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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사조》(성기조, 1995, 한국문화사)를, 《한강문학》에서 ‘문학도의 필독서’로 선정하여, 17호(여름호)부터 권두에 분재한다.〈편집자〉 * 강좌 순서 ⟹ 고대문학, 중세의 서양문학, 근세문학, 현대문학, 작가연구 |
2. 중세의 서양문학
-인류문명의 기틀이 선 시대
유럽사에서 중세로 알려진 시대는 고대문명의 종결과 현대의 시작 사이의 긴 기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적인 구분으로 중세기란 5세기 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하여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까지의 기간을 흔히 말한다.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이 15세기 중엽에 중세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은 당시의 ‘고대인들’을 ‘오늘날의 근대인들’, 즉 르네상스 인간들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1) 그들은 과학과 예술과 문학을 통하여 찬란한 빛을 발하던 그리스 로마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이에 일종의 어두운 터널인 중세를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중세’라는 문학사적인 용어를 창조한 것은 그리스, 로마, 성경시대 등 참된 고대로 복귀하는 것이 근대적이라는 주장을 통해서이다.2)
미슐레는 서기 500년대에서 150년대까지의 긴 중간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낙인찍었다. 15-16세기의 문헌학자들은 고대를 숭앙하여 겸손히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시대로 보았지만, 미슐레와 같은 이유로 중세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니다. 중세를 자신의 시대와 특별히 다르지는 않으나 극히 타락한 시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3)
한편 독일 지식인들이 인류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의 3시대로 구분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라틴어는 당시에 두 개로 분류되었는데, 하나는 고대 라틴어이고 다른 하나는 타락한 언어인 중세 라틴어이다. 18세기에는 고급 라틴어가 통속어 속에 전파되고 3시대 구분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중세가 계몽시대 인간들에게는 해로운 시대, 암흑시대였다. 낭만주의가 중세를 복권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실증주의는 중세를 특이한 시기, 아니 진보의 휴식기로 보았다. 이리하여 ‘중세’, ‘중세적’, ‘중세인’이라는 말은 경멸을 의미했다. 따라서 애초부터 언제나 중세라는 개념에는 르네상스가 도입한 단절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4)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세를 암흑과 타락의 시대로만 보지 않고, 인간 삶의 원형을 이야기해 주는 추억의 시대로 보기도 한다.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게 여겨졌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 매 행동과 매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들에 둘러 싸여졌고, 또 그 형식들은 거의 의식의 높이에 까지 올려졌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 등의 주요 사건들은 성례聖禮를 통하여 신비의 후광을 띠었고, 여행, 직무, 방문 같은 대단치 않는 사건들조차도 강복시降福式이니 의례儀禮니 서식書式 따위를 동반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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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쟈크 르 고프, 유희수 역, 《서양 중세 문명》(서울:문학과 지성사, 1992) p.11.
2) 위의 책, pp. 11-12 참조.
3) 이상섭,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비평》(서울:민음사, 1985) p.13-14 참조.
4) 자크 르 고프, 앞의 책 pp. 11-16 참조
5) 요한 호이징가, 최홍숙 역 《중세의 가을》(서울:문학과 지성사, 1992) p.11
위의 인용문은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1872~1945)의 유명한 저서 《중세의 가을》의 첫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는 현대인의 뿌리요, 현대인의 출처요, 현대인의 어린 시
절이다. 현대인의 향수를 간직한 추억의 시대요, 할아버지의 시대이다. 그것은 또한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고 구전되고 있는 옛날 얘기를 여전히 결부시키고 있는 중세인 것이다.
따라서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명명되는 어두운 이미지와 동시에 종교적 신앙, 조합들에서 실현된 사회집단들의 조화, 민중들 속에서 태어난 불가사의한 예술의 만개 등으로 중세를 아름다운 시대로 보는 찬란한 이미지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는 기근과 대역병과 빈곤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성당과 성채의 시대이고, 도시며 대학이며 노동이며 포크며 모피며 태양계며 피의 순환이며 관용 등을 만들어 내거나 발견했던 시대이다.6)
중세를 다시 시대 구분을 한다면, 중세 전기와 중세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4세기부터 9세기까지를 중세 전기로 볼 수 있는데, 이때는 지체된 시기이면서, 봉건제도의 발생기이다. 한편 10세기부터 15-16세기까지를 중세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때는 대 비약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뒤에 이르러서는 중세적인 형식이 무너지는 종결의 시기이기도 하다.
중세문학은 몇 가지의 계열로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중세 문학을 네 계열로 분류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7)
첫째는 기독교 계열의 라틴 문학이다. 주로 라틴어로 기록되어진 것으로, 사상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많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354∼430)의 《참회록Confessiones》(397∼400),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1380∼1472)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Imitatio Christi》, 파리대학 교수였던 아벨라르Pierre Abélard(1079∼1142)와 그의 애인 엘로이즈 사이의 왕복 서신, 성 프란체스코S. Francesco d' Assisi(1182∼1226)의 생애를 그린 《작은 꽃》, 왕자들의 여러 일화를 모은 《황금 전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로 게르만 계열의 신화, 서사시, 사가Saga이다. 고대 게르만족의 신화와 전설을 노래한 것으로는 《엣다Edda》가 있다. 장단長短을 합쳐서 40편 가량 남아 있는데, 그리스 신화와 아울러 유럽 2대 신화로 일컬어지는 북구 신화의 거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신화의 영웅이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중세 서사시 또는 사시史詩의 최대 장편으로서, 이와 같은 사시로 영국에는 《베오울프》, 프랑스에는 《롤랑의 노래》, 스페인에는 《시드》가 있다. 또한 북대서양의 고도 아이슬란드에는 11세기경부터 발달한 사가Saga라 일컬어지는 산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신들과 영웅의 이야기 외에 기독교의 왕자나 바이킹의 호걸과 시인, 지방 유지의 선교, 식민, 결투, 복수, 사랑 기타의 생활을 근대 소설에 거의 근접한 리얼리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150편 가량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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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쟈크 르 고프, 앞의 책 pp.16-17 참조
7) 김희보,《세계문예사조사》(서울:종로서적, 1989) p.83참조
셋째는 켈트, 기독교 계열의 기사도 소설이다. 기독교적인 정신세계는 그 무렵에 확립된 봉건제도와 더불어 독특한 기사도를 형성하게 된다.
기사들에게는 “영원한 여성”이 있었고, 결국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노래된다. 그런 이야기를 가리켜 “로망스”라 하는데 음유시인들에 의해 창작되어 12-13세기경부터 크게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더왕의 죽음》, 《성배聖杯이야기》, 《파르시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가우엔과 초록의 기사》 등이 있다.
넷째는 새로운 세속적인 문학이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과 켈트 특유의 환상성을 버리고 좀 더 현세적인 색채를 짙게 한 시가와 이야기이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생겨난 새로운 서정시와 각 지방의 대학을 유전한 방랑 학생의 노래 및 《오카생과 니콜레트》 따위의 이야기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술을 예찬하고 방랑을 사랑하며 사랑에 젊음의 피를 들끓게 하면서 생의 기쁨을 한껏 들여 마시려 했다. 따스한 남부 프랑스에서 발생한 이 뜨루바둘troubadour의 새로운 시풍이 이탈리아로 전해져 젊은 날의 성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도 감동을 받게 되었고, 이윽고 단테와 페트라르카로 연결되었다.
