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빈의 시편(5편) 강해
시5:1-6 여호와여 나의 말에
다윗은 원수들의 횡포 때문에 매우 괴로워 할 뿐 아니라 아직도 더 많은 해악이 자기 앞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려서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요청한 바를 더 쉽게 얻고자 하는 뜻에서 기도의 간절성을 통해서 자신의 슬픔이 크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 뒤에 먼저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용납할 수 없는 악한 의도를 밝히 제시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대로 버려 둔다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겠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자기 신앙과 인내와 위안까지 말하고 행복한 결말을 의심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자기가 구원을 받게 되는 날 자신의 구출에서 오는 혜택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경건한 자들 모두에게 미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1. 본 시편 표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네힐롯)에 맞춘 노래” 입니다.
‘네힐롯’(Nehiloth) 이라는 단어를 ‘상속’으로나 ‘군대’로 번역합니다.
전자로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견해에 대한 이유로서 다윗이 그가 ‘상속’으로 부르는 열두 지파의 안녕을 위해 간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고 나옵니다.
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뜻에서 다윗이 부지기수의 인간들에게 포위되자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했으며 따라서 ‘.....에 대한’이라는 단어에 ‘....에 대항하는’ 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본 시편의 표제를 두고 그것이 마치 수수께끼라도 된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의 추론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악기나 음률의 조정으로 보는 자들의 견해를 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종류였는가 하는 문제를 확인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2.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 다” 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자신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원수들로부터 받은 부당한 행위를 두고 탄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장기간에 걸쳐서 사울 밑에서 괴롭힘을 당한 여러 가지 박해를 두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본 시편을 압살롬에게까지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피에 목말라 하며 기만으로 가득 찬 자’가 도엑과 아히도벨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윗은 사울이 죽은 뒤에 평화롭게 왕국을 차지하면서 그가 역경과 위기 속에서 드렸던 기도를 글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첫째, 그가 한 가지 내용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이 반복은 자기 마음의 욕구와 기도에 대한 오랜 불굴의 인내를 상징합니다.
곧 그는 서로 다른 형식의 표현을 구사함에 있어서 여러 말을 사용하는 것을 즐겨한 것이 아니라 기도에 깊이 빠져 있었으므로 이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다양성 있는 호소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냉담하게 기도하거나 적은 말수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의 감정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재난을 두고 진지하게 하소연 했다는 점과 그리고 이 재난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당장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그가 동일한 하소연을 끈질기게 반복했다는 점을 언급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러한 억제에는 그가 분명히 말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의 소원을 발설하지 않음으로서 그가 하나님 앞에 내놓는 자신의 내면적인 감정이 얼마나 크던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였다는 점을 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크고 낭랑한 목소리를 상징하는 울부짖음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소원의 진지성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귀머거리의 귀에 대고 소리치듯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슬픔의 감정과 내면적인 번민이 이 울부짖음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사용하고 있는 הגה(하가)라는 동사는 ‘연설’(speech)을 뜻하는 גיגה(하긱)에서 파생된 단어로 거기에는 ‘분명하게 말하다’ 는 뜻도 있고 ‘속삭이다’ 또는 ‘투덜대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가 본 구절에서 더 잘 어울립니다.
다윗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는 점을 말합니다.
곧이어 보다더 구체적인 성격을 띠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말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희미하고 불분명한 끙끙거림으로 다른 하나는 큰 외침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첫째 표현을 통해서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투덜댐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히스기야가 너무 슬퍼서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때 부른 노래에서 엿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울며”(사38: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에든 우리가 뒷전에 물러서서 기도하거나 우리의 독실한 마음이 그 열기를 잃어가기 시작할 경우 우리는 여기서 자신들의 활력을 되찾고 앞으로 전진할 이론을 찾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자신의 왕’과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름으로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자신의 고통의 결과에 대해서 더욱 더 생생하고 호의적인 소망을 품고자 했듯이 우리도 이 칭호를 비슷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곧 우리자신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서 사용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끝에서 그는 자신이 불신자들처럼 불만스러운 태도로 이를 갈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난처한 처지를 하소연했다는 점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나머지 속으로 안달을 부리거나 자신들의 불평을 인간들에게 내뱉는 자들은 하나님의 관심을 얻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혹자는 마지막 구절을 ‘내가 주께 간구할 때’ 로 번역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다윗이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 제시하는 이유로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이것을 일반적인 원칙, 곧 누구든지 자신들이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결코 그에게서 퇴박을 맞지 않을 것으로 여겨 스스로를 격려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본문 3절은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입니다.
