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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 한국경기시인협회 / 계간 한국시학 원문보기 글쓴이: 嘉南 임애월
■□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공복의 밥그릇에 담긴 놀빛, 탁월한 역설의 시학
박 복 영 시인
-《한국시학》55호 <이 계절의 시인>이신 박복영 시인과의 인터뷰도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문학적으로 꼭 만나고 싶었던 시인님인데 지면으로나마 만나 뵙게 되었다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조심스럽게 노크해 본다. 똑똑똑... -
임애월 : 박복영 시인님, 안녕하세요?
꽤 오랜만인데 이렇게 지면으로 뵙게 되어 아쉽습니다. 직접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 잔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웃음)
박복영 : 그러네요. 미당 생가 문학기행 이후이니 참 오랜만이네요. 건강 잘 챙기고 계시지요?
임애월 : 네, 저는 인구밀도가 아주 낮은 산골짜기에 살다 보니 대도시에 사는 분들에 비해 코로나 관련해서는 비교적 안전하긴 합니다.
사실 저는, 여름이 되어 기온과 습도가 높아지면 코로나가 거의 잡힐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집회 발 확진자가 마구 쏟아져 나오니 정말 기가 막힐 뿐입니다. 국력이 모두 코로나와의 싸움에 소진되는 것 같아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박복영 : 동감입니다. 쏟아지는 확진자보다도 감염 원인을 추적할 수 없도록 대하는 저들의 행동이 국민 모두를 땡볕에 서게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임애월 : 네, 개개인이 모두 방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고약한 코로나를 하루빨리 종식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장마가 길어도 너무 길어 농부인 저로서는 그 동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었는데... 이제부터는 땡볕이네요. 그래도 맑은 태양을 보니 살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부터 알려 주시지요.
박복영 : 참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뭐 사회적인거야 다 아시는 주변일들이니 접어두고요. 개인적으로는 직장 정년이 이년 반 정도 남아서 퇴직 후 삶의 방향을 어찌 해야 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지요.
틈틈이 문학적으로는 니체의 말처럼 과정을 없앤 시를 써 보려고 시도 중인데 쉽진 않네요.
임애월 : 과정을 없앤 시요? 아찔하게 현기증이 나도록 핑핑 돌아가는 이 시대는 느슨하게 풀어진 과정들 중 많은 부분이 이미 생략되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시인님 고향이 전북 군산이지요? 언제쯤 고향을 떠나오셨는지요?
공광복 : 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전북기계공고, 익산)를 진학하면서 부터였으니 꽤 오래 되었지요.
임애월 : ‘고향’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요? 군산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냄새 같은 게 분명 있으시죠?
공광복 : 시나 시조의 작품에서도 고향, 군산에 대한 작품들이 있는데 특별한 냄새라면 아무래도 금강을 낀 동네여서 비린 살 내음 같은 치열한 삶의 냄새겠지요. 현재 화력발전소 자리가 갈밭이었는데 고은 시인님의 만인보에도 나오는 갈밭탕이 제가 태어난 동네여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임애월 : 군산이 항구라서 더 그럴까요, 어느 곳이나 항구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되니까요.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셨는데 시를 쓰기 시작한 동기와 등단 배경도 듣고 싶네요.
박복영 : 삼십대 중반 늦은 나이의 등단이었지만 사실 시는 고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결국 쓰기 시작한 동기가 등단 배경과 방향을 같이 했다고나 할까요. 고등학교시절 새 책을 사볼 형편이 되지 않아 고2 때 헌책방을 들른 적이 있었지요. 거기서 표지가 노란 월북 작가 시선집에서 정지용 시인의 「향수」란 시를 읽고 아, 우리글도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가 있구나, 아마, 그 날부터였을 거여요. 시와 사랑에 빠져버린 게. 아무튼, 책 모서리가 닳도록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임애월 : 정지용의 「향수」에 매료되어 결국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군요. 좋은 시 한편이 한 사람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은 셈이군요. 문학의 위대한 힘입니다.
등단 20년이 다 되어가는 2014년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은, 장르를 바꿔보고 싶으셨던 건가요?
