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 고신교회가 50주년 희년을 맞는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요, 포괄주의자들이며, 일제시 신사참배를 하고도 공적 참회를 거부한 자들의 폭력적인 교권에 의해 축출당한 경남노회가 중심이 되어 여러 지원하는 지방 교회들과 함께 고신 총노회를 조직한 것이 오는 9월 11일이면 만 50년이 된다. 뜻깊은 50주 년 희년을 맞아 고신교회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던 때 의 한국 장로교회를 뒤돌아보게 된다. 그 때의 한국 장로교회와 오늘의 고신교회의 현실을 살펴보고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한국장로교회는 1934년에 선교 50주년 희년을 맞이했다. 한국 선교는 짧은 50년간 큰 축복 을 받아 세계선교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성장을 보였다. 당시 한국교회가 받은 축복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순수한 복음이 전파됨으로 5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일이고, 둘째는 한민족이 일제에 의해 강점을 당하고 모든 것을 수탈당한 어려운 때 교회가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속에 살아감으로 실의에 찬 민족 에게 희망의 길을 보여주는 귀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려는 때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큰 위기와 시련을 맞았다. 먼저 보수주의 한국교회에 자유주의 세력이 고개를 내밀고 나타났다. 김재준이 성경완전 영감 을, 김영주가 오경의 모세저작을 부인했고, 김춘배가 고린도서의 여성에 관한 교훈이 한 지 방의 풍습이라면서 여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이 성경의 파괴 적 비평에 근거한 아빙돈 주석편집에 관련함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 때까지 보수일색이었 던 장로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다. 1934-5년 총회는 김영주와 김춘배의 이론을 정죄하고 취 소하게 했으며, 아빙돈 주석에 관련한 분들의 사과를 받아냈다. 그 다음은 밖으로부터 오는 큰 시험이었다. 1931년 만주침략을 한 일제는 전 동아의 정복 을 위해 정신, 사상을 통일하기 위해 교회에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무섭게 강요하고 교회 를 압박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50주년 희년을 맞은 당시 한국교회는 자유주의의 기세를 잠 시 누르고, 일제의 저 강압을 견뎌 나갔으나, 4년 후 이 모든 것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 다. 1938년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 일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배교하였으며, 이 와 함께 잠시 머리를 숙여왔던 자유주의자들은 일제의 협력 아래 자유롭게 그들의 사상을 보급하여 한국교회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역사에는 꼭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 러나 옛 뱀(사탄)은 그의 날이 끝날 때까지 같은 본질을 가지고 활동한다. 언제나 그리스도 의 교회 파괴라는 목적을 가지고 때를 따라 변장하여 교회를 위협하고 시험해 온다. 50주년을 맞는 고신교회가 지난날 선교 50주년을 맞을 때의 한국 장로교회와 같을 수는 없 다. 그러나 지난날의 역사를 ‘거울’삼고 오늘의 교회현실을 점검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오늘날까지 고신은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잘 지키고 보존해 왔다. 그러나 이로서 우리 가 안심할 자리에는 있지 않다. 자유주의 신학의 교회의 잠입은 마치 낙타가 텐트 안에 들 어 올 때, 처음에는 코만 내밀고 그 후에 머리를 밀어 넣은 후 결국 텐트 안에 들어오게 되 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학문제에 있어서 고신 교역자들은 서로를 감독하고, 온 교회는 신 학교를 감독하고 보호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조금도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50주년을 맞은 고신교회는 외부로부터 신사참배와 꼭 같은 강요를 당함으로 속화나 배교의 위협을 당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같은 속성의 무서운 속화의 물결이 엄습해 들어 오고 있음을 본다. 물론 지난 50년 역사에서 고신답지 않은, 교회적이 아닌 일들이 교회 안 에 종종 일어났다. 그러나 근년에 총회와 학원 이사회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가히 교회적인 치리회나 교회적인 운영주체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게 되어 있다. 총회가 병 원노조(총회직영 복음병원의)의 강점으로 회를 진행하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학 원이사회가 병원 노조와 쫓고 쫓기는 경쟁을 하던 중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어떤 결의를 강행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오늘의 총회 안의 이런 모습들이 고신성의 변질과 속화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은 진리운동을 해 온 역사의 선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 는 모습들이다. 50주년을 맞는 고신교회는 분명히 큰 위기에 당면하고 있다. 고신교회는 50주년을 맞아 현재의 정체가 어떠함을 점검해야 한다. 이상 더 “그래도 고려 파다”라는 말로 위안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지난날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 50주년에 자유주의를 억누르고 당면한 일제의 우상숭배 강요를 배격해 나갔지만, 조만간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전례를 보게 된다. 고신교회는 앞에 있는 적신호를 바로 보아야 한 다. 참된 회개와 자정을 통해 고신된 정체를 되찾는 일이 50주년 희년의 급선무이다. 여기 에 고신교회의 미래가 있다. (앞으로 계속될 글에서 한국장로교회사로부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으려 한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2) -한국에 설립된 장로교회의 정체성
개신교 한국선교에서 장로교 선교가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 장로교 첫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첫 선교사 아펜셀라가 같은 날(1885.4.5) 한국땅을 밟고, 같은 시기에 선교를 시작 했지만 장로교 선교회측이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의 요인으로 선교사의 수가 많았다 는 점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초대 장로교 선교사 거의 모두가 성 경의 축자영감을 믿고,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 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 바로 구원의 능력임을 알고 성실하게 복 음을 전한 결과, 많은 열매를 얻었다. 한국교회는 이런 순수한 복음을 전해 준 초대 선교사 들에게 감사한다. 그런데 초대 장로교 선교사들이 순수한 복음을 전한 일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감사하면서 도 그들이 한국교회의 터를 놓은 개척선교사로서 한 일들에 대해 모두 잘했다고 치하하기 는 어렵다. 역사를 살필 때 유감스러운 면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반석과 같은 터 위 에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는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장로교의 터를 놓은 선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조직적으로 밝혀 준 역사적 신조 (신앙고백)를 받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장로교회가 명실공히 장로교회가 되려면 정치적으 로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회 체제를 가질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앙의 내용을 담은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답’이라는 신조를 교회의 신조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 다. 여기 장로교회 정체성이 있다. 기록된 대로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감리교나 성공회, 침례교나 어느 다른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로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것은 장로회 정치와 함 께, 특유한 장로교회의 신조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 은 처음부터 이 점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07년의 독노회(獨老會)의 조직은 한국장로교회의 터를 놓는 일이었다. 당시는 아직 한국 인 목사가 장립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선교사 공의회가 주체가 되어 거의 모든 준비작업 을 했다. 그런데 이 때 이들은 장로교회의 모든 신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 답)를 교회의 신앙고백문서로 채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인도(印度) 자유장로교회가 채용한 두 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위 12 신조를 교회의 신조로 채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로부터는 어린이 교육용으로 마련된 간결한 소교리문답만을 받아들였다. 