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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연안의 유물유적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들의 무대는 어느 정도였을까? 저 머나먼 시베리아 땅과 우리 선조들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시베리아 출토 신석기 유물들보다 이른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베리아와 발해 연안, 한반도를 아우르는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 발해 연안과 한반도의 구석기 유물들 과거 역사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옛 사람들이 남긴 문헌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는 문헌 사료를 남긴 시기보다 그렇지 못한 시기가 훨씬 더 길다. 그래서 문헌 사료가 등장한 이후의 역사와 이전의 역사를 구분할 필요성이 생기는데 문헌 사료가 존재하는 시기를 역사시대(歷史時代), 그 이전을 선사시대(先史時代)라고 부른다.
선사시대에는 문헌 사료가 없어 그들의 생활 모습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군집사회(band society), 부족사회(tribal society)], 사용한 도구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이 중 도구로 분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도구로 분류하는 방법 중에서는 덴마크의 고고학자 톰센[C.J.Thomsen]의 도구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Stone Age), 청동기시대(Bronze Age), 철기시대(Iron Age)로 나누는 세시기 분류법(Three Age System)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중 석기시대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석기를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구분한다. 구석기시대에는 타제석기(打製石器; 뗀석기)를 사용했고, 신석기시대에는 마제석기(磨製石器; 간석기)를 사용했다.
타제석기는 돌에 충격을 가하거나 큰 돌에서 조각을 떼어 내어 원하는 형상으로 만든 석기를 말한다. 마제석기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형상으로 만든 석기다. 인류 역사에서 도구 제작 벙법이 타제 방식에서 마제 방식으로 발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나 될가?
이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발전한 시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현재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들만 살펴보면 구석기 유물들은 약 60만년 전의 것까지 출토된다. 하지만 신석기 유물들은 기껏해야 6천년 전까지밖에 소급할 수 없다.
이는 돌을 떼는 방식에서 가는 방식으로 진화하기까지 60여만년의 시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현재의 눈부신 문명 발달 시간으로 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시대 인류의 조상들, 즉 원인(猿人)들의 뇌용량은 현대인들에 비해 아주 작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사로 확대시키면 구석기시대의 시작은 훨씬 이르다. 인류 최초로 석기를 사용한 원인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라고 하는데, 이들이 사용한 최초의 석기는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으로 약 26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호모 하빌라스는 약 150만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진화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자신들이 살던 지역의 기후가 변동하자 살기 좋은 지역을 찾아 이동하는데 그 중 일부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프리카에 살던 원인들이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곧 지구의 기후 변화 때문인 것이다. 북경원인(北京猿人)이 바로 호모 에렉투스로서 불을 사용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약 20만년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qiens)가 출현하고 이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재 인류가 비슷한 수준의 뇌용량을 갖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던 시기는 기후의 변동이 심했고 또 오늘날에 비해 추운 기후여서 빙하기(氷河期)가 있었다.
이들 역시 살기 좋은 기후를 찾아 이동하게 되는데 마지막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육지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육로는 호모 사피엔스뿐 아니라 살기 좋은 기후를 찾아 이동하는 많은 동물들의 이동로이기도 했다. 이 동물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식량이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했다. 발해 연안과 한반도 지역에는 호모 에렉투스는 물론 호모 사피엔스도 살고 있었다. 이는 이들 지역에서 출토되는 구석기시대 유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는 구석기인들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졌었다.
실제로는 1930년대에 이미 함경북도 종성 동관진(憧關鎭)에서 동물뼈 등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한반도에는 구석기인들이 살지 않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식민사학자들이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 들어서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이런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했다.
만주 지역에서는 1963년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언도현 석문산촌(石門山村) 동굴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포유동물 화석이 발견됨으로써 만주 지역에도 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이를 필두로 만주 지역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약 20여곳이나 발굴되었다. 1974년에는 북경대학교에서 요동반도 영구현(營口縣) 금우산(金牛山) 동굴 유적을 발굴했다.
