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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한림공(翰林公) 용파(勇派)
1. 6세(世) : 용(勇)
절효선생 김극일(金克一)의 셋째 아들인 김용(金勇)은 명재상(名宰相) 황희(黃喜)의 문하생으로 항상 덕업(德業)에 힘쓰고 문장이 뛰어나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고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와도 시사(詩史)를 강론하고 친교 하였으며 당대의 손꼽히는 학자였다. 자질(子姪)들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지의(智義) 두 자(字)를 일컬어 말하되 「족함을 알고 그칠 줄 아는 것을 지(智)라 하고, 몸은 위태롭되 도(道)를 찾는 것을 의(義)라」하여 그것을 좌우명(座右銘)의 심법(心法)으로 삼으시고 자질들을 가르치니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케 하였다.
또 여섯 형제들이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여 항시 호상화락(互相和樂)함이 유아(乳兒)의 장난치는 모습과 같으니 세인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안로(金安老)가 찬(撰)한 남호(南湖)선생 묘비문(墓碑文)에서 「한림을 지냈고 여러 번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 염결관후(廉潔寬厚: 청렴하고 결백하며 너그럽고 후함)함이 그 당시의 제일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을 모신 사당(祠堂)은 긍구정(肯構亭: 경북 경산시 압량면 내동)이다.
□ 남호(南湖)선생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용(勇)이요, 자(字)는 자경(子敬), 호(號)는 남호(南湖)이시니 김해에서 계출(系出)하신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이며 흥무왕의 원손(遠孫)이시다. 조부의 휘는 서(湑)이니 조선 태종조(朝)에 의흥현감(義興縣監)을 하셨으며, 부친의 휘는 극일(克一)이니 벼슬길에 끝까지 나아가지 아니하고 효성에 이류(異類: 호랑이)가 감동한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을 명하시어 남대(南臺: 학덕이 뛰어나 이조(吏曹)에서 사헌부 대관(臺官)으로 천거된 사람) 지평(持平: 정5품)과 사헌부집의(執義: 종3품)을 주셨다. 또 선생의 덕업과 문장이 규연(巋然: 높고 크고 견고한 모양) 찬란하여 연촌(煙村) 최선생(최덕지(崔德之))와 항상 시사(詩史)를 의론한 관계로 인하여 도의(道義)의 벗을 삼으셨다. 조카는 탁영(濯纓)선생이신데 문장, 절의, 도덕이 뛰어났고, 종손(從孫)은 삼족당(三足堂)선생이신데 퇴퇴(성한 모양)한 의행(懿行: 좋은 행실)이 있으니 과연 남호선생이로다. 선생의 가운(家運)이 광명하게 연마하여 불기운이 위로 오른 것 같네.
세종 신유년 서기 1441년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고 정유년 서기 1447년에 문과에 탁입(擢入: 뛰어난 사람을 뽑음)하여 한림(翰林)을 지내시며 여러 번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 염결관후(廉潔寬厚)하여 그때의 제일 모범이 되었다. 단종 계유년 서기 1453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를 주셨으나 사양하시고 향리로 돌아와 임천(林泉)에 가휴(暇休)하여 단(壇)을 집 뒤에 쌓아 아침마다 등하(登賀)하기를 종신토록 쇠(衰)하지 않으셨다.
