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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영원과 태양 — 내 안에 형상이 있다
단단丹旦 이동용 (철학아카데미)
1. 욕망 대 이성이라는 대립의 형식
인간에겐 손이 있다. 학명 중에도 호모 파버라는 개념이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말의 전제는 손의 존재다. 손이 있으니까 도구가 문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손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손, 그것은 창조의 행위에 동원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파괴를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남을 위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남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노랑무늬영원》 속의 단편 〈왼손〉은 말 그대로 손의 의미에 집중한다. 왼손은 오른손을 전제한 개념이다. 오른손은 옳다는 말을 전제로 한다. 오른손이 옳다는 것에서 유래한다는 말에서 거꾸로 유추하게 되면, 왼손은 그 의미가 이미 옳지 않다는 것에서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영어에서도 오른손은 ‘right hand(옳은 손)’고 왼손은 ‘left hand(잘못됐다는 뜻의 옛말 'lyft'에서 옴)’라고 한다는 사실을 비교해도 좋다. 문제는 둘 다 자신의 손이라는 데에 있다.
왼손도 내 손이고, 오른손도 내 손이다. 그런데 하나는 틀렸고, 다른 하나는 맞다.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의미가 정확히 반대다. 성경에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3-4)라고도 한다. 그럴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자기가 자신을 속일 수 있나? 자신을 속일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은 그럴 수 있다. 성경이니까 그런 말도 말이 될 뿐이다.
한강은 〈왼손〉이라는 단편 소설에서 본능대로 움직이려 하는 왼손 대 이성적으로 움직이려는 오른손의 대결이라는 판타지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왼손은 하고 싶은 대로 하려하고, 오른손은 그런 움직임을 막으려고 애를 쓴다. 생각하는 존재는 이런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다. 비유를 인정하고 읽으면 뭐든지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내 가슴속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다”고 말한 의미를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 두 개다. 원하는 바가 서로 충돌한다. 하고 싶다와 해서는 안 된다가 서로 대립을 일삼는다. 하고 싶은 욕망만큼 그것에 대립을 형성하는 감정도 강해진다. 내면의 대립은 인간의 문제가 된다. 존재의 존재성은 이런 충돌의 현상으로 해석된다. 두 개의 영혼이 있다. 하나는 본능, 즉 욕망을 담당하고, 다른 하나는 그 욕망을 통제하거나 방해한다.
엷게 멍이 든 왼쪽 팔뚝도 보였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오른손으로 움켜쥐어 생긴 상처였다. […]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랑, 180쪽)
얼마나 꽉 잡았으면 상처까지 났을까. 얼마나 갈등이 심했으면 이런 지경까지 갔을까. 왼손은 예측을 불허하고, 오른손은 예측을 불허하는 그 왼손을 붙잡고 통제하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가설을 전제하고 나면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의 공식이 형성된다. 왼손은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고, 오른손은 그 마음을 제어하려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러면 가짜가 진짜처럼 형성되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세계의 공식이 이런 것이다. 개인과 사회가 대립한다. 개인적 의지와 사회적 의지가 대립한다. 어린 아이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훈련을 거듭하게 된다. 이성이 형성되면서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조건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인간이 너무나 이성적인 존재가 되는 대신, 자신이 뭘 원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지고 만다는 데 있다.
이성이 강해질수록, 인간이 잃는 것이 있다. 이성적으로 행하는 인간은 그의 행동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예측을 불허하는 그런 행동을 하는 인간을 두고 우리는 서슴없이 비이성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배타적인 논리로 사람의 삶을 규정할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철학의 문제가 된다. 시킨 대로 하면, 창조는 요원해진다. 명령대로 행동하고 있다면, 그는 노예나 부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주인이 될 수는 없다.
2. 말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왼손
세상은 참으로 신기하다. 누구에게 세상은 재밌는 놀이터 같고, 누구에게 세상은 빠져나갈 길 없는 생지옥 같다. 똑같은 사람에게도 세상은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되어 주어진다. 인간에게 세상은 정말 수수께끼 그 자체 같다.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 이 모든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이유로 인해 복잡해지기도 하고, 또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인해 억장이 무너지기도 한다.
