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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향을 찾아서17
-지조와 멋의 시인...조지훈 편
7월,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인 틈을 타 경북 영양으로 달린다. 시인 조지훈8륙 국도를 따라 골짜기 골짜기를 달리는 동안에는 미처 산등성을 넘지 못한 구름들이 갑자기 굵은 소나기로 쏟아져 우당탕탕 차 유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호리병 형상을 닮은 지형에서 유래되었다는 일월면 주실마을, 고풍스런 고옥(한옥)들이 이름처럼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다. 호은고택(시인의 태실이 있는 생가) 앞을 지나 먼저 문학관으로 간다. 이원기(한국문인협회 영양지부장) 시인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문 앞에 나와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행을 맞는다. 이원기 시인은 시인(조지훈)의 가족사와 마을의 내력을 얘기하며 마을 앞에 문필봉(산)이 있어 이곳에서 학자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는 것 같다고 한다. 지훈의 집안은 지훈 뿐만 아니라, 고모(조애영), 형(세림), 여동생(동민) 등이 글을 쓰는, 문장가 집안이다. 최근에는 건축을 전공한 지훈의 큰 아들(광렬)까지 글을 쓰고 있다. 그는 한국일보(뉴욕지사)에 칼럼을 쓰다 2004년에 계간<<문예운동>>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하여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 조지훈문학관에서 이원기, 양희 시인과의 대담 >
지훈(본명:동탁)은 1920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리(한양조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조헌영(제헌국회의원)과 어머니 유노미 사이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그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매우 병약하였다고 한다. 지훈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유학과 민족학을 전승시키려는 할아버지(조인석)의 의도로 보통학교를 그만 두고 대신 ‘월록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전신)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보통학교 3년을 정도 다닌 것이 전부다. 그러나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지훈은 한학을 공부하면서 할아버지 몰래 와세다 대학 강의록을 독학하다가 들키고 만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신학문에 대한 그의 열망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신학문을 하도록 풀어주어 혜화전문에 편입학하게 되고, 거기서 불교를 공부한다.
< 지훈의 태실이 있는 호은고택 >
일찍이(1931년) 11세 때 형 세림과 함께 ‘꽃탑회’ 라는 조직을 만들어 마을 소년들을 중심으로 문집 <꽃탑>을 만들었던 그는 1935년엔 ‘소년회’를 만들었고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정책으로 어린이날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산 속에서 당국 몰래 행사를 치르다 발각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그는 1936년에 상경하여 선배가 운영하는 ‘시원사’에 머물면서 서양문학을 탐닉하며 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시를 쓴다.
김인환(지훈의 제자)교수 말에 의하면 처음(18세 이전)엔 초월적이고 모더니즘적인, 다양한 시를 썼으나 그 이후론 우리의 전통을 참작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장>>지에 모더니즘적 시를 내기도 했는데 정지용은 전통적인 시 <고풍의상> <승무> 등을 추천하며 “조(지훈)군 에스프리는 애초에 명소 고적에서 날조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고유한 푸른 하늘바탕이나 고매한 자기살결에 무시로 거래하는 일말운하와 같이 자연과 인공의 극치일까 합니다. 가다가 명경지수에 세우와 같이 부리며 내려앉은 비애와 아티스트 조지훈은 한 마리 백조처럼 도사립니다. 시에서 깃과 죽지를 고를 줄 아는 것은 천성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니 시단에 하나의 신 고전을 소개하며…. 부라보우!” 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얇은 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란이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닢 닢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이냥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승무> 전문
승무는 1939년 정지용으로부터 추천을 받고 <<문장>>지에 등재되었던 조지훈의 대표 시다. 김인환(고려대학교국문학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선생님(조지훈)으로부터 수업시간에 들은 얘긴데 시인은 당대 최고의 무용수 최승희와 조태권이 추는 승무를 보고서 승무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용수가 추는 춤에서 어찌 여승의 내면에 든 번뇌까지 읽을 수 있었겠는가. 1938년, 지훈은 수원 용주사에서 열린 큰 법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거기 용주사 여승이 추는 승무를 본 것이다. 그는 법회가 끝난 후 늦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달빛 교교한, 뒤뜰 오동나무 아래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한 편의 시(승무)를 완성하기 위해서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 앞에서 두 시간 가까이 서서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승무는 2년여에 걸친 혼신의 노력 끝에 완성된 시라는 것을 “<승무>로써 나의 시(詩)세계의 처녀지를 개척하려고 무척 고심하였으나 마침내 이보다 늦게 구상한 <고풍의상>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다.