박복영 : 사실 시에 대한 갈망보다 실적(?)이 저조하다보니 나름 원인분석을 했던 것 같아요. 뭐가 문제인지 시집들을 되돌아보니 말이 많았더군요. 시 속에 할 말을 다하려 했던 거여요. 그래서 말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게 시조란 장르였다고 할까요. 그래서 시작한 시조가 먼저 실적을 냈다고나 할까요(웃음)
임애월 : 자신의 문학적 삶에 대한 점검인 셈이었네요. 그리고 욕심(?)이 참 많으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사적인 술자리에서 김준기 시인께 박복영 시인님은 어떤 분이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죄송) 그때 김준기 시인이 ‘시적 대상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시적 내공이 깊다. 문학적 열정은 뜨겁고, 덩치(?)에 안 어울리게 다정다감하며 은근히 눈물도 많은 시인’이라고 하셨어요. 그 ‘열정’을 저는 욕심이라고 표현했고요.(웃음)
그 이후에도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또 당선되셨는데 여러 번 응모한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박복영 : 쑥스럽네요. 준기 형님은 늘 저의 문학적 열정을 칭찬해 주시는데 사실 문학적 열정은 준기 형님이 더 대단하지요. 특히, 시평을 할 때면 정말 진지하시거든요. 그러다 술 한 잔 드시면 더 없이 좋은 선배로 다시 돌아오지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형님입니다.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고 이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는데 시조가 당선되기 전까지 경인일보에 시를 몇 번 투고 했었지요. 세 번인가 심사평에 올랐는데 결국 당선엔 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시조가 당선된 후에 전북일보에 도전해서 결국 당선되었지요. 사실 여러 번 응모한 이유는 내 시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 여러 번 응모한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임애월 : 첫 시집 『구겨진 편지』의 분위기가 궁금해요. 구할 수 없어서 못 읽었거든요.
박복영 : 아, 그래요. 첫 시집이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애착이 많은 시집이지요. 서정성이 강하고 올올이 기억의 끈을 풀어나가려는 고민이 역력했던 시집이었으니까요. 시 해설을 쓰신 정한용 시인의 말처럼 “썩지 않는 기억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박혀 쓰라린 감정의 상처들이 오롯이 새 살을 틔우고 있는 시집이지요. 물론 아쉬움도 많은 시집이기도 하지만요.
임애월 : 첫 시집은 그 생김이야 어떻든 마음 깊이 두고서 가끔씩 지나온 그 흔적들을 꺼내 들여다보곤 하는데 박복영 시인님의 첫 시집 출간은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이미 말씀하신 아쉬움은 빼고요.
박복영 : 네, 첫 시집을 한국문예진흥원기금을 지원받아 현대시(한국문연)에서 출간했지요. 어찌 보면 쉽게 낸 것 같은데 심정은 이렇게 부족한 시집을 내 놓아도 되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 만큼 가슴 아픈 시편들도 있어서 조심스러웠는데 호기를 부린 것인지도 모르지요
임애월 : 한국문예진흥원 기금을 받아 출간하셨으니, 첫 시집부터 확실하게 작품성을 인정받으신 거네요.
두 번째 시집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는 그 표제시를 가져와 봤어요.
산 아래 바람들이 올라와 잡풀처럼 덜컹거린다. 어디선가 넝
쿨처럼 가슴에 금이 가고 바람이 길을 낸 틈을 따라 우, 우 거
미줄이 솟아난다. 관청리에도 긴 여름이 왔다 햇살은 파란 기
왓장을 쪼며 연신 파고든다. 누군가 이글거리는 땡볕에 뚜벅뚜
벅 땀방울을 찍으며 약수터를 오른다. 저 발자국을 따라가면
빈집 같은 내 가슴에도 藥水 같은 휴식이 찾아올까. 젊은 生의
꽃길 같은 기억들 남아 있을까. 돌아보면 아직, 청보리들이 푸
른 물결로 출렁이고 있을까. 지상 가득 찾아오는 햇살들. 가만
히 귀 기울이면 햇살의 얼굴마다 숨은, 무수한 상처들이 박혀
있다. 햇살이 直立으로 걸어오는 길 위에 나의 문장은 서 있다.
-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 전문
“관청리”는 실존하는 마을이겠지요? 그 마을이 이 시에 등장한 배경이 있나요?
박복영 : 그렇습니다. 강화도에 근무하던 때였는데 관사가 관청리에 있었어요. 산중턱인데 새벽이면 약수터를 오르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들이 잠든 내 기억을 깨우는 소리로 들리곤 했지요. “귀 기울이면 햇살의 얼굴마다 숨은, 무수한 상처들이 박”힌 길 위에서 발자국 소리들이 나에게 시적 질문을 자주 했던 것 같아요
임애월 : 아, 강화도에 있는 마을이군요.
