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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배경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던김지회(중위),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노당 프락치들에 의해 주도된 반란,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 지역에서 군, 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 흔히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알려진 그 반란의 핵심은 여수, 순천에 주둔중인 육군 제 14 연대로서, 군부의 악랄한 대민책임 떠넘기기 잔꾀에서 발상되어, 오랜세월을 여수, 순천의 시민들이 공산폭동을 일으킨 듯 한 뉘앙스를 풍기며, 사건의 실체가 호도되어왔다. 그 사건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폭동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22일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군진압부대(임시함대)는 제반 여건과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했을 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그리하여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에서는 그 작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리게된다. "만약에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병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전장인 육지를 해상으로부터 봉쇄하고, 지상에 상륙한 육전부대가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한다면, 전과는 물론, 승리의 결적적인 요인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가정적인 판단과, 실전에서 터득한 교훈에 의거하여 도출된 일부 지휘관 및 참모들의 건설적이고 애군적인 의견과 건의가 그러한 특수부대를 갖는 것이 삼면환해의 조국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식된다.또한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강력한 육전부대보유의 필요성이 절감됨에 따라 마침내 창군기의 해군수뇌부 에서는 결코 쉽지않은 시대적인 여건을 무릅쓰고 해병대의 창설을 준비한다.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육군 14 연대의 반란을 통해, 권부와, 군부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해군수뇌부의 의지가 더해저 준비에 박차를 가한 끝에, 드디어 개국이래 단 한번의 전쟁, 전투에서도 패하지 않은 상승불패의 "해병대" 가 탄생되었다.
해병대의 창설을 뒷받침한 법령은 49년 5월 5일에 공포된 대통령령 제88호이다.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1조),[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제2조)창설시 대통령의령에 명시되어 있던 제 1, 제 2조 중 해병대의 임무를 규정한 제 2 조는 6.25 동란중인 1952년 8월 16일에 개정 공포된 대통령령 제 672 호에 의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개정 됨으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전투부대임을 명문화시켰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배경에는 육군 14 연대의 공산반란을 통해 수천명의 시민과, 공무원등이 학살당한 아픔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상 효율적인 해군작전의 필요성이 대두된 시대적, 안보적, 지정학적 당위성을 갖는다.또한, 타군의 헌정질서에 대한 대국민반란을 진압하고, 견제하라는 국민적 염원을 가지고 창설된 해병대가, 5.16 을 통해, 비록 그것이 그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음으로서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서울로 출동하였음은 두고두고 불명예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12.12 사건당시, 전두한과 노태우를 주축으로하는 신 군부의 반란을 진압하여 헌정질서를 수호하지 못한 해병대의 책임은 영원히 면할 수 없을 것이다.전통을 만들어라!해병대가 정식으로 창설되기 이전부터 해군에서는 해병대가 반드시 창설된다는 신념하에, 상륙전의 경험이 있는 안창관소위, 김낙천 소위 등 30여명으로 편성된 창군선발대를 앞으로 해병대의 기지가 될 진해덕산비행장에 파견(1949. 02. 2 1)한바 있다. 파견대장 안창관 소위는 이들 선발대를 중심으로 연병장을 닦고 병사로 사용할 부서진 구 일본군 격납고를 수리하는 등 기초작업에 돌입하였다. 연병장을 닦는등의 일은 비교적 순조로왔으나 그밖의 격납고를 수리하는 일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있는 것 수리하는 일이 그렇게 희자될 만큼 어려웠으면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일에 명령 한마디로 임무 달성해야 했던 병사들의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동년 3월 28일 해군에서 전입된 장교 및 하사관과 신병 등 총 "380" 명 으로서 보잘 것 없는 여건 속에서 열과 성의로써 새 역사의 창조와 조국수호의 정예강군육성을 위해 온갖 애로와 고난을 극복하면서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드디어 1949년 4월 15일 대망의 해병대가 창설 되었다. 이날 초대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은 "해병은 단결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 유사시에 대비할 최강부대를 이루도록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는 훈시로써 장병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 하는 역사를 창조할 것" 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한국해병대는 국군중 최강부대로 육성하겠다는 신념으로 해병대의 질적, 양적 확충을 도모하였다. 이때의 우리 해병대는 사령부요원 15명, 근무중대 70명, 정보대 10명, 2개소총중대 270명 등 380명 으로 편성되었고, 사병으로서는 해군신병 13기중에서 인수한 해병대 신병 1기생 (303명)이 그 근간이었다. 그 후(8.1) 해군신병 14기중에서 인수한 해병대 신병 2기생(440명)이 새로운 해병대 가족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훈련방식은 일본의 해군과 육전대식, 그리고 미군의 방식이 혼합된 상태였고, 장비는 모두 일본 99식 소총이었으며, M1소총은 교육용으로 단 1정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천자봉까지 완전무장하여 휴식없이 구보로 정신력과 인내력을 배양하였고, 단체훈련과 경기 등으로 심신을 연마해 나갔다.이러한 가운데 우수한 해병대장교의 육성을 위해 사관후보생 30명을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을 이수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곧 해간1기생이다. 이렇게 해병대가 체제를 갖추게 됨으로써 동년 8월 15일에 거행된 광복4주년기념식에 우리 해병대가 참가하여 서울시민들이 우리 나라에도 해병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49년 8월 1일 해병대 신병 제2기 440명을 해군에서 인수하고 장교 및 하사관 수명이 전보되어 해병대는 2개대대 규모로 확충되었다. 창설초기에 있어서 우리 해병대에게 어울리는 독특한 노래가 필요하다는 간부들의 의견이 대두되어 당시의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가제정위원회에서 채택된 것이 "나가자 해병대"이다. 나라로 치면 "애국가" 와 도 같은 해병대의 "성가" 인 "나가자 해병대" 는 신영철해병(예비역 소령)의 작사초고를 약간 수정하고 김형래씨(당시 경찰악대장)가 작곡하였으며, 다시 이병걸씨(해군군악대장)가 군악으로 편곡한 것이다. 진주에 주둔했던 해병대.여순반란사건 이래 잔여공비들이 지리산에 숨어들어 유격전을 벌이고, 이지역 일대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어 민심이 극도로 동요되고 있었고, 더욱 진주는 마산, 진해, 부산을 연결하는 중요 도시였다. 이에 따라 1949년 8월 26일 대구에서 신현준 사령관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준장)이 맺 은 협정에 의해 해병대 일부병력이 진주에 파견되어 공비소탕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년 8월 29일 김성은 중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1개대대를 편성하여 진주(사범학교 기숙사) 에 본부를 두고 진주, 창녕 및 함안 일대에서 준동하는 공비를 소탕하게 되었다. 진주 주둔시 해병대의 출사표어는 [백성없이는 전투도 없다]라는 것으로서 일체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노력을경주했다. 우리 해병대가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를 소탕함에 있어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내렸다. 첫째, 공비조직 이상의 세포조직을 갖출 것, 둘째, 군.경.민 협동면에서 해병대가 선봉이 될 것, 셋째, 공비들의 허울좋은 선전에 빠지지 않는 굳은 신념을 가질 것 등이었다. 그리고 선무공작조를 조직하여 취약지역을 순회하는 한편, 나머지 시간을 맹렬한 훈련으로 충당하였다. 이같은 우리 해병대의 모습을 목격한 주민들은 해병대를 믿으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진주를 시찰했던 정일권 준장과 하우스맨 미 해병대고문(소령)등이 직접 확인하여 국방부장관 및 재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중장 등에게 정식 보고한 바 있다. 이와같이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시절, 우리 해병대는 공비토벌과 함께 자체의 정신무장, 민심수습, 선무공작 및 전술 전기연마 등에 힘써 앞으로의 발전에 대비해 나갔던 것이다. 해병대는 동년 12월 26일 육군 제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해병대 제주도 주둔. 해병대가 진주에서 공비를 소탕하다가 제주도로 이동한 것은 1949년 12월 28일이었다. 우리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면서 수행한 임무는, 첫째, 우리 해병대 자체의 정신적 및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고, 둘째, 4.3사건으로 인해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제주도민에게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그들은 생활면에서 안정되도록 인도하고, 셋째, 한라산을 근거지로 삼고 준동하는 공비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특히 도민을 계몽하여 공비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도록 힘쓰는 한편, 군의관으로 하여금 무의촌을 순회 진료하며,도민의 도로보수 공사를 돕는 등 도민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에 노력하였다. 