▲기독교 계열의 라틴문학
이 시대의 모든 사상과 감정을 비롯한 문학적 표현들은 오직 승려 계급에 의해서 양피지 위에에 기록되었다. 방언과 민중의 말이 풍부한 문화 공간 속에서 승려들은 라틴어를 사용한 것이다.
라틴어는 중세 초기 유럽의 공용어이자 승려 계급의 언어인 동시에 교회에서 사용하는 문화어로서 신의 말씀이 생생하게 들어 있는 언어였다. 그 당시 라틴어를 장려했던 유일한 교육 기관은 수도원이었다.8)
한편, 중세에 있어서 모든 소요를 지배하고 모든 것을 고요와 질서로서 감싸는 한 소리가 있었으니, 곧 교회 종소리가 그것이었다. 교회 종소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톤으로 기쁨과 슬픔, 평온과 위험을 알려주는 영감이었다.
종소리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영혼에 매번 그 온전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9)
이와 같은 분위기가 예술가들의 작품 속으로의 용해되어 상당 부분이 중세의 인간 가치체계로 나타나 설명된다. 그 지배적인 가치체계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며, 그는 불가피하게도 신에게로 방향이 정해져 있으나, 지상의 삶이 운명적인 유한성(죽음) 때문에 신과 분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아래에서의 인간 문명은 인간이 신과 결합하는 과정을 도와주도록 구축되어 있다. 이것이 사회의 모든 제도와 문화의 전체 패턴의 궁극적인 평가 기준이다.
신과의 영교靈交가 영혼의 경험으로, 신비적 영교를 준비하는 명상적 생활이 어떤 형식의 활동적 생활보다 우월하다. 그리하여 수도사는 세속적 사제보다 우월하다. 마치 사제가 다른 것들은 동등 하지만, 평신자의 지위보다 정신적으로 더 바람직한 지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중세문학은 이러한 가치의 척도에 따라 판단된 인간 생활의 연구라 볼 수 있다. 이 척도는 단테의 《신곡》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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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호프만 뢰쉬, 오한진 외 역 《독일문학사》(서울:일신사, 1992) pp.21-22 참조
9) 요한 호이징가, 앞의 책 p.12참조
10) 존 C. 맥갤리어드, 앞의 책 pp.76-77 참조
1.전기 암흑시대의 작가와 작품
(1)《참회록Confessiones》(397∼400)
중세시대의 서두를 장식하는 작가는 《참회록Confessiones》(397∼400) 《신의 나라De civitate Dei》등을 썼던 아우구스티누수Augustinus (354∼430)이다.
그의 대표작 《참회록》이 집필되던 당시는 로마제국 말기로서, 이 책이 집필된 뒤 곧 고트족과 반달족의 침입으로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퇴폐와 혼란 속에서 열렬한 마음으로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였다. 그 사상은 중세 1천년에 걸친 기독교 지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인 모친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에서 신부神父로 일생을 보냈다. 그의 박식과 신앙심은, 카톨릭 교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와 동등한 대교부大敎父로서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리우게 되었다.11)
《참회록》은 전 1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9권은 유년시대에서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기까지의 자서전적인 내용이요, 10∼13권은 성서해석과 관련된 신학적, 철학적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9권까지가 생활편, 체험편이라면, 10권 이후는 사상편, 해석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을 가리켜 “내 생활의 악과 선에 관하여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했다.
장엄한 《시편》의 인용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힘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변증과 찬미가 있은 뒤, 유년기부터 17세 때 카르타고에 유학하기까지의 생활이 1∼2권에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제 3권에는 17세 때부터 19세 때까지 이르는 카르타고에서의 유학 생활, 청춘의 눈뜸과 사랑에 대한 동경에서 끝내는 불순한 사랑, 유물론적인 마니교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4권에서 6편은 그 속에서 진리를 향한 사모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점차 기독교로 접근하는 과정, 그러면서도 한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며 자식까지 얻게 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7권에서 8권에 걸쳐서는 점점 기독교에 가까이 이르면서도 몇 가지 의혹이 그를 괴롭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여 대지에 몸을 던지고 외친다. “오오, 주여, 당신은 언제까지 노여움을 품으시겠습니까?” 이렇게 눈물어린 목소리로 외치는 그에게 드디어 회개가 온다. 이 대목이 전 부분을 통하여 가장 격조 높은 부분이다.
제9권에서는 일생을 하나님 앞에 바치기 위하여 지금까지 종사하던 교사직을 버리고, 친구 아리피우스와 자기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도중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을 맞게 되자, 그녀의 일생을 회상하고 찬미하는데, 가장 아름다운 대목으로 꼽힌다.
제10권에서는 “사람은 어떻게 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논하여, 기억에 관한 면밀한 분석으로 유명하다. 11~13권은 ‘창세기’의 해석을 시도한 부분으로서, 그 속에 유명한 ‘시간론’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이거나 카톨릭이거나 어느 쪽에서도 사상적인 아버지로 숭상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 고백서인 동시에, 적나라하게 자기 사상과 생활의 방황 및 구원을 고백한 자서전으로서, 세계 자서전 문학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12)
(2)기독교적 라틴 작가
로마 제국의 붕괴 과정에 즈음하여 기독교는 끊임없이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라틴 문화는 서西로마 제국의 멸망 후 계속되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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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영수, 《문예사조》(서울:수학사, 1986) p.16 참조.
12) 김희보, 앞의 책 pp.83-85 참조
그 무렵 최후의 로마 귀족이라고 일컬어지는 보에티우스Boétius(480∼542)가 등장하여 플라톤 정신으로서 기독교의 여러 문제를 해석하였고, 교회의 신학자들과는 또 다른 영향을 중세에 남기게 되었다.
그의 옥중 수상기 《철학의 위안》은 신학의 도그마나 철학의 유파에 얽히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로서 단테 또는 초서 등에게 영향을 끼친다.
갈리아 지방의 작가로는 찬송가와 수많은 시를 남긴 알드헬름Aldhelm(639∼709)과 《영국 교회사》를 쓴 베다Beda(673∼735) 등이 유명하다. 한편 카를 대제Kar der Groβe(742~814) 때가 되어 민족 대이동 후 처음으로 문예부흥의 기운이 찾아오게 되었다. 대제는 중앙집권적인 통치로써 평화를 기하고 아울러 여러 국가의 학자를 궁정에 초치하여 문예의 진흥과 통일에 힘썼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이른바 카롤링가 왕조 르네상스로서, 그 중심 지도자는 잉글랜드의 요크에서 온 알퀸Alcuin(735∼784)이다.
영국에서는 알프레드 대왕(제위 871~901)이 나와 덴족의 침입과 싸우면서 문예진흥에 힘썼고, 또 자신이 직접 문필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보에티우스와 베다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과 유명한 《앵글로 색슨 연대사The Alglo-Saxon Chronicle》의 첫 부분도 대왕이 관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3)
2.중세 후기의 기독교 계열의 작품
11∼12세기에 봉건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독특한 기사 제도를 낳게 되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와 시가를 발달시켰다.
