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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탈출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분명히 선명한 현실이었는데 깨고보니 꿈이었다.
죽기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열 명쯤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절반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고 또 절반은 전화번호는 물론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른다. 나는 그들이 보고 싶어 꿈을 꾸고 또 꾼다. 꿈속에 그들을 만나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 꿈을 도데체 몇 번이나 꿨는지 알기나 합니까.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라고 항의조 하소연을 한다.
70세가 된 아버지가 어느날 한국관광공사에서 실시하는 외국어번역자격시험을 응시하려 상경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나이 칠십에 무슨 시험을?」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대구고등학교에 재직하던 육십 초반에 일본 NHK본사에서 주최하는 일본중고교 교사대상 강연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강연주제는 아마도 「일제시대를 거친 어느 한국인 老교사의 회고」이었던 것 같다. 물론 시작 전에 강사소개가 있었겠지만 강연 도중에 사전정보없이 들어온 사람은 앞에 선 강사가 한국인라고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일본어구사가 일본인 이상으로 유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일본에 유학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그 정도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음도 사실이다. 그런 실력을 가진 아버지가 일본어시험을 본다고? 지금 그 시험을 쳐서 어떻게 하려고? 왜? 나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또한 시험당일 날 70대 노인이 고사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앉아 있던 10대 20대 젊은 학생들은 시험감독관으로 오인해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소란하던 교실이 일시에 조용해 졌다고 한다.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아버지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마치 할 일 없는 노인의 여가선용 정도 밖에 생각해 주지 못한 내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때 내가 「그래요? 와 아부지 대단합니다. 와 우리 아부지 아직 살아있네」 요샛말로 「와 아부지 대박입니다」 라고 말해 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자가 말하기를, 세상에 일찍 스스로 깨우치는 사람이 1등. 부모나 선생의 도움으로 깨우치는 사람이 2등. 고생 실컷하고 깨우치는 사람이 3등. 고생 실컷 하고도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4등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 저는 영락없는 4등인가 봅니다. 그 간단한 것을 깨우치는데 무려 40년이나 걸렸습니다.
내가 늙고 보니 친구가 적다는 사실에 후회막급이다. 친구 숫자는 자신의 인격과 정비례한다. tv를 보고 있노라면 여럿 국회의원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흔히 우리는 정치인들을 욕하기도 하지만 국회의원들 개개인은 여러모로 능력있는 사람들이다. 지역의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인간적 매력을 가진 능력자들이다. 특히 언변이 뛰어나고 재기발랄한 사람들이라 그들을 친구로 삼는다면 대화를 나누어도 참 유쾌하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능력자들은 나 같은 무능력자를 친구로 삼아주지 않는다. 설사 친구로 만들어도 어릴 때 젊을 때나 일이지 이제는 글렀다. 누구나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가끔 전화하고 바쁜일이 생기면 새카맣게 잊고 지내는 그런 부류의 친구도 있다. 서로 그저그런 친구가 된 연유는 나도 상대방도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피차 그 공들이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만나면 「늙어서 친구가 제일」이라고 힘주어 얘기한다. 나는 그것을 「유리창 우정」이라고 표현한다. 겉보기는 예쁜 유리창같이 멀쩡하다가도 피차에 어려움이 생겨 상대가 혹은 내가 조그마한 구원의 손길이라도 내 밀면 난감한 얼굴로 외면하면서 우정의 유리창은 그냥 와장창 깨어져 버리고 만다. 그들은 친구라기 보다는 그냥 이웃주민과 동종류의 막연한 사람들이다. 그냥 별일 없이 잘 지내면 되는 사이다. 살얼음 같은 룰이 깨지면 그들은 혹은 나는 십리 밖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늙어서 친구가 제일이라고 즐겨 말한다.