이유는 한국교회가 아직 ‘유약하여’ 웨스트민스터 신 경은 감당하기 어렵고, 12신조가 간단해도 요긴한 것은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 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정체성이 뚜렷하지 못한 장로교회로 출발했다. 혹 처 음 내세운 아직 ‘유약’하다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해도, 한국 장로교회가 유약에 서 벗어나 장성해진 수십년 후에도 장로교 신조들은 채용되지 않았다. 이는 장성해진 한국 교회측의 책임도 있으나, 일찍부터 신조에 대한 마땅한 강조를 하지 않은 선교사들의 기본 태도가 한국교회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회는 신조를 등한히 하는 교회로 굳어져 버림으로 장로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한국 장로교회들은 해방 후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장로교 신조들을 채용한다. 채용 후에 도 거의 형식상이었을 뿐 신조(신앙고백)를 등한시하는 고질적 전통에서 벗어나지는 못했 다. 고신교회는 1969년에야 웨스트민스터 신경을 교회적인 것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고신교 회도 이미 다져진 신조에 무관심해 온 전통 때문에 ‘신앙고백적 장로교회’가 되지 못하 고 있다. 초대 선교사들이 장로교 신경에 마땅한 강조를 하지 않은 것은 다른 면에서도 나타난다. 장 로교 신조를 전 교회의 신조로 받아들이는 전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신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하고, 목사 장로 등의 교회지도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것으로만 보게 된 것 이다.(독노회시의 12신조 서문 참조) 결과 장로교 신조가 일반교인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것 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전통은 목사 장로 집사만이 장립을 받을 때 신조에 대한 서약을 하게 되고(물론 대부 분이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형식적으로 서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일반신자들은 신 앙고백 혹은 입교를 할 때 신조에 대한 서약을 하지 않는 일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한 국 장로교회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 장로 집사만이 ‘장로교회의 신자’이지, 일반교 인들은 장로교인이 아닌 ‘보편교회의 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 신자들이 신앙고백 이나 입교 서약을 한 후 집례자가 “장로교인 됨을 선언하노라” 선언하지만, 장로교회 교 적에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장로교회 교인이지, 장로교회가 믿는 신조를 받아들임으로 장로교 인으로 선언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 일반 교인들은 신앙양심에 별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장 로교회로부터 다른 교회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초대선교사들은 이로써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 없는 정체성 없는 장로교회를 세웠다. 장로 교회가 유럽에서 신대륙 미국에 이식될 때 새로운 교회환경에서 어느 정도 변형이 되었다. 초대 선교사들은 미국에 이식된 장로교회의 틀을 더 변형시켜 이곳에 심었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장로교이면 장로교다워야 하고 정체성이 뚜렷해야 했다. 원래의 장로교는 그렇지 않다. 장로교회의 근원지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신앙고백 혹은 입교문답을 할 때 장로교 신경인 ‘웨스트민스 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답’으로 서약한다. 이 서약을 위해서는 물론 철저한 신조에 대 한 교육이 선행된다. 본질적으로 장로교와 같은 유럽대륙의 개혁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그 교회들은 직분 자들과 신자들이 모두 같은 신경을 고백하는 정체성있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도 명실공히 참된 장로교회가 되려면 장로교 신조가 직분자뿐 아니 라, 모든 교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교파 무용론과 교회일치운동이 지배하는 현 시대적 환경에서 신조를 통한 장로교회의 정체 성을 말한다는 것이 시대를 역류하는 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산 물고기는 물살을 거 슬러올라간다. 교회가 살아있고 정체성있는 교회가 되고, 미래의 역사를 책임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시류(時流)를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 신조(신앙고백)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교회가 되어 야 한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3) -선교사들이 원한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교회'
한국선교를 시작한지 만 20년이 되던 1905년 5월 미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 이 함께 모여 “재한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총공회”라는 연합기구를 조직하였다. 그 때는 양 선교회가 마침내 조선교회의 조직을 갖추고 정치적 체제를 세워야할 할 시점에 이르렀 다. 그런데 이 때 거기 모인 선교사들은 하나 같이 조선에 단일한 개신교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장로교나 감리교가 아닌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 기로 결의했다. 이 때 선교사들 세계에는 교회일치정서가 지배했다. 그런데 실제로 배후에서 이런 분위기 를 가장 크게 조성한 분은 장로교 최초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복음주의자였지만 교파라는 것을 원래 싫어한 교회일치주의자였다. 그가 장로교 한국선교사 로 임명이 되었을 때 선교부 총무에게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 나를 조선에 보낸다면 가기 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표하기 원한다면 가겠습 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당시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뜻을 수용하고 보낸 것이다. 초대 선 교사들이 가진 이런 교회관이 바로 전 호에 소개된 대로 장로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조 를 등한히 하게된 결과를 가져 온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복음주의자였으나, 근대신학지향적 인 성향을 가진 분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1906년에 장, 감 선교사들은 캐나다에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세 교파가 합동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었다. 조선교회도 저들이 마련한 공동신조의 내용 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를 조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본국에 있는 교회들이 그 뜻을 쉽게 수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북장로교 보다 보수성이 강한 남장로교에 서 강한 반대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장로교는 우선 1907년에 총노회를 조직함으로 독자적 인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에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장, 감 선교사들의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16년에 하나의 교회설립에 대한 찬반 양론이 예리하게 맞섰다. 이 해에 이 운동 을 앞장 선 언더우드가 별세했지만, 하나의 교회 설립운동은 지속되었다. ‘장로교선교사공 의회’에서는 제5회 총회(1916년)에 조선 장로교총회와 조선 감리교연합연회가 ‘연합공의 회’를 조직하도록 건의했다. 총회는 이 건의를 받아드려 ‘장감연합공의회’를 구성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방편을 통해 양 교회의 협력과 이해를 넓혀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데 성공 하기 원한 것이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이제는 한국 교회지도자들 중에서도 교회일치를 원하는 분들의 소리가 매우 높아졌다. 이 소리는 주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부터였다. 첫째는 구미의 자유주의 신학 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인 신조를 경시하고 교회의 개방을 원한 분들이었고, 둘째는 민족주 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민족은 조선민족을 본위로 삼아야 한다고 하면서, ‘교파’를 서 양교회에 대한 맹종이라 비난하고 하나의 ‘조선적 기독교’를 주장했다. 1925년에 캐다다에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의 합동이 성사되어 캐나다 연합교회가 이루어 졌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20년의 협상을 거쳐 이루어진 일이었다. 1905년 캐나다 교회들과 같은 때에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 교회’ 설립 이상을 품고 노력해온 분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열의가 솟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긔독신보’가 질문지를 내어 교회지도자들의 여론을 알아보았다. 