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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김중미
1.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앞선 바둑이가 강동강동 뛰면서 눈을 반긴다. 석이와 석이 엄마도 신이 나서 산길을 뛰어 내려온다. 산비탈 함석집 부엌에서는 외할아버지가 군불을 넣고 있다. 집에 돌아온 엄마와 석이는 외할아버지 곁에 쭈그리고 앉아 언 발과 손을 녹인다.
“고구마 구워 먹을까?”
엄마가 부엌 한구석에 세워 둔 비닐 자루에서 고구마를 꺼내 온다. 외할아버지와 석이가 고구마를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다. 그리고 빨간 숯만 남은 아궁이에다가 고구마를 넣고 기다린다. 석이는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며 빨간빛이 다 사라진 까만 숯을 건드려 본다. 쇠꼬챙이로 숯을 때릴 때마다 빨간 숯불이 튄다. 석이 마음은 따뜻하고 아주 느긋하다. 아궁이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와 외할아버지의 표정도 평화롭다. 밝게 웃는 엄마의 얼굴이 석이 마음을 더 푸근하게 한다.
“자, 이제 꺼내 볼까?”
외할아버지가 재를 들춰내고 고구마를 꺼낸다. 쪼글쪼글해진 알루미늄 호일을 벗기고 나니 가죽 껍데기처럼 딱딱해진 고구마 껍질이 나온다. 껍질을 벗기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랗고 투명한 고구마 속이 먹음직스럽게 나타난다.
“와! 맛있겠다.”
석이가 외할아버지한테서 고구마를 받아 드는데 갑자기 부엌으로 누군가 들어선다. 아버지다.
“이것들이 나만 따돌리고 여기 숨어 있어! 어서 나와!”
엄마가 외할아버지 뒤에 숨는다. 석이만 아버지 손에 끌려 나온다. 아버지는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두르며 아무도 석이 곁에 오지 못하게 한다. 석이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산비탈을 내려간다.
“외할아버지! 엄마! 엄마!”
애타게 불러보지만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석이는 아버지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끌려가며 울음을 터뜨린다.
엉엉 울다가 눈을 떴다. 꿈이었다. 벌떡 일어나 시계를 올려다본다. 아홉 시 반이다. 또 늦었다. 아직도 아버지는 옷장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채 코를 골고 있다. 석이는 엄마가 밤새 웅크리고 앉았던 자리를 본다. 요 위에 구겨진 담요 한 뭉치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석이는 아버지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요에서 빠져 나온다. 배가 고픈 석이는 방문 앞에 있는 전기밥솥을 열어 본다. 누렇게 굳은 밥이 밥솥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반찬은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멸치 볶음과 언제 먹다 남겼는지 기억도 안 나는 참치가 전부다. 불쑥 화가 치민다.
“에이 씨, 일 나가기 전에 밥이나 좀 해 놓지.”
하지만 이내 아버지 발길에 채여 넘어지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석이는 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가방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학교에 가기 싫지만 한 번만 더 학교에 오지 않으면 아버지를 부른다고 한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석이는 가풀막길을 뛰어 내려간다.
2.
다행히 쉬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책상 앞에 앉아 뭔가 일을 하고 있다. 석이는 선생님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맨 앞에 있는 자기 자리로 갔다. 그러나 의자에 앉자마자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이구, 이제 행차하셨어요?”
선생님의 말에 석이 뺨이 새빨개진다.
“아, 안녕하세요?”
“이렇게 늦게라도 나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석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고개를 좀 들어 보시지요.”
석이는 까닭을 몰라 눈은 그대로 내리 깐 채로 고개만 든다.
“귀 밑에 상처는 어인 일이십니까?”
“네?”
그제야 석이는 동그래진 눈으로 선생님을 올려다본다.
“왼쪽 귀 밑에 이 상처 말야. 뭔가에 얻어맞은 거 같은데…… 너 이제 싸움질까지 하냐?”
“아니오.”
석이는 손을 더듬어 왼쪽 귀 밑을 만져본다. 엉겨 붙은 딱지가 만져진다.
“아침에 너 거울도 안 봤니? 언제 다친 건지도 몰라? 멍까지 들었는데.”
