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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조의 무단 정치를 수행한 사람들
세조의 정치는 한마디로 무단 강권 정치였다. 이는 왕권 안정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해진 세조 특유의 전제 정치로, 조선 성리학자들의 왕도 정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세조가 이 같은 무단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대의명분 없는 즉위 때문이었다.
대의명분을 정치적 행위의 최상의 근거로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패륜적인 행동으로 얻은
왕위를 지켜줄 수 있는 오직 물리적인 힘뿐이었다. 따라서 세조는 물리적인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무단 정치를 했으며, 그 방법으로 철저한 측근 정치를
택했던 것이다.
측근 정치란 말 그대로 자신의 심복 내지는 측근을 위주로 정사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조의 이런 측근 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그와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른바 정난공신 세력
덕분이었다.
정난공신 세력은 권람과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조의 심복 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주축으로 하는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눠질 수 있다. 심복세력들은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을 직접 수행한 인물들이며, 집현전 학사 세력은
계유정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이 거사의 대의명분을 설정해준 인물들이었다.
이들 두 세력의 공통점은 김종서, 황보 인 등의 고명대신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거나, 또는
이들의 정권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계유정난에 협조한
이유는 사뭇 달랐다. 심복 세력들이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학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학사 세력도 결국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으며, 그 대가로 세조 시대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세조 시대를 이끌었던 이들 두 세력 중 대표적인 인물인 권람, 한명회, 신숙주 등의 삶을
약술하면서 세조의 무단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수양의 좌장 권람(1416-1465)
세조의 심복 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인물은 권람이었다. 그는 한명회와는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도모한다.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자 권제의 아들이다. 1416년에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컸다. 그래서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쌓았고,
이때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는다.
그는 한명회와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사람이기도 했다.
1450년, 3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그는 향시와 회사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전시에서는 4등이 되었으나 장원한 김의정의 출신이 한미한 덕으로 장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는 데 동참하여 그와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김종서, 황보 인 등이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안평대군이 그들 대신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수양대군이
이에 불안을 느끼며 동지를 찾고 있을 때 권람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 접근하여
집권 거사를 모의한다.
이후 권람은 수양의 부탁에 따라 양정, 홍달손, 유수, 유하 등 무사들을 규합하여 수양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성공한다. 정난에 성공하자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그는 집현전
교리에서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2월에는 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시 1년 뒤에는 이조판서에 올라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458년 신숙주와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해 12월에 의정부우찬성, 이듬해에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그는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문장에 능했고 호탕한 성품에 걸맞게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아버지 권제가 첩에
혹하여 어머니를 내쫓은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명회를 만나 권력을
꿈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양과 함께 정난을 일으켜 그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수양의 '장량' 한명회(1415-1487)
권람이 수양대군의 좌장 역할을 했다면 한명회는 '장량'격이었다. 말하자면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였다.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141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탓으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서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거사 국면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그는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들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바 '생살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적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처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1457년에 이조판서,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체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 손에 거머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사돈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466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함길도(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한다. 이유는 그들이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시애의 계략이었다. 이시애는 조정에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
'한명회, 신숙주 등이 강효문과 짜고 반란을 도모하려 하기에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집권기의 가장 큰 변란이었다. 즉위 이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일단 신숙주와 한명회를 옥에 가두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조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신하는 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하였다. 그리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 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공신들과 함께 고관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했다. 세조는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으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단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됐다 하여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를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세조의 '위징' 신숙주(1417-1475)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징은 당
태종의 문화 통치를 수행하여 당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된다. 사실 신숙주는
계유정난의 공적 면에서는 한명회에 뒤질지 몰라도 세조에 끼친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인
친분에서는 누구보다도 앞섰다. 따라서 정사를 논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숙주는 단연 세조의
오른팔격이었다.
신숙주는 1417년 태생으로 세조와는 동갑내기다.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이 그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의 딸이다. 그는 한명회와는 달리 일찍 관직에 나갔다. 22살이 되던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됐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차례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
1447년 그는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고,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에 오른다.
신숙주가 수양과 가까워진 것은 1452년 그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중국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감은사를 자청했는데, 신숙주는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이듬해 4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되었다.
1453년 신숙주는 승정원에서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지만 김종서 등의
권신들의 경계를 받아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10월에 외직에 나가 있었다. 이때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가장 빠른 출세를 하고 있던 신숙주가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것은 그와
수양대군과의 관계를 김종서 쪽에서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실은
신숙주로 하여금 수양의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신숙주는 정난공신 1 등에 책록된 뒤 곧 도승지에 올랐다.
세조가 권력을 잡자마자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신숙주를 앉혔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했다는 의미가 된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수양대군에게 보고했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 제7대 왕이 된다.
이후 신숙주는 1456년엔 병조판서, 이듬해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인 1462년 마침내 영의정부사직(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러나 그는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에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한다.
하지만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에 따라 한명회와 함께 원상으로 서무를 결재하는
데 참여하고, 이듬해 예종이 죽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성종)을 왕으로 추천해 결국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데 성공한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 변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계에 남아 있다가 147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되었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 출신 벗들에게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의 이른바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했으며,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롭게 만들었다. 또한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거' 등의 작품을 남겼다.
5. '세조실록'편찬 경위
'세조실록'은 총 48권으로 본문 47권과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록에 종묘와
제례에 쓰는 음악 악보를 수록한 점이 특징이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세조혜장대왕실록'이며, 1455년 윤6월부터 1468년 9월까지 13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세조실록'편찬 작업은 1469년(예종 1년)4월에 시작하여 1471년(성종 2년)에 완료되었다.
이 작업은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 작업을 거친 상태여서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4월초에 1권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른바 '민수의사옥'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록 편찬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사건의 발단은 사초를 거둘 때 사간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간에서는
사초에 서명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명을 할 경우 소신껏 쓸 수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왕명에 따라 서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수는 사관
시절에 대신들에 대해 비판을 많이 가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사초를 몇 군데 뜯어고쳤다.
이것이 발각되자 예종은 민수를 제주에 관노로 보내고 서명을 반대하던 사관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도 실록 편찬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2년 만인 1471년 12월 15일에 완성되어 성종이 찬진을 마쳤다.
이 편찬 작업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영관사에 신숙주와 한명회, 감수에 강희맹과 양성지
등이었고, 나머지 58명이 실무를 담당했다.
세조 시대의 세계 약사
이 당시 중국의 명에서는 대지진이 발생해 전국이 기근과 가뭄에 시달려 혼란에 빠졌으며,
일본에서는 '응인의 난'이 일어나 본격적인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유럽은 독일에서
프라이부르크대학이 창립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 공공도서관이 설립되었으며, 로마에
처음으로 인쇄소가 설치되어 문화적인 발흥을 이루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프랑스의
비용이 1462년에 '유언시집'을 간행하고 이듬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