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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찾아가야 하나... 어디서부터
큰 산줄기 인근으로 산과 물에 겨우 손 한번 담가 봤지만
들판과 도로가 이어지는 곳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모르겠다
이게 길이라며 두 팔 벌려 반기는 이정표라도 있을 텐데
난감한 곳에서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왜 여기 서있나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잠시 산을 벗어나 하천 물을 더불어 보태니
태백산에서 온 어천, 지장천, 영월에서 옥동천, 속리에서 달천, 여주에서 청미천, 쌀 좋기로 유명한 이천의 복하천,
사거용인의 땅인 경안천까지 한 곳에 어우러져 서로가 몸 섞기 바쁘다
산정에서 시끄럽게 들리던 바람소리 이내 그칠 무렵 계곡에서 들리던 물소리
물은 깊은 곳에서는 조용하게 흘러 내려왔으나 함께 어우러진 곳에서
니 물이 더럽다고 다시 올라가겠다며 역류하는 물은 어디에도 안 보인다.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들어와
배는 고프고 용인땅 저쪽까지 가야 하니
발걸음을 서둘러 서쪽으로 향한다.
그늘진 가로수길이 한동안 이어지고
저놈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흔히 보던 빗자루이건만 도심 가정에서는 청소기 때문에 보기 힘들어졌고
시골집 마당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물건이다.
늘 보던 물건이건만... 이야!~ 그놈 참 대단하구먼
가로수길을 빠져나오면 17번 국도인 죽양대로가 보기 좋게 기다린다.
죽양대로 옆길은 예전 국도이니 옆 길을 찾아가며 진행
양지 방향으로
멀리 한남길에 만나는 고려 전기 때 만들어진 좌, 문수. 우, 보현의 마애 보살상이 새겨진 문수산이 보인다
높이는 403m이지만 세 지역(안성, 용인, 장호원)으로 물을 흘러 보내는 삼파수의 발원지를 갖추고 있는 산으로
경기도 안성땅을 적시는 안성천의 발원지 격인 한천
용인과 장호원 앞으로 흐르는 청미천
용인과 광주시를 적시는 경안천이다
이곳에서 좌찬로 따라 처인구 원삼면 좌향마을로 이동후 길가에 자리 잡은 두레 식당에서 잔치 국수 하나 시켜놓는다
먼 길을 걷다가 주막을 만나면 가능한 국수나 라면, 뷔폐를 찾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짧고 먹기 편해서 찾아간다.
배낭이 무거우면 하루 65km
가벼우면 하루 80km 이렇게 걷지 않으면 다음날 일정을 맞추기가 어렵다.
좌찬고개를 오르면 처인구 양지면이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좌찬고개는 조선 건국 당시 일등 공신이던 박포와 관련 있는 고개다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나 1등 공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평을 털어놓다가
괴심죄에 걸려 유배를 갔는데, 이 무렵 박포의 벼슬은 의정부 종1품 관직인 좌찬성(요즘 벼슬로 따지면 부총리 격)이었고 한양에서 이고개를 넘어 좌항리로 유배를 갔다
근신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훗날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에게 "너도 왕이 될 상이다"라며 꼬드겨 난을 일으킨 죄로 죽음을 당한다.
왕자의 난이 아니었더라도 태종이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귀향을 보내거나 죽였으니 이 또한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
처인구 양지면에 들어오니 한양이 지척이라...
오늘은 용인땅 지나고 내일이면 한양에서 과거를 볼 수 있겠다
좌찬고개를 내려오면 고개 같지 않은 고개 용구리 고개가 나온다.
전설 따라 삼천리를 봐야만 알 수 있는 고개인데 유래를 찾을 수가 없다.
용이 아홉 마리 나왔거나
용을 물리친 나무꾼 이야기
아니면 착한 용과 나쁜 용의 대결이라던가
지나가는 주민분께 여쭈어 봐도 모르겠단다.
의병장 옥여 임경재상
1907년 의병단을 만들어 많은 활동을 하셨지만 같은 단원의 밀고로 수감되어 갖은 고문과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총살되신 분으로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으신 분이다.