석이는 그제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왼쪽 귀 밑이 당기고 쓰라리던 것이 생각난다. 언뜻 어젯밤 아버지가 던진 텔레비전 리모컨에 맞은 기억이 난다.
“너 싸웠지?”
“…….”
선생님은 석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한숨만 몇 번 쉬더니 더 묻지 않는다.
“정말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따가 방과 후에 얘기하자.”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하품부터 난다. 석이는 어젯밤에도 거의 잠을 못 잤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석이를 보고 공부는 안 하고 텔레비전만 본다고 호통부터 쳤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던졌다. 깜짝 놀란 엄마가 석이를 감싸 안자, 아버지는 이번에 공부도 못하는 자식을 감싼다고 엄마에게 손찌검을 했다.
아버지가 하던 인쇄소가 문을 닫은 뒤부터 아버지는 밤마다 술에 취해 석이와 엄마를 못살게 군다. 친할아버지가 물려준 인쇄소를 빚더미에 올라앉게 만든 아버지는 그 탓을 모두 엄마에게 돌렸다. 엄마가 외갓집의 산비탈 땅이라도 팔아 빚을 갚았으면 모든 일이 잘 풀렸을 거라고 하면서 엄마를 구박했다.
석이는 잘못된 탓을 모두 엄마에게 돌리는 아버지가 밉다. 또 터무니없는 아버지의 행패를 참으며 사는 엄마도 답답하다. 엄마는 석이에게 참는다고 말하지만 석이가 바라는 것은 엄마가 석이를 데리고 아버지가 없는 곳으로 가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날마다 아버지가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석이를 안고 밤을 새울 뿐이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아침밥도 못 먹고 공장으로 나간다. 석이는 그런 엄마가 바보같이 보인다. 화가 난다.
창 밖을 본다. 교실 밖에 있는 낙엽송이 가늘고 짧은 잎이 누렇게 바래 떨어지고 있다. 며칠 전 외갓집에 전화했을 때, 외할아버지가 고구마도 캐 놓고 가을에 주운 토종 알밤들도 다 말려 놨다고 했다. 석이는 지금 당장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산골짜기로 달려가고 싶다. 석이는 시골을 좋아한다. 시골에 가면 파삭파삭 금세 부서질 것 같던 마음이 촉촉해지고 말랑말랑해진다. 석이는 외갓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때가 그립다.
석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가 아버지의 매를 못 견뎌 석이를 데리고 외갓집에 갔었다. 그 때 석이는 참 행복했다. 엄마도 좋아 보였다. 외할아버지 도와 농사일도 거들고, 산 아래 마을에 있는 엄마 친구들한테 마실도 갔다. 석이는 외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닭과 염소 먹일 풀도 메고, 고추밭이랑 논에 나가 풀도 뽑았다.
석이 몸에 난 상처가 아물고, 엄마 몸에 난 피 멍들이 다 지워져 갈 무렵,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는 석이도, 엄마도 때리지 않겠다고 빌었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밤을 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짐을 쌌다. 석이는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 싫다는 말도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석이 마음을 알고 엄마에게 말했다.
“석이는 놔두고 가거라. 석이 아비가 정말 달라지면 그 때 와서 데리고 가.”
하지만 엄마는 석이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엄마는 석이가 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를 더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만 자란 것들은 뿌리가 없어. 그래서 조금만 힘들어도 주저앉고 마는 거여. 사람은 자고로 땅 힘으로 길러야 하는 거여. 지 새끼랑 마누라한테만 힘자랑하는 놈은 애초에 싹수가 노랗지. 아비 밑에서 자라면 석이도 똑같이 될 거야.”
외할아버지 말에 엄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도시로 온 석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엄마도 다시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석이는 여전히 밤이 되면 술 취한 아버지에게 시달려야 했다.
3.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으로 나오자 석이는 다시 머리가 멍해지고 몸이 무거워진다. 집에 갈 생각을 하면 언제나 그렇다. 어차피 공부 시간 내내 딴 생각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학교에 있는 편이 낫다. 아버지한테 또 맞지 않으려면 집에 일찍 가야 하는데, 집에 가기가 싫다. 교문을 터덜터덜 나서는데 반장 찬식이가 부른다.
“야, 이석! 너 이리 와 봐.”
“왜?”
“6학년 형들이 잠깐 오래.”