슬프다. 선생이 그칠 줄 알아 그칠 때 그치고 조정에 계실 때 바로 간(諫)하시다가 군소(群小)에게 미워함을 보여 퇴휴(退休)하시니 이는 장한(張翰: 중국 진나라의 명사로 학덕이 높고 효자임)이 배를 타고 돌아온 것과 어찌 다르랴. 자질(子姪)을 가르치되 반드시 지(智)와 의(義) 두 자를 풀이하여 이르되 몸은 위태롭되 도(道)를 찾는 것을 의(義)라 하고, 만족함을 알고 그칠 줄을 알면 지(智)라 하니, 너희들로 하여금 좌우명(座右銘)을 써서 이에 심법(心法)을 삼으라고 하니 그 전하신 말씀이 족히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또 인의예지(仁義禮智) 좌사유(座四維)로써 좌우명을 삼아, 풀이하여 이르되 널리 사랑하고 덕이 높아 사단(四端)을 거느리며 만선(萬善)을 갖추어 타인이 나를 해(害)함이 있어도 해로써 갚지 말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일호(一毫)라도 그릇됨이 없는가를 생각해 본 연후에 흡족하게 덕을 베풀면 그 사람이 감화되어 스스로 자기의 본심(本心)을 깨달아 즐겁게 그 허물을 고치면 인(仁)이라 하고, 마음이 편안함이 없고 이치에 어긋난 일을 아니하며 몸이 정리(正理)에 있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집중 탁마(濯磨: 씻고 닦음)하여 천하의 낙(樂)을 곧 나의 낙(樂)으로 삼고, 천하의 근심을 나의 근심으로 삼아 평생 동안 만사에 정중(正中)에서 천추의 절의(節義)를 지키며, 치평(治平)의 제(際)에 나의 공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절의의 장소에 나의 몸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을 의(義)라 하고,
예(禮)는 예(禮)이니 일체(一體)가 만선(萬善)의 가운데 입(立)하여 공손하여도 아첨함이 없으며, 씩씩하여도 거만함이 없으며, 친(親)히 하여도 가벼움이 없으며, 엄연하여도 헛됨이 없으며, 간략하여도 허탄함이 없으며,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스승을 높이고 제신(祭神)에 정성을 다하며, 부부(夫婦)에 분별(分別)하며 장로(長老)에 공경하며, 비유(卑幼)에 깨우치며 붕우(朋友)에 믿음이며 빈객(賓客)에 사양한 것이 다 예(禮)라 하고, 지(知)는 지(知)이니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平)히 한 것이니, 알아도 마음을 다스리며, 충실하면 넘친 것을 알며, 미워하면 원망한가를 알며, 살면 도(道)를 알고 죽으면 절(節)을 알며, 가득하면 넘칠 것을 알며, 어려움이 다다를 때 용맹을 알며, 죽을 때 죽으며 사는 데 권도(權度)를 알며, 진퇴주선(進退周旋)에 알지 못하면 나의 몸이 없는 것과 같은지라.
이제 선생의 양명(兩銘)의 서(書)를 보건대 밝게 마음이 열리되 아까는 담에 낯을 댄 것 같으나 이제 빠르게 지름길로 사람을 개유하여 가르쳐 백성에 참연(嶄然: 한층 높이 뛰어난 모양)하거늘 하물며 소소(昭昭)한 하늘이 어찌 이에 백록(百祿)을 내리지 아니할까. 다남(多男)에 4대부(大夫)요, 다질(多姪)에 3대인(大人)인데, 재주 있고 또 현명하니 반드시 천지정영(天地精英)의 기운 진진(津津: 끊임없이 솟아나듯 많다) 발육하여 김씨 일문(一門) 3세에 이르니 기특하도다.
자(子)는 운천(雲川)이요 손(孫)은 수재(修齋)인데 능히 그칠 줄을 알며, 조카는 탁영선생이요 종손은 삼족당선생인데, 몸은 위태롭되 도는 높으며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정일부징(精一不徵)하니 김씨의 가전(家傳) 성촉(盛躅: 번성한 자취)이 능히 나라의 기강을 보(補)하여 혁혁히 끼친 뜻이 만세에 장존(長存)하여 천지와 더불어 썩지 아니하니, 그 두터움을 어떻게 말할까.