학계에서는 스콜라 철학이 안셀무스Anselmus, 알베르투스마그누스Albertus Mág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 등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이성의 권위를 확립하여 새로운 인식에 기초해서 교리를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 아벨라르Pierre Abélard(1079∼1142), 로저 베이컨Roger Bacon(1214∼1294) 등에 의해 대표된다. 프란체스코 S. Francesco d'Assisi(1182∼1226)가 탁발교단을 설립하여 종래의 은둔적 생활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 것도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산문으로는 아벨라르와 그의 애인 엘로이즈 사이의 왕복 서신이 있다. 또한 《햄릿》의 원래原來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덴마크의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1150∼1206)의 《덴마크역사Hitoria Danica》 등이 있다.
시가 부문에서는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의 작품이라고 하는 《분노의 날Dies Irae》을 비롯하여 우수한 찬미가(종교시)가 창조 되었다. 한편 세속적인 아름다움이나 성의 고뇌 등을 노래하거나, 혹은 성직자의 부패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라틴시가 등장하게 된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러한 시들은 12세기경 각지를 순례하며 수도원과 주막집 사이를 왕복한 무명의 방랑 서생書生 Goliards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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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위의 책 pp.85-86 참조.
14) 위의 책 pp.90-91 참조:이하 (1)-(3)절은 주로 이 책을 참고함.
(1)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 왕복 서신》
아벨라르는 당시의 스콜라 철학 자 중 가장 민감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22세때 스승인 샴포의 윌리엄을 논쟁으로 이기고 새 학파를 일으켰다.
뒷날 파리에서 철학교수가 되었으나, 39세 때 17세 소녀 엘로이즈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후견인인 엘로이즈의 숙부 퓨르베르에게 접근하여 그 집 가정교사로 취직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고백대로 “우선 집을 하나로 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철학적 명성과 그녀의 스승이라는 명목 속에 숨어 그녀를 소유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비밀은 곧 그녀의 숙부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엘로이즈의 숙부는 아벨라르에게 속죄를 요구했다. 즉 그의 명성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비밀히 엘로이즈와 정식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엘로이즈는 이미 임신하고 있었으나, 아벨라르의 명성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혼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아벨라르의 고향에 도피해 살던 두 사람은 아이를 누이동생에게 맡긴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퓨르베르 일가에서는 엘로이즈를 학대하고, 결혼을 공포해 버렸다. 할 수 없이 아벨라르는 그녀를 수도원에 도피시켰다. 엘로이즈의 숙부는 엘로이즈가 수녀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아벨라르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아벨라르의 하인을 매수하여 ‘남성을 상징하는 신체의 한 부분’을 자르게 하였다. 거세라는 잔인한 행위를 당한 아벨라르는 부끄러움과 함께 스스로 수도원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도 수녀원에서 자란 엘로이즈가 세상의 햇빛을 본 것은 아벨라르와 함께 살았던 3년뿐이었다.
이상이 첫째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아벨라르가 이 편지를 미지의 친구에게 써 보낸 것은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그는 이미 육체에 가해진 굴욕과 정신적 갈등을 초월하여 오로지 그리스도 섬기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 편지를 보게 된 엘로이즈는 옛날에 그리운 연인에게 정열적인 편지를 보냈다. 31세의 젊은 엘로이즈의 억제할 수 없는 관능의 회오리바람이 그 편지 속에 스며있었으나, 아벨라르의 회답은 냉정하기 짝이 없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편지는 오갔으나, 여전히 수도원 생활에서 주의할 점과 신학 및 성서학적 문제에 관한 해답과 자작 찬미가와 설교집과 신앙의 전통성에 관한 의견 밖에는 말하지 않았다.
아벨라르는 각지를 방랑한 뒤 쓸쓸하게 홀로 죽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의 시체를 엘로이즈는 후히 묻었고, 엘로이즈가 죽자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그 옆에 묻어 주었다 .
(2)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
책의 제목인 《작은 꽃 I Fioretti》이란 사화집詞華集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이다. 전 54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이나 일화를 중심으로 쓰여 있다. 특히 16장에는 유명한 ‘새에게의 설교’가 실려 있다.
프란체스코는 눈을 들어 길 가까이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뭇가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새들이 떼 지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길동무에게 “그들이 여기 이 길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가서 내 자매인 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나무 위에 있던 새들도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새들은 모두 조용하여 성 프란체스코가 설교를 끝내고 축복을 내릴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 프란체스코가 새들 사이를 걸으며 옷깃으로 그들을 쓰다듬어도 새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자매 새들이여, 너희들은 너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한없는 은총을 입고 있다. 너희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주 하나님을 칭송 하도록 하여라. 하나님은 너희들이 소망대로 어디나 날아가는 자유를 주시고 샘과 흐르는 물을 너희의 마실 것으로 주신다. 하나님은 너희에게 산과 산골짜기를 집으로 주시고 하나님은 너희와 너희 어린 것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그러므로 나의 자매여, 마음으로 은혜를 잊는 죄를 범하지 말고 항상 주 하나님을 칭송 하도록 하여라”
성 프란체스코가 새들에게 설교를 할 때, 새들은 부리를 열고 날개를 벌린 채 공손한 몸짓으로 기쁨을 나타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가난과 절대적인 사랑의 봉사 속에 살았다. 그는 ‘작은 형제들’ 이란 수도회를 만들었다. 그는 찬송가에 실려 있는 〈태양의 노래〉 등 아름다운 시도 남기고 있다.
(3)《그리스도를 본받아》
전 4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저자는 독일 태생의 신비주의자인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1380∼1471)이다.
제1권은 ‘영적 생명에 도움이 되는 권고’라는 제목 밑에 2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에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이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므로, 자기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삶과 합치시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책을 쓴 의도를 밝히고 있다. 17장 ‘수도원 생활’에서는 참다운 경건성이 없다면 수도원 생활 또한 헛된 것임을 이야기한다.
제2권은 ‘내적 생활에 관한 권고’이다. 제1장의 ‘내적 생명’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 비참한 세상을 버리면 영혼이 안식을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3권은 ‘성찬식에 관한 권고’이다. 성서를 읽는 일과 성찬식에 임하는 일이 크리스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제4권은 총 59장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내적 생명의 위안’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4)《십자가의 꿈 The Dream of the Rood》
《십자가의 꿈》은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에 관한, 많은 시 중 하나이다. 이 시는 인기 있던 중세의 형식인 몽상夢想을 사용하고 있다. 즉, 무명의 시인은 자기가 꿈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말한다.
이 몽환에서 십자가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상의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눈에 보이는, 찬란한 우주적 물체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축축이 젖어’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책형磔刑 crucifixion]을 말하는 대목에선 다음과 같은 영웅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 때 젊은 용사, 전능하신 하나님
강하시고 단호하신 그 분은 옷을 벗으시고
인류에게 속죄하시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십자가에 오르셨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말을 타고 나가서 괴물을 죽이고 백성을 구하려는 게르만 왕과 거의 흡사하다. 전능자全能子로서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그가 다시 돌아와 벌을 주고 보상하는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고 마지막 ‘의기양양한’ 지옥에의 하강에서 나타난다.
이 시의 운율 패턴은 모두 고대 영어의 시에서처럼, 두운 제 1반행半行의 하나 혹은 두 단어, 그리고 제 2반행의 한 단어 시작에 있는 강세 있는 음절의 유사음에 의존하고 있다.
▲게르만 계열의 민족 서사시 및 사시史詩
기독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게르만 시대의 문학은 초기에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종교적인 제례의식祭禮儀式에서 비롯되었다.
