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 핵심 정리
▮갈래 : 설화(서사)
▮성격 : 전(傳) 형식의 설화
▮내용 : 고귀한 신분의 공주와 미천한 신분의 바보 청년의 감동적 만남
▮문체 : 역어체, 설화체
▮출전 : <삼국사기> 권45. 열전
▮의의 : 역사적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작품
◘ 작품 해설
이 글은 <삼국사기>의 ‘열전(列傳)’에 수록된 작품이다. 신분이 고귀한 공주가 스스로 미천한 바보 총각을 찾아가 결혼을 하고, 남편을 영웅으로 성장시켜 공을 세우게 하는 과정이 실감과 짜임새를 갖추어 그려지고 있다. 공주는 과단성이 있을 뿐 아니라, 상상치 못한 제의를 납득하지 못하는 온달과 그 모친을 지성으로 설득하고 또 좋은 말을 고르게 하여 온달이 영웅으로 입신케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비범한 안목을 가진 여성이다. 아울러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죽고 삶이 결정났으니 돌아가자.”고 하여, 초탈한 모습까지 보여 이인(異人) 같기도 하다. 반면 공주의 도움이긴 하나 세상이 바보라 했던 온달에게 영웅적 능력이 잠재해 있었음이 밝혀져 사람을 신분이나 겉모습으로 판단할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 역사적 인물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시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를 소재로 최인훈이 「온달」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은 소설과 희곡을 겸용한 특이한 형태이다.
◤ 심화 학습 ◥
<온달 설화의 유형적 성격>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조는 민간 전승을 통해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전되는 ‘바보 온달 전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같으나, 공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 의식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갈등 구조상 동일 유형인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에 먹고 산다고 하여서 쫓겨난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각이 등장하므로,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그 구조와 주제는 전설과 다름이 없다. 화소(모티프)들이 <무왕 설화>와 유사하여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하나, 이 설화가 남녀 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룬 것이라면 ‘온달 설화’는 부녀 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 작품 감상 ◨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얼굴은 웃음직하게 못났으나 마음씨는 고왔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노상 밥을 빌어 모친을 봉양하며 해진 적삼에 헐어빠진 신발로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우온달(愚溫達)이라고 하였다. 평강왕이 어린 딸아이가 울기를 좋아하니 농담으로,
“네가 노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란 다음에도 반드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 노릇은 못할 것이니 우온달에게 시집보내야 마땅하겠다.”
마냥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나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출가시키려고 하니 공주는 아뢰되,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고치십니까? 필부도 식언(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시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농담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그릇된 것이니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노하며,
“네가 나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면 단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 같이 살아서 무엇하느냐. 네 갈대로 가라.”
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값진 패물 수십 개를 팔목에 차고 궁중을 나와 혼자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바로 그 집에 당도하여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를 보고 앞에 가까이 가서 절하며 그 아들의 행방을 물으니 노모(老母)는 대답하되,
“우리 아들이 가난하고 또 배운 것이 없어 귀인과 가까이 할 자격이 못 되는데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아 보니 향취가 이상하고 그대의 손목을 잡아보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소.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 터인데 누구의 꼬임을 입어 여기에 왔소? 우리 아들은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으로 느티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오.”
하였다.
공주는 나가 산 아래에 당도하여 온달이 느티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와 더불어 속사정을 말하니 온달은 성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니 나를 박해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돌아보지 않으며 바로 갔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 그 집 사립문 밖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모자(母子)와 더불어 자세히 말을 하니 온달은 의아하여 결정을 못 하고, 그 모친은,
“우리 아들이 지극히 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살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는 대답하되,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재봉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부귀한 뒤에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가졌던 패물을 팔아 전택(田宅)․노비(奴婢)․우마(牛馬)․기물(器物)을 사들여 살림을 두루 갖췄다. 처음 말을 사들일 적에 공주는 온달에게,
“아무쪼록 상인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가 병들고 여위어 버림을 당한 것만을 가려서 사오세요.”
부탁하므로 온달은 그의 말대로 하니 공주는 착실히 사육하여 그 말이 날로 살찌고 장대하여졌다. 고구려가 항상 봄 3월 3일 낙랑벌에 모여 사냥하고 잡힌 그 돼지․사슴으로 하늘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하므로 그 날이 되면 왕이 사냥 나오고 여러 신하 및 5부의 병정이 다 따르게 된다. 이 때 온달은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는데 그 말의 달림이 항상 다른 말보다 앞서고 잡은 것도 많아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이 하는 자가 없으므로 왕은 불러 오라하여 성명을 묻고 놀라며 특이하게 여겼다. 때마침 후주 무제(後周武帝)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妖東)을 치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마주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랜 격투로 적군 수십여 명을 베니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서 들이쳐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적에 온달로써 제일이라 하지 않는 자 없으므로 왕은 감탄하며,
“너는 내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아들인 다음 벼슬을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으니 이로 인해 은총과 영화가 더욱 거룩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은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짜개서 저희들의 군․현을 만들었으므로 백성이 원통히 여겨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니 원컨대 대왕은 저더러 어리석다 마시고 군사를 내주시면 한번 걸음에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고 하니 왕은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전할 적에 맹세하되,
“계립현(鷄立峴), 축령(竹嶺)의 서편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신라군과 아차성(阿且城) 아래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그를 장사하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삶이 결정났으니 아! 돌아갈지어다.”
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서 장사하였다. 대왕은 듣고 애통하였다.
▰ 어휘 풀이
▪평강왕 : 고구려 제25대 왕, 평원왕(재위 559-590)을 말함
▪시정(市井) : 인가가 많이 모인 곳
▪우온달(愚溫達) : 우리말 ‘바보 온달’을 그대로 한자로 표기한 것
▪전택(田宅) : 논밭과 집
▪기물(器物) : 살림살이에 쓰이는 온갖 그릇
▪국마(國馬) : 나라에서 기르는 말
▪무제(武帝) : 북주(北周)의 왕
▪승세(乘勢) : 이길 기세
▪계립현(鷄立峴) : 문경 새재[鳥嶺] 동북쪽의 고개
▪아차성(阿且城) : 서울 동쪽의 산성
▪유시(流矢) : 목표에서 빗나간 화살 또는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 여기서는 후 자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