨, 박경용씨 등이 서울에서 오셨다. 이원수, 박경용 두 분은 같은 아동문학을 하시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으나 김동리 선생을 개별로 대해서 인연을 맺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동리 선생 얼굴을 대하기는 10년 전쯤 서울에서 문협 이사장 선거가 있을 때였다. 김동리 선생이 이사장으로서 사회를 하는데 땀을 흘리는 모습을 봤다. 약간 귀는 어두운 것 같으나 얼굴이 퍽 곱다. 머리카락도 검다. 겉으로 보기에는 곁에 읹아계시는 이원수 선생보다 훨씬 아래인 것 같은데, 66세로 두 살 낮다고 한다. 20세 전후해서 세계명작을 통독하셨다는 김 선생님은 이야깃거리가 궁색하지 않았다. 샘물이 솟듯 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서는 싫증을 느끼기도 했으나 김 박사 이야기는 대단찮은 줄거리라도 재미가 있었다. 내가 문학을 한다고 남에게 소개되기는 했으나 김 박사에 비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목표의식과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 이번 김 박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내 일생 문단에서 새 마디가 맺을 수도 있으리라.
상주에서 김천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김동리 박사가 나한테, 내 이름이 너무 여성답고 곱고 가냘프며, 얼굴 인상도 이름과 같이 여리기 때문에 그 반대로 굳고 힘찬 이름이 좋겠다고 했다. 혜암(兮巖)이라고 지어 주셨다. 바위 중에서도 큰 바위 암(巖)을 쓰라고 하셨다. 호를 지어 주실 때 붓글씨로 나한테 써 주신 글이 있다. 春風大雅能容物 戊午立冬之節 爲兮巖崔椿梅詞兄 雅鑑於金泉 東里亦叟! 나는 이를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월 6일(토) 방학을 하고 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이오덕씨다.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 교장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정이어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 교장이 시키는 대로 7번 버스를 타고 갔다. 종착점에 내리니 이 교장이 기다리고 있다. 역시 신용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교장을 따라 10분쯤 걸어서 갔다. 2층의 퍽 좋은 집이다. 시골에서 봉급만 받아서 살아도 사모님도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남부럽잖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살림에 구애받지 않고 소신껏 살 수 있는 형편이 된 것 같다. 도회의 큰 학교에서 잡음을 듣고 교육이 아닌 다른 일에 복잡한 신경을 쓰느니보다는 산골에 묻혀서 소신껏 구김살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부럽기도 하다.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책으로 엮어서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도 이 교장처럼 살고 싶다.
점심시간에 이 교장과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사모님이 정성을 쏟아 만들어 온 음식은 구미가 당겼다. 나물 반찬도 있었고 쇠고기 반찬도 있었다. 이 교장 선생님은, 손수 가꾸어서 가져왔다는 배추와 그 밖의 야채만 잡수시고 고기반찬은 잡수지 않는다. 손님을 위해서 양보하느라 그러겠지 생각했다. 주인이 고기반찬에 손을 대지 않으니까 나만 고기반찬에 손을 대는 것이 미안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먹고 싶은 고기반찬을 덜 먹었다. 나중에 이 교장한테서 받은 책을 읽다가 ‘초식과 육식’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서 바로 문 앞에서 시익시익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나가 보았더니 마당 건너 옆집 돼지우리에서 누워 자고 있는 돼지의 소리였다. 짐승도 먹고 잠자고 병들면 아파하는 것이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잡아먹다니! (중략) 인간은 자연을 배반하고 생물을 학살, 약탈해 왔을 뿐 아니라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마침내 대량 살육의 무기까지 만들어 낸 것을 자랑삼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늦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제 피해만 입고 살아온 초식 동물을 본받아 그들의 평화와 자유, 그들의 평등과 공존의 생활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구원의 길이 없으리라. 이 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이 교장의 본성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점시 시간에 야채만 먹고 쇠고기를 먹지 않던 의문도 풀렸다. 전쟁놀이하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 하던 것, 항상 약자 편에 서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던 것, 생물을 아끼고 사랑하던 것, 아이들 편에 서서 폭력과 지시를 저주하던 것, 권위, 지시, 명령, 기합 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것 등. 이런 사실들이 모두 피해만 입고 살아온 초식동물을 아끼는 마음에서 울어난 것임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석가와 예수를 존경하였지만 이 교장만큼 자비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존경스럽다.
1988년 1월 27일(수) 윤혜승의 회갑 기념문집 <사랑 이야기 그리고 찬가들>을 읽었다. 성실하고 깨끗한 시인으로서 전부터 존경해 오던 분이다. 5년이나 연상이고 문단의 대선배이신 분이 책을 낼 때마다 부쳐주셨다. 그 분의 후배를 아끼는 마음은 나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그는 50년대에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등단이 10년 이상 빠르다. 30여 년이나 시 공부를 하셨다. 정선된 작품집이라 하겠다. 성인시를 쓰는 데 좋은 자료가 될 작품집이라고 생각한다.
1992년 5월 8일(금) 대구아동문학회 주최 ‘아동문학의 밤’ 개최. 아동문학의 밤에 회장인 신송민과 회원 정휘창, 심후섭, 김상삼, 권영세 등이 발표를 했다. 발표를 위해 상당히 연구를 많이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식적인 것이 아닌 깊이 있는 내용이고 청중들이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한 내용이다. 발표하는 솜씨도 자연스럽고 어색한 데가 없었다. 사회하는 김형경 선생도 부드럽고 유창하게 잘 진행시켰다. 내년에는 내가 발표를 해야 할 텐데 지금부터 그 때를 대비해서 구상해 두어야 될 것 같다.
1992년 9월 15일(화) 권기환의 동시집 <아이들이 차 올린 아침 해>를 읽었다. 권기환은 무척 겸손하다. 그가 동시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 1968년이니까 만 26년이 지났다. 그 동안 책을 내라고 주위 사람들이 여러 번 권했지만 낼만 한 작품이 없다면서 사뭇 사양했었다. 그가 환갑을 맞이해서 이제 첫 시집을 냈다. 그 동안 동화집은 두세 권 냈지만 그의 겸손한 본성이 작품 세계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좀처럼 작품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고 발표하지도 않는다. 또 그는 남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받으면 도움 받은 것 이상으로 보답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지고는 못 견디는 성미다. 그리하여 한 번 사귀게 되면 절대로 도중에 사이를 떼지 못한다. 말하자면 경상도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지닌 사람이다. 그 대신 처음 사귀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좀처럼 말을 걸려고 하지 않고 어쩌다 한 마디 하는 말도 상냥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를 사귀어 본 사람들은 겉모습이나 표현과는 달리 아주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따스함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또 그는 글을 쓸 때 낱말 하나하나에 무척 신중하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냥 두고 배기질 못한다. 늦더라도 기어이 마음에 드는 표현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권기환의 동시집 <아이들이 차 올린 아침 해>를 읽고 나서 위선 아이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을 좋게 생각한다. 동시는 먼저 아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그런데 가끔 보면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차원 높은 시를 쓴다면서 아이들이 이해 못 할 내용을 쓴 것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1994년 5월 23일(월) 박인술 선생의 동시집을 읽었다. 이번에 한정동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동시집 시집 산문집 등 3권을 한꺼번에 냈다. 박인술 선생은 연세가 높지만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는 분이다. 차를 타고 갈 때도 늘 책을 읽는다. 그는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아껴 쓴다. 그의 동시집 작품 중에도 시간을 소재로 쓴 작품이 있다. 늘 시간을 아껴 책을 읽거나 작품을 쓰거나 아니면 일을 한다. 과수원을 가꾸든지 목수 일을 하든지 무엇이든지 하고 있다. 계속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 성공을 한다. 그는 연세가 매우 높다. 나보다 11살이나 앞선다. 그런데도 건강도 좋고 창작도 활발히 하고 있다.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분의 인생관, 사상 등을 본받아야 되겠다.
1995년 1월 1일(일) 홍기의 <눈먼 벌치기>를 읽었다. 홍기 선생이 강조한 것은 때 묻지 말고 깨끗하게 사라는 것. 남 원망 말고 현실에 만족하라는 것.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면 벌과 같은 곤충도 뜻을 알아준다는 것. 등이다. 벌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자고 애원하는 마음으로 살면 벌도 사람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이다. 95년 10월 10일 홍기의 여덟 번째 작품집 장편동화 <바보 상득이>를 받았다. 198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10년이 채 못 되었는데 여덟 권이나 책을 냈다. 문단 생활 30년이 된 나보다 더 능력이 있다. 문장력도 좋고 동화 동시 구상도 잘한다. 이제는 우리나라 유수한 출판업계에서도 홍기의 작품이라면 마음 놓고 출판을 해 준다. 대교 출판사는 판로도 좋고 책도 잘 만드는데 홍기 동화집을 벌써 여러 권 냈다. 홍기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다. 홍기가 이만큼 자란 데에는 위선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동시에서 동화로 넘어갈 때 남의 작품을 많이 읽고 동화 쓰는 공부를 성실히 했다. 그는 한 편의 동화를 쓰기 위해 현장에 가서 누워 자면서 현장을 충실히 관찰한다. 1997년 1월 3일 홍기의 동화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읽고 난 느낌을 쓰고 있다. A4 용지로 7장이다. 경북아동문학회 연수회 때 발표할 자료다.
1995년 1월 9일(월) 이용순 선생이 시집을 내는데 발문을 써 달라고 한다. 이번 주 안에 아동문예사에 보내주어야 2월 5일에 책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작품 해설을 써야 하는데 정휘창 교장과 등산을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등산을 안 하면 약속을 어기게 된다. 남과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일이 좀 늦더라도 등산을 하기로 했다. 이틀 뒤에 작품 해설을 마쳤다. 부탁 받은 일들을 다 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다. 예상보다 일찍 끝낼 수 있어서 큰 다행이다. 내일 인동국민학교에 가서 12시에 전해 주기로 했다. 이튿날 이용순 부부가 교장실에 찾아왔다. 동시집 원고에서 띄어쓰기 틀린 것, 말이 틀린 것, 글자가 틀린 것 등을 모두 고쳐주고 작품평 쓴 것을 주었다. 작품 평은 한 이틀간 쓴 셈이다. 원고지 16장이다. 가면서 구두 티켓을 한 장 주고 갔다. 100,000원 짜리다.
1995년 5월 27일(토) 신송민 불교아동문학상 수상, 김종상 한국동요동인회 회장에 피선되다. 남이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으면서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 나와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 대구아동문학회장 신송민씨가 오늘 불교아동문학상을 받는다. 시상식에 참석은 못 하더라도 축전이라도 보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불교아동문학회에서 보낸 소식 난에 보니 오늘이 신송민씨 수상날이다. 오후 3시에 시상식이 있는데 이미 시간이 지났다.
김종상 선생이 한국동요동인회 정기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또 5월 5일 초록 동요제에서 제1회 대한민국 동요대상을 받았다. 이만큼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이 컸겠는가? 김종상 선생이 낸 동요 작품을 읽었는데 역시 동요 작사에는 대단한 솜씨다. 동요를 읽으면서 나도 동요를 써 보고 싶은 생각을 했고 동요를 쓰는 방법도 조금 익힌 것 같다. 김종상 작가 작품론을 쓸 때 동요 작사자로 크게 부각을 시켜야겠다.
7월 4일에 김종상의 동시를 주제별로 정리해 보았다. 주로 선집에 있는 것을 내 나름대로 그 내용과 주제를 적어 두었다. 92년도에 나온 동시집 <생각하는 돌멩이>, 93년도에 나온 동요시집 <매미와 참새>에 실린 글을 정리했다. 그가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1984년까지는 <어머니 무명치마>(동시선집)에 실렸으므로 그것만 함께 정리를 하면 김종상의 작품은 빠짐없이 분석하게 된다. 주제별로 정리를 해 보고 연도별로도 조명해 볼 작정이다. <어머니 무명치마>에 실린 작품을 읽고 적어 놓은 것을 찾지 못해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찾게 돼서 다행이다. 내일은 오늘 정리한 것에 <어머니 무명치마>에 실린 작품평을 함께 정리해야 되겠다.