인간과 세상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사람과 사회도 마찬가지의 공식을 적용받는다. 모든 인간에게는 현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각각의 개인의 개인성에 따라 현실은 다르게 형성된다. 나의 현실은 너의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세계는 너의 세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름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똑같은 이유라 해도 사람에 따라 뜻밖의 해결의 실마리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 똑같은 결과로 예상치 못한 행복이 주어지기도 한다.
결혼한 사람의 결혼 생활은 사랑에서 시작하여 행복하자고 다짐하며 형성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인정하고 참고 견뎌주며 생활이 지속될 뿐이다. 환상에서 시작된 사랑 이야기는 현실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본색을 드러내지만,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해석해 줄 뿐이다. 하지만 사랑조차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상대가 필요하고 상대에게도 시공간이 다른 형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만다.
그렇다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하면 사회생활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모든 개인은 그 사람 나름대로 형성된 시공간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사회는 무리 없이 작동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런데 소설 속 화자는 왼손이 너무 나댄다. 왼손이 모든 것을 불안하게 만든다. 결국 그는 병원을 찾아간다. 의사 앞에서 오른손으로 왼손을 들어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어제부터 자꾸만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고 있어요. (노랑, 190쪽)
말을 안 듣는다. 이 말의 의미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한 상태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말 잘 듣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위 착한 사람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존재의 형식이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사회가 선호하는 사람이다.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 사회 안에 있으면 그 사회 전체가 불편해진다. 사회가 안정을 찾는 데에 있어서 급선무는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말은 일종의 법의 경우와 비교해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즉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으로 이해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사회를 힘들게 만든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가 없다. 말을 듣지 않으니 타인과 소통도 불가능해진다.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남의 인생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이 규정되고 만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다.
그런데 그런 존재, 즉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자신의 왼손이다. 왼손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러면 무엇이 힘들어질까. 힘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생각은 이것을 원하는데, 왼손은 이것을 방해한다. 이성은 저것을 하려 하는데, 왼손은 저것을 거부한다.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왼손, 이성적인 상황을 거부하는 왼손 때문에 모든 것이 혼란 속에 빠져버렸다.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아. 이것 때문에 다 엉망이 됐어. (노랑, 197쪽)
왼손 때문에 힘들다. 왼손 때문에 삶이 어려워졌다. 왼손 때문에, 이런 지경이 된 것은 다 왼손이 원인이다. 원망스럽다. 왼손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안타깝다. 왼손도 자기 자신의 손이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딜레마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으면 한계다. 한계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인정하기가 싫다. 비극적인 문제상황이다.
“난 정말 바보였어.”(노랑, 199쪽) 이혼한 여자가 과거를 회상하며 쏟아내는 고백이다. 무엇이 바보짓이었을까? 관계를 회복하려 애를 썼던 것이 바보짓이었다. 어떤 행동이 그녀를 바보로 만들었던 것일까? 그런 의미 없는 관계 회복에 목숨까지 걸었던 것이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었다. 그것은 자기 생각에 갇혀 있었던 때의 상황이다. 생각대로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 바보였다.
관계가 문제다. “관계에 시간이 밴다”(노랑, 29쪽)고 했다. 그런데 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다. 시간이 배어 있지 않은 시간은 과연 어떤 시간들일까. 그것은 의미 없는 시간들이다. 그저 시계 속에서만 한 순간 의미를 취하고서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그런 존재의 시간들이다. 추억이 없고 사랑이 없는 시간들이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 남편에게도 남편의 시공간이 따로 존재한다는, 그 간단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뜻을 따른다. 그 뜻이 기준이 되고, 그 뜻이 불행과 행복의 기준이 된다. 슬픔과 기쁨의 경계가 결정된다. 자신의 뜻이 실현되면 웃고, 그렇지 않으면 운다. 그래서 관계 형성은 기적과 같다. 시공간이 서로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사랑 행위에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대로 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 바보짓이었다.
