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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스크랩 현대윤리사상(국민윤리)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40 08.08.28 10: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현대 윤리 사상

 

 유물론<materialism>
(唯物論)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정신을 바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또는 물질(뇌)의 상태, 속성,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등 여러 입장이 있다.


【용어】

원래 철학용어로서는, 세계의 본성(本性)에 관한 존재론(存在論)상의 입장으로서 ‘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대립시키고, 인식의 성립에 관한 인식론(認識論)상의 학설로서 ‘실재론(實在論)’과 ‘관념론(觀念論)’을 대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용어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어(對語)로 사용된다. 그 까닭은 근본적으로 근세철학에서 유물론은 실재론적 입장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에 근거를 두고 존재론이라는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해왔던 데 대하여, 관념론은 유심론적 입장이 ‘사고(思考)하는 우리’에게 근거를 두고 인식론적으로 전개하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유물론’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F.엥겔스가 용어법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어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계승한 N.레닌이 ‘오해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배척하였다는 사정도 있다.


【특징】

  ⑴ 과학주의:유물론의 근본적인 주장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물질’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관해서는 여러 입장이 있다. ‘물질’의 특질은 흔히 질료(質料)·불가입성(不可入性)·타성(惰性) 등 대개 자연과학적으로 기술되고 규정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유물론자는 대체로 그 시대의 자연과학이 이룬 성과를 철학적 입장의 근본으로 하는 ‘과학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질을 ‘우리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 보고(물질의 철학적 개념), 물질에 관한 과학적 인식내용에서 원리적(原理的)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그 경우도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거한다는 ‘과학주의(科學主義)’로 일관한다.


  ⑵ 결정론(決定論)

유물론에는 이 ‘과학주의’와 관련하여 일종의 ‘결정론’이 있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는 선행하는 물질적 조건과 그것을 포함하는 법칙성을 근거로 결정된다”라는,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과율(因果律)의 지배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무슨 일에나 원인이 있다’는 뜻이며 이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것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든가 혹은 어떤 법칙성(法則性)에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다”라고 하여 법칙적 필연성 인식에 근거를 두는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로 보고 있으나 이 경우도 ‘법칙에 따르는’ 자유이며 근본적으로는 결정론으로 볼 수 있다.


  ⑶ 감각론(感覺論):유물론은 이러한 법칙성의 인식에 관하여 감각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까닭은 인식내용의 원천을 물질적인 외계에서만 찾고 내적·주관적인 것은 혼입(混入)을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의 역할은 부정된다. 유물론자 엥겔스가 영국의 경험론을 평하여 ‘부끄럼쟁이의 유물론’이라고 하였듯이 유물론은 경험론과 같이 감각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가깝다. 그러나 경험론은 감각의 원인으로 그 자체로서는 비감각적인 실체(유물론이 인정할 수 있는 물질)를 인정하는 일이 없다.

  ⑷ 무신론(無神論):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적일 때 신이라든지 정령(精靈)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게다가 세계의 사상(事象)이 물질적 법칙성에 의하여 결정될 때 세계의 변화를 관장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神的)인 것은 설명의 편법으로서도 배제된다. 이렇게 유물론은 언제나 무신론을 위한 강력한 논리가 되어왔다. 유물론자는 모두 무신론자이며 사상사(思想史)의 측면에서 볼 때 양자는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역사】

유물론이라는 명칭은 18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고방식은 이미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볼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原子)와 공간(空間)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사물의 성질은 이러한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의 모양·크기·위치 및 그 결합의 밀도(密度)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원자의 기계론적인 작용으로 일어나며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영혼의 작용도 원자의 한 작용으로 생각하였다. 유물론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더욱이 중세에 이르러 쇠퇴하였으나 근세에 이르자 F.베이컨, P.가생디를 선구자로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독일에는 G.W.F.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 L.A.포이어바흐가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아 K.마르크스, 엥겔스가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을 확립하여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이어바흐<Feuerbach, Ludwig Andreas> (1804.7.28~1872.9.13)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이에른주(州) 란츠후트 출생. 하이델베르크대학·베를린대학에서 수학,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1828년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Gedanken ?er Tod Und unsterblichkeit》(1830)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것이라 하여 교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 후로는 재야(在野) 철학자로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41) 《장래 철학의 근본문제:Grunds?ze der Phi1osophie der Zukunft》(43)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45) 등이 있다. 그의 철학의 공적은 그리스도교 및 관념적인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데에 있다. 그의 철학은 후일,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마르크스<Marx, Karl Heinrich> (1818.5.5~1883.3.14)