< 시 공원 내 시비(승무) >
<승무>는 선적인 정취와 분위기에 차 있으며 지상적 세계와 천상적 세계가 대비되는 시다. 오동잎이 떨어져 내리는 밤 자신의 번뇌를 떨쳐버리려는 몸짓이며 영혼의 세계를 향한 발돋움이 눈물겹다.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오고 //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는 표현에서는 번뇌를 이기고 초월적으로 승화되고자하는 여승의 간절한 염원을 엿볼 수 있다.
<승무>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풍의상>을 조동민(지훈의 여동생)이 엮은 삼 남매 시집<<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선우미디어)에서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雲鞋 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蝴蝶
蝴蝶인양 사푸시 춤을 추라 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곳줄 골라보리니
가는 버들인양 가락에 맞추어 흰손을 흔들어지이다
-<古風衣裳> 전문
<고풍의상>은 우리 옷(한복)에 있어서의 백미인 선의 흐름과 색상 대비의 고풍스런 멋을 노래한 서경적 분위기의 시다. 정한모는 지훈의 데뷔작 <승무> <봉황수> <고풍의상>등 그의 고전적 작품들에 대해 “… 대상을 다만 시각적 영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리듬의 흐름이 이루어주는 우아한 격조가 의상이 지니는 전아한 품격과 잘 어울려 고전적인 한국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재창조하였다.” 라고 하였다.
한편 의상학을 전공(문학에 입문하기 전)한 필자 입장에서 <고풍의상>에 나타난 시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하늘을 향한 한옥기와의 처마 곡선이나 반월이 숨은, 밤의 푸른빛에 대비한 파르란 구슬 빛은 한복의 곡선과 색깔이 중첩되는 표현이다. 또한 자줏빛 회장(호장)과 하얀 동정은 만월이 아닌 조각달(반달)의 이미지(부피와 색채 면에서)와 중첩된다. 반면 사르르 물결을 치는 열두 폭 치마와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여는 한 마리 호접이란 표현에서는 반월에 비친 곡선 처마의 그림자나 혹은 잔잔하게 흔들리며 대청을 지나 한지 문에까지 들이치는 한국정원의 나무 그림자를 연상할 수도 있다.
지훈은 민족말살정책이 극심했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모국어의 역사적 운명을 담당하는 주역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역사적 변천과정의, 크고 작은 사건들 가운데 흐름을 잡아 그의 문학을 통하여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조지훈의 문학세계 특징은 민족적인 것과 선적인 것, 두 가지 경향을 보이는데 전자는 해방 전의 작품 <봉황수> <고풍의상> <승무> 등을 든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다소 정치적 색채를 띤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지훈은 1940년 김위남(난희)과 결혼한다. ‘난희’라는 이름은 결혼 후 지훈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이름을 지어주자 부인이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결혼한 다음 해(1941년) 그는 혜화전문을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 가승으로 지내며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외전(장자, 노자 등)을 강의한다.
장마기간 중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 오전 취재팀이 고려대 문리대교수연구실로 찾아간 지훈의 애제자 김인환 교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절에 기거하는 동안에도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거기 있는 동안 싱가포르를 함락한 일제가 기념 축하연등을 달으라는 강요에 분노하여 시작한 술이라고 한다.
< 김인환 교수(우측)와 대담 >
호탕하면서 한정 없이 섬세하고 자상했던(김인환 교수의 표현), 그러나 민족문화와 민주정치를 살리자는 데서는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던 그는 박정희(전 대통령)의 진해발언에 대해 “이는 학자와 학생과 기자를 버리고 정치를 하려드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비판해 정치교수로 몰리기도 했다. 그로 인해 그는 학교(고려대)에 폐를 끼칠까봐 늘 사직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여차하면 사표를 던져 학교의 피해를 막으려는 각오였다.
한편 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가 있고 근엄하면서 관대함을 지닌 현대의 선비였다. 그리고 그는 멋이 있었다. 나라 잃은 암흑의 시대에도 신념과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가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에 대한 일화가 많은데 그 중 한 가지는 제자들도 기가 질릴 만큼 꼿꼿한 자세였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술이 취해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밤새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아침까지 입고 있던 모시옷이 구김살 간 데가 없이 반듯하였다고 한다. 김인환 교수는 “선생님의 그런 자세가 건강을 더 빨리 해치게 된 원인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술을 마시면 조금은 흐트러지기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라고 말하며 지훈의 술에 대한 에피소드를 몇 가지 더 이야기한다. 한번은 노기남대주교(천주교 한국최초의 주교)와 술을 마시다 노주교가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에 그는 성냥을 한 주먹 손바닥에 놓고 태우며 문학을 하면서 이와 같은 지조 없이 할 수 있는지 아느냐며 대응했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서도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다.”라고 한 선생님(지훈)에 대해 제자(김인환)는 선생님은 삶 자체가 예술이었으며 지사로서의 마지막 현인이라고 본다고 힘주어 말한다.