7월 28일 김종상 작품론을 거의 다 써 간다. 70면 내외로 써야 하는데 지금까지 59면을 썼으니까 앞으로 11면만 쓰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 이야기만 써도 11면이 넘을 것 같다. 동화 이야기를 10면 정도 더 쓴다면 정한 매수의 10면이 더 늘 것 같다. 7월 말까지 마무리하기로 생각했으나 아무 일이 없으면 넉넉히 되겠는데 내 생일 행사 때문에 지장이 있다. 7월 31일 김종상 작품론을 탈고했다. 87매를 썼다. 17매가 초과됐다. 작가론 분량이 약 40매, 나머지는 작품론이다. 어느 정도 비율이 맞게 쓴 것 같다. 일단 컴퓨터로 정리를 해서 본인한테 보낼 예정이다. 예정대로 7월 말까지 쓰게 돼서 다행이다.
1997년 1월 25일(토) 최춘해 대구아동문학회장 추대되다. 오후 1시 명덕 불고기집에서 대구아동문학회 월례회를 했다. 이번 모임에는 임원 개선이 있다. 임기는 2년인데 중임도 가능하다. 1시 조금 넘어서 도착하니 벌써 다 와 있었다. 대구아동문학회는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특성이다. 총무의 개회 선언에 이어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총무가 회계 간사를 대신해서 결산 보고를 했다. 현재 잔고가 약 1천만 원 되었다. 그리고 미납회비가 250만 원이 있다. 이제 살림이 제법 좋아진 편이다. 이어서 회장 선거가 있었다. 회장 추대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정 회장이 나를 추대하고 박수를 쳤다.
1997년 3월 22일(토) 월례회에 신송민, 정휘창, 김몽선, 박경선, 홍기, 전정남, 장경희, 곽홍란, 김선주, 이석장, 이순우, 최춘해 등 12명이 참석했다. 대구아동문학회 창립 40주년 사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상해 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렇다 할 사업 계획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70세 이상 분들에 대해서 작가작품론을 특집으로 하자고 했더니 전 회장인 신송민씨가, 각자 우수 작품 한 편씩을 싣고 누가(회원 아닌 사람)회원 작품평을 쓰도록 하자고 했다. 회원 아닌 사람이 누가 작품평을 주겠는가.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회보를 발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매월 만나는데 만나서 말로 하면 되지 회보를 낼 필요가 있겠느냐고 한다. 회보를 통해서 정보 교환도 되고 작품 발표, 문학이나 현실에 대한 소견 발표, 자기만의 특수한 경험담, 작품을 읽은 감상문 등을 발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회보를 맡을 사람이 없으면 내가 만들 작정이다. 전정남 선생께 퇴직 기념 축하금으로 100,000원을 주었다. 전정남 선생이 저녁 식사비를 내고, 신송민 선생이 커피를 냈다. 박경선 선생께 출판 축하금 30,000원 전달했다.
그림 ) 대구아동문학회 야외 행사(1990년대)
1997년 7월 20일(금) 여영택씨와 함께 미국 동부와 캐나다 관광을 했다. 8박 9일 동안 여행이다. 우리가 본 곳은 미국 동부와 캐나다 일부이다. 땅이 하도 넓어서 한 곳에서 다음 곳으로 이동하는 데 보통 한나절씩 걸렸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계속 여영택씨와 한방을 썼다. 여 시인이 양말과 내복을 빠는 등 무척 부지런했다. 여 시인과 같이 팩에 든 소주를 나누어 먹었다. 여 시인이 술을 즐긴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뉴욕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여 시인과 같이 산책을 했다. 집들이 그리 호화롭지는 않다. 우리나라처럼 담으로 둘레를 막아 놓지 않았다. 뜰은 잔디를 잘 깎아 놓았다. 방범창을 해 놓지 않았다. 도로 양쪽에는 나무가 막고 있어서 둘레를 볼 수가 없다. 숲 속 도로를 계속 달리니 지루하다. 산도 보이지 않는다. 논밭에 곡식 자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나무 숲 속에 집이 보일 뿐이다. 7월 20일에 출발해서 7월 27일에 집에 도착했다. 더운 날씨에 목이 말라 음료수를 사 먹자고 하니 손사래를 쳤다. 여행하는 동안 여 시인이 무척 검소하다는 것도 느꼈다.
1997년 11월 12일(수) 대구아동문학회 창간 40주년 특집 원고 교정 아동문예사에 전화를 해 보니 책의 면수가 560쯤 되는데 출판비가 580만 원이나 된다고 했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값진 특집을 꾸밀 수 있어 다행이다. 이렇게 많은 원고를 한두 사람이 교정을 보기에는 벅차다. 전화를 해서 11월 16일(일) 10시에 서울식당에서 교정을 보기로 했다.
1997년 12월 13일(토) 대구아동문학 창립 40주년 기념호 <정다운 고향>이 출판되었다. 전 회원이 다 참석했다. 회에 자주 나오지 않는 회원도 작품을 다 실었다. 회원들이 회지를 잘 냈다고 좋아했다. 정휘창씨가 회지를 내느라 수고했다고 하자 모두 박수를 쳐주었다. 책 판 돈 500,000원을 인계했다.
1998년 2월 28일(토) 금년도 첫 월례회다. 권영세 교감이 대명에서 상인으로, 홍기 선생이 왜관동부에서 동명동부로 이동되었다. 심후섭 선생이 대구문학상을 받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심후섭 선생이 50,000원을 회에 기부했다. 정년퇴임을 했다고 나한테 축하금으로 100,000원을 주었다. 내가 차를 냈다. 연간 연수 계획과 행사 계획을 했다.
1998년 4월 9일(목) 이선영 남편 정광진 선생이 돌아가시다. 이선영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갑자기 돌아갈 줄은 몰랐다. 안 알릴 수 없어서 회장인 나한테만 알린다고 했다. 경북아동문학회회장 김상문씨께 알리고 대구에 사는 대구아동문학회원에게 알렸다.
1998년 5월 9일(토) 홍기 선생 ‘물뿌리개 아동문학상’ 수상. 광주의 물뿌리개 아동문학회에서 주는 제3회 문학상이다. 작년에 ‘하늘을 나는 자전거’라는 장편 동화집을 내었다. 이 작품이 수상 대상이 되었다.
1998년 8월 24일(월) 박경선 선생 국어전공 학사 논문 통과. 축전을 보냈다.
1998년 9월 1일(화) 나숙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는 주임 교수로 문학 분야 강의를 하는 게 승인이 되고 벌써 주부들이 50명 등록했다고 한다. 개강식을 과학대학 교육관에서 하는데 9월 7일에 나와 달라고 했다. 늘 집에 있기보다는 가끔 강의를 나가는 것이 좋겠다. 내가 맡은 강의는 청소년 문학 교육이다. 교재는 전에 구미에서 경북도서관에 강의 요청이 있어서 준비를 해 둔 게 있다. 보충 교재로 이승훈의 시작법이란 책에서 발췌할 예정이다. 예문을 들어가며 강의를 할 작정인데 더 좋은 책이 있는지 서점에 가서 살펴볼 작정이다. 9월5일(토) 월례회 때 나숙 선생이 자기 석사 논문인 ‘가사와 작곡과의 관계’에 대해서 발표했다. 12월14일(월) 출판보조금으로 시에서 800,000원이 나왔다.
1998년 12월19일(토) 송년회를 했다. 이선영 회계간사가 귤을 사 왔다. 글사임당에서 케이크와 샴페인 두 병을 사 왔다. 장기 결석한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연간집 한 사람 앞에 20권씩 배당된 것도 찾아가지 않는다.
1999년 4월 24일(토) 야유회를 했다. 전에 초대 회장이었던 이응창씨는 매일 모임을 할 때는 회장이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1년에 한두 번씩 야유회를 할 때도 회장이 경비를 베풀었다. 이응창 회장이 돌아가신 뒤 2대 김성도씨, 3대 박인술, 4대 정휘창, 5대 신송민 때는 정휘창씨만 한두 차례 야유회 경비를 부담했을 뿐 모두 회비로 썼다. 내가 회장이 되고 난 뒤 벌써 만 2년이 지나고 3년 째 들어섰는데 오늘 처음으로 야유회 경비를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전에도 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회원들이 참석을 하지 않아서 못 냈다. 오늘도 10명만 참석했다. 곽홍란 권기환 김선주 전정남 신송민 정휘창 이순우 심후섭 박인술 나 등. 홍기는 며칠 전에도 동화집 역작을 발표했다. 작품을 자신 있게 쓰니까 모임에는 소홀한 것 같다. 좀 섭섭하다.
1999년 8월 12일(목) 내 작품 ‘흙’이 영어 번역판으로 외국 잡지에 실림. 등산을 하고 돌아오니 서울 일지사에서 전화를 해 달라고 하더란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내 작품 ‘흙’이 외국 잡지에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했다. 번역된 책 두 권과 원고료 12만원을 보내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원고료도 가장 많이 받아본다. 원고료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 작품이 뽑혀서 영어로 번역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여러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무척 기쁘다. <THE EARTH> 이 책은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센터’ 라는 데서 낸 책이다. 일본에 있다. 흙을 중심으로 꾸몄다. 여러 나라에서 쓴 원고를 모아 영어로 번역해서 만들었다. <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일본을 시작으로 필리핀 이란 네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타이·중국·인도·뉴기니아·스리랑카·파키스탄·말레이시아·한국 등 14개국 기사가 실려 있는데, 우리나라 것은 내 작품 ‘The soil’ 하나 뿐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서 그런지 일본 기사가 가장 많았다. 내 연작시 가운데 ‘흙 4’를 번역해서 실었다. 원고료도 많이 받았지만 이 책을 2,030원이나 들여서 등기로 보내왔다. 성의가 고맙다. 잘 받았다는 전화를 했다. 책의 머리말에 보니 37개 국어로 번역이 된다고 한다. 앞으로 이 책이 한글로 번역이 돼서 나온다고 한다. 책이 나오면 부쳐 주겠다고 했다.
1999년 12월 22일(수) 9시 45분에 문예진흥원 문학미술부 담당자에게 문집 출판지원금 신청한 것에 대해서 전화로 물었다. 벌써 심사를 마치고 결재 과정에 있는데, 다음 주 30일 전후에 신문에 발표하고 개인한테 통보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발표 전이라서 미리 말하기가 거북하다고 하면서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300만 원을 받을 것이라는 힌트이다. 10월에 신청서를 내고 근 두 달 동안 기다렸다. 300만원이면 큰 문학상을 받은 것과 같다. 이름도 안 쓰고 작품만 20편 내라고 했다. 내 작품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어 영광스러웠다.
2001년 3월 24일(토) 전에는 전날 전화로 참석해 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권기환 한 사람한테만 연락을 하고 일체 전화를 하지 않았다. 과잉 친절도 금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상 외로 비교적 많이 참석했다. 권영세, 박운택, 하청호, 유종호, 곽홍란, 조영미, 전정남, 이순우, 정휘창, 박인술, 신송민, 권기환, 나 모두 13명이고 헤어질 때쯤 심후섭씨가 왔다. 이번에는 구미에서 온 조영미 선생이 석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두레 활동을 통해서 동시 짓는 공부를 가르치는 방법이다. 창작활동은 개인의 활동으로 창작되는 것인데, 공동작이 효과가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는 분도 있었다. 회보를 중심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새소식 1~3호까지는 회장인 내가 썼으나 다음 4호에는 다른 사람에게 위촉하기로 했다. 문예진흥기금을 200만 원 지원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청호님이 안일초등 교장으로, 강윤제님이 영양군 교육장으로 발령되었음을 축하했다.