   독일의 공산주의자·혁명가·경제학자.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36년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47년 P.J.프루동(1809∼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50~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실려 있다. 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64), M.A.바쿠닌(1814∼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85년과 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생철학(생의철학)<philosophy of life/Lebensphilosophie>
(生-哲學)

  실증과학(實證科學) 발달에 영향받은 실증주의와 과학비판철학의 성행에 대립하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철학의 총칭. A.쇼펜하우어, F.W.니체, W.딜타이, G.지멜, H.베르그송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공통 특징은 인간 또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 나아가서는 우주 전체의 ‘생’은, 실증과학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는 파악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은폐되어 버린다고 생각한 점에 있다. ‘생’의 실체를 놓고, ‘생’의 철학의 시조 쇼펜하우어는 ‘생에의 맹목적 의지’,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 딜타이는 ‘정신적·역사적 생’, 지멜은 ‘초월의 내재’, 베르그송은 ‘생명의 비약’이라 파악하여 같은 생의 철학이라 해도 각각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러나 합리적·과학적 사고의 그물을 피하는 것, 오히려 어떤 종류의 직관, 또는 직접적 체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비로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일관되고 집요한 주목이라는 점에서는 궤도를 같이하며, 거시적으로 볼 때 하나의 조류를 이룬다. 생의 철학이 지닌 의의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서구문명 전반에 확대되는 생의 모든 영역에서의 합리화 경향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근저에 있는 생의 비합리적 기반에 소행(遡行)하여 그 존재를 적시한 데 있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비합리적’인 ‘직관’의 지시로 끝나기 쉽다는 점에, 다시 말해서 철학이 나쁜 의미에서 문학으로 해소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

생의 영역에서 고유한 논리를 찾으려고 한 딜타이의 역사적·해석학적 방법은 뒤에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 K.야스퍼스, M.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또 미국에서는 W.제임스나 프래그머티즘의 사상가에게서, 또 에스파냐에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 M.우나무노 등에서 생의 철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1788.2.22~1860.9.21)

   독일의 철학자. 염세사상의 대표자로 불린다. 단치히 출생. 은행가와 여류작가인 부모 덕택에 평생 생활에 걱정 없이 지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자유도시 함부르크로 이사하였고, 1803년에는 유럽 주유의 대여행을 떠났다. 1805년 그를 상인으로 만들려던 아버지가 죽자, 고타의 고등학교를 거쳐 1809년부터는 괴팅겐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고, G.E.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이어 11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J.G.피히테와 F.E.D.슐라이어마허를 청강하였으며,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er die Vierfache Wurzel des Stazes vom Zureichenden Grunde》(13)로 예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때를 전후한 사교가인 모친 요한나와의 불화·대립은 유명한데, 이로 인해 햄릿과 같은 고뇌에 빠졌고, 그의 독특한 여성혐오, 여성멸시의 한 씨앗이 싹텄다. 바이마르에서 살면서 J.W.괴테와 친교를 맺었고, 그에게서 자극을 받아 색채론(色彩論)을 연구하여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er das Sehen und Farben》(16)를 저술하였다.