3. 왼손의 승리와 인간의 한계
관계는 사람 사는 곳에서는 운명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관계를 맺고 살아갈 뿐이다. 관계 속에는 경쟁도 끼어든다. 서로가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 뜻을 펼치기를 바란다. 그런데 각각의 개인이 모두 자신의 뜻을 펼칠 수는 없다. 누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누군가는 자신의 뜻을 접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온 힘으로 엎치락뒤치락하던 한 순간, 울부짖는 비명이 아파트의 정적을 찢었다. // […] 겁결에 칼이 꽂힌 가슴이 흐느끼듯 한차례 떨었다. […] 충혈된 눈가의 끈적이는 얼룩을, 피 묻은 왼손이 어루만져 붉게 물들였다. (노랑, 208쪽)
우물 속의 자신의 영상을 바라보며 괴로웠던 사나이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자화상〉에 나오는 사나이다. 그는 우물 속에서 한 사나이를 발견하고 미워져서 그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가지만 마냥 돌아설 수가 없다. 우물 속에 남겨진 그 사나이가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가 불쌍해서 돌아서지 못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늘 그 사나이는 그 자리로 되돌아 와 확인한다는 내용의 시다.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한강의 소설도 형성된다. 갈등이다. 어쩔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운명이다. 한계다. 필연이다. 우연은 끼어들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비극적이다. 비극적 운명이 삶을 지배한다. 왼손과 오른손이 대결을 멈출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만 한다. 마치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잔인한 싸움을 지속한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든다. 자기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자신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 모순이지만 모순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비명이 터져 나온다. 정적을 채운다. 빈 공간을 가득 채운 그 소리는 비명이었다. 고통의 울부짖음이었다. 아픔이 가득 실린 비극적 울림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정적을 뚫고 나온 긴 비명,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또 다른 정적. 정적과 정적 사이의 그 짧고도 긴 시간에는 호흡이 멈춰버린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숨을 들이쉴 수도, 숨을 내쉴 수도 없는 그런 지경이.
칼이 가슴에 꽂혔다. 어떤 손의 짓일까? 그냥 물 흐르듯이 읽어가다가 다시 몇 줄 위로 시선을 돌린다. 도대체 누구 짓일까? 오른손이었다. 오른손이 과도를 움켜쥐었던 것이다. 과도를 들고 살인을 꾀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려 든 것이다. 오른손이! 옳아야 할 그 오른손이 칼을 쥐었다. 다 끝장내자는 식으로 상황을 종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것이 이성적일까. 질문은 남겨지지만 대답은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다.
피가 흐른다. 피는 몸 안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피는 몸 밖으로 흘러나오면 곧 굳고 만다. 호흡도 마찬가지다. 숨은 들숨과 날숨으로 이어지지만 단 몇 초만 숨통이 막혀도 곧 생명은 위기에 처해지고 만다. 답답함이 극도에 달할 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에 손을 대고 만다. 물론 소설 속 인물이 정말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어 있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충혈된 눈가의 끈적이는 얼룩을, 피 묻은 왼손이 어루만져 불게 물들였다.”
흘러나온 피를 문질러서 그 얼룩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현상을 그렇게 더욱 선명하게 만든 것은 왼손이다.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도 아니다. 흘러나온 피를 피 묻은 왼손이 그렇게 어루만져 피범벅이 되게 했다. 칼을 잡은 오른손의 난동은 예상 밖의 일이었고, 그런 예측 불허의 오른손의 움직임에 저항했던 왼손의 치열한 움직임은 살려고 발버둥치는 욕망의 출현 같았다. 이성이 이겼을까, 본능이 이겼을까. 대답은 없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이성과 비이성, 이성과 감정, 이성과 감성, 이성과 본능 등,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들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은 단일하여 잘 보이는 듯한데, 그 반대편이 다양한 개념으로 흩어져서 잘 안 보인다. 비이성, 감정, 감성, 본능,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새로운 개념의 출현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이성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중세 천 년 동안 학자들은 이성은 신성으로 떠받들며 공부에 임했다. 이제 우리는 이성도 새로운 측면에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성에는 반대편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형식을 깨달아야 한다. 태극의 문양처럼, 그 안에는 악도 있고 선도 있다. 음도 있고 양도 있다. 왼쪽도 있고 오른쪽도 있다. 둘이 서로 함께 하면 극단적인 세계, 즉 태극이 완성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운명이 끼어든 비극적인 현상만 드러낼 뿐이다.