2002년 10월 26일(토)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 44호 <아름다운 길>을 자축하였다. 내가 아동문학회의 회장을 6년 동안 맡았다. 이제 내 임기 동안 마지막 연간집 44호가 나왔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 창립 40주년 기념 특집을 냈고 작년 1월부터는 회보를 냈으며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전에는 월례회 때 10명 미만 참석했는데, 오늘 모임에는 20명이다. 전에 비해 배의 인원이 참석했다. 회원도 43명으로 늘었다. 전에는 연간집 수록 회원이 25명 안팎이었는데, 이번에는 41명이 참여했다. 내가 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만큼 활성화시켜 놓았으니 다음 이어받을 회장은 현재 상태를 유지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다음 김선주로 예정이 돼 있는데, 컴퓨터를 잘하지 못해서 홈페이지 운영, 회보 발간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2002년 12월 28일 (토) 회장을 6년간 맡고 다음 7대 회장 김선주씨께 넘겨주었다. 내가 너무 오래 회장을 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2년 동안은 대구아동문학회 홈페이지를 개설해서 운영하고, 회보를 다달이 발행하기 위해 자진해서 회장을 맡았었다. 이 달에 회보 24호를 냈다. 내 의도대로 다 했으나 너무 오래 했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 인수 회장은 컴퓨터를 잘 모르지만 컴퓨터에 익숙한 한은희께 사무가 넘어가서 홈페이지 운영이 제대로 될 것 같아 다행이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전통을 이어주기 바란다.
2003년 4월 6일(일) 창립회원 윤운강씨가 향년 83세로 별세하셨다. 중풍으로 6년 동안 투병을 했다. 전에는 등산도 많이 하고 술도 즐겼는데 중풍으로 출입을 못 했다. 그는 김선주씨와 함께 <꽃가마 타고> 동화집을 냈고, 500부 한정판으로 동시집 <햇살을 그린 그림>을 냈다. 특집에 윤운강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쓸 작정이다.
2003년 8월 23일(토)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무료) 개설. 수강자 수를 오전, 오후 각 10명씩으로 예정했으나 수강 신청자 수가 늘어서 오전, 오후 각 15명씩으로 확정했다.
2006년 4월 24일(월) 대구아동문학회 창립 회원 김진태 선생 별세. 정휘창 교장 전화를 받으니 김진태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김진태 선생은 1917년 생으로 90세이다. 노인 문학 모임이 있을 때도 근간에는 몸이 불편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에 ‘김진태의 삶과 문학 세계’ 추모 특집을 쓸 작정이다.
2006년 10월 7일(토) 추모 특집 ‘윤사섭의 인간과 작품 세계’ 추모 특집 원고를 쓰기 위해 한가위에도 윤사섭의 작품을 읽으며 구상을 했다. 어제 저녁부터 윤사섭의 인간에 대해서 썼다. 연보를 중심으로 그가 태어나서 살아온 과정을 쓰고 내가 그를 만나서 겪고 느꼈던 것을 썼다. 그가 그의 자화상이라고 한 작품 ‘산 할아버지와 꿩’, ‘귀뚜라미’ 두 작품에서 그의 인간성을 살펴보았다. 또 임종 때 ‘아베마리아’ 등 장송곡을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가족들에게 들었다. ‘동화 속에 살다가 동화 나라로 가다’라고 끝을 맺았다. 이제 작품 세계에 대해서 써야 한다. 구상은 다 돼 있다. 대표작인 ‘아기 바람과 엄마 바람’, ‘목각 인형’ 두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볼 작정이다. 이미 두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정리해 놓았으므로 시간이 별로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2007년 9월 29일(토) 오늘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 원고를 교정하기 위한 모임이다. 자신의 대표작 한 편, 신작 두 편과 특집 원고 교정이다. 내가 쓴 ‘대구아동문학 반세기의 역사’ 는 50년 동안 회원들의 업적을 역대 회장 재임 기간별로 모았다. 50년 긴 기간에 회원 60여 명의 업적을 모은 것이다. 사실은 혼자의 힘으로는 쓰기 어려운 것을 썼다. 따라서 문집이나 수상, 교과서 수록 작품 등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느라 최선을 다 했지만 빠질 수가 있다. 그래서 10부를 복사해서 나누어 주고 자기 것에 대해서 살펴보라고 부탁을 했다.
2007년 11월 20일(화) 신현득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아동문학인 협회에서 <한국아동문학> (2007년 12월 말 발행 예정)에 ‘아동문학의 맥’이란 난에 올해는 최춘해를 싣는다고 했다. 작품론, 작가론, 대표작, 연보를 싣는데, 작품론은 최지훈씨께 부탁했으나 바빠서 못 쓴다고 해서 대신 최용 아동문학평론가에게 부탁을 했고, 작가론은 신현득 선생이 쓴다고 했다. 마감이 25일까지인데, 초안한 원고를 나한테 보냈다. 나의 어린 시절, 평소의 나의 생활 등을 미화해서 나를 돋보이게 썼다. 이오덕을 나와 비교해서 나를 추켜올린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다.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 수료생 수와 등단한 사람 수 등을 써 넣어서 다시 보냈다.
2008년 3월 16일(일) <나무야, 나무야!> 열네 번째 동시집이 나왔다. 이번 동시집 내용을 살펴보니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나무는 자연의 일부이고 내가 자랄 때 소나무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책이 나왔으니 할 일이 많다. 첫째 기증하는 일이다. 누구한테 보낼 것인가?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한국동시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펜클럽, 저작권협회, 아동문예사, 아동문학평론사, 소년한국일보,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일보, 아동문학인주소록에서 나한테 책을 보내 온 사람, 혜암아동문학회, 경북아동문학회, 대구아동문학회, 여백문학회, 산절로 산악회, 이후문학회, 불교문학회, 금호테니스회, 레지오 단원, 신송테니스회, 대구문인협회, 5기 수강생, 6기 수강생, 매일신문, 영남일보, 도서관, 공무원 연금, 교원공제회 신문 등.
2010년 5월 19일(토) 주제 발표를 박경선 교장이 했다. 주제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의 소리를 많이 듣고 아이들 편에 서서 글을 쓴다는 것이 주제다. 박경선 선생은 동화책을 많이 냈는데, 다 기획 출판이다. 인세를 받고 책을 냈다. 1년에 인세만 해도 500여 만원인데 이 인세를 모두 아이들을 위해 쓴다고 했다. 생활은 부부 교원이니까 월급만으로도 충분하다. 돈이 많을수록 탐을 내기가 쉬운데 인세로 책을 사서 선물한다고 했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씩 대구아동문학회원과 경북아동문학 회원에게 점심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다.
2011년 9월 10일(토) 이선영 둘째 동시집 발문 전송. 출판사 요구가 200자 원고지 20매이다. 처음 원고는 작품 4편을 해설했으나 수정을 해서 작품 3편을 더 해설했다. 20매가 좀 넘는 셈이다. e-메일로 보냈다. 두 번째 작품집으로 영남아동문학상을 받는다.
2012년 1월 29일(월) 여영택 장례식. 성주군 벽진면 장지에 가기 위해서 대구문화예술회관에 모였다. 10시 반에 출발한다고 했다. 예정 시간이 아직 20분 남았는데, 공영구 문협회장, 사무국장, 견일영, 이원성 등이 벌써 와 있다. 사무국장이 커피를 한 잔씩 사 주었다. 승용차 6대로 출발했다. 정휘창, 견일영, 나는 이원성 차를 탔다. 화원에서 고속도로로 갔다. 성주에서 내리니 통행료가 2,800원이다. 견일영이 냈다. 벽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다가 장지로 갔다. 장지에 도착하니 아직 서울에서 도착하지 않았다. 장지에는 천막이 몇 개 처지고 음식이 준비돼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조회에서 하는 것 같다. 대구문인협회장이기 때문에 대구문인협회 기와 검솔 여영택 장례식 현판을 걸었다. 선영이 있는 산에 납골당처럼 돌로 석관을 만들고 석관 뚜껑 위에 검솔의 집이라고 써 놓았다. 화장을 해서 재를 석관에 넣고 무거운 뚜껑을 덮었다. 뚜껑은 포클레인으로만 들 수 있다. 구미에서도 김원호, 최재곤 등이 참석했다. 김원호 선생이 중학교 교장이고 현재 선주문학 회장이라고 한다. 식이 시작되었다. 문인협회장 인사, 약력 소개(장호병) 조사 낭독(정휘창), 조시 낭독(최춘해)
2012년 3월 26일(월) 신현득 시집 <우리를 하나의 나라로 하라>를 읽고 있다. 신현득은 자나 깨나 시만을 생각한다는 걸 시집을 읽으면서 느꼈다.
“쌍문역에서 집까지 역에서 나오며 휴지통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줍는다. 과거, 현재, 미래를 종이 위에 적는다. 재미를 섞고 노래를 부르고 얘기를 뒤섞는다. 이들이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려 하는군. 향기도 나네. 마음 집개로 요놈 조놈 위치를 바꾸어 보고 마음에 차지 않는 놈은 집어낸다. 그러다가 소파를 만난 때도 있다. 수유리로 열린 골목에서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석동을 만날 때도 자주 있다. 안델센은 늘 뒤처져 걸으며 한글 책을 더듬더듬 읽는다. 마아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도 같이 걷는다. 내 아파트 내 동호에 와서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를 때쯤 모두들 어디 가고 시 한 편이 되었어! 아니?”
신현득은 길을 걸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하루 운동하러 가는 시간, 돌아오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생각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이 많은 시간이 있는데도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시를 못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강의 시간에 강의를 하고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엔 준비를 해도 집에서 강의실까지 오는 동안, 산에 오르는 동안, 잠들기 전 시 쓸 시간은 무척 많다. 그 동안 시를 생각 않는 건 시간 낭비다.
2012년 8월 8일(수) 매일신문 특집 기사 ‘나의 살던 고향은’에 실을 사진을 촬영하였다. 신홍식씨 차를 타고 상주 사벌 덕골로 갔다. 매일신문사 기자와 만나서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구미에서 취재할 일이 생겨 구미에 다녀서 덕골로 오겠다고 했다. 신홍식씨 차를 타고 국우 터널을 지나 화달리 사벌 왕릉, 정기룡 장군을 모신 충의단, 사벌면사무소를 지나 덕골로 갔다. 정자가 있는 나무 그늘에서 매일신문 기자를 기다렸다. 내가 살던 마을 저수지에서 못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황새골 조상의 묘가 있는 데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사벌초등학교에 가서 정문에 서 있는 향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2012년 9월 13일(목) 안영선 동시집 <독도야, 우리가 지켜줄게>가 2012년 3분기 우수도서로 선정 되었다. 추모 특집으로 ‘여영택의 인간과 작품 세계’를 쓸 작정이다.
2012년 10월 27일(토) 선산중고등학교 부지에 여영택 시비를 세웠다. 위치도 좋고 모양도 좋았다. 주최측 인사, 경과보고, 약력 소개, 축사 순서로 진행됐다. 이원성 견일영 정휘창 나 4명이 참석했는데 대표로 정휘창씨가 축사를 했다.