  또한 동양학자 F.마이어와의 교우(交友)로 인도고전에도 눈을 뗬다. 드레스덴으로 옮겨 4년간의 노작인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9)를 발표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20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G.W.F.헤겔의 압도적 명성에 밀려 이듬해 사직하고, 22∼23년의 이탈리아 여행 후 31년에는 당시 유행한 콜레라를 피해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옮겨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철학은 Ⅰ.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피히테, F.W.J.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하였으나, 그 근본적 사상이나 체계의 구성은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論) 및 인도의 베다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사상의 기조로 한다. 즉, 그는 칸트와 같이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는 시간·공간·카테고리(category), 특히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형식으로 구성된 표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전체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세계의 존재는 주관에 의존한다. 세계의 내적 본질은 ‘의지’이며, 이것이 곧 물(物) 자체로서, 현상은 이 원적(原的) 의지가 시간·공간인 개체화(個體化)의 원리(principium ndividuationis)에 의하여 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물 자체를 인식불가능으로 한 칸트와는 달리, 그는 표상으로서의 현상세계(現象世界) 배후에서 그것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 자체를 의지로써 단적으로 인식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세계의 원인인 이 의지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형이상학설을 배경으로 할 때, 인간생존의 문제는 이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지가 부정되고 형상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열반(涅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그는 이와 같이,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靜寂)의 획득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서 제시하였고, 또한 그렇게 하여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 즉 동고(同苦:Mitleid)를 최고의 덕이자 윤리의 근본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염세관의 사조(思潮)에 영합하여 크게 보급되었는데, 의지의 형이상학으로서는 F.W.니체의 권력의지에 근거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사상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밖에도 W.R.바그너의 음악, K.R.E.하르트만, P.도이센의 철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73~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Unzeitgem?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76년 《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enschliches,Allzumenschliches》(187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Morgenr?e》(81) 《환희의 지혜:Die fr?iliche Wissenschaft》(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83∼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Jenseits von Gut und B?e》(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Zur Genealogie der Moral》(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Wille zur Macht》(84∼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
(實存主義)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베르그송<Bergson,  Henri>(1859.10.18~1941.1.4)

  프랑스의 철학자. 파리 출생.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앙제와 파리의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00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유심론(唯心論)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C.R.다윈·H.스펜서 등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였는데, 이와 같은 그의 학설은 철학·문학·예술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생물의 진화는 동물과 식물의 2대 방향으로 진화되어 나아가는데 지성적 인간은 전자의 정점(頂點)에 서 있다. 이 진화는 기계론적(機械論的)도 아니고 목적론적(目的論的)도 아니다. 이 진화는 동적(動的)이며 예견(豫見) 불가능한 내적(內的) 충동력인 엘랑비탈, 즉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창조적 진화이다. 인간의 지성(知性)은, 정적(靜的)이며 고정화(固定化)된 것을 다루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동적인 흐름을 파악할 때는, 지성은 이를 정적 요소의 한 연속으로 환원시켜 버린다(지성의 ‘영화촬영적 방법’). 지성은, 예를 들면 시간을 표준단위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는, 평면상의 등질적(等質的) 직선과 같은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시간은 이질적(異質的)인 과정의 구체적이며 불가분(不可分)한 것의 연속이다. 또 지성은, 어떤 사물(事物)이 출현하면, 여러 기존요소를 재구성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관(直觀)에 의존해야 한다. 지성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 직관은 그와 같은 목적과 이해(利害)를 갖지 않으며, 다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지성이 대상의 외면(外面)만을 보고 방황하면서 관점에 따라 다른 상대성을 면하지 못하는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과는 달리, 직관은 대상의 내면(內面)에 깊이 파고들어 절대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 지성의 산물인 자연과학은 지성의 모든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직관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지속·생성(生成)·진화를 파악하여 그것으로써 과학을 보완해야 한다.