“햇살이 直立으로 걸어오는 길 위에 나의 문장은 서 있다” 구절에서는 삶의 긴 시간 속에 더러 “상처들이 박혀 있”다 할지라도 그 상처를 아프게 통과하는 빛살로 당당하게 “직립”보행(고집)으로 시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저는 읽습니다만.
박복영 : 약수터를 오르든, 기억의 출생지를 찾아가든, 우리들의 발자국에는 소리(아픔)가 낀 상처들이 박혀 있지요. 아픈 상처 없이 생을 찾아가는 사람 없듯, 우리는 흔들리는 생을 살지만 직립으로 찾아드는 햇살에서 걸어야 할 이유들을 찾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아픈 상처의 시편들 속에 햇살을 끄집어냈던 것인지도..
임애월 : 세 번째 시집 『거짓말처럼』은 64편의 연작시로 묶으셨어요. “거짓말처럼”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때론 희망이나 기대 같은 게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로 많은 걸 부정한다고도 읽힐 수도 있거든요.
박복영 : 그렇습니다. 저는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프고, 서럽고, 슬픈 우리 삶에서 절망들이 꽃 피울 수 있는 배후를 찾고 싶었지요.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길이 벼랑이 아닌,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긍정적 쉼터 같은 바닷가. 그런 면에서 보면 부정의 역설이 되겠네요.
임애월 : 부정적인 것들이 결국은 긍정이 되는 ‘부정의 역설’인가요? 박 시인님은 마법사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나 봅니다.(웃음)
이 시집에서 “세상은 흔들릴수록 살만 한 거”라고 하셨는데, 시인님은 어린 시절에는 어떤 소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요. 분명 모범생이었을 것 같지만요.
잠시 들른 빗물을 베어 문 갈라진 흙이 향내를 푼다. 기억을 더듬는 바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립된 저수지 주변에서 중얼거린다.
돌아오는 길. 멈춰 서서 울컥, 울어버리고 싶은 생각들이 감춰진 군데군데. 끝끝내 놓지 않는 삶의 집착에 나른한 졸음이 흔들린다.
세상은 흔들릴수록 살만한 거라며, 일어설 때마다 비로소 풀어지던 질척한 생(生)의 뼈아픈 그림자들.
무명(無名)의 발자국을 안고 마르고 늙어가는 진흙의 얼굴 위로 환청처럼 시간의 영혼이 파랗게 자라고 있다. 무심하게 무심하게
- 「거짓말처럼 4 – 춘니(春坭)」
박복영 : 모범(?)생은 아니었고요, 없이 살아 삐뚤어진 세상(어린 제 눈에 비친)을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이 무척 싫었지요. 정말 뭔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해 본거 같네요. 정말 답이 없던 시절이었지요. 공부는 잘 한다는 소린 들었지만, 먹는 거조차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하지만 그때 했던 경험들이 시를 표현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네요.
임애월 : 그 말씀에 저도 격하게 공감합니다. 똑 같은 시대를 비슷한 과정으로 살았던 거 같아서요.(웃음)
“이 시집을 사랑하는 어머니께 바치”는 연유를 알고 싶어요. 절절한 사모곡이 아니라 오히려 눈물이나 우울, 어둠, 겨울, 슬픔,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어휘나 구절들이 많아 자꾸만 눅눅하게 가라앉게 되던데요. 물론 깊은 은유는 독자들조차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요.
박복영 : 네, 맞아요. 어린 제가 느낀 아프고, 서럽고 슬픈 삶의 중심에 어머니가 계셨지요. 어머니의 아픔이야 오죽했을까요.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저를 세워 방향을 가르켜 키워주신 어머니가, 제 시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고리가 되는 건 부정할 수 없지요. 아마 독자님들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임애월 : 사실 박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 많이 아프고 서러워요. 깊숙이 숨겨둔 눈물샘이 터지려고 합니다.