목동, 농부, 군인 등은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의 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다. 그들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가는 곳마다 악령이나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게르만족들은 마법으로 보탄Wotan, 토르Thor, 티르Tyr, 프레야Freya 등의 신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 힘으로 신들을 진정시키거나 무서운 재앙을 물리치려고 하였다.15)
그러나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게르만족 전체의 생활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동고트족, 서고트족, 부르군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 민족들은 단기간에 유럽을 가로질러 발칸 반도, 이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등지로 이동하면서 이질적인 문화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들의 모든 종교적 관념들이 변화를 겪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새로운 문화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최초의 문학적 결실이 바로 아리안 계통의 서고트족 불필라Wufila(311∼383) 주교가 번역한 성서이다.
한편 끊임없는 전쟁, 잦은 이동, 주거지의 무차별적 점령이 계속되던 이 시기는 귀족 지배계층의 지도자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등장했다. 이들의 용감한 행동은 추종자들의 의식 속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귀족 계급의 투사이자 가수인 스코프Skop는 영주의 홀에 모인 투사들 앞에서 하프 연주에 맞추어 지배자의 영웅적 업적을 노래했다. 이로써 영웅서사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위풍당당한 군대와 그들의 업적은 후세대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고, 여기에 환상적인 전설이 가미되어 신화의 형태로 바뀌었다. 에첼 왕, 디트리히 폰 베른, 힐데브란트, 지그프리트와 크림힐트, 그리고 나중에는 로터왕과 아키타니엔의 발터가 자주 생칭송되던 영웅들이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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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호프만 로쉬, 오한진 외역,《독일문화사》(서울:일신사,1992), p19참조
16) 위의 책, pp.19-20 참조
(1)《베오울프Beowulf》
게르만 민족 중 튜튼족은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신화, 전설과 영웅적 선도자의 전설화 된 사적을 주제로 하는 서사시적 형태의 문학을 형성하였다.
그 중 영국으로 이주한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형성된 《베오울프가》 채록된 연대상 가장 빨라서 10세기 말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사본이 현존해 있다. 그러나 서사시의 성립은 그보다 훨씬 전인 700년경으로 추측되어진다.
이 서사시에 전반은 스웨덴의 용사 베오울프가 괴물 그렌델을 퇴치하는 내용이며 후반은 왕위에 오른지 50년이 지나 이제 연로해진 베오울프가 악한 용과 싸워 그것을 쓰러뜨리지만 자기도 상처를 입고 죽는 이야기이다. 전 3,182행의 이 장시는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초기의 영웅서사시의 하나이다. 그런데 7세기경에 이미 기독교화한 앵글로색슨족의 이서사시에는 이교적 원리와 기독교적 요소와의 기이한 혼합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민족의 운명을 ‘하나님’의 개념과 혼합시키고 있으며 요괴를 거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古 영어로 쓰여진 것으로는 《핀즈부르호Finnsburh》, 《왈드헤레Waldhere》, 《몰든의 전투The Battle of Maldon》 등이 있으나 모두 단편적인 것들이다. 기타 《위드시드Widsith》와 《데오르Deor》는 서정적이어서 정확히 서사시라 할 수는 없으나 모두 영웅시대에 속하고 또 이것들 역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와 같은 시기에 노산브리아 지방에 캐드먼 및 키니울프 등 종교시인이 활약하였다. 특히 키니울프는 낭만적인 서사시의 성격을 지닌 신앙 이야기를 썼다.17)
(2)《엣다Edda》
북구 스칸디나비아 지방에는 고대 아이슬랜드어로 기록된 《엣다》라 일컬어지는 운문과 산문의 2종에 문서가 있다. 《구舊 엣다》는 ‘시의 엣다’라고도 일컬어지며, 북구의 신화와 영웅 전설을 읊은 고시의 집대성으로서, 형식과 내용에 있어 다양하다.
그것은 일찍이 아일랜드의 성직자 새문드의 창작 모음 또는 엮음이라 전에 왔으나 실제로는 9세기 이후의 스칼트Skald 가요를 좀 더 후대에 집대성한 것으로 본다. 그 중 저명한 것은 신화시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뵐루스파》(무녀의 예언)이다. 그것은 무녀가 최고 신 오딘Odin을 향하여 여러 신이 출생하기 이전의 세계로 종말을 예언하는 이야기이며, 북구 민족의 신앙을 다룬 특이한 상상의 산물이다.
신화에 이어지는 영웅시는 순 북구적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구와 독일 지방의 전설을 전한 것이 많으며 예를 들자면 《니벨룽겐의 노래》와 같은 것을 다룬 것이 있어 그것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속담과 격언집의 종류까지 포함하고 있어 북구 게르만 민족이 소유하고 있는 민족 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7세기 이래로 거기에 전개된 웅대한 비전과 눈부신 용기로 해서 독자를 매혹시켜 왔다.
《신新 엣다》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아이슬랜드의 역사가 소노르리 스투를루손이 1230년경 산문으로 쓴 것으로서, 오딘 신화의 시법에 관한 해설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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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희보, 앞의 책, p.86 참조
18) 위의 책, pp.86-87 참조
(3)《사가Saga》
위의 《엣다》 보다도 기독교 문화의 감화를 덜 받은 것에 아이슬랜드의 《사가》가 있다. 이 ‘사가’란 말은 고대 노르웨이어로 “이야기”란 뜻이다.
이 작품은 아이슬랜드 또는 노르웨이의 군주와 영웅에 관한 신화 및 전설로서 원래 9세기 중엽에 노르웨이 본국이 압제에 항거하여 자유를 찾아 얼음이 덮인 섬으로 이주한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던 것이 후대에 기록된 것이다.
《사가》 전성기인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역사적 색체가 짙은 것으로부터 역사적 색체가 여린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것까지 여러 종류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들은 그 연대가 봉건제의 전성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정신의 감화는 희박하여 그 감정은 완전히 중세의 초기의 것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19)
(4)《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lied》
《베오울프가》나 《엣다》 등에 독일 지방의 민족 이동기의 역사와 전설이 반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류流의 서사시는 뒤늦게 기록되었고, 1200년경이 되어서야 《니벨룽겐의 노래》가 집대성되었다.
이 민족 서사시는 다른 독일 사시史詩인 《쿠드룬Gudrun》이나 동고트의 테오디리히 대왕에 관한 영웅전설시Heldenbuch 등과 마찬가지로 라틴 문화와 기독교의 감화를 받아, 세련되면 기사도Chivary의 관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활감정을 말해주고 있다.
북부 프랑스의 무훈武勳의 노래Chansons de geste는 이 생활 감정의 일보전진이라 할 수 있다.
작자는 장르에 걸맞게 익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를 만든 저자는 동시대의 교양 뿐 아니라 바이에른-오스트리아 쪽 도나우 지역의 문학에 정통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1198∼1203년 사이 바로 도나우 지역에 살고 있는 파사우 주교 볼프거Wolfger의 집에서 씌여진 듯하다.20) 《니벨룽겐의 노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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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같은 곳.