한편, 사회에는 폐쇄된 사회와 개방된 사회 2가지가 있다. 전자는 지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것에 지배되며, 사람들은 공동체의 규약을 엄수해야 하므로 자발성과 자유는 최소한도로 억제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폐쇄된 사회에서 벗어나, 개방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랑이며 또한 사랑의 대상이기도 한 하느님을 신비적 직관으로 체험하고 있는 신비가(神家)들의 존재에 의하여 직관된다. 개방된 사회는 정적인 것 대신에 동적·진보적인 것을, 획일성(畵一性) 대신에 개인간의 최대한의 다양성과 자유를 소유하며, 또 이 사회에서는 지성이 고안한 유형적(類型的) 도그마는 직관과 계시(啓示)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시간과 자유》(1880), 《물질과 기억》(96) 《창조적 진화》(1907) 《사상과 움직이는 것》(34) 등이 있다. 191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2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딜타이<Dilthey, Wilhelm>
(1833.11.19~1911.10.1)

  독일의 철학자. 생(生) 철학의 창시자이다. 헤센의 비브리히 출생.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고, 1866년 바젤, 68년 킬, 71년 브레슬라우, 82년 베를린의 각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자연과학에 대해 정신과학의 영역을 기술적·분석적·심리적 방법으로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어 I.칸트의 비판정신의 영향을 받아, G.W.F.헤겔의 이성주의·주지주의에 반대하여 역사적 이성의 비판을 제창하고, 역사적 생의 구조를 내재적으로, 다시 말하여 체험·표현·이해와의 관련에서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다. 만년에는 세계관 연구에 도달, 철학적 세계관 유형을 분석해 내었으나, 상대주의적 경향이 강해졌다.

해석학 영역에서는 청년시대의 F.D.E.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연구를 거쳐, 역사적 생의 이해,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해석학의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그의 해석학·역사철학은 실존철학·문예학·양식학(樣式學)·유형론(類型論)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전집 12권(1914∼36)이 있다.


키르케고르<Kierkegaard, Sen Aabye>(1813.5.5~1855.11.11)

  덴마크의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43~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43) 《반복:Gjentagelsen》(43) 《공포와 전율:Frygt og Baeven》(43)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Philosophiske Smuler》(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後書):Afsul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1 D?en》(49) 《그리스도교의 수련:Indoevelse i Christendom》(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야스퍼스<Jaspers, Karl Theodor>(1883.2.23~1969.2.26)

  독일의 철학자. 오르덴부르크 출생. 하이델베르크대학·뮌헨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이어 괴팅겐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심리학과 조교로 있으면서, 13년 《정신병리학 총론:Allgemeine Psychopathologie》을 써서 여러 가지 심리학적 방법의 검토를 통해 종래의 독단론을 비판하고 상대화(相對化)된 과학적 인식의 방법을 제기하였다. 16년 이 대학 심리학 교수로 승진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관의 심리학:Psychologie der Weltanschauungen》을 출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심리학에서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고, 스스로도 이 책을 ‘최초의 실존철학적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21년 철학 교수로 전임한 뒤에 I.칸트, S.A.키르케고르, F.W.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E.후설의 영향까지 곁들였다. 그는 더욱 철학에 진력하여 마침내 그의 최대의 저서인 《철학:Philosophie》(3권)을 펴내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체계적 전개의 배경에는 《현대의 정신적 상황:Der geistige Situation der Zeit》(1931)에서와 같이 20세기 서구사회가 제기하는 기계문명, 대중사회적 사회, 정치상황,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가치전환적인 사상적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기조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인 과학에 대한 과신(過信)을 경고하고, 근원적인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포착하여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양태를 전개하는 ‘실존철학’을 시대구원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인간존재를 규명하는 철학적 사색은 그 전과 같이 세계의 조감도를 얻는 그런 단순한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근원에 파고드는 활동이며, 철학은 ‘철학한다(Philosophieren)’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철학적 사색은 순차로 3개의 존재의 차원(世界·實存·超在)을 거치는데, 이에 따라서 철학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① 우선, 구래(舊來)의 과학적·철학적 세계인식(世界定位:Weltorientierung)을 가지고는 인간의 현존재를 포함하는 세계의 전체적 인식은 불가능하며, 또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존재 또는 초재(超在)를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다. 이 인식활동의 한계를 규명하고 거기로 이끌어가는 것이 ‘철학적 세계정위’이다.

