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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크루즈 낭만여행
제25화 보헤미안의 블타바 “프라하(2)”
-2016년 7월 3일-
오늘은 프라하 시내 관광하는 날이다
오전 9시 바츨라프 광장에서 자전거 나라 가이드를 만나
그룹으로 걸어서 시내 관광을 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이 호텔을 나와 걸어서 광장으로 나가니 여러개 팀이 있어
우리 팀을 찾아 관광을 시작하였다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의 전성기 1348년 카롤4세가 허허벌판에
신시가지를 건설하여 거대한 시장을 조성하고 오래 동안 “말시장”
으로 불려 오던 것을 1848년부터는 체코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
의 이름을 따서 바츨라프 광장이라고 한다
폭 60M 길이 750M로 펼쳐진 광장은 광장이라기 보다는 대로이다
양편에 지금은 고급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마치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를 연상하게 된다고 한다
광장이 시작하는 제일 높은 지대에 웅장한 국립박물관이 가로 막고 있고
그 아래에는 성 바츨라프의 청동 기마상이 멀리 펼쳐진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청동상에는 “체코 땅의 영도자이시며 우리의 주군 성 바츨라프여!
우리와 우리후손들이 사라지지 않토록 보호해 주소서“라고 세겨진
문장이 인상적이었으며 체코의 아픈 역사를 함축성 있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성 바츨라프는 체코 민족의 수호성인으로 10세기경 체코를 통치한 기독교 군주이며
전설에 의하면 바츨라프는 국난이 닥쳐오면 중부 보헤미아의 블라닉 산에서 깊은 잠에 빠진
기사들을 깨워 그들을 이끌고 적을 물리쳤다고 하며 기마상 주위에 4명의 호위 성인도
1920년경 추가 되었다고 한다
이 광장은 체코의 고달픈 역사를 말없이 대변해 주는 광장으로 1968년
자유를 외친 “프라하의 봄”때 분신 자살한 두 학생(얀 팔라흐 와 얀 자이츠)
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으며 1989년에는 15만 명의 군중집회가 벨벳혁명을
일으켜 민주 주의를 쟁취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린 우체국 옆에 있는 무하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무하의 이름은 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위대한 미술가 인지는
이곳에 와서 느낄 수가 있었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는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이며
프라하는 무하의 도시였고 도시의 공공건물에는 그가 그린 벽화가 있고
프라하 어디를 가도 무하의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자랑스런 체코의
아들이자 체코 인의 자존심이다
여인과 꽃, 자연의 아름다운 곡선을 디자인의 모티브로 한 아르누보 양식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로써 1860년 프라하에서 태여 나 그림 공부를
하든 중 1894년 모든 미술가가 크리스마스 휴가 중일 때 그는 지스몬다
(Gismonda)에 출연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그렸는데 40대의 사라를 20대의 얼굴로 표현하고 포스타의 크기도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만들었기에 주인공 사라의 마음에
들었으며 이 연극이 대성공을 거두자 사라 베르나르는 무하와 6년간의
계약을 맺고 포스터와 의상 및 무대 배경과 보석 등의 디자인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후 무하는 이를 계기로 파리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크게
성공하여 그의 작품 활동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슬라브 역사의 대변혁기를 단계별로 묘사한 것으로, 총 20점, 제작 기간 18여 년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대작을 만들었다
<슬라브 민족의 기원><신과의 축제><대부 안후스의 설교><그룬발트의 전투>
< 투르크에 대항한 시게트 방어>< 린덴나무 아래서 옴라디나의 맹세>
< 슬라브민족의 영광>등이다
제1화 슬라브 민족의 기원 610x810cm
4-6세기 발트해와 흑해 사이의 습지에 살던 농민들이 게르만족의 공격을 받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유목민 무리의 공격을 받아 슬라브마을이 불타고 있으며 평화의
상징인 흰옷을 입고 소녀의 공포스런 눈망울엔 북수에 대한 열망과 평화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희망이 세겨져 있다고 한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예술을 창조하였으며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현대 에니
메이션의 기초가 되고 캐랙터의 기초가 되는 아르누보 양식의 거장이 었다
제2화 신과의 축제 610x810cm
중세 슬라브 민족의 신인 풍요와 전쟁의 신을 의미하는 스베토비트 신들의 축제이야기로
제사장들이 풍성한 수학에 하느님께 감사하고 힘의 상징인 황소를 제물로 바치고
축제를 즐기지만 아래 무릅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고