슬프다. 공(公)이 성화 6년 서기 1470년 3월 14일에 별세하셨다. 선생의 손(孫) 응형(應馨)씨가 그 유서(遺書)와 군표일반록(群豹一斑錄)과 좌우명(座右銘)을 가지고 나로 하여금 명(銘)을 찾거늘, 그 장자(長子)의 명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그 글을 보고 그 말씀을 거두어 명(銘)하여 이르되, 김해는 고구(古國)인데 성신(聖神)한 업을 전하였네. 오래 갈수록 오직 새로우므로 바탕이 착하고 정중함에 이르렀네. 남호당 앞에 기상이 밝고 화(和)하네. 충효는 세세로 독실하고 절의는 온전하네. 여경(餘慶)이 쌓여 성한 복(福)이 경통(慶通)하네. 하늘이 어진 짝을 주시니 황주변씨(黃州邊氏)와 남양홍씨(南陽洪氏)로다. 두 짝이 아름다워 4남이 계종(繼從)하였네. 꽃이 고운 계수나무에 다투어 군용(群龍)이 오르네. 두 자(字)를 훈계함에 지(智)와 의(義)로다. 자질(子姪)을 깨우치되 의와 지로다. 자라서 오른쪽 새겨진 4유(維)는 사람을 첩경(捷徑)으로 깨닫게 하네. 이학(理學)을 확충함은 십세(十歲)된 어린 나이로세.
슬프다. 홍주(洪州)여 손님이 화봉(華峰)에 돌아가네. 저어 숭고(崧高)한 유악(維岳)이여 천추에 나타난 무덤이로다. 저어 편석(片石)에 명(銘)을 하였으니 덕이 용납하기 어렵네.
가정(嘉靖) 13년 갑오년(서기 1534년) 중종(中宗) 29년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 연안(延安) 김안로(金安老) 찬(撰)
정헌대부(正憲大夫)이조판서 함종(咸從) 어영로(魚泳瀘) 서(書)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字)는 내경(乃敬)이고 호(號)는 남호(南湖)이다. 영락(永樂) 11년 서기 1413년 9월 22일에 출생하여 세종(世宗) 23년 서기 144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서기 1447년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한림원교리(校理)가 되었으며 단종(端宗) 때인 서기 1453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여가로 임천(林泉: 자연)에 휴식하며, 집 뒤에 대(臺)를 쌓고 아침마다 또는 초하룻날마다 임금의 은혜에 하례(賀禮)하고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선생과 함께 도의지교를 하였다. 군표일반록(群豹一般錄)과 좌우명, 창수문(唱酬文: 시가나 문장을 지어서 주고받는 글)을 지었다.
청도(淸道)에서 이사하여 홍주(洪州) 녹양면 운남동으로 옮겨 살았다. 이렇게 남쪽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므로 그 재(齋)의 이름을 남호(南湖)라 불렀다. 이미 사화(士禍)를 격은 뒤라서 사화를 깊이 조심하여 그 문집(文集)을 모두 불태워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는다.
세조(世祖) 서기 1457년 3월 14일 향년 45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홍주 화성산(華城山) 갑좌(甲坐)에 모시고 갈명(碣銘: 비석에 새긴 글)은 우의정(右議政) 김안로가 찬(撰)하였고 사인(舍人: 정4품) 어영준(魚泳濬)이 썼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황주변씨(黃州邊氏)로 부친은 사헌부장령(掌令: 정4품)을 지낸 변우정(邊于貞)이고 기일은 8월 19일이다.
또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부친은 이조판서(정2품)을 지낸 문양공(文良公) 홍여방(洪汝方)이고 기일은 정월 23일이다. 묘는 동원(同原) 건좌(乾坐)이다. 여러 번 병란(兵亂)을 겪어 묘를 수호하지 못하여 7대손(代孫)되는 낙은공(樂隱公) 우하(遇河)가 화성산에 올라가 고분(古墳)들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냈다.」
2. 7세(世) : 한손(漢孫)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로 다른 이름으로는 한유(漢裕), 자(字)는 두운(斗雲), 호(號)는 운천(雲川)이다. 김한손(金漢孫)은 서기 1480년 출생하였고, 단종(端宗) 서기 1453년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찰방(察訪: 종6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堂下官)) 행(行) 종성부사(鍾城府使: 종3품)를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7세(世) : 춘손(春孫)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로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그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임술보(壬戌譜)에는 「자(字)는 백인(伯仁)이며 탁영선생의 3형제와 같이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업에 대성(大成)하여 명성(名聲)이 높았으나 세정(世情)을 현찰(賢察)하고 그 명리(名利)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7세(世) : 이손(駬孫)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로 천자(天姿: 타고난 용모)가 수미(粹美: 순수하게 아름다움)하고 학문이 깊으며, 15세 때 종형(從兄)인 탁영선생을 따라 김종직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지도군수(智道郡守: 종4품)를 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당하여 정처 없이 표박(漂迫: 떠돌아다님)하다가 신안군 지도면 자포동에 둔적(遁跡: 자취를 숨김)하여 후진(後進)교육에 힘썼다. 후세인(後世人)이 연계(蓮溪) 위에 사당을 짓고 연계사(蓮溪祠)라 하여 봉향(奉享)해 오고 있다.