20) 호프만 뢰쉬, 앞의 책, p.47 참조
라인강의 아름다운 흐름에 그림자를 던지며 볼름스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부르군트의 왕 군텔이 사는 성이었다. 그의 누이동생 크리힐트는 뛰어난 미녀였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키우고 있던 독수리가 두 마리 매한테 습격을 받아 죽는 꿈이었다. 그것은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한 운명의 예고였다.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 네덜란드의 왕자인 지그프리트였다. 그는 니벨룽겐족을 정복하여 그 보물을 빼앗았다. 또한 용을 무찔러 그 피로 목욕을 한 불사신의 영웅이기도 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크리힐트를 보고 결혼을 신청하였다.
한편, 그녀의 오빠인 군텔 왕은 아이슬란드의 아름답고 용맹한 여왕 브룬힐트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창 던지기, 돌 던지기, 넓이 뛰기 등 세 종목의 경기에서 그 여왕을 이겨야만 했다. “이 경기에 이기게 해주면 누이동생과의 결혼을 승낙해주겠다”고 군텔은 지그프리트에게 말하였다. 지그프리트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갑옷을 입고 군텔 왕의 그림자가 되어 브룬힐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이들은 모두 결혼을 성취할 수 있었다.
행복한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지그프리트에게는 귀여운 자식이 생겼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브룬힐트와 크리힐트 두 여왕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크리힐트가 경기 때의 비밀을 말하여 브룬힐트를 모욕하였기 때문에 브룬힐트는 울면서 복수를 결심하였다. 브룬힐트의 명령을 받은 용사 하겐은 지그프리트를 사냥에 꾀어내었다. 불사신인 지그프리트에게도 등에 한군데 약점이 있었다. 용의 피로 목욕을 할 때에 나뭇잎이 등에 붙어 피가 묻지 못한 곳이었다. 그 비밀을 알게 된 하겐은 지그프리트를 속여 등 뒤에서 창으로 찔렀다. 물을 마시기 위해 엎드렸던 지그프리트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풀과 꽃에는 빨간 피가 얼룩지게 되었다.
슬픔에 잠겨 있던 미망인 크리힐트는 훈족의 엣첼왕과 결혼하게 되었다. 몇 해의 세월이 흐른 뒤 지크프리트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하겐과 브룬힐트 일족을 자기 성으로 초대하였다. 그리고 피어린 복수전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브룬힐트 일족은 전멸하였고, 크리힐트 자신도 죽게 되었다. 죽을 사람은 모두 죽고 사람들은 탄식에 잠기는 것이었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그 엄청난 고난에 대해 나는 더 이상 말할 것 없네
거기 멸망한 채 죽어 누워 있는 모습을
운명이 그 뒤 훈족의 장래를 어떻게 결정지었는지.
(5)《쿠드룬 노래Das Kudrunlied》
두 번째 포괄적인 영웅 서사시 《쿠드룬 노래Das Kudrunlied》(1230~1240)는 《니벨룽겐의 노래》의 세계상과 인간상과 대조된다. 궁정문학의 모범에 따라 아름답게 만든 이 서사시는 기독교적 화해의 분위기를 풍긴다.
내용을 말하자면 쿠드룬은 반反 크리힐트이다. 크리힐트가 고집스럽게 복수를 계획하는 데 반해 제란트Seeland의 하르베크 왕에게서 빼앗은 신부 쿠드룬은 13년간 구금되어 있는 동안 온갖 멸시와 모욕을 참고 견딘다. 그녀가 구출된 후 화해의 결혼식이 뒤따른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잔인한 복수의 법칙이 통용됨으로 인해 불완전한 것으로 묘사된 궁전 세계가 《쿠드룬 노래》 마지막에서는 밝은 광명으로 빛난다.
(6)《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프랑스 문학은 《롤랑의 노래》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롤랑의 노래》는 프랑스어로 씌어진 위대한 최초의 설화시(narrative poem)이다.21) 노래 형식으로 민간에 구전되다가 11세기 말 또는 12세기 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프랑스 봉건제도의 이상인 기사의 영웅적 행위를 예찬한 서사시이다.
제1차 십자군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이 시는 샤를마뉴 대제의 생애에 있어서의 한 사건에서 발단된다. 8세기 말경 프랑스와 샤를마뉴는 스페인에 주둔하고 있는 사라센 군과 전쟁을 벌인지 일곱 해째가 되었다. 사라센의 마르실왕은 도저히 더 비틸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복종하기를 맹세하며 금, 은, 보석을 보내어 프랑스에 충성을 서약하였다. 용사 롤랑은 이들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가늘롱은 평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그 평화안이 샤를마뉴 대왕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평화조약의 사자로 가야할 사람은 마땅히 가늘롱이라고 롤랑은 지명하였다. 그러나 그 사자의 역할이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가늘롱은 화가 났지만 그 명을 받아들여 롤랑에의 복수를 결심하면서 사라고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사명을 완수한 가늘롱은 마르실 왕과 한 패가 되어 프랑스 군이 귀국하는 도중 불의의 습격을 가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이러한 시실을 모르는 프랑스 군은 롤랑에게만 명을 주어 후위를 지키게 하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산봉우리가 높고 골짜기가 어두컴컴한 외진 곳에 이르게 되자 사라센 군사들은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것이었다. 첩첩 산맥인 피레네 산맥이라 더 도망할 곳도 없었다. 롤랑의 친구인 올리비에는 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대왕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롤랑은 그 말을 거절하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적과 싸우리라 결심하였다. 전투는 시작되었다. 프랑스 군은 힘껏 싸웠으나 전사자의 숫자는 늘어날 뿐이었다. 남은 병력이란 겨우 60명 뿐, 그때서야 롤랑은 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대왕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원군이 오는 낌새를 눈치 챈 사라센 군은 도망가지만, 혼자 남은 롤랑도 끝내는 승리자로서 또한 크리스찬의 순교자로서 숨지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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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존 C. 맥겔리어드, 앞의 책, p.78 참조
샤를마뉴 대왕이 룽스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군이 전멸한 후였다. 대왕은 사랑하는 부하들의 죽음을 탄식한 뒤에 이교도들을 추적하여 그들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예블강에 빠져 죽게도 하였다. 그리고 난 뒤 룽스보로 돌아와 전사자들을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반역자인 가늘롱은 능지처참을 하였다.
시인은 롤랑이라는 유럽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 한 사람을 창조해내었다. 아킬레우스, 아이네이아스, 햄릿처럼 롤랑은 이념의 화신이다. 롤랑이 육화肉化한 이념은 봉건 기사도의 이념이다. 봉건사회의 제도가 모든 계급에서 산출하려고 모색했던 특징들과 태도를 롤랑은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지극히 용감무쌍한 투사이며,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신하이며, 뜨거운 우정을 지닌 친구이다.
인간은 그들의 영주를 위해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사나운 열기와 추위, 험난한 기후에도 참아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피와 살과 가족을 잃어야 한다.
명심하라, 지금! 각자는 용감히 싸워라!
우리를 모욕하도록 수치스런 노래가 불리어지게 하지 말라!
이교도는 틀렸고, 그리스도 교도는 옳다!
나에 대한 험담을 아무도 못하게 하라!