맨 처음 문장은 미래 직설법으로, ‘당신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견해로 이 동사는 우리가 번역한 대로 기원법 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기를 간청한 뒤에 그는 그분에게 속히 서둘러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혹자는 그가 율법의 규칙에 따라서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곤 했던 아침 기도를 여기서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견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가 약간 장기화된 지연에서 오는 싫증 때문에 자신의 구출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소원하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는 ‘제가 일어나자마자 제게 떠오르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제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도움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시고 당장 제 소원을 들어주소서’ 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한다’ 는 표현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간다는 표현과 동일합니다.
여기서 마치 생략 구절이 있는 듯이 ‘나의 기도’를 보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도가 자신이 이리저리 향했거나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시험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다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자기생활의 확정된 순서였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이 말에는 자신들 주위에 있는 세상적인 도움을 구하거나 자신들의 계략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배회와 불분명한 운동과 모든 경건한 자들이 세상의 헛된 유혹으로부터 물러서서 오직 하나님께로만 달려가는 신앙의 똑바른 인도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습니다.
ךדע(아라크)라는 히브리어는 ‘질서를 잡다’ 또는 ‘순서’라는 의미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돈하다, 꼭 맞게 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결코 자신의 질서정연한 진로에서 꾸불꾸불한 오류와 죄악의 길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밝히는 이 구절에 아주 적합합니다 ‘지키겠다’는 단어로 그는 불안할 뿐만 아니라 소망과 인내의 개념을 전달합니다.
הפּצ(차파)가 히브리어에 있어서는 ‘바라보다’라는 의미와 ‘기다리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다윗은 틀림없이 그가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의 품에 벗어버린 다음에 초조한 마음으로 마치 보초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점을 행동으로 보여주기까지 주시하고 있겠다는 의도를 이렇게 피력합니다.
물론 기다림이라는 단련 속에는 항상 어느 정도 초조가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초조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자는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탄원자들의 마음을 망대(watch-tower) 위에서 볼 수 있는 소망이 따르지 않는 기도의 무용성(無用性)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 본문 4-6절은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 하며
(5)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 하시나이다” 입니다.
1) 여기서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고의적인 사악을 근거로 자신에 대한 신의 호의를 강력하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마치 성도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더듬거리는 경우처럼 갑자기 맥락이 바뀌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더듬거리는 기도라 하더라도 아주 능란한 웅변적인 기도보다 더 반가와 하십니다.
더욱이 다윗이 염두에 두고 있는 큰 목적은 그의 원수들의 횡포와 배신이 최악의 극에 달한 만큼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곧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 그들을 체포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논리의 근거는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의와 정직을 기뻐하시므로 반겨하시는 만큼 다윗은 바로 이 점을 생각하고 그분께서 모든 불의한 자들과 악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재판관이심을 확연히 알면서도 그들이 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서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겠는가?
