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연륜
조선일보 2010.12.13.보도에 의하면,
12월 10일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공화당과 합의한 감세 연장안 상정을 대통령 자신이 소속해 있는 민주당의 하원 의원들이 거부하자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감세연장안에 대한 지지 발언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 아예 클린턴만을 남겨둔 채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백악관 로고가 붙은 단상을 내주고 자리를 떴다. 클린턴은 감세 연장 합의안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마치 자신이 현직 대통령인 것처럼 미·러 군축 협상 등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후로도 30여분간 단독으로 회견을 계속했다. 이날 방송국에는 "대통령이 바뀐 거냐" "자료화면이냐"라는 문의전화가 폭주했고,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중간부터 방송을 보신 분들을 위해…"라며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륜과 경륜이 많은 선배 전 대통령에게 협조를 구한 것이다. 이래서 연륜과 경륜이 중요한 것이다. 두 대통령의 격의 없는 유머적 행동에 찬사를 보낸다.
다음은 최근 시사에서 나타 난 연륜과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되새겨 보았다.
▣ 11년 ;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부터 11년간 라디오를 통한 노변담화(fireside chat)로 국민과 직접 소통하였다.
▣ 24년 ;
도브리닌 ; 1962년부터 86년까지 24년 동안 주미대사로 일한 러시아의 전설적 외교관이다. 90세로 2010.4.6.에 사망했다. 그는 회고록 'In Confidence (믿음으로)'에서 "미국의 트루먼부터 부시까지, 소련의 스탈린에서 고르바초프까지 모든 정상회담에 관여했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냉전시대 모든 국제문제를 지켜본 유일한 외교관"이라고 자랑했다. 우리나라와 인연은 한소 수교 등에 막후 역할을 했다.
▣ 25년 ;
고은 시인(77세)은 25년간 4001편의 시로 5600명의 한국인을 노래해서, 시로 쓴 한국사 인물대사전격인 <만인보>30권을 완간하고 “술에 취했다 깬 것 같다” 고 하셨다. 고은 시인은 “삶이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듯,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점점 시가 쓰여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세상은 멀리서 보면 생명이 나고 죽는 것밖에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에서는 어떻게 태어나서 무엇을 먹다가 죽는가가 보이고,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이웃에서 여러 지역과 사회 각계, 땅의 역사와 산야에 잠긴 삶을 그는 한 개뿐이며 한 번뿐인 세상의 원본으로서, 천 개의 목소리가 만든 유일하고 같은 하나의 함성으로 포착하였다.” 고 김형수는 평했다. 그 집념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 30~40년 ;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고,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한 40년쯤 걸어야 강물이 됨을 알았다. 내 인생의 길가를 걸으면 강물은 내 핏줄로 이어져 내 몸속을 뜨겁게 흘러다녔다. 섬진강에 꽃이 피었고, 강물에 꽃그늘이 드리워지고 꽃잎이 강물에 흩날린다. 사람들아! 그 강물 위의 꽃잎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인 줄 알 거라.” (김용택 시인)
▣ 127시간 ; -중앙일보 2010.11.13. 기사에서-
미국에서 ‘127시간(127 Hours)’이란 영화가 개봉됐다. 이 영화를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 등반 중 떨어진 육중한 바위에 팔이 끼인 채 조난돼 닷새간 홀로 사투를 벌이다 자신의 팔을 먼저 부러뜨린 후에 등산용 무딘 칼로 직접 절단한 채 생존해 돌아온 실존 인물 애런 랄스턴의 실제이야기이다. 너무도 끔찍해 주인공이 탈출에 성공했을 때 모두가 이 고통스러운 영화에서 벗어난다는 데 기뻐했다”주인공은“나도 실제로 팔을 자르는 데 성공한 후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고 말했다.
당시 애런 랄스턴은 실제 캠코더로 셀프 카메라를 찍어 자신의 심경이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들을 기록해 놓았다. 곧 죽게 되리라는 두려움 속에 찍은 영상들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랄스턴은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유머감각까지 발휘해 자신의 127시간을 캠코더에 담았다. 그리고 이 기록은 영화의 기초가 됐다.
그 철저한 고독과 두려움, 참기 힘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겠단 의지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힘은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영화에 나온 그대로”였다고 말한다.
“모든 게 무너져 버릴 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그때 엄마, 아빠, 여동생, 동료, 친구 등에게 캠코더로 메시지를 남기며 그 사람들에 대한 제 사랑, 저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 저를 붙잡아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출하기 직전 마지막 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미래에 저만의 가정을 꾸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환시 같은 것을 봤어요. 이것이 저에게 또 다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더군요.”
“그 일을 겪고 난 후 제 인생은 더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했어요. 못 이겨낼 것이 없단 생각이죠. 다만 전에 없던 한 가지 두려움이라면 아내와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