이 유적의 맨 아래층에 위치한 전기 구석기시대층에서는 포유동물 화석을 비롯해 인류가 사용하던 석기와 불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개골과 사지골 등 한사람분의 완전한 인류 화석이 발굴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유골은 북경원인으로 불리는 북경 주구점(周口店) 인류 화석과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금우산 유적을 주구점 유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보고, 북경원인과 비슷한 50만~2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하부층에 대한 우라늄 측정 결과 약 27만년 전후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1978년 중국 요녕성 본계시(本係市) 묘후산(廟後山) 남쪽 석회암 채석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동굴 유적은 북경 주구점 동굴 유적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어 주목된다. 묘후산 유적에서는 호모 에렉투스 단계의 견치(犬齒) 화석 1과와 포유동물의 동물상(動
物相)이 발견되었는데, 견치 화석은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과 연관성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동물상 또한 북경 주구점 동물상과 비슷하다.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북경원인(北京猿人)과 같은 인류가 만주 지역에도 살고 있었다고 판단할 만한 개연성은 충분한 것이다.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의 동아시아 분포와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묘후산 유적에서는 또 호모 에렉투스의 한 단계 뒤인 호모 사피엔스 단계의 어금니 화석 1과와 팔뼈 와석 한 토막도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구석기인들이 오랜 세월 생활하던 지역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발해 연안에서는 더욱 이른 시기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다. 중국 하북성 니하만(泥河灣)지구의 동곡타(東谷陀)와 소장량(小長梁) 등의 전기 구석기 유적들은 약 1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황하 중류에서 발견된 남전(藍銓) 구석기 유적은 약 80만년 전의 것이다. 다음은 한반도를 살펴보자.
1930년대에 종성 동관진 유적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기존 학설은 1960년대 들어 만주 지역과 한반도 각지에서 구석기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무너졌다. 1966년에 발굴된 평양 상원의 흑우리(黑偶里) 상원강 기슭 우물봉 남쪽 절벽에 위치한 검은모루 동굴 유적에서는 60만년~40만년 전의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쥐, 토끼류를 비롯해 아열대, 열대지방에 사는 원숭이, 코끼리, 끜쌍코뿔소, 물소 등의 동물상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이 시기 한반도가 열대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검은모루 동굴 유적의 출토 동물상 중에는 북경 주구점의 화석 동물상돠 비슷한 것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또한 1978년에는 경기도 연천군 진곡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들에 대해서 요녕성 묘후산 유적 발굴 조사단은 묘후산 출토 석기들과 같은 제작 수법이라고 밝혀 주목된다. 이는 요녕성 묘후산에 살던 구석기인과 한반도 전곡리에 살던 구석기인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경 주구점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포괄하는 발해 연안에서 유사한 형태의 원인 화석과 동물상 화석들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아득히 먼 옛날 이 광활한 지역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같은 성격의 인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그 시절 같은 성격의 원인들이 북경과 만주, 한반도하는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삶을 영위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살던 구석기인들은 우리들과는 직접적인 혈통관계가 없다. 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는 후기 구석기시대인 약 5만~4만여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이전의 원인들과는 달리 정교한 석기, 골각기를 만들어 내었을뿐만 아니라 벽화 등 예술 작품까지 제작해 새로운 후기 구석기문화를 창조해 내었다.
이들이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에 분포하는 것은 이들이 이동 생활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관련해 1981년 요동반도 해성현 소고산(小孤山) 선인동(仙人洞) 동굴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이빨 및 다리뼈 화석이 다른 많은 종류의 포유동물 화석, 석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그리고 요동반도의 금우산(金牛山) 유적과 묘후산 유적에서도 후기 구석기시대 화석이 발견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주로 대동강 유역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된다. 북한의 덕천 숭리산 동굴에서는 두개 층에 걸쳐 인골의 턱뼈가 발굴되었다. 이 인류의 생존연대는 4만~3만여년 전으로서 우리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판단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두개골의 뇌용량은 평균 1400cc로서 현대인과 동일한 수준이다. 숭리산 동굴 외에 평양 부근의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과 화천동 동굴 유적에서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단계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발해 연안 일대에서 발견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인류 화석은 우리 민족의 부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신석기인들의 역사 공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하는 후기 구석기시대를 지나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인류의 모습은 획기적으로 변화한다. 농경이 시작되는 것인데, 이는 선사시대를 석기 제작기술사에 따른 분류가 아닌 경제사적인 분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차일드(Vere Gordon Childe)는 구석시시대를 식량 채집경제단계, 신석기시대를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단계로 나누고, 산업혁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큰 비약이라며 신석기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이동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질적인 전환을 이루는 농업혁명의 시기가 신석기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시대가 곧바로 농업혁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신석기시대의 주요 유적들이 대개 강가나 바닷가에 분포하는 것은 이들이 농경보다는 어로 등을 더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들 지역의 신석기인들은 채집과 사냥을 계속하다가 어느 시기엔가 농경을 시작해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조개무지 유적과 집자리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조개무지 유적은 신석기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개껍질을 비롯한 쓰레기들을 같은 곳에 묻은 결과 생긴 것이다.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 유적과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 유적 등에서는 조개무지 유적 외에 신석기시대의 집자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집자리 유적은 정착 생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과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 등이 바로 조개무지 유적이 아닌 집자리 유적이다. 이런 곳에서 출토되는 토기 등의 유물들로 신석기인들이 농사나 사냥 등 여러가지 생산활동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 또는 조 등의 재배곡물이 석제 농기구와 함께 발굴되었으며,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에서는 돌가래[石椒], 뿔가래[骨椒] 산돼지 이빨로 만든 낫과 같은 농기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농경생활을 영위했음을 말해준다. 또 가락바퀴나 뼈 바늘이 출토되는 것은 의복을 짓거나 그물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신석기인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신석기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지금가지는 시베리아 기원설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왔다.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와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동일 계통으로 인식된데 따른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표지유물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그 명칭 자체가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c)을 직역한 것으로서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인들도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939년 일본의 황산장삼랑(煌山將三郞)이 우리 나라 빗살무늬토기의 유입 경로를 시베리아->연해주->동북 지역->남해안 지역->서해안 지역의 순으로 전파된 것으로 발표했고 이것이 계속 학계의 정설로 통해 왔다.