② 그러나 존재의 탐구는 이 한계에서 반전(反轉)하여 자기의식으로 내향(內向)한다. 인간은 그 세계존재를 자기를 초월하며 거기서 자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실존을 모색한다. 이것이 ‘실존개명(實存開明)’이다. 인간의 실존에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궁극의 자기존재는 항상 어떤 것을 향한 약진인데, 인간은 단순한 세계존재, 즉 공리성(功利性)과 안이성으로 타락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 본래적인 자기존재는 인간의 깊은 상호교섭(通心:Kommunikation)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더욱이 이 통심에서 인간의 ‘자유’가 ‘결단’의 순간에 강하게 자각된다. 실존은 자유 때문에 가능적 실존으로서 미완(未完)인데, 더욱이 역사적으로 과거로부터 한정(限定)되어 있는 현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놓여 있다. 또한 그 밖에 죽음·고뇌·투쟁·죄책 등 숙명적인 한계상황을 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한계상황을 감내하여 세계에 버티어 내는 각오가 실존의 본질이며, 이 한계상황에서의 좌절 가운데서 실존은 보다 깊게 개명(開明)·조파(照波)되는 것이다.

③ 이와 같은 실존은 유한적이며, 이러한 유한성을 지양하는 절대적 존재(超在)가 추구된다. 즉, 위와 같은 객체적인 세계존재와 주체적인 자기존재를 초월하여 하나의 이념 가운데 주객(主客)의 긴장·갈등이 지양된다. 이러한 초재는 좌절의 암호(暗號) 가운데 모습을 나타낸다. 형이상학이란 일자(一者)를 초월적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실존과 초월자와의 만남으로써 아는 일이다.


  인류의 가장 심각한 체험은 형이상학과 종교의 역사에 암호문자로 쓰여진 것이며, 형이상학은 초재 현현(顯現)의 ‘암호해독(Chiffrelesen)’인 것이다. 1937년 부인이 유대인이라 하여 교직에서 쫓겨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그 철학적 정신은 흐리지 않았으며, 전후에는 곧 복귀하여 대학의 부흥에 힘썼다. 전쟁 중의 경험을 통하여 《전쟁죄책론》의 반성이 나와 전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48년 바젤대학 교수가 되었고, 61년 은퇴 후에는 47년에 제1권을 내어 자기 체계의 재구축을 시도한 《철학적 논리학:Philosophische Logik》의 속권 집필에 힘썼다.


마르셀<Marcel, Gabriel-Honore>(1889.12.7~1973.10.8)

  프랑스의 철학자·극작가. 파리 출생. 파리대학 졸업 후 파리대학과 몽펠리에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교단을 떠나 사색과 저술에 전념하였으며, 1929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철학은 S.키르케고르와 K.야스퍼스 계열에 속하는 그리스도교적 실존주의였으며, 일체의 체계적 구축을 거부하는 그의 실존주의적 기술(記述)과 섬세한 분석은 그의 작품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난해한 점이기도 하다. 합리적 철학은 신을 객체화하여 다루기 때문에 신을 비실재적 카오스로서만 파악할 수 있으나, 사실 신은 객체화될 수 없는 ‘너’이며, 참된 실재(實在)이고, 또 신은 인간관계의 중심에 있으며, 거기에서만 희망으로 지탱되는 성실에 의해서 자기와 타인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형이상학적 일기:Journal m?aphysique》(1927) 《존재와 소유:?re et avoir》(35)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44) 《존재의 비밀:Le Myst?e de l’?re》(51) 등의 철학적인 것 이외에 《갈증》(39) 《밀사(密使)》(49) 등 약 20여 편의 희곡을 발표하여 그의 철학사상을 구체화시켰다.

 

 하이데거<Heidegger, Martin>(1889.9.26~1976.5.26)

  독일의 철학자.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의 대표자. 바덴주(州) 메스키르히 출생.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E.후설에게 현상학(現象學)을 배웠다. 1923년 마르부르크대학 교수, 28년 후설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 33∼34년 총장을 지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스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전후에 한때 추방되었다. 후에 다시 복직하여 강의를 하였지만, 전전·전후를 통틀어 그의 사색의 대부분은 슈바르츠발트의 산장(山莊)에서 이루어졌다.

