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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히브리서 12:1
오늘 우리가 다룰 찬송은 주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은 겸손(1절), 인자한 말(2절), 인내(3절), 소망(4절)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에 매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헌신과 봉사’ 찬양으로 작사자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교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윌리암스 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기자와 편집인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책을 저술한 워싱톤 글래든(W.Gladden;1836-1918) 목사가 1879년에 작사하였습니다. 이 찬송의 곡은 옥스퍼드 베일리 대학을 졸업하고 1850년 영국 성공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찬송가 연구에 힘을 썼던 헨리 퍼시 스미스(H.P.Smith;1825-1898) 목사가 1874년에 작곡하였습니다.
1절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잘 설명한 말씀은 마가복음 10:45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못난 우리들까지도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셨고, 기도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면서 우리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계속 섬기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삶은 철저한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까? 찬송가 1절 가사처럼 겸손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로마서 12:3 뒷부분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교만한 자세로 우리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없습니다. 겸손이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주제와 분수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에서 묵묵히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수녀님은 자기들만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속상하지 않습니까?” 그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허리를 굽힌 채 섬기며 사는 사람에게는 주위를 쳐다볼 겨를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속상할 이유도 없고, 상처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일에만 힘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지혜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평양의 산정현 교회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은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 장로님이 마산 문창교회 주기철 목사님을 자기 교회로 청빙해 오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오산 학교 교장이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노 장로님은 젊은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장로님, 편히 앉으십시오.” 목사님의 말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귀하신 종이고, 저는 그 종을 받들어 섬기는 장로에 불과합니다.” 끝까지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장로님의 겸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장로님의 권유에 따라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이었는데, 장로님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습니다. 장로님은 부랴부랴 교회를 뛰어왔지만 이미 예배가 시작이 되어 설교 시간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서 앉으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 장로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노 장로님에게, 그것도 옛 스승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순종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장로님은 울먹거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그만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을 칭송했습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목사에 그 장로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겸손이 있기를 바랍니다.
2절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자가 귀한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 간에 서로 높아지려는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시기하며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앞서서 교회 일을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나 된다고?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네! 저만 예수 믿나? 꼴사나워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야겠다.” 하며 분쟁과 미움과 질투의 화살을 쏩니다. 바울 당시에도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존재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고린도전서 1:10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찬송가 2절의 가사처럼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4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직분과 해야 할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있는 입과 코와 눈이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말 많은 입이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음식을 넣어주고, 말도 하는데 왜 너희보다도 언제나 맨 밑에 위치해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자 코가 대꾸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숨도 쉬고, 냄새도 잘 맡고, 생긴 것도 오뚝하게 잘 생겼지만 기껏해야 얼굴의 중간에 위치에 있지 않는가?” 그러자 눈이 우쭐대면서 말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너희들보다 위에 있는 이유가 다 있어. 내가 없어 봐. 너희들은 단 한 시간도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걸” 그러다가 입과 코와 눈이 자신보다 훨씬 위에 있는 눈썹을 향하여 언짢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이, 눈썹! 자네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잘난 척하는 거야?” 그러자 눈썹이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너희들 말이 맞아. 나는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는 너희들 앞에서 늘 미안한 심정으로 그저 내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을 뿐이야.” 과연 눈썹이 쓸모없는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눈썹은 우리 눈 위에 옆으로 뻗어 있습니다. 눈썹의 결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래서 땀이나 물이 눈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고 옆으로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눈썹은 더 자라지 않습니다. 눈썹이 머리카락처럼 계속 자란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눈썹 하나만 보더라도 절묘하게 설계가 되어져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직분이 다릅니다. 다른 지체와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그저 자기가 맡은 그 직분에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며, 주님과 교회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절
구주의 귀한 인내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굳건한 믿음 주셔서 늘 승리하게 하소서
섬김의 신앙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려면 인내하며 섬김의 자세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고 발을 씻겨 주십니다. 요한복음 13:14~15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당시의 관습으로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사랑이며 섬김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 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사랑의 십자가를 지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몸을 버리시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를 섬기셨던 예수님의 섬김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이라는 것은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자식이 출생하기까지 어머니의 고통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주님의 고통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까지 전도자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핍박의 골짜기를 걸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순순히 받아드리는 사람보다 거부하고 조소하며 핍박하거나 무관심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내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6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구원이라는 생명의 선물을 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함을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과 높아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가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크기와 교인수를 자랑하며 서로 높아지려는 경쟁을 하다 보니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 타종교로 옮겨갔습니다. “기독교는 말로만 사랑과 섬김을 주장하지 실제로 낮아짐과 십자가 섬김의 영성이 없다”며 교회를 떠나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십자가 섬김의 영성을 되찾지 않으면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섬김의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와 같은 섬김의 자세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랑과 평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평안이, 죽음이 있는 곳에 우리를 통해 생명이 있기를 원합니다.
4절
장래의 영광 비추사 소망이 되게 하시며
구주와 함께 살면서 참 평강 얻게 하소서 아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영국의 어떤 교회 마당에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동상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내게로 오라.” 그런데 예수님의 두 팔이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서 잘려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이 동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두 팔이 잘려진 채 그대로 동상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상에 있는 글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내 손은 너희가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어서 예수님의 섬김을 이어 받겠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를 했을 때였습니다.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이 되면 꼭 자기의 고향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출석을 하며 예배를 드렸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루는 수백 명의 기자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배드리며 또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카터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를 찾아서 여기까지 와 주신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부터는 여러분이 섬기시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피 흘려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겸손하게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십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서로 아껴주면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섬김과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찬송가 4절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구주와 함께 살면서 참 평강 얻게 하소서”처럼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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