7세(世) : 숙손(驌孫)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로 자(字)는 영운(英雲)이며 호(號)는 죽포(竹圃)이다. 음사(蔭仕: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부(祖父)의 공으로 얻는 벼슬) 통덕랑(通德郞: 정5품)을 지냈으며, 성품이 순수하고 효도하며 본래 어질어서 증자(曾子: 공자(孔子)의 제자)의 독실한 효성(孝誠)과 같고, 왕상(王祥: 진(晋)나라 효자)과 같이 하였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을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호남(湖南)에 귀양 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본가(本家)에 돌아와 덕(德)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7세(世) : 한석(漢碩)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로 처음 이름은 익유(益裕)이며 참봉(參奉)을 지냈다. 기일은 10월 10일이다.
배위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기일은 3월 7일이고, 묘는 선영하(先塋下)에 쌍분(雙墳)이다.
7세(世) : 귀손(貴孫)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이다.
7세(世) : 겸손(謙孫)
한림공(翰林公) 김용(金勇)의 아들이다.
3. 8세(世) : 대령(大齡)
7세(世) 김한손(金漢孫)의 아들이며, 김대형(金大馨)의 형(兄)으로 자(字)는 천로(天老)이고 통덕랑(通德郞: 정5품)을 지냈다. 중종(中宗) 서기 1513년에 별세 하였고, 묘는 경산(慶山) 동면 범동(凡洞)이다. 배위는 대구서씨(大邱徐氏)로 부친은 서식(徐寔)이며 묘는 쌍분이다.
8세(世) : 대형(大馨)
7세(世) 김한손(金漢孫)의 아들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응형(應馨)이며 자(字)는 사도(思道), 호(號)는 수재(修齋)이다. 승지(承旨: 정3품)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위는 의인(宜人: 6품관 아내의 봉작)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묘는 부친 묘 오른쪽에 쌍분이다.
4. 9세(世) : 옥(鈺)
8세(世) 김대형(金大馨)의 아들로 다른 이름은 복원(福遠)이며 자(字)는 겸수(兼壽)이고 호(號)는 망미당(望美堂)이다. 성화(成火) 원년(元年) 서기 1465년 12월 14일에 출생하였고, 성종(成宗) 경자(更子)년 서기 1480년에 등제(登第)하였고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행(行) 제주목사(濟州牧使: 정3품)와 고양군수(高陽郡守: 종4품)를 지냈다.
서기 1543년 9월 19일에 향년 79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호조판서(戶曹判書: 종2품)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친은 좌랑(佐郞)을 지낸 송문오(宋文吾)이고, 조부(祖父)는 군수를 지낸 송형림(宋炯林), 외조부는 현감(縣監)을 지낸 전주 이담령(李聃齡)이다.
9세(世) : 건(鍵)
8세(世) 김대형(金大馨)의 아들로 다른 이름은 기원(琪遠)이며, 자(字)는 조원(祚遠)이고 세조(世祖) 정해(丁亥)년 서기 1467년 9월 26일에 출생하였다. 성종(成宗) 서기 1486년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서기 1532년 8월 13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선영하(先塋下) 임좌(壬坐)이다. 배위는 수원백씨(水原白氏)로 기일은 10월 17일이고 부친은 백승옥(白勝玉)이다.
9세(世) : 록(錄)
8세(世) 김대형(金大馨)의 아들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형원(亨遠)이며 자(字)는 영윤(永允)이다.