또한 제주도에 여성이 많다는 점에 유념하여 여성을 대하는 태도면에서 극히 신중을 기하여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것을 강조하는 사령관의 경고를 준수함으로써 도민의 해병대에 대한 신뢰심을 높였다. (이 시기에 해병대가 제주도에서 쌓은 신뢰는 우리나라 해병사에 제주도민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설명이 불가능 할 정도로 깊은 연관을 맺게된다. 이른바, 4.3 사건으로 알려진 "제주도 공비토벌작전" 에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진압군 으로 출동한 육군 9 연대, 2연대, 경찰, 서북청년단(공산주의를 반대하여 북에서 월남한 청년들 위주로 결성된 단체) 등으로부터 무차별적 학살을 당한끝에 정부군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있었 시기였다. 바로 이런때에 적절한 대민선무활동과, 복구지원등으로 제주도민의 신뢰를 얻게된 해병대는 비로소 제주에서 양적, 질적 팽창을 시작하게된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제주대학교의 ROTC 학사장교들이 해병대로 배속되고, 도민들 또한 기꺼이 아들들을 해병대에 "징집" 대원으로 보내고 있다. 그러나, 해병대는 향후 전쟁을 치룬 대원들의 열기와, 젊은 혈기가 엉뚱하게도, 국민과, 타군전우들에게 표출됨 으로서 제주에서의 교훈을 살리지 못했다. ) 제주도 주둔 해병대는 제주읍과 모슬포에 배치하고 모슬포부대는 제주도일대의 경비에 임하였으며 모슬포부대의 제1대대는 북제주군 일대를 담당하고 제2대대는 남제주군 일대를 담당하였다. 해병대의 제주 주둔시 가장 큰 성과는 주둔 반년동안에 실시한 정신훈련이 지금까지 해병대의 정신훈련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병대의 수색대원들은 특수훈련을 통하여 한라산의 험산 심곡에서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육군 제9연대와 제2연대, 경찰, 서북청년단등이 토벌하지 못한 공비들을 모두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제주도 주둔시의 더욱 큰 과제는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6.25를 맞게되어 조국의 위기를 해병대의 피와 땀으로 구출해야한다는 사명감이었다. 해병대는 제주도 해안선의 철저한 경비와 도내 각 기관내의 유기적인 협조로 전투력을 통합하는 한편 도내치안을 유지하고 해상감시 및 경계를 철저히 하며, 제주도로 상륙하는 적을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국내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 해병대는 적의 남침을 저지할 임무를 띄고 중부전선에 참가하기 위하여 우선 3개 중대가 1950년 7월 15일 제주항을 떠나 군산 으로 이동했다. 한편 제주도민들은 해병대를 신뢰하여 제주도의 많은 청년들이 해병대에 입대함으로써 신병 3,000여명 (3,4기생)을 훈련시켜 1개 연대와 독립 5대대로 편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과 "서울탈환작전" 을 위시한 역전의 용맹을 또한, 그 전쟁은 다시한번 우리민족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비평화적인 방법으로,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자주와, 발전을 저해케한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이를 전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동란발발 초기 국군지휘부의 허접하기 그지없는 "패주작전" 과 병사들의 "살신보국" 으로 나눌 수 있다. 국군지휘부에서 자신들의 무능을 호도키 위해 내세우는 동란초기 국군의 대처와 방어는 한마디로 말해서 "육탄십용사" 로 대변된다.나라의 안보를 튼튼이 하지 못하고, 국제정세의 흐름과, 주적의 동향파악을 게을리한 군 지휘부와 권부가 내세우고, 구차하게 들이댄 공과가 바로 "육탄십용사" 인 것이다. 병사들에게는 더욱 많은 피를 흘려 적을 막을 것을 요구하고, 자신들은 패주의 대열에서 앞을 다투어 ?겨 내려가다가 급기야는 국군총사령관인 "채 모" 장성이 인민군에게 사살당하는 개망신까지 당 한다. 혹자는 6.25 동란이 불의의 기습으로 인한, 계획되고, 짜여진 각본에 의해 이루어진 불법침략 이이었다는 이유로 초기의 패주와, 무방비를 핑계대고, 구차한 변명을 하지만, 이것을 국민과, 병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휘부와, 권부의 무능과, 무기력과, 직무유기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라며 개나발을 불어내던 군의 지휘부와, 권부는 새벽의 총소리와 함께 병사들과 국민들을 적 앞에 팽개치고 개떼처럼 남으로, 남으로 도망쳤다. 이천년에 걸친 "백성방패막이" 가 재현되었던 것이다.
해병대의 전쟁
진동리 전투 마산 서남방의 관문 지대를 형성하는 이른바 3전지구 가운데 마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동리지구에 위기가 고조된 시기는 낙동강 공방전이 바야흐로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8월상순경 이었다.이 지역으로 침공했던 적은 마산을 공략하기 위해 호남지구를 석권한 다음 진주와 사천 및 고성지구로 기동한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북괴군 6사단 이었으며, 이 지역에 투입된 아군 부대는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25사단과 긴급 배속된 미 제24사단의 1개 연대와 미 해병 제5연대(1여단), 그리고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와 육군의 민기석 부대 및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 등 이었다.진동리지구에 투입 된 미 제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8월 7일부터 진주를 탈환하기 위해, 거듭된 패주를 멈추고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다.마산지구가 적에게 넘어가 부산이 포위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감행했던 그 반격 작전 기간중 8월 1일 새벽고사리 지구에서 북괴군 6사단을 공격하여 거둔 혁혁한 전공이 바로 진동리전투 이다. 이 전투는 무기력하게 패주를 거듭하여, 국민들의 전쟁수행의지를 꺽이게했던 두달간의 패전에서 벗어나, 국군 최초로 침략해온 적과 맞서 승리한 의미있는 전투이다. 해병대의 승전소식을 부산에서 접한 국민들은 "승리" 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학도병등, 이른바 "전통적인 의미의 "의병" 지원이 줄을 잇게된다. 8월 6일 부로 국군최초의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린 김성은부대 장병들은 야반과 수리봉 (557) 서북산(739)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고, 8월 12일 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목표를 점령하는 등 부여된 공격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빛내었다. 동년, 동월 12일까지 계속된 미육군 킨 특수부대의 반격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사동에서 한국군 제3사단이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북괴군 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의 박진에서, 북괴군 3사단은 국군 3사단을 괴멸시키고 대구 서북방에서 낙동강을 건너오는 등 낙동강전선에 절박한 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미8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8월 13일을 기해 방어작전으로 전환 되고 말았다.그와 같은 조처는 미8군의 기동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미해병 제5연대를 영산지구에 투입하고, 배속된 한국해병대를 포함한 한국군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등 병력의 전용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시작에 불과하다! 미 8군 "킨" 소장예하 부대의 반격작전이 방어작전으로 전환된지 3일 후인 8월 16일에, 한국군에 대한 연합군의 불신과,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며, 우리 국군이 아직 건재함을 알리는 희대의 "대승" 을 거둔다. 그 동안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던 경남, 통영읍에 적이 돌입하자 해군본부에서는 바로 그 무렵 킨 부대 작전에 참가한 후 진해에 집결해 있던 해병대 김성은 부대에게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에서 거제도를 노릴것으로 판단되는 적을 격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통영을 침공했던 적은 킨 부대의 반격작전 때 미 해병5연대에 의해 점령 당하고있던 고성 지구로부터 내도한 북괴군 7사단 이었다.그 명령에 따라 2척의 해군 LST에 병력을 분승시켜 그날 밤 22시경 진해 군항을 출항했던 김성은 부대는 그 이튼날 새벽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지도동쪽 기슭에 이르자, 그 동안 부대장 김성은이 세워놓은 복안에 따라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먼저 2개조의 정찰대를 운용하여 통영시가지쪽과 거제도 서해안쪽의 적정을 정찰한뒤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작전명령의 변경을 요청했다. 김성은이 지휘하는 해병부대가 작명의 변경을 요청했던 이유는 불과 백여명의 적은 병력으로 거제도의 긴 서해안을 수비하는 소극적이고 불안한 대책보다는 차라리 당시 통영 해상을 초계중에 있던 P.C-703호 (함장 이성호 중령)를 비롯한 수 척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통영읍 동북단의 장평리에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이른바, 공세적인 방어작전으로의 전환 요청인, 지속적 작명변경요구에, 자체적인 상륙작전의 경험이 없으며, 연합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음을 들어 거부하는 해군본부를 설득하였다. 상세한 지형정찰결과와, 적동향보고, 합리적인 기습상륙작전계획등을 검토한 해군본부의 허락을 득한 뒤 드디어 "대한민국 해병대" 최초의 "단독상륙작전" 이자, 6.25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통영상륙작전" 이 시작되었다. 김성은의 해병부대는 이른 새벽에 통영 시가지를 감제하는 시가지도쪽의 망일봉(▲148)을 선제 점령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통영읍의 진입 길목인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인민군 7사단의 퇴로와 적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총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통영에 돌입한 적 7사단을 독안에 든 쥐처럼 완벽하게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이것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전계획을 끈질기게 요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작명의 변경을 승인받게 된 김성은 부대장은 P.C-703호와 소해정 504, 901, 320, 307호 등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는 가운데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하였다. 