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노동관
원철/ 팔공산 은해사
1.들어가는 말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불교는 늘상 시대와 상황에 다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체계화시키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노동관 역시 그러하다. 원시불교시대에는 불살생계不殺生戒와 무소유에 바탕을 둔 철저한 무노동의 원칙을 고수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참선불교 시대가 되면서 노동을 통하여 교단의 경제적 자립은 물론 노동을 통한 수행이 보편화된다. 출가자도 역시 일을 통해서 수행과 사회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는 정신적 노동으로 사회에 동참하는 인도불교와는 확연한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출가자와는 별도로 재가자의 정당하고 올바른 노동을 통하여 부의 축적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 재물을 베푸는 보시행布施行를 통하여 재산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갈망을 버리게 하여 수행과 동시에 부의 사회적 분배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관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원시불교교단의 출가자는 육체노동을 할 수 없었다.
원시불교 교단에서는 출가자의 노동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생활의 목표가 수도하는데 있고, 출가자들은 걸식으로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이 고대인도의 사회풍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는 곳도 나무아래 혹은 바위 위 그리고 동굴 속이었으며, 열대지방인 까닭에 나무열매를 언제든지 얻을수 있으므로 무소유가 원칙이었다. 이러한 무소유 무육체노동의 원칙은 정신적 노동의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종자요, 지혜는 내가 밭가는 보습이며, 매일 입으로 짓는 허물, 몸으로 짓는 허물, 생각으로 짓는 허물을 제거하니 이는 곧 내가 밭에서 김매는 것이다.”라고 하여 황폐한 땅을 농부가 경작하듯 출가자는 마음의 밭을 경작하여 정신적인 경제의 참여로써 국가사회에 이바지함을 설파하였다. 출가자들이 본래 일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의 제1조 때문이다. 땅을 갈고 파면서 혹시나 벌레나 곤충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지 않을까 염려해서 논밭을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3 중국의 백장선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는 열대지방이던 인도에서 4계절이 뚜렷한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상황이 변하게 되었다. 추위를 막기 위하여 두터운 옷이 필요했고, 불을 때야하는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먹을 것도 미리 준비해두어야 했다. 그리고 사찰이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신도와의 연계성이 없어지고 자급자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백장스님은 승려들로 하여금 하루의 일부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아 주로 자신의 노동으로 살게하고 부차적으로 시주를 받게하는 ‘시주와 자급자족’의 병행형태로 사찰을 운영하는 방식을 택했다. 스님 역시 스스로도 열심히 일했다. 90살이 넘은 말년에 제자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노동에서 빠지기를 권유하였으나 듣지않자 연장을 감추어 버렸다. 절에서는 연장 하나하나에 개인의 이름표를 달아서 자기가 관리하도록 되어있다. 이에 스님은 사방으로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자 단식을 했다. 제자들은 할 수 없어 연장을 제자리에 갖다놓았고 단식은 그쳤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장청규를 만들어 승려는 누구나 매일 어떤 종류이건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원칙아래 교단의 경제자립이라는 전통이 확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노동에 대한 주장은 정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즉 이는 노동을 통해서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내심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후로 출가자의 노동은 보편화되었다.
4.한국 혜월선사의 경제논리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인 경허선사의 으뜸가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혜월선사는 일제시대의 스님이다. 뙤약볕 아래에서 얼굴이 그을도록 논밭을 일구고 짚신을 삼고 빗자루를 매면서 소박한 일상생활 가운데 참선공부를 하면서 살았다. 부산의 선암사라는 절에 계실 때 좋은 논 다섯마지기를 팔아서 산중의 논을 개간하였다. 여러달만에 겨우 세마지기를 개간하는데 그쳤다. 다섯마지기를 팔아서 개간을 했으면 적어도 일곱여덟마지기로 늘어나야 하는데 겨우 세마지기밖에 개간하지 못한 것은 일꾼들이 일하다가 게으름이 나면 스님께 법문을 해달라고 조르는 탓이였다. 그리하여 시간가는줄 모르고 법문을 들려준 까닭이다. 가난한 절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해서 벌인 개간사업이 결과적으로 사찰의 재산을 축낸 꼴이 되어 함께 살던 스님들의 불평이 이민저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혜월스님은 한마디 하였다.
“이 소견머리없는 사람들아! 논 다섯마지기가 어디 갔더냐? 어느 누가 농사를 짓던간에 다섯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세마지가 더 늘어나지 않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이처럼 도인의 세계에서는 너와 나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네것’ ‘내것’이라는 소아적 이해타산이 없고 온 인류가 일가를 이루는 법인 것이다.
