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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암릉엔 고정로프와 우회길 있어, 때 묻지 않은 산성골도 볼거리
강원도 홍천과 충남 서산에는 팔봉산(八峯山)이, 전남 고흥에는 팔영산(八影山)이 있다. 산 이름에 붙는 숫자 8은 봉우리 개수를 뜻한다. 그런데 뿔(角)을 뜻하는 팔각산(八角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경남 거창에는 두 봉우리가 쇠뿔 형상에서 유래되었다는 양각산(兩角山)이 있다. 각산(角山)도 뿔을 닮은 산을 말한다. 그렇다면 팔각산의 유래도 여덟 개의 뿔처럼 생긴 산의 모습에서 비롯됐을 터이다.
그렇지만 팔각산은 유독 날카로운 암봉의 산세가 이채롭다. 8개의 암봉에서 느껴지는 예각이 뿔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봉(峯)’이 아닌 ‘각(角)’자를 붙였을까. 고도는 낮지만 기암괴석과 급경사의 암벽으로 인해 산세가 험하다.
팔각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것은 아름다운 계곡이다. 1983년 지방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된 옥계계곡은 뛰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때문에 계곡이 먼저 알려지면서 이로 인해 팔각산이 알려졌다. 그래서 옥계계곡과 연결시켜 ‘옥계팔봉(玉溪八峯)’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조선시대 선비 손성을이 계곡의 아름다움에 취해 ‘침수정(枕漱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평생 살았다고 한다. 정자는 옥계계곡 37경 중 하나로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이처럼 까칠한 암봉과 경치가 빼어난 계곡, 사방으로 막힘없는 조망까지 안겨 주는 팔각산은 여름뿐 아니라 가을에 찾아도 오래 기억될 산이다.
들머리는 옥계리 팔각산장으로 등로는 산장 마당을 지나 안쪽으로 연결된다. 개울에 깔린 데크를 지나며 철제 계단을 오르게 된다. 계단이 끝난 산길은 푸석돌이 많아 까다롭다. 119팔각산구조위치 1번 지점을 지나면 묘지를 만난다. 산 사면을 따르는 숲길인가 싶더니 ‘팔각산 1.9km’라고 새긴 표석과 위험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다. 그러나 정상까지의 거리만을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시작은 1봉을 오르면서부터라는 각오로 산행에 나서야 한다. 톱니 같은 암봉을 오르내리는 산길이 사납고 까다롭기 때문이다.
산등성이를 따르는 산길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타고 고도를 높이다 보면 전망이 트인다. 거칠게 이어지는 팔각산의 여러 암봉이 푸른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스테인리스스틸 봉에 이어진 로프를 붙잡고 올라서면 전망 좋은 암릉이다. 뒤돌아보니 건너편 내연지맥의 바데산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솟았다. 산자락의 옥산리 수구동마을은 지붕을 서로 맞댄 이웃이 납작하게 엎드렸다.
우회길도 있지만 암릉길로 간다. 들머리에서 40분쯤이면 첫 봉우리인 1봉이다. 암봉 아래에는 ‘第一峰(제1봉)’이라 새긴 표석이 박혀 있다. 계속 이런 표석으로 봉우리마다 표시를 해놓았다. 1봉에서 2봉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봉우리 아래로 우회해 2봉에 오른다. 앞으로 오르내려야 할 연봉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파른 바윗길로 내려선다.
2봉에서 3봉은 암릉길로 잇는다. 절벽 위에 몸을 세운 운치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깨진 바위틈에 뿌리를 지탱한 생명력에 감탄이 난다. 조망도 좋아 잠시 땀을 식히며 주변 경치에 취해 본다. 산골짜기를 휘감으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길은 옥계의 속살을 숨김없이 보여 준다. 물길 따라 곳곳에 터를 잡은 마을도 정겹다. 옹기종기 온통 파란색 지붕을 덮은 수구동 마을이 발아래 있다.
발길을 옮기니 아쉽게도 3봉은 오를 수 없다. 위험하기에 폐쇄됐다. ‘이 등산로는 위험하여 통제한다’는 영덕군수의 경고판이 서있다. 산길은 3봉 아래 비탈을 따라 비스듬히 이어진다. 119팔각산구조위치 7번 푯말과 ‘팔각산 0.9km’라고 새겨진 빗돌을 차례로 지난다. 로프를 붙잡고 힘들게 올라서면 3봉과 4봉을 잇는 능선에 닿는다.