계획대로 이튼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선제 점령하여 한발 늣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인민군 7사단 예하대대를 요격하여 전멸시키고 승기를 잡게 된다. 같은날 오후 해군통제부로 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을 지원받고, 그 다음날(19일)미명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그 통영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이것이 바로 두달여의 패주를 끝내고, 대 반격의 선봉에 나선 우리 해병대가 실시한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었다. 통영시가지를 탈환한 김성은 해병부대는 9월 10일경까지 적 후속 부대와 원문고개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일부 병력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항으로 떠나고 본대는 해군방위부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9월 22일 김성은 부대장의 지휘하에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한다. 당시 이 "통영상륙작전" 은 국내,외의 신문등에 대서특필되어 "한국군이 승리하기 시작했다" 는 신뢰와, 믿음을 주게했고, 신생 한국해병대의 용맹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 이른바 "해병대 6 대 작전" 으로 불리우는 신화의 시작이었다.신현준 초대 사령관과 함께 우리해병사에 영원히 그 이름이 기록될 김성은 장군은 후일 국방부장관이 되어 월남전을 치루는 등 "한국군의 주요인물" 이 된다.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내었소." 이 말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이루어진 "통영상륙작전" 의 대담하고, 용맹한 해병대의 승리에 경탄을 금치 못한 외신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워싱턴 포스트 등의 외신 기자들은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 "귀신잡는 한국 해병대" 라는 찬사를 썼다. In commending of the brilliant victory in the operation, foreign reporters gave us a praise saying "The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무적해병대의 이름을 온세계에 널리 전파한 "통영상륙작전""TONG-YENG" Area Landing Operation, widely know to the world as a symbol of invincible Marine Crops.(Aug. 17. 1950) 오늘날, 해병대를 일컬어 "귀신잡는 해병대" 라 칭하는 것은 해병스스로 칭한 것이 아니다."다만, 해병대원들은 모든 것을 내걸고 용맹하게 싸웠을 뿐이다" 인천상륙작전1950. 9. 15 유엔군 제7합동기동부대에 의해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총 7만여명의 병력과 261척 (미국 225,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네덜란드 1, 한국 15)의 함정이 참가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적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 수세에서 공세로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15척의 함정 해병대 3개대대 및 육군 제 17연대가 참가하였다.1950년 9월 15일에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됨으로써 90일간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시민을 해방시켰다.한국군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진동리작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한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장병 1계급특진이란 영예를 얻은 데 이어, 8월 17일엔 통영상륙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던 적 1개대대를 섬멸한 나머지 미국의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로부터 '귀신잡는 해병대'(They might capture even Devil)이란 찬사를 얻은바있다. 오늘날 한국해병대는 해병대를 가진 세계 20여개국 가운데서 3번째로 많은 2만 7천여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아이러니하게도 한국해병대는 15란 숫자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1948년 4월 15일에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창설되어 1950년 9월 15일에는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적화통일을 망쳤다고 한 죽은 김일성의 생일이 바로 4월 15일이기도 하다. 한국해병대는 '한번 해병대원이면 영원한 해병대원'(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이란 2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미해병대의 좌우명을 스스로의 것으로 수용하여 탄생한 이래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5.16군사반란, 그리고 사령부해체 해군편입, 12.12군사반란, 사령부 분할 등 영욕의 파노라마를 그리면서 성장해 왔다. 북한이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두려워 했던 두가지는 한, 미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과 미공군의 항공폭격이었다. 이 두가지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김일성은 휴전후 최우선 과제로 공군력의 질적및 양적 증강을 강력하게 추진, 단시간 내에 대남우위를 확보 견지하게 되었으며, 당시 전무했던 상륙군을 창설, 2개여단 규모로 편성하여 해상침투 비정규전부대로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해병대를 의식한 나머지 대상륙작전능력을 강화코자 현재 지상군의 약 1/3을 후방의 상륙가능 해안을 중심으로 배치해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천상륙작전을 회고하면서 한국해병대와 관련하여 수륙양면작전의 전략적 진가를 당시 작전을 통해 재음미해 보기로 한다.
작전의 개요
(1) 작전배경 함정 약 270척에 7만여명의 병력으로 실시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형세를 일변시켰다. 그리하여 이 작전을 계획하고 집행한 맥아더 원수는 일약 세기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사상 유례없는 완벽하고 담대한 전략전인 강타였다'고 격찬하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그런데 한국전쟁 당초에는 미국과 국제연합의 전쟁목적은 한국에 침공한 북한 공산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로 전쟁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무런 정치·외교적 대응 노력도 없이 전쟁목적을 확대 변경하여 38도선을 돌파하고 말았던 것이다.당시 미국정부의 전쟁지도방향은 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이와같은 예측하지 못했던 지역에서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면전쟁 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한국전쟁에 미국이 지나치게 깊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미국의 전력을 소모하여 여타의 전투, 특히 유럽방면에서 똑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대응능력을 상실하게 될지 모르는 바, 이에 유의하면서 유엔에 가입한 우호국들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데에 일관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목적은 전쟁 전 상태의 회복에 있으므로 전쟁의 수단과 지역을 한정해 놓고 싸웠던 제한전쟁이었다.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전쟁목적을 확대하여 군사적및 정치적으로 완전 승리를 획득하려고 했던가?한국전쟁은 정치,군사적으로 특이한 전쟁으로서 아직 해명되지 않은 문제가 많이 있으니 전쟁목적의 변경도 이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아뭏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이 전쟁목적 변경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맥아더원수가 한국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적의 후방에 상륙할 것을 생각한 것은 그의 전쟁경험으로 봐 당연한예측이었다. 제2차대전중 필리핀의 바탄전투에서 '나는 돌아올 것이다'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난 그가 수륙양면 작전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루손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점령했던 태평양의 여러섬들을 차례로 탈환하였던 것이다.제해권은 부대이동을 보장하고 , 융통성있는 기동작전은 항시 귀중한 보상과 신속한 결과를 가져오며, 상륙작전으로 적의 후방으로 우회하여 병참선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란 것이 그의 일관된 태평양전쟁 경험에서 얻은 신념이었다. 한국전쟁이 1주일쯤 지났을 때, 맥아더는 전선을 시찰하면서 그의 참모장 알몬드 장군에게 서울을 연하는 적의 병참선 중앙부를 타격하기 위하여 상륙작전 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23일에 극동군사령부 전략계획단(TOSDOG)의 라이트장군은 9월 중순을 상륙목표일로 잡고, 상륙가능 해안으로 서해안 인천, 서해안 군산, 그리고 동해안 주문진의 3개 지점을 선정하여 맥아더에게 보고하였다.여러 참모들과 예하지휘관들 그리고 워싱턴의 군사 고위층이 강력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8월 23일 동경 제일생명빌딩에 있는 맥아더원수의 사무실에서 열린 최종회의에서 그는 9월 중순경 인천에 상륙한다는 작전개념을 확고히 결심하게 되었다.당시 70세의 노장인 그는 무려 45분간에 걸쳐 차분한 목소리로 모든 참석자들을 설득시키고 '우리는 인천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리자, 더 이상 아무도 반대하는 자가 없이 회의장은 숙연해졌다.