9세(世) : 랑(鋃)
8세(世) 김대형(金大馨)의 아들로 다른 이름으로는 양원(養遠)이며 자(字)는 양여(養汝)이다. 서기 1473년 7월 19일에 출생하여 음사(蔭仕)로 성균관주부(主簿: 종6품)를 지냈고, 서기 1540년 3월 4일에 별세하였다.
배위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기일은 1월 3일이고 부친은 박봉복(朴奉福)이다.
5. 10세(世) : 축(軸)
9세(世) 김옥(金鈺)의 아들로 초명(初名)은 정수(正壽), 자(字)는 고언(高彦), 호(號)는 남강(南江), 남계(南溪), 남간(南澗) 등 여러 기록이 있다.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관)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내냈다. 아우인 선교랑(宣敎郞) 김헌(金軒)과 함께 용만(龍灣: 평안도 의주)에 까지 임금을 수행하여 갔으며 많은 위적(偉績)을 남겼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카 두남(斗南), 지남(志南)과 더불어 의병(義兵) 수백 명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에 이르러 여러 차례 큰 공훈(功勳)을 세우고 분전고투(奮戰苦鬪)하다가 40여 일 만인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순절(殉節)하니 80세였다. 선조(宣祖) 서기 1605년에 종손(從孫) 김효립(金孝立)이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하사받았고, 순조(純祖) 서기 1830년에 남산사(南山祠)에 배향되었으며 충신정문(忠臣旌門)이 건립되었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영의정(領議政) 박규수(朴珪壽)가 찬(撰)하였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참봉(參奉) 박동무(朴東茂)의 딸이며, 7월 17일 공(公)이 아들. 조카와 함께 순절하였다는 비보(悲報)를 접하고 하종(下從: 죽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며느리 나씨(羅氏)도 같은 날 자결(自決)하였다. 갑술(甲戌)년에 열녀(烈女)로서 그 사실이 어사각(御賜閣: 전북 고창에 있는 사당으로 6충(忠) 1효(孝) 4열(烈)을 모심)에 게판(揭板)되었고 열녀정문(烈女旌門)이 세워졌다.
○ 6충(六忠): 축(軸), 기남(起南), 두남(斗南), 지남(志南),
흥립(興立), 덕립(德立))
○ 1효(一孝): 효립(孝立)
○ 4열(四烈): 축(軸)의 배(配) 반남박씨(潘南朴氏),
두남(斗南)의 배(配) 영암박씨(靈岩朴氏),
지남(志南)의 배(配) 광산김씨(光山金氏),
흥립(興立)의 배(配)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字)는 고언(高彦)이다. 정덕(正德) 9년 서기 1514년 10월 17일에 출생하였고 임진년 서기 1592년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선무공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여덟 사람에게 내린 공훈)이 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승정원좌승지(左承旨)로 아우인 선교랑 김헌(金軒)과 더불어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호가(扈駕: 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어 좇음)하여 많은 위적을 남기었으며, 조카인 두남(斗南)과 함께 임지(任地)에 가서 여러 번 큰 공(功)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는데 그날이 서기 1593년 6월 29일이다.