하이데거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주요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 때문이며 이것은 전체 구상의 전반부(前半部)에 해당하며, 처음에 후설이 편집하는 현상학에 관한 연구연보(硏究年報)에 발표되었다. 여기에서는,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현존재)의 존재(실존)가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주제가 되고,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규정인 ‘관심’의 의미가 ‘시간성’으로서 확정되는 데서 끝맺고 있다. 그는 거기에서 《존재와 시간》의 본래의 주제인 ‘존재’와 ‘시간’의 관계로 되돌아가 현존재의 시간성(時間性)을 실마리로 해서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 의하여 밝히는 동시에 역사적·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역시 시간적인 지평(地平)에서 구명(究明)할 예정이었으나, 이 후반부는 미발표로 그쳤다.

즉, 그가 실존사상의 대표자로 간주된 것은,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 부분 때문이며, 여기에서는 불안·무(無)·죽음·양심·결의·퇴락(頹落) 등 실존에 관계되는 여러 양태(樣態)가 매우 조직적·포괄적으로 논술되었다.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상(三相)의 통일인 시간성으로서 제시된 것도, 인간이 시간적·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삶의 철학’ 이래의 사상을 실존의 시점(視點)에서 다시 포착한 것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현존재 분석의 수법은 정신분석에서 문예론(文藝論), 더 나아가 신학(神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1935년 전후를 경계로 해서 하이데거의 사색은 존재 그 자체를 직접 묻는 방향으로 향한다. 존재는 개개의 존재자와 동렬(同列)에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들을 저마다의 존재자로 존재하게 하는 특이한 시간·공간이며, 인간은 거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개존(開存:Eksistenz)’이다. 서양의 철학은 예로부터 존재를 존재자로서 파악하는 ‘형이상학’인 것이며, 거기서부터 하이데거의 역시 특이한 사관(史觀)이라 할 수 있는 존재사관이 탄생한다. 존재자를 인간의 객체로서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인간중심적인 ‘폐존(閉存:In-sistenz)’의 입장은 이 형이상학에, 즉 존재의 망각(忘却)에 유래한다.

현대에 필요한 한 가지 일은, 형이상학의 역사적 유래를 앎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존재 그 자체에 청종(聽從)하면서 그것을 지키고 간직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존재의 사색이 《존재와 시간》의 목표였던 존재 그 자체의 해명과 연속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인간 본연의 자세에 대한 견해가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런 의미에서는 후기(後期)의 하이데거를 이를테면 J.P.사르트르 등과 동렬의 실존주의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 밖에 주요 저작으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29)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29) 《휴머니즘에 관하여:?er die Humanismus》(47) 《숲 속의 길:Holzwege》(50) 《휠데를린의 시(詩)의 해명》(50) 《니체》(61) 등이 있다.


사르트르<Sartre, Jean-Paul>
(1905.6.21~1980.4.15)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파리 출생.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다녔는데, 동급생 중에는 M.메를로 퐁티, E.무니에, R.아롱 등이 있었다.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소년시절부터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해후도 그 때의 일이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루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이 포구는 후일 《구토:La Naus?》(1938)에서 묘사된 부비르라는 도시의 모델이라 한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간 유학, E.후설과 M.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저서 《자아의 극복:Transcendance de l’Ego》(34) 《상상력:L’Imagination》(36)은 당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심취가 낳은 철학논문이다. 38년에는 소설 《구토》가 간행되었는데,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듯한 이 작품의 특수성은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39년 9월 참전하였다가 이듬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41년 수용소를 탈출, 파리에 돌아와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장편소설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45∼49)의 대부분과 《시튀아시옹:Situations》(47∼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으나, 특히 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존재와 무:L’?re et le N?nt》(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인 작업이었고,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중부터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웅대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노작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레탕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誌)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46)에서 밝혀 두었는데, 그가 말하는 ‘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그 이전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 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으나, 특히 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그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생 즈네:Saint Genet》(52)는 《도둑 일기》의 작가 즈네의 평전(評傳)으로 쓰면서도 개인적인 실존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그러한 세계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 듯한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60)은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노작인데,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동맥경화증에 빠져 있는 양상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기모순적인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던 친구들이 계속하여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카뮈와도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도 많은 극작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파리:Les Mouches》(43) 《출구 없음:Huis-clos》(44) 《무덤 없는 사자:Mort san s?ulture》(46) 《더럽혀진 손:Les Mains sales》(48) 《악마와 신:Le Diable et le Bon Dieu》(51) 《알토나의 유폐자들:Les Suestr d’Altona》(59)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 때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현상화한 것으로 주목된다. 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카뮈<Camus, Albert>(1913.11.7~1960.1.4)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알제리 몽드비 출생.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빈곤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L.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 철학과에서는 평생의 스승이 된 J.그르니에를 만났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이 보이며, 이때 이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 문제 등이 서정적인 에세이풍으로 서술되었다.

