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의 수술 이겨낸 집념의 미드필더
K리그 포항, 전남과 국가대표팀의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김상호 前U-17 대표팀 코치(43세)는 세심한 가르침으로어린 선수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지도자다. 예전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 시절 그가 지도를 했던 백지훈(수원) 역시어려울 때 큰 힘이 되었던 지도자로 김 코치를 꼽았었다. 조용하지만 내실있게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김 코치는 현역 시절에도 크 게눈에 띄지는 않지만, 팀에서 없어서는 안될 살림꾼 역할을 했다.
그리고 6번에 걸친 수술을 이겨내고 프로에서만 12년간 팀에 공헌하면서 대표팀에서도 활약한인간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 강원FC 수석고치)
TV로 축구 보는 축구부원 부러워 시작
김 코치가 축구를 시작한 계기는 여느 선수들과 다를 것이 없다.“광주 효동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죠. 70년대만 해도 TV가 별로없었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면 교무실에서 축구부원들이 TV로 축구경기를 보고 있더군요. 워낙 축구를 좋아했기에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부러웠어요. 그래서 4학년이 되자 축구부에 가입했지요.”
단순히 축구가 좋아 공을 찼던 김 코치는 축구 명문 북성중에 진학하게 됐다. 그러나 축구부 생활은 반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입학해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키가 137cm였어요. 축구부원 중에서 제일 작았지요. 1학년 여름방학 전에 체육부장님이 잠깐 면담을하자고 해서 갔더니‘너는 볼은 잘 차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안되겠다. 공부를 해라’고 하시더군요.”“너무 충격이 컸어요. 생전에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학교 수업 끝날 때까지 울었습니다. 집에 가니까 어머니께서 제 눈이퉁퉁 부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시더군요. 어머니한테 키커야한다고 문을 잡고 있을 테니까 다리를 잡아당겨달라고까지 했어요.(웃음)”
금호고 진학, 운명적으로 축구와 재회
축구를 그만둔 그는 연합고사를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에는 추첨으로 고교를 배정했는데, 배정된 학교가 바로 금호고였다. 축구와 운명적인 재회가 이뤄진 것이었다.“그때는 금호고가 개교한지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었지요.
그런데 가보니까 축구부가 있더군요. 광주에 3개밖에 없는 축구부 있는 학교였고, 더구나 인문계에서는 유일한 팀이었어요.”
마냥 축구가 하고 싶어 일반 학생들로 구성된 동아리 축구팀에 가입했는데, 마침 금호고 축구부와 연습경기를 갖게 되었다. 이 경기를 지켜본 금호고 김상구 감독이 그에게 정식 축구부에 들어올 것을 제의했다.“저야 무조건 OK였죠.(웃음) 당시에도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가는 동계훈련부터 합류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알다시피 고교 축구부는훈련량이 많은데, 저는 체력적으로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3일 훈련하니까 등에 담이 오더군요.”
금호고 전성시대 열어
다시 축구를 시작한 김 코치는 2학년부터 조금씩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81년 6월에 열렸던 대통령금배에서 생애 첫 우승의기쁨을 만끽했다. 3학년이 되자 금호고는 전국 최강자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동기였던 신연호(대구 수석코치), 김판근(김판근축구아카데미 대표), 황영우(광주축구협회 이사), 최수용(금호고 감독) 등과 함께 최강 전력을 구축했고, 이들은 청소년대표팀에도 함
께 뽑힐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솔직히 멤버가 너무 좋아서 전국대회를 싹쓸이하겠다고 목표를 세웠어요. 그런데 그게 쉽게 안되더군요.(웃음) 그래도 몇개 대회는 우승했습니다. 특히 대구 MBC 대회에서는 5경기에서 15골-3실점으로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면서 우승을 차지했어요. 일본에서 개최하는 국제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기도 했지요.”
청소년대표에 선발, 그러나 세계대회 앞두고 좌절
금호고를 졸업한 뒤 서현옥 감독이 이끌던 동아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박종환 감독의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83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을 준비 중이었고,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을 조련하고 있었다.
“21명 엔트리까지 뽑혔어요. 태릉 선수촌에서 83년 4월부터 훈련을 했는데,체력훈련이 엄청났습니다. 제가 공백을 갖고 고2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던 터라 당시만 해도 힘이 안붙어 있었거든요. 저한테는 훈련이 너무 강했습니다.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장 30바퀴를 돌았고, 알려진 것처럼 고원지대에대비해서 마스크 쓰고 훈련을 하기도 했지요.”“체력적으로 도저히 안되겠구나 생각하고 포기한 상태였어요. 결국 2주 훈련을 하고, 18명 최종 엔트리가 나왔는데 동기인 신연호, 김판근은 뽑혔지만저는 제외됐습니다. 그게 너무 한이 되어서 그뒤 동아대 숙소가 있는 부산다대포에서 밤마다 체력훈련을 했습니다. 골대와 반대편 골대 사이를 20바퀴씩 돌았어요.(웃음)” 83년 청소년대표팀은 멕시코 4강 신화를 이룩했고, 김 코치는 그들의 개선행진을 지켜만 봐야 했다.
포항에서 첫 시즌부터 자리잡다.
동아대를 졸업한 김 코치는 1987년, 호화멤버를 자랑하던 포항제철(현 포항)에 입단한다.
입단 무렵만 해도 김 코치를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때 포항의 화려한 멤버들을 열거하자면 최순호, 박성화, 이흥실, 최상국, 박경훈, 조긍연, 이기근, 유병옥, 남기영, 윤성효, 유동관 등 끝이 없다. 갓 대학을 졸업한 그가자리를 잡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팀에는 11명의 스타가 필요한것이 아니었다. 팀에 헌신하는 살림꾼의 존재는 어느 팀에나 필요한 것이었고, 김 코치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좋은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는 팀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역할을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선배들을 보좌하면서 팀을 위해 많이 뛴 것이 감독님께 어필한 것 같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잘 잡은 것도 있어요. 개막전에 벤치멤버였는데, 0-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20여분 남기고 교체로 들어갔지요. 이후에 2-2까지 따라붙었고, 제가 포인트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역할은한 것 같아요. 그 때부터 감독님이 잘 보셨는지 선발멤버로 많이 넣어주셨지요.”87년 입단 첫 해 29경기에 나왔고, 그 중 22경기를 선발로 뛰었다. 공격 포인트를 많이 올릴 수 있는 역할이 아님에도 3골-1도움을 기록하기도했다. 성공적인 프로 데뷔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후에도 꾸준했다. 이듬 해에는 초반 무릎부상을 딛고, 포항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을 세우며 K리그 베스트11에 선발되는 영광을 맛봤다. 1991년에는 36게임에 나와 5골-6도움의 호성적을 거두면서 최고의 한해를 보내기도했다.
국가대표팀 선발, 그러나 이탈리아 월드컵 출전 좌절
K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자 1989년,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렸
다. 이회택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면서 애제자인 김 코치를 불러들였고, 1989년 10월에 있었던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도 참가했다.새로운 전환기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시작된 부상은 모든 꿈을 앗아갔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