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세상에서 길을 찾다.
교회에서 친화력이 뛰어나고 언변도 좋아 배울 점이 많다고 느껴지는 Y를 만났다. 그들은 부부가 모두 예일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항상 직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미 미국인 매니저가 있었지만 아무 기술도 없는 그녀에게 최고 기술자보다 더 높은 급료를 지급하기로 하고 매니저 격으로 가게 하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이 거의 되어가는 무렵에 그녀가 긴히 이야기할 말이 있다면서 직원들이 총파업을 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 왔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근무시간이 길어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7시까지 하루에 9시간 30분 영업을 하지만 손님이 몰리면 어떤 때는 10분에서 20분까지 지체되는 수가 있었다. 그것이 미안해서 종종 늦을 때가 있으니 8시까지 일을 하고 하루 10 시간으로 계산해서 5일 근무로 6일에 상당하는 주급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해서 다들 만족해했는데 별안간 마음이 바뀌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 미팅을 해서 현재대로 하는 것과 하루에 1시간 일찍 퇴근 하고 6 일 근무에 6 일치 주급을 받는 것을 투표로 하니까 12명 직원 중에 10명은 현재대로 하기를 원했고 단지 2명만 6 일 근무에 1시간 일찍 퇴근하기를 원했다. 그녀의 주장은 결국 오버타임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당시에 아직 미용업계는 오버타임 수당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여성 신학, 해방신학 공부를 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장사가 안될 때 고용주는 손해를 보면서도 임금을 주어야 하는 현실이 보일 리가 없었던 탓에 이론적으로만 접근했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헤어졌고 다시 만나기까지는 십여 년이 걸렸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목사가 되어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그 교회에 나가서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보고 인터넷으로 진보적인 신앙 사이트를 알게 되어 전혀 새로운 것들을 배울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아담이 떠난 것에 대한 풀 길 없는 의문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시절 인연’에 대한 아주 의미 있는 글을 읽었다.
“아들의 죽음 후 황망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누님이 가진 전통적인 기독교적 해석으로는 자식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나는 종교를 불교로 바꾸어 보라고 권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누님은 “목사가 별소리를 다한다.”고 하면서 천국에 가서 아들을 다시 만난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누님이 종교를 바꾸지 않은 것을 지금도 아쉬워한다. 왜냐하면, 만일에 종교를 바꾸었다면 인생과 삶에 대하여 ‘더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글을 쓴 이는 온라인을 통하여 활발하게 글쓰기를 하는 지성수 목사였다. 사실은 2008년부터 온라인을 통하여 그의 글을 많이 읽어왔기 때문에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졸지에 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 속에 빠진 누님에게 한 이야기는 아담을 생각 하며 슬퍼하고 분노하는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 글을 읽고서 처음으로 그의 글에 댓글을 달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페이스북을 통하여 대화하기 시작했다. 2015년 11월에 미국에 올 일이 있다고 해서 뉴욕에 꼭 다녀가도록 부탁을 했다. 뉴욕에서의 4박 5일 짧은 일정을 지내는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지목사와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내 이야기를 듣고 지 목사는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권유 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이야기를 글로 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이 글로 써서 남겨놓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 목사는 해방 전에 태어난 여자로서 어려서부터 남다른 조건 속에서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내 이야기가 소개될 수 있다면 답답한 이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할 젊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꼭 글을 써보라고 강력하게 격려해 주었다.
지 목사가 뉴욕을 떠난 다음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 사건들을 요약을 해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내면 지 목사가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 보내고 내가 다시 보충하고 하는 방법으로 1 년 동안 매일 같이 교신을 하면서 이 글이 만들어졌다. 글을 쓰면서 살아온 날들을 다시 곰곰이 되씹어 보면서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성찰할 수 있게 되어서 남들에게 읽히기에 앞서서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나 자신에게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서로가 바쁘고 뉴욕과 시드니가 시간이 정반대이어서 대화를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피차에 글로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애 편지를 보내듯 즐거운 마음으로 매일 글을 주고 받아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 반대 편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공동의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 살고 있는 덕분이다.
네일 협회와의 동행.
1980년에 미국에 왔었을 때, 한인 여성들이 할 수 있었던 직업이라곤 봉제공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일본식당에서 서빙하는 일은 지금으로 보자면 삼성에 취직하는 정도로 선망하는 일이었다. 네일산업은 미장원 한 구석의 테이블 하나에서 일하던 것을 독립을 시켜서 하나의 고소득 전문직으로 끌어 올려 뉴욕 한인 교민 사회 경제에 한 몫을 단단히 하게 되었다. 또 한국에서 새로 이민 온 여성들에게 단기간의 훈련으로 직업을 얻을 수 있게 하고, 홀로 사는 여자의 수입으로도 아이 둘쯤은 무난히 공부시킬만 하던 우리 교민들의 젖줄이었다.
