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나폴리, 통영을 다녀오다.
김은영
지난 번 특박 나왔다 돌아가는 아들에게 남편은 다음 특박에는 꼭 함께 여행 가자며 난데없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제안은 정작 자기가 해놓고 아들의 특박 날짜 정해지면 나에게 여행 장소 정하고 숙박도 미리 예약해 두라고 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뗏놈이 먹는다던가? 이번에도 또 내가 곰이 되어야하는가 보다.
문자메시지로 가끔 연락이 가능한 아들은 특박 날짜가 나오니 몹시 기대가 되는지 어디로 갈 거냐며 물어왔다. 한동안 바깥바람을 못 쐬어 본 지라 통영으로 바다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고 일찌감치 저렴한 숙소를 물색해 예약을 해두었다.
아들은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고 토요일 저녁 늦게 도착했고 일요일 오후까지 수업이 빡빡한 나는 수업을 다 마친 오후 3시에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성주에 들러 콩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남성주 IC로 올려 통영을 향했다. 모처럼 떠나는 여행이라 그런지 기상 특보가 내린 폭염에도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학교생활로 2년여 떨어져 지내다가 올해 초 군 생활을 시작한 아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 더 설레고 신명이 났다. 아들도 팍팍한 영내 생활에서 잠시지만 벗어나는 홀가분함에 들떠있는 듯하다.
통영은 몇 번 방문 경험이 있는 지라 이번에는 미처 둘러보지 못한 곳, 다시 보고 싶은 곳을 즐겨보자 마음먹었다. 주말 저녁 시간이라 마산이 가까워지니 도로가 막혀 지체되기 시작했다. 달아 공원에서 해지는 모습을 보기로 해서 일몰 시간을 놓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여름 해가 길어 다행이었다.
통영으로 들어서 얼마 안 되니 남해 한려수도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을 쭉 지나서 숙소로 먼저 갔다. 숙소는 유람선 터미널 근처 바닷가에 위치해 찾기 쉬웠다. 2인+1인 침대가 있는 작은 방을 예약한 터라 숙소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선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베란다 가득 통영의 바다가 보이지 않은가.
일몰 시간 7시 반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가야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초여름 신록과 길옆으로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가 되었다.
달아 공원에 이르니 어느 새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공원으로 오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바다에는 금빛 햇살을 길게 늘이며. 커다란 해가 수평선 가까이 떠있었다. 금방이라도 수평선에 잠기면 어쩌나 발걸음을 재촉해 올라갔더니 여름해라 그런지 꽤 오래 그리고 천천히, 붉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언젠가 추운 겨울에 해넘이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흥이 깊었던 남편은 여름에 보는 해넘이는 그때만은 못한 모양이다. 너무 추워 와들와들 떨면서 보긴 했지만 그때 노을이 더 좋았다며 아쉬워한다. 달아 공원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어둑하지만 빛살은 남아 풍경들은 아직 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바닷가 마을에 하나둘 켜지는 불빛과 바다의 모습은 한데 어울려 안온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통영을 왜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지 가히 이해가 되었다.
오랜만에 한잔하고 싶다는 남편의 바람에 따라 차를 숙소에 두고 택시를 타고 통영 시내로 가서 횟집에서 한 상 잘 차린 저녁을 먹었다. 남편과 나, 아들 다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어쩌면 처음일 거 같은 시간, 생활이 주는 압박과 긴장을 내려놓고 편안하고 맛있는 시간을 즐겼다.
숙소로 돌아오니 베란다 밖 바다는 검은 빛으로 젖었지만 불빛들로 반짝이며 시원한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풍경이 너무도 마음에 드는지 담배 한 대 피운다며 베란다 의자에 앉아 꽤 오랜 시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는 폭염주의보가 내렸지만 바닷가라 보송하고 쾌적하게 잠들었다.
화장실에 가느라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밖은 이미 훤해 있다. 날이 흐린가 싶어 밖을 나가보니 수평선 가까이가 불그스레하다. 그제야 시간을 확인해보니 5시 30분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던 것이다. 늦게 잠자리에 드는 습관 탓에 해 뜨는 것을 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생일이기도 하여 나는 해 뜨는 것을 기다리기로 한다. 바다에 떠있는 섬들 가운데 하나의 산등성이가 훤해지며 붉어진다. 핸드폰 카메라로 해 돋는 모습을 찍는데 눈으로 보이는 풍경이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기지 않아 안타깝다. 내 시선 속의 해는 저렇게 크고 붉은데 카메라 안에는 그의 백 분의 일, 아니 만 분의 일도 담기지 못하는 거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제 저녁 7시 30분에 해넘이를 보고 채 12시간이 안 돼 해돋이를 보다니......... 생일 아침, 반평생 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을 이 아침에 만끽하며 신기해한다.
오전에만 열린다는 서호 시장으로 가서 유명한 시락국을 먹었다. 비록 미역국은 아니었지만 생일 아침 속풀이로는 그만이었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통영 루지를 타기 위해 미륵산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단 걸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오미사 빵집에 들러 꿀빵도 하나 샀다. 10시부터 매표한다는 안내를 검색해 10시 좀 지나 통영 루지 탑승장에 도착하니 벌서 관광버스 3대가 정차해 있었고, 그 버스에서 내린 듯한 젊은 관광객들이 줄을 구불구불 길게 서있었다. 속도감 있는 유흥을 즐길, 한창의 나이인 아들에게는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돌아가 오후 수업을 해야 하니 루지 타기는 포기하고 대신 미래사 편백나무 숲을 가보기로 했다.
차로 오르기에도 매우 힘이 들 만큼 가파른 길을 한참 오르니 편백나무 길이 보였다. 중간 즈음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오르면 좋겠다 싶기도 했지만 이미 저질 체력으로 전락한 우리 부부는 미래사 주차장까지 그냥 차로 올랐다. 내리자마자 작은 못이 보이는데 녹음에 잠긴 풍경이 소담스러우면서 아름다웠다. 은은한 편백향을 마시며 산사로 들어서니 잘 가꾸어진 뜰이 웅장하지는 않지만 무척 아름다운 경내가 눈길을 잡았다. 폭염의 햇빛도 이 산사는 피해가는 듯 마루 끝에 앉아 있으려니 소슬바람이 옷깃으로 스쳐 소르르 잠이 들 것 같았다. 눈으로는 시원한 신록이 가득 들어오고 귀로는 청량한 바람 소리, 그리고 은은한 편백 향. 힐링이란 단어가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난다.
힐링. 통영으로의 하루 여행. 그동안 삶에 지친 남편과 나,그리고 군 생활에 답답했을 아들, 우리 세 사람에게는 치유의 여행이었다. 특별한 목적도, 일정도 없이 떠나 많은 말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마음 가벼운 여행이었다.
돌아오는 길, 중앙 시장에 들러 친정엄마 좋아하는 멍게 젓갈 사고 아귀포, 잔새우 좀 샀다. 그리고 시장 한복판에서 작은 딸의 왁자지껄한 축하전화도 받는다. 생일 축하해. 친구들까지 동원해 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