우울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화가 되면서 상업적인 요소들을 말살시키는 사회구조 때문에
무하의 천재성도 공산화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후반에 미술사에서
그의 가치를 논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7화 프라하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대부 안후스의 설교610x 680cm
보헤미안의 종교개획의 기초가 된 성 안후스의 진실이 승리한다는 1412년의 이야기로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안후스대부를 바라보는 조피아 여왕과 예배당
건축자금을 지원한 Hanus와 흰두건을 쓴 교구 신부 포부다(Pobuda)도 보이며
알폰소 무아의 부인인 마리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애국자로써 1910년 체코로 돌아와 체크의 아픈 역사를 기록에
남기고져 한편에 6-8M나 되는 대작 “슬리브 서정시” 연작 시리즈
20여편을 18년간 제작하여 1928년 프라하 시에 기증하였을 뿐 아니라
체코의 기념우표는 물론 체코 화페까지도 그의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정말 채코 인의 자랑이자 체코의 보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제10화 그룬발트 전투
1410년대 튜턴 기사단을 물리친 슬라브 민족의 승리가 슬라브 족의 단결을 만들었으며
그룬발트 전투에서 전사한 튜턴 기사 그랜드 마스트 울리히 폰 융겐엔(Ulrich) 과 흰색
만도를 입은 죽은 기사단과 함께 사망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 슬라브 민족의 전사자를
보면서 폴란드 왕인 Vladislav Jagiellon 은 슬픔에 잠겨 고통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제14화 콜라스 즈린스키(Nicholas Zrinsky)의 투르크에 대항한 시게트 방어
그리스도 국가들의 단합으로 투르크인들의 침입을 저지하는 1566년대의 이야기로
투르크군의 침공으로 시케트를 방위하는 즈린스키는 물량 공세로 진격하는
투르크 군을 맞이하여 폭죽에 화약을 넣어 투르크 진영으로 투석하여 어두운 연기
기둥은 폭발과 함께 자유를 위한 인간 생명의 위대함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제18화 슬라브 린덴나무 아래서 옴라디나의 맹세
1890년대의 슬라브 민족 의 부흥을 노래하는 이야기로 린든나무 아래에 국
가에 충성하는 10대 들이 무릎을 끓고 맹세하고 있으며 짐보 청년구룹인 옴라디나의
명세를 그리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이 구룹은 반역제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아픈 역사이기에 흐미한 그림으로 그렸으며 하프를 켜는 소녀와
오른쪽 소년은 무차의 딸과 아들이라고 한다
제20화 슬라브민족의 영광
미래는 슬라브 민족의 영광으로 인류의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이야기로
4가지색 중 아래 회색은 신비한 고대의 슬라브민족을 나타내고 검은 색은
고통받는 억압의 시간을 나타내며 붉은색은 찰스4세의 영광스런 시간이며
중앙의 밝은색은 안후스의 개혁과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한다
무하의 천재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상업 포스타 담배회사 JOB이라고 한다
여인의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는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
가다가 오른 손에 든 담배 갑에 멈쳐져서 JOB를 자연스럽게 만나며
여인의 브롯지도 JOB를 변형한 케랙트로 만든 것으로 보아 그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1939년 나치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 났지만
4개월 만에 페렴으로 사망하였으며 체코의 유명 인사나 예술가들만이 묻힐
수 있다는 프라하의 비세흐라드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이며 메데아의 작가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는 현실과
인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적 인간관계를 대담하게 신화 속에
도입해 일종의 심리적 사실주의를 책으로 표현했으며 니체는 그를 ‘비극적
죽음’의 하수인이라고 불렀다고하며 기원전 484년에 테어 나 406년에 사망했다
메데 (Medee; 메데이아Medea)는 메데이아와 아이손의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악녀 메데이아(medea)는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황금 양피를 구하려 온 그리스 신화의 아르고 원정대의 대장 아이손을 만나
그를 사랑하며 그를 도와 황금 모피를 찾았지만 권력욕에 사로잡힌 아이손이
메데아를 버리고 코린토스의 크레온 왕의 딸과 결혼을 하려는 하자 사랑하는
남편의 배신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하는 길로 두 아들을 죽이자
아이손도 사랑하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아르곤 호에서 떨어진 나무
토막에 맞아 죽었다하는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연극으로 메데이아 손의 칼에서
핏자국이 떨어지는 곳에 쓰러져 있는 두 아들의 시체를 그린 포스트가
무하의 작품이다
마침 2016년 12월3일부터 3월 05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알폰소