그러나 시베리아 기원설이 맞다고 해도 그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할 수 있다. 특히 바이칼은 신석기인들의 이동 경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지역에 살던 흉노족(匈奴族)이 바이칼을 지칭할 때 사용한 '텡기스'라는 말은 '천지(天地)'란 뜻이다.
바이칼 지역의 기하문 토기는 북만주의 송화강과 눈(嫩)강 유역 등에서도 나타나며 동심원과 사냥 장면들이 주로 표현된 이 지역의 암각화(巖刻畵)는 한반도 남부의 암각화와 매우 유사하다. 바이칼에 살던 신석기인들의 한 갈래는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 지역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몽고 초원을 경유해 중국 동북부 발해 유역과 중국 서북부 등으로 남하하는 것이다.
시베리아 기원설과 함께 그 이전부터 발해 유역에 살던 신석기인들의 존재 여부도 주목된다. 최근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시베리아의 신석기 유물들보다 이른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발해 연안과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시베리아 계통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이 지역에 살고 있었음과 스스로 신석기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말해준다.
즉 이동설 외에 자체 발전설도 설득력이 있는 상황이다. 1970년대에는 발해 연안 서남부 황하 하류와 발해 연안 동북부 요하 하류 등에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발해 연안의 요녕성 적봉(赤峰)시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심양(瀋陽)시 신락(新樂)유적 등에서 출토된 신석기 토기는 한반도의 토기 문화와 동일 계통으로서 이는 발해 연안과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같은 성격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시작은 대략 기원전 3000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요하(遼河) 하류의 산락문화와 요동반도 남단의 광록도(廣綠島)에서 발견된 소주산(小珠山)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5500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동성뿐만 아니라 자체 발전설도 힘을 얻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과거에는 신석기문화의 상한을 대략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했으나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 및 양양 오산리 유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의 결과 최고 기원전 6000년경까지도 올려 잡을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표지유물인 빗살무늬토기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약 기원전 4000년까지로 비정할 수 있다. 이는 발해 연안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의 신석기문화보다 앞서 발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동설과 자체 발전설이 꼭 대립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신석기인들은 씨족 단위로 생활했고, 아직 씨족사회 내부에 지배, 피지배의 신분관계가 발생하지 않은 평등사회였다. 씨족 내부는 경쟁이나 대립보다는 상호협조나 부조의 관계였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씨족은 물론 개인의 생존이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던 것이다.
이 시기 신석기인들의 지배, 피지배의 신분관계가 아니었던 만큼 이동설과 자체 발전설도 서로 대립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차차 계급이 발생해 평등했던 인간 사이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면서 그 모습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호부조의 전통이 붕괴되어 개인과 집단이 치열한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되었고, 경쟁에서 승리한 개인과 집단은 지배계급으로 상승한 반면, 패배한 개인과 집단은 피지배계급으로 하락했다.
신석기시대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계급분화는 청동기시대가 되면 확고한 제도로서의 계급으로 자리잡게 된다. 계급의 발생은 신석기인들의 생산을 촉진시켰다. 물론 계급 발생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석기인들은 자연의 힘을 절대시해서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 중 으뜸가는 숭배 대상은 태양이었고, 이는 북방 종족들의 공통된 사항이기도 했다.
암각화의 동심원도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생존의 의미이기도 했다. 신석기인들은 사람의 육신(肉身)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의 사상 또한 갖게 되었는데 이는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증보자로서 무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이 널리 유행했다. 죽음에 대한 의문과 삶에 대한 자각이 종교와 신앙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에 계급과 종교가 발생하면서 인류 역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출처; 휴머니스트(humanist) 版 '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해설;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