나라와 겨례에 혼이 살아 있다면 바로 이런분들로 인해 살아 움직일것이며
"민족 정신"이 뭔지 자연스럽게 알려 주는것 같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며 인사드리고...
산매동 고개를 지나
양지면 복지센터
은이성지와 문수산 마애불길과 영남길이 이어지는군요
은이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가 성소(聖沼)를 뿌렸던 곳이며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관리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던 곳으로 은이(隱里)란 말처럼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김대건 신부께서는 중죄인을 처형하는 한강변 새남터(용산구 이천동 한강철교 아래)에 망나니의 손에 한 칼에 죽음을 맞지 못했으니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쟁이라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며 망나니의 이빨 빠진 칼이 몇 번이나 그의 목을 스치고서야 죽음을 맞이했다
신부께서 처형되시고 시신은 모래사장에 매장했지만 이민식이 동료들과 함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용인땅을 지나며 은이성지와 신덕고개를 넘어 시궁산 자락의 애덕고개 아래 미리내 성지로 유해가 옮겨졌다.
미리내 성지는 김대건 1821-1846년) 신부의 뼈조각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천주교인이라면 꼭 찾는 곳이다.
양지면에서 42번 4차선 도로는 위험하여
용인시 처인구 칠봉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양지천
양지천 자전거길은 조용하니 용인시내에서 경안천과 만나는 곳까지 쉽게 갈 수 있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한양에서 미리내 성지로 옮겨진 길이기도 하다.
신념과 종교는 서슬 퍼런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 같고, 피와 살과 혼이 분리가 되어도 그 신념을 바꿀 수 없었고
아무리 뛰어난 사대부의 문장가라 하더라도 신념 앞에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을 것 같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들판으로는 익어가는 벼들로 가득 차있다
이곳을 지나며 영남이네 길은 이어진다.
양지천은 경안천으로 흘러들어 오기에 자전거 길 따라오면 한결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용인시 처인구 송담대역으로 들어와
금학천 옆에 자리하는 전통 시장에 들러 장똘뱅이 마냥 신나게 구경하고
금학천 옆길로 진행
용인시청
이제 방향을 용인 향교 쪽으로
멱조현 오래전 호랭이에게 물려간 시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대신 두고 시아버지를 찾은 효부 이야기를 전설로 간직한 곳이다.
한남정맥길에 보던 용인 미르스타디움
한남정맥 마루금이죠
용인시 기흥구 아차지고개를 지나며
기흥구 호수공원 육교를 지나서 언동로길과 탄천 옆길인 구성로길을 따른다.
용인향교 근처에서 석양이 넘어갈 무렵
뜻하지 않게 목은 이색의 시(詩)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하노라"라는 글귀가 생각나니, 저녁이 되면 왜 이리 서글픈지 모르겠다.
해는 넘어가고 초저녁이 되어 붉은 홍살문 앞에 도착하고 보니 바람마저도 사대부가 아니라면 들어가지 못하도록 굳게 닫혀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좀 더 서둘렀다면 내부로 들어가 자세하게 구경하였을 텐데
점심때 국수하나 시켜 먹은 죄로 향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까치발로 본 제사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 보이고
향교는 조선시대 각 고을마다 유학(儒學)을 교육하고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것으로
각 고을 중심지에는 관아, 사적단(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향교를 설치하여 고을의 기본틀을 만들고 질서를 바로 잡았다
용인 향교는 조선초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인조 때 다시 옮겨 짓고, 숙종 때 원래 자리 (하마비마을)에 옮겨지었다가 1900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겼다.
다른 향교에서 보던 학자수 나무인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보이지 않을걸 보니 대문에서는 안 보이는 곳 어딘가에 꼭 꼭 숨겨 놓은 듯하다.
주택가 가운데 자리 잡은 마북리 석불 입상과 석탑
마북리 석불입상과 석탑
맨 앞에는 효자 한량 김해 김사철지리
본관은 김해이고, 한량인 효자 김사철의 마을이란 뜻
그 뒤로 현령 유공봉휘 창덕애민 선정비로 유공휘는 숙종 때 용인 현령을 지내신 분
용인 향교에서 탄천을 건너와 마북동 구성 4거리를 지나와
어느 닭집에 들러 닭 한 마리 물에 빠트리고...
