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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욱아빠의 평화강정! 스크랩 강정 구럼비 해안, 한겨울 추위속 이어지는 움직임들.
민욱아빠 추천 0 조회 70 13.02.08 11: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겨울들어 제가 강정에 가는 날은 항상 눈바람이 이는 추운 날이었습니다.  포구에 가만히 서 있어도 매서운 겨울바닷바람에 휘청거리며 두세발자국 물러나지는 그런 바람, 외투에 달린 모자라도 뒤집어 쓴 채 바람을 정면으로 하면 걷기조차 힘들어집니다.  그 바람에 간간히 눈이라도 날리면 강정은 꽤 추운날의 정경이 됩니다.  작년보다는 그닥 춥지 않은 겨울이었건만 제가 가는 날은 왜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을까 싶습니다.  스산하고 아픈 제 마음과 통했던 걸까요?


  한겨울 바람부는 포구에는 갈매기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파도가 거세어지다 싶으면 강정포구 안으로, 바람만 분다 싶으면 포구 밖의 갯바위들에서 갈매기들은 휴식을 취합니다.  때로는 바람을 타며 날아오르는 웅장한 군무는 추운 바람에도 잠시 포구위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장관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경관만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참 좋겠습니다만, 강정포구로 내려가는 길에서부터 바다는 이미 완연한 공사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복잡하게 변하는 광경은 브레이크없이 가속도가 붙어 내려가는 모습같았습니다.


  육상의 공사도 무언가 많이 생겨난 듯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고 해상의 공사도 바람은 거세지만 파도가 없으니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분주하게 진행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케이슨은 이제 구럼비 위에서 제작되어 운반선에 실려 곧바로 바다에 투입됩니다.  줄지어 서 있는 케이슨을 보고 있자니 공사의 가속도가 느껴집니다.  저들은 무얼 위해 저리 재촉하듯 분주한 걸까요?


  케이슨 제작장 옆에선 무언가를 채취하거나 측정하려는 듯한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해상은 더욱 분주합니다.  대충 보이는 바지선만 해도 5척이 넘는데다가 바지선 사이를 오가며 작업중인 배들까지 보고 있으면 정말 공사판은 바다 위임을 실감합니다.


  케이슨은 저 멀리 해상에 일렬로 줄을 맞춘 뒤에 포구쪽으로 각도를 이루며 여러 개가 더 수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안을 채우는 작업이 준비중인 듯 보입니다.


  강정포구에서 멀리 보이는 곳에도 케이슨으로 보이는 것들이 일렬로 바다에 수장되어 있습니다.


  케이슨이 놓일 자리에는 해저작업이 분주합니다.  어느 지점에는 해저지반을 채우기 위해 파쇄한 바위들을 퍼서 바다에 쏟아붇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여전히도 해저 바위를 퍼올리는 준설작업이 진행중입니다.  바라보면서 든 느낌이랄까..  대선 이후로 저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졌고, 공사하는 모습은 더욱 당당해졌습니다.  그리고 진행은 어떤 임계지점을 넘어선 듯 보였습니다.  무력감만이 한가득 엄습해오는데 옆으로는 낚시할 자리를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 몇몇만이 지나다닐 뿐입니다.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옆에 없었음은 바람부는 추운 한겨울, 그것도 남들 쉬는 일요일에 혼자 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분주하게 드나들었던 펜스옆 이 길이 적막한 것도 바람부는 한겨울의 추운날씨 탓으로 돌려봅니다.  오가는 건 동네차량이나 제주허씨 차량 몇몇과 두세명의 올레꾼들 뿐입니다.


  무기력과 적막감을 이겨낼 희망을 있는 걸까요?  포구에서 공사장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중에 동백나무 담장아래 메마른 덤불 사이에 피어난 수선화를 발견했습니다.  매서운 겨울추위에 철모르고 피어난 건지, 아니면 때가 되었으니 매서운 추위쯤은 이겨낼 수 있어 피어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쉬이 뜨이지 않게 나지막한 자리의 덤불 숲에서 피어난 수선화를 보며 마음을 추스려 봅니다.


  중덕 삼거리의 터줏대감 중덕이는 모습이 더욱 중후해졌습니다.  하기사 제가 중덕이를 본 시간만 해도 3년이 되어가니 이 친구도 이젠 사람나이로 치자면 성숙한 청년쯤 되어갈 겁니다. 