석이는 망설인다. 석이는 찬식이가 무섭다. 찬식이는 선생님이 보지 않는 데서 석이처럼 약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이다. 찬식이는 힘도 세고 반장이라 아이들이 꼼짝 못한다. 석이는 힘센 아이들이 싫다. 외할아버지는 진짜 힘 있는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했지만, 석이가 만난 힘센 사람들은 모두 약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집에서도 그랬다.
“나 일찍 가야 되는데…….”
석이는 안 간다고 딱 잘라 말하지도 못하고 어물어물거린다. 다시 찬식이가 석이 팔목을 잡아끌었다.
“짜아식, 겁먹지 마. 재미있는 일이야. 이리와 봐.”
학교 뒷담에는 찬식이와 잘 노는 6학년 형들이 모여 있다. 2학년짜리 진영이도 있다. 석이가 진영이를 보고 놀라는데 찬식이가 대뜸 말한다.
“너 쟤랑 싸워 봐.”
“뭐라구?”
“쟤랑 한판 붙어 보라구.”
석이는 찬식이를 빤히 올려다본다.
“얌마, 못 알아 듣냐? 쟤랑 한판 붙어 보라구.”
석이가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도대체 왜 자기보고 진영이와 싸우라고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이기는 사람에게 천 원 준다.”
석이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찬식이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찬식이 패거리들이 진영이와 석이를 둘러싸고 서서 빈정대며 웃고 있다. 모두들 석이보다 한 뼘이나 두 뼘쯤 더 크다. 석이는 진영이를 본다. 진영이는 2학년인데도 키도 크고 살도 뒤룩뒤룩 쪄서 5학년쯤은 되어 보인다. 그렇지만 진영이도 형들한테 억지로 끌려 왔는지 얼굴이 울상이다.
“왜 내가 쟤랑 싸워야 되는데?”
“아쭈, 왜? 형, 석이가 왜 싸워야 되냐고 묻는데.”
찬식이가 형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6학년 아이 가운데 하나가 석이 곁으로 오면서 말한다.
“싸우라는 게 아냐. 이건 게임이야, 게임.”
“그래두 싫어.”
석이가 용기를 내서 대답했다.
“뭐라구? 싫어? 왜?”
“그냥.”
석이는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장난감이냐고 따지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겁쟁이. 너 진영이한테 질까 봐 무서워서 그러지?”
“아냐.”
“아니면 왜 못 붙냐?”
“나, 난, 싸우기 싫단 말야.”
“싸우는 게 아니라 게임이라니까, 게임.”
“…….”
석이 속에서는 부레끓는 소리가 나고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석이는 찬식이와 패거리들을 겁내는 자신이 미웠다. 찬식이 패거리들은 이미 진영이와 석이 편으로 나뉘어 돈을 걷고 있다. 석이와 진영이가 둘 다 머뭇거리고 있자. 6학년 아이가 진영이에게 겁을 준다.
“야, 돼지, 너 먼저 덤벼. 안 그러면 넌 우리 손에 죽는다. 자 덤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진영이가 석이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석이는 진영이 밑에 깔리고 만다.
“야호! 진영이가 이겼다.”
“어이구, 저 왕재수. 4학년짜리가 2학년한테도 지냐.”
“야, 뚱보 1승이다.”
석이와 진영이를 둘러싸고 티격태격하던 아이들이 석이와 진영이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외친다.
“자, 2회전 시작이다.”
이번엔 진영이가 확 달려들지 못하고 주뼛거린다. 아무래도 석이한테 미안한 모양이다. 이번에도 석이가 지면 찬식이 패거리들한테 더 당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진영이를 힘으로 이길 자신도 없다. 무조건 덤벼들 수도 없고, 그냥 지자니 앞일이 걱정이고, 석이 마음이 갈팡질팡이다.
“둘 다 뭐 해, 시작!”
진영이가 다시 미적거리며 걸어온다. 석이는 눈을 질끈 감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진영이에게 달려들어 손목을 떼꺽 물어 버린다. 그리고 진영이는 석이를 뿌리칠 생각도 하지 않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만다. 진영이 울음소리에 석이는 냉큼 손목을 놓았다. 그러나 이미 진영이 손목에 동그란 잇자국이 선명하게 나고 말았다.