400km 이상을 걸어왔더니 다리와 어깨가 빠질듯하여 수저로 깨작거리며 먹고 있으니
멀리서 주인장께서 거지 같은 몰골을 보고 웃으신다.
ㅎㅎㅎ
써빙하시던 여 종업원이 곁에 오시더니 너무 멋지다고 하셨는데 듣기 좋으라고 한말은 아닌 듯
다 먹지 못하고 일어나며 주인장께 "훗날 다시 오면 알아보겠느냐"? 고 하니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신다.
마지막 밤을 용인에서 보내며 내일은 점심 무렵에 한양 경복궁에 도착해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든다.
새벽 01시에 밖으로 나오니 뭐가 이리 추운지 배낭에 든 옷 모두 꺼내고 무릅 담요는 앞치마 삼으며 걸으니 탄천이 바로 옆에 있다.
탄천은 숯내로 부르며 조선시대 강원도 인근에서 목재와 땔감을 한강을 통해 싣고 와서 건너편 뚝섬에서 숯으로 만들었던
곳이 탄천 주변이므로 개천물이 검게 변했다고 숯내로 불리다가 이를 한자로 옮겨 놓은 것이 탄천이라 한다.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궤구도루례를 행한 곳
명(明) 나라가 점차 약해지고 후금이 요서와 몽골을 정복하며 청(淸)이란 나라를 세우더니 청 태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조선과 형제 사이가 아닌 군신(君臣)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격분한 조선은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최명길을 중심으로 외교적 교섭을 주장하는 주하론을 내세우고
적화파의 김상헌 등 소장파는 힘이 있고 없고 그런 건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강력하게 밀고 오랑캐들과 한판 붙어 보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대립은 결국 싸우자는 쪽으로 났으니... 1636년 청나라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니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하죠
"싸움"
청나라는 압록강을 넘은 지 불과 5일 만에 서울 함락하고, 조선의 왕자와 빈, 인조 가족들은 대부분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인조는 갈팡질팡 하다가 1만 5천 명이 안 되는 병사들과 50일분의 쌀이 남아있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청나라는 조선으로 남하(南下)한 지 7일 만에 도망간 인조를 찾아 남한산성을 포위
인조는 추위와 배고픔에 결국 참지 못하고 45일 만에 농성을 풀고 1637년 1월 30일 저곳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궤 구 고두례"를 하며 청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한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찌질한 왕이라면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있겠으나
우리나라 역사상 남의 나라 국왕한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안겨준 인조
망국(亡國)으로 치닫던 명(明)을 버리고 후금(청)과의 외교를 했더라면 조선에 치욕을 안겨준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인데
밥그릇 싸움 하느라 바로보지 못한 국제 정세와 한판 붙어 보자는 명분이 대립되어 만들어진 결과로 봐야 할 것 같다.
"삼궤 구 고두례"(세 번 무릎 꿇고 절하며 아홉 차례 머리를 조아리는 예)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무릅꿇고 삼궤 구 고두례를 하며
청나라 옷을 갈아입고 청태종이 주는 술을 마신다.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 수가 60만에 달한다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감당할 수 있는 크기여야 함에도 싸우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니 그 피해는 오롯이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이제부터 한남대교까지 30km 이상 경부고속도로 와 함께 걸으면 되는데
가다가 막히면 굴다리를 찾아가면 된다.
용구대로 따라 구성역으로 이동후 용인 서부경찰서 앞을 지나
처인구의 용구리(죽암대로) 고개와 이곳 용구대로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용인 포은 아트홀 앞을 지나며 우측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길게 자리하는데
포은이라? 정몽주의 묘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처인구의 또 다른 문수산 자락에 묻혀있어 그분의 호를 따서 지은 아트홀인 듯 보인다.
정몽주 선생은 경북 영천이 고향이며 대구로 흐르는 금호강 상류인 영천댐 아래 임고서원에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용인시 수지동 풍덕천 사거리 지나서 오다 보면 경부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는데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동천역을 지나 경기도 분당구 소떼 목장에 도착 새벽 03시 무렵에
피골이 상접한 얼굴에 옷차림은 거지가 울고 갈 상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식사하시던 손님 일행분들이 어디서 오냐고 하신다."저짜서 와서 경복궁에 주상전하 뵈러 간다"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런 분 만나서 영광이라며 아직 먹지도 않은 저의 밥값까지 계산해주시며 인증 남겨 줄 수 있냐고...