이것이 행동의 의무를 가진 사람의 규범이다. 이 시에서나 다른 데에서도 롤랑은 자신의 운명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기사로써 갖춰야할 충직성, 봉토封土를 하사받은 기사로써 용감하고 우직했다.22)
프랑스 문학사는 11세기 성자전聖子傳과 무훈시武勳詩에서 비롯된다. 이 무훈시 가운데 최초의 단연 돋보이는 걸작 서사시가 바로 《롤랑의 노래》이다. 작품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비극적인 장엄미는 전사의 무용과 더불어 신앙의 정열과 초자연적 정적靜寂으로 채색되어 있다. 단순하며 통일적인 이야기의 구성, 빈틈없는 줄거리의 전개, 사건과 장면과 인물 등의 균형 잡힌 배치와 그 대조의 묘, 등장인물의 심리 관찰의 예리함, 뉘앙스가 풍부한 회화적 묘사 등은 그야말로 프랑스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훈시는 그 뒤의 봉건시대 변화와 더불어 사시적史詩的인 요소를 상실한다. 특히 서사시의 특질인 집단의 이상과 영웅주의를 잃고 로망스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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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존 C. 맥갤리어드, 앞의 책, pp.79-82 참조
▲로망스와 새로운 형식의 대두
중세 라틴어의 문학은 말할 것 없이 교회의 세력권 안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층계급에서는 일상용어인 속어(곧 프랑스어)로 생활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기운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속어 문학이 문학상의 큰 흐름이 된 것은 11세기 말, 남부 프랑스-프로방스 지방에 생겨난 뜨루바둘의 시에서 비롯되었다.
이 뜨루바둘troubadour(서정시인)들은 시와 음악을 우아한 취미로서 개척한 신사나 기사,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지위는 매우 배타적이어서 작곡자로서의 재능을 확보한 사람만이 그 지위를 허락 받았다. 서정시인 말고도 음유시인jongleur이 있었는데, 이들은 직업적인 연주가였다. 독창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민요라든가 로망스를 노래하거나 암송하는데 숙련된 사람들이었다.
한편 프로방스에 맞먹는 북부의 존재는 뜨루베르trouvère(서사시인)이었다. 이들은 뜨루바둘에 비하여 좀 더 직업적이었고, 이들 서사시의 경향은 나중에 로망스로 연결되었다.23) 앞에서 언급한 《롤랑의 노래》와 같은 무훈시는 이들의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오늘날 음유시인이라고 일컫는 대상은 뜨루바둘, 뜨루베르, 음유시인jongleur을 포괄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정시인으로는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Bernard de Ventadouir, 베르트랑 드 본Bertrand de Born, 아르노 다니엘Arnaut Daniel, 피에르 비달Perre Vidal 등이었다.
그들은 주로 사랑을 다루었고, 아울러 성모 숭배의 감화를 받아 그 대상을 후원자의 아내 등 신분 높은 여성들에게서 구하였다. 그들의 서정시는 근대 연애시의 근원을 이루는 것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다. 단테도 페트라르카도 독일의 ‘민네장’의 시인들도 그 연원을 뜨루바둘에 두게 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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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존 메이시, 박중황 역, 《세계문학사》(서울:종로서적,1991), pp.156-158 참조
24) 김희보, 앞의 책, p.97 참조.
한편, 후기 중세 문명의 현저한 특징은 질서를 갈망하는 점이었다. 무질서 위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이 봉건제도를 낳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봉건제도의 유래를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어지는 로마의 사회조직 또는 수령과 부하로 구성되는 게르만족의 사회계급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봉건제도는 특히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약자가 강자에게 의지하려는 자연스런 욕망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중세의 이상주의자들은 실제로 보통 조직화될 수 없는 것들을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게 조직화함으로써 질서를 향한 갈증을 만족시켰다. 이상주의자들이 사용한 모델은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조직을 본 따서 조직한 것이었다. 그들이 사용한 모델은 모두 위로는 하나의 최고 우두머리를, 그 아래로 서열이 이어지는 일방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에, 질서와 위계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모든 것을 이상화하려는 경향을 지닌 개화된 새로운 시대정신은 기독교 종교관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사회에서 성행하였던 금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여전히 경건하였고, 청렴하였다. 기독교는 더욱더 인간화되고, 고결화 되고, 지성화 되었다. 그러나, 천벌을 내리는 날을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쉽사리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므로, 종교적 가르침의 중점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의 도입이 요구되었다.
이 새로운 대안이란 성모 마리아를 경배하는 것이었다. 지적으로 된 삼위일체 사상은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가슴의 온기를 크게 생성할 수 없었으며, 또한 영원한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잊어버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반면, 산고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였고 아들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직접 보았던 예수의 어머니는 생생하게 인간적인 고통의 체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입장을 성모 마리아가 이해해 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믿었기에 마리아에게 소원을 빌었고, 또한 그녀의 아들인 예수와의 사이에서 중재해주도록 마리아에게 간청할 수도 있었다.
성모 마리아 경배사상이 생겨난 것은 게르만족의 여성 숭배와 회교에서 크게 영향 받은 것이 확실하며, 또한 사랑은 인간이 미의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고, 천국의 미를 이해하고 다다르는 첫 단계라는 것을 주장한 신 플라톤적인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게 된 복합적인 요소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든 간에, 성모 마리아 숭배 결과는 모든 여성을 마리아의 자매로서 고귀하게 만들었으며, 기사도적인 여성 숭배 정신에서도 목격될 수 있고, 또한 단테의 베아트리체의 흠모 속에서도 신격화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테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마리아를 천국의 여왕으로 보게 하였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신을 “태양과 많은 다른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보게 하였던 것이다.25)
1.로망스
(1)프랑스의 로망스
북부 프랑스 지방의 속어를 사용한 뜨루베르에 의한 무훈시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 이야기 시 곧 로망스이다. 로망스는 풍요로운 궁정 생활 속에서 우아한 기사도의 정신과 여성에 대한 충성, 애정을 주제로 한 읽을거리로 발달하였다. 또한 무훈시가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가미하여 제작된 반면, 로망스는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는 옛 켈트인의 전설 등에서 취재하여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에 이르도록 한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봉건제도는 더욱 확립되었고, 궁정생활도 풍요로워졌다. 또한 여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기사들의 사랑이야기가 발생하게 되었고, 그 속에 다루어진 사랑의 이념에는 고전작가 특히 오비디우스Ovidius의 연애시나 앞에서 언급한 뜨루바들로 부터의 영향이 아주 크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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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R. W. 호튼, V. F. 호퍼 편, 고양성역, 《서양문학의 배경》(춘천:강원대학교출판부,1988) pp. 264-268 참조.
26) 김희보, 앞의 책, pp.97-98 참조.
기사문학의 시초는 12세기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뜨루바둘의 문학으로서 프로방스 말로 쓴 문학이다. 그 당시 귀족들은 시를 좋아하여 뜨루바둘을 집에 묵게 하면서 후히 대접하였다. 시인들은 달콤한 연애를 시의 주제로 삼았다. 소박하고 자연 발생적인 민요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하면, 예술성이 풍부한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짧은 형식의 서정시 보다는 비교적 긴 실화시가 대부분이었다.27)
뜨루바들이 남쪽을 대표하는 음유시인이라면 북쪽을 대표하는 음유시인은 뜨루베르이다. 시인은 옛 프랑스 말을 구사하며 역사시, 실화시 등의 무훈시를 써서 읊었다. 이들 역시 장원 영주나 귀족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시를 낭송했는데, 대표적인 무훈시로 《롤랑의노래》가 있음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봉건 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존재는 기사들이었다. 기사는 무술, 용기, 정의, 겸양, 윗사람에 대한 충성, 동료에 대한 예절, 약자에 대한 연민, 교회에 대한 헌신 등의 여러 가지 덕을 고루 갖춘 영웅적 성격의 이상을 추구하는 무사 계급이었다. 기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서 부터 어려운 수련을 거쳐야만 했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7세가 되면 장차 섬겨야 할 윗사람의 왕궁이나 성으로 가서 생활을 하였다. 교리문답, 윗사람에 대한 예절, 궁중 의식에서의 예절 등을 감독자에게서 배웠고, 어른의 몸종으로서 고기를 썰거나, 식탁에서 시중을 들기나, 그 밖에 머슴이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틈이 나면 춤이나 하프 켜는 법을 배우고 사냥, 매사냥, 낚시, 레슬링, 승마, 말 타고 창 쓰기를 익혔다. 14세가 되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 올라타기, 달리기, 성벽 타기, 물도랑 건너뛰기, 투구를 쓰고 격투, 도끼 휘두르기 등 고된 훈련을 해야만 했다.