근대 이후 세상 사람들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여전히 그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다. 이성은 잘 아는 듯이 말하는데,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그저 질문에 뒤이어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중세의 버릇이 남아 있어서 타인을 향해 독단을 펼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아직까지 중세는 극복되지 못했다. 현대에 이른 지금까지도 중세의 기세는 여전하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중세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아는 것을 진리라고 간주하는 사람이 가소롭다. 자기가 할 말만 생각하고 고려할 뿐, 상대의 말과 생각과 의견과 판단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는 그 태도가 너무도 잔인하다. 신을 믿는다면서 전쟁을 마다하는 그 잔인성이 사람을 흉측하게 만든다. 이제 이념은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4. 전체의 의미와 시간의 의미
《노랑무늬영원》을 마감하는 단편은 〈노랑무늬영원〉이다. 이 단편이 이 전체 이야기의 제목으로 선택되었다. 그 제목이 형식을 규정한다. 같은 제목이지만, 단편 소설의 제목과 단편 모음집의 제목은 무게가 다르다. 그만큼 이목을 끈다. 도대체 작가 한강은 이 단편 속에 무엇을 담았기에 전체의 이야기를 이끄는 제목으로 이것을 선택했던 것일까? 〈노랑무늬영원〉의 시작 문단이다. “그게 전부다”라는 말로 끝나는 지점까지 생각을 이어가보자.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 있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배 밑을 헤어쳐 갔다. 빠른 속력으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헛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 그게 전부다. (노랑, 211쪽)
“그게 전부다.” 무슨 말일까. 짧게 말했지만, 그 짦음 속에는 긴 여운이 남겨진다. “그게 전부다.” 다른 것은 없다는 얘기다. 그 전부에서 빠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앞의 말은 하나의 문단 나누기로 인해 동 떨어진, 즉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 앞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내 안에 남아 있다”가 된다. 결국 ‘내 안에 남아 있는’, 그것이 ‘전부’라는 논리가 형성된다.
내 안의 것이 전부다! 나의 현실이 있고, 나의 세계가 있으며, 나의 인생이 있다. 나의 의견이 있고, 나의 생각이 있고, 나의 판단이 있다. 인간은 개인이고, 개인은 자신만의 시공간을 취한다. 시공간!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말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두 개의 수수께끼 같은 개념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원리가 형성된다. 지금 이 순간조차 끝없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또 다시 끝없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지나간 세월이 한정된 것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지나간 시간이 일 초, 일 분, 한 시간,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이라고 해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한 순간에 담겨지는 의미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상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자의 〈권학문〉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생각난다. “소년이노학난성 / 일촌광음불가경” 하며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사람은 늙기 쉽다. 소년의 때는 한 순간에 불과할 수 있다. 시간 보내기를 잘못하면 헛된 인생을 살 수도 있다. 물의 표면이 연출해 내는 수많은 반짝임, 잔물결이 보여주는 빛의 축제, 그것은 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지속되는 그 무엇이 된다. 수면 위에 펼쳐진 다양한 현상들, 그것이 기억 속으로 담겨지면 영원의 형식으로 돌변한다. 형식이 형성되고 나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영원에 동참하는 그 무엇이 된다.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이다.
시간의 존재는 수수께끼 같다. 그래서 신화의 인물 스핑크스도 수수께끼를 내는 존재로 등장했던 것이 아닐까. 스핑크스는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냈고, 그것에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인간은 잡아먹었다고 하는 괴물로 설정된다.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사람이다. 사람이 정답인 그 수수께끼를 사람에게 묻는다. 그 정해진 정답조차 알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는 뜻일까.
중세 동안에는 영생이 문제였다. 영원히 사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제 또 다른 형식으로서 영원을 이해해야 할 때가 되었다. 천국에서 펼쳐질 영생을 버릴 수 있는가? 하나님 곁에서 영원히 살아갈 그 행복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질문이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신학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문학으로 전환하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학의 복음 소식은 너무도 치명적이다.
영원에 맞서 영원을 지켜보자. 이것이 인문학의 소명의식이다. 내 안에 빛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빛이 있다. 내면을 밝히는 빛이 있다. 현상이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있다. 사람이 보는 사물이 있다. 무엇이 사물인가? 무엇이 빛인가? 무엇이 현상인가? 질문은 구슬이 되고, 각각의 구슬은 하나의 실에 꿰져야 목걸이가 된다. 마찬가지로 개념들은 논리를 꿰찰 때 인식의 빛이 되어 심연의 어둠을 뚫고 솟아올라 마침내 수면 위에 떠오를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이 신일 수도 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신의 형상일 수도 있다. 내가 응시하는 것이 신의 신성일 수도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 수면 위에 운행하는 그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 수면은 표면이고, 표면은 깊이가 없는 단면에 불과하지만, 그곳에 창조의 주체인 신이 존재한다. 거울 속에 신이 있다. 거울 속의 영상이 신이다. 수면 위에 신이 있다.
