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성령
말씀 / 요한복음 16 : 1-33
요절 / 요한복음 16 :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의 새사람이 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큰 변화를 겪도록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성령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할 때 우리는 육체와 세상 속에서 썩어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리의 성령을 영접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1-15)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차 받을 핍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앞으로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은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장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맞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치명적인 위기나 심각한 고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항상 준비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위해서 가장 준비를 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에 대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기도로서 준비하셨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시지만, 철저한 기도로 고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을 배워서 우리도 준비되어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예수 믿는 자들마저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4-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미리 준비하게 하시려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오히려 근심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말씀하시는 뜻을 잘 따라야 마땅했습니다.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근심이 많은 것입니까? 그들의 관심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장래, 나의 안전, 나의 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인 사람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근심이 따르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인류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랑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시는데 이 부활은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인류최대의 경사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할 줄 알면 기쁨과 소망이 넘칩니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근심의 가시가 끊임없이 심중을 찔러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지금 근심할 필요가 없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셔야 다른 보혜사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더 큰 유익을 주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으시지만 성령께서는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며 모든 사람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더 좋으신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소망과 기대를 품어야 합니다. 근심을 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 보혜사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8-1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께서 이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책망하는 일입니다. 책망의 겉 뜻은 ‘꾸짖다, 나무라다’의 뜻입니다. 꾸짖는 목적, 나무라는 목적은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책망은 원칙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첫째, 죄에 대해서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죄의 결과만 보고 죄라고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때려서 부상을 입히거나 사망하게 했을 경우 이것을 죄라고 정죄합니다. 사람을 왜 미워하는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왜 커져서 때리기까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든지 자신에게 크고 현저한 손해를 입혔을 때 미워하고 그 미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쁜 행동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말 근본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나는 예수님께서 축복하시고 높이실 것을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나 자존심을 극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죄인들에게 합당한 보응을 해주실 것을 믿고 자기 힘으로 복수하려는 마음을 버릴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와 같이 왜 우리가 죄인인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둘째, 의에 대해서입니다. 본문말씀에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 어째서 의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완성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에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건너가게 하셨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를 죄인이라 하지 않으시고 의인이다! 의롭다! 해주십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셋째는 심판에 대해서입니다.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길을 영접하지 않을 때 심판이 있습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마치는 날이 옵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 알게 해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죄를 죄로 알지 못합니다. 죄에는 벌이 있고 죄를 범한 세상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중요하고 심각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러 성령께서 오십니다.
우리가 세상풍조를 따라서 살아온 것과 감정과 자기유익을 따라서 살았음을 죄로 깨닫고 회개하였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실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우리가운데에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기도를 해야 성령이 임한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강하게 임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꼭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임했다’고 하거나, 신유의 은사를 소유하거나 체험해야 성령이 제대로 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역사입니다. 이러한 주된 사역보다도 부수적인 은사들을 더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무지하거나 사람중심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이므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으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입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님을 일컬어 이 말씀에서는 ‘진리의 성령’이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영적으로 무지한 제자들일지라도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진리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자체를 의미 합니다. 성령께서는 자의로 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것, 예수님께로부터 듣는 것을 말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진리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기대하되 특별히 말씀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4: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이 말씀은 공동번역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구하라고 성경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진리의 성령의 역사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담대하라(16-33)
16-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의 죽으심이 임박했다는 말씀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 세상은 마치 자기들이 이긴 것처럼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이 때 제자들은 낙심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상에게 져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세상만민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만왕의 왕 주의 주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때 슬퍼하던 예수님께 속한 자들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과 해산후의 기쁨에 비유합니다. 제가 처음 산부인과에 가보니 다른 산모들은 적게는 몇 시간에서 심지어 이틀간이나 계속 산통을 겪으며 남편을 붙들고 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산통을 겪으며 엉엉 우는 사람이나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나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안타까움도 아기를 보면 달라집니다. 태어날 때 빨갛고 조그마했던 아기가 볼에 살이 오르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뽀얗고 예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산통을 겪을 때 너무 아파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던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동안의 고난과 수고로 인한 아픔들은 하나도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수고에 대한 넉넉하고 충분한 상급이 되고도 남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후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어서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께 마음껏 나갈 수 있고, 마음껏 구할 수 있고...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기뻐하셔서 예수 믿은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가 어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비사”란 비유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제자들은 비유로 하지 않으시고 직접 말씀하시자 이제 알아듣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시는 분으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해놓고는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예수님을 두고 도망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지 못한 자연인으로써의 인간은 결코 영적인 역사, 십자가를 지는 역사에 동참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성령에 충만한 사람인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인간조건이 훌륭해도 고난과 어려움을 같이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연약함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서 스스로를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방금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으로 믿는다고 해놓고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주님을 버리고 도망 쳤음을 깨달을 때 마음에 불의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유다같은 경우 자살을 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이야 말로 가장 연약하고 부족한 자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오도록 하십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며 주 앞에 나올 때 평안이 임합니다. 또 앞으로 담대하게 고난에 대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모든 사단의 권세, 세상권세를 다 이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기셨습니다.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마귀에 대해서 이기셨습니다. 사망에 대해서 이기셨습니다. 다 이기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진리의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가운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의 캠퍼스 양들 가운데에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역사를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