(2) 상륙일시및 장소선정 과정 그러면 맥아더가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전략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첫째, 공산군에게 양면 전쟁을 강요하고 둘째, 공산군의 병참선을 차단하여 보급을 곤란케 하며 셋째, 그들의 국가지휘및 통신체계를 양단하고, 넷째, 한반도에서 가장 큰 항구를 탈취하게 되며, 마지막으로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공산군에게 심리적·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또한 이와 관련하여 상륙일자를 9월 15일로 택함에 있어서도 맥아더의 자신만만한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상륙가능한 만조때를 9월 15일, 10월 11일, 그리고 11월 2일의 3일 중 택일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맥아더가 첫번째 대안인 9월 15일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부산교두보를 고수하는 유엔군 장병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38도선 북진시는 동계작전을 회피해야 한다는 두가지 중요하 고려요소가 작용했던 것이다. 만약 이 시기보다 1개월 또는 1개월반쯤 늦어지는 경우, 적의 해안방어력은 더욱 완강해 질 것이므로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질지도 모른다고 예견하였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10월 중순은 농작물수확기이므로 농민들이 실지를 회복하여 조기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국민사기를 위해 좋을 것으로 판단하였다.그러나 맥아더의 결심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그의 참모와 합동참모본부의 반대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고집을 관철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인천이 상륙지점으로 틀림없고 9월 15일이 좋다는 확신은 주위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반대론자들은 작전에 투입되는 주력전투부대인 미해병 제1사단과 미육군 제7사단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하는데 불충분하며 유사시 증원부대를 부산교두보 안에서나 주일미군으로부터도 차출할 자원이 없기 때문에 곤란할 뿐만 아니라, 함선의 부족으로 수륙양면작전이 최악의 상황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특히 8월 23일의 마지막 회의에 참석한 당시 미해군참모총장 셔만제독은 인천의 평균 간만의 차이가 20.7피트로서 세계에서 가장 심한 곳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 9월 15일은 30피트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조시간(6시 33분)으로부터 2시간 후에는 상륙주정들은 모조리 인천항의 진흙속에 빠지고 해안에 배치되어 있는 공산군의 각종 포화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 것이라고 장황하게 부당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상륙해안의 접근수로를 감제하는 월미도를 사전에 제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전 늦게 월미도의 저항을 무력화시킨다 해도 오후의 만조시간을 고려한다면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야습에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에 충분한 보급을 추진하기 위한 가용시간은 2시간밖에 없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에 덧붙여 미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은 '인천이 작전선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바,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한다 해도 낙동강 방어선 안에 있는 워커장군의 지상군부대와의 연결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산교두보선 내에 있는 미해병여단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뽑아 내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인천보다는 군산에 상륙하는 것이 훨씬 제8군의 공세이전에 유리하다'는 열변을 토하면서 반론을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맥아더는 이러한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실행의 불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한층 더 기습효과를 보장할 수 있음을 뜻한다. 적 지휘관은 이러한 불리한 작전계획을 세울 자가 아무도 없을 것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군산 상륙은 조류나 지형조건으로 봐 안전한 상륙작전이 되겠지만, 적을 포위섬멸하기는 불가능하고, 성공률이 작은 혈투가 되고 말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맥아더는 이와 같은 인천상륙작전의 군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아시아의 공산주의자 섬멸이란 대의명분을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반공전선은 베를린이나 런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워싱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바로 한국의 낙동강에 존재할 따름이다. 바로 이곳 아시아에서 전지구를 정복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분쇄되지 못한다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추방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패한다면, 유럽의 안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운명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기어코 10만인의 생명을 구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맥아더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이 작전의 성공요소는 기습에 달려있다. 작전계획의 비밀은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자연장애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합참본부의 분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작전이 위험한 것은 틀림없으며, 일대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엄숙하게 다짐하였다. 반대론자들은 설득당했으며 맥아더의 계획은 건전하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될 정면공격을 회피하려면 다른 방도가 없음을 재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작전 실시 드디어 상륙개시일은 다가왔다. 맥아더가 예측한 대로 대담하고 정교한 실행을 필요로 했던 이 기동계획은 적에게 완전한 기습효과를 미치게 했던 것이다. 미해병 제 1사단은 9월 15일 새벽부터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익일 오후 늦게 해안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계획한 바와 같이 북한을 양단격파하여 부산교두보를 포위한 적의 병참선을 차단시키고 상륙 10일만에 수도서울을 탈환하였던 것이다.이에 힘입어 유엔군은 9월 16일 0시를 기하여 부산주변의 포위망을 뚫고 북진을 개시, 지역내 적을 포위 추격하면서 9월 30일에는 38도선에 당도하였고, 10월 1일부터 북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실행경과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1950년 9월 9일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의 발동을 명령함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의 집행을 위해 잠정 편성된 제7합동기동부대사령관(제7함대 사령관)은 동월 11일 0시를 기하여 기히 배포한 작전계획에 따라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제7합동기동부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수륙양면상륙돌격으로 인천지역에 교두보를 점령확보하여 방어하고 제10군단에 의한 인천, 김포공항및 서울의 탈취를 지원할 후속부대의 행정상륙을 지원한다. 그리하여 인천·수원선 남방의 적군을 저지하고 서울지역의 적 병참선을 차단한다.'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합동기동부대가 편성되기 이전에 선견부대작전으로서 목표지역에 대한 항공폭격, 기만및 양동작전이 사전에 개시되었다. 즉 9월 4일부터 10일까지 함재기에 의한 서울, 인천을 중심한 반경 50km이내에 교통로차단 폭격이 실시되었고, 양동목적상 원산에도 이와 똑같은 폭격이 이루어졌으며, 12일에는 미육군및 영국해병대의 군산 상륙기습이 감행되었고, 13일엔 동해안 삼척과 서해안 진남포에 대하여 치열한 함포사격이 집중되었다. 9월 15일의 본 상륙에 앞서 13일및 14일 양일간 인천과 월미도의 사전제압을 위하여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으로 집중적인 함포사격을 하고, 항공폭격을 가하였다. 인천에 대한 상륙돌격은 2회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9월 15일 만조시간인 6시 30분 함포 사격과 항공폭격의 엄호하에 미해병 제5연대 3대대(한국해병대 1개중대배속)가 녹색 해안 (월미도)에 상륙하여 8시까지 소월미도를 포함한 도서일대를 완전 점령하였다.그리고 제2회의 상륙은 당일 오후 만조시간인 17시 30분경 미해병 제5연대(한국해병대 제3대대배속) 적색해안(인천북방)에 미해병 제1연대가 청색해안(인천남방)에 각각 돌격제대로 상륙하였으며, 뒤이어 한국해병연대(2개대대)가 적색해안에 상륙하였다. 상륙당일 상륙군은 경미한 피해로 약 2천명 정도의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소탕했으며, 16일 18시에는 인천을 중심한 48km의 광범위한 해안교두보를 점령 확보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17일에는 미해병제1사단과 한국해병대가 김포공항및 영등포를 향하여 진격하는 동안 제2진 미육군제7보병사단과 미해병 제7연대를 비롯한 미 제10군단의 후속상륙이 계속되고, 21일 18시에는 제10군단의 전투지휘소가 해안에 설치됨으로써 제7합동 기동부대는 상륙작전 임무를 종료하고 해체되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1) 전쟁목적 변경과 그 경위 미국의 최초 전쟁목적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분명히 제한전쟁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을 계기로 미국은 국제연합군이 반격의 기세로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구축하고 '북한군을 격멸하여 북한영토를 점령 한반도를 통일된 독립의 민주적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으로 전쟁목적을 바꾸어 군사목표를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영토로 확대하려고 했던 것이다.이는 다분히 북한군을 격퇴하는 것만으로는 북한군의 재건을 허용케 되므로 재침략의 두려움이 있어 유엔군뿐만 아니라 한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38도선을 넘어 북한군을 완전히 격멸해야 한다는 군사적 요구에 1943년의 카이로 선언 이래 일관하여 미국이 추구해 온 통일, 독립된 민주적 정부의 수립이란 정치목적을 일거에 달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전쟁목적의 변경은 종래까지 알려져온 바처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무성측에서는 개전 직후부터 문제의 검토에 착수하여 7월 중순까지는 죠지케넌 등 유럽파 인사를 위주로 전면전쟁으로의 발전을 방지해야 한다는 관점의 한정목적설이 우세를 보인 것 같으나, 이미 7월 중순에 에치슨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극동파의 주도로 전쟁목적 변경이 기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군부에서는 8월 23일의 동경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특별조정회의에 참석한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만 해군참모총장이 맥아더 원수와 38도선 돌파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급속히 전쟁목적을 변경하는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진 것 같다. 이에 따른 국가정책 결정과 관련하여 트루만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에 있어서 공세를 취한다는 결정은 이와 관련한 행동방침이 차원높은 정책검토를 필요로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전쟁목적의 변경이 정책적으로 결정되어 작전으로 집행되는 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트루만의 회고록에는 국가안보회의가 소련과 중국의 행동, 유엔에 가맹한 우호국과의 협의, 전면전쟁의 위협 등 3가지를 고려하여 9월 11일에 대통령의 승인을 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국가안보회의는 이에 따라 맥아더에게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점령하도록 작전계획을 성안케 지시했으며, 이를 합참이 재확인하여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9월 15일 맥아더에게 서면으로 송달하였던 것이다. 이 계획지침에 따라 맥아더는 제8군으로 하여금 서해안의 회랑을 따라 북진공격케하고, 제10군단을 동해안 원산에다 또다른 상륙작전을 실시케 하는 내용의 계획을 성안하여 수도서울 탈환 익일로 9월 29일에 합참에 보고하여 다음날 승인을 받았다.이 계획은 마샬 국방장관에 의해 트루만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고, 이에 따라 10월 1일부터 한국군 제1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한 진공작전에 돌입했으며, 10월 3일 정식명령을 받은 미 제8군은 10월 7일부터 유엔군작전명에 의해 북진을 개시하였다. 다만, 이에 대한 유엔의 승인은 10월 7일 열린 총회에서 추인의 형식으로 소급처리 되었던 것이다.