1942년 7월,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그의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etranger》(42)은 발표되자, 칭송과 함께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寵兒)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神話)》(42)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희곡 《오해(誤解)》(44) 《칼리굴라:Caligula》(45)에서도,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 《콩바》지(紙)의 주필로서 레지스탕스의 필봉(筆鋒)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도 카뮈가 훨씬 더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일도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45)는 전시 중에 썼던 4편의 서간형식의 ‘독일인론(獨逸人論)’으로서, 편협한 애국심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그 후 《페스트》(47)는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었으며, 이것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하면서 페스트의 유행과 싸우는 선의(善意)의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 명쾌한 문체와 힘찬 필치로써 그렸다. 희곡 《계엄령》(48)은 《페스트》의 주제를 극화한 것이다.

시사평론을 쓰면서 연극을 상연하여 청년층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그를 실존주의자로 보는 세상 사람들과 매스컴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부정했으며, “실존주의가 끝난 데서부터 나는 출발하고 있다”라고 그는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반항적 인간》(51)을 둘러싸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여 10년 가까이 맺어온 우정에 파탄이 갔다는 사실이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희곡 《정의(正義)의 사람들》(49) 속에서 열렬히 변호되는 제정 러시아의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형이상적(形而上的)·역사적·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반대하여, 점진적·개량적인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발표된 《전락(轉落)》(56)은 깊은 내성(內省)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도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도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 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靜觀主義)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그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57년 노벨 문학상을 받고 나서, 최초의 본격적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슈바이처<Schweitzer, Albert>(1875.1.14~1965.9.4)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사상가·신학자·음악가.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출생. 제1차 세계대전 후 알자스가 프랑스령(領)이 되었으므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강사로, 그리고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그 사이에 《음악가·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en Bach:le musicien-po?e》(1905) 《예수전(傳) 연구사》 등을 발표하였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교 의학부의 청강생이 되어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현재의 가봉공화국)로 건너가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자력으로 병원을 개설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인이라 하여 포로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고 그의 병원도 폐쇄되었으나 아프리카 생활의 회상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Zwischen Wasser und Urwald》(21)의 출판을 계기로 그의 인간과 사업이 점차 세인의 주목을 끌기에 이르렀다. 이에 힘을 얻어 다시 랑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재개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큰 병원을 이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도와 진료에 전렴하였는데, 재차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 그는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려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28년에는 괴테상(賞)을 수상하고, 51에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으로 나환자촌(癩患者村)을 세웠다.

60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가 독립하여 가봉 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경외(敬畏)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새로 창설된 적도성십자훈장(赤道星十字勳章)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90세의 생일이 지나고부터 건강이 나빠져서 65년 9월 4일 전세계인의 애도 속에 죽었다. 그는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고, 철학가로서는 칸트를 연구하였으며,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였다.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과 오르간 음악》(1906)을 발표하고 과도한 풍압(風壓)으로 인하여, 음색이 손상되던 폐해를 제거하는 등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꾀하였고, 바흐 연구가로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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