물속에서 ‘잔멸치 떼’를 발견한다. 그것들이 발산하는 ‘무수한 은빛의 점들’을 인식한다. 그것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순식간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헛것이 아니다. 헛것을 본 것처럼 보였을 뿐, 그것들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 이런 말들이 이어져야 한다. 그때 인식이 주어진다. 이제 전부다, 라고 선을 긋지만, 그것은 한계에 직면한 정신의 숨 막히는 고백이 아니다.
5. 일상 속의 내가 나를 향해 던진 질문
아폴론의 신전에 적혀 있었다는 명언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이다. 인간에게 던져진 영원한 숙제이다. 수천 년을 지나면서도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단 여섯 개의 글자의 조합이지만, 그 글자들이 합쳐지면서 연출해 내는 시공간은 영원을 꿰뚫으며 이어진다. 인식만이 남는다. 남겨진 그 인식이 영원의 공식 속에 담긴다. 인식이 남긴 그 말 한마디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의 존재성을 밝힌다.
영원하다. 우리는 이런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중세 천 년을 거치면서 우리 모두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지경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지성의 공식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제 지성의 틀 안에 갇힌 자신의 존재의 존재성을 구원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자신을 향해 자신을 내용으로 하는 질문을 형성해 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때 자신은 자기를 위한 구세주가 될 뿐이다. 자기가 자신을 구원한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거기 서서 열차를 기다렸던 사람은, 정말 나였던가? (노랑, 215쪽)
이게 정말 나야? 중요한 질문이다. 이게 나란 말인가? 소설 속 질문은 과거의 시제로 형성되었다. 이게 나였단 말인가? 과거가 형성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시간이 보내졌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가 과거로 인식되고 나면, 현재가 문제될 수 있다. 자신이 있던 곳이 ‘거기’로 명명될 수 있고 나면, 지금 자신이 있는 ‘여기’가 문제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복잡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들려준다. 믿으면 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말은 지양한다.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는 영원한 숙제이면서도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목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멀기만 하다. 별빛처럼 보일 뿐이다. 가까이 가기가 너무도 어렵다. 울어도 소용없다.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가 없다. 천사가 있어서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있어서 그를 믿으면 다 된다는 식의 논리는 인문학에서 성립되지 못한다. 이게 정말 나야? 질문은 영원하고, 대답은 무궁무진하다. 이게 바로 나다, 하고 단정하는 순간 이미 생각은 틀에 갇히고 만다. 틀에 갇힌 의견의 주체가 되고 만다. 그런 생각은 생각하는 존재의 한계가 된다. 한계에 직면한 정신은 늘 한결같다. 상대를 향해 바른 소리를 쏟아내지만 그 바른 소리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
일방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바른 소리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법의 조항조차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영원한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서 현상이 문제가 된다. 현상을 연구했던 현상학은 그래서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이렇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공간이 달라지면 또 다른 현상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지경이 펼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나로 남는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이다. 끝도 없이 과거가 형성되고 있고 또 동시에 끝도 없는 미래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이런 말들을 자신이라는 개념으로 변경해서 공식을 바꿔보자. 자신은 자신이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자신으로 남는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자신 그 자체는 변화 속에 존재한다. 나의 나다움 그 자체는 변화 속에서만 인식된다. 간단한 주장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신학이 주목했던 신의 신성에서는 이것은 이것이다 하고 교리적으로 말을 펼칠 수 있었지만, 인문학이 주목하고 있는 인간의 인간성에서는 그 자체를 뭐라고 단언하기가 힘들다. 인간을 향한 모든 단정적 표현은 그것 자체가 불공정한 현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까지! 하고 규정하고 단정하고 판단하는 모든 표현들은 부당하다. 사람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계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존재의 문제로 제시된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나대면 큰일날 수도 있다. 한계를 알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동시에 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한다.