(2) 인천상륙작전 결과와 한국전쟁 그러면 인천상륙작전계획이 전쟁목적 변경을 전제로 작성되었다면, 작전결과가 전쟁목적 변경을 실현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가?전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9월 11일에 국가안보회의가 검토, 건의한 내용을 트루만 대통령이 승인한 것은 사실이나, 이 문서(NSC-81/1)속에는 몇가지 불명확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즉 '국제연합에서 이 계획이 승인되고 소련이나 중국이 군사적인 개입을 할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있을 것이다' 란 조건부 표현이 그것이다. 이를 음미해 볼 때, 38도선의 돌파에는 위험이 상존하며 예측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공산측의 개입이 유엔군의 38도선 진격 이전에 행하여질 지 혹은 불특정시에 개입할 지 불확실성이 큰 바, 공산군의 개입과 미군의 38도선 돌파는 전면전쟁에 대한 도박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목적의 변경사항이 비록 대통령에 의해 승인되었다 해도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의가 아닌 합참을 통한 국방장관의 지시로 맥아더에게 하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맥아더가 유엔의 승인을 득하기도 전에 작전행동이 선행되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컬한 것이다. 10월 1일을 전후하여 미 제8군이 일단 38도선에서 정지하여 10월 3일 명령을 받기까지 며칠간 우물쭈물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몇가지 불명확한 요소가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이상 여러가지를 종합해 볼 때 전쟁목적 변경의 구현에 인천상륙작전이 가져온 예상외의 성공이 다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당시 미국의 민주당 정권은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이 소극적이라 비판을 받아 왔으며 1950년 11월에는 중간선거를 치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얻고자 전쟁목적을 변경하려 했던 것 같다.그러나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전쟁의 늪에 미국이 깊이 빠지게 되면, 서구에서의 대응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쟁의 확전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10월 1일 주은래가 국제련합군이 38도선을 넘으면 중국은 북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는 공식태도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이를 단순한 공갈로 받아들이고, 부산교두보 공방전이나 인천상륙작전시가 중국개입의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미 시기를 놓쳤으므로 개입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라. 결론 한국전쟁은 피아 동원병력 2백여만에 3년 1개월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엄청난 피해만 입고 현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무승부의 종전을 맞게 되었다. 이는 한마디로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오판하여 전쟁목적을 너무 경솔하게 확대 변경한 미국의 책임이기도 하다.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일관된 지도방침은 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전쟁을 전면전쟁화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가되 타지역에서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경우 그 대응력을 잃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유엔가맹 우호국들과의 협력을 유지하는데 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전구, 병력, 수단을 한정시켜 놓은 채로 전쟁목적만을 확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처사는 트루만 정부의 한정전쟁 지도상 중대한 시행착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놀랍게도 인천상륙작전이 예상을 넘는 성공을 거두게 되자 정부가 주도면밀한 배려를 잃고 일시에 완전승리에 대한 강한 유혹을 받게 된 결과라고 하겠다. 다음의 글은 맥아더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인데, 자기 정당화 노력과 더불어 정부가 인천상륙작전에 관련한 전쟁목적 변경정책을 결정하기 이전인 7월 14일에 벌써 38도선을 넘어 북한군은 격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급박한 전술상황에서 이러한 고차원의 전략적 구상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전쟁을 치르고, 전투행동을 취하는 유일한 목적은 전장에서 승리함으로서 신속하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정세를 창출하는데 있다.전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승리 뿐만 아니라 그 승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은 북한군을 격멸한 인천에서의 승리를 바로 정치적 평화로 대처할 수도 있다.다시 말하면 군사적으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여기에서 전쟁을 종결지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이는 패배한 북한군에게 우리의 의지를 무조건 강요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은 특별한 야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한국으로부터 적군을 일소하여 독립군으로서의 존재를 지킬 수 있는 상태로 만들려는 것 이외는 아무 다른 사명도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중국과 소련에게 납득시킬 만한 외교능력이 필요하다.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해병대는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지역내 잔적을 소탕한 다음, 익일부터 공격기세를 늦추지 않고 동북방으로 진출해 김포비행장을 탈취하고 수도 서울로 진격해 나갔다. 그리하여 19일에는 주력이 영등포 서쪽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일부는 행주 나루터를 확보한 다음 야간 강습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 1주일째인 9월 21일 오후 맥아더는 안양 서쪽에서 작전 중인 미해병1사단을 방문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가죽점퍼 속에서 은성훈장을 꺼내어 그의 가슴에 달아주면서 "빠른 시일 안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숙소인 주일 미대사관에서 오랜만에 부인과 1박하는 동안 부산으로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까운 장래에 각하를 서울로 모시도록 서둘러 준비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여 기쁨을 안겨 주었다. 9월 22일, 미8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했는데, 25일까지는 상륙군인 미10군단과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철상(slash)'과 망치(hammer)작전' 으로서 한반도의 적을 인천상륙작전으로 양단격파함으로써 북진하는 유엔군이 이를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한편, 미해병대 제1연대는 영등포로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서남으로 진입하고, 미해병대 제15연대와 한국해병대 1대대는 일산,수색 쪽으로 접근하며 인천에 대기중인 미해병대 제7연대는 북한산 경유 미아리 쪽에서 남으로 압박함으로써 서울을 9월 25일까지 점령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서측으로 접근한 미해병대는 당인리, 와우산, 인왕산을 연하는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돈좌됨으로써 23일까지도 서울 서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2일간의 악전고투끝에 공격기세를 회복한 한,미 해병대는 연희고지를 탈취하고 서대문으로 진격 중 9월 25일 아침 북한군의 역습을 받았다.당일 저녁에 겨우 서대문형무소를 점령했을 때엔 수용되어 있던 미군포로 4백여명은 북한군이 도주하면서 대동월북한 후였다. 익일 9시를 기해 미해병대 제1사단장이 서울 중심가 진격명령을 내리자, 작전구역별로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배속된 한국해병대 제2대대는 새벽부터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서울 탈환은 누구보다도 한국군이 선두에서 성취해야한다는 열망을 미해병대 지휘관이 묵인해 준 것이다. 미해병대 복장을 한 한국해병대 장병이 서울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공산치하에서 3개월간 신음하던 시민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서울역 청사 안에는 북한군 일부가 남아 완강히 저항하매, 해병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전원을 소사시켰다.이날 오후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이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다'는 성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내는 아직도 시가전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완전탈환은 못한 상태였다.