고맙다며 감사인사 드린다.
소떼목장
금곡교차로를 지나며
도로가로 인도가 잘 되어 있어 좋고
분당구 금곡동에서
새벽시간에 불러 세우는 분이 있어 이야기 나눈다.
저 처럼 미친 듯 걷고 싶다며 자기 건물이 이 근처에 있는데
옥상을 잘 꾸며 놓아 같이 가서 커피도 한잔하고 주무시고 가란다.
그럴 시간은 없고 잠시 이야기 나누다가 얼어 죽을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 한양으로 향한다.
드디어 서울 톨게이트 옆을 지나
궁내동 덕양군 묘소
경기도 성남시 성(城) 남쪽 땅이라는 지명의 성남을 지난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도기 가마터
판교 ic부근에서
낙원중학교 지나서 성내미 사거리에 영남길이란 이정표가 숨어있다.
청계산 옛골 방향으로
낙생고가차도를 지나며 본 경부고속도로
아주 복잡한 동네라 어디가 어딘지 알길 없고
삼성중공업판교 R 앤 D센터 앞을 지나 금토천을 건너
서울시 외관순환도로와 제2경인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고 금토동 삼거리에서 대왕판교 방향으로
다시 용인 서울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검은 밤에 초행길 그리고 복잡하고 어지러운 길 정신이 하나도 없다
천림산 봉수터
하늘길의 열어 통신하다
부산에서 한양 남산봉수대로 봉수로 연결하면 반나절이면 충분한데 대략 40여 개 이상의 봉수대가 연결되어 있다.
남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에서 올라오는 봉수대가 집결되던 곳
제1봉수대 함경도 -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 경상도 충청도 -광주시 천림산
제3봉수대 평안도-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 평안도 의주 -항해도 해안 한성 무악 서봉 봉수대 120개 연결
재 5 봉수대 전라도 충청도-양천 개화산이다
이곳 봉수대는 부산 다대포에서 시작하여 경상 좌도를 지나 이곳까지 40개 이상의 봉수를 받아 중앙에 보고하는 곳이다.
봉수대 관리를 누가 했으며 어떻게 불을 피웠을까?
봉수대에 불을 피울 인력이 늘 상주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주위에 시계(視界)를 확보하려면 늘 나무를 베어야 했는데 그럴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고
통상적으로 몇 명이 근무를 해야 했겠지만 낮이면 농사일로 바쁘고
저녁에는 없던 자식도 낳아야 하고 고단한 처지에 산 정상으로 지게 짊어지고 올라 왔을리도 만무하고
그리고 북쪽 변방으로는 적의 침입이 잦으니 봉수대가 활발했던 것에 비해
남쪽으로 이어지는 봉수대는 상대적으로 사용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한양으로 봉수로 연락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참고
달래내 고개
달래내 고개
달내고개길에 경기도 영남길
이제 쬐금만 더 가면 한양이다.
청계산 옛골 편의점에서 아침에 뜨신 커피 한잔하며
친절하신 주인장과 잠시 이야기 나눈다.
야간에 경부 고속도로와 순환 고속도로 옆길을 어떻게 지나 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뭔 고속도로가 그리 많은지
경기도에서 어쨌든 고생했다며 안녕히 가시란다.
드디어 한양시 서초구에 도착
한양땅에 들어서니 허공이 길을 막고 영남에서 과거시험보러 왔다고 반길줄 알았는데
길 거리는 텅비어있고 오고 가는 몇몇이 웬 상거지가 찾아왔나 처다만 볼뿐이다.
서울의 첫 관문격인 서초구의 유래인 서초(瑞草)는 서리풀은 뜻하고 고구려때 벼를 서화(瑞禾)라하여 예전에 서초구에서 벼농사를 지어 임금님께 진상한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서리풀을 한자로 풀이하면 서초이다
갓길따라 양재 꽃동네로 진행하며
시골쥐 서울쥐 만나러 온것도 아닌데 ...부산에서 이곳까지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다.