이 구절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악인들의 끝없는 오만 때문에 얼마나 크게 낙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장 오만불손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당장 멍하게 되고 당황하거나 아니면 낙심의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고 마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격려와 확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의 원수들이 자기에게 가하는 불법행위가 크면 클수록 더욱 진지하게 모든 악을 증오하시기에 모든 악인들을 멸망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는 하나님께 보호를 간청합니다. 2) 그러므로 모든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횡포, 기만 그리고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할 입장에 처할 때마다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께 이끌어 올리는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고한 소망으로 자신들을 격려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 1장5-7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라고 격려하는 그대로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고에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보상이 쌓여 있지 않다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재판관이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에서 취할 수 있는 용법은 우리가 악인들이 제멋대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신가 하는 질문이 은근히 우리의 마음에 파고드는데 우리는 모든 불법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처벌당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당분간 용납해 주시더라도 결국에는 심판대에 오르셔서 자신의 백성에게는 방패와 보호자가 되시는 것처럼 그 자신의 모습을 그들의 복수자로 임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비록 자신은 사단과 불경건한 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시며 자신의 심판을 행사함에 있어서 그들의 고의를 이용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분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며 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는 목적이 항상 의로우시며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에 의하여 그가 원하시는 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닌 자들을 정당하게 정죄하고 처벌하시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2) 4절에 עד(라)를 남성, 곧 악한 사람으로 보는데 우리는 악 그 자체로 이해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불의 사이에는 전혀 일치점이 없다는 점을 간단하게 밝혀줍니다.
그는 곧이어 인간들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그분 보는데 서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불법행위가 하나님께 증오의 대상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인들에게 공정한 처벌을 행사하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지당한 일입니다.
그는 통상적인 성경의 용법에 따라서 맹목적인 열정에 이끌려 죄악으로 곤두박질쳐 넘어지는 자들을 가리켜 ‘바보’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아랑곳없이 팽개쳐 버리고 해악만 끼치는 욕망을 자신들의 지배원칙으로 삼는 것보다 더 바보스러운 짓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모든 바른 것을 굽어지게 하는 멸시보다 더 나쁜 광기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뜻에서 이 진리를 숙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단련을 쌓기 위해 유익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악의 복수자이신 사실을 선언함으로서 우리가 벌을 받지 않고 그냥 피할 것이라는 부질없는 소망을 품고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재갈을 물리십니다.
시5:7-12 오직 나는
박윤선 주석에 따르면 본문은 두 부분입니다.
첫째로 다윗 자신이 하려는 일과 다윗의 기도입니다(7-8).
둘째로 원수들이 받을 벌과 성도들이 받을 복입니다(9-12).
1. 본문 7절은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입니다.
혹자는 앞 절과 본 절을 연결하는 ‘그리고’(And)가 ‘그러나’ 대신 쓰인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불경건한 자들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악인들은 혐오하고 파멸하실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자비로우실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자신에게 확실한 약속을 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앞 문장에 대한 추론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 문단에 더 어울리지 않을 까 생각하는데 문제는 독자들의 의견에 맡깁니다.
이 구절은 ‘오 주여 주께서는 악인들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능력에 의해서 그들의 손으로부터 구원받을 때 내가 성전에서 주 앞에 나아가 내게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를 드리겠나이다’ 라는 식입니다.
만약에 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심을 간단히 언급함으로서 자신을 자기가 언급하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구별합니다.
이 구절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윗은 앞에서 그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그리고나서 스스로 감사의 훈련을 쌓을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라는 말씀은 내가 비록 현재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호의로 우리는 완전한 안전 속에 보호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가 더없이 힘겨운 시험의 고통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봄으로서 더없이 큰 위험 속이지만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소망으로 지탱해 나가야 옳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마음은 악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얕보거나 흔히 세상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포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이로우신 위대성을 지극히 높여서 칭송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다윗의 우선적인 의도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는 바 자기 백성 보존에 대한 확고한 소망으로 자신을 격려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다윗은 구원을 받는 즉시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것이요, 그 구원의 사실을 계속 기억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위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린다고 하지만 그들은 거룩하지 못하고 이미 지독하게 오염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된 즉시 “주를 경외함”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윗은 진지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생활의 일반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려면 오직 주님의 선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올바르게 기도할 수 없다는 점을 배웁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덧붙여지는 것은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을 육신의 부질없는 자만과 구별하려는 뜻에서입니다.
2. 본문 8절은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입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내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소서, 그리고 나로 하여금 당신의 성품을 닮아 그 의를 전적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고 내 원수들을 보아서라도 이것을 이루어 주소서.