“어쭈, 물었어. 저거 반칙이다. 야, 손진영, 달려들어서 한 방에 쓰러뜨려.”
“언제 우리가 무는 게 반칙이라고 말했냐. 진영이가 셋 셀 동안 덤비지 않으면 이번엔 석이가 이기는 걸로 한다.”
“야, 이석, 2학년한테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무냐? 치사하다.”
“어쨌든 석이도 1승. 지금 비겼으니까, 3회전에서 이긴 사람이 승이다. 시작.”
찬식이 패거리들은 석이와 진영이를 다시 싸우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석이는 아직도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 진영이한테 달려들 수가 없다. 진영이한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야, 너희들 뭐 해? 지금부터 셋 셀 동안 누구든지 먼저 공격이다. 하나, 둘, 셋.”
찬식이가 겁을 주었지만 진영이도 석이도 꼼짝하지 않았다.
“으이구, 병신아, 야, 살은 뒀다 뭐 할 거냐? 한 번 물렸다고 꼼짝도 못하냐, 으이구, 왕바보, 겁쟁이, 정말 왕짜증이다. 왕짜증.”
아이들은 더 재미있는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더니 걷은 돈을 서로 나눠 갖는다. 그리고 진영이와 석이 머리를 한 번씩 쥐어박고는 돌아섰다. 석이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석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전봇대 옆에 버려진 나무 막대기를 봤다. 석이는 냉큼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고 돌아서서 가는 찬식이를 불러 세웠다.
“나쁜 새끼들, 거기 서!”
찬식이가 놀라 뒤를 돌아본다.
“어쭈, 너 뭐라고 했어. 너 우리 보고 그러는 거야? 왜 그래 너 돈 안 줬다구 그러냐?”
“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이 새끼야.”
“어쭈!”
찬식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돌아본다. 석이는 아이들한테 놀림을 당할 때도, 까닭 없이 쥐어박힐 때도, 따돌림을 받을 때도, 억울한 마음을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으며 참았다. 그런데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석이 앞에 문득 아버지의 성난 얼굴이 떠오른다. 석이는 아버지가 때릴 때도 언제나 참기만 했다. 석이 대신 누군가가 아버지를 때려 주길 바란 적이 많다. 그런데 지금 석이는 아버지가 된 것 같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석이는 소리를 지르며 다시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석이의 막대기에 뭔가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정신이 아뜩해졌다.
“야, 어떻게, 찬식이 머리에 피 나! 야, 선생님 불러, 빨리, 빨리.”
석이는 아이들의 겁먹은 소리를 들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4.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학교로 뛰어온 엄마는 작업복 차림 그대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엄마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기부터 한다.
“이번엔 다른 애들도 장난이 좀 심한 거라 교감 선생님이 나서서 무마해 주셨어요. 다행히 꿰맬 정도의 상처도 아니고, 찬식이 어머니가 이해심이 많으셔서 이 정도로 끝난 거예요. 그렇지만 이런 일이 또 한 번 생기면 제가 곤란해요. 석이가 그 동안 지각도 많이 하고 학교도 자주 빠졌거든요. 학교 공부 못 따라가는 건 상관없는데요. 애가 자꾸 학교에도 오기 싫어하는데 이제 폭력적으로 변하기까지하면 정말 큰일납니다.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써 주세요.”
담임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교감 선생님이 덧붙인다.
“제가 다친 학생 부모님을 겨우 달랬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겨우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각목을 휘두르고, 다음부터 이런 폭력 행위는 그냥 못 넘어갑니다…….”
석이는 억울하다. 왜 찬식이와 형들이 한 짓은 장난이고, 석이가 한 짓은 폭력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동안 찬식이 패거리들이 석이를 따돌리고 괴롭힌 일들을 하나하나 고자질할 수도 없다. 석이는 또 다시 목구멍까지 답답하고 뜨거운 공기가 꽉 차 오르는 것 같다. 어디 가서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그런 석이 속도 모르고 엄마는 무슨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바닥만 비비 대고 있다. 술 취한 아버지 앞에서 겁에 질려 있을 때처럼 말이다. 엄마는 그 동안 석이가 학교에 자주 빠지는 것도, 지각 대장이라는 것도 몰랐다. 석이는 자기 때문에 엄마까지 창피를 당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억울한 마음이 북받친다. 딱히 누구한테 화가 나는지도 모르는 채로 자꾸만 화가 치민다.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질 만큼.