유비가 여상(呂尙)보다 더 뛰어나다는 제갈공명을 얻으러 삼고초려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삼고초려는 못했더라도 각 지역을 올라 오는길에 오랜 역사와 문화를 많이 배운길이다
산에서 배우지 못했고 하천을 통해서 배우지 못했던 선조들의 길
현대 모터스 사옥인가
양재꽃시장을 지나고 꼭두 새벽부터 걸었더니 배는 고프지만
밥먹는 일이 오늘만 있는것도 아니고
죽는날까지 먹어야 하니
오늘은 한양에서 마지막 식사는 포기하고 집에가서 밥 해서 먹는것으로 정하고
신분당역을 지나고 양재역
양재역
가다가 신호를 기다리고
대부분 출근길인데 휴대폰을 보는 사람들이다
나만 문제가 있나 했더니 모두가 문제로군요
휴대폰 보느라 인도 블록에 걸려 자빠지지나 말았으면..그리고
대구에는 미인이 많은데 서울은 그러지 못하다.
사방 팔방 고개를 돌려 보지만 황진이급의 미인은 안보인다.
강남역에서 오래전에 이곳에 조금 살아본곳이건만 기억이 도통 나질 않는다
이쯤에서 조선시대 3대 미인은 누구였을까? 궁금해지는데
신덕 빈(광해군의 母), 이루미(선조의 후궁 최 씨의 딸), 현 씨(정조 후궁)라고 한다. 그 외 희빈장 씨와 장녹수가 있고
선조 후궁 최 씨의 딸인 이루미라는 이름은 그 당시 이름으로 파격적인 이름이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때는 여자 이름은 대부분 큰 년이, 작은년이. 막례, 개덕이, 막금이, 깨똥이, 삼월이 사월이 아니었나...
이런 이름은 궁중에서 쓰는 이름은 아니었을 것 같고, 후궁의 딸이면 옹주 마마인데 개똥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옹주마마의 은밀한 이야기는 모르니 넘어가고
강남 스타일의 강남역,
신논현과 논현
그리고 신사동 그 사람의 신사역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고 지난다.
잠시스치고 지난 사람들과 또다시 스칠 듯 지나갈 수 있을까
250년 정도 된 느티나무 앞을 지나
한남대교에 도착
용인에서 이곳까지 길은 거의 직선이나 신호등과 굴다리를 지나야 한다
한강이라
멀리 태백산 금대봉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정선, 영월-단양, 충주, 양평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남한 제일의 유역을 가진 한강이다.
한남동에 도착 주한 태국 대사관
태국 분들 이야기하는 걸 얼핏 들으니 모두가 꽁냥꽁냥이란다
이태원역을 지나
용산 평화소녀상 앞을 지나며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이 근처에 사는데
검은 안경을 쓴 남자분이 길을 막는다 "어디 가시느냐!"며
저짜로 갑니다. 하니 조심해서 가시란다.
뭐 딱히 지킬 것도 없을 텐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과 경찰분들이 많이 보인다.
전쟁 기념관 앞을 지나며
서울역 앞을 지나고
길고 길었던 과거길도 이제 숭례문을 들어서면 끝이라 할 수 있겠다 한양 성벽 18km 중 가장 웅장한 곳에서 인증 담고
연인원 50만 동원해서 98일 만에 완성한 도성으로 누구로부터 뭘 지키고자 했나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전란 때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었으며 살기 힘든 백성들 불러다가 강제 노역 시켰으면서 엽전 한 잎 주지 않고 지은 성곽이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에 한양 남쪽에 지었으며 임금이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했고
나라의 안정과 왕의 권위로 상징되며 동서남북 4개의 큰 문이 있고 그사이에 작은 문이 4개가 있다.
4대 문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유교덕목인 (인, 의, 예, 지)을 담아 이름 지었다.