한편 그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성 안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 안의 여성 중의 한 사람을 마음의 여인으로서 섬기도록 권장을 받아 모든 감정, 언어, 행위를 그 여성에게 결부시키며 행동을 해 나갔다. 사랑하는 이에게 봉사하는 것은 기사의 영광이며 의무였다. 14년의 훈련 기간이 지나고 나이가 21세가 되면 ‘기사 서임식’을 거쳐서 기사 칭호를 받게 된다. 기사 서임식은 매우 까다로운 의식을 통해서 거행되었다.
기사 후보자는 그 전날 단식을 하고, 밤새워 기도를 올리며, 죄를 고백하고 성찬을 받는다. 이튿날 아침 하얀 옷을 입고 서임식이 열리는 교회나 넓은 홀로 들어간다. 기사 후보자는 미리 성직자의 축복을 받은 칼을 몸에 지니고 있다. 식장에 들어가면 후보자는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영주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 때 영주는 후보자에게 기사가 되려는 동기와 목적을 묻고 서약을 시킨다.
기사 후보자가 서약하는 내용은 주로 영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여성 및 고아를 보호하며, 거짓말이나 중상을 하지 않으며, 동료들과 잘 어울리며 생활하겠다는 것이다. 서약을 마치면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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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정창범, 《호메로스에서 포우까지》(서울: 영학출판사, 1983), p. 53 참조.
에 참석한 많은 기사, 귀부인, 아름다운 처녀들이 기사에게 몸에 지닐 물건들을 선사한다. 후보자는 칼을 차고 다시 한 번 영주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 후보자의 어깨 또는 목 언저리를 칼끝으로 가볍게 세 번 친 뒤 다음과 같은 말을 외우고 기사로서 임명한다.
“하나님과 세인트 마이클, 세인트 죠오지의 거룩한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기사로 삼노라. 용감하고 예절 바르고, 그리고 충성을 다 할지어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기사가 탄생한다. 그런데 기사 서임식에서 후보자가 영주 앞에 서약하는 내용 중에서, 그들이 보호하겠다는 여성이란 어떤 여성을 말하는 것일까. 이 경우의 여성이란 여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 신분에 속하는 특정한 여성을 말한다. 그 여성들은 처녀보다는 유부녀들이었으며, 주로 영주의 부인이었다. 이러한 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은 곧 여성을 연약한 존재서 기사답게 돌봐주고 지켜 준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여성을 숭배하고 사랑한다는 뜻이 더 강했다. 이는 당시의 성모 숭배사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중세 문학은 기사들의 무용담이나 귀부인과 기사들의 연애를 다룬 내용이 많다. 로망스는 그 당시 문화가 가장 앞서 있던 프랑스에서 생겨나서, 유럽 여러 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12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이에 끼어 유럽문화의 촉매역할을 하였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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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위의 , 57-5) 참조.
로망스에서 로망 쿠르토와(le roman courtois)라 일컬어지며 궁정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켈트적인 환상이 풍부한 브리튼계의 이야기(아더왕 전설 등)이며, 그 외에 고대 문학 모방의 이야기 (트로이아 이야기와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등이다. 대표적 작가는 12세기의 크레티앙 드 트로와Chrétien de Troyes로서 《에랙》, 《클리제스》, 《랑승로 또는 마차 위의 기사》,
《이반 또는 사자를 끈 기사》 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아더왕 전설에서 취재한 두 작품은 용기와 우아함을 갖춘 기사의 전형이 잘 나타나 있다.
켈트에서 생겨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et Iseult》의 슬픈 이야기는 토마스Thomas와 배를Béroul에 의해 ‘로망 쿠르토와’로 만들어졌다. 또한 프랑스 최초의 여류시인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의 시도 이 같은 연애 지상 문학에 속한다.
13세기에 들어서면 이런 이야기는 더욱더 많이 쏟아져 나와 〈원탁 이야기Roman de la Table Ronde〉, 〈성배 이야기 Roman du Saint Graal〉 등 여러 가지 모험 이야기로 발전하였다. 또한 《오카생과 니콜레트Aucassin et Nicolette》 등은 사라센 등 근동적 요소가 섞여진 모험과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오카생과 니콜레트Aucassin et Nicolette》는 아마 중세 로망스 문학에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12세기 무렵의 북부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로 쓰여졌다. 《오카생과 니콜레트》에 있어서 산문과 운문 교대는 좀 특수하다. 아마 산문 구절은 큰 소리로 읽기나 낭송되도록 의도된 것이고, 시는 노래되어졌을 것이다. 이 작품이 그것을 연극처럼 연출하는 순회공연에서 음유시인들의 레퍼토리에 속해 있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오카생과 니콜레트》는 연애담이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연애담에서의 관습적인 처리와는 상당히 다르다. 일반적인 경우, 여인은 표면상으로는 적대적이거나, 그녀를 사랑하는 애인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변덕은 종종 기사에게 시련을 준다. 기사는 그들을 갈라놓는 수많은 외적 장애물을 물리치고 그녀를 정복해야 한다. 그러나 《오카생과 니콜레트》에서 니콜레트는 오카생만큼이나 상대를 사랑하고 있으며, 한층 더 영리하고 모험적이다. 둘 다 아주 솔직하고, 직접적이고, 한결같이 서로에게 헌신적이다. 성안의 지하 감옥들, 창문을 통한 정원으로의 도망 등은 로망스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이야기되는 분위기는 다르다.
특히, 달빛과 나이팅게일로 함뿍 적셔진 초여름의 따뜻한 밤, 두 여인의 서정적인 기쁨은, 이
작품의 신선함과 자연 발생성,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쾌활함과 기쁨이 넘친다. 플롯은 간단하고 결정적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오카생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적들에게 포로가 된다. 상황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는 용감히 싸워 적인 백작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20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러한 오카생의 단호함과 직접성은 다른 부분에도 강조 되어 있다. 즉, 니콜레트를 사랑하면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고 경고 하는, 도시의 자작에게 오카생은 활기찬 기사들과, 쾌활하고 상냥한 숙녀들과, 악사들과 시인들과 함께 거기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오카생은 인간생활의 환희와 아름다움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 물론 이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풍성함이다. 도가 지나친 오카생의 말은 그의 성격의 일부이며, 그의 세계의 한 특징이다.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종교 -완전한 현신을 강요하고 완전한 행복을 주는 종교- 의 일종의 복음서이다. 그러나 작가가 그 시대와 세대에 주려고 했던 어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바로 동기와 행위가 너무나도 단호하고, 너무나도 산뜻하고, 너무나도 안성맞춤이기 때문에 중세 프랑스 문학의 몇몇 현대의 전공자들은 이 작품을 패러디parody 혹은 풍자문학이라고 생각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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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존 C. 맥갤리어드, 앞의 책, 5. 84-86 참조.