상당수가 교회일 치를 원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개방적이고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 있었던 백낙준, 김 길창 같은 인물들이었다. 보수성이 강한 양전백, 임택권 같은 분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런 데 특이한 것은 지난 25년 여간 일치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서 선교사들 가운데 큰 영향력 을 행사할 수 있었던 분들 중 어느 한 분도 이 일치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강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양신학교의 제1대 교장이었던 모펱(마포삼열)이나 그 뒤를 이 은 로버트(라부열)이 신학적으로는 보수면서도 다 그러했다. 1929년 여론을 물을 당시 라부 열 교장은 “장, 감 양교회가 다 한국교회이니 한국교회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고 말했 다. 이것은 이미 미국 북장로교에 스며든 교리적 포괄주의 사상의 영향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 일치운동은 1935년 장로교회내에 침투한 자유주의 사상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이것이 정죄를 받게 되자 잠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장, 감의 ‘연합공의회’도 해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해방 후에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위 역사에서 사람이 무엇을 경영하나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본다. 만일 그 때 선교사들의 뜻을 따라 정체성이 없는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교회’가 조직되었다고 가 정해 볼 때 아찔한 마음까지 들게 된다. 처음 장, 감 선교사들이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모델로 생각한 ‘캐나다 연합교회’가 어떠한 교회였고, 현재 어떤 교회가 되어 있음 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로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서고도(W. Scott)를 위시하여 앞장서서 자유주의 신학을 한국에 보급했고, 1953년 김재준 중심의 진보 주의 교회들이 예장에서 분열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조직했을 때 적극 지원하였으 며, 1955년에는 한꺼번에 2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도와주었던 것이다. 일찍이 이런 신학 적으로 좌경한 ‘캐나다 연합교회’는 현재 세계에서 제일 속화된 교회 중 하나로 지목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려는 인간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사되지 않고, 장로교회의 정체성이 지켜져 온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교 회일치를 주장하는 분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신학에 대하여 개방적이며, 역사적인 교 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조를 장애물로 여긴다. 이런 일치운동은 교회를 속화시키고 허무 는 결과를 낳고 만다는 사실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근년에 고신교회 속에서도 장, 감 을 위시한 모든 교파교회들의 일치를 주장하는 소리가 들려지고 있음을 보고 위기감을 느끼 며 우려하게 된다. 고신교회는 50주년을 맞으면서 지난날의 교회역사를 다시 읽고 배워 교 회생활을 새로 정비하여 미래 역사를 향해 전진해야할 것이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4) -한국 장로교안에 자리잡은 신학적 포용주의
초대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철저한 보수주의자들로서 순수 복음을 전하고 교회생활에서 성경공부를 강조한 것은 아주 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청교도적 경건생활을 강조하 고 보여준 것도 한국교회에 복된 것이었다. 초대 선교사 대부분은 성경을 파괴적으로 비판 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미 북장로교 선교본부 총무인 브라 운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공존할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고등비평주 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조선의 초대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는 불평으로 들려지는 말도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잠시였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전과 같은 분 위기도 바뀌었다. 차츰 자유주의 신학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해 가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 개척시에도 자유주의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1909년에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40명 가운데는 미국 자유주의 신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뉴욕 유니온 신학 출신 3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 진보적 사 상을 가진 분들이 틀림없이 있었겠지만, 강한 보수성을 가진 선배들의 대세 때문에 자기들 의 정체를 들어내지 못하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10년대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사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때 두 사람의 선교사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한국교회에 의해서 고소당했 다. 그 중 한사람이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1908년에 한국에 와서 황해도 재령지역에서 일 해 온 고위량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장호 목사는 성경에 나타난 이적을 부인했다. 홍 해의 이적을 간조(干潮)현상으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모든 사람들의 도시락으로 해석했다. 이 때문에 그는 면직 당했다. 그 후 그는 ‘조선기독교회’를 세우고 철저한 친일파가 되 어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사역하는 북장로교 선교회 에 속한 대부분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는 철저한 보수입장에 서 있었으면서도 자유주의자들 에 대하여 유연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저들이 취한 포용적인 정책이 곧 한국교회 생활에 도 영향을 그대로 미쳤다. 이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공위량의 문제를 취급한데서부터 나 타났다. 선교부 전도위원회는 그의 신학이 문제가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령성경학교에 서 가르치도록 하자고 인사위원회에 제의를 했다. 인사위원회는 이 제의를 수용하지 않고 서울로 이동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선교사 를 사면하고 일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공위량은 곧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위한 선교 사로 파송받아 돌아와서 한국에서 일했다. 이것은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자유주의자들을 포 용하는 방향으로 변모되고 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국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런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공위량은 1923년에 미국에서 발표된 이름난 자유주위 신학 선언인 ‘오번선언’에 서명한 장로교 1300명 자유주의 목사중 한 분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는 더 이상 보수주의 신학이 지배하는 세계는 아니었다.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분위기가 차츰 형성되어 갔다. 1926년에 카나다 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가 함흥의 성경학 교에서 성경에는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1920년대 에 일본, 미국 등에 유학하여 자유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등이 용기 를 얻어 기회를 보아가며 그들의 자유주의 사상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김춘배 김영주 등이 공개적으로 진보적 신학입장을 발표했다. 이미 언급한 대 로 1935년 총회가 이들의 사상을 정죄하여 취소하게 했지만, 그들 마음속에 자리잡은 사상 을 취소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서고도는 그의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별 제재를 받지 않았다. 결국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아 보수 신학자들이 흩어지자 완전히 자유주의자들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위 역사는 오 늘의 교회에 심각한 경고와 교훈을 던져 준다.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정책은 결국 교회의 붕 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미 북장로교회는 급속하게 신학적 포용주의 로 흐르게 된다. 선교사들의 강한 영향아래 살아온 한국장로교회도 이를 뒤따랐다. 