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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수학자. 핀되 출생. 아버지는 목사였고 검소한 생활환경에서 자랐다. 1815년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의 중학교에 입학, 18년 M. 홀름보에게 배웠다. 23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을 졸업했다. 24년 《일반오차방정식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 대수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자비로 출판하였다. 차수(次數)가 주어진 방정식에서 대수적으로 풀릴 수 있는 것을 모두 찾아내는 것과 주어진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릴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2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1799년 독일의 K.F. 가우스가 <모든 대수방정식은 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아벨의 <일반오차방정식은 풀리지 않는다>라는 표제는 무시당하게 되었다. 아벨은 1825년에 독일로 유학했으나 오차방정식의 논문을 묵살한 가우스가 있는 괴팅겐을 피하여 베를린으로 갔다. 이곳에서 A.L. 크렐레에게 인정받았다. 크렐레는 수학자이면서도 정부 요직에 있어, 젊은 수학자에게 살롱을 제공하였으므로 아벨도 이 살롱에 모이는 수학자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아벨은 타원적분이 정의하는 함수의 역함수를 생각해서 이것이 이중주기를 가진다는 것을 제시하고 타원함수를 도입하였으므로 타원함수의 연구가 A.M. 르장드르를 만나기 위해 26년 파리로 갔다. 파리과학아카데미에 이것을 확장한 논문(뒤에 파리논문이라고 한다)을 제출하였다. 심사를 위촉받은 사람은 A.L. 코시였는데 그는 이 논문을 책상서랍에 넣어 두고 잊어버렸다. 27년 5월 20일 귀국하여 빈곤과 싸우면서 타원함수와 대수방정식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대수방정식의 연구에서 가환군(可換群)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뒷날 처음 도입한 그의 이름을 따서 아벨군이라고도 한다. 아벨은 보궐강의직을 감수하면서 타원함수이론을 계속 발전시킴으로써 수학분야에서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28년 9월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플로란드로 약혼녀를 방문한 크리스마스에 병으로 쓰러졌다. 29년 1월 6일 크렐레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 파리논문의 개요를 적었고, 크렐레는 이것을 발표하였다. 파리아카데미에서는 서둘러 논문을 찾아내어 아카데미상 수여를 결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직위를 마련하여 노르웨이-스웨덴왕에 전하였고, 동시에 크렐레의 주선으로 베를린에서도 교수직이 배정되었으나, 이미 그가 사망한 뒤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