무하 전이 열리고 있으며 슬라브 서정시(Slav Epic) 대작은 없지만
무하의 천재적인 구상과 장식 패널의 기초를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합니다
우린 걸어서 프라하 시민회관으로 갔다
14세기말 보헤미아 왕들이 사용했든 왕궁으로 그동안 신학교 군사학교등으로
사용하다가 1905년부터 1911년에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형식의
건물로 개조하여 시청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시민 문화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의 스메타나 홀에서 매년 프라하의 봄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특히 스메타나가 서거한 날인 5월12일에는 매년 대통령을 비롯한 귀빈들이
모인 가운데 스테미나의 연작 교향곡 <나의 조국>이 울려 퍼지면서
프리하의 봄 국제 음악회가 시작된다고 한다
때로는 홀의 의자를 이동시키고 만찬장으로 만들어 사용할때도 있다고 한다
또한 알폰소 무하가 직접 제작한 시장 방의 벽화도 일품이라고 하며
이 건물의 복원도 체코 예술가들의 헌금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 시민회관의 실내와 실외의 모든 장식은 알폰스 무하를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체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기에 시민회관은 “체코인의, 체코인에 의한,
체코인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정면 입구 아취형 천정 조각상 안에는 화가 카렐 슈펠라르의 모자이크 그림
“프라하에 바치는 경의”라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시민화관 옆에는 섬세한 고딕 양식의 탑이 있으며 탑의 아래에는 통로로
사용하는 탑문이 있다 원래 이 성벽에는 13개의 탑문으로 둘러 쌓여 있다고
하며 이 탑문은 1475년에 착공하여 1483년에 완공한 동쪽에 있는 탑문인데
이 탑을 화약 탑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방어의 목적인 탑의 기능이 없어지자 이곳을 화약 보관소로
사용하였기에 이 탑을 화약 탑이라고 불려 진다고 한다
이 문을 시작으로 프라하의 왕이 행차했든 왕의 거리(Royal Mile)가 시작되며
구시청 광장-카롤 다리-소지구-네루도바-프라하 성까지 이어지는 거리이다
올드 타운 광장은 11세기부터 시장으로 조성되면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로 들러 쌓여 있는 프라하의 명소이다
이 광장의 제일 명물은 구시청사 탑의 남쪽 면에 있는 천문시계이다
탑아래 돌출부의 지붕 아래에는 찬문시계가 있고 그 아래에는 보헤미아의
12개월 농경달력이 있다
예쁜 천문시계는 오를 로이(Orloj)라고 부르며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안쪽의 원과 시간을 알려주는 바깥쪽의 원이 있고 한 가운데는 지구본이
있고 푸른색은 아침부터 저녁시간까지의 시간을 나타내며 황토색과 검정색은
밤과 새벽을 나타내고 가운데 문장은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정밀한 계산으로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우주의 공간을 알려주는 것으로
단순히 시간만 나타내는 것보다는 헐씬 복잡한 기계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시계가 정각이 되면 해골이 줄을 잡아당기면 반대편 손으로 잡고 있는 모래
시계가 뒤집혀 지며 두개의 문이 열리면서 각각 6명씩 12사도들이 차례로
지나가고 황금 닭이 한 번 울고 나면 끝이 난다
매시 정각에 시계가 울리는 것을 보기 위해 프라하의 모든 관광객들이 집결하기에
이 광장이 꽉 찰 정도로 유명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수탉은 삶을 상징하며 쇼가 끝나면 사라 젔다가 쇼가 시작되면 다시 나타난다
천사의 돌 흉상은 천문시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중의 하나이며 쇼가 시작되면
그리스도의 제자 12사도가 한번 씩 나타나고 쇼는 1분만에 종료된다
그리고 시계 주위의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해골은 인간의 수명을 측정하는 모래
주머니를 들고 있어 이것을 흔들면 쇼가 시작되고 인간의 타락과 사치를 묘사하는
악기(류트)를 가진 터키인이 조각되어 있으며 어리석은 남자는 허영심에 가득 찬
거울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인으로 표현된 탐욕의 인물은 12사도들이 행진하는
동안 막대로 지갑을 흔들며 탐욕을 나타낸다고 하며
아래쪽의 보헤미안 농경 달력 옆에 책을 든 철학자와 대천사 마카엘의 조각상이
붙어 있었으며 망원경을 든 천문학자와 양피지를 든 역사 편찬인의 모습도
조각되어 있었다
이 처럼 천문시계는 복잡한 원리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 진 것으로 첨단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천문시계는 1410년 명장 하누슈가 세계적인 명물을 만들었는데 시장은
다른 도시에도 이런 시계를 만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하누슈의 눈을 멀게하여
다시는 이런 시계를 만들지 못하였는데 하누슈는 이에 적개심을 푼고 기계장치를
고장나게 만들어 시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으나 150년이 지난후 1522년
얀 타보르키의 명장이 다시 수리하여 오늘날까지 유명세를 안고 있다고 한다
시청사는 1338년 존 왕의 지시로 이 광장에 시청사를 짓도록 하여 1364년에
고딕양식의 청사를 완공하였으며 이 시청사를 더욱 빛내기 위하여 당시 유행하든