"중앙청에 올려진 태극기" 박정모 소위가 이끈 한국해병대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서울시청을 점령하고 시청사 안에 걸려 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박살내었다. 그리고 시청 옥상에 휘날리던 인공기를 내려 불태우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이때 인근의 각국 대사관 옥상에는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9월 26일이 저물어갈 무렵, 한,미 해병대가 확보한 서울시가지는 겨우 절반도 안되었으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호텔에 본부를 둔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대대장 김종기 소령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불러놓고 다음날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기자가 "중앙청은 미해병대 제5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분부가 있었으며, 상금 3천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뜸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정모 예비역 대령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허가를 상신하였다. 대대장은 신현준 연대장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박소위를 격려하였다.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호텔 보이를 시켜 구해놓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 중앙정으로 접근하였다. 세종로 일대에는 군데군데 북한군이 구축해 놓은 사낭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소탕, 제압한 다음, 2개 분대를 중앙 돔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를 근접호위케 하여 2m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2등병조를 대동하고 돔 계단으로 올라갔다.철제 사다리는 폭격으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하였다. 부득이 호위 분대원들의 허리띠를 모두 회수하여 연결한 다음 천정에 매달고서 천신만고 끝에 돔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 때가 9월 27일 새벽 6시 10분이었다.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양병수 이등병은 이 공로로 미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상금 3천만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태평양 전쟁시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 (이오지마)상륙작전에서 4인의 해병이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으로 유명한 알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전쟁기념비는 미해병대의 상징이다. 서울 탈환에 앞장 선 미해병대는 곳곳에 성조기를 꽂고 승리를 기념하였으나, 국권의 상징인 중앙청만은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올리도록 아량을 베풂으로써 형제 해병대의 혈맹관계를 확인하였다. 9월 28일 한,미 해병대는 서울의 잔적을 거의 소탕하게 되었으며, 익일 거행될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는 서울 수복기념식 준비를 하는 사이에, '수도 완전 탈환' 이라는 제하의 대형활자 신문호외가 이날 오후에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후 매년 9월 28일에는 중앙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는 기념행사를 해병대 주관으로 가진 바 있다. 1996년 일제의 총독부를 철거함에 따라, 그해의 행사가 이곳 마지막 행사가 될 것이기에 격전지에 세워진 104고지 전적비 추념식과 함께 당시 도하작전을 상기하는 해병대 철인3종 경기가 양화동 한강 시민공원에서 펼쳐져 해이된 국민안보의식 고취에 일조하였다. 우리는 인구 1천만이 넘는 거대도시 서울에 살면서 한국전쟁기간 중 주인이 4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초토화된 바 있으나 이제 세계유수의 빌딩숲을 이루게 된 것을 경탄하기도 하지만,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떻게 생존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몇년전, 불과 26명에 불과한 북한군 특수요원이 잠수함으로 침투하자 이들을 소탕, 추적하느라고 무려 7개 사단이 동원, 투입되어 근 한달이나 작전을 했으나 오히려 아군과 민간인의 사상자 다수를 내면서 작전을 종결지은바 있다. 포항에서 고도로 훈련되어진채 출전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을 활용하지 못할만큼 편협하고, 저급한 당시 합참지휘부의 졸전을 다시한번 지적한다. 피로 얻은 영광들!도솔산지구작전적의 춘기공세를 분쇄하고 북상한 해병대는 1951년 6월 3일 화천저수지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맡은 전투지역은 38선 이북의 양구와 인제 간에 있는 태백산맥 가운데서 가장 험악한 지역 이었다. 이 지역은 도솔산지역으로서 일찍이 유엔군이나 우리 국군이 한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고 적이 또한 난공불락임을 호언하던 천연 요새이기도 하였다.적은 이 곳에 틀어박혀 발악을 하였는데, 이 지역은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면 우리 해병대와 좌우에 있는 우군의 계속진출이 매우 용이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적에게 포위 당할 우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해병대가 담당한 도솔산지구일대는 양양에서 철원을 3각의 저변으로 하고 원산을 정점으로 하는 중동부의 이른바 철의 3각지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은 이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아군의 공격을 저지 하려 하였는데, 여기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군의 공격목표인 23 및 24고지를 두고 2, 4, 9, 11 및 18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도솔산지구 전투 개요 (1951.6.4~19) 주저항선에는 견고한 진지가 구축되고 막대한 수량의 지뢰가 매설되어 거듭된 공격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끝까지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고지들을 모두 점령하였다.이 도솔산지구작전은 최초 미해병 제1사단의 제5연대가 담당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4일 이른아침 우리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해병대에서 8목표전방 약2km지점의 고지를 점령하는데 무려 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고, 다수의 전쟁후유증인 정신질환자까지 발생하여 부대정비 및 재편성의 기회를 갖기 위해 국군해병대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된 것이다.당시 인접우군으로서는 좌측에 미해병 제7연대, 우측에 제1연대가 있었고, 미해병 제1공병대대의 제2중대 제3소대와 제11연대 제3대대(포병)가 우리 해병대를 직접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무를 교대할 우리 해병대에 미해병대가 제1사단으로부터 6월 3일 24시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이 하달 되었다. 1) 제1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680고지, 910고지 부근에서 목표1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이어서 목표2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2) 제2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105.7고지 남쪽의 912고지 부근을 전령후 이어서 목표8과 목표7을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3) 제3대대는 연대예비대로서 800고지 부근을 점령하고, 증강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고지3을 점령 후 연대우측을 엄호하라. 당시 우리 해병대 중간보급소는 광사동 부근에 있었고, 연대본부는 원동지곡, 그리고 의무대는 죽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 총공격에 앞서 연대장 김대식대령은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요지의 훈시를 내렸다.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4일 오전 8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고 일진일퇴하는 가운데 6월 12일에 이르러 Kansas Line 안의 16개 고지 전부를 점령하였다. Kansas Line 이남의 전략적인 요지를 상실한 적은 완전히 사기를 잃게 되어 나머지 17부터 24까지의 8개 고지는 비교적 용이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해병대 정면에 포진되었던 적은 인민군 12 및 32사단이었으며 우리 해병대가 점령한 14목표와 그앞에 있는 17목표 사이의 대암산봉 능선일대에 집결되어 있었다. Kansas Line내의 1목표에서 16목표까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어서 Badger Line의 17에서 24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제2단계 작전을 6월 13일부터 개시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11고지를 근거지로 삼고, 제2대대는 9 및 10고지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제3대대는 13고지 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각각 정찰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2대대가 6월 15일 오전 8시에 공격 을 개시하여 17, 18 및 19고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작전개획은 이후 제3대대가 목표 20, 21 및 2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할 때, 측면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이같은 계획 밑에 제2대대는 17일 8시 31분에 임무를 완수하고 제3대대가 공격할때, 능률적으로 지원 하였다. 적은 고지 후면 암석에 잠복하여 저항해 왔기 때문에 육박전을 감행한 끝에 6월 17일 12시 30 분 20고지를 점령하고 다음 날에는 21고지, 그리고 19일에는 22고지를 차례로 탈환하여 드디어 도솔산 을 완전히 점령하였다.이어서 제1대대는 11고지와 14고지로 이동하여 23 및 24고지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고, 19일 7시에 22고지부근까지 전진하여 8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9시 30분에 23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미해병대 제7연대는 우리 해병대의 좌측에서 24고지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고, 6월 20일 제3대대가 24고지를 인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솔산일대의 산악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리 해병대의 찬란한 공훈에 대하여 당시의 국회의장 (신익희)은 감사문을 신현준사령관에게 보내왔고, 또한 미국대통령은 참모장 김성은대령과 제1연대장 김대식대령에게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다.도솔산 24개고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 고지들을 위협하는 적 3개대대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대우산을 7월 8일부터 2일간 걸쳐 공격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린다음, 7월11일부터 17일까지 방어전에 임하였다. 이와같이 6월 4일부터 7월17일까지 40여일동안 대규모의 산악전을 수행한 우리 해병대는 전선을 미육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인계하고 홍천지방으로 이동하여 차기작전을 수행할 준비에 임하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십여년후에 월남에 파병된 해병대 청룡부대가 미군과, 프랑스군이 십여년간 공격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한 난공불락의 고지를 하룻만에 점령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한 것은 이러한 선배해병들의 "임전무퇴"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도솔산에서의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포연이 가시지도 않은 전투현장에 날아와, "무적해병" 이라는 휘호를 내리고, 전장의 승리를 여는 무적의 군대라는 의미로 "개병대" 라 부르며 지휘관과 병사들을 치하했다. 