한국장로교회의 포용주의는 카나다 연합교회를 품에 안게 됨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캐나 다 장로교가 감리교회, 회중교회와 하나가 되어 캐나다 연합교회를 조직했을 때(1925), 한 국장로교회는 이 교회로부터 오는 선교사들을 개인적으로 심사하여 수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해인 1926년 그 선교회에 속한 서고도 선교사가 성경에 역사적 과학적 오 류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를 제재하지 못하고 포용했다. 그는 후에 조선 신학교의 후원자로, 교수로 거의 평생 한국에 자유주의 신학을 뿌리는데 어떤 어려움도 겪 지 않았다. 그는 자유주의 ‘한국기독교장로회’측을 위해서는 은인이요 공로자가 되었다. 한국 장로교 역사는 일찍이 자리잡은 신학적, 교리적 포용주의가 한국교회의 배교, 분열, 붕괴의 한 큰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제시대의 배교와 순정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분들의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의 추종자들이었음을 누구나 잘 알 고 있다. 1951년 제36총회에서 고신을 축출하는데 앞장 섬으로 한국장로교회 첫 분열을 야기한 주체 세력도 이들이었음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교회역사는 신학과 교리 면에서 협상이나 양보 나 포용은 교회를 건설하기 보다 결국 무너트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多 元主義), 교회적 상대주의, 신학적 포용주의가 지배할 21세기에 50주년을 맞는 고신 교회 는 우리 세대뿐 아니라, 오고 오는 다음 세대들이 복을 누릴 수 있는 미래의 참된 교회건설 을 위해 신학과 교리(신조)면에 있어서 순수성을 지키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5) -한국 자유주의 신학과 일제하의 역정
한국 장로교회는 100년 남짓 짧은 역사 동안 선교역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했지만, 세계 어 느 교회에 못지 않은 시련과 박해를 겪었다. 시련과 박해의 시대에 어떤 분들은 옥고를 치 르고 순교를 당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시류를 잘 타고 협상 양보함으로 박해를 피하거 나 배교의 길을 걷기도 했다. 1938년 9월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체제상의 한국장로교회는 태양신 을 섬기면서 우상숭배의 급물살을 탔다. 1년 후인 1939년에 안두화 선교사가 미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한국기독교인 중 거의 98퍼센트가 신앙양심을 굽혀버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목 자들이 태양신을 섬기면서 우상숭배가 아니고 국민의례라 가르쳤으니, 대부분 순진한 양떼 들은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도상의 한국장로교회는 배교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때 이런 배교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따라한 상당수 목사들과 신자들이 있었 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장서서 친일행위를 보이며, 배교한 분들이 있었다. 이들의 대 부분은 일찍부터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거나 포용한 분들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다 신사참 배를 반대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다 신사참배를 했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 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반대입장에 서 왔고, 자유주의자들은 협상 혹은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1939년부터 배교총회를 이끌어간 소위 지도자들은 거 의 예외 없이 자유주의자들이거나, 유사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채필근이 1940년 친일 평양신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등장한다. 그는 1942년 총회에 나와서 “我等 不 知不識間에 美英人의 思想 觀念에 感染되어 此等 아직 殘存해 있는바 우리들은 깊이 反省하 여 國家에 대해 犯한 罪惡을 철저히 悔改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기존 기독교에 속 했던 것을 회개한 후 순정 일본적기독교로 전향한 채필근은 1943년 일제가 만든 ‘일본기독 교조선장로교단’의 통리가 되는 영광(?)을 안았고, 부산의 자유주의 추종자 김길창은 연성 국장겸 경남교구장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은 평양신학교가 설립되던 같은 때에 서울에 설립된 조선신학교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 학교의 다음과 같은 교육목적에서 그 의 친일 배교적 모습이 잘 들어난다. “복음적 신앙에 기하여 신학을 연구하고, 忠良有爲한 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 이는 일본 국책을 따라 천황에게 충성하는 목사를 배출하겠다는 것이다. 이 양 신학교의 이 사였던 자유주의 신학의 추종자 김관식은 1945년 8월 1일에 모든 교파롤 통합해 만들어진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리로 임명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일제 가 조선 기독교를 신도(神道) 제도권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여 말살하려는 기도에 저항없이 협력했다. 자유주의 신학추종자 전필수는 이미 1932년에 함태영, 감리교의 신흥우 등과 함 께 ‘적극신앙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사회복음주의자임을 나타내 보였고, 1943년에는 일제 의 뜻을 간파하고, 일제가 싫어하는 구약과 계시록 등을 폐기한 개조된 일본적 기독교인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을 조직하고 거기 의장이 되었다. 이 외에 배교단체에서 앞장서 친 일배교생활에 협력한 분들이 있는데, 송창근 윤인구 같은 사람들이다. 일제시 배교생활에 앞장섰던 자유주의자들은 해방이 되었을 때 그럴듯한 자기 변호를 했 다. 신사참배를 하고 감옥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밖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 나 고생과 명분은 다 같다고 변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저들은 해방 후에도 일제 말 배교교 회 안에서 누리던 권좌를 그대로 유지하려 노력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모든 수단 을 동원하여 제거하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저들의 이런 계책은 교회를 분열하고 무너뜨리 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일제의 작품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통리였던 김관식 은 해방 후에도 그 체제를 그대로 이끌고 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 자 형식상 재건된 장로교 안에 정치부장이란 한 권좌를 차지하여 교권을 휘둘렀다. 그는 공 적참회와 정화를 부르짖는 고려신학교를 누구보다 미워했다. 그래서 1948년 제34회 총회시 에 고려신학교 문제가 논의되자 그는 “고려신학교는 우리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 가 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칼로 베듯 잘라 말했다. 1949년 제35총회, 1950년 제36총회에서 고신을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를 절단하고 축출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전권위원회’ ‘특별위원회’의 위원 대부분이 자유주의 추종자였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1953년에 기독교장로회측에 가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제35총회가 세 운 ‘전권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김세열은 뒤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설준비위원 장, 첫번째 총회장(1953)이 된 인물이다. 제36회 총회의 ‘특별위원회’의 위원이었던 박용 희와 조승제는 각각 1956년과 1962년에 ‘기장교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1951년 제36회 총 회에서 고신계 경남노회를 축출한 주역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고신축출은 이 자유주의자들 과 소위 중도 보수주의자들의 암묵적인 합작품이었다. 한국교회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의 역정은 여러 교훈을 주고 있다. 먼저 저들은 인본주의 적 사고 속에 살아감으로 시류를 잘 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저들은 교회를 분열하고 무너뜨리는 일에 주역을 담당했다. 지난날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실은 저들로 말미암아 시 작되었다. 첫번째 분열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김길창이다. 1949년 2월 경남노회와는 신앙 과 신조가 맞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다른 10여명 동류 목사들과 함께 불법노회를 조직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총회의 자유주의자들, 교권주의자들과 합력하여 고려신학을 지원하 는 경남노회를 축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저들은 분열자 김길창을 옹호하고 경남(법 통)노회를 축출함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첫번째 분열을 야기했다. 50주년을 맞는 고신교회는 피해의식에서가 아니라 미래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음으로 양으로 틈을 노려 잠입하 려는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하는 안목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6) -한상동 목사와 장로교회 재건운동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일 뿐 아니라, 고신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터를 놓은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졌던 교회관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 다. 