임란 때 왜군들은 동대문을 통해 궁궐로 우르르 몰려간 곳이건만 동대문은 지난날 본곳이기에 생략하고
성밖으로는 북한산을 조산(祖山)으로 하고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현무 격인 백악산(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좌, 청룡 격인 동쪽으로 낙산(낙타)
우, 백호격인 서쪽으로 인왕산을 그리고 남쪽으로 주작인 목멱산을 바라보게 궁궐을 짓었다
그 외 궁궐(경북궁)을 감싸는 여덟 산 중 내성(內城)인 북악산-인왕산 -남산-낙산을 산세 따라 연결하여 성을 쌓고
외곽 4 산(四山)으로는 삼각산(북한산)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 아차산 서쪽으로 덕양산을 포함시켜 수도를 지켰다
시청 앞을 지나
청계 광장을 지나고
천주교 신자분들께서 핵 오염수 바다 방류를 반대하는 사물공연을 하시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았지만 잠시 서서 관객이 되어 주고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인진왜란 전에는 조선 최고의 무장 신립과 이일이 있었다면 이후에는 이순신 장군이죠
위대한 이순신 장군님께 인사 드리고
부연 설명은 생략...
주상 전하께 문안 인사 드리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에게 니르고져 홇베이셔도
마참네 제뜨들 시러퍼디 몯핧 노미하니아 내 이랄 윙하야 어엿비너겨 새로 스믈 여듫자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 수비니겨
날로 쑤메 뻔한킈 하고자 할따라미니라" 세종대왕 앞에서 고등학교 고전 시간에 외우고 또 외운걸 한번 외워본다.
정부 서울 청사
광화문과 공사 중인 월대
흥례문
무수리 응시 온 분들인가?
동네 처자들 다 모여 있고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
드디어 도착
역사에 있어 꼬장꼬장하고 면도날 같은 성품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임금을 섬기는 가운데 그중에 몇몇 분들이 "부당하다"며
"주상전하 그러 하시면 아~~~~니되옵니다."라고 목소리 높이던 말씀이 귓전에 쩌렁쩌렁 울린다.
수많은 신하들 중에서 모두가 벼슬길에 있어 최고 정점에 오르기까지 숱한 노력을 했거나
권력에 쫓겨나거나 동료를 모함하고,남을 해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중에 한 분은 벼슬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치기라도
한 듯 서슬 퍼런 임금의 뜻을 물리치고 낙향하기를 79차례나 하셨던 퇴계선생 같은분도 계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犬) 헤엄은 치지 않고, 얼어 죽을지언정 남의 겻불은 쬐지 않는
다"는 선비의 표상이셨던 조광조 선생도 이자리에 계셨고
조선시대 지식인 4천 중 유배를 다녀온 사람은 700명 물론 갈 놈은 가야 했지만 억울했던 분들도 많이 계셨고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저 높은곳에 앉아 계셨을 비운의 어린임금 단종과 그의 비(妃)정순왕후의 애틋한 생이별이 그려지는 가운데
임진왜란때 이순신을 살려야 한다는 우의정(右議政) 약포 정탁(鄭琢) 선생의 신구차 상소문(伸球箚上疏文)을 읽어 내려가던
선조도 그려진다.
아울러 찌질했던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이 용상에 앉아 뭘 생각했을까
선조:아! 이순신이 백성들로 부터 인기가 많다는데 한번 불러서 조지까....윤두수: 전하 그렇게 하소서 했을것 같고
인조:야만족들 하고 한판 붙어뿌가... 김상헌:그랍시다
고종:아씨~~~ 못해먹겠다. 아버지도 그렇고 마누라도 그렇고
조선시대때 가장 비참했던 왕들인데 설마 이렇게 했겠나 싶지만...
백성들과 어울려 즐기시는 주상전하와 보디가드와 함께
주상전하께서 "과거 시험은 겨울에 있다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 가랍니다."
근정전 아래에서 주상전하 콧방망이도 구경했고...이제 집으로 가자
궁중에서 일하는 나인들이 쫙 깔려 있는데
모두가 나선 이방인들이다.
조선이 좋다고 오신분들인데 조선의 좋은점만 보고 가셨으면...