네일업계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네일 트렌드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세탁이나 청과, 마켓 등 타 이민 비즈니스 업종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세련된 감각과 고급화 전략으로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일대의 주요 상권을 선점, 뉴욕 네일업계를 주도하고 있다. 네일 살롱 수가 늘면서 서비스도 업그레이드 되었고 단순히 손톱, 발톱을 다듬어주는 서비스에서 페이셜· 마사지· 왁싱 등 스파의 개념을 더해 고급 살롱으로 진화했다.
70년대까지 세탁소나 채소 장사 등을 제외하고는 주로 한인들끼리 비즈니스를 하던 한인사회에서 네일업은 완전히 주류 백인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한류 열풍으로 한국 연예인들이 타민족들에게 인기를 끌고, 한인 미용실의 퍼머 기술이 입 소문을 탄 영향도 적지 않다.
지금은 전혀 상황이 변했지만 그 동안 네일업은 여자가 소자본으로도 손쉽게 열 수 있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서 가격 경쟁도 심해지고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 성수기에는 직원을 보충하기 위해서 쩔쩔매야 했다. 기술이 있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으로 옮기려고 하기 때문에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직원들이 기가 살고 업주들은 기가 죽는다.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은 네일 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돈보다는 한국에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다. 어느 날 남편이 바디샵을 하는 그리스인 지역인 아스토리아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근처에 있는 네일샵에 가서 패티케어를 받으러 가보았다. 한국 여자 주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묻길레 롱아일랜드에 산다고 했더니 "거기에 해피라는 여자가 가게를 여러 개 하면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다는데 아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잘 모른다고 하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또 가게를 시작한지 10여 년 후 우연히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진행자가 "이 분이 그 유명한 해피 네일의 해피 씨입니다."라고 소개를 해서 어리둥절했다. 나는 정신 없이 달려오느라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나에 대한 소문이 나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작 네일협회에 관여하게 된 것은 5~6대 회장을 지낸 이승렬 회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1990년 다섯 번째 가게를 준비 중일 때라서 단체에 몸담을 형편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존경하던 분의 권유를 마다하기 어려웠다. 당시 이승열 씨는 네일 협회 수석부회장으로 박종규 회장을 도와서 새로 생긴 네일 면허의 까다로운 조항을 완화 시키는 일과 네일 잡지 창간 등의 일로 애를 많이 쓰고 있었다. 고대 동문회장을 지내서 뉴욕에서 인맥이 넓은 이승렬 씨는 뉴욕 네일 협회의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한 해법을 제시해 주시는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그때 이후 총무, 수석부회장을 거쳐 2003년에는 이사장을 지내면서 장장 20년 세월을 협회와 함께 울고 웃고 하며 협회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죽으면 ‘네일협회장’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해놓았는데 요즘 같아서는 그 희망이 지켜질지 모르겠다.
2015년 5월에 한인 뉴욕 타임스의 왜곡되고, 날조된 기사 때문에 네일 산업이 뿌리까지 흔들리는 날 벼락이 떨어졌다. 처음에 뉴욕 타임즈 기사를 접했을 때 30 여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스를 얻은 것인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인력난에 허덕이는 때에 일당 10, 20, 30 불에 일을 하는 스페니쉬나 중국인이 어디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요즘은 가격경쟁이 심해서 세금과 높은 임금을 제하고 나면 업주들 대부분이 종업원 수입보다 못한 것이 네일 업계의 현주소이다.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가게 치고 한인업소만큼 시설에 투자하고 고급재료를 쓰고 임금을 많이 주는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인데 한인 업주들이 폭언과 폭행까지 하는 일들이 있고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교육의 대가로 주인이 돈을 받는다는 기사가 마치 한인업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악마의 편집이 되었다. 이번 기사 때문에 생긴 법령이 현실적 상황에서 100% 실행된다면 초 대형 업소, 약 10~20%만 버틸 수 있고 나머지는 퇴출될 위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미국 언론의 의도는 이민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네일업계의 약점을 최대한 부각시켜 네일업계의 생태계의 변화를 유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러나 네일 산업계가 대자본 위주로 변한다면 당연히 서비스 가격이 상승되어 손님들에게도 부담을 주게 될 것이고 직업을 잃은 기술자들이 저소득층으로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정부의 도움을 신청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세금이 지출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생존의 기로에서 위기를 느낀 뉴욕의 3000여 한인 네일 업계는. 2016년 2월 29일 7개의 대형 버스를, 중국 네일협회에서는 8개의 대형버스를 동원 총 15대의 버스를 타고 1천여명이 올바니 뉴욕주청사 의원 회관 건물 월홀에 일제히 집결해 대규모 항의 피켓 시위를 가졌다. 