6. 영원이라는 도롱뇽의 속명
소설 속 화자의 아이가 도롱뇽을 키운다. 아이는 그 이름을 ‘영원’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실수로 서랍을 급하게 닫는 바람에 도롱뇽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런데 그에게 팔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아이가 읽고 있던 책 동물도감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도롱뇽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 “노랑무늬영원 / 불도마뱀 / Fire Salamander”(노랑, 278쪽) 참으로 신기한 동물이다.
노랑무늬영원, 하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영원이란 도롱뇽과에 딸린 속명일 뿐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 동명이의어의 울림은 가냘프게 내 마음을 움직인다.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움직임이다. (노랑, 279쪽)
“내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이? 그 동명이의어의 울림이! 무엇이 동명인가? 노랑무늬영원이 도롱뇽의 속명이다. 영원이 도롱뇽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같은 이름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도롱뇽은 도롱뇽이고 영원은 영원이다. 다르면서도 같은 것을 지칭한다. 놀랍다. 경이롭다. 이런 인식이 생각을 형성한다. 그 생각의 지점에 깨달음이 형성되고 있다. 깨달았다. 인식했다. 소설의 형식 속에 담긴 작가 한강의 깨달음이 이런 말로 형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도롱뇽은 그럴 수 있어도,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데 있다. 잘려나간 손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 신비로운 것이 담겨 있다. 이성에서 생각으로 이어지는 그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 어떤 동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능력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으로 뭐든지 생각해 낼 수 있다. 그 생각의 힘은 무한하다. 그 이성의 힘은 끝없이 펼쳐진다.
마음이 움직인다. 마음에도 움직임이 존재한다. 내면에도 움직임이 있다. 내면은 생각 때문에 생겨난 시공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이나 “나는 살아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니체의 말을 기억해도 좋다. 나 자체가 삶이고, 삶 자체가 나이며, 나와 나의 삶을 아우르는 개념이 존재이다. 나에서 삶을 지나 존재로 나아가는 그 길목을 인식해 주면 된다. 개념에서 이념으로 나아가는 그 관념의 길을 이해하면 된다.
생각을 우선시하면 합리론이 되고, 삶을 우선시하면 생철학이 된다. 하지만 둘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사상이다.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린 그런 논리가 아니다. 생각이 없으면 삶이 무의미하고, 삶이 없으면 생각은 헛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정답을 중요시하면 계몽주의가 되고, 정답을 무시하면 낭만주의가 된다. 둘 다 필요한 철학이다. 정답이 필요할 때도 있고, 정답이 오히려 삶 자체를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노랑, 293쪽)
팔십 세의 나이에 도달한 여류화가가 인터뷰에서 남겨놓은 말이다. 소설 속 화자는 그 글을 차분하게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간다. 태양도 태양 나름이다. 그녀가 그린 노랑은 태양이라고 설명한다. 아침이나 저녁에 볼 수 있는,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신비롭고 그윽한 태양이 아니라,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 ‘가장 가벼운 덩어리’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강렬한 태양이다.
그런 태양을 ‘보려면’, ‘겪으려면’, ‘견디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 한다. 태양의 찬란한 빛의 축제를 경험하려면 스스로 빛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태양처럼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대낮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시간 보내기가 문제다. 대낮의 뜨거운 태양 속에서 그 강렬한 빛 속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불꽃이 되어 스스로를 태우는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노랑무늬영원’은 태양에서 현실 속 형상의 의미를 담아내는 무늬로 이어졌다가, 그 무늬는 다시 영원이라는 이념의 세계로 나아간다. 참으로 긴 시간 보내기다. 참으로 긴 시간, 묵상과 명상으로 반복되고 지속된 시간의 형식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마지막 순간에 외쳐 대는 소리를 닮았다.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의 시작이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일견, 사람의 삶은 허무하게 보일 수 있다. 인간의 인생은 태어난 게 죄라는 염세적인 공식 속에서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존재자의 존재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인식될 수도 없다. 영원한 과거, 그 어느 순간에서부터 인간은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존재할 것이다. 텅 빈 것 같은 삶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관건이다. 삶을 형성하는 그 무늬를 발견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7. 내 안에서 시작되는 삶에의 의지
《노랑무늬영원》을 마감하는 단편소설 〈노랑무늬영원〉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비유는 ‘역광’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싶다. 사물을 빛 앞에 둔, 즉 나와 빛 사이에 사물을 둔 시선의 공식이다. ‘역광을 받은 나뭇잎들의 형상’(노랑, 283쪽) “버스에서 나는 계속해서 가로수들을 올려다본다. 따가운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반짝이는 잎사귀, 잎사귀의 동그라미들.”(노랑, 284쪽) “해를 등진 잎사귀들처럼, 내 팔뚝이 투명한 레몬빛이 되었다.”(노랑, 295쪽)
그냥 읽고 지나온 뒤, 다시 페이지를 뒤적이며 ‘역광’이 언급되는 부분을 찾아보았다. 놓친 부분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서 빛과 빛이 서로 맞물리고 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노랑무늬영원〉은 ‘잔멸치 떼’의 ‘무수한 은빛의 점들’(노랑, 211쪽)을 이야기하며 시작되었고, 빛의 아름다운 현상과 마주하고, 거기서 생명의 의미를 추궁하는 질문 속에서 마감한다. 이 단편 소설의 마지막 문단이다.