특히 한상동 목사는 해방전후 교회재건을 위해 행동으로 헌신한 분이었기에 그가 어떤 교회관을 가졌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오늘을 사는 고신 세대에 유익이 될 것이다. 그의 교회관은 개혁주의적인 매우 건전한 것이었다.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 를 함으로 공적으로 무너졌을 때, 교회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걸음에서 이를 잘 알게 된다. 그는 투옥되기 전, 이미 배교한 조선장로교회를 재건하여 역사적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확 신을 가졌다. 겨우 반세기 역사를 넘긴 조선장로교회는 일제 압력으로 1938년 제27회 총회 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이를 ‘솔선수행’함으로 배교단체가 되었다. 총회는 모일 때마 다 국민의례를 먼저 하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고, 궁성요배를 했다. 신사참배는 뺄 수 없는 절차였다. 당시 제도상의 조선장로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었다. 태 양신(天照大神)과 천황(天皇)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예수보다 더 높였다. 그러니 제도상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무너진 것이다. 이에 서북지방(평안도, 황해도)의 이기선 목사와 경남지방의 한상동 목사 중심으로 재건운 동이 일어났다.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사불참배자들의 새 교회조직 운동이었다. 서북 보다 한상동을 중심한 운동이 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한상동은 1939년 초 마산 문창교회를 사면하고 이 운동에 헌신했다. 처음에는 몇몇 신앙동지들과 함께 교인들에게 신 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말 것과 신사참배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예배드릴 것을 권 장했다. 다음으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결심하고 부산과 마산 진주 거창 각 지방에 책임자를 세웠다. 1940년 초에 이르러서는 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하도 록 노력하며, 신사 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새 노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기 존 총회에 속한 교회와 노회는 배교하고 실상 죽었으니 조선장로교회의 전통과 역사의 맥 을 잇기 위해서는 새 교회, 새 노회를 조직함으로 교회재건을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1940년 4월 평양의 주기철 목사 가석방 소식을 들은 그는 이인재 전도사와 함께 주 목사를 위로하고 협의하기 위해 4월말 평양을 찾았다. 이 때 모인 20여명의 신앙동지 앞에서 한 목 사는 조직적인 반대운동과 새 노회 조직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주 목사는 조직적 인 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옥고를 겪고 나온 그는 조직적 운동이 더 많은 희생을 내지 않을까 함이요, 또 민족운동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염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신사불참 배 노회 조직에 대하여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원칙적으론 찬성하지만 때를 얻기 위해 좀 더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총회와 노회가 전적으로 배교한 단체 임을 마음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4개월 전인 1939년 12월에 평양노회가 그에게 목사면 직 처분을 내렸다. 출옥 몇 주전인 3월말에는 그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가 폐쇄되었다. 가 족은 축출 당하고, 그 사택에는 친일 신학교 교장 채필근이 점령하여 살았다. 그는 새 노회 의 조직으로 교회재건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찬동하면서 시기가 이른 것으로 보았던 것 이다. 새 노회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분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이는 두 분 다 분리 주의적 혹은 완전주의적 교회관을 가진 데서가 아니었다. 해방 후에도 한상동의 거취에서 원리적으로 해방전과 같은 행보를 그대로 보게 된다. 해방 이 되고 출옥하자 교회의 환경은 투옥 전과는 달랐다. 이제 새로운 노회와 총회의 조직보다 는 공적으로 배교하고 우상숭배한 교회가 공적인 참회와 정화를 거쳐 재건됨으로 과거의 전 통적 조선장로교회 역사의 맥을 잇기를 원했다. 한상동은 ‘분리주의적, 완전주의적’ 교회 관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교회조직의 길에 나선 최덕지와는 달랐다. 그는 다른 출옥 충복 들과 함께 배교한 교회의 공적참회와 권징을 통한 재건을 주장했으나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 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신학교를 세워 순교적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파송함으 로 교회재건에 봉사하기 위해 주남선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신학교 설립 후 경 남노회 안의 이름난 배교자 김길창 일파와 교권주의자들의 갖은 비난과 신학교 파괴공작에 시달리면서도 총회와 노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세우려하지 않았다. 1946년 12월 경남 제48회 정기노회에서 김길창이 노회장으로 선출되고, 지난 노회에서 결의 한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이 때 상당수가 저들과 함께 일할 수 없으니 새 로운 교회의 기치를 들자고 강권했으나, 한상동은 교회 분열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불만이 었던 주상수 장로 같은 분들은 최덕지에게로 넘어갔다.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잠시 봉사하다 이탈했던 박형룡도 “새 교단을 형성하고자 밖에 서 싸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상동은 새 교회나 노회 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한 일 이 없다. 그는 끝까지 동지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모든 비난과 고신 분쇄공작을 견뎌내다 가 제36, 37총회(1951,2)가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하고 완전 단절함으로 만부득이 이교파적 으로 나가는 가설 총회를 벗어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대로의 전통적인 장로회 총회를 계승”하기 위해 1952년에 총노회를 조직, 고신교회 출발에 동참했다. 해방전이나 해방 후에 취한 한상동의 교회재건 운동은 원리상 일관되었다. 이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고신교회의 정체 이해와 직결된다. 우리는 지난날의 교회사에서 고신의 선진들이 한 국장로교회를 사랑하고, 신학, 신앙생활의 바른 전통을 잇는 교회를 재건하려는 일념으로 살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결코 ‘분리주의적’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고신 선진 들이 가졌던 개혁주의 교회관을 바로 이해하고, 그 선상에서 미래의 교회건설에 임하는 것 이 50주년 희년을 맞는 고신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7) -예장 제36회 총회와 고신계 축출
제36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던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한 때는 6.25의 비극이 한창이던 1951년 5월이었다. 이 때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민족의 화복을 책임진 양심공동 체로 과거의 죄를 살피며 베옷을 입고 참회했어야 했다. 그런데 한국장로교총회는 이에 역 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감행한 총회 주체세력은 일제에 친일 배교한 교권주의자들이었 다. 해방 후 장로교 총회는 진실한 공적 회개로 과거를 청산하고 교회재건에 나서지 않았다. 1946년 6월 남부총회로 모여 교회재건을 했으나, 이는 기구적인 재건이었을 뿐 영적 신앙 적 재건은 아니었다. 총회는 ‘순정일본적기독교’(純正日本的基督敎) 건설과정의 극치였 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지도급 인물들이 계속 교권을 장악했다. 예를 들면 일제 ‘교 단’의 ‘통리’로 친일의 최고사령탑에 앉았던 김관식이 1948년 총회시에 정치부장으로 등 장했다. 그 해 그는 총회를 대표하여 암스텔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창립총회 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했다. 남부총회는 1938년에 결의한 신사참배를 취소하는 결의를 했 다. 공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성실하게 실천해 온 분들이 공적참회나 권징과정도 없 이, 단순히 결의를 취소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전필수 김길창 등은 민족 반역죄 로 반민법에 걸려 심판을 받을 자리에 있었지만, 총회는 이들을 오히려 감싸주었다. 