2012년 12월 1일(토) 권영주 동시집 <발맞추어 둥둥둥 > 출판기념식. 북구 문화예술회관에서 이영태 한비문학 회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김원중, 허형만, 서정윤 등이 초대 문인으로 참석했다. 이 책에 내가 발문을 썼기 때문에 나도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2013년 3월 30일(토) <오늘의 동시 문학상> 시상식. <오늘의 동시 문학>지 창간 10주년 기념 잔치이다. 제12회 <오늘의 동시 문학상>을 혜암아동문학회 회장 박승우씨가 받는다. 혜암아동문학회에서 김성민 총무, 김규학 부회장 등이 축하하러 갔고, 대구아동문학회 총무인 김종헌과 회원인 박방희씨도 참석했다. 박경용, 김종상, 김완기, 정용원, 정두리, 서재환, 김진광 등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서 고맙다. 박승우씨가 <오늘의 동시문학상>을 받고 수상자 소감을 말할 때 ‘처음으로 아동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어서 고맙다고 내 이름을 들어 주어서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었다. 뿌듯하게 생각했다. 박승우, 김성민, 김규학은 자고 나는 서둘러서 내려왔다.
2013년 9월 13일(월) 신홍식씨 사회복지상 대상. 동시집 <우리 선생님>을 내고, 이어서 사회복지 대상을 받는 영광을 맞이했다. 신홍식씨는 '찾아가는 쌀 배달 아저씨'로 불린다. IMF 경제 위기로 운영하던 컴퓨터 부품 사업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 '어려울 때 돕고 사는 것이 진짜 돕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1999년 2월부터 저소득층 10가정에 쌀을 직접 전달하기 시작해 현재 60가정에 쌀을 지원하고 있다. (사)아트빌리지 대표이사이기도 한 그는 차세대 젊은 화가들을 위해 17명의 작가들에게 오피스텔을 무상 임대해 창작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고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재정 지원, 중견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대구문인협회, 아동문학가협회 등도 지원해 청소년 예술 활동 활성화에 기여했다.
2014년 2월 28일(금) 박인술, 김몽선 별세. 대구아동문학회 회원 두 사람이 같은 날(27일)에 돌아가셨다. 박인술씨는 오래 전부터 사람을 몰라본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쉽게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은 안 했다. 오래 전부터 동인회 활동을 함께해 왔다. 원화여고 교사로 정년퇴임을 했다. 승진이나 돈에 욕심이 없고 순수했다. 나이가 나보다 11살 위이다. 나이 차이가 있어도 거리감 없이 가까이 사귈 수 있었다. 근 10년 대구아동문학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구아동문학회회지에 추모 특집을 하면 내가 쓸 작정이다. 장례식 때 조시를 내가 쓰기로 했다. 김몽선씨는 시조시인으로 대구신천초등학교 근무할 때(1966년) 만났다. 작품도 잘 쓰고 작품평도 잘 쓴다. 예의바르고 의리가 있는 본받을 사람이었다.
2014년 12월 14일(목) 김현숙 동시집 <특별한 숙제> 출판기념회. 오늘 밤 7시에 뉴욕뉴욕에서 열린다. 축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작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이기 전에 인성이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생활이 따로 있고 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문학이 있다. 문학 작품을 밤새워서 쓰고 문학 공부를 하는 것은 삶을 보다 바르고 값지게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을 뛰어나게 잘 쓰는 것보다 작품은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값지게 사는 것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다. 문학하는 사람 중에는 둘 중 한 가지가 더 돋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 <특별한 숙제> 동시집을 출판한 김현숙씨는 인간성도 좋고, 작품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성과 작품을 관련시켜서 6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자신의 자화상이다. 겉모양보다는 향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작품 ‘모과’. 둘째 사랑 즉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 곤충, 동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푼다. 작품 ‘깜짝 파티’ 셋째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다. 작품 ‘손발 빌려주기’, ‘이상한 휴가’, ‘군불’ 등 (생략)
2015년 4월 16일(목) <최춘해 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이 150권 택배로 왔다. 150권은 출판사에서, 내가 이름을 보낸 사람에게 기증을 하고, 150권은 나한테 보내달라고 했다. 225쪽이라서 부피가 있고 무게도 있어 보인다. 내 문단 생활을 정리하는 책이 될 것이다. 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만나서 기증할 작정이다. 머리말 중에서 한 부분을 책 앞표지에 나타낸 것이 독자들에게 인상적일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은 농부였다. 평생 흙과 더불어 살다가 돌아가셨다. 흙처럼 거짓말할 줄 모르고 항상 낮은 자세로 남에게 양보하면서 적은 것도 이웃과 나누고 싶어 하셨다. 못 배우고 늘 낮은 데서 사셨지만 많이 배워서 유명한 것보다 흙처럼 정직하고 순수하게 사신 어머니가 존경스럽다. 흙과 같은 어머니 품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흙이 그냥 좋다.’
2015년 10월 24일(토)
오후 3시에 대구서부도서관에서 대구경북아동문학인 모임이 있다. 현재 대구문협 부회장을 맡고 있는 심후섭씨가 몇 달 전부터 이 모임을 주선했다. 카페도 만들어 놓고 자기소개를 카페에서 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아직은 시작이라 글을 올린 사람이 심후섭 한 사람뿐이라서 내 소개를 올렸다. 대구아동문학회 카페 회원 프로필 난에 올렸던 걸 복사해서 올렸다. 서부도서관 시청각실에 도착하니 좀 일렀다. 명찰을 받아서 목에 걸고 자리에 앉았다.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게 개회를 했다. 개회 및 사회는 심후섭씨가 하고 대구아동문학회장인 권영세씨가 이 모임을 갖게 된 취지를 이야기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의 어떤 목적을 위한 모임이 아니고 순수한 모임임을 강조했다. 김종헌씨가 ‘대구경북 지역 아동문학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자료를 동영상으로 보이면서 설명을 했다. 여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많았다. 자료를 알뜰히 수집한 김종헌씨가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한 시간 이상 강의를 했다. 다음은 소백동인회, 영남아동문학회, 새바람아동문학회, 대구아동문학회, 경북아동문학회 별로 회장이 나와서 회를 소개하고, 개인별로 자기소개를 했다. 낯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2015년 12월 27일(일) 김영란 제3 동시집 <나바라기> 발문 부탁을 받고 나서 한 달쯤 지났다. 책을 내기가 바쁘다고 하면 서두를 텐데, 틈나는 대로 써 달라고 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음 주일쯤 본인한테 메일로 보낼 작정이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머리에 첫 동시집과 달라진 점을 밝힐 작정이다. 김영란 동시집 <나바라기>를 2016년 6월 25일에 받았다. 동시집 뒤표지에 발문 일부를 옮겨 놓았다. ‘이번 시집에서는 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말의 묘미를 다룬 시가 여러 편 있고 이 시집의 전편에 말을 절제하고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2016년 11월 12일(토) 박승우 제3 동시집 <말 숙제 글 숙제>가 학이사에서 출판됐다. 모친의 89세를 기리기 위해서 동시집을 냈다고 한다. 박승우 시인은 1962년에 나서 2005년에 대구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을 했다. 43살에 등단을 했으니 좀 늦은 편이다. 늦었지만 정진을 해서 짧은 시간에 많은 공을 쌓았다.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9년 푸른문학상 당선, 2011년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자, 2012년 대산창작기금 수혜자, 2012년 동시집 <백점 맞은 연못>이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고, 2013년 제12회 <오늘의 동시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둘째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 출간, 2015년 동시 ‘축구공’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2016년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로 김장생 문학상 대상 수상을 했다. 2015년에는 아드님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런 상이나 창작지원금들은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이고 지원금이기 때문에 경합이 매우 세다. 실적을 올렸으면 자랑도 하고 자만해질 수도 있는데, 박 시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 1914년 11월에 나온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에도 그 많은 수상과 창작지원금 수혜자 등은 하나도 적지 않았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다. 아드님이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도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인데 전혀 자랑을 안 한다.
2017년 1월 26일(목) 노남진이 <최춘해 동시 연구> 논문으로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의 결론 부분 일부를 옮겨 본다.
“최춘해는 1967년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을 동시와 동화 평론을 쓰면서 아동문학을 위해 활동했다. 고향인 상주의 자연과 문학적 배경은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흙을 소재로 한 작품 활동의 토대가 되었다. 아동문학 활동이 우리나라의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했던 대구 경북은 1957년 ‘대구아동문학회’를 결성하면서 이를 축으로 지역의 작가들이 활동하게 된다. 교사로서 학생들의 글짓기를 지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춘해는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를 시작으로 ‘대구아동문학회’ 회원과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연간집을 내고 누리집을 개선하였다. 그 외에도 ‘상주아동문학회’ 등과 활동을 통해서도 본인의 작품 활동 및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경북아동문학회’ 창립 회원과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좋은 읽을거리를 어린이들에게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옛이야기 들려주기를 통해 우리의 얼을 이어 주고자 하였다.” (이하 생략)
2017년 2월 17일(금) 박영옥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동시집이 나왔는데 책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4시쯤 동시집 <사실은 말이야>를 10권 가지고 왔다.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흰 바탕에 깔끔하게 장정이 돼 있다. 머리말에 ‘최춘해 선생님 덕에 동시를 배워서 고맙다는 내용을 썼었는데 학이사 출판사에서 그런 내용은 빼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첫 동시집이기 때문에 박승우씨의 발문을 붙이는 게 좋겠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출판사에서 하지 마라고 해서 안 붙였다고 한다. 4부 중에서 1부를 읽어보니 요즘 내가 받은 동시집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작품이 좋다고 칭찬했다. 삽화 표지화도 박영옥 본인이 그렸다.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2017년 6월 17일(토) 김성민 동시집 <브이를 찾습니다>가 창비에서 출판되었다. 김성민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1년 『대구문학』 동시 부문 신인상을 받고 2012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에 동시 「나비 효과」 외 4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린이 문학평론가 김이구는 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시인은 어린이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순간에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보태어 빛나는 동시를 길어 올린다. 특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낯선 공간을 천연스럽게 펼쳐 보이는 능력이 인상적이다. 어린이 독자들은 밝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를 접하면서 기존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주변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내는 힘을 얻을 것이다.”
2017년 7월 10일(월) 정휘창 동화선집 <밀리미터 학교>가 소소담담사에서 출판되었다. 경북 문경군 마성면 솥골 새터에서 태어나(1928년)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던 중에 일제의 징용을 피해서 고향으로 가서 지냈다. 해방 이후 교원자격 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었다. 이응창, 김성도 등과 함께 대구아동문학회를 창립하고 동화집 <어린이 역사 이야기>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를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동화, 수필, 소설 등을 창작했다.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대구아동문학회장을 지냈다. 원화여중 교장으로 퇴직한 후 지금까지 25여 년 간 대구 수성구 시지동에 있는 증심사에 ‘한재말글산방’이라는 작은 글방에서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책 표지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된 작가의 동화선집, 정휘창 선생님 동화의 강점은 주제가 깊고 그 파장이 크다는 점이다.”
최춘해(동시인, 본회 전 회장)
나는 1967년에 대구 아동문학회에 가입했다. 전에는 대구아동문학회에 가입하고 싶어도 등단을 못 했기 때문에 자격이 안 돼서 못 하다가 196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고 바로 가입하였다. 가입 당시에는 월례회를 창주 이응창 성생 댁에서 했다. 청구주택이다. 작은 정원도 있었다. 대지가 한 60평 정도 되는 집인데 당시는 무척 넓어 보였다. 셋방에 살 때였으므로 선망이 되었다. 그때는 회비도 안 내고 차나 다과를 회장님 댁에서 베푸셨다. 회원들은 원화여자중고등학교 선생님과 계성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다. 회장 이응창, 회원 김성도, 김진태, 윤운강, 여영택, 신송민, 정휘창, 윤혜승, 박인술, 전정남, 이재철, 채위식, 신현득 등이다. 창립회원인 이민영, 서월파, 서광민은 보이지 않았다. 총무는 정휘창이고 부회장이나 다른 직책은 없었다. 가끔 야외도 나갔는데 경비는 거의 회장이 베풀었다. 구미 송림사에도 가고 은해사에서 하룻밤 자고 대구 동화사로 넘어온 적도 있다. 그때 밀서리해 먹은 기억도 난다. 권기환, 신현득, 김선주, 필자 등은 젊은 편이어서 늘 뒷자리에서 경청하다가 회가 끝나면 다방이나 막걸리 집에 가서 우리끼리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67년부터 약 10년간의 일기장을 못 찾아서 1978년 이후의 일기장에서 대구아동문학회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1978년 11월 17일(금)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권태문 선생이 상주에서 제3동화집 <아픔이란 열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권태문 선생은 그 동안 상주에서 닦아 놓은 터전이 넓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출판기념회 할 때보다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서울에서 이원수, 박홍근, 이영호씨가 참석하고 광주에서 아동문예 주관인 박종현씨가 참석했다. 김천에서 윤사섭, 장정문, 심형준씨가 참석하고 대구에서 김상삼씨가 왔다. 학교에서, 미술협회에서, 그 밖에 여러분이 참석했다. 회비 및 찬조금이 170,000여 원이 접수되어 여비 및 기타 경비를 제하고 얼마쯤 여분이 있었다고 한다.