시집 『눈물의 멀미』의 시인의 에스프리에서 “이번 시집에서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도출하려고 애를 썼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시어가 바라보는 눈, 그 눈은 나와 사물의 눈일 것이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눈일 것이다” “순간적인 감정의 반란이 시작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슴 내부를 찢고 나오는 순간적 발화된 감정 이때, 말 할 수 없는 폭발. 그 무엇(빛, 속도, 광음 등)이라는 뜻”이라고 하셨는데, 내면에서 예고 없이 튀어나온 다듬지 않은 어떤 격정 같은 것인가요? 그렇다면 순간적인 발화의 이미지는 어쩌면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복영 : 그래요. 시적 감정. 이것은 만들어낸 시어가 아닌 감정이 생각을 찢고 터져나오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독자들이 느낄 공감대 같은, 짧지만 디카시나, 단시조가 이런 시적 감정을 포용한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시속에도 당연히 존재하는 시인의 감정이지만 아시다시피 시는 감정의 이미지화이니 “눈물의 멀미”라는 감정도 그런 순간적 발화라고 보고 싶네요.
눈물은
달빛 머금은 이슬 같은 것이니
처음, 아침이 오는 구부러진 길에
마중 나온 풀잎은
욱, 멀미를 할 것이나
눈물이 넘어져 일어설 때까지 당분간
떨어뜨려놓고
멀미가 잦아든다면
식은 눈물이 무릎을 툭툭, 턴다면
살면서 견뎌야 할 하루는
이제 바닥에 있다
열꽃처럼 몸속에 돋은 눈물이 밖을 향하여
피어오르는 것은
몸 안에 허공을 두고 싶기 때문이니
흔들리다가
차갑던 눈물이 뜨거워지는 순간
풀잎은 우뚝, 일어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이고
꽃이 될 것이다
눈물의 몸살이 깊다
- 「눈물의 멀미」전문
임애월 : 그 순간의 이미지는 “차갑던 눈물이 뜨거워지는 순간”이며 그때 “풀잎은” “꽃이 될 것”이기 때문에 순간적인 이미지 포착은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작업이겠네요. “몸 안의 허공”이 밀어내주는 그 순간을 위하여 눈물은 수없이 넘어지곤 하나 봅니다.
박복영 : 발화되는 감정의 순간이 이미지로 포착되어 표현되는 시어는 어쩌면 모순의 이미지로 포장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순간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생성되는 이미지를 멀미로, 잎은 꽃이 피는 순간으로 밀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을 긍정적 용서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임애월 : 순간의 이미지 포착은 앞에서 말씀하신 “과정을 없앤 시”와도 상통하나요?
박복영 : 아니요, 순간의 이미지 포착은 사물에 대한 단면, 크로키 같은 것이고요.
“과정을 없앤 시”는 기와 결만 표현하고 승, 전,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 여백 같은 것이지요. 독자의 상상력이 시의 과정을 끌고 가는 거거든요. 저 나름대로 시도하고픈 것이어서 방법론을 구상중인데... 힘드네요.
임애월 : 아하, 그런 의미군요. 작품 완성이 독자에서 마무리되는군요. 그런 고난이도의 독서를 하려면 아무래도 문학적 안목이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시어들이 내적 무서움을 지니고 있다면 좋은 시”라고 하셨는데 “무서운 내공” 즉, 내공의 깊이를 위해, 강가에서 찰방거리는 게 아니라 “시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하셨잖아요? 그 말씀 후 7년이란 시간이 흘렀거든요. 이제 그 강물 깊숙이 뛰어드셨나요?
박복영 : 그땐 정말 뛰어들면 되는 줄 알았었어요. 그런데 강가를 거닐면 거닐수록 강물의 표면은 더욱 파래져 깊어지더군요. 함부로 저 같은 애송이에게 시적 내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젠 물살의 흐름이나 물결의 잔 미동에서 조금은 니체의 말을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없다”란 말처럼.
임애월 : 겸손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늙은 남자가 지게를 지고 모퉁이를 돈다
남자가 끌고 오는 길은 밥그릇이다
걸어온 만큼 밥그릇에 밥이 찼어야 했다
공복의 밥그릇에 담긴 놀빛을 들고
남자가 두리번거린다
밥그릇은 남자의 어깨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어둠속에
지게를 내려놓으려
몸을 숙이자 숟가락 소리가 났다
숟가락은 이제 밥그릇을 믿지 않는다
- 「낙타와 밥그릇」 전문
2016년에 시집 『낙타와 밥그릇』을 상재하셨지요?