김길창 은 계속 총회 총대로, 전필수는 후에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1949년 초 김길창은 회개를 외치는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가 싫어 불법노회를 조직, 경남노 회의 분열을 일으켰다. 제35회 총회(1949)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5인 전권위원을 파송했 다. 그런데 이 전권위원장은 김길창과 동색을 가진 조선신학교 지원자 김세열이었다. 그러 니 전권위는 경남에 와서 분열자 김길창을 돕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회개와 정화를 외치는 고려신학교를 분쇄하고, 이 학교를 돕는 기존 경남노회를 해체하고 삼분(三分)해 세 를 분산함으로 김길창을 도우려했다. 제36회 총회는 이 전권위의 보고를 받을 수 없게 되 자 다시 ‘7인 특별위원회’를 파송했다. 이 위원회도 같은 성분을 가진 인물들로서 같은 방향의 작업을 했다. 당시 총회의 교권은 친일 배교자들을 도와 그들의 위신을 세워주고, 정화를 부르짖는 세력을 분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장로교회는 교회와 민족 앞에 일제시에 범한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는 일을 외면함으로 양심공동체로서의 모습 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땅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었다. 해방 5년만에 동족상잔 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 민족적 대참사는 배교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교회의 책임으로 보아 야 한다. 6·25 1년 전인 1949년 초 한상동 목사는 ‘대한교회에’라는 제목으로 예언자적 인 다음 글을 파숫군지에 실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과일(過日)의 모든 죄를 솔직히 자복하고 눈물을 흘려 통회하면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께서 용서하시련만은, 해방을 주시 고, 독립을 주신 오늘에도 회개는 고사하고, 패망의 일인(日人)에게 배운 버릇 훌륭한 체 생각하고, 죄감이 전무하고, 회개를 거부하니 어찌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리요… 여호와 반 듯이 진노하시리라.” 그는 회개하지 않는 한국교회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심각하게 느꼈다. 6·25가 한창이던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계속총회가 모였다. 전해 4월 대구 제일교회에서 36총회가 모였으나, ‘전권위원회’의 보고를 두고 폭력이 일어나 무장경관 이 출동, 진압해야 하는 대치욕을 남기고 5일간을 허송하다 9월에 속회하기로 하고 정회했 다. 그러나 2개월 후 6·25가 일어나 모이지 못하고, 다음해 5월에야 ‘계속회’로 모였 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속회로 모인 이 총회는 민족 대란을 맞아 피 흘리고 고통하는 때에 하나 님 앞에 베옷을 입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지난날의 배교의 죄, 신사참배의 죄, 일제시에 범한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청산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총회 는 더 굳어져 있었다. 총회는 오히려 공적회개와 참회로 정화의 길을 밟아 교회재건에 나서 자고 외쳐 온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법통)노회를 분쇄하는데 초점을 맞추 고 교권을 동원했다. 총회는 미리 입장권을 발행하여 총대들에게 나누어주어 입장하게 함으 로 경남(법통)노회 총대들이 입장하는 길을 막았다. 이런 방법으로 총회는 경남노회를 총회 제도권 밖으로 축출해버렸다. 그래도 한국장로교회를 사랑하는 경남노회는 총회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원해, 다음해 37총 회에 총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총회는 경남노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 버렸다. 이에 경남(법통)노회는 하나님께서 회개를 외면하고 이교적으로 흐르는 교권으로부터 벗어나서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을 바로 이어가기 원하시는 줄 믿고, 그해 9월 11일 총노회를 조직함으 로 고신교회로서의 새 출발을 했다. 고신의 선진들은 하나님 앞에서 공적 참회와 권징을 통 한 정화로 한국교회의 신앙적 재건을 하기 원했고, 이것이 나라와 민족 앞에도 책임있는 일 임을 믿었다. 그런데 이만열 교수는 6·25 민족상잔 시기에 고신파의 분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고신파의 분열이 기장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로 6·25 의 동족상잔이 자행되고 있던 1951-2년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동족끼리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민족적인 시련을 두고 마음을 합해야 할 시기에 ‘진리싸움’이라는 명분으로 교단분열 을 결과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이만열, 특집/한국교회, 연합의 장은 열리는가1. 목회와 신학, 1995, 3월호, p.51) 고신교회를 향한 이런 사관은 고신교회 존립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사관은 신앙보다 민족을, 진리보다 교회 일치를 앞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을 민족중심적 입장에서만 보았지 신앙의 눈으로는 보 지 않고 있다. 결과 고신교회의 출발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와 교 회는 바른신앙의 파수와 참된 교회의 건설만이 그 땅과 민족을 진정 위하는 길로 알고 살아 간다. 고신교회는 50주년을 맞으면서 이 땅의 참된교회 건설이 곧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복 이 된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배우고 교회의 참된 개혁과 건설에 임해야 한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8) -1960-1963 합동과 환원이 준 교훈
고신교회사에서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1960-1963)은 떳떳한 역사가 못된다. 고신의 신앙 과 생활에 혼란을 초래한 역사요, 고신의 원색을 퇴색하게 만든 역사였기 때문이다. 합동 과 환원을 통해 고신교회은 많은 것을 잃었을 뿐이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신학과 신앙, 교 리와 신조를 초월하는 통합 일치운동이 강타할 것이다. 이 때 실패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 으면 한다. 첫째, 고신 지도자들은 당면한 난국 타개의 길을 조급하게 찾았다. 당시 고신의 가장 큰 난 국은 신학교 문제였다. 당시 신학교는 고신신학을 주조해 온 교장 박윤선을 잃었다. 그를 잃은 고려신학교는 빈집처럼 되었다. 교회도 허탈감에 싸였다. 지도자들은 박윤선이 떠난 큰 공간을 속히 메우기를 바랐다. 때마침 유사한 난국에 직면한 승동측이 그들의 위기 탈출 구를 찾아 고신에게 접촉해 왔다. 이 때 고신은 즉각 비어있는 공간을 메우고, 난국을 타개 할 길이 거기 있다고 판단했다. 거기에는 박윤선이 남긴 큰공간을 메우고도 남을 박형룡도 있다고 본 것이다. 둘째, 고신 지도자들은 합리적 사고보다는 감상적 정서에 지배를 받았다. 승동측의 제의로 고신 지도자들이 1960년 8월 서울에서 회동했다. 이 때 고신 지도자들은 “박형룡 박사와 승동측 지도자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로 개혁주의 신학을 위해 함께 새 출발하자고 간곡 히 제의해 온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들이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수용과 교회적 차원의 수용은 다른 것이다. 미래교회 의 역사를 위해서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승동의 수장격 자리에는 노진현 목사 가 있었다. 그는 해방당시부터 부산에 있었지만 고려신학교와 경남(법통)노회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그는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한 제36회 계속총회가 모인 부산 중앙교회의 목사 이기도 했다. 셋째, 고신 지도자들은 합동만을 최선으로 여기고 미래를 보지 않았다. 합동추진은 초고속 이었다. 지도자들은 8월에 비공식적 접촉을 갖고, 9월 총회시에 승동측과의 합동을 발의하 여 즉시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0월에 대전에서 양측 합동추진위원들이 회동했 다. 이 회의는 25일 오후 2시에 모여 그 이튿날 아침 9시에 마쳤다. 1960년 12월 13일에 합 동총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10시간 내외의 시간에 합동준비가 끝났다. 합동에 대한 말이 오 간 지 5개월만에 성사되는 것이다. 그러니 양측이 함께 마련한 소위 ‘합동공약’에는 원칙 만 있었지 구체성은 전혀 없었다. 예를 들면, “신학교는 총회직영의 일원적인 신학교”로 한다고 했다. 이것은 부산의 고려신학교와 서울의 총회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안이 전혀 명시되지 않았다. 결과 합동총회 후 바로 다음 총회에서 부산고려신학교를 폐교하는 결의를 할 수 있었다. 또 “이사의 수는 양측 12명으 로 하며”라고 했지만, 이것을 언제까지 적용할 것인지 언급이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단 지 합동총회 당시에만 적용되었다. 합동총회 후 다음 총회에서의 이사 비율은 승동측 10, 고신측 6명이 되어 버렸다. 고신교회는 10년전 축출당할 때 겪은 동일한 교권 폭력의 재현 을 보게 된다. 당시 600여 교회의 역사적 진로를 책임진 고신지도자들이 취했던 졸속한 합 동진행과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넷째,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순진했고, 인간적이 되어버렸다. 