월정사에서 상경한 그는 조선어학회에서 일하면서 공부하고 논문을 많이 쓰게 된다. <<우리말 큰 사전>>을 만들 때는 밤새워 일을 하고 남산(일본신사)으로 부역(청소)을 나가기도 했으나 그로 인해 그의 민족애에 대한 신념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고 김인환 교수는 말했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심문을 받기도 한다.
지훈은 발표되는 글로만 알고 지냈던 목월과 1942년 처음 교유한다. 지훈이 목월을 만나러 경주(건천)로 내려간다. 그가 건천역에 내린 시각은 어스름 저녁, 분분한 눈송이와 함께 봄비가 뿌릴 때였다고 한다. 지훈을 본 적이 없었던 목월은 지훈을 마중하기 위해 ‘박목월‘이라 이름을 적은 깃대를 들고 나온다. 청록파 지훈과 목월은 그렇게 만나고 지훈은 거기서 보름정도를 머문다. 그날 밤 여사에 머물며 목월은 지훈에게 <밭을 갈고 콩을 심고>라는 시 한 편을 준다. 지훈도 경주에 머무는 동안 목월에게 <완화삼>을 건넨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玩花杉 -木月에게> 전문
목월의 <나그네>는 지훈의 <완화삼>에 대한 화답의 시다. 훗날 지훈은 목월과의 관계를 “붓을 꺾고 떠돌며 살던 5년간 우리는 이렇게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하소연하며 해방을 맞았다.” 라고 자술했다. 한편 목월은 청록파 3인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목월)는 곡선이고 두진은 직선이며 지훈은 원이었다. 지훈이 원으로 감싸 안아 우리의 관계가 잘 유지될 수 있었노라고.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는 명륜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며 한글학회 <국어교본>과 진단학회 <국사교본>을 편찬한다. 이듬해엔 경기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3인의 시집 <<청록집>>을 발간한다. 1948년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명되며, 1968년 타계하기까지 20여년 고려대학에 몸을 담았다.
그의 저서는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시집) <<창에 기대어>> <<돌의 미학>>(수필집)를 비롯한 문학서적 다수와 <<시론집>>과 학술서 <<한국문화사서설>> <<민족문화대계사>> 역사서로 <<한국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1967년 한국시인협 회장을 맡은 그는 대구의 달성공원에 이육사 시비를 세우고 비문을 손수 지었으며, ‘한국신시 60년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1968년 5월 16일 지병인 기관지 확장증으로 국립의료원에 입원했는데 다음 날인 17일 새벽 병실을 지키던 처남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작스레 영면한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시인협회와 고려대 문과대학 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지는 경기도 마석에 있다. 취재팀이 어렵사리 찾아간 묘지마당엔 전에 누가 다녀갔는지 비닐봉지와 타다 남은 모기향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박인식 팀장은 참배를 하기 전 쓰레기들부터 주섬주섬 주워 모으고, 봉분 위에 들쑥날쑥한 잡초들을 제거한다. 시인의 묘 바로 뒤(위)에 어머니 문화 유씨의 묘가 있으며 묘지 주변엔 타래 난과 붓꽃 등이 자생하고 있다.
< 시인의 묘지 - 경기도 마석 >
조지훈문학관은 그의 고향 영양 주실마을에 한옥으로 건립되어 2007년 5월 18일 개관하였다. 문학관에 들어서니 그의 대표 시 <승무>가 흘러나온다. ‘ㄷ’자로 된 전시관에는 그의 유품들과 가족사를 읽을 수 있는 사진(가족), 그림(김난희 여사의 작품)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을 나와 시공원으로 가니 입구부터 그의 시들을 돌에 새겨져 공원까지 세워 놓았다. 공원에는 <승무>와 <낙화> 등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그의 시비는 이곳 주실마을 외에도 남산(최초 -파초우 수록)과 고려대학교 교정에도 세워져 있다.
< 남산 시비 - 파초우 수록 >
그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풍광 좋은 곳에 자신의 서재를 하나 갖는 것을 간절히 바랐으나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성북동 60번지 한옥 처마 끝에 달아낸(증축) 칙칙하고 좁은 서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큰 아들 광렬(문인, 칼럼니스트)씨는 “아버지는 평생 당신이름으로 된 집 한 칸 소유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라고 그의 산문집에서 술회한다.
그의 시의 모태는 그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전통을 중시했던 할아버지를 비롯한, 위로는 조상들부터 이어져온 선비의 지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우리민족, 우리문화에 대한 신념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다. 지훈은 늘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책을 많이 읽고 산문을 써야 한다. 시만 쓴다고 다 시인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취재에 도움을 주신 이원기, 양희 시인님, 김인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취재팀
기획: 박인식
사진: 정동희
글: 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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