종손(從孫) 효립(孝立)이 그 공적을 진술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왕이 단서철권(丹書鐵券: 공신에게 왕이 붉은 글씨로 공훈을 기록하여 내려주는 문서, 일종의 훈장)을 내려주었다. 이런 사실이 무장읍지(茂長邑誌)에 실려 있다. 초혼장(招魂葬: 순직한 혼령을 위로하는 장례)으로 무장 남산(南山) 곤좌(坤坐)에 안치하였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부친은 참봉(參奉)을 지낸 박동무(朴東茂)이며 묘는 쌍분이다. 」
10세(世) : 헌(軒)
9세(世) 김옥(金鈺)의 아들로 승지공(承旨公) 김축(金軸)의 아우이다. 출천효자(出天孝子)로 여묘(廬墓) 6년을 하였으며 홍주(洪州)에서 무장(茂長)으로 이주(移住)하였다. 벼슬은 선교랑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형(兄) 승지공과 더불어 호가용만(扈駕龍灣)하였고 귀향(歸鄕)하던 중에 길을 가로막는 왜적(倭敵) 수백 명과 격전(激戰)하여 크게 이겼으나, 수십 군데의 창상(創傷)을 입고 겨우 귀향하였다. 불구의 몸이 되어 남산에 단(壇)을 쌓고 국운(國運)을 빌던 중 서기 1593년 7월 18일 형(兄) 승지공과 두 아들이 순국(殉國)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가 7월 20일 단 아래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선조(宣祖) 때 손자(孫子) 효립(孝立)이 조정에 알려서 참원종훈(參原從勳)하고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리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좌찬성(左贊成: 종1품)에 가증되었고 갑술(甲戌)년에 어사각(御賜閣)에 삼강행실을 게판(揭板)하고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초휘는 인수(仁壽), 자(字)는 사함(士涵)이고 호(號)는 남산정(南山亭)이다. 중종(中宗) 12년 서기 1517년 11월 5일에 출생하여 벼슬은 선교랑(宣敎郞: 종2품) 호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공(公)은 충효(忠孝)가 천출(天出: 타고난 천성(天性))하였고 여묘(廬墓)를 6년 하였으며, 홍주(洪州)에서 무장(茂長)으로 이거(移居)하였다.
백형(伯兄)인 승지공(承旨公)과 함께 호가용만(扈駕龍灣)하여 많은 위적을 남겼고, 곧 본도(本道)에 돌아온 후 승지공은 자질(子姪)과 함께 진양(晋陽)의 임지(任地)에서 출전(出戰)하므로 공(公)은 집 뒤에 있는 남산 위에 단(壇)을 쌓고 밤낮으로 국운(國運)을 축천(祝天)하였는데, 서기 1593년 7월 18일 백형인 승지공이 두 아들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가 단(壇) 아래에서 순절하였다.
서기 1605년에 손자(孫子) 경립(敬立: 효립(孝立)의 아우)이 조정에 진정하여 원종훈(原從勳)이 내리고 아울러 단서철권(丹書鐵券)도 내렸다. 그 이듬해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으며 갑술(甲戌)년에 어사각(御賜閣)에 삼강행실이 게판(揭板)되고 병오(丙午)년에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들을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를 세우도록 명이 내렸다. 순조(純祖) 서기 1830년에 남산사(南山祠)를 부조묘(不祧廟: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을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내리는 왕명)로 제향(祭享)토록 어명이 내렸다. 묘는 남산동 승지공의 묘 왼쪽 미좌(未坐)이고 신도비명은 대제학(大提學) 서명빈(徐命彬)이 찬(撰)하였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로 부친은 호군(護軍: 정4품)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한세좌(韓世佐)이고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한건(韓健), 증조부는 좌리공신(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판돈영부사(判敦領府事)를 지낸 한치인(韓致仁)이고, 외조부는 신순정(辛舜鼎)이다, 기일은 4월 19일이고 묘는 남산동 백호(白虎) 병좌(丙坐)이다.
계배위(繼配位)는 정부인 함안조씨(咸安趙氏)로 부친은 판관(判官: 종5품)을 지낸 조세웅(趙世雄)이고, 조부는 좌통예(左通禮: 정3품)를 지낸 조경빈(趙璟彬)이고, 증조부는 진사(進士)를 지낸 조성철(趙晟哲), 외조부는 좌리공신 우의정 상평공(喪平公) 윤사흔(尹士昕)이다. 부군(府君) 형제가 자질(子姪)과 함께 순절하였을 때 정부인은 42세였는데 식음(食飮)을 불납(不納)하고 7일 후에 복절(伏節: 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킴)하였고, 총부(冢婦: 맏며느리) 박씨(朴氏)도 역시 같은 날 취의(就義: 의를 위하여 죽음)하니 그 날이 7월 27일이다. 그러므로 일문(一門)의 삼강행실이 어사각(御賜閣)에 게판(揭板)되고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어명(御命)이 내려졌으며, 묘는 부군(府君) 묘아래 미좌(未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