승동측 지도자들이 눈물을 머금고, 지난날의 고신을 이탈했던 박형룡이 아닌, 지난날에 고신측을 추방한 노진 현이 아닌 모습으로 나타나 도움을 요청했을 때 고신 지도자들은 갑자기 전 한국 장로교회 에 영적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가 오게 된 듯 뿌듯한 자고(自高)의 마음을 갖게 되었 을 수 있다. 곧 저들은 고신교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한상동을 합동 총회의 총회장과 이 사장으로, 그 다음 총회에서 다시 총회장으로 높이 올려 세웠다. 당시 한상동 목사는 총회 장으로 ‘신학교 일원화’의 공약파기에 한마디 저항없이 ‘고려신학교’ 폐교결정에 의사 봉을 두드렸고 이를 강행해 나갔다. 고신측 합동추진위원장 황철도 목사에게는 승동측 당 시 대구에서 제일 큰 예배당을 가진 서현교회로 청빙받는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 뀌었다. 한상동 목사는 두 번째 총회장 자리를 뒤로하고 내려왔다. 그 때 총회 임원석에는 고신에서 전성도 한 분만이 고고히 앉아 있었다. 그뿐 아니다. 이제 이사장에는 노진현이 앉아 있고 자신은 부이사장이 되었다. 개편된 이사회를 둘러보니 16명 가운데 고신은 6명뿐 이었다. 2년 동안 높이 떠있어 참된 자아와 현실을 잊었다가 낮은 곳에 내려온 순간 자의식 을 찾게 되고 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지난날 만난을 무릅쓰고 가꿔온 신학교 도 승동측 품에 안겨 주고 홀홀 빈손 쥐고 나선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쨌던 고신 지도자 들은 너무 인간적이었을 수 있다. 고신인의 자의식으로 돌아왔을 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자신도 살고 한국교회도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 진다. 결국 한상동은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여 신학교를 찾는 길에 나섰다. 이제 할 말이 있 을 수 없다. 이유도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주변으로 부터 오는 모든 비난을 당연히 받아야 할 징계로 여겼던 것 같다. 뒤따라 교회도 환원하였 다. 합동이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환원 역시 합리적인 과정을 거 치지 않았다. 고신은 합동으로 150여 교회를 잃었다. 합동은 솔직히 실패한 부끄러운 역사 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용하심과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인간들의 실패와 실수 속에서도 한국에서 고신교회를 통해 이루어 가실 뜻이 있어 단절된 교회의 역사를 잇게 하신 은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실패한 합동 환원의 역사는 고신교회의 현재를 책임지고 있는 오늘의 세대와 미래를 이끌 어 갈 고신인에게 귀한 교훈을 준다. 앞으로 교회의 통합 합동 일치운동은 끊임없이 일어 날 것이다. 그러나 급하고 졸속한 진행은 교회의 건설이 아니라 파괴를, 역사의 진행이 아 니라 중단이란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9) 고신교회사와 교권
고신교회는 1950년대 초 장로교 총회(1951-2)가 휘두른 교권횡포 결과로 생겨난 교회이다. 고신은 교권의 큰 피해자다. 그렇다면 고신은 교권남용이나 횡포에 남다른 경계를 해야한 다. 교권이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순수성, 성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權)이기 때문이다. 교권은 교회건설을 위해 시행 되어 질 때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빗나간 교권행 사는 분열을 초래하거나 큰 해를 입혀 왔다. 고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남노회는 제35-36회 총회가 휘두른 교권의 횡포로 무서운 박 해를 받았다. 총회의 대세는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으로 교육하고, 교회의 공적참회와 정화 를 부르짖는 고려신학교를 싫어했다. 그래서 이 신학교를 승인하고 지원하는 경남노회를 분 쇄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1949년 2월 배교자요 자유주의자인 김길창이 경남노회안에 분 열을 일으켜 불법노회를 조직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35회 총회가 김세열을 위원장 으로 하는 ‘5인 전권위원’을, 제36회 총회가 다시 ‘7인 특별위원’을 보냈다. 그런데 양 위원회 주도인물들은 자유주의 조신측을 지원하는 분들로서 김길창과 동색이었다. 그러 니 분열자 김길창에게는 전혀 책임을 묻지 않고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 를 분쇄하는데 만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이들은 총회를 배경한 교권을 가지고 기존 경남 (법통)노회를 제거하기 위해 새 불법 경남노회를 조직함으로 경남노회 분열을 고착시켰다. 제36회 계속 총회는 이 새노회를 받아드림으로 ‘법통 경남노회’를 제도권 밖으로 축출했 다. 친일 배교의 죄를 가리기 위해 사용된 교권의 횡포였다. 여기 고신교회의 불가피한 출 발이 있었다. 고신교회는 교권의 남용과 횡포가 교회에 얼마나 무서운 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역사적으 로 체험했다. 초기 고신 총회 분위기는 교권은 봉사라는 사실을 생활로 보여주었다. 회장으 로 당선되어도 그 자리에 선듯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총회임원으로 당선되어도 겸손하게 사양하고 사의를 표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정말 그리스도의 종들이 모인 ‘성회’답게 보 였다. 총회장은 총회기간에만 회를 사회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총회 후에는 총회 장이란 칭호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적어도 합동직전인 50년대 말까지 지속되 었다. 그런데 차츰 고신교회가 그 원색을 잃어 가면서 교권을 접근하고 시행하는 태도에 변화 조 짐을 보였다. 이것이 처음 나타난 것이 고려신학교 이사회가 신학이나 교리문제가 아닌 주 일성수와 관련된 ‘건덕’상의 이유로 고신신학을 주조(鑄造)해온 박윤선 박사의 교장직을 해임한 데서이다. 그가 주일에 부득이한 일이나, 자비의 일은 할 수 있음을 성경적으로 교 리적으로 밝혔으나 이사회는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 징계했다. 건덕상의 문제로 이런 중징계 를 한 것은 이사회의 지나친 교권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결과는 곧 고신교회의 위기를 불 러와 ‘실패한 합동’으로 이어졌다. 이 후 고신안에는 교권남용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때때로 일어나 교회에 큰 손해를 초래했 다. 이것은 고신의 속화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67년에 신학교 측은 대학부의 대학인가 를 얻기 위해 기존 ‘유지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명의 변경하기를 원했다. 이에 대한 이사장의 적극적인 협력이 없자 한상동 목사를 이사장으로 하는 ‘가 이사회’를 조직하여 ‘학교법인’인가를 신청하여 받았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교권남용이라 볼 수 있다. 이 사 건은 곧 한상동(측)과 송상석(측)사이에 극단적인 대립을 불러 전국교회를 불안하게 했다. 이렇게 출발한 ‘학교법인’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1972년에는 송상석 목사가 소위 ‘법적이사장’직을 고수함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4년 임기 를 마쳤지만 교육부에서 승인한 임기가 남았다는 이유로 이사장직을 고수했다. 이제 양측 교권이 충돌하게 된다. 74년 총회는 ‘송목사 비행에 관한 처리’를 위한 특별재판국을 설 치했다. 그 해 12월에 재판국은 송목사에게 ‘목사면직’이란 극단적 시벌을 가했다. 그가 곧 정년 은퇴할 시점이었다. 교회권징의 가장 큰 목적은 치유에 있다. 그런데 이 권징은 치 유보다는 출혈의 결과를 가져왔다. 재판국은 지나친 교권행사를 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배경하고 있는 경남노회가 반발하여 행정보류를 선언하고, 7년을 따로 살 게 된 비극을 초래했다. 1990년대를 돌이켜 본다. 복음병원 지하주차장 건설입찰문제를 둘러싸고 소송문제가 일어 나 95년부터 98년까지 무려 3년 동안 시련을 겪었다. 95년 총회는 “학교법인 안에 있는 제 반문제 해결을 위하여 전권위원을 내기로”결의했다. 이는 1949년 제35총회가 경남노회 분 규를 해결하기 위해 전권위원을 낼 때 “기타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심사처리”케 하 기 위해 전권위 5인을 내어 무한한 교권을 행사한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해 전 권위원이 1년 동안 17회 모여 많은 작업을 한 보고를 96년 총회가 어렵사리 받았다. 받은 보고의 중요한 내용은 시벌이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97년 총회는 96년 총회가 받은 전권위 원회가 낸 보고서에 대한 전권위원을 내게 된다. 양립된 세력간의 교권 시소게임이었음이 분명했다. 98년 총회에서 새 전권위원이 제출할 보고는 총회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조정위 원을 내어 결국 지난 3년 동안의 모든 것을 백지화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불법이 있으면 밝혀 징계하고, 범법자는 이를 겸손히 수용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 생활이다. 수년 동안 심각한 듯 다루어 온 모든 일은 양 세력간의 교권장악을 위한 시소게 임이었다는 인상만을 남겼다. 고신교회는 특별히 교권남용과 횡포에 의해 어려움과 박해를 받은 역사적 경험을 가진 교회 다. 합동때도 교권의 횡포로 분쇄당하기 직전 환원했던 쓰라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고신이 지난날 교회내에 시행해 온 교권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성실하게 봉사해온 것이었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권남용과 횡포는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속화현상이다. 교권횡포 에 큰 피해를 경험한 고신교회는 50주년을 맞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성실하게 받드는 겸허 한 마음으로 교권행사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허순길 박사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10) 대학교 총회 직영