시계탑을 1402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1410년에 완공하여 모습을 드러내니
정교함과 화려함이 세계적인 명물로 인정받게 되어 프라하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유명하게 되었다
이 같은 시계를 다른 지방에서도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프라하 시장은 이 시계를 만든 장인 잔 누제 하누슈(Jan Ruze Hanus)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눈이 먼 하누슈는 자기가 만든 시계를 한번 만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시계탑에
올라가 시계를 만저 보다가 기계장치를 정지시켜 버리고 그 자리에 그도
쓰러졌다고 한다 그 시계의 기계장치를 다시 작동할 수가 없어 150여년간
정지 상태였다가 1522년에 잔 타보르스키 명장의 손으로 시계를 고쳐 다시 작동
하도록 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구청사 광장은 10세기 이후부터 프라하의 심장부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끊임없이 발전하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종 건축양식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인 동시에 종교 탄압에 대한 항거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광장 중앙에는 종교 지도자 얀 후스(Jan Hus)의 동상이 서 있고 주위로는
시청사 ,틴 성모 교회 성 니콜라우스 교회와 지금은 프라하 국립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골츠킨스키 궁전으로 둘러 쌓여 있다
구청사 광장으로 나오면 광장 바닥에 27개의 십자가와 21VI1621숫자가 새겨진
바닥을 볼 수 있는데 체코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 숫자로써 1621년 6월21일
27명의 체코 귀족 지도자들이 이 광장에서 처형당한 날이라고 한다
카톨릭을 신봉하는 함스브르그 가는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을 받은 체코의 신교
귀족들을 탄압하자 1620년 신교군대가 항거하여 전투를 벌렸으나 카톨릭 군대에
패하고 27명의 귀족들이 이곳 광장에서 참수당한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광장 중앙에는 얀 후안 기념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사제이자 카젤대학의 총장이는 얀 후안(Jan Huan 1369-1415)는 라틴어로만
하든 미사를 일반인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체코어로 집전하고 체코어로
찬송가를 부르며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고 진정한 기독교를 위하여 개혁을
외치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1414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415년 7월 6일 화형되었다고 한다
마틴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의 불씨를 만든 체코의 위대한 성인이며
후스의 지도력을 따라 후스파가 생겨났다고 한다
후스가 죽은 지 500주년이 되는 1915년 7월6일 체코인들의 모금으로 이 기념
동상을 제막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였기에
국가적인 축제는 하지 못하고 시민들이 꽃을 헌화 하면서 조용한 축제를 했다고
하는 슬픈 역사의 발자취이라고 한다 조각가 라디슬라프 샬로운(Ladislav Saloun)이
만든 동상 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지켜라”는 얀 후스의
유언이 새겨져 있었다.
후스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틴(Tyn) 성당이 있다
11세기 외국상인 들을 위하여 Tyn 광장에 세워진 교회로서 1256년 고딕
양식으로 개조 되었으며 14세가부터 지금의 모양을 갖추었으며
15세기에는 후즈파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집결되였다고 한다
80M나 되는 두 개의 첨탑 중 북쪽의 조금 낮은 탑은 “이브”라 하며
조금 높은 남쪽 탑은 “아담”이라고 부르며 중앙에는 보헤미아 왕의 조각상과
후스파를 상징하는 금으로 만들어진 성배가 있었으나 30년 전쟁 후 오스트리아의
가톨릭이 정권을 잡으면서 왕의 조각상을 녹여 성모 마리아의 초상으로
성배는 후광으로 제작했으며 성모 마리아교회로 개명도 했다고 한다
틴성당 맞은편 코너에는 1723-4년 독일건축가 칼리안 딘첸호퍼가 세운
성 미쿨라슈 성당이 있었다
성 니콜라스의 헝거리식 발음이며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써 내부에는 사암으로 된
성 니콜라스의 석상이 있으며
본당에는 하라호프 유리공방에서 제작된 크리스털로 장식된 왕관형태의 1400Kg
되는 샹들리에가 더욱 아름답게 흥미로운 빛과 어울려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었다
1787년에 모차르트가 이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하며 1920년 부터는
후스파 교회로 현재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정면은 흰색이 대부분이며 안토닌 브라운(Antonin Braun)의 조각품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으며 정기적으로 다양한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