김일성 모택동 고지 전투북한 인민군 제3군단 예하의 정예부대인 제3연대는 924고지를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명명하면서까지 고지 사수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우리 해병대 (제1연대 연대장 대령 김대식)는 1951. 8. 31 첫 공격을 개시한 이래 적의 완강한 저항과 매설된 지뢰에 의해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나 맹렬한 공격으로 혈전을 거듭하여 1951. 9. 2일 924고지를 점령하고 이어서 1951. 9. 3일 마침내 1026고지를 점령하였다. 924 · 1026 고지 전투 개요도솔산고지전을 수행 후 홍천지방의 철정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제1연대는 8월 27일에 다시 새로운 임무를 띠고 출동하게 되었다. 우리 해병 제1연대가 출동한 지역은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6.25 동란 전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펀치볼일대의 고지였다.제1연대는 8월 28일 평촌에 집결한 후 거기에서 Kansas Line의 방어를 위하여 전선으로 이동하여 29일 Kansas Line에서 미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즉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1951년 6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정전회담 이후 피아가 서로 소규모의 정찰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해병대가 맡은 임무는 적의 주저항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해병대가 공격할 목표는 도솔산을 출발점을 삼고 만대리 분지를 둘러싼 지단의 능선일대에 있는 주봉들인데, 이 일대를 우리가 확보하게 되면 금강산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북한땅 깊숙히 들어가게 된느 것이었다. 이 지점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점령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중동부전선의 전세를 전반적으로 유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924고지와 1026고지에는 인민군의 최강부대인 제3군단 제1사단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예하 제1대대(약 500명)가 924고지에, 제2대대(약500명)가 1026고지에 각각 포진하고 제3대대가 예비대로서 그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적은 소련제 중화기로 장비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는 82미 박격포 8문과 중기관총 6문을 장비하고 있어 화력면에서 우리 해병대보다 훨씬 우세한 상태였다.또한 적은 휴전회담중의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였고, 진지전면에 막대한 수의 대인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러면서 도솔산에서 패배한 치욕을 여기에서 만회한다고 호언하면서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그리고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924고지를 공격할 부대는 제2대대였는데, 8월 31일 공격대기지점인 월산령에 집결하여 공격을 감행하여 고지전방 100야드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날씨가 불순하여 관측착오로 말미암아 아군지원 사격포탄이 공격부대에 낙하하여 부상자가 속출함으로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일단 철수하였다. 이날 연대장 김대식대령은 제3대대의 최전방중대인 제11중대를 시찰 격려하고 돌아가다 지뢰를 밟아 부상당하자 부연대장인 김동하중령이 임무를 대행하게 되었다.9월 1일 제3대대는 재차 공격을 개시하고 육박전을 감행하여 제10중대가 적진 300야드까지 접근하게 되었으며, 제11중대는 924고지 100야드전방까지 성공적으로 진격하였다. 9월 2일 제1대대 제3중대와 제2대대 제 6중대가 9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하여 12시 20분에 924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의 공격이 비교적 용이하였던 것은 제12중대의 박격포 연막탄에 의한 연막차장이 적절하게 이루어졌고, 날씨가 청명하여 아군의 항공지원과 야포지원이 효과적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924고지를 점령하는 3일간의 혈전으로 제1대대와 제3대대가 다대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1026고지에 대한 공격은 예비대로 있던 제2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제2대대는 제3대대가 924고지를 점령하자 곧 이어 1026고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9월 3일 정오 이전에 1026고지를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924고지, 1026고지및 1056고지 등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이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해병대의 이름이 또다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혹한과 싸우면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해병대는 1952년 3월 17일 수도서울의 방어를 위하여 양개 고지를 육군에 인계하고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양도작전인천상륙작전 이후 해병대는 원산만을 제압하기 위하여 여도를 비롯한 동해상의 도서들을 점령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 적진 깊숙이 위치한 북위 40도 40분, 동경 129도 30분에 위치한 양도에는 1951년 8월 28일 우리 독립 제43중대(중대장 최청송 중위)가 상륙하여 첩보공작을 수행하고 있었다. 양도는 3개의 작은 섬인 길주양도, 명천양도및 강후의도로 되어 있는데, 강후의도는 암석으로 된 무인도였다. 양도의 대안은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으로서, 양도와의 거리는 4,000야드에 불과하였다.이 양도대안에는 다수의 인민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후 인민군 총사령부 직속의 독립 63보병연대가 배치되었다.1952년 2월 20일 해병대는 대안의 적으로부터 105미리 직사포 3문과 120미리 박격포 3문의 맹렬한 포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 오전 1시 40분에는 길주양도에 적이 접근하여 상륙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명주양도 전면에도 적의 상륙선 2척이 접근해 왔다.날씨는 몹시 흐려서 가까운 거리도 분별하기 곤란한 가운데서도 아군은 세심하게 적의 그림자를 찾아 포화를 퍼부어 적 상륙선 2척을 격침시켰으나, 적의 주력은 끝내 길주양도 70고지와 명천양도 47고지에 기어 올라 만세를 부르며 아군의 사기를 제압하려 하였다. 당시 아군이 생포한 적대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대안의 적은 연대지휘소를 청진에 두고 양도 2개 도서를 기습할 목적으로 전투경험이 많은 장병을 선발하여 1개대대를 편성후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1개월간 상륙작전훈련을 실시하고 나서 다시 나진해안에서 모의연습을 마쳤다는 것이다. 적은 대대병력으로 기습을 감행하여 길주양도 70고지와 명주양도 47고지를 일단 점령하였다. 그러나 해병 독립 43중대는 열세한 전투력임에도 매복과 기습으로 상륙한 적주력을 하루만에 유인 격멸하고 일부 함정을 타고 도주하는 적을 해상에서 격침 소탕하였다. 이 작전의 승리에 대하여 미태평앙함대 사령관으로부터의 극진한 찬사가 있었고, 중대장 최청송 중위와 이영덕 병조장,정진영 2조는 미국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은성훈장을 받았으며, 중대선임장교 황병호 소위는 미동성훈장을 받았다. 또한 우리 정부에서도 중대장에게 을지훈장을 수여하였고, 그 밖에도 10명에 대하여 충무훈장과 30명에 대하여 화랑훈장을 각각 수여하였다. (-을지훈장:최청송 중위, 이영덕 상사, 정진영 하사 -은성훈장:최청송 중위, 정진영 하사 -동성훈장:황병오 소위) 이 독립43중대는 그 후 철통같은 양도경비에 임하던 중, 1952년 10월 5일 양도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휴전후 동해부대 철수계획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철수를 개시하였고, 동년 8월 4일 진해에 도착하여 제2연대에 편입되었다.
장단지구전투 1952년 3월 중순경, 그동안 924고지 일대를 점령 방어하고 있던 해병 제1연대와 펀치볼 지구에서 작전중이던 미해병 제1사단은 미8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수도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했다.미8군사령부의 그와 같은 조처는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른 서울 방어를 위한 전투부대 재배치계획의 일환이었는데, 해병제1연대가 배치된 곳은 판문점 동북방의 고랑포지구였다.북으로는 휴전회담이 진행중인 판문점, 방어정면인 서쪽에는 사천강, 방어선의 배후인 동쪽과 남쪽은 임진강에 접해 있었다. 해병 제1연대가 맡은 새로운 작전지역은 적으로부터 철저히 감제당하고 있는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판문점과 휴전협상 대표들의 안전을 보장해야하는 특수한 상황하에서 작전행동에 제약을 받는 불리한 지역이었다. 그 유례없는 제한조처란 이른바 중립지대로 규정해 놓은 판문점을 중심으로 한 반경 100m 이내와 양측 휴전협상 대표단의 숙소와 연락사무소가 있는 개성-문산 간 도로, 이른바 평화도로로 명명이 된 그 도로 양쪽 200m 이내 지역에서의 적대행위나 사격의 금지및 심지어는 착탄까지도 금한 것이었다. 이같은 제한조처에도 불구하고 적은 야간을 이용해서 야포나 탄약 또는 병력 등을 그 중립지대나 평화도로 근처에 비밀 이동, 은닉 배치하거나 저장해 둠으로써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한편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한 직후 해병 제1연대는 1951년 3월 중순경부터 김포지구에 투입이 되어 있던 독립 제5대대와 105밀리 포병대대를 중심으로 전차중대, 공병중대 등이 증강된 연대전투단으로 증편되어 10월 1일부터 정식으로 작전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전투단으로 승격된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2일 밤(추석전야) 정면의 중공군 제65군 제113사단은 대공세를 취했다. 적에게는 사천강변에 있는 눈의 가시와도 같은 3개의 해병대 전초기지를 수중에 넣기 위함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해병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우일선 대대(1대대)의 36고지와 67고지, 좌일선 대대(2대대)의 86고지 등 그 3개의 최전방 전초진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연대전투단(단장, 김석범대령)은 67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6차에 걸친 역습전을 실시했으나, 중공군 포병단의 정확한 탄막사격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하고 사상자만 늘어나자 결국 그 외곽전초선을 포기하고 일단 제2의 전초전으로 이동하여 주저항선을 방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0월 31일 밤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를 맞아 해병연대전투단은 패배를 설욕하고도 남음이 있는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전투단장은 진동리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 그리고 영월지구 전투를 지휘했던 지략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운 김성은대령 이었다. 10월 16일부로 전투단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제1차 공세 때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추석 전야에 한번 재미를 본 중공군 제 113 사단이 수중에 넣은 전초진지들을 기반으로 하여 다음 만월야에도 반드시 공세를 취하여 주저항선을 유린할 것이라는 예상 하에 진지강화 작업을 서둘렀다. 그리고 전차부대를 전진배치하고 우일선인 미해병사단과 협조하여 적의 예상접근로를 철저히 강타하기 위한 탄막사격및, 역습작전계획을 빈틈없이 계획해 놓았다.드디어 10월 31일 밤 10시 5분부터 15분간 계속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준비 지원사격과 함께 1개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31,33,39고지등 3개의 전초진지를 일제히 공격해 왔다. 사전계획된 지원화력의 지원하에 사투 끝에 주저항선을 지켜낸 3대대 11중대(중대장 임경섭 중위)와 전초진지(86고지)를 고수했던 2대대 6중대(선임장교 이창수 소위)는 날이 밝자 헤아릴 수 없는 적의 시체가 가을 들녁의 집단처럼 뒹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황량한 가을 들판에서 감격에 겨워 '나가자 해병대' 를 힘차게 부르면서 부둥켜안고 승리를 만끽했던 것이다.다음날, 한국전을 취재, 보도하던 전 세계의 언론에는 이런 기사가 서울발로 타전되었다."중공군 제 113 사단 전멸, 한국해병대 서부전선서 중공군 1개사단 격멸"이러한 표제 하에 그날의 전과를 대서특필했던 당시의 언론매체들은 수도의 관문인 서부전선을 이상없게 지켰던 해병대원들의 용감성과 불굴의 감투정신을 다시 한번 찬양해 마지 않았다. 6.25 동란을 통해 불굴의 해병정신으로 임전무퇴, 무적해병의 전통을 세운 해병대의 영광뒤에는 이렇게 수없이 많은 해병들의 피가 강물처럼 흐른다.
