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6장 1~14절>
서론: 거대한 고통 앞에 서다
인간이 겪는 까닭 없는 고통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 문학의 거장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의 소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 카라마조프(Ivan Karamazov)입니다. 순결한 어린아이들이 당하는 불합리한 고통 앞에서 이반은 신의 세계를 이해하기를 거부하며, 구원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그 구원을 위해 아이의 눈물이 필요하다면 자신은 "구원의 입장권을 하나님께 반납하겠다"고 울부짖습니다. 이반의 신음은 존재론적 반항이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에 대한 실존적 탄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내뱉는 탄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친구 엘리바스가 "죄 없는 자가 망한 적이 없다"며 인과응보의 잣대로 자신을 정죄할 때, 욥은 자신의 고통이 단순한 훈계나 교훈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몸부림치며 항변합니다.
1. 통제할 수 없는 슬픔을 주님께 토해내라
"나의 괴로움(카아스)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욥기 6:2-3a) 욥은 자신의 괴로움과 탄식이 결코 경솔한 불평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괴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아스(כַּעַס)는 단순한 화나 서운함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져 내릴 만큼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격분과 슬픔, 괴로움"을 뜻합니다. 욥은 자신의 '카아스'가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워 가슴이 메어 오르고(3절), 전능자의 화살이 자신을 찌르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 역시 가슴속에 차오르는 '카아스'를 참지 못해 차가운 이성의 언어로 항의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절망을 가식 없이 깨닫는 정직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쓸 때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 자신의 '카아스(울분과 절망)'를 정직하게 인정할 때 진정한 영적 회복의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영혼의 깊은 '카아스'를 겪으셨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 26:38)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탄식과 절망을 친히 품으셨기에, 오늘 우리는 우리의 통제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가식 없이 하나님 앞에 토해낼 수 있습니다.
2. 세상의 미사여구가 아닌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라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욥기 6:6-7) 욥은 친구들의 교조적이고 상투적인 충고를 '소금 없는 음식', '알의 흰자위' 같다고 비판합니다. 고통받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이론이나 냉정한 당위론이 아닙니다. 욥이 갈망했던 것은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맛, 즉 타암(טַעַם)이었습니다. '타암'은 "달콤함, 영혼을 만족시키는 진정한 맛과 깊은 이치, 분별력과 통찰력"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친구들의 헛된 비판은 영혼을 쓰라리게 할 뿐, 욥의 깊은 갈증과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논리로 죄를 합리화하려 했지만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배지에서 창녀 소냐가 읽어주는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상의 미사여구가 아닌 말씀의 '타암(진정한 달콤함)'이 그의 영혼을 깨뜨리고 회복시켰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현대인이 알맹이 없는 언어, 즉 '잡담(Gerede)' 속에서 자신의 참된 존재를 잃어버린다고 지적했습니다. 고난의 밤을 지나는 이들에게 세상의 이론이나 헛된 위로는 영혼을 채우지 못하는 '잡담'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당하는 우리 영혼에 임하는 참된 '타암'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제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고백했듯, 신앙인은 세상의 미사여구나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오직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에서 영혼의 참된 달콤함(타암)을 찾아야 합니다.
3. 무너진 이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라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헤세드)을 받느니라" (욥기 6:14) 본문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론에 해당하는 절절한 고백입니다. 여기서 '동정'으로 번역된 단어가 구약 성경의 핵심 주제인 헤세드(חֶסֶד)입니다. '헤세드'는 "조건 없는 인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고통이 너무나 가혹하여 설령 그 사람이 낙심한 나머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마저 흔들리고 저버릴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곁에 있는 친구라면 마땅히 '헤세드(조건 없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그를 정죄하고 판단하기 바빴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아들 알료샤(Alyosha)는 형 이반의 격렬한 회의와 불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알료샤는 형에게 말없이 다가가 따뜻하게 입을 맞추어 줍니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는 타자의 고통스러운 얼굴(Visage)을 마주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 말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그 고통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책임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성육신하시어 우리에게 완벽한 '헤세드'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낙심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방황할 때, 주님은 율법의 잣대로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우리를 안아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구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셨을 때, 주님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씀하시며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명하셨습니다." (눅 10:36-37) 병든 성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 상처받은 성도를 향하여 교회는 헤세드를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은 설명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결론: 슬픔의 깊이 보다 더 높은 주님의 은혜
도스토옙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는 고통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비극으로 끝이 났지만, 욥은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욥을 찾아오셔서 그의 탄식을 승리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교회에게 거룩한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삶의 무게와 '카아스(כַּעַס, 괴로움)'로 인해 울부짖는 성도들의 탄식을 정죄하지 맙시다. 그들이 정직하게 아픔을 쏟아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십시오. 상처 입은 영혼의 탄식을 품어주는 공동체가 됩시다.
오직 영혼을 살리는 십자가의 참된 '타암(טַעַם, 달콤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합시다.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알의 흰자위 같은 헛된 위로를 버리고, 세상의 비판과 기복적 위로를 넘어 '생명의 말씀'을 전합시다.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조건 없는 '헤세드(חֶסֶד, 자비, 인애)'를 실천합시다. 믿음이 흔들릴 만큼 낙심한 이웃을 향해 판단의 손가락질을 거두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조건 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줍시다.
우리의 슬픔보다 더 깊은 주님의 은혜가, 낙심한 우리 모두를 일으켜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Keywords: 카아스(כַּעַס, 괴로움), 타암(טַעַם, 달콤한 생명의 떡), 헤세드(חֶסֶד, 조건 없는 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