5..재가신도는 정당한 노동을 통해서 재산을 모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재가신도들에게는 적극적으로 현세의 재물을 존중할 것을 설하고 있다.
상인은 오전 대낮 그리고 오후에도 열심히 일하면 재산을 얻을 수 있고 또 얻은 재산을 늘일 수 잇다고 하여 열심히 일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부의 축적을 위해서는 소비를 가능한 한 작게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정신자세로써 사치와 향략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하여 소비를 막고 있다. 「상가라에의 가르침」에 보면 술 등 나태의 원인이 되는 것, 때가 아닌 때에 거리를 돌아 다니는 것, 연극하는 곳과 무용하는 곳을 출입하는 것, 나쁜 벗과 사귀는 것, 도박 등을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대지도론」에서는 일체 악행의 근본을 궁핍에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그 생활이 풍요하면 인간사회에서 악한 행위가 사라지고 생활이 궁핍해지면 악이 자행되어 사회와 국가가 혼란에 빠진다고 하여 “재물과 수입의 지출을 알아서 균형잡힌 생활을 하고 지나치게 사치에 빠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에 떨어지지도 않게 한다.‘고 하였다. 재산은 자기도 남도 괴롭히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재산의 올바른 분배법을 「중아함경」에서는 ”수입을 4등분하여 4분의 1은 생계비에 충당하고, 또 4분의 1은 생업을 경영하며, 4분의 1은 저축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나머지 4분의 1은 경작자나 상인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받아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살생을 하는 직업이나 도둑질 그리고 무기 판매, 술집, 고깃집, 마약 등 독극물 장사 등은 직업으로 가지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종사해서는 안될 직종을 제외하고는 바른 행위를 하는 한 직업의 귀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직업관이다. 특히 재물을 구하기 전에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먼저 기술을 배우고 난 뒤에 재물을 구하라. 먼저 재주를 익히고 그런 후에 재물을 구하라. 재물을 이미 갖추었으면 마땅히 스스로 지킬지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직업 및 노동관의 원칙은 첫째. 금욕적이면서 부지런히 일하려는 정신을 지닐 것, 둘째. 능력있는 기능인이 될 것, 셋째. 정당한 법에 의하여 재산을 모울 것 등이다.
이렇게 재와 부는 재가자에게 인정되고 장려되지만 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갈망은 경계하고 있다. 즉 물질의 축적과 아울러 정신의 축적을 병행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5.주인마음으로 살자
섬유수출회사에서 10여년 동안 열심히 근무하던 회사원이 있었다. 회사가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회사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결국 혼자 회사 일을 도맡다시피하게 되자 회사 실무는 물론이며 경영, 망한 회사 정리법까지 익히게 되었다. 드디어 사장까지 손을 떼면서 그에게 회사를 한번 맡아보라고 하였다. 다 배운 일이라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 처분하지 못한 몇가지 시설을 양도받아 회사를 혼신을 다하여 새로 시작했다. 마침내 회사는 정상화되었고 예전보다 더 많은 매출액을 내는 성공을 이루었다. 갓 입사한 조카가 그 비결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오래 몸 담았던 회사의 공경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주위의 욕과 비난을 들으면서도 회사를 지켰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바로 주인 마음이더구나. 잘되면 붙어있고 못되면 나간다는 것은 남의 집 사는 객의 마음이야. 설사 못되서 어려워도 버리지 못한 주인마음 때문에 내가 그때 결국 사장이 된 것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회사에서 일을 하자면 꼭 그러한 주인이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혹 이것이 남의 회사라는 생각으로 소홀함이 없었나를 항상 살피고 맡은 바 자기일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6.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
내가 곧 주인이라는 생각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자비심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혜월스님 처럼 소유자로서 누가 농사짓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논 다섯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세마지가 늘어났다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함을 불교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노동은 생산활동일 뿐만 아니라 또다른 수행방법의 하나이다. 육체적 노동을 통하여 정신적 수행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정신은 불교의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교의 적극적 사회참여 의지를 읽을 수 있겠다.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매개체로서 일을 즐겨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인정신으로 연결된다면 이 사회와 국가의 한 켠을 밝혀가는 주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전체적인 입장에서 모든것을 볼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연기적 관계에서 사회와 소통하며 참여할수 있는 주인정신으로서의 주체자가 될수 있는 삶 ...감사합니다
노동은 생산 활동일 뿐 아니라 또다른 수행방법의 하나라는 일석이조의 불교의 적극적 사화참여와 일을 즐기면서 하면 힘든 일도 가볍게 할 수 있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