고신교회는 현재 진리운동의 노선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다. 진리운동을 해 오던 고신의 정 체성이 어느 면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원인을 찾고 교정하여 진리운동을 다시 해야 한 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적인 이권을 포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고신교회 속화를 가져 온 한가지 중요한 역사를 솔직하게 뒤돌아보자. 1964년 제14회 총회 시에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이 총회직영이 되었다. 그 후 대학의 설립과 발전과정 에서 고신교회의 속화가 동반되었다. 총회는 1970년 12월 고려신학교 부설 대학부의 대학인 가를 받아 ‘고려신학대학’을 직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신학대학’설립을 추진하면 서 학교측은 ‘가 이사조직’을 하여 유지재단을 ‘학교법인’으로 변경, 인가를 받아냄으 로 제9계명을 범한 우를 남겼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는 생활의 정화를 부르짖어 온 고 신의 원류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이것이 속회의 길에 들어선 제1보였다. 그 다음이 ‘고려신학대학’을 기독교 일반 인문대학 ‘고신대학’으로 개명 개편하는 일 에 들어섰다. 그런데 1978년 제28회 총회는 이사회가 낸 ‘일반대학으로 변경’ 건의를 다 수의 반대로(가 36, 부 74) 부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대학으로의 변경노력은 막 후에서 특정인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1980년도에 일반대학으로의 변경승인이 교육부로부터 나 이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총회는 타의에 이끌려 말없이 ‘일반기독교대학’ 직영을 떠 안았다. 이 과정도 본질적으로 지난날의 ‘가 이사회’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생활의 정 화를 부르짖어온 진리운동 선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의 지도급 중진들은 이제 교회적이 아닌 방법 사용을 크게 문제시하지 않게 되었다. 한번 내디딘 속화의 과정 이 멈추지 않고 진행된 것이다. 왜 잘못된 과거를 들추느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 난 20여년 간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이런 과거 역사를 가지고 나온 대학을 직영하는 고신교 회의 오늘의 속회 현실을 직시할 때, 교회의 미래를 위한 치유를 위해 병원(病原)을 찾아내 어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대학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기독교 철학에 입각한 고등교육기관을 필요로 한다. 고신대학교가 이를 위해 공헌했고 지금 도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문제의 초점은 둘이다. 첫째, 고신교회가 ‘신학대학’ 설립을 위한 첫 걸음부터 일반기독교 대학 ‘고신대학’으로의 개편에 이르기까지 세속적인 방법 을 사용함으로 교회 안에 속화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고신총회는 개혁주의 교회생 활에 따른 타당성 연구도 없이 일반기독교 ‘고신대학교’ 직영을 떠 안음으로 교회 속화 를 자초했다는 사실이다. 고신 총회는 솔직히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학교를 직영해 옴으로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 았다. 복음병원도 마찬가지다. 병원은 이제 대학설립 전의 구호 ‘복음병원’이 아닌, 고신 대학교(의학부)를 위한 ‘교육병원’으로 고신대학교의 일부이다. 이 기관들을 직영해 온 고신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고신교회의 정체, 개혁해가는 교회의 모습을 전혀 현실화해 보 여주지 못했다. 고신교회는 이 기관들의 직영으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의 속화를 촉진시켜 왔 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982년에 고신대학 학생들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고신교회는 속화의 모습을 한국과 온 세계에 보여주었다. 총회장이 고신교회를 대표해서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이것은 고신교회가 사과한 것이다. 그 후 80년대에 여러해 이어진 운동권 학생들의 학원민주와 운 동으로 캠퍼스 안에 폭력과 비신앙적 행사가 난무했다. 이것은 어떤 기관의 속화가 아니고 바로 이 기관을 직영하는 교회속화의 표상이었다. 이제 캠퍼스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는데 왜 옛일을 끌어내느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의 직영을 통한 고 신교회의 속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끊임없이 보기 때문이다. 속화는 이제 교회 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교계의 중진 목사 장로들은 고신대학교와 복음병 원이라는 큰 기관의 이사 감사 자리를 얻기 위해 분주하다. 이 기관들의 운영 체제상의 변 화를 둘러싸고 파벌이 갈려 싸우고, 서로 승리하기 위해 세력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교회 의 참된 개혁과 건설에는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다. 90년대 이후 총회가 힘을 쏟은 핵심 문 제는 전도, 선교, 교회교육, 영적 지도 등 교회건설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대학교와 복음병 원에 관계된 문제들이었다. 병원의 지하주차장 건설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소송문제, 김 해복음병원 처분문제, 의료원 제도의 폐지 문제 등이었다. 이 모든 것은 ‘고신대학교’의 체제 제도상의 변혁과 연관되어 있다. 고신교회는 이런 문제들에 매여 미래의 도약에 마음 을 기울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지난 두 총회는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노조’의 총회장소 점거로 상당시간 정회를 해야 했다. 노조와 같은 속(俗)된 단체가 총회장을 점거한 역사는 아마도 세계역사에서 고신교회가 최초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 노조는 총회직영기관의 일부 이기 때문에 고신교회의 속화된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고신교회는 이제 감각이 둔화되어 이런 일에도 태연하게 되어진 것 같다. 고신교회는 참으로 중대한 위기를 당면하고 있다. 총회의 대학교 직영이 고신교회 속화의 중요한 요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대학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총회는 대 학과 병원을 간접운영하든지, 기독교교육에 관심있는 분들을 통한 위탁운영을 하든지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속히 직접운영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참된 교회생 활 건설이 많은 재산보다 중하다. 세계 거의 모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역사적 경험을 통 해 총회의 대학직영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을 직영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바로 읽 고, 세계교회를 보고 배워야 한다. 오직 은혜로 50주년을 맞는 고신 교회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과감한 시정과 개혁을 필요로 한다. 교회생활의 속화를 막고, 진리운동을 하는 교회로서의 미래역사를 다시 열어 가기 위해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의 총회직영을 정리하고 신학대학원만을 직영하는 길을 속 히 모색해야 할 것이다.
허 순 길 박사 ·전 고려신학대학원장
※ 그동안 10회에 걸쳐 연재된 허순길 박사의 시리즈는 본 보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댓글환원을 잘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합동시도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논리가 좀 이상하군요. 그외에.........교권의 남용과 횡포를 동대구노회에서의 이광호목사의 문제에도 적용해 보면 좋겠군요. 고신의 위기가 더욱 깊은 곳에 있는 듯 한데....조직적인 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쉽지만, 윗글의 제일 마지막에 보여진.....
첫댓글 환원을 잘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합동시도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논리가 좀 이상하군요. 그외에.........교권의 남용과 횡포를 동대구노회에서의 이광호목사의 문제에도 적용해 보면 좋겠군요. 고신의 위기가 더욱 깊은 곳에 있는 듯 한데....조직적인 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쉽지만, 윗글의 제일 마지막에 보여진.....
기독교보의 토가 야릇하군요. 어떤 면에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인 지............기독교보의 속화는 왜지적하지 않았는 지...
참 ! 고신의 원로이거나 모든 목사들이 한결같은 증상이 입만 살아 가지고서는??? ................
기학님의 지적 맞습니다...정확합니다...일선에서는 할말을 잘 안하죠....나중에는 입은 사는데 몸은 죽더군요...ㅜㅜ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 갸롯유다 보다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를 낙원에서 기억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