1978년 11월 19일(일) 토요일 저녁에 세종문화사 주최 문학 강연회가 있어서 김동리 박사 이원수씨, 박경용씨 등이 서울에서 오셨다. 이원수, 박경용 두 분은 같은 아동문학을 하시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으나 김동리 선생을 개별로 대해서 인연을 맺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동리 선생 얼굴을 대하기는 10년 전쯤 서울에서 문협 이사장 선거가 있을 때였다. 김동리 선생이 이사장으로서 사회를 하는데 땀을 흘리는 모습을 봤다. 약간 귀는 어두운 것 같으나 얼굴이 퍽 곱다. 머리카락도 검다. 겉으로 보기에는 곁에 읹아계시는 이원수 선생보다 훨씬 아래인 것 같은데, 66세로 두 살 낮다고 한다. 20세 전후해서 세계명작을 통독하셨다는 김 선생님은 이야깃거리가 궁색하지 않았다. 샘물이 솟듯 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서는 싫증을 느끼기도 했으나 김 박사 이야기는 대단찮은 줄거리라도 재미가 있었다. 내가 문학을 한다고 남에게 소개되기는 했으나 김 박사에 비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목표의식과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 이번 김 박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내 일생 문단에서 새 마디가 맺을 수도 있으리라.
상주에서 김천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김동리 박사가 나한테, 내 이름이 너무 여성답고 곱고 가냘프며, 얼굴 인상도 이름과 같이 여리기 때문에 그 반대로 굳고 힘찬 이름이 좋겠다고 했다. 혜암(兮巖)이라고 지어 주셨다. 바위 중에서도 큰 바위 암(巖)을 쓰라고 하셨다. 호를 지어 주실 때 붓글씨로 나한테 써 주신 글이 있다. 春風大雅能容物 戊午立冬之節 爲兮巖崔椿梅詞兄 雅鑑於金泉 東里亦叟! 나는 이를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월 6일(토) 방학을 하고 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이오덕씨다.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이 교장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정이어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 교장이 시키는 대로 7번 버스를 타고 갔다. 종착점에 내리니 이 교장이 기다리고 있다. 역시 신용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교장을 따라 10분쯤 걸어서 갔다. 2층의 퍽 좋은 집이다. 시골에서 봉급만 받아서 살아도 사모님도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남부럽잖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살림에 구애받지 않고 소신껏 살 수 있는 형편이 된 것 같다. 도회의 큰 학교에서 잡음을 듣고 교육이 아닌 다른 일에 복잡한 신경을 쓰느니보다는 산골에 묻혀서 소신껏 구김살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부럽기도 하다.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책으로 엮어서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도 이 교장처럼 살고 싶다.
점심시간에 이 교장과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사모님이 정성을 쏟아 만들어 온 음식은 구미가 당겼다. 나물 반찬도 있었고 쇠고기 반찬도 있었다. 이 교장 선생님은, 손수 가꾸어서 가져왔다는 배추와 그 밖의 야채만 잡수시고 고기반찬은 잡수지 않는다. 손님을 위해서 양보하느라 그러겠지 생각했다. 주인이 고기반찬에 손을 대지 않으니까 나만 고기반찬에 손을 대는 것이 미안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먹고 싶은 고기반찬을 덜 먹었다. 나중에 이 교장한테서 받은 책을 읽다가 ‘초식과 육식’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서 바로 문 앞에서 시익시익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나가 보았더니 마당 건너 옆집 돼지우리에서 누워 자고 있는 돼지의 소리였다. 짐승도 먹고 잠자고 병들면 아파하는 것이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잡아먹다니! (중략) 인간은 자연을 배반하고 생물을 학살, 약탈해 왔을 뿐 아니라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마침내 대량 살육의 무기까지 만들어 낸 것을 자랑삼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늦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제 피해만 입고 살아온 초식 동물을 본받아 그들의 평화와 자유, 그들의 평등과 공존의 생활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구원의 길이 없으리라. 이 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이 교장의 본성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점시 시간에 야채만 먹고 쇠고기를 먹지 않던 의문도 풀렸다. 전쟁놀이하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 하던 것, 항상 약자 편에 서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던 것, 생물을 아끼고 사랑하던 것, 아이들 편에 서서 폭력과 지시를 저주하던 것, 권위, 지시, 명령, 기합 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것 등. 이런 사실들이 모두 피해만 입고 살아온 초식동물을 아끼는 마음에서 울어난 것임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석가와 예수를 존경하였지만 이 교장만큼 자비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존경스럽다.
1988년 1월 27일(수) 윤혜승의 회갑 기념문집 <사랑 이야기 그리고 찬가들>을 읽었다. 성실하고 깨끗한 시인으로서 전부터 존경해 오던 분이다. 5년이나 연상이고 문단의 대선배이신 분이 책을 낼 때마다 부쳐주셨다. 그 분의 후배를 아끼는 마음은 나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그는 50년대에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등단이 10년 이상 빠르다. 30여 년이나 시 공부를 하셨다. 정선된 작품집이라 하겠다. 성인시를 쓰는 데 좋은 자료가 될 작품집이라고 생각한다.
1992년 5월 8일(금) 대구아동문학회 주최 ‘아동문학의 밤’ 개최. 아동문학의 밤에 회장인 신송민과 회원 정휘창, 심후섭, 김상삼, 권영세 등이 발표를 했다. 발표를 위해 상당히 연구를 많이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식적인 것이 아닌 깊이 있는 내용이고 청중들이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한 내용이다. 발표하는 솜씨도 자연스럽고 어색한 데가 없었다. 사회하는 김형경 선생도 부드럽고 유창하게 잘 진행시켰다. 내년에는 내가 발표를 해야 할 텐데 지금부터 그 때를 대비해서 구상해 두어야 될 것 같다.
1992년 9월 15일(화) 권기환의 동시집 <아이들이 차 올린 아침 해>를 읽었다. 권기환은 무척 겸손하다. 그가 동시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 1968년이니까 만 26년이 지났다. 그 동안 책을 내라고 주위 사람들이 여러 번 권했지만 낼만 한 작품이 없다면서 사뭇 사양했었다. 그가 환갑을 맞이해서 이제 첫 시집을 냈다. 그 동안 동화집은 두세 권 냈지만 그의 겸손한 본성이 작품 세계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좀처럼 작품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고 발표하지도 않는다. 또 그는 남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받으면 도움 받은 것 이상으로 보답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지고는 못 견디는 성미다. 그리하여 한 번 사귀게 되면 절대로 도중에 사이를 떼지 못한다. 말하자면 경상도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지닌 사람이다. 그 대신 처음 사귀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좀처럼 말을 걸려고 하지 않고 어쩌다 한 마디 하는 말도 상냥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를 사귀어 본 사람들은 겉모습이나 표현과는 달리 아주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따스함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또 그는 글을 쓸 때 낱말 하나하나에 무척 신중하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냥 두고 배기질 못한다. 늦더라도 기어이 마음에 드는 표현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권기환의 동시집 <아이들이 차 올린 아침 해>를 읽고 나서 위선 아이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을 좋게 생각한다. 동시는 먼저 아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그런데 가끔 보면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차원 높은 시를 쓴다면서 아이들이 이해 못 할 내용을 쓴 것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1994년 5월 23일(월) 박인술 선생의 동시집을 읽었다. 이번에 한정동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동시집 시집 산문집 등 3권을 한꺼번에 냈다. 박인술 선생은 연세가 높지만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는 분이다. 차를 타고 갈 때도 늘 책을 읽는다. 그는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아껴 쓴다. 그의 동시집 작품 중에도 시간을 소재로 쓴 작품이 있다. 늘 시간을 아껴 책을 읽거나 작품을 쓰거나 아니면 일을 한다. 과수원을 가꾸든지 목수 일을 하든지 무엇이든지 하고 있다. 계속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 성공을 한다. 그는 연세가 매우 높다. 나보다 11살이나 앞선다. 그런데도 건강도 좋고 창작도 활발히 하고 있다.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분의 인생관, 사상 등을 본받아야 되겠다.
1995년 1월 1일(일) 홍기의 <눈먼 벌치기>를 읽었다. 홍기 선생이 강조한 것은 때 묻지 말고 깨끗하게 사라는 것. 남 원망 말고 현실에 만족하라는 것.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면 벌과 같은 곤충도 뜻을 알아준다는 것. 등이다. 벌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자고 애원하는 마음으로 살면 벌도 사람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이다. 95년 10월 10일 홍기의 여덟 번째 작품집 장편동화 <바보 상득이>를 받았다. 198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10년이 채 못 되었는데 여덟 권이나 책을 냈다. 문단 생활 30년이 된 나보다 더 능력이 있다. 문장력도 좋고 동화 동시 구상도 잘한다. 이제는 우리나라 유수한 출판업계에서도 홍기의 작품이라면 마음 놓고 출판을 해 준다. 대교 출판사는 판로도 좋고 책도 잘 만드는데 홍기 동화집을 벌써 여러 권 냈다. 홍기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다. 홍기가 이만큼 자란 데에는 위선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동시에서 동화로 넘어갈 때 남의 작품을 많이 읽고 동화 쓰는 공부를 성실히 했다. 그는 한 편의 동화를 쓰기 위해 현장에 가서 누워 자면서 현장을 충실히 관찰한다. 1997년 1월 3일 홍기의 동화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읽고 난 느낌을 쓰고 있다. A4 용지로 7장이다. 경북아동문학회 연수회 때 발표할 자료다.
1995년 1월 9일(월) 이용순 선생이 시집을 내는데 발문을 써 달라고 한다. 이번 주 안에 아동문예사에 보내주어야 2월 5일에 책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작품 해설을 써야 하는데 정휘창 교장과 등산을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등산을 안 하면 약속을 어기게 된다. 남과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일이 좀 늦더라도 등산을 하기로 했다. 이틀 뒤에 작품 해설을 마쳤다. 부탁 받은 일들을 다 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다. 예상보다 일찍 끝낼 수 있어서 큰 다행이다. 내일 인동국민학교에 가서 12시에 전해 주기로 했다. 이튿날 이용순 부부가 교장실에 찾아왔다. 동시집 원고에서 띄어쓰기 틀린 것, 말이 틀린 것, 글자가 틀린 것 등을 모두 고쳐주고 작품평 쓴 것을 주었다. 작품 평은 한 이틀간 쓴 셈이다. 원고지 16장이다. 가면서 구두 티켓을 한 장 주고 갔다. 100,000원 짜리다.
1995년 5월 27일(토) 신송민 불교아동문학상 수상, 김종상 한국동요동인회 회장에 피선되다. 남이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으면서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 나와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 대구아동문학회장 신송민씨가 오늘 불교아동문학상을 받는다. 시상식에 참석은 못 하더라도 축전이라도 보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불교아동문학회에서 보낸 소식 난에 보니 오늘이 신송민씨 수상날이다. 오후 3시에 시상식이 있는데 이미 시간이 지났다.