박완호 시인은 시 해설에서 ‘모순된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을, 박복영 시인은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공복의 밥그릇에 담긴 놀빛’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불행한 삶의 현실을 넘어서는 탁월한 역설을 통해 남다른 시적 성취를 펼쳐 보인다. 이러한 역설의 시학은 시인이 지닌 남다른 언어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은 현실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현실의 부조리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시인이 지닌 독특한 미학적 세계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평 했어요. ‘공복의 밥그릇에 담긴 놀빛’이 ‘역설의 시학’으로 서늘하게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더 아프네요.
박복영 : 밥그릇의 이미지를 끌어오기가 현실적으로 일차적이자 표면적이어서 좀 고민을 했었지요. 하지만 낙타를 붙이니 이미지는 알 이미지가 되더군요. 독특한 미학적이란 말은 아마 다른 시 중에 “벗어놓은 신발에서 밥 냄새가 난”다는 것 같은 이야기일 듯 싶네요. 아프고 슬픈 우리들 이야기들이지요.
임애월 : 사실 “낙타”만으로도 고단해 보이는데 “밥그릇”이 더 완강하게 고단해 보이는 건, 밥그릇을 믿지 않는 “숟가락”이 삶이라는 실재적인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고 일러 주고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박복영 : 네. 고단하고 서러운 우리네 삶처럼 자신의 몸에서 나는 숟가락 소리는 그 만큼 열심히 세상을 살아 왔다는 이야기일 텐데 내가 밥그릇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열심히 살아도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불협화음이 끼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 보면 몸 안에 소리는 세상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겠지요.
임애월 : 세상에 대한 항거도 직설적이 아니라 박완호 시인의 평처럼 ‘현실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현실의 부조리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거군요.
그런데요, “밥그릇은 남자의 어깨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에서 왼쪽이 의미하는 게 궁금합니다. 세 번째 시집의 「먹줄처럼」에서도 “한 남자가 계단을 오르네/유난히 뒷굽 닳은 왼쪽 구두가 덜컹거리네”에서도 그 왼쪽이 의미하는 게 사실 궁금했거든요.(웃음)
박복영 : 그것은 왼쪽의 의미보다 기운다는 것의 의미가 더 클 거여요. 다만 방향을 오른쪽보다 왼쪽을 택한 것은 몸의 주체는 나인데 일상적 방향은 거의 오른쪽이어서 숟가락은 밥그릇을 믿지 않는다는 것처럼 익숙하고 편한 삶의 행동이나 동행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의 암시적 의미가 있지요.
임애월 : 그렇군요. 오른쪽은 정말 옳은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앞에서 시조 얘기를 잠깐 나눴는데 여섯 번째 시집 『바깥의 마중』은 시조로 묶으셨어요.
박복영 : 네, 시조집으로 첫 시집이지요. 시조 등단 이후이니까요.
임애월 : 하하, 그런가요? 첫 시집이군요.
외형적인 율격을 떠나서, 시에 비해 시조는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던가요?
박복영 : 단언컨대 절제미지요. 몇 음보만으로도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정말 매력적인 장르지요. 할 말을 다하려 했던 시에 비해 말을 다 하지 않고도 내 뜻을 전할 수 있는 게 매력이지요.
임애월 : 사실 시조는 격조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거든요. 같은 이야기도 시조로 썼을 때 더 품격이 있어 보이는 건, 저만의 착각인가요.
정수자 시인은 해설에서 ‘박복영 시인의 시조 보법은 섬세한 감각과 촉기 어린 문장들로 옥죄지 않는 정형시의 부드러운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하였던데, 우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시와 시조 중에서 어느 쪽에 마음이 더 끌리시는지요?
박복영 :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각각 서로 다른 매력이 있는 게 사실이니 어느 한 쪽이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설명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하지만 시는 이미지가 끌어주는 배후의 아름다움이, 시조는 함축된 시어가 전하는 묵직한 생의 깊이가 있어 한쪽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네요.
임애월 : 그렇겠지요. 어떤 그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이 시집으로 <천강문학상 시조대상>과 <성호문학상>을 수상하셨어요. 문학적 ‘실적’이 또 쌓인 셈인가요?(웃음)
박복영 : 네, 천강 문학상은 응모작 “저녁의 안쪽”외 3편이고요. 성호 문학상은
“낙타와 밥그릇”으로 수상했지요. 그러고 보니 실적(?)이네요. (웃음)
임애월 : 단도직입적인 질문 하나요... 시인님께 ‘시’는 무엇인가요?