석이는 더 참고 있다가는 선생님한테 소리를 지르거나 엄마를 때릴 것만 같다. 석이는 교감실을 뛰쳐나갔다. 엄마와 담임 선생님이 쫓아 나오며 석이를 불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시장 어귀의 상가 간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시장 앞 오거리는 밀려드는 차들로 꽉 막혀 있다. 석이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밀어 넣고 빵집 진열창에 몸을 기댄다. 춥고, 다리가 아프다. 더 걸어 다닐 힘이 없다. 뒤를 돌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빵집 안에 있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다섯 시 반이다.
석이는 외할아버지 생각을 한다. 지금이라도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는 석이를 반갑게 맞아 줄 거다. 석이가 왔다고 금세 군불을 때 주고, 고구마를 삶아 줄 거다. 그리고 석이가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엄마 어렸을 때 얘기며 외할아버지 젊었을 때 얘기, 전쟁 얘기, 마을 사람들 얘기를 해줄 거다.
석이는 망설이다가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돈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가르쳐 준 수신자 부담 서비스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석아, 석이구나. 너 어디야?”
“엄마!”
“석아, 지금 어디야? 응?”
“옆에 아버지 있어?”
“아냐, 아니야. 아직 안 들어왔어. 이제껏 너 찾아 다녔잖아. 도대체 어디니, 응?”
엄마 목이 메인다.
“석아, 빨리 와. 그러다 또 아버지한테 맞으면 어떡해.”
“하루 이틀인가 뭐. 아예 안 들어가면 되지, 뭐.”
“뭐라구?”
“엄마, 우리 도망가자. 응? 외갓집으로 가자.”
“석아, 또 그 소리니, 안 된다고 했잖아. 외할아버지네 가도, 네 아버지가 찾으러 올 거야.”
“그래두 거긴 외할아버지가 있잖아. 아버지가 오면 경찰한테 신고하면 되잖아.”
“석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는 우리를 맘대로 하잖아. 어제도 엄마 허리 다쳤잖아. 엄마, 알기나 알아? 내 귀 밑에 상처 난 거? 피도 나고 멍까지 들었어. 엄만 내가 날마다 매 맞고 멍들고 피나도 괜찮아? 엄마는 맞는 게 좋아?”
“…….”
“나 이제 학교도 안 갈 거야. 학교도 가기 싫고 집에도 있기 싫어.”
“석아.”
“엄마, 나도 자꾸만 누구를 때리고 싶어. 나 아까 찬식이 때리면서 내가 꼭 아버지가 된 것 같았어. 엄마, 나 무서워. 나도 아버지처럼 병이 들면 어떡해.”
“병이 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외할아버지가 그랬단 말이야. 아버지는 병에 걸린 거라구. 그 병은 절대 못 고친다구. 나도 아버지처럼 화만 나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단 말야. 나도 아버지랑 똑같은 병이 든 것 같다구.”
“…….”
“엄마, 듣고 있어?”
“그래. 석아, 알았어.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하자. 응?”
석이는 대답도 안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고 만다.
석이는 전화를 끊고 다시 시내를 기웃거렸다. 발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힘들어졌다. 석이는 혹시나 하고 다시 바지 주머니를 뒤진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점심시간에 코풀고 꼬깃꼬깃 구겨 넣은 휴지가 전부다. 돈이라도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외갓집으로 가 버릴 텐데, 석이는 자기가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친구도 없는 석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외할아버지랑 엄마뿐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석이가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엄마.
5.
엄마는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석이는 엄마가 차려 준 밥상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돈도 없을 텐데 엄마는 돼지고기도 볶아 놓고, 콩나물도 무쳐 놨다. 밥 먹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 났다. 하지만 밥을 다 먹고 엄마가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간 다음부터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다. 술 취한 아버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열한 시가 넘자마자 현관문이 열렸다.
“뭐야, 이 집에 가장이 들어오는데 새끼도 마누라도 내다보지도 않아, 엉?”
석이는 잽싸게 방바닥에 누워 버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한다. 하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석이 이 녀석, 어딨어?”
“자요.”