친한 친구가 두명 있다. 비록 두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과는 가족처럼 지내고 싶었다. 「유리창 우정」이 아닌. 이들이 멀리에서 나를 향해서 걸어올 때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의 얼굴이 형과 동생의 얼굴로 겹쳐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친한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커피숍에 앉아서 보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걸어다니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시골출신답게 우리는 아파트가 아닌 비교적 한적한 단독주택가 골목을 걸으며 고향같은 한적한 정서를 가지려고 애쓴다. 그런 대화 속에 나는 가끔 이야기 중에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친구에 대한 비난의 얘기를 할 때가 많다. 항상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던 친구이건만 이때만은 얼굴이 굳어지고 입을 닫아버리고 대꾸가 없다. 이유인즉 남의 얘기를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의 험담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또한 그것도 그 사람의 주관이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남의 욕을 하는 심리 속에는 듣고 있는 상대로부터 동의를 받고자 맞장구치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상대로부터 「맞아. 니 말 맞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문제있네」 라고.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각자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최소한 「아니야. 그건 너가 잘못 생각한 거야. 그 친구가 이러이러한 단점도 있지만 저러저러한 좋은 점도 있잖아. 너 너무 속 좁게 생각하는 것 아니니? 」 라고 말해 주어도 서운하지는 않을 텐데 친구는 그만 입을 딱 닫아버린다. 친구가 대꾸하지 않으니 결국 나만 어색하고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다. 친구를 자기의 부모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가령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철수가 나를 때렸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면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철수 그 놈 나쁜 놈이네. 내가 언제 혼내줄게」 라고 말하지 「너가 뭔가 맞을 짓을 했겠지」 라고 말한다든가 「철수가 없는 자리에서 철수 욕을 하지마」 라고 입다물고 묵살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 친구에게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시 꺼집어 냈다. 그냥 침묵만 하지 말고 하다못해 충고라도 해주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라고.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역시 비슷했다. 사람은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를 수가 있고 등등 이야기를 빙글빙글 돌려서 하는데 나는 정작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제3자를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험담하는 것은 싫으니 내 앞에서 그런 얘기는 하지마」 라든가 혹은 「너 생각이 좀 틀린 것 같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라는 얘기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상쾌하게 둘 중 어느 쪽의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역시 침묵할 작정인가 보다. 젊을 때에는 그처럼 생각이 유연하고 능청을 떨며 밀당에 능했는데 나이를 먹으니 사람이 변했다. 자기 생각을 고치기도 부정하기도 싫은 자신이 한 행동은 옳다고 생각하는 확고함이 보일 뿐이다. 뭘 다 늙어서 남의 험담이나 하고 있니 라고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이처럼 친구의 침묵에 민감한 이유는 세상에 한사람 혹은 두 사람 정도만은 무슨 얘기라도 제한없이 성역없이 눈치보지 않고 꺼림없이 말할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싶기 때문이었다. 욕심 아니던가. 그도 그만하면 좋은 친구인것을.
언제 이였던가 나는 그 친구에게 중학교 2학년 때의 나의 일기 1년치분을 A4용지로 복사해 보낸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일기를 아마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일기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고 자기가 기억조차 못하는 까마득한 어린시절의 짓궂은 사건들의 이야기가 일기 속에 있었으니 무척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일기를 남에게 보여 준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중학교시절의 일들이 무슨 비밀스럽고 대단한 일이 있을까 싶어 한번 객기를 부린 것이다. 이처럼 나는 살면서 가끔 테잎이 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나는 가차없이 파격의 정신없는 짓을 잘한다. 상대가 친구이든 가족이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사풀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들은 항상 긴장된 모습으로 절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 내지는 꼬투리 잡힐 행동은 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더 심하다. 오래 살면서 터득한 지혜와 인내심으로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설령 누가 웃겨도 잘 웃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타인을 웃기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를 강하게 의식하고 자세를 허뜨러 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외로워질 터인데.
