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별이 지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서는 미용실을 다니며 자기 취향에 맞는 곳을 골라 다닌다
나와 같은 동년배 또래 친구들은 어린시절 매월 월중 행사로 머리를 깍기 위해서는 이발소를 정해놓고 어른들과 함께 다니며 깍았고 요즘처럼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는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 또한 그 시절 늘상 아버지께서 데리고 다니는대로 이발소를 정해놓고 따라 다녔다
그 당시 ㅇㅇ 고사동에 있는 ㅇㅇ 이발소였는데 송대관 아저씨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발소에서 기술을 익히고 있었고 매번 방문할때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잘도 불렀다
갈때마다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살갑게 대해 주었고 머리도 잘 감겨 주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어가며 한동안 정이 들 정도로 익숙해져서 친근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이발을 위해 방문 했는데 그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이유를 주인장에게 물으니 어떤 손님(가수 김상희의 남편 유훈근)이 머리손질을 왔다가 송대관님의 노래소리를 차분히 들어 보고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서울로 데려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인연등으로 송대관님과는 이후 내가 성년이 되어서도 교분을 하며 지냈다
그는 '인정만은 아저씨 '라는 곡으로 맨처음 가요계 데뷔를 하였고 이후 그는 해뜰날이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좌절과 절망 고난에 굴하지 않고 그의 오뚜기 인생은 시작되었다
이후 수많은 다양한 곡들을 히트시키며 정상급 가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전성기를 맞고 있던중 돌연 처갓집이 있는 미국으로 팬들의 성원을 뒤로 한채 미국 이민을 결심하고 홀연히 떠나갔다
미국에서는 처가의 든든한 경제력의 뒷받침속에 사업을 시작하였고 1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슈퍼 마켓에 이어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인근에서 최고급 이탈리안 식당을 개설 운영하여 대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늘상 송대관님의 마음은 허전함으로 가득 채워지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10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고
혼자랍니다 정때문에 차표한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네박자등 곡들을 순차적으로 히트시키며 예전의 해뜰날이라는 곡을 히트시킨것처럼 10년의 공백을 무색케하혀 가요계의 기둥으로 우뚝서는 녹슬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서울 용산 소재 그랜드 하얏트호텔 인근 각국 대사관들이 즐비한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어느날 송대관님은 집을 직접 짓고 이사를와 살게 되었고 나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갔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그의 아내가 충남 대천 인근에 아파트 시행사업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업 실패 소식은 전하여졌고 이후 민사 및 형사소송에 연루되면서 그는 벼랑끝으로 내몰렸다
이후 형사적 문제는 억울함에서 풀어났지만 부동산개발과 관련하여 145억원의 빚을 졌고 법원의 10년 회생기간을 불과 2년만에 털어냈다
한편으론 그는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송영근선생의 친손자이기도 하였다
친할아버지 송영근선생은 1919년 정읍 태인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나누어 주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하여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2006년 광복 61주년기념 보신각 타종 행사에도 참석하였다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군림하는등 그는 58년의 가요 활동 기간 동안 우리 가요계의 큰 흔적을 남기고 대중의 큰사랑을 받으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가 생전 보여준 노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송대관 파산했을 때 10억 내어준 가수 김성환 #자기계발 #동기부여
https://youtube.com/shorts/RTpHQeK6xWE?si=HPZt05mwzi34BB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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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ㅡ가수 송대관님을 그리며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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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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