“자? 아비도 아직 안 왔는데 잔다구? 나오라구 해.”
“아파요. 열도 많이 나고, 감기가 심해요.”
“아파?”
방문이 덜컹 열린다. 자는 척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깜빡인다. 저절로 숨도 쉬지 않게 된다. 다행히 쾅 하고 방문이 다시 닫힌다. 그리고,
“야, 가서 술 좀 더 사 와.”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 다시 끔찍한 밤의 시작이다. 석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석이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방문을 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석이는 부엌방이 잠잠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귀를 막고 있는 동안에도 엄마의 비명 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들이 다 들렸다. 석이는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일어나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부엌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이 들어 있다. 부엌방으로 나와 방을 둘러본다. 살림살이가 제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엄마는 빗자루로 깨진 그릇을 쓸고 있다. 언뜻 보니 엄마 손목에 헝겊이 동여매져 있다.
“엄마! 다쳤어?”
“아직 안 잤구나. 괜찮아.”
엄마가 석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엄마, 정말 괜찮아? 손은 왜 그래?”
“괜찮다니까. 그냥 조금 빈 거야. 아버지 깰라. 어서 문 닫고 들어가서 자.”
“엄마!”
“기름이 다 떨어져서 방이 차가울 거야. 이불 깔고 자라.”
석이는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맨바닥에 다시 누웠다.
“석아, 일어나. 석아.”
석이는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석아, 어서, 일어나. 어서.”
“엄마! 왜 그래?”
“어서 일어나서 잠바 입어.”
“지금 몇 신데?”
“다섯 시 반.”
엄마는 석이 어깨에 가방을 매줬다. 석이는 영문도 모르는 채 서두르는 엄마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안개가 자욱하다. 석이는 골목 어귀에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지만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뛰자.”
골목을 빠져 나오자마자 엄마는 비탈길을 내달렸다. 엄마가 얼마나 빨리 뛰는지 석이는 언덕을 다 내려올 때까지 몇 번이나 안개 속에서 엄마를 잃었다. 엄마는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숨을 돌렸다.
“엄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이제 집 나온 거야.”
깜짝 놀란 석이가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으로도 심하게 부어 오른 엄마의 뺨이 보였다. 그리고 손목에 아직 동여매진 헝겊도 보였다. 석이는 엄마 손을 꽉 잡았다. 엄마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엄마, 정말 괜찮아?”
“응. 걱정 마. 외할아버지가 터미널에 나와 계실거야. 걱정 마. 걱정 마.”
시외버스가 오자 엄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엄마, 아퍼?”
엄마는 몹시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는 것처럼 눈을 치떠 석이를 본다.
“괜찮아, 석아. 자자, 외갓집에 갈 때까지. 이제 괜찮을 거야.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근데 엄마, 안개가 되게 심해.”
“걱정 마. 날이 밝으면 다 걷힐 거야.”
석이는 차창에 뺨을 기댄다. 꼭 얼음에 댄 것처럼 차갑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자동차들의 전조등 불빛이 물에 잠긴 것처럼 보인다. 석이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일까 두렵다.
“엄마, 우리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아니야, 석아. 이제 좀 자. 두 시간은 가야 하니까.”
엄마는 눈도 뜨지 않고 말한다. 석이는 다시 창을 내다본다. 차창에 눈을 감은 엄마의 모습이 비친다. 석이도 엄마처럼 눈을 감는다. 그러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골안개 사이로 낡은 함석지붕이 알른거린다. 까만 염소랑 닭에게 먹이를 주러 나온 외할아버지도 아슴푸레 떠오른다. 그리고 사료 포대를 들고 뒤뚱뒤뚱 외할아버지 뒤를 따르는 석이 모습도 보인다. 아궁이 앞에 앉아 군불을 때는 엄마 모습도 보인다. 외갓집을 생각하니 딱딱하게 오그라든 마음이 풀리는 것 같다.
석이는 다시 눈을 뜬다. 창 밖은 아직 어둡고 안개도 자욱하다. 하지만 석이 마음은 이미 안개가 걷히고 아침 햇살이 비치는 산골짜기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석이는 안개가 걷히고 외갓집에 다 도착할 때까지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을 작정이다.
***아이들과 이 동화로 수업을 하다보면 참 마음이 아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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