영구를 닮은 동궁 내시(內侍)와 떠오르는 태양이신 동궁 저하를 안아들고
6일 반나절 동안 참 많은걸 배웠던 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400km라고 했지만 돌아가고 어찌하다보니 446km
이 길을 떠나기전에 공부한다고 새벽에 일어나 했지만 눈은 침침하고 양손으로 독수리를 잡다보니
생각처럼 좋은 자료를 남기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영남대로길은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은 저 멀리 땅끝에서 노령과 차령을 넘어 남태령 고개를 지나 한양으로
오는 삼남(전남,경남,충남) 천리길을 준비해봅니다
이제 궁굴 밖으로 나가 서울역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길은 ktx타고 가려니 잠들면 부산까지 갈것 같아 졸린눈 비비며 대구에 도착하고보니 진작에 이것 타고 서울로 올라올껄 그랫나 생각이 들더군요
한양 도성길에 도움 주셨던 "동강님,콜리님.맥가이버님,산이님,보라님.깽이님,전국구님,타키님,팔개님께 감사 드리며
그외 전화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시험은 잘 치루신것 같고요
영남대로 한양길 걸음보다 후기가
더 긴시간을 요하는군요 호남대로 5로도
잘 걸음하시고요
수고 마니 하셨습니다 ~~~~~~~~~~~~~~~~
시험은 미뤄져서 다음에 올라 오랍니다.
양반 되기 너무 힘들었지만
많이 배울 수 있어 좋은길이었습니다.
수안보에서 닭 한마리 물에 빠트린게 큰 힘이 되었답니다.
대구 촌사람 출세 하신다고 욕봤심더...
엿새 하고도 반나절만에 446Km넘빠른것아님니까??
(무거운 봇짐지고 걸어서 )
참 별남니데이 ~~^^
ㅎㅎㅎ 한양가서 봇따리 팽겨치고 싶었으나 어전 앞이라 그러지는 못하고 다시 챙겨왔습니다.
다음에 삼남길은 누님이 살고 계시는 곳으로 갈지 모르니
어디 가시지 말고 집에서 대기 바랍니다.
@배병만 통행신고 미리 안하시면 국경 못넘어 가십니다~~^^
겨울에 다시 오랍니까?
예
가을에는 농번기라 시험이 없답니다.
훗날 三南길 준비해서 갈때 연락 드리겠구요
친구님 덕분에 비석 유래와 이름 알게 되어 길이 편안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분당구 소떼목장
그분들 참 좋은분들이네요.
드디어 주상전하를 알현하셨네요.
긴시간 걸음보다 긴 후기가 더 힘들었을것 같네요 ㅎ
수고 많으셨습니다^^
삼남길이 뭔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것두 천리길이네요 ㅎㅎ
소떼목장 주막에서 밥 한끼 잘 얻어 먹었구요
주상전하와 동궁 마마도 뵙고 왔는데
다음에 또 오랍니다
삼남길은 땅끝에서 해남-장성-,노령고개-정읍-은진-공주-차령고개 -천안-수원-남태령-한양길이구요.딱 천리길 입니다.
매일 지도보며 길을 외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상전하뵈기가 만만치 안지요?
긴시간 걸음하시는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라가 어수선하니 주상과 동궁도 수입 같습니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 아시지요 수고했습니다
ㅎㅎㅎ 주상전하와 세자저하가 어째 이국적이십니다.
덕분에 마지막 부분에서 웃을 수 있는 재미났던 후기
446km를 후기 4편에 거대하게 그려내시느라
욕보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살아 꿈틀꿈틀~
영남대로 과거길
가는 동안도 문제지만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근정전에 들었던 뭇 관리들
우리가 대하사극에서 만나뵙던, 위대한 역사속에서 이름난 분들이
보통분들이 아니시구나 다시금 엄청남을 느껴봅니다.
문득, 이순신 장군님이 선조나 인조 대신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왕의 상을 가지신 방장님 고생 억수로 많이 하셨습니다.
글쓰는 것은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을 듯 합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왕은 바로 배 왕입니다
방장님 고생하셨습니다.ㅎㅎ 음악과 글이 잘 어울립니다. 이 노래는 누구 노래인지요?
안녕하세요
노래 가수는 박현, 제목은 "바람아 불어라" 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 감기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배병만 감사합니다. 방장님!^^
방장님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가는 길 잘 봤습니다. 과거에는 흙길이었을건데 아스팔트길보다는 편했지 않을까 싶습니다.ㅎ 장원급제 하신거지요 방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