산중 독가촌 거쳐 비경의 산성골로 하산
4봉 오르는 길은 제법 긴 철계단이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4봉이다. 바위틈에 뿌리를 지탱한 고사목 한 그루가 암봉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활짝 열린 조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함을 안겨 준다. 지나온 능선과 그 아래로 보이는 계곡은 한 폭의 그림이다. 뒤로는 오르지 못했던 3봉이 훤하다. 건너편에는 바데산과 동대산이 이어지며 그려내는 헌걸찬 산줄기가 녹색의 향연을 펼친다. 4봉에서부터 5~6봉을 거쳐 7봉까지는 깎아지른 절벽에 뾰족한 암봉이 톱니바퀴처럼 이어지는 날등이다. 등로는 암벽과 암릉을 반복적으로 오르내린다. 물론 우회 등산로와 안전 시설물이 설치돼 있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늘이 없어 아쉽다. 하지만 확 트인 능선 길이라 바람이 시원하다. 오히려 주변 전망이 안겨 주는 절경에 취해 안전에 소홀할까 염려될 뿐이다.
5봉에 올라서면 지나온 봉우리와 가야 할 봉우리가 거칠게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내연지맥의 내연산 삼지봉, 향로봉, 괘령산 일대와 구암지맥의 구암산도 머리를 내민다. 그 오른편 낙동정맥의 마루금도 확인된다. 6봉에 올라서면 동해의 짙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낙동정맥이 뻗어 내리며 싸안은 주왕산이 가깝다. 7봉에 닿으면 울창한 숲으로 덮인 산성골 일대가 훤하다.
7봉을 넘어 안부를 지나 철계단을 통과하면 8봉인 팔각산 정상이다. 정상은 지나온 여느 봉우리와는 달리 암봉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널찍한 터에 정상석이 자리하지만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은 기대할 수 없다. 하산은 산성골로 잇는다. 2시간 이상 걸리는 하산 길은 정상석 뒤로 왼편이다.
10분쯤 내려서면 화강암 이정표와 삼림욕장 안내도가 걸려 있는 안부 갈림길이다. 여기서 왼편은 팔각산장으로 원점회귀하는 길. 산성골은 직진한다. 하산 길은 정상으로 오르던 거친 암릉과는 정반대다. 금강송과 참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갖춘 부드러운 길이다. 갈림길을 무시하고 능선 길로 따르다가 573m봉 직전에서 우회하면 ‘팔각산 0.9km’를 알리는 나무간판이 있다. 영덕군과 청송군의 군계를 따라 나지막한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 파평 윤씨, 가선대부 안동 임씨 묘를 차례로 지난다. 10분쯤이면 다시 ‘팔각산 1.7km’라는 팻말을 만나고, 곧 산중 독가촌이 나타난다. 산속에 파묻힌 옛 마을은 스산하기만 하다.
산성골의 비경은 독가촌을 뒤로하고 만나는 협곡부터다. 꼭꼭 숨어 비경을 감췄던 산성골이 알려진 건 제법 오래됐다. 그런데도 아직 청정계곡이다. 암반 위로 구르는 수정 같은 계류에 더위가 사라진다. 계곡에는 오랜 세월 물살에 깎이고 패인 작은 소를 비롯해 골짜기를 둘러싼 낙엽교목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치를 뽐낸다. 쑥빛의 너럭바위와 나제통문 같은 독립문바위도 이곳의 명소. 계곡의 길은 이리저리 계속 건너게 된다. 그래서 수량이 많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독가촌에서 산행종점인 산마루펜션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주변 풍광에 빠지다보면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산행이 끝날 무렵 만나는 출렁다리(길이 70m, 너비 1m, 높이 20m)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다리 아래의 계곡은 경관과 물이 좋아 여름철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피서지로 인기다. 다리를 건너 아름드리 수목의 삼림욕장을 벗어나 국도변에 닿으면 군내버스가 정차하는 산마루펜션이다.
글·사진 황계복 부산산악연맹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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