8.15 6.25 4.19 5.16 10.26 12.12 5.18 6.29 ..... 많이 듣던 숫자들의 나열이다. 이 숫자들이 바로 우리현대사에서 어떤 분수령이 되었던 의미있는 숫자들이다. 8.15 와 6.25 는 설명이 없어도 모두 이해하고 알고있는 일이다. 그러나 위 숫자나열 중 4.19 이후 부터는 상당한 이유들로 인해 논의자체도 그렇지만 평가 역시 논란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국기로 체택하고 있는 국가나 사회에서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자체가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시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이른바 "법" 이 제대로 지켜졌는가를 평가의 가장큰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논의 자체가 무의미 할 것이므로 그 부분을 먼저 강조하고 위 숫자들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법의준수라는 측면을 떠나 이미 기정사실화 된 어떤 사건의 결과로서 발생 되고, 발전되어진 "역사" 자체를 부정할 수 는 없다. 다만 그것에서 후세의 우리는 결과를 토대로 공과를 판단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치우침 없이 살피고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를 준비하면되는 것이다. 4.19의거, 또는 4.19혁명 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에 항거하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퇴진시킨 "시민혁명" 이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하야 하여 하와이로 망명했고 일련의 과정을거쳐 이른바 "민주정부" 가 들어서게 된다. 그 때에 살지 않은 필자이고 보니 그 시대의 혼란과, 가난이 피부로 와닿지 않을 수 밖에 없지만 여러가지 서적이나 증언들은 그 시절을 "혼란과 가난" 의 시대였음을 알게해준다. 4.19 이후 모든게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던 시민들은 달라지지 않은 정치와,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고통하고 있었다. 전국이 데모와, 시위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을 만큼 시국은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박정희 장군이 주도하는 5.16 이 일어난다. 5.16 이 쿠데타냐, 혁명이냐 하는 논란이 있지만 10.26 과, 12.12, 5.18 광주사태 등이 5.16 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5.16 에 대한 평가를 결코 소홀히할 수 없다. 5.16 당시 김포주둔 해병여단을 이끌고 한강다리를 넘었던 예비역 해병중장 김윤근장군 의 "해병대와 5.16" 에 소개된 당시상황과 이후 발전되는 거사주체들의 갈등등은 12.12 반란을 일으킨 세력들 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김윤근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미국의 한 단체에서 발간하는 책자에 실린 "콜론보고서" 라는 글이, 많은 한국군장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했던 모양이다. 글의 내용은 남미등지국가들의 군부쿠데타를 소개하고 작금의 한국상황을 볼때 여타 남미국가들의 상황과 비슷한 한국에서 시민이 세운 민주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할 만 한 직업군인이 한국에는 없을 것이다, 라는 시사적인 내용이다. 글쓴이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이 글이 한국군의 젊은장교들에게 준 충격과 자존심의 상처 는 대단했다고 한다. 어지러운 시국과 혼란스런 정치는 전쟁을 겪은 군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마침 알려진 콜론보고서는 애국심과 엘리트의식에 불타는 젊은 장교들의 "시국성토" (김윤근장군은 이를 "우국방담" 이라 표현함) 를 불러왔으며 자연스럽게 이는 어떠한 행동으로 귀결되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16 의 과정에서 알려진 해병여단의 역할이나 동원된 육군부대들의 여러가지 비화들은 나름대로 역사의 기술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는 있겠으나 그것보다도 한번 시작된 반란의 역사가 그 말단 장교들에 의해 다시 되풀이되어졌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박정희장군과 김윤근장군등 이른바 5.16의 주체들 아래에서 선배장교들의 반란을 지켜보고 이에 동참했던 젊은 "대위" 들 이었던 전두한과 노태우등 이른바 정규육사 11기들이 중심이 되어 저지른 12.12 군사반란은 바로 5.16 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경험한 후배들에게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5.16과 박정희의 공과를 논하기에 앞서, 이는 민주주의를 국기로 체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헌정질서를 무너트렸다는 점에 주목하여야한다. 더우기 그로부터 불과 20년 후에 다시 반란이 되풀이되어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니말이다. 한번의 반란으로 20년간 권력을 차지하고 그 과실을 즐기는 선배들, 그리고 그 영양분을 받아먹으며 성장한 후배들이 당시와 비슷한 혼란이 찾아왔던 79년 10.26 이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땅에 살고있는 민초들에게 어쩌면 이렇게 불행하고 슬픈 아픔의 역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되어져 수탈과 일방적 희생이 반복되는지 알 수 없다. 민초들에게 있어 그것은 아마도 한반도라고 하는 이 땅이 애초부터 신의 저주를 받은 "죽음의 땅" 인지도 모른다. 더욱 한심스럽고 절망적인것은 이것을 마치 운명인듯 받아들이며 자각하지 못하고 떠드는자들의 어리석음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어줍잖은 짧은 논리와 허접스런 의식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시각을 가진다면, 또한 그런 시각이 사회전체로 팽배되어 애매모호한 결론들이 정당성과 정의를 호도한다면, 언제 다시 전방의 군인들이 총부리를 돌려 밀고 내려오지않는다고 장담하겠는가? 더구나 5.16의 기안자이며, 주체중의 주체인 김종필씨가 아직도 살아서 40 여년이 지난 현시대의 주체로 남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며, 12.12 반란을 일으킨자들을 화합과 용서라는 허접한 정치논리를 앞세워 처단하지 못한 전례까지 있으니 말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이승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파들이 부활하여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국민위에 군림하며 저급한 상류의식과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이 사회를 좀먹고 있는 것과 다를 것 없다) 그야말로 한번 엎으면 영원토록 부귀를 보장받는, 이 손쉽고 간편한 방법을 눈으로 보았고, 그 수단을 가지고 있는 군인들 중 일부가 지금 어디선가 무슨짖을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일이다. 5.16과 12.12 반란을 동일선상에서 보고 평가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며 다시는 이땅에서 단순무지한 군인들의 폭거로 인해 시민들의 피를 먹으며 성장한 민주주의를 범하게할 수 없다. 5.16 당시에는 직업군인계층이 비교적 잘 훈련되고 교육되어진 엘리트집단이었고, 그들의 리더인 박정희장군이 "경제발전, 자주국방, 민족중흥" 이라는 일관된 목표를 세워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매진했으므로 남미여타국가들의 경우와 다르게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르나 사회전체적으로 지식수준과 의식수준등이 높아지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국제화시대에이른 지금은 결코 그들이 이 사회와 국가를 이끄는 리더집단이 될 수 없다. 한가지 일례로 박정희대통령의 경우와 달리 그 졸개들 이었던 전두한과 노태우는 각각 1조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기업들로 부터 갈취, 착복하여 숨겨두고 쓰다가 들킨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5.16 이후 군인집단의 의식과 수준은 민간의 그것과 비교해 역전된지 오래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민주투사, 민주화신, 이라 자칭하며 군인들과 대립하는 것을 정치적 생명줄로 국민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대통령에 이른 두사람의 김씨들로 인해, 격동의 21세기를 안전하게 대비하고, 준비하고있지 못 하다는 점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