성도들이 불경건한 자들의 악한 습관과 기만적인 술책에 이끌려 올바른 길에서 돌아설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식의 기도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 의미는 신앙적이요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원수들의 무수한 올무 속에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며 겉으로 보기에는 틀림없이 완전히 사방으로 포위되어 붙잡히고 말 것 같은 상황인데도 그에게 돌파구를 열어주셔야만 한다는 뜻을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나오는 “주의 의”는 다른 많은 구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지탱함에 있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의 의”는 ‘당신의 의를 살피시고’ 나 ‘당신의 의에 의하여’ 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안내자로 삼으려는 마음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자신의 청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이것은 ‘주여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시오니 나를 주의 도우심으로 방어하셔서 나로 내 원수들의 악한 음모에서 피할 수 있게 하소서’ 입니다.
“주의 길을 내 목적에 곧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마지막 소절도 같습니다.
자신이 너무도 완벽한 포위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숱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구출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혜를 주셔서 길이 전혀 없는 곳에 길을 열어 주시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의 무수한 원수들의 올무의 속박을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우리 역시 다윗의 모범을 본받아서 동일한 일을 해야 어울릴 것입니다.
우리는 분별력이 부족하고 원수들의 고의와 사악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자신을 불신하고 사망의 문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속히 달려가야 합니다(시69:).
3. 본문 9절은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입니다.
1) 다윗은 여전히 자기가 앞서 말한 동일한 하소연을 반복합니다.
이로서 다윗의 원수들이 하나님 앞에 그만큼 더 가증스러운 존재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다윗은 부당히 학대받는 자들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합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횡포를 더 치열하게 드러내거나 더 사악하게 우리를 괴롭힐수록 우리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마땅히 하늘을 향하여 탄식을 올려보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횡포가 극한 상황까지 치닫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한 의도를 백일하에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다윗이 그들의 배신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도무지 정직하거나 그들은 단연코 진지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내면에 불법이 가득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그들을 무덤에 비유합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 라는 말은 그들이 게걸스러운 탐닉에 빠져 허덕인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만족을 모르는 피흘림에 대한 욕망을 뜻합니다.
본 절 마지막에 가서 다윗은 다시 그들의 기만을 언급합니다.
다윗을 단련시켰던 숱한 부당행위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인정도 절제도 없는 가장 악독한 원수들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더없이 비참한 학대를 받게 되었지만 자신의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자신의 외형적인 상황의 혼란과 절망에서도 소망의 근거를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2)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까지 포함합니다.
다윗은 모든 인류에게 확대해서 적용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지적해 주시는 허용범위를 벗어나는 말씀이 아닙니다(롬3:13).
바울 사도는 다윗을 통해서 여기에 우리에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 머리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지체 속에 있는 교회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여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되지 않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간에 모두 그리스도의 원수의 숫자 속에 포함된다는 결론입니다.
다윗은 앗시리아인들이나 애굽인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의 거룩한 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자랑하는 타락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구절을 온 인류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 말씀의 순수한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온 인류가 타고난 성품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을 옳게 주장합니다.
4. 본문 10절은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입니다.
םשא(아삼)이라는 히브리어에는 ‘죄를 짓다’는 뜻 이외에 ‘자르다’ 또는 ‘파괴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그리고 비유적으로 ‘그르치다’ 또는 ‘속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두 의미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든 잘 어울립니다.
다윗은 곧이어 ‘그들이 그들의 음모에 스스로 빠지게 하소서’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는 이 첫 기도가 두 번째 기도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구절을 원인과 결과로 하나로 묶어서 생각합니다.