어디까지 왔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간을 모은다. 물감이 빳빳하게 굳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석양에 비추어본다. 뚜렷한 손가락뼈와 관절 들 사이로, 늦은 여름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소리 없이 몸을 뒤집고 있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 있다. 말없이. (노랑, 295쪽)
말이 없다. 말이 필요 없다. 굳이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들리는 말이 없지만 말이 보인다. 관음觀音의 경지가 이런 것이리라. 인식의 경지가, 깨달음의 경지가 바로 이런 형식 속에서 실현되리라.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노랫말이 있다. 참고 견디다 보면 꽃으로 피어난다. “줄기 없는 연꽃은 없다”고 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참고 견디는 세계라고 말한 불교의 가르침이 음절을 갖추고서 귓가에 들려오기도 한다.
“어디서 들어오는 건가, 이 조용한 마음은. / 어디서 이 마음—살고 싶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울려오는 건가.”(노랑, 292쪽) 마음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마음이 연꽃처럼 피어난다. 수면 위에서 창조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의 운행이 보이기도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 불교가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 형식은 상관하지 말자.
소설 속 화자는 자신의 살아 있음에 대해 치열하게 묻는다. “당신 안에 그날의 내가 남아 있는가. 아직 살아 있는가.”(노랑, 285쪽) 작가 한강의 목소리가 이런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지를 인식하기 위해 의지의 극단까지 파고든다.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 인식은 전혀 다른 상황을 펼쳐준다. 그곳이 바로 정상임을 보여준다. 그곳이 바로 태양의 그 강렬한 빛 속임을 깨닫게 해 준다.
바다 가운데로 나오자, 눈부신 잔멸치 떼가 일제히 배 밑을 헤엄쳐 간다. 빠른 빛이다. 셀 수 없는 빠른 빛이다. 배까지 쓸려 뒤집힐 것 같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 물의 정적이 숨을 틀어막는다. 기포처럼 내 몸이 부서진다. 영원히, 시간이 정지한다. 나는 떤다. 두렵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노랑, 282쪽)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 있다”라는 구절과 함께 시작한 〈노랑무늬영원〉의 이야기다. 그때,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열세 살의 여름방학, 작은아버지를 따라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이야기로 이어진다. 징검다리처럼 건너다보면 작가 한강이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멈춰버린, 그 영원의 공식 속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불꽃이 되는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만끽하는 태양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를 발견할 수도 있다.
노랗다. 노랑이 태양이다. 그 태양의 빛으로 인해 무늬가 보인다. 그 무늬가 삶 속에 배어 있다. “관계에 시간이 밴다.”(노랑, 29쪽) 시간이 밴 관계가 삶이라 불릴 뿐이다. 시간을 낼 수 있는 자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추억이 많은 자가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허공을 바라보면서도 사람을 웃게 하는 것은 좋은 말로 채워진 무늬들 때문이다.
무늬를 보려면 살아야 한다. 개울 속에 버티고 있는 파란 돌을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노랑, 151쪽)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노랑, 285쪽) 작가 한강이 들려주는 복음소식이다. 부활에의 의지가 들려주는 행복론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단단丹旦 이동용
단단丹旦 이동용 (010-3261-3913; 이메일 sapereaude@hanmail.ne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germanis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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