(2)영국의 아더왕 계통의 이야기
아더왕 전설은 원래 영국 본토의 원주민 켈트인(브리튼인)에 의해 생겨진 것인데, 그것이 뒤에 프랑스 등 해외에 전해지게 되었다. 아더왕의 이름은 영국에서는 9세기경부터 라틴어에 의한 역사서와 전설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영어로 기록된 것은 노르만계 역사가 웨이브스Wace의 이야기 시에 기초하여 라야몬이 지은 장시 〈브루트Brut〉가 그 효시이다.
거기에는 아더왕을 비롯하여 “리어왕' 등 후대의 영문학에 많은 소재가 되는 여러 전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아더왕 이야기는 처음부터 통일된 이야기로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가지 설화가 뒤섞여 있다.
1. 아더왕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아더왕과 왕비 기네바의 결혼, 기네바의 정절, 기네바와 뛰어난 무술과 숭고한 인격을 지닌 기사 랜스로트의 불의의 사랑, 반란자 모드레드, 정복, 아더왕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2. 성배聖杯(성스러운 술잔, 곧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들었다고 하는 포도주 술잔) 전설을 엮은 것이다. 그리스도가 요셉에게 전해 주고 요셉이 그 성배를 그리스도의 어깨를 뚫은 거룩한 창과 함께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고 상상되는 것이다. 그 성배는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것으로서, 하나의 이상의 상징이었다.
원탁의 기사들은 이 거룩한 잔을 찾으라는 중대한 임무가 부여된다. 그런데, 그 성배는 순결한 기사만이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원탁의 기사 중 파시발, 보우호트, 개라해트가 성배를 찾았으나, 하늘의 사자가 개라해트의 영혼과 함께 그 잔을 가지고 올라가 버린다.
3. 아더왕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서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그 것이다.
아더왕 이야기 중에서 원탁의 유래와 성배에 관련된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원탁의 이야기들에서 공통 단락은 다음과 같다.
아더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마술사 마린은 둥근 탁자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렸다. 원탁을 둘러싸는 자리는 그리스도의 제자 13인을 본 따 13개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앉을 수 있는 자리는 12개로 한정하고 그 자리는 가장 명예로운 기사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13번째의 자리는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 자리만은 항상 비워 두었다. 전에 사라센의 기사 한 사람이 억지로 그 자리에 앉았다가 땅이 갈라져서 그 사람을 삼켜 버린 이변이 있었다. 그 뒤부터는 그 자리는 ‘위험한 자리’라고 불렀다.
자리 하나하나에는 마법의 힘으로 원탁에 앉도록 허락된 기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빈자리가 생겨도 전에 그 자리를 얻었던 기사를 능가하는 용모와 무공을 보여주지 않으면 뒤를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격을 갖지 못한 기사가 앉을 경우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골탕 먹였다. 따라서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는 누구나 온갖 시련을 극복하여 용맹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일랜드의 모란드의 자리가 10년이나 비어 있었다. 그가 트리스트람의 칼에 명예로운 기사 답게 쓰러진 이래 그의 이름은 원탁의 빈자리에 그대로 적힌 채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더왕이 성스러운 트리스트람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 안내했다. 그리자 형언할 수 없는 음악이 들려오고 온 방안에 그윽한 향기가 서렸다. 그 자리에 모란드의 이름이 사라지고 트리스트람의 이름이 밝게 빛났다.
성배에 관한 이야기에서 공통 단락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아리마타야의 요셉의 자손의 한 사람이 대대로 그 성배를 일생동안 지켜 나갔다. 그 성스러운
그릇을 보려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하는 모든 일이 순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성배를 보려고 많은 숭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성배가 있다는 것은 그 고장에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고 있는 증거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성배를 지켜오던 몇 대째의 자손이 신성한 의무를 깜박 잊고 한 여자 순례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뜻하지 않게 그 옷이 흘러내리는 것을 음탕한 눈길로 훔쳐보았다. 성스러운 창이 곧바로 그 사람 위에 떨어져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 기적의 상처는 아무리 치료를 하여도 아물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성배를 지켜 가는 사람을 ‘죄의 임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시에 성배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3)독일의 민네장
독일에서 자유로운 문학 표현의 욕구가 확산된 것은 프랑스와 영국의 이야기 시 및 뜨루바둘의 서정시에 자극된 12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다. 이리하여 《니벨룽겐의 노래》와 같이 기사문학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것도 나타났으며, 기사문학으로는 궁정 서사시와 민네장Minnesang의 두 가지 경향을 보였다. 특히 궁정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신분이 높은 여성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기쁨 및 슬픔을 노래한 서정시를 가리켜 민네장이라고 한다.
궁정 서사시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하르트만Hartman von Aue, 볼프람Wolfram von Eschenbach, 고트프리트Gottrried von Strassburg 등이 있다. 민네장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라인마르Reinmar von Hagenau, 발터Walther von der Vogelweide, 하인리히Heinrich von Morungen 등이 있다.
기사도에서 볼 수 있는 귀부인에 대한 사랑의 봉사가 성모 숭배와 결부하여 남부 프랑스로 부터 전래된 것이다. 라인마르는 그 창시자이며, 발터는 그 내용을 격상시키고 풍부하게 한 이 분야에서 일인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시와 종교시 등 넓은 영역에 걸쳐 자기감정의 솔직한 표현에 의하여 괴테 이전 최대의 서정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하인리히의 경우 정신적인 요소보다 관능적인 향락을 주로 하는 세속적인 요소가 우세해진다. 이리하여 하인리히와 고트프리트는 각각 서정시와 서사시에 있어서 기사문학의 만가挽歌를 노래하는 역할을 하였다.
《불쌍한 하인리히Derarme Heinrich》
이 작품의 저자는 하르트만이다. 문둥병자가 된 기사와 청순한 아가씨의 희생적인 사랑을 묘사한 작품이다.
기사 하인리히는 명문가 태생으로서 부귀와 권세를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인품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행복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그 거만스러운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를 꺼리는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 치료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고, 사레르노의 명의에게 “순결한 처녀가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심장의 피 말고는 달리 특효약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치료의 길이 끊어진 하인리히는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느 소작인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그 집에서는 하인리히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여덟살 난 딸은 잠시도 그의 길을 떠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었다.
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영주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다 못한 충성된 농부와 그의 아내는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옆에서 그의 야기를 듣고 있던 소녀는 진심으로 동정하여 유일한 약이라고 하는 심장을 제공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하인리히는 소녀를 데리고 살레르노에게 갔으나, 수술용 칼 가는 소리를 듣고 수술대 위에 나체로 누워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가 너무 욕심스러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수술을 중지시키고 소녀를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진심과 가난한 마음을 미쁘게 여겨 하인리히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 젊음과 건강을 다시 찾은 하인리히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예전보다 더 부귀를 누리며 축복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명의 은인인 그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더욱 행복한 생애를 보냈다.
<19호 계속 / 중세의 서양문학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