  중덕삼거리에서 사람들은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휴식의 시간을 가집니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마냥 이곳도 한가한 모습만 보입니다.


  중덕삼거리에서 공사장 정문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저항의 메세지들로 가득한, 가끔씩 오는 제게는 익숙한 풍경입니다.  최근에 생긴 변화 중 하나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공사현장에 대거 투입되면서 베트남내 평화활동가들의 저항메세지들이 베트남어로 쓰인 플랭카드 형태로 곳곳에 걸린 모습입니다. 


  내부에서는 해상과 육상공사들이 진행중이지만, 오가는 공사차량들이 없다보니 저항도 잠시 휴식중입니다.  한때 24시간 공사체제를 유지하던 대선 전에는 야간에도 휴일에도 한시간에 한번씩 고착을 겪어내며 저항해야만 했죠.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했었습니다.  그때의 모습들을 생각해보니 일요일 하루라도 이렇게 쉼의 시간이 허락된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바람이 거세니 의자에도 나무토막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에는 원시적이지만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의 방법이 동원됩니다.


  누군가가 저항의 장소앞에 가져다 둔 백합..  저항은 비폭력적일 때 가장 위력적이지만, 속좁고 조급하기만 한 인간의 머리는 지금의 상황들이 무척 답답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대선 이후의 결과는, 저 백합을 총칼든 공권력이 짖밟기 전에 배부른 돼지들이 우걱우걱 먼저 먹어치워버릴 듯한 절망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강정천을 따라 동쪽 공사경계선에 머물러 봅니다.  이곳의 모습도 무척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포구에서 바라보이던 저 멀리 일렬로 늘어선 케이슨은 이곳에 접안시설을 만들려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지선의 포크레인은 케이슨 안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채워넣고 있습니다.


  내리는 빛이 야속할만큼 무기력하고 절망감 가득한 공사판..  지금 현재 강정 구럼비의 모습입니다.. 


  여름이후로 가지 못했던 강정천 끝엘 가 보았습니다.  마치 어딘가의 계곡같은 모습..  하지만 이곳은 강정천의 담수와 바다가 만나는 곳입니다.  쏟아지는 물의 가장 아래는 바다입니다.  이곳으로 강정천의 은어는 물을 거슬러 올라와 강정천의 식구가 될 것입니다. 


  해군기지 공사가 강정천을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기지부두의 동쪽 옆을 따라 강정천은 여전히 흐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은어가 여전한 모습으로 강정천의 식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급격한 해상환경의 변화는 강정천으로 오르는 은어의 개체수나 건강상의 문제에 있어 심각한 변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대선 이후의 강정의 저항에 불어닥친 절망과 정권인수기에 맞추어 무언가 애매한 듯한 지금의 분위기는 이곳에서도 감지됩니다.  이미 고착후 연행이라는 방침이 조심스레 나오는가 하면, 강정마을회에서도 이런저런 성토와 성명이 나오고 있고 강정의 저항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은 시민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제주도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단지 힘이 빠진 모습이 아닌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는 추스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강정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는 이들이 아직도 재판을 이어가며 서울에서 제주를 오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재판은 지겹도록 오래 이어지고 있고 재판받는 이들은 금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와중에 양윤모 선생님이 다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받고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양윤모 선생님은 두번의 옥중단식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졌음에도 다시 자신의 무죄와 저항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세번째 옥중 단식을 결심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여러 소식들을 들어가며 시선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자본과 공권력이야 좀 더 활개치기 좋은 환경을 만났을 뿐, 폭력성과 교활함은 언제나 여일한 모습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저항과 소신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토대와 판단에서 존중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강정의 저항은 과연 합리적인 토대와 판단에서 존중받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저항자체의 의미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아닌, 저항의 토대가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저항의 장소앞에 놓인 백합이 공권력의 군화에 짓밟히기 전에 배부른 돼지들에 먹혀 해치울까 걱정하였듯, 배부른 돼지들의 세상에 극단적일 수 밖에 없기도 한 소신과 저항들은 본질을 제대로 존중받고나 있는 것인지 걱정부터 앞섬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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