박복영 : 운명이지요. 시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쯤 현실의 터널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겠지요. 여튼 시는 내 삶의 앙꼬(단팥)같은 존재지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 찾아가야할 길과 이유를 알려주었으니까요.
임애월 : 정지용 시인의 시 한편을 만나 결국 그 길로 들어서고, 이제 그 길이 운명이 되었군요. 아마 처음부터 분명 시인으로 타고난 운명이었을 겁니다.
시인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어떤 작품인가요?
박복영 : 아무래도 「저녁의 안쪽」이지요. 귀갓길의 안과 바깥, 어두움과 밝음, 따듯함과 차가움, 치열함과 고단함 등이 다 내포되어 있어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어둠의 기척으로 등불은 내걸린다
응집된 소리들과 분할된 소리들이
나직이 속살거리며 무게를 더는 시간
시선은 바깥으로 마중을 나간다
바람의 발자국을 경청하는 들녘에
나른한 젖은 노동을 끌고 오는 맨발들
더불어 걸어야할 시간들을 보았을까
어둠이 짙을수록 바람으로 흔들려도
서로를 다독거리며 지친 몸을 세운다
- 「저녁의 안쪽」전문
임애월 : 네,“등불”처럼 “서로를 다독거리며”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어 “맨발들”이지만 따뜻해서 참 좋습니다. “저녁”은 곧 따스한 안식이기도 하니까요.
시를 창작할 때 혹시 혼자만의 비밀스런 습관이나 버릇 같은 게 있으시면 여기에서 실토하시지요.(웃음)
박복영 : (웃음) 그럴까요. 습관이라면 술을 마셨을 땐 절대로 펜을 들지 않지요. 첫 시집이 「구겨진 편지」인 것도 실제 느낀 거거든요. 술을 먹고 편지를 썼는데 다음날 아침에 읽어보니 도저히 보낼 수 없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바로 노트북에 입력하며 쓰지 않고 펜으로 쓰고 교정하고 옮기는 스타일이지요. 대부분 그럴 거여요. 아닌가요?
임애월 : 아하, 그래서 「구겨진 편지」가 탄생되었나요.
그리고 아직도 펜으로 원고를 쓰고 다시 옮기시는군요. 요즘은 컴퓨터에 직접 입력하기 때문에 퇴고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들 하던데 은근히 꼼꼼하신 편이네요.
앞으로 문학 말고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박복영 : 글쎄요. 문학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퇴직 후엔 백수가 될 것 같지만 기회가 되면 시나 시조의 창작에 관심 있는 분들께 제 가슴속 열정을 나누어 드리고 싶네요.
임애월 : 역시 문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문학인으로 살기를 원하시는군요. 실례가 되는 얘기겠지만 고집이 좀 세실 것 같아 보이세요. 물론 저는 그런 고집을 진심으로 숭배합니다.(웃음)
대면이었으면 육성으로 들을 기회인데... 게재호가 가을호이니 가을에 어울리는 자작시 한 편 소개해 주시겠어요?
박복영 : 네, 짧은 시 한 편 올립니다.
풀벌레 울음소리 어쩔 수 없었다
말라가는 이파리의 흔들림은
쉴 새 없이 중얼거린 오늘의 반성이어서
외면하듯 흔들리는 그림자는
아직 이별을 통보하지 않았다
마루 밑 고양이 울음은 고요를 할퀴고
불빛은 아픈 만큼 객지여서
어둠은 밀봉된 내가 피었다 질 때
두리번거릴 뒤란이다
빗장은 풀었으나 닻을 내린 계절은 간략해졌고
쇠기러기 하늘에 쓴 탯줄이었으므로
나는 울지 않기로 한다
문풍지 섧게 떨어 저녁은 외로워졌고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
-「가을밤」전문
임애월 : “나는 울지 않기로 한다” “저녁은 외로워졌고 나는/너무 오래 기다렸다”... 시인님은 울지 않기로 하셨지만 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가을밤”이니까요.
두서도 없고 어설픈 제 질문에 답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그때 수원 종로빈대떡에서 모듬전 시켜놓고 막걸리 한 잔 해야겠네요.
박복영 : 네, 하루 빨리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고 뵙기를 기대해 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세요. 감사합니다.
- 정말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은
그 거대한 부조리에 대해 대부분 침묵한다.
그 대신 자기 안으로 은유의 아픈 채찍을 든다.