첫째 구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해력을 박탈하시고 그들을 곁길로 몰아붙여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둘째 구절에서는 그 결과 그들의 음모가 헛되이 무산되고 말 것이고 곧 그들의 시도가 실패할 것을 기원합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부질없이 음모를 꾸미고 분별없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그처럼 천박하게 고집을 피우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감쪽같이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시고 그들의 술책을 단번에 부숴버리기 때문에 광란과 현기증으로 그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장 하찮은 문제까지 바보스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들의 올무와 기만을 두려워하며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자들이 총명하고 재치있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현명한 그들을 우매와 광기로 후려쳐서 불법을 저지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잠들어 있더라도 주님은 그의 입김으로 그들의 계략을 아시고 그것이 아무리 음흉하더라도 무산시키며 마침내 그들을 온 세상의 조롱거리로 폭로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손을 드셔서 그들의 악한 의도에 종지부를 찍어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사실 악인들이 간교하게 꾸며대는 모든 계략을 하나님께서 좌절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이 해악을 저지르도록 모든 방법을 넌지시 일러주는 모든 기만의 주모자가 바로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라는 기도 가운데는 그들이 결정한 것을 획득하거나 성취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이 벌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그들을 처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악하고 부당하게 무고한 자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하는 중에 ‘주를 배역한 자들’ 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압박하며 무시하는 가련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통해서 자신이 몸소 모욕을 받고 상처를 입는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악인들은 그런 사실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가련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타격이 하늘을 대항해서 휘두른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그들이 마치 발로 먼지나 흙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디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의 문제를 자신의 장중에 쥠으로서 그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보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반성하는 양심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의 정직을 지킨다면 그가 비록 부당한 고통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방패로 여기는 문제를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5. 본문 11절은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라는 식의 미래 시제로 읽거나 ‘모두 기뻐하게 하소서’ 라는 식의 기원문으로 읽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거나 선지자의 의도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다면 이 구원의 열매가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만약에 주께서 나를 도와 주신다면 주께서 나에게 베푸는 선하심이 나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주님의 모든 종들에게 확대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신앙을 더욱더 확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이름을 더욱더 찬양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식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요청하는 뜻에서 이 고백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그 이론의 근거로 그것이 가져올 목적 또는 효과를 구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큰 신뢰를 두고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도록 단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이웃에게 내리는 모든 복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웃에 대한 복을 통해서 경건한 자들 모두에게 언제나 자신의 선하심을 베풀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이 기쁨의 원인이 덧붙여집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 가운데 누구에게 어떤 복을 내리든지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수 천 번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의 손길로 덮어지고 방어를 받고 있다는 이 한가지 생각으로 만족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헛된 그림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 보호를 구하도록 유혹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를 신뢰한 자들이 ‘주의 이름을 사랑한다’고 한 말에 특별한 관심을 표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으로 흡족해야 합니다.
그 주님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또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매혹시켜야 옳습니다.
반대로 모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사장(死藏)되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두려워 떨며 기피하기 마련입니다.
6. 본문 12절은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앞 문장의 결론 부분입니다. 즉 여기서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의 체험에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도움을 받는 것으로 확증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가지 예를 통해서 모든 경건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불변성과 영속성을 판단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아무 곳에서나 참되고 올바른 기쁨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축복한다’ 는 단어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우리가 이것을 인간의 행동으로 말할 경우에 어떤 사람에게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야기할 경우에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을 번영하게 하고 그에게 모든 좋은 것을 풍성하게 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호의는 효과가 따르기 마련인 만큼 그분의 복은 그 복 자체로 모든 좋은 것을 풍성하게 산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 곧 ‘의로운 자’ 라는 이름은 어떤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종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의로운 자로 불려지는 자들은 자신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의를 갈망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집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호의로 받아들여주십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그들에게 전가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정직한 노력을 온전한 의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또는 선한 뜻으로 ‘그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라고 이어지는 구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저자의 지적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신실한 자들을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굳은 요새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확고부동한 신앙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그들의 온 사방이 완벽하게 방어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면류관을 씌우다’는 단어는 종종 히브리어에서 ‘예배장식’ 또는 ‘예배의 영광’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방패의 비유가 덧붙여집니다.
다윗은 이 단어를 ‘요새화하다’ 또는 ‘에워싸다’의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의인들을 에워싸는 위험이 제아무리 엄청나고 다양하더라도 그들이 나갈 길을 찾게 되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귀정사실이라는 고백이고 선언입니다. 그것은 총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