평생을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대학시절 경제학공부가 하고 싶어서 남의 대학교 야간대학에서 꼬박 1년간 성실히 도강했던 일과 또 하나는 젊은 시절 90cc오토바이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동해남부선 국도를 달린 일이다. 오른쪽으로 푸른 동해바다를 끼고 왼쪽으로는 짙푸른 산과 숲을 안고서 구룡포 칠포 월포 장사 울진 영덕 맹방 삼척 강릉. 그 대자연이 눈에 선하다. 바다를 여러 번도 아니고 고작 몇 번 가보았을 따름인데 세월은 벌써 다 가버렸다. 몇 해 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해 오토바이 운전면허를 따려고 자동차운전학원으로 향했다. 등록을 했더니 위험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오토바이운전면허를 그것도 노인이 따러 왔다고 학원이 야단이었다. 운전강사는 말했다. 연습 중 포기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등록금은 언제라도 100%환불해 드릴께요. 젊은 사람도 합격률이 20%가 안되는데 하시겠어요. 다치지 않겠어요. 1000cc 이상의 오토바이는 중량이 무거워 차체가 넘어져 다리가 끼면 다리나 발이 부러질 수도 있어요 등등 말도 못하게 겁을 주었다. 그 와중에 주위를 돌아보니 수강생들이 50대는 커녕 40대도 별로 없었다. 사실 어려웠다. 달리다가 넘어지기가 부지기수. 넘어지니 휘발유까지 넘쳐 흐르고 차체가 손상되고 부끄럽고 미안해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기를 수십번. 그러나 막상 실기시험에서는 단 첫회에 합격을 했다. 합격을 하자마자 학원안에서 소문이 퍼져 과연 노인이 해내기나 할까 나몰래 걱정하던 학원원장이 정말 버선발로 뛰어나와 축하해 주었다. 원장입장에서는 합격률에 따라 학원광고에 영향을 끼치므로. 처음 젊은이들은 나를 보기를 투명인간 취급하듯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젊은 그들에게 노인이란 웬지 대하기가 어려울 따름이지 노인 자체를 싫어서가 아님도 알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코스를 통과하자 「아저씨 축하합니다. 파이팅」라고 외치며 젊은 그들은 박수치고 입에 손가락을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아저씨. 언제 우리 함께 동해바다를 한번 달립시다. 연락할께요」 라고 환호해 주었다
서예를 배우는 수강생과 선배들과 원장이 가끔 점심을 같이 먹는다. 밥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처음에는 기대를 하고 갔더니 정말 밥만 먹었다. 평균년령 65세가 능가하니 살아가면서 각자 느낀 바가 적지 않을터 인데 어느 누구 말없이 열심히 밥만 먹었다. 「안선생. 요새 글씨가 좀 좋아진 것 같습디다」 라든가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 세상사 걸림이 없더군요」 등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모두 열심히 밥만 먹었다. 초등학교동창회에 가면 「박근혜대통령은 달성군 유가읍 사저에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 정치얘기만 한다. 노인들은 이제 가슴떨리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어린왕자가 어떻고 소행성 B-612가 어떻고 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건 덜 떨어진 노인이고 해서는 않 될 반칙같은 것이다. 노인들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할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나 할까.
이상한 일이다. 정장을 한 벌 사러 백화점에 갔는데 옷색깔이 검정 아니면 곤색 뿐이다. 멋지게 보이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은 현대백화점에도 롯떼백화점에도 없다. 30년 전 어느 백화점에서 입생로랑 신사복 정장을 사 입었는데 천이 부드럽고 가볍고 착용감이 참 좋았는데 지금도 그런 신사복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노인들은 멋을 부리지 않는다. 부유한 노인도 가난한 노인도 모두 검은색 곤색의 등산복 혹은 추리닝 차림이다. 옷에 있어서만은 철저히 빈부의 격차가 해소된 나라가 되었다. 어린시절에는 멋쟁이 노인들이 있었다. 흰 백구두에 나비텍타이 그리고 중절모의 차림으로. 멋을 부린다는 것은 남을 의식한다는 말이다. 남을 의식하기에 멋도 부리고 말씨도 더 우아하고 예쁘게 하려고 했다. 페티김의 은백색 흰머리는 정말 보기가 좋았다. 생각이 젊으면 몸도 꾸미게 된다. 멋부리기를 포기했다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니 자칫 자신에게만 집착하기 쉽다. 멋부리기는 물론 더 이상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종착역에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공부에 대한 사치는 아무리 지나쳐도 과함이 없다」라고 하듯이 겉이든 속이든 멋을 한껏 부리면 세상이 좀 더 밝아지고 살 맛이 날 것 같은데 오늘날의 노인들은 이제 더 이상 멋 부리지 않는다. 멋에 기준이 있을까. 자신이 좋으면 그만인 것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미리 카톨릭공원묘지에 묘터를 사두고 출근하다시피 자주 자신의 묘터에 갔다. 잔디를 깎고 풀을 뽑고 어느 날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미꽃을 심고 어느 날은 다알리아를 심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묘터 옆에 꽃을 심어면서도 내가 누워서 보면 이 꽃들이 보일까 보이지 않을까 의심하는 듯 했다. 「좀 더 키 큰 나무를 심을 걸 그랬나?」 괜히 꽃집에만 가면 예쁜 꽃이 있나 없나 키가 알맞을까 어떨까 요리조리 살핀다. 묘터를 예쁘게 가꾸고자 힘쓰는 어머니의 그 심정. 생각하니 그것도 일종의 멋이요 희망이었다/
첫댓글 멋집니다.
단정하게 멋지게 차려입는건 중요한 일이지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 생각납니다.
오토바이는 조심히 타셔요.
화이팅!!
감사합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구정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한 해의 시작 설날입니다.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새해에도 강령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 합니다.
문선생님. 베란다 창문밖으로 멀리 고속도로가 보입니다. 차들이 좀 밀린다 싶으면 명절 아니면 주말입니다. 명절연휴 즐겁게 그리고 푹 쉬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