항구도시 군산의 ‘치열한 삶의 냄새’처럼
문학적 삶을 뜨겁게 살아가시는 박복영 시인
그 치열한 열정의 꽃밭에, 아름다운 꽃들은 피어나리라 -
■□ 박 복 영 시인 약력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월간문학》 시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을 하였고 <천강문학상 시조 대상>과 <성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구겨진 편지』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처럼』 『눈물의 멀미』 『낙타와 밥그릇』이 있고 시조집으로 『바깥의 마중』이 있다. 현재 오늘의 시조시인회의와 전북작가회의 회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 시인의 자선시 5편
아무도 없는 바깥
허물어지는 벽을 짚고 낡은 문짝이 가쁜 숨을 쉬고 있다
녹슨 경첩에 한쪽 어깨를 걸고
번개 맞은 대추나무처럼 기울고 있다
삐걱이는 문을 열면 누군가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습니까? 말할 것만 같은데
두리번거리는 햇살에선
한 동안 그늘로 앓아온 묵언이 대답으로 쏟아지겠다
마당엔 목젖처럼 튀어 오른 돌멩이가
깊어지는 계절의 바닥을 물고 있으니
버틴 날들이 그려내는 빈집의 공복은 끝끝내 거미줄이다
수채는 말라 허허한 바람만 들이고
빛바랜 격자무늬 문짝은 찢어진 흉터뿐이다
저 낡아 삐뚤어진 오랜 문형(門刑)
누군가 다시 부를 때까지 온 몸은 야위어갈 테지만
어쩌자고 문짝은 가슴을 열고 바깥을 내보이는지
내가 그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혼잣말
펴다 만 노인의 손바닥 주름에서 혼잣말을 듣는다
몸 안의 말들을 모으는 구부린 손가락에서 그림자 진 주름
과 주름이 망설임 없이 만나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오랫동안 뒤척였을
추억을 놓지 못한 노인의 쓸쓸한 한 때처럼 손 안에 남겨
진 말들은 이미 사랑을 잃어버린 얼굴이다
오래전에 들어보고 싶었을 안부들
생과 생이 만나듯 함부로 낭비하지 않은 환한 시간들이
주름과 주름의 두 손을 맞잡고 있다
수런거리는 말들은 덧없이 흩어지는 초저녁 눈발 같은데
안타까운 주름이 주름을 안아주고 있다
적막(寂寞)
치자꽃 와락, 하얘졌다
보잘 것 없는 설익은 탱자가 어쩌자고
땡볕을 불러들여 그림자를 깨우는지
바람은 느긋하고 탱자나무 가시는 완강하였다
마당에 가을을 닮아가는 그늘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숨어드는 동안
쓸쓸함은 노랗게 익어가겠다
먹구름이 부르튼 입술을 적시는 저물녘
식어가는 아랫목이 안타까웠다
9
무릎으로 가는 릭샤*처럼 흔들려 기울어 걸어간다
굽어 휘어진 채
봄여름가을겨울 기우는 각 안에 흔들린 흔적이 있다
바닥에 누운 그림자의 몸짓이
흩어졌다 모여 뭉칠수록 조금 더 선명해진다
구겨진 마른 이파리가 구른 궤적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어깨를 짚고 술 냄새를 풍기며 걸었을 뒷골목에
흔들려 기울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흔들리는 것들의 몸에서 추락하지 않으려는 듯 소리들이
쏟아진다 구.구.
어쩌면 내 몸 안의 소리 같아서 나는
휘어진 몸을 내려본다
기울어지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어서
기우는 것은 빨리 가기위한 것이 아니라 멀리 가려는 뜻
이어서 나는
기우는 각 안에 나를 넣어둔다
이제 흔들리는 것들로 저녁은 따뜻하겠다
각 안에 내가 단단해진다
* 릭샤 : 인도. 인력거
저녁이거나 그림자거나
언뜻, 첫 울음은 사귀지 못했다 앙상한 뼈마디에서 흘러
나오던 울음소리
나는 그 울음을 만나기 위해 이슬이 마르기전 떨어뜨린
발자국을 찾아야 한다
가랑잎들이 나의 굽은 등을 위로할 것이다
갓난애의 희미한 발 지문에 새겨질 생처럼 사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저 울음의 무게는 그림자다
그림자 찾아 불빛을 향해 엎드린 노숙의 기척들
귀 기울이면 모두 바깥으로의 청첩이어서
어둠속 불빛들은 매듭진 사연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은 아직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