김종상 선생이 한국동요동인회 정기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또 5월 5일 초록 동요제에서 제1회 대한민국 동요대상을 받았다. 이만큼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이 컸겠는가? 김종상 선생이 낸 동요 작품을 읽었는데 역시 동요 작사에는 대단한 솜씨다. 동요를 읽으면서 나도 동요를 써 보고 싶은 생각을 했고 동요를 쓰는 방법도 조금 익힌 것 같다. 김종상 작가 작품론을 쓸 때 동요 작사자로 크게 부각을 시켜야겠다.
7월 4일에 김종상의 동시를 주제별로 정리해 보았다. 주로 선집에 있는 것을 내 나름대로 그 내용과 주제를 적어 두었다. 92년도에 나온 동시집 <생각하는 돌멩이>, 93년도에 나온 동요시집 <매미와 참새>에 실린 글을 정리했다. 그가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1984년까지는 <어머니 무명치마>(동시선집)에 실렸으므로 그것만 함께 정리를 하면 김종상의 작품은 빠짐없이 분석하게 된다. 주제별로 정리를 해 보고 연도별로도 조명해 볼 작정이다. <어머니 무명치마>에 실린 작품을 읽고 적어 놓은 것을 찾지 못해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찾게 돼서 다행이다. 내일은 오늘 정리한 것에 <어머니 무명치마>에 실린 작품평을 함께 정리해야 되겠다.
7월 28일 김종상 작품론을 거의 다 써 간다. 70면 내외로 써야 하는데 지금까지 59면을 썼으니까 앞으로 11면만 쓰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 이야기만 써도 11면이 넘을 것 같다. 동화 이야기를 10면 정도 더 쓴다면 정한 매수의 10면이 더 늘 것 같다. 7월 말까지 마무리하기로 생각했으나 아무 일이 없으면 넉넉히 되겠는데 내 생일 행사 때문에 지장이 있다. 7월 31일 김종상 작품론을 탈고했다. 87매를 썼다. 17매가 초과됐다. 작가론 분량이 약 40매, 나머지는 작품론이다. 어느 정도 비율이 맞게 쓴 것 같다. 일단 컴퓨터로 정리를 해서 본인한테 보낼 예정이다. 예정대로 7월 말까지 쓰게 돼서 다행이다.
1997년 1월 25일(토) 최춘해 대구아동문학회장 추대되다. 오후 1시 명덕 불고기집에서 대구아동문학회 월례회를 했다. 이번 모임에는 임원 개선이 있다. 임기는 2년인데 중임도 가능하다. 1시 조금 넘어서 도착하니 벌써 다 와 있었다. 대구아동문학회는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특성이다. 총무의 개회 선언에 이어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총무가 회계 간사를 대신해서 결산 보고를 했다. 현재 잔고가 약 1천만 원 되었다. 그리고 미납회비가 250만 원이 있다. 이제 살림이 제법 좋아진 편이다. 이어서 회장 선거가 있었다. 회장 추대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정 회장이 나를 추대하고 박수를 쳤다.
1997년 3월 22일(토) 월례회에 신송민, 정휘창, 김몽선, 박경선, 홍기, 전정남, 장경희, 곽홍란, 김선주, 이석장, 이순우, 최춘해 등 12명이 참석했다. 대구아동문학회 창립 40주년 사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상해 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렇다 할 사업 계획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70세 이상 분들에 대해서 작가작품론을 특집으로 하자고 했더니 전 회장인 신송민씨가, 각자 우수 작품 한 편씩을 싣고 누가(회원 아닌 사람)회원 작품평을 쓰도록 하자고 했다. 회원 아닌 사람이 누가 작품평을 주겠는가.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회보를 발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매월 만나는데 만나서 말로 하면 되지 회보를 낼 필요가 있겠느냐고 한다. 회보를 통해서 정보 교환도 되고 작품 발표, 문학이나 현실에 대한 소견 발표, 자기만의 특수한 경험담, 작품을 읽은 감상문 등을 발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회보를 맡을 사람이 없으면 내가 만들 작정이다. 전정남 선생께 퇴직 기념 축하금으로 100,000원을 주었다. 전정남 선생이 저녁 식사비를 내고, 신송민 선생이 커피를 냈다. 박경선 선생께 출판 축하금 30,000원 전달했다.
그림 ) 대구아동문학회 야외 행사(1990년대)
1997년 7월 20일(금) 여영택씨와 함께 미국 동부와 캐나다 관광을 했다. 8박 9일 동안 여행이다. 우리가 본 곳은 미국 동부와 캐나다 일부이다. 땅이 하도 넓어서 한 곳에서 다음 곳으로 이동하는 데 보통 한나절씩 걸렸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계속 여영택씨와 한방을 썼다. 여 시인이 양말과 내복을 빠는 등 무척 부지런했다. 여 시인과 같이 팩에 든 소주를 나누어 먹었다. 여 시인이 술을 즐긴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뉴욕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여 시인과 같이 산책을 했다. 집들이 그리 호화롭지는 않다. 우리나라처럼 담으로 둘레를 막아 놓지 않았다. 뜰은 잔디를 잘 깎아 놓았다. 방범창을 해 놓지 않았다. 도로 양쪽에는 나무가 막고 있어서 둘레를 볼 수가 없다. 숲 속 도로를 계속 달리니 지루하다. 산도 보이지 않는다. 논밭에 곡식 자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나무 숲 속에 집이 보일 뿐이다. 7월 20일에 출발해서 7월 27일에 집에 도착했다. 더운 날씨에 목이 말라 음료수를 사 먹자고 하니 손사래를 쳤다. 여행하는 동안 여 시인이 무척 검소하다는 것도 느꼈다.
1997년 11월 12일(수) 대구아동문학회 창간 40주년 특집 원고 교정 아동문예사에 전화를 해 보니 책의 면수가 560쯤 되는데 출판비가 580만 원이나 된다고 했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값진 특집을 꾸밀 수 있어 다행이다. 이렇게 많은 원고를 한두 사람이 교정을 보기에는 벅차다. 전화를 해서 11월 16일(일) 10시에 서울식당에서 교정을 보기로 했다.
1997년 12월 13일(토) 대구아동문학 창립 40주년 기념호 <정다운 고향>이 출판되었다. 전 회원이 다 참석했다. 회에 자주 나오지 않는 회원도 작품을 다 실었다. 회원들이 회지를 잘 냈다고 좋아했다. 정휘창씨가 회지를 내느라 수고했다고 하자 모두 박수를 쳐주었다. 책 판 돈 500,000원을 인계했다.
1998년 2월 28일(토) 금년도 첫 월례회다. 권영세 교감이 대명에서 상인으로, 홍기 선생이 왜관동부에서 동명동부로 이동되었다. 심후섭 선생이 대구문학상을 받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심후섭 선생이 50,000원을 회에 기부했다. 정년퇴임을 했다고 나한테 축하금으로 100,000원을 주었다. 내가 차를 냈다. 연간 연수 계획과 행사 계획을 했다.
1998년 4월 9일(목) 이선영 남편 정광진 선생이 돌아가시다. 이선영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갑자기 돌아갈 줄은 몰랐다. 안 알릴 수 없어서 회장인 나한테만 알린다고 했다. 경북아동문학회회장 김상문씨께 알리고 대구에 사는 대구아동문학회원에게 알렸다.
1998년 5월 9일(토) 홍기 선생 ‘물뿌리개 아동문학상’ 수상. 광주의 물뿌리개 아동문학회에서 주는 제3회 문학상이다. 작년에 ‘하늘을 나는 자전거’라는 장편 동화집을 내었다. 이 작품이 수상 대상이 되었다.
1998년 8월 24일(월) 박경선 선생 국어전공 학사 논문 통과. 축전을 보냈다.
1998년 9월 1일(화) 나숙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는 주임 교수로 문학 분야 강의를 하는 게 승인이 되고 벌써 주부들이 50명 등록했다고 한다. 개강식을 과학대학 교육관에서 하는데 9월 7일에 나와 달라고 했다. 늘 집에 있기보다는 가끔 강의를 나가는 것이 좋겠다. 내가 맡은 강의는 청소년 문학 교육이다. 교재는 전에 구미에서 경북도서관에 강의 요청이 있어서 준비를 해 둔 게 있다. 보충 교재로 이승훈의 시작법이란 책에서 발췌할 예정이다. 예문을 들어가며 강의를 할 작정인데 더 좋은 책이 있는지 서점에 가서 살펴볼 작정이다. 9월5일(토) 월례회 때 나숙 선생이 자기 석사 논문인 ‘가사와 작곡과의 관계’에 대해서 발표했다. 12월14일(월) 출판보조금으로 시에서 800,000원이 나왔다.
1998년 12월19일(토) 송년회를 했다. 이선영 회계간사가 귤을 사 왔다. 글사임당에서 케이크와 샴페인 두 병을 사 왔다. 장기 결석한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연간집 한 사람 앞에 20권씩 배당된 것도 찾아가지 않는다.
1999년 4월 24일(토) 야유회를 했다. 전에 초대 회장이었던 이응창씨는 매일 모임을 할 때는 회장이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1년에 한두 번씩 야유회를 할 때도 회장이 경비를 베풀었다. 이응창 회장이 돌아가신 뒤 2대 김성도씨, 3대 박인술, 4대 정휘창, 5대 신송민 때는 정휘창씨만 한두 차례 야유회 경비를 부담했을 뿐 모두 회비로 썼다. 내가 회장이 되고 난 뒤 벌써 만 2년이 지나고 3년 째 들어섰는데 오늘 처음으로 야유회 경비를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전에도 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회원들이 참석을 하지 않아서 못 냈다. 오늘도 10명만 참석했다. 곽홍란 권기환 김선주 전정남 신송민 정휘창 이순우 심후섭 박인술 나 등. 홍기는 며칠 전에도 동화집 역작을 발표했다. 작품을 자신 있게 쓰니까 모임에는 소홀한 것 같다. 좀 섭섭하다.
1999년 8월 12일(목) 내 작품 ‘흙’이 영어 번역판으로 외국 잡지에 실림. 등산을 하고 돌아오니 서울 일지사에서 전화를 해 달라고 하더란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내 작품 ‘흙’이 외국 잡지에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했다. 번역된 책 두 권과 원고료 12만원을 보내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원고료도 가장 많이 받아본다. 원고료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 작품이 뽑혀서 영어로 번역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여러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무척 기쁘다. <THE EARTH> 이 책은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센터’ 라는 데서 낸 책이다. 일본에 있다. 흙을 중심으로 꾸몄다. 여러 나라에서 쓴 원고를 모아 영어로 번역해서 만들었다. <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일본을 시작으로 필리핀 이란 네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타이·중국·인도·뉴기니아·스리랑카·파키스탄·말레이시아·한국 등 14개국 기사가 실려 있는데, 우리나라 것은 내 작품 ‘The soil’ 하나 뿐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서 그런지 일본 기사가 가장 많았다. 내 연작시 가운데 ‘흙 4’를 번역해서 실었다. 원고료도 많이 받았지만 이 책을 2,030원이나 들여서 등기로 보내왔다. 성의가 고맙다. 잘 받았다는 전화를 했다. 책의 머리말에 보니 37개 국어로 번역이 된다고 한다. 앞으로 이 책이 한글로 번역이 돼서 나온다고 한다. 책이 나오면 부쳐 주겠다고 했다.
1999년 12월 22일(수) 9시 45분에 문예진흥원 문학미술부 담당자에게 문집 출판지원금 신청한 것에 대해서 전화로 물었다. 벌써 심사를 마치고 결재 과정에 있는데, 다음 주 30일 전후에 신문에 발표하고 개인한테 통보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발표 전이라서 미리 말하기가 거북하다고 하면서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300만 원을 받을 것이라는 힌트이다. 10월에 신청서를 내고 근 두 달 동안 기다렸다. 300만원이면 큰 문학상을 받은 것과 같다. 이름도 안 쓰고 작품만 20편 내라고 했다. 내 작품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어 영광스러웠다.