이날 1천여명의 항의 시위 참가자들은 피켓을 통해 △네일살롱 임금보증보험인 웨이지 본드(Wage Bonds)의 철회 △더 이상 네일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 것 △인종차별을 하지 말 것 △이중잣대를 들이대지 말 것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지 말 것 △우리는 지금껏 말한 것들을 관철 시키기 위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등의 메시지를 전하며, 지난 시간 참고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시위에는 브루클린에서 직접 네일살롱을 경영하는 한 업주가 나와서 “주정부에서 나온 인스팩터가 느닷없이 조사를 나와 문을 잠그고 한 사람씩 다른 방에 불러다가 일대일로 면접을 하고 8000달러의 벌금을 내라고 했다”며, “나는 당시 마치 중범죄자 취급을 당한 것 같았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 잘 내고 법을 잘 지키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규정대로 다 지키니까 환경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울먹였다. 이 밖에도 1천 여명의 시위자들은 청사 밖으로 나와서 준비해 둔 매니큐어와 네일 싸롱에서 쓰는 연장, 집기들을 무덤처럼 쌓아놓고 이대로 두면 네일업은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해서 절실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날 나는 70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시위를 하느라고 팔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더니 집에 와서 녹아 떨어져 버렸다. 힘은 들었지만 억울했던 마음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터트리고 나니 일단 속이 시원하기는 했다.
아침 8시 15 분부터 45분까지 30분 동안 뉴욕 한인 밀집 지역인 훌라동(후러싱)에는 네일 업소 직원들을 픽업하는 미니밴과 15인승 차가 서 있거나 지나가거나 한다. 길가에는 작은 키, 긴 생머리, 터질 듯 꽉 조인 청바지나 쫄바지에 쫄티를 입은 어린 남미 여성들이 손에 런치백을 들고 자기들을 픽업할 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3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직원들을 위한 차량 서비스를 해 온 터라 후러싱의 골목 골목 변천사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돌다 보면 같은 얼굴을 보게 되어 낯이 익은 얼굴들이 많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얼굴들 중에 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니 벤의 운전대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더 이상 종업원이 아니고 업주가 되었다는 의미일 터이다.
초창기에는 길거리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젊은 한인 여성들이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며 한인 여성들 자리에 중국 남자나 중국 교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여성과 중국 교포 여성들은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는 중국 교포들도 보기 힘들어지고 남미계통 사람 일색으로 바뀌어져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네일 면허를 취득할 수 없어서 안정적인 직업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단속이 심하지 않아서 라이센스가 없이도 또 불법 체류자도 직업을 갖기 쉬웠는데 2015 년부터 단속이 강화된 탓에 그들을 채용할 수 없어서 가뜩이나 여름이면 심했던 인력난이 인력대란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가게도 풀타임으로 일하는 기술자 11명이 필요 했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운 숫자로 떨어졌다. 자격이 있는 기술자를 구하기 힘들어서 나도 하는 수 없이 손님을 받아야 할 판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아침에 직원들과 차 안에서 함께하는 시간들이 참 귀중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아침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서 나눠 먹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유익한 정보 교환도 하고, 교양교육(?)도 하면서 보내는 시간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가졌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넉넉함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나로서는 하루 하루가 감사할 날이지만 한인 네일업계가 위기를 맞고 있어 진정으로 안타깝다. 중국인들의 저가공세의 영향이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네일업계 종사하는 인력들이 나이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젊은이들이 더 이상 유입이 되지 않아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중국계나 베트남계는 2, 30대가 주류인데 비해서 한국 기술자들은 5, 60대가 전반이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네일업은 특성상 미국에서 자란 2세들 보다는 한국에서 새로 유입되어 온 사람들이 유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근래에 오는 한인여성들의 대부분은 유학생이거나 아니면 좀 더 쉽게 돈을 버는 유흥가로 빠진다고 들었다. 주인 편에서 볼 때도 직원들이 대부분 이민 1 세대이기 때문에 1.5세대나 2세가 이어 받아 경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아우성인데 만일 뉴욕의 네일 업계에 젊은 피가 수혈될 수 있다면 피차간에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기에는 넘어야 할 기술적인 문제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진출시키는 길만이 인력난 해소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된다. 가게를 그만 하고 싶어도 젊은 한인들 보다는 타민족 사람들이 더 흥미를 보여서 한인 네일업의 미래가 걱정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은 30여 년 전 젊은 한인들이 고령의 미국 네일 가게를 흡입하듯 접수하던 시절의 반복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