2001년 3월 24일(토) 전에는 전날 전화로 참석해 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권기환 한 사람한테만 연락을 하고 일체 전화를 하지 않았다. 과잉 친절도 금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상 외로 비교적 많이 참석했다. 권영세, 박운택, 하청호, 유종호, 곽홍란, 조영미, 전정남, 이순우, 정휘창, 박인술, 신송민, 권기환, 나 모두 13명이고 헤어질 때쯤 심후섭씨가 왔다. 이번에는 구미에서 온 조영미 선생이 석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두레 활동을 통해서 동시 짓는 공부를 가르치는 방법이다. 창작활동은 개인의 활동으로 창작되는 것인데, 공동작이 효과가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는 분도 있었다. 회보를 중심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새소식 1~3호까지는 회장인 내가 썼으나 다음 4호에는 다른 사람에게 위촉하기로 했다. 문예진흥기금을 200만 원 지원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청호님이 안일초등 교장으로, 강윤제님이 영양군 교육장으로 발령되었음을 축하했다.
2002년 10월 26일(토)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 44호 <아름다운 길>을 자축하였다. 내가 아동문학회의 회장을 6년 동안 맡았다. 이제 내 임기 동안 마지막 연간집 44호가 나왔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 창립 40주년 기념 특집을 냈고 작년 1월부터는 회보를 냈으며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전에는 월례회 때 10명 미만 참석했는데, 오늘 모임에는 20명이다. 전에 비해 배의 인원이 참석했다. 회원도 43명으로 늘었다. 전에는 연간집 수록 회원이 25명 안팎이었는데, 이번에는 41명이 참여했다. 내가 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만큼 활성화시켜 놓았으니 다음 이어받을 회장은 현재 상태를 유지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다음 김선주로 예정이 돼 있는데, 컴퓨터를 잘하지 못해서 홈페이지 운영, 회보 발간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2002년 12월 28일 (토) 회장을 6년간 맡고 다음 7대 회장 김선주씨께 넘겨주었다. 내가 너무 오래 회장을 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2년 동안은 대구아동문학회 홈페이지를 개설해서 운영하고, 회보를 다달이 발행하기 위해 자진해서 회장을 맡았었다. 이 달에 회보 24호를 냈다. 내 의도대로 다 했으나 너무 오래 했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 인수 회장은 컴퓨터를 잘 모르지만 컴퓨터에 익숙한 한은희께 사무가 넘어가서 홈페이지 운영이 제대로 될 것 같아 다행이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전통을 이어주기 바란다.
2003년 4월 6일(일) 창립회원 윤운강씨가 향년 83세로 별세하셨다. 중풍으로 6년 동안 투병을 했다. 전에는 등산도 많이 하고 술도 즐겼는데 중풍으로 출입을 못 했다. 그는 김선주씨와 함께 <꽃가마 타고> 동화집을 냈고, 500부 한정판으로 동시집 <햇살을 그린 그림>을 냈다. 특집에 윤운강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쓸 작정이다.
2003년 8월 23일(토)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무료) 개설. 수강자 수를 오전, 오후 각 10명씩으로 예정했으나 수강 신청자 수가 늘어서 오전, 오후 각 15명씩으로 확정했다.
2006년 4월 24일(월) 대구아동문학회 창립 회원 김진태 선생 별세. 정휘창 교장 전화를 받으니 김진태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김진태 선생은 1917년 생으로 90세이다. 노인 문학 모임이 있을 때도 근간에는 몸이 불편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에 ‘김진태의 삶과 문학 세계’ 추모 특집을 쓸 작정이다.
2006년 10월 7일(토) 추모 특집 ‘윤사섭의 인간과 작품 세계’ 추모 특집 원고를 쓰기 위해 한가위에도 윤사섭의 작품을 읽으며 구상을 했다. 어제 저녁부터 윤사섭의 인간에 대해서 썼다. 연보를 중심으로 그가 태어나서 살아온 과정을 쓰고 내가 그를 만나서 겪고 느꼈던 것을 썼다. 그가 그의 자화상이라고 한 작품 ‘산 할아버지와 꿩’, ‘귀뚜라미’ 두 작품에서 그의 인간성을 살펴보았다. 또 임종 때 ‘아베마리아’ 등 장송곡을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가족들에게 들었다. ‘동화 속에 살다가 동화 나라로 가다’라고 끝을 맺았다. 이제 작품 세계에 대해서 써야 한다. 구상은 다 돼 있다. 대표작인 ‘아기 바람과 엄마 바람’, ‘목각 인형’ 두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볼 작정이다. 이미 두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정리해 놓았으므로 시간이 별로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2007년 9월 29일(토) 오늘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 원고를 교정하기 위한 모임이다. 자신의 대표작 한 편, 신작 두 편과 특집 원고 교정이다. 내가 쓴 ‘대구아동문학 반세기의 역사’ 는 50년 동안 회원들의 업적을 역대 회장 재임 기간별로 모았다. 50년 긴 기간에 회원 60여 명의 업적을 모은 것이다. 사실은 혼자의 힘으로는 쓰기 어려운 것을 썼다. 따라서 문집이나 수상, 교과서 수록 작품 등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느라 최선을 다 했지만 빠질 수가 있다. 그래서 10부를 복사해서 나누어 주고 자기 것에 대해서 살펴보라고 부탁을 했다.
2007년 11월 20일(화) 신현득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아동문학인 협회에서 <한국아동문학> (2007년 12월 말 발행 예정)에 ‘아동문학의 맥’이란 난에 올해는 최춘해를 싣는다고 했다. 작품론, 작가론, 대표작, 연보를 싣는데, 작품론은 최지훈씨께 부탁했으나 바빠서 못 쓴다고 해서 대신 최용 아동문학평론가에게 부탁을 했고, 작가론은 신현득 선생이 쓴다고 했다. 마감이 25일까지인데, 초안한 원고를 나한테 보냈다. 나의 어린 시절, 평소의 나의 생활 등을 미화해서 나를 돋보이게 썼다. 이오덕을 나와 비교해서 나를 추켜올린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다.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 수료생 수와 등단한 사람 수 등을 써 넣어서 다시 보냈다.
2008년 3월 16일(일) <나무야, 나무야!> 열네 번째 동시집이 나왔다. 이번 동시집 내용을 살펴보니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나무는 자연의 일부이고 내가 자랄 때 소나무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책이 나왔으니 할 일이 많다. 첫째 기증하는 일이다. 누구한테 보낼 것인가?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한국동시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펜클럽, 저작권협회, 아동문예사, 아동문학평론사, 소년한국일보,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일보, 아동문학인주소록에서 나한테 책을 보내 온 사람, 혜암아동문학회, 경북아동문학회, 대구아동문학회, 여백문학회, 산절로 산악회, 이후문학회, 불교문학회, 금호테니스회, 레지오 단원, 신송테니스회, 대구문인협회, 5기 수강생, 6기 수강생, 매일신문, 영남일보, 도서관, 공무원 연금, 교원공제회 신문 등.
2010년 5월 19일(토) 주제 발표를 박경선 교장이 했다. 주제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의 소리를 많이 듣고 아이들 편에 서서 글을 쓴다는 것이 주제다. 박경선 선생은 동화책을 많이 냈는데, 다 기획 출판이다. 인세를 받고 책을 냈다. 1년에 인세만 해도 500여 만원인데 이 인세를 모두 아이들을 위해 쓴다고 했다. 생활은 부부 교원이니까 월급만으로도 충분하다. 돈이 많을수록 탐을 내기가 쉬운데 인세로 책을 사서 선물한다고 했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씩 대구아동문학회원과 경북아동문학 회원에게 점심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다.
2011년 9월 10일(토) 이선영 둘째 동시집 발문 전송. 출판사 요구가 200자 원고지 20매이다. 처음 원고는 작품 4편을 해설했으나 수정을 해서 작품 3편을 더 해설했다. 20매가 좀 넘는 셈이다. e-메일로 보냈다. 두 번째 작품집으로 영남아동문학상을 받는다.
2012년 1월 29일(월) 여영택 장례식. 성주군 벽진면 장지에 가기 위해서 대구문화예술회관에 모였다. 10시 반에 출발한다고 했다. 예정 시간이 아직 20분 남았는데, 공영구 문협회장, 사무국장, 견일영, 이원성 등이 벌써 와 있다. 사무국장이 커피를 한 잔씩 사 주었다. 승용차 6대로 출발했다. 정휘창, 견일영, 나는 이원성 차를 탔다. 화원에서 고속도로로 갔다. 성주에서 내리니 통행료가 2,800원이다. 견일영이 냈다. 벽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다가 장지로 갔다. 장지에 도착하니 아직 서울에서 도착하지 않았다. 장지에는 천막이 몇 개 처지고 음식이 준비돼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조회에서 하는 것 같다. 대구문인협회장이기 때문에 대구문인협회 기와 검솔 여영택 장례식 현판을 걸었다. 선영이 있는 산에 납골당처럼 돌로 석관을 만들고 석관 뚜껑 위에 검솔의 집이라고 써 놓았다. 화장을 해서 재를 석관에 넣고 무거운 뚜껑을 덮었다. 뚜껑은 포클레인으로만 들 수 있다. 구미에서도 김원호, 최재곤 등이 참석했다. 김원호 선생이 중학교 교장이고 현재 선주문학 회장이라고 한다. 식이 시작되었다. 문인협회장 인사, 약력 소개(장호병) 조사 낭독(정휘창), 조시 낭독(최춘해)
2012년 3월 26일(월) 신현득 시집 <우리를 하나의 나라로 하라>를 읽고 있다. 신현득은 자나 깨나 시만을 생각한다는 걸 시집을 읽으면서 느꼈다.
“쌍문역에서 집까지 역에서 나오며 휴지통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줍는다. 과거, 현재, 미래를 종이 위에 적는다. 재미를 섞고 노래를 부르고 얘기를 뒤섞는다. 이들이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려 하는군. 향기도 나네. 마음 집개로 요놈 조놈 위치를 바꾸어 보고 마음에 차지 않는 놈은 집어낸다. 그러다가 소파를 만난 때도 있다. 수유리로 열린 골목에서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석동을 만날 때도 자주 있다. 안델센은 늘 뒤처져 걸으며 한글 책을 더듬더듬 읽는다. 마아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도 같이 걷는다. 내 아파트 내 동호에 와서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를 때쯤 모두들 어디 가고 시 한 편이 되었어! 아니?”
신현득은 길을 걸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하루 운동하러 가는 시간, 돌아오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생각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이 많은 시간이 있는데도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시를 못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강의 시간에 강의를 하고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엔 준비를 해도 집에서 강의실까지 오는 동안, 산에 오르는 동안, 잠들기 전 시 쓸 시간은 무척 많다. 그 동안 시를 생각 않는 건 시간 낭비다.
2012년 8월 8일(수) 매일신문 특집 기사 ‘나의 살던 고향은’에 실을 사진을 촬영하였다. 신홍식씨 차를 타고 상주 사벌 덕골로 갔다. 매일신문사 기자와 만나서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구미에서 취재할 일이 생겨 구미에 다녀서 덕골로 오겠다고 했다. 신홍식씨 차를 타고 국우 터널을 지나 화달리 사벌 왕릉, 정기룡 장군을 모신 충의단, 사벌면사무소를 지나 덕골로 갔다. 정자가 있는 나무 그늘에서 매일신문 기자를 기다렸다. 내가 살던 마을 저수지에서 못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황새골 조상의 묘가 있는 데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사벌초등학교에 가서 정문에 서 있는 향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2012년 9월 13일(목) 안영선 동시집 <독도야, 우리가 지켜줄게>가 2012년 3분기 우수도서로 선정 되었다. 추모 특집으로 ‘여영택의 인간과 작품 세계’를 쓸 작정이다.
2012년 10월 27일(토) 선산중고등학교 부지에 여영택 시비를 세웠다. 위치도 좋고 모양도 좋았다. 주최측 인사, 경과보고, 약력 소개, 축사 순서로 진행됐다. 이원성 견일영 정휘창 나 4명이 참석했는데 대표로 정휘창씨가 축사를 했다.
2012년 12월 1일(토) 권영주 동시집 <발맞추어 둥둥둥 > 출판기념식. 북구 문화예술회관에서 이영태 한비문학 회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김원중, 허형만, 서정윤 등이 초대 문인으로 참석했다. 이 책에 내가 발문을 썼기 때문에 나도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2013년 3월 30일(토) <오늘의 동시 문학상> 시상식. <오늘의 동시 문학>지 창간 10주년 기념 잔치이다. 제12회 <오늘의 동시 문학상>을 혜암아동문학회 회장 박승우씨가 받는다. 혜암아동문학회에서 김성민 총무, 김규학 부회장 등이 축하하러 갔고, 대구아동문학회 총무인 김종헌과 회원인 박방희씨도 참석했다. 박경용, 김종상, 김완기, 정용원, 정두리, 서재환, 김진광 등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서 고맙다. 박승우씨가 <오늘의 동시문학상>을 받고 수상자 소감을 말할 때 ‘처음으로 아동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어서 고맙다고 내 이름을 들어 주어서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었다. 뿌듯하게 생각했다. 박승우, 김성민, 김규학은 자고 나는 서둘러서 내려왔다.
2013년 9월 13일(월) 신홍식씨 사회복지상 대상. 동시집 <우리 선생님>을 내고, 이어서 사회복지 대상을 받는 영광을 맞이했다. 신홍식씨는 '찾아가는 쌀 배달 아저씨'로 불린다. IMF 경제 위기로 운영하던 컴퓨터 부품 사업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 '어려울 때 돕고 사는 것이 진짜 돕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1999년 2월부터 저소득층 10가정에 쌀을 직접 전달하기 시작해 현재 60가정에 쌀을 지원하고 있다. (사)아트빌리지 대표이사이기도 한 그는 차세대 젊은 화가들을 위해 17명의 작가들에게 오피스텔을 무상 임대해 창작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고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재정 지원, 중견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대구문인협회, 아동문학가협회 등도 지원해 청소년 예술 활동 활성화에 기여했다.
2014년 2월 28일(금) 박인술, 김몽선 별세. 대구아동문학회 회원 두 사람이 같은 날(27일)에 돌아가셨다. 박인술씨는 오래 전부터 사람을 몰라본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쉽게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은 안 했다. 오래 전부터 동인회 활동을 함께해 왔다. 원화여고 교사로 정년퇴임을 했다. 승진이나 돈에 욕심이 없고 순수했다. 나이가 나보다 11살 위이다. 나이 차이가 있어도 거리감 없이 가까이 사귈 수 있었다. 근 10년 대구아동문학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구아동문학회회지에 추모 특집을 하면 내가 쓸 작정이다. 장례식 때 조시를 내가 쓰기로 했다. 김몽선씨는 시조시인으로 대구신천초등학교 근무할 때(1966년) 만났다. 작품도 잘 쓰고 작품평도 잘 쓴다. 예의바르고 의리가 있는 본받을 사람이었다.
2014년 12월 14일(목) 김현숙 동시집 <특별한 숙제> 출판기념회. 오늘 밤 7시에 뉴욕뉴욕에서 열린다. 축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작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이기 전에 인성이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생활이 따로 있고 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문학이 있다. 문학 작품을 밤새워서 쓰고 문학 공부를 하는 것은 삶을 보다 바르고 값지게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을 뛰어나게 잘 쓰는 것보다 작품은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값지게 사는 것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다. 문학하는 사람 중에는 둘 중 한 가지가 더 돋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 <특별한 숙제> 동시집을 출판한 김현숙씨는 인간성도 좋고, 작품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성과 작품을 관련시켜서 6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자신의 자화상이다. 겉모양보다는 향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작품 ‘모과’. 둘째 사랑 즉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 곤충, 동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푼다. 작품 ‘깜짝 파티’ 셋째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다. 작품 ‘손발 빌려주기’, ‘이상한 휴가’, ‘군불’ 등 (생략)
2015년 4월 16일(목) <최춘해 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이 150권 택배로 왔다. 150권은 출판사에서, 내가 이름을 보낸 사람에게 기증을 하고, 150권은 나한테 보내달라고 했다. 225쪽이라서 부피가 있고 무게도 있어 보인다. 내 문단 생활을 정리하는 책이 될 것이다. 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만나서 기증할 작정이다. 머리말 중에서 한 부분을 책 앞표지에 나타낸 것이 독자들에게 인상적일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은 농부였다. 평생 흙과 더불어 살다가 돌아가셨다. 흙처럼 거짓말할 줄 모르고 항상 낮은 자세로 남에게 양보하면서 적은 것도 이웃과 나누고 싶어 하셨다. 못 배우고 늘 낮은 데서 사셨지만 많이 배워서 유명한 것보다 흙처럼 정직하고 순수하게 사신 어머니가 존경스럽다. 흙과 같은 어머니 품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흙이 그냥 좋다.’
2015년 10월 24일(토)
오후 3시에 대구서부도서관에서 대구경북아동문학인 모임이 있다. 현재 대구문협 부회장을 맡고 있는 심후섭씨가 몇 달 전부터 이 모임을 주선했다. 카페도 만들어 놓고 자기소개를 카페에서 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아직은 시작이라 글을 올린 사람이 심후섭 한 사람뿐이라서 내 소개를 올렸다. 대구아동문학회 카페 회원 프로필 난에 올렸던 걸 복사해서 올렸다. 서부도서관 시청각실에 도착하니 좀 일렀다. 명찰을 받아서 목에 걸고 자리에 앉았다.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게 개회를 했다. 개회 및 사회는 심후섭씨가 하고 대구아동문학회장인 권영세씨가 이 모임을 갖게 된 취지를 이야기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의 어떤 목적을 위한 모임이 아니고 순수한 모임임을 강조했다. 김종헌씨가 ‘대구경북 지역 아동문학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자료를 동영상으로 보이면서 설명을 했다. 여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많았다. 자료를 알뜰히 수집한 김종헌씨가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한 시간 이상 강의를 했다. 다음은 소백동인회, 영남아동문학회, 새바람아동문학회, 대구아동문학회, 경북아동문학회 별로 회장이 나와서 회를 소개하고, 개인별로 자기소개를 했다. 낯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2015년 12월 27일(일) 김영란 제3 동시집 <나바라기> 발문 부탁을 받고 나서 한 달쯤 지났다. 책을 내기가 바쁘다고 하면 서두를 텐데, 틈나는 대로 써 달라고 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음 주일쯤 본인한테 메일로 보낼 작정이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머리에 첫 동시집과 달라진 점을 밝힐 작정이다. 김영란 동시집 <나바라기>를 2016년 6월 25일에 받았다. 동시집 뒤표지에 발문 일부를 옮겨 놓았다. ‘이번 시집에서는 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말의 묘미를 다룬 시가 여러 편 있고 이 시집의 전편에 말을 절제하고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2016년 11월 12일(토) 박승우 제3 동시집 <말 숙제 글 숙제>가 학이사에서 출판됐다. 모친의 89세를 기리기 위해서 동시집을 냈다고 한다. 박승우 시인은 1962년에 나서 2005년에 대구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을 했다. 43살에 등단을 했으니 좀 늦은 편이다. 늦었지만 정진을 해서 짧은 시간에 많은 공을 쌓았다.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9년 푸른문학상 당선, 2011년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자, 2012년 대산창작기금 수혜자, 2012년 동시집 <백점 맞은 연못>이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고, 2013년 제12회 <오늘의 동시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둘째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 출간, 2015년 동시 ‘축구공’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2016년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로 김장생 문학상 대상 수상을 했다. 2015년에는 아드님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런 상이나 창작지원금들은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이고 지원금이기 때문에 경합이 매우 세다. 실적을 올렸으면 자랑도 하고 자만해질 수도 있는데, 박 시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 1914년 11월에 나온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에도 그 많은 수상과 창작지원금 수혜자 등은 하나도 적지 않았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다. 아드님이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도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인데 전혀 자랑을 안 한다.
2017년 1월 26일(목) 노남진이 <최춘해 동시 연구> 논문으로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의 결론 부분 일부를 옮겨 본다.
“최춘해는 1967년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을 동시와 동화 평론을 쓰면서 아동문학을 위해 활동했다. 고향인 상주의 자연과 문학적 배경은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흙을 소재로 한 작품 활동의 토대가 되었다. 아동문학 활동이 우리나라의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했던 대구 경북은 1957년 ‘대구아동문학회’를 결성하면서 이를 축으로 지역의 작가들이 활동하게 된다. 교사로서 학생들의 글짓기를 지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춘해는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를 시작으로 ‘대구아동문학회’ 회원과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연간집을 내고 누리집을 개선하였다. 그 외에도 ‘상주아동문학회’ 등과 활동을 통해서도 본인의 작품 활동 및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경북아동문학회’ 창립 회원과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좋은 읽을거리를 어린이들에게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옛이야기 들려주기를 통해 우리의 얼을 이어 주고자 하였다.” (이하 생략)
2017년 2월 17일(금) 박영옥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동시집이 나왔는데 책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4시쯤 동시집 <사실은 말이야>를 10권 가지고 왔다.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흰 바탕에 깔끔하게 장정이 돼 있다. 머리말에 ‘최춘해 선생님 덕에 동시를 배워서 고맙다는 내용을 썼었는데 학이사 출판사에서 그런 내용은 빼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첫 동시집이기 때문에 박승우씨의 발문을 붙이는 게 좋겠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출판사에서 하지 마라고 해서 안 붙였다고 한다. 4부 중에서 1부를 읽어보니 요즘 내가 받은 동시집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작품이 좋다고 칭찬했다. 삽화 표지화도 박영옥 본인이 그렸다.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2017년 6월 17일(토) 김성민 동시집 <브이를 찾습니다>가 창비에서 출판되었다. 김성민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1년 『대구문학』 동시 부문 신인상을 받고 2012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에 동시 「나비 효과」 외 4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린이 문학평론가 김이구는 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시인은 어린이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순간에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보태어 빛나는 동시를 길어 올린다. 특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낯선 공간을 천연스럽게 펼쳐 보이는 능력이 인상적이다. 어린이 독자들은 밝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를 접하면서 기존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주변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내는 힘을 얻을 것이다.”
2017년 7월 10일(월) 정휘창 동화선집 <밀리미터 학교>가 소소담담사에서 출판되었다. 경북 문경군 마성면 솥골 새터에서 태어나(1928년)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던 중에 일제의 징용을 피해서 고향으로 가서 지냈다. 해방 이후 교원자격 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었다. 이응창, 김성도 등과 함께 대구아동문학회를 창립하고 동화집 <어린이 역사 이야기>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를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동화, 수필, 소설 등을 창작했다.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대구아동문학회장을 지냈다. 원화여중 교장으로 퇴직한 후 지금까지 25여 년 간 대구 수성구 시지동에 있는 증심사에 ‘한재말글산방’이라는 작은 글방에서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책 표지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된 작가의 동화선집, 정휘창 선생님 동화의 강점은 주제가 깊고 그 파장이 크다는 점이다.”
첫댓글 혜암선생님의 일기를 읽으며 한 생을 아동문학의 길로 정진 하신 흔적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정직하시고 꾸준하시며 후학을 위해 아시는